무가(巫歌)가 기독교에 끼친 영향? [교회 속 무속신앙]
교회 노인대학에서 성주풀이 민요를 가르치는 것 성경적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회에는 무속신앙의 굿판을 연산케 하는 그릇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복음적인 십자가의 구속의 메시지보다. 무속신앙 굿판에서처럼 해학과 익살에 능한 만담을 방불케 하는 입담이 있어야 능력 있는 부흥사로 불립니다.
1, 들어가는 말
시편기자는 시편146;1-2에서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생”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빼오디”로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이란 뜻입니다. 즉 살아 있는 동안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살게 다는 신념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언젠가 필자는 모 교회 노인대학 강사로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의 시간을 기다리는 중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노인대학에서 성주풀이 민요를 가르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얼핏 무속신앙(巫俗信仰)과 기독교신앙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관계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람은 사중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교회에 가지만 생각은 불교(佛敎)적으로 하고, 살기는 유교(儒敎)적으로 살고, 신앙생활은 무속(巫俗)적으로 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한국의 문화 속에서 하나씩 성경적인 신앙으로 개혁, 정화시키는 것이 미래의 한국교회의 과제로 봅니다.
2, 성주풀이에 담긴 의미
한국에서 종교를 거론할 때 대체로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와 그 외의 신흥종교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이런 오래종교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한국에 종교가 없었느냐는 반문이 나오고, 그 반문이 나온 다음에는 다시 민족종교(民族宗敎)의 맥을 어디서부터 찾아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민간인이 민족의 다수 보편 층이기 때문에 민간인의 생활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민간신앙이 한민족의 보편적 기층종교(基層宗敎)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주제인 민간종교인 무속신앙의 무가(巫歌)가 기독교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기 전에 한국의 전통적인 무속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설명 하고자 합니다.
1)무속(巫俗)신앙
무속신앙(巫俗信仰)은 민간지층에서 전승되는 자연적 신앙, 곧 민간이 신앙하는 자연적 종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속신앙의 의미는 종교를 인위적 종교와 자연적 종교로 구분할 때 후자는 가리키는 종교입니다. 전자는 교주에 의한 교리가 문서화되고 이것을 중심으로 인위적 조직을 갖는 인위적상황의 종교입니다. 후자인 무속신앙(巫俗信仰)은 교조에 의한 교리가 문서화된 경전이나 체계화된 조직 없이 “자연적 상황 그대로의 자연적 종교현상”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속신앙의 전승자인 민간인 그 자체로서 생활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것을 무속신앙(巫俗信仰)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속신앙은 매년 해가 바꿜 때 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신년제를 비롯한 계절제, 가신신앙, 동신신아, 무속신앙, 독경신앙, 점복신앙, 풍수신앙, 동물신앙, 주술신앙 등 민간인의 생활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자연적 종교 현상을 무속신앙의 범위로 설정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주풀이는 가신신앙에 속한 성주신을 축원하는 무가(巫歌;무당이 굿할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가신신앙(家神信仰)이란 가택의 요소마다 신이 있어서 집안을 보살펴 주는 것이라 믿고 이들 신에게 정기적인 의례를 올리는 것 가신신앙입니다.
2)성주(城主)고사
성주고사란 음력 정월 또는 상달인 10월 중 오일(午日)이나 길일을 택하여 집안을 지키는 신인 성주신(城主神)에게 집안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한편, 햇곡으로 만든 술과 시루떡(고사떡), 과일 등으로 제의를 행하면서 한 해 동안 지은 농사의 수확을 감사하는 의례인 가신제입니다. 성주고사는 안주인인 주부에 의해 간단히 끝 네는 경우도 있지만 크게 할 때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성주굿, 성주 밭이 굿(?)이라고 합니다. 이때 불리는 성주풀이는 무가(巫歌)의 주축을 이루는데 “민요 성주풀이”이는 여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주고사는 각 개인의 집에서 행해지는 의례인 만큼 집집마다 의례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어떤 집에서는 제물을 시루떡과 술, 청수만을 놓고 행하는가 하면, 통돼지를 잡아 굿을 하는 집도 있습니다. 성주고사 떡을 “가을 떡” 혹은 “가을시루”라는 곳도 있으며, 고사가 끝난 후 이웃이나 친지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음력 10월을 “떡 달”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고사떡을 붉은 밭을 얹은 시루떡을 사용하는 것만은 공통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붉은 색은 음양사상에서 양기(陽氣)를 상징하고, 음기(陰氣)인 잡귀를 쫓고 예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주고사는 거의 해마다 하지만, 성주굿 혹은 안택굿을 하는 경우는 3년에 한 번 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성주고사는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했으나 정부 주도로 무속신앙을 미신 타파 대상으로 못하게 했고,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지면서 최근에는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3)성주풀이의 의미
한국의 무속신앙의 외형적 특징은 노래(무가)와 춤으로써 신을 섬긴다는데 있습니다. 무속신앙에서 노래와 춤은 신과 신접하는(영통하는) 길입니다. 그 목적은 신의 힘을 빌어서 재액(災厄)을 물리치고 복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주풀이는 무가(巫歌)로서 가정을 지키는 성주신앙의 내력을 풀어서 노래한 성주풀이 무가에서 파생된 대표적인 한국 민요입니다. 이 민요에는 잡무가. 축원무가. 서사무가 등으로 나뉩니다. 우선 잡무가로서의 성주풀이를 살펴보면, “성주본이 어디 메냐 경상도 안동에서 제비원 본이로다”로 시작하여 제비원에서 자란 소나무 제목을 베어다가 집을 짓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축원 무가로서의 성주풀이가 있습니다. 제비원에서 자란 소나무 재목을 베어다가 집을 짓고 그 집안에 온갖 치장을 하고 세간을 들여놓은 후, 농사를 지으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자라서 과거에 급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셋째로 서사무가 성주풀이는 가정 수호신이면서 가옥의 신인 성주신의 유래를 서술한 무속신화를 말합니다. 끝으로 민요의 성주풀이로서 굿거리 장단에 경기 소리의 선율로 부려지는 노래가 있는데,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라는 후렴이 붙는 민요입니다. 이 민요는 한국 무속신앙인 무가(巫歌)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경기 중부 지역 민간에서 널리 불러지고 있습니다. 한국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무속신앙 행위 중 하나인 성주풀이는 흔히 음력 10월 상달에 성주 맞이니, 성주굿이니, 하는 이름으로 행해지거나 또는 집을 지을 때 낙성식에서 맹인무당들에 의하여 불립니다. 쉽게 말해서, 무당이 성주 밭이 할 때 복을 받기 위해 부르는 노래가 성주풀이입니다. 성주 밭이는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한 뒤에 성주를 새로 받아들이는 굿을 말합니다.
4)성주신이란
성주신이란 가택신앙(家神)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최고의 가신신앙으로, 성주대감, 성주조상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조상들은 성주신이 집의 전체를 관장하는 가신을 대표하여, 그들을 거느리는 최고의 신으로서 집안의 가장을 보호하며 가족과 가문 전체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성주의 위치 때문에 성주는 집의 구조 중 가장 중심인 대청마루에 모셔졌습니다. 대청마루는 성주의 혼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집의 실질적인 중심에 위치하며,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쓰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매년 가을에 햇곡식이 나오면 성주단지에서 낡은 곡식을 쏟고 햇곡식을 갈아 넣음으로써 그 집의 평안함을 기원합니다. 성주는 대주(아버지)의 나이에 7이 들어가는 해에 벌이는 성주굿으로 맞이합니다. 경기도 지방의 성주풀이에 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성주신은 부정하거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집에서 나갑니다. 예를 들어 출산 산모가 흘린 피로 부정한 것이며, 사람이 죽는 것도, 화재가 나는 부정한 것으로 봅니다.
성주를 흔히 대청에 모시는 것도 이곳이 깨끗하고 성스러운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사나 명절에는 먼저 성주 신상을 차립니다. 성주신은 특히 가옥을 신축했거나 이사를 했을 때에는 반드시 새로 매므로 가옥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어 가옥(家屋)신입니다. 성주의 신체를 봉안하는 것을 “성주 옷 입힌다. 또는 성주 맨다”고 말합니다. 이때 무당들이 성주굿 하면서 불르는 노래가 성주풀이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피 값으로 세우신 몸입니다. 재가 강의 하고자 방문했던 노인대학도 교회 안에 속한 기관 이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민요를 배우는 시간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때에는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가 민요곡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의 민요에는 무속신앙인 굿의 제의 무가에서 발전한 민요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민요를 불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무속신앙적인 무가(巫歌) 요소가 없는지 깊게 보아야 합니다.
3,굿판과 부흥회
우리가 한국 민요라고 알고 있는 “창부타령”, “성주풀이”, “대감타령”, “배뱅이타령”, “회심곡” “장님타령”등은 전부 무속신앙(巫俗信仰)의 무가(巫歌)입니다. 한국 무속신앙의 굿판의 무가(巫歌)가락에는 해학과 익실과 만담에 한 바탕 웃다가, 어느 순간에 무당의 슬픈 무가가락에 함께 우는 것이 굿판 모습입니다. 볼거리와 소일거리가 적었던 옛날에는 굿(?)판이 벌어 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그 굿판에 함께 울고, 함께 웃었습니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한국 기독교가 부흥 발전하여 온 결과, 오늘의 부흥회는 무속신앙의 굿판을 연상케 하는 그릇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복음적인 십자가의 구속의 메시지보다 무속신앙 굿판 같이 해학과 익살에 능한 만담을 방불케 하는 입담 있어야 능력 있는 부흥사로 불립니다. 굿판의 빠른 장단에 맞춘 무가(巫歌)에서 귀신이 공수되듯이 빠른 박자로 손뼉 치며 찬송을 함께 하무로서 앞뒤로 넘어지는 부흥회의 광경은 굿판에서 신 내림을 연상케 합니다. 한국 무속신앙의 종교적 의례인 굿판은 귀신이 즐거우니 사람도 따라 한께 즐겁고, 귀신의 한(恨)에 의해서 슬플 때는 함께 슬퍼 웁니다. 그러므로 굿(?)판에는 술과 노래와 춤으로 한껏 홍이 오르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같이 어울러 한바탕 흥이 벌어지는 것이 무가의 특징입니다. 한국 문화에서 “신 난다”, “신명 난다”에서 ‘신’은 귀신 신(神)을 의미 합니다. 필자가 어느 교회에서 마지막 밤 부흥회를 끝내고 사택 숙소에 있는데, 예배당에서 빠른 찬송소리와 북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숙소를 나와 예배당에 가 보았습니다. 마치 뒤풀이 굿(?)하듯이 신명이 난 성도들이 천국 춤이라고 하는 이상야릇한 동작으로 몸을 흔들고, 서로 붙잡고 방언을 하며 통변하고, 입신하는 광경이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부흥회를 은혜롭게 마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러한 행위들이 무속신앙(巫俗信仰)의 굿판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25년 전 어느 시골교회 부흥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한국 무속신앙의 특징 중 하나가 무가(巫歌)입니다. 무당은 노래하며 춤추는 가운데 신령과 만나(신접) 교통할 수 있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이런 관념에서 부흥회하면 제일 먼저 연상되는 것이 흥겨워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뭔가 신명나는 일이 없는 부흥회는 은혜가 없는 부흥회라고 생각 합니다. 손뼉을 치고 신나게 찬송을 부르며 흥이 신명으로, 황홀경으로 이어져야 은혜가 충만한 집회 이였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그 이유가 한국 무속신앙의 굿(?)판이 한국인의 심성의 밑바탕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무속신앙에서 무가(노래)의 기능이 굿(?)판을 좌우합니다. 이런 현상이 한국 교회 부흥회에도 영향을 미쳐서, 흥겨움과 때로는 통한의 슬픔이 교차해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필자의 교회에서는 주일 오후 2시 예배에 250여명의 노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 왜에는 한 번도 민요나 이방들이 부르는 노래는 부르지 안이했습니다.
4, 한국교회 안에 무속신앙(巫俗信仰)은 극복되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토착화되고 한국인들의 심성에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무속신앙의 토양에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무속신앙(巫俗信仰)과 한국의 문화 정서 속에 흐르는 무속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한국교회와 무속신앙은 여러 모로 자주 연결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의 무속신앙(巫俗信仰)화는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한국교회가 무속(巫俗)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이유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무속은 조직화된 종교라기보다는 무당 개인을 정점으로 하는 지극히 개인적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한 조직이나 교리 그리고 신앙 체계가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당(巫堂)의 숫자만큼 그들의 교리나 세계관(世界觀)은 다르고 또 다양합니다. 무당은 굿이라는 특별한 종교 행위의 주관자로서 주체적 행위를 하게 됩니다. 굿(?)이란 산 자와 죽은 자와 조화를 위한 종교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굿은 생각보다 길어 굿을 몇 시간 단위로 끊어 행하기도 합니다. 대략 굿은 10거리(거리는 장(場)을 세는 단위를 뜻함)에서, 12거리, 38거리, 정도로 이루어집니다. 몇몇 굿들의 경우는 45거리까지 행하는데, 보통 한 거리에 들어가는 시간이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인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굿(?)이란는 행위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각 거리들은 청혼(請魂) 행위를 통하여 문재의 원인이 되는 신령들을 불러내는 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불러낸 신이 내리게 되면 경쾌한 음악과 춤으로 그를 즐겁게 해줍니다. 굿이 진행되는 과정에 무당들은 내린 신에게 빙의(憑依)되어 문재 의뢰자들에게 공수(空授)를 내리기도 합니다. 즉 무당들은 인간과 신령의 중재자로서 무업을 하는 자입니다. 신접에는 춤과 노래(무가) 필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무가(巫歌)인 성주풀이를 가르치는 것은 교회 안에 귀신의 공수를 내리는 행위로 보아야 합니다. 필자는 한국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혼탁하게 하는 샤머니즘의 부정적인 정서를 고찰해 보았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무속화느냐 아니면 무속이 기독교화하느냐 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 중대한 일입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진리의 말씀 위에 온전히 서서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5, 나오는 말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온지도 이미 1세기가 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전통적 제례와 관습, 무속신앙과의 충동과 갈등 속에서 꽤나 고달프고 어려운 신앙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떠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층심리에 내재하고 있는 종교의 의식 구조를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무속신앙의 무가(巫歌)를 교회 안에 가르친다는 것은 심각한 문재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 무속신앙의 특징 중 하나가 무가입니다. 무가(巫歌)는 노래하며 춤추는 가운데 신령과 만나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무속신앙(巫俗信仰)입니다.
물론 성령이 역사하면 은혜가 충만하여 박수치고, 춤을 출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재 없이도 빠른 박수치며 노래와 춤을 추면 성령이 역사란다는 것은 이것 또한 무속신앙의 무가(巫歌)와 굿판의 춤에서 온 영향이라고 지적 않을 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갈라디아서1장6-8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더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오늘날처럼 많은 종교가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새삼스레 한국교회 안에 무속신앙을 운운할 필요가 있느냐하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무속신앙(巫俗信仰)적인 현상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 미래 한국교회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면서 무속적인 의식을 타파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가 무속신앙(巫俗信仰)적인 종교의식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 무속적인 요소를 타파해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샤머니즘적 요소인 무가(巫歌)가 끼친 문재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목회현장에서 교회의 부흥이라는 명목을 빙자해서 얼마나 이러한 많은 현상들을 보았고 또한 지금도 보고 있는지 또한 모릅니다. 우리의 잘못된 목회 현장에서의 이러한 무속적인 요소들을 성경적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월간 “성경과 소금” 기고 글 서울대현교회 / 서재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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