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성경적 상급론

수호천사1 2014. 10. 4. 22:19

성경적 상급론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상(급)의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부름의 상

바울 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상은 그가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가리킵니다. (빌 3:12) 그렇다면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은 무엇일까요? 11절입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1)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름이 바울 사도가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는 부르심의 상입니다. 그가 말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은 인간의 낮은 몸을 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빌 3:21)

 

면류관

성경에서 사용되는 면류관을 상(급)과 연결시키기에 그에 대하여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이 본문은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죽음까지 눈앞에 두게 된 상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다르게 표현하면 "죽을지언정 네 믿음을 지켜라"가 될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봉사, 헌신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순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순교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순교하지 않고 배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생명의 면류관이 없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배교하면 영생은 있을까요? 영생이 없습니다. 배교하면 영생이 주어지지 않고 순교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면류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영생에 더하여지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비교가 맞지 않습니다. 배교하면 영생이 주어지지 않는데, 순교하면 영생에 더하여 무엇인가가 주어진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영생을 뜻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딤후 4:8상) 그리고 그는 계속 편지를 쓰다가 결론적으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의의 면류관'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의의 면류관이란 하나님께 최종적으로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 2:19-20) 바울 사도는 주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자랑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생명을 다하여 주님의 뜻대로 사역한 결과물인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결과에 대하여 예수님의 '세 종의 비유'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 25:21. 23)

여기에서 최종적인 상태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함'입니다. 바른 사명 감당의 결과물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는 이가 누리는 최종적인 상태는 주인의 영원한 즐거움에 영원토록 참예함입니다.

결론적으로 면류관이란 표현은 영생, 최종적 구원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딤후 4:8),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은 영생의 다양한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지, 영생에 더하여 덧붙여지는 무엇인가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합당한 복음 전파를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고전 9:16) 이 말에는 자신에게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이 주어짐이 하나님의 너무도 크신 은혜이기에 복음 전파는 당연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임의로 복음 전파를 하였다면 상을 얻을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직분이 주어졌다고 말하고는 자신의 상이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복음 전파가 자신에게 화와 상을 결정하는 요소라는 말이 됩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하나님나라의 일, 곧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곧 달란트 비유(세 종들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바와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 비유에서 달란트는 재능이 아니라 각 종들의 재능을 따라 주어진 자본금으로서 그 비유가 하나님나라의 비유임을 생각한다면 달란트는 하나님나라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전파를 통하여 바울 사도가 누릴 상이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앞의 고백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육체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얻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음으로 당할 화란 바깥 어두운 가운데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같게 됨

요한 사도는 장래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심이 되면 교회(지체)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주와 같게 되는 것은 교회(지체)가 가진 소망입니다. 그것은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연합과 교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부와 성령과 누리고 계신 성자의 그 교제가 우리에게도 주어져서 삼위 하나님과 하나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부활을 통하여 누리게 될 예수그리스도와 같게 됨은 모든 믿음의 교회(지체)가 동일하게 누리게 될 은혜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차등 상급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구절들

먼저 열 므나 비유(눅 19:11-27)에서 말씀하시는 다스리는 고을의 차이입니다.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 다섯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는 삭개오의 집에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먼 나라로 가서 왕위를 받아온 왕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그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원수들을 끌어다가 왕 앞에서 죽이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여기에서 자기들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로서 유대인들입니다.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를 통하여 언약 관계를 완전히 파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왕은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고 승천하셔서 주후 70년에 하신 말씀을 집행하십니다. 므나를 받은 종들은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이 사역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은 그들이 살아 있는 시점에서 시행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란 죽고 난 이후에 천국에서 다스리게 되는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역에 순종한 이들이 이 땅에서 가지게 되는 영향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당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영향력과 디모데의 영향력의 차이와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에 대한 순종의 차이는 교회에서의 영향력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잘못된 사역임에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정을 받고 그 영향력이 크게 되는 경우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장(고전 15장)에서 영광의 차이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다르다며 해, 달, 별들의 영광이 다르다고 합니다. 이 설명을 천국에 영원한 구원에 덧붙여지는 어떤 상급이 있고 그 상급은 차등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바울 사도의 글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이 그와 같다며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인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의 차이를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부활한 사람들이 부활한 이후에 어떤 영광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흔히 바울 사도가 이야기한 부끄러운 구원을 차등 상급론과 연관지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484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차등 상급론의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들은 모두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결과일 뿐입니다.

 

상(급)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

그렇다면 '왜 상(급)이라는 표현을 쓰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 등록한 한 새 가족의 집에 등록 심방을 갔습니다. 방 안에 들어가니 그 성도의 자녀(초등학생)가 받은 미술 대회 상과 그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림에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초등학생의 그림 치고는 범상치가 않았습니다. 사유를 들어 보니 미술을 전공한 어머니가 미술 대회에 함께 참여하여 지도를 한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림을 실지로 그린 당사자는 아이이지만 그 그림은 지도한 어머니의 실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을 받은 당사자는 어머니가 아니라 그 아이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삶, 바울 사도가 고백하고 있는 원리를 따르는 삶은 그 자신만의 수고와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삶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실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아이처럼 현실에서 하나님의 실력이 나타나도록 손과 발을 움직인 이는 바로 그 당사자입니다. 하나님의 실력이지만 하나님의 실력이 제대로 나타나도록 삶을 드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상, 상급이라는 이름으로 영광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자랑을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를 높이기를 기뻐하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는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바울 사도와 저를 비교하면 하나님의 실력을 더욱 온전히 드러낸 바울 사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임은 자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는 있겠지만 구원에 덧붙여지는 어떤 상(급)이 있고 그것에 있어서 차등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자리에 이른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의 정도 차이를 가지고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 또는 사명 감당에 있어서 자신보다 못한 수준이 자신과 동일한 결과(영생, 상, 상급)를 얻는다고 배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것일 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러한 생각을 가진 이는 영원한 나라로서의 천국에 발을 디딜 수 없습니다. 천국에는 그러한 생각을 가진 이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상(급)이란 영원한 구원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받는데, 상(급)이 없다는 말은 비성경적인 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상(급)이 없다는 말에 해당하는 삶이 바로 영원한 구원이 없는 것이 되겠습니다.

 

차등 상급론의 문제

천국에 대해서 오해하게 만듭니다. 천국도 이 땅에서와 같이 사람들 간에 높고 낮음의 서열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천국이 그렇다면 이 땅에서 그런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이나 직무의 차이는 서열이 아닙니다. 반면에 현실에서는 서열로 인식되고 당연시되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개혁해야 할 요소입니다. 순종하는 삶의 의의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순종하는 모든 성도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히 5:9) 이 말씀은 믿음 구원론과 표현이 다를 뿐이지 같은 의미입니다. 믿음이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인데, 의지함이 바로 하나님께 스스로를 맡기는 것으로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순종과 영원한 구원이 함께 움직이는데, 차등 상급론은 별개로 만들고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결정되어 불변이고 순종은 영원한 구원에 덧붙여지는 상(급)에 관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신자라고 하더라도 옛 사람으로서 살 수 있다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은 아주 교묘하게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차등 상급론은 아주 유용한 자원이 됩니다. 영원한 구원이 불변이니 상급은 없더라도 괜찮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더라도 의식 깊은 곳에서 불순종하는 스스로에 대해 안위합니다. 당연히 회개의 절실함이 약화됩니다. 말로는 회개가 많지만 실제로는 회개가 드문 교회 현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바입니다.

 

결론

성경이 진술하는 바를 따라 상(급)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하여야 합니다. 천국에서 차등이 있는 상(급)은 잘못된 이해일 뿐입니다. 상(급)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그것은 신자에게는 영원한 구원 자체이지 그것에 덧붙여지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바른 상(급)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따르는 신자의 순종을 기뻐하셔서 상(급)이라고 영광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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