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나님과 교회와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9장 4절, 신명기 7장 6-11절, 29장에서 이스라엘을 피값을 주고 구속하신 주인이라고 선포하신다. ‘너희의 소유권은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선포하신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할 일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떠나서 하나님의 영광된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본분이다. 히브리어에서 ‘본분’이라는 단어는 존재(being)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본분, 즉 존재 의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떠나서 하나님의 영광된 나라를 위해 사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것이 더 구체화된 모습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이다.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 것이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러한 사상도 없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여전히 근심하고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며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 앞에 있는 자신이 누구이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바르게 설정되어 있다면 최소한 인간의 생사화복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그 말씀을 하신 뒤에 20장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이스라엘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특히 십계명 중에서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하여, 5계명부터는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우리가 이 1, 2, 3, 4계명을 안다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1) 결핍이 없어야 하는 신지식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말씀은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네 앞에는 하나님만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은 ‘왜 자기를 위해서 새긴 우상을 두느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는 의미이다. 우상을 두는 그 궁극적인 이유는 자기를 위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본체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객체이다. 우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다. 자기의 생사화복을 위해서 모든 근심 걱정이라든지 장래의 어떤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우상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불합리했을 때 우상을 섬기게 된다.
제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에서 ‘망령되다’는 말은 의식 작용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정상적인 지적 작용이 없어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인품, 인격, 이성을 발휘해서 사람다워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망령들었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정상한 인격을 가지고 명확하게 판별하여 하나님을 정당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인식이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역시 망령된 일이다. 자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다. 때문에 왕이신 하나님의 의중을 따라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이권을 위해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바르고 철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변질되거나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망령된 일이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속에는 모든 삶의 근거가 하나님에게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하나님께 자신을 철저하게 맡기지 않고서는 안식일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안식일 하루 동안 일을 안 한다는 정도가 아니다. 안식년 동안에는 한해 동안 농사도 짓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농사도 짓지 않고 일년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한해 동안에 먹을 양식을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6년째에는 그 해 소산분과 7년째의 안식년 소산분과 8년째의 수확을 얻을 때까지의 양식까지 합하여 3년 치의 양식을 수확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제6년의 수확은 3년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식을 수확하게 된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그만한 수확을 하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음 해에 농사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날마다 체험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날마다 이스라엘의 삶에 대하여 보증해 주셔야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불안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자신의 삶을 경영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없다. 그렇게 자신의 삶의 경영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을 때는 당연히 자기의 삶을 자기가 경영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곧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해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아가 우상을 만들게 되며 그것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고 만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거역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러한 일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가지 비유에서 읽을 수 있다. 포도나무 가지는 자기가 열매를 못 맺을 것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포도를 맺기 위한 환경은 가지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습도나 토양 그리고 포도나무 종자가 진품인가 아닌가, 농부가 실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 가지가 걱정할 이유는 없다.
한편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포도나무 가지가 본체인 나무에서 단절되어 있을 경우이다. 반면에 가지가 본체인 나무에 연결되어 있다면 의당히 열매를 맺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하다면 열매를 맺는 환경 때문에 염려할 이유가 없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들에 핀 백합화나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우리는 일용할 양식 곧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한 염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가 가야 할 적극적인 삶의 방향을 좇아가야 한다. 바로 그 삶이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이다.
2) 하나님 위해 존재하는 교회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의 의를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삶을 구현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길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우리 생활 가운데서 현시하고 확인하면서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항상 하나님과 나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론적 의미부터 확인되어 있어야 하며 날마다 우리의 신지식이 새로워져야 한다. 내 삶을 날마다 주장해 나가는 하나님의 모습이 항상 내 삶 가운데서 확인되어야 한다. 또한 그 확인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삶 속에서 언제나 확실하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이 말씀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각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사명에 대한 확인은 창세기 12장 7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신 말씀 속에서 나타난다. 이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단을 쌓았다.
이때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이다. 창세기 12장 1-3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후 아브라함이 점차 남방으로 내려가 애굽 땅에 들어갈 때는 애굽 왕에게 자기 아내를 빼앗길 뻔하였다. 그런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사라를 구원해 내신다
그리고 창세기 13장에서는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고 하시면서 ‘네 자손을 땅에 티끌같이 많게 할 것이라’고 자세히 계시해 주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더욱 자세하게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삶을 경영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해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더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특히 결정적인 사건이 창세기 14장 19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온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땅을 침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동맹해서 소돔을 공략했다. 그래서 소돔에 있는 롯이 잡혀가고 장차 아브라함이 유업으로 받을 땅을 탈취해 갔다.
아직은 아브라함의 소유가 아니지만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군사를 동원하여 침략군들을 물리친다. 그리하여 그는 이 전투를 통하여 생사화복은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그 땅의 백성까지도 보장해 주시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간 소돔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 14:18)는 소개와 함께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창 14:19)라고 기도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계시된다. 창세기 12장부터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어 왔다. ‘여호와라고 할 때는 항상 ‘언약의 창시자이시요 주관자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언약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실 터인데 창세기 14장에 와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천지의 주재’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계시된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천지의 대주재이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온 후 장차 땅에 티끌같이 네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언약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만 알고 있었지 그분이 대주재이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멜기세덱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아브라함은 창세기 14장 22절에서 소돔 왕을 향하여 축복을 한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시며, 단순히 가나안 땅을 내게 주시는 일만 성취하시는 그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천지를 주장하시는 분이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이제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 아브라함의 일생에 아주 커다란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더욱 확실하게 해석해 주신 사건이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고 하시면서 아주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많아지게 될 것과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너의 방패(ןגמ)이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급(לכשׁ)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실 때 아브라함이 그 의미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도록 드러내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너의 방패요 너의 상급이라’고 하실 때는 아브라함이 이방의 다섯 왕들과 싸워 이기고 난 후였다. 이 전투를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는 분이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은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 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야말로 내 모든 삶의 방패가 되시며, 하나님 자신이 나의 상급이 되시고 내가 살고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권능이다”는 지식을 새롭게 세워가게 되었다.
그러한 일이 창세기 17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ידשׁ לא)이다”고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때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후사를 이을 아들을 얻고 싶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난 뒤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후사를 이을 아들은 후실인 하갈이 아닌 정실인 사라에게서 얻게 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얻게 된다. 이 일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브라함은 알게 되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또 하나의 지식을 얻게 된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는 의미를 가진 ‘여호와 이레’(הארי הוהי)라는 이름이다.
이와 같이 자기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새롭게 알아간다. 이름을 알았다는 것은 그 품성을 알았다는 의미이므로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자꾸 쌓아 갔음을 알 수 있다.
3) 항상 장성하고 있어야 하는 교회
신지식이 이렇게 새로워지면 구원의 확증이 더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증이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사는 동안에 그들을 날마다 새롭게 인도하셨다. “너희는 새롭게 하나님을 알라”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일을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일시적인 행복에 빠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이야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것 때문에 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어야 한다는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걱정하며 마침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날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도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날마다 새로워지지 아니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는 없다. 그것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달라야 한다.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우리가 안주하며 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그건 사망에 처한 것과 같다. 하나님을 향해 전진해 나가지 않으면 그건 생명의 호흡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생사화복을 주관하고자 할 때 마침내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만 것을 같이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삶을 점검했사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신앙하고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날마다 새로워짐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게 하고 구원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그 깊으신 경륜을 자꾸 좇아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중대한 경고를 받았사옵나이다.
이러한 일에 있어서 우리 교회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 말씀을 날마다 확고하게 세울 뿐만 아니라 새롭게 전진해 나가야 할 것이옵니다. 이러한 진전이 없이는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고 우리 성도가 살아야 될 근본도 없는 줄 아옵나이다. 그러하오니 주여, 저희에게 크신 명철을 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더욱 깨닫고 날마다 한 발자국씩 전진해 가는 삶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럴 때 주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을 은혜의 방도로 삼으셔서 마침내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사옵고 주께서 우리에게 그만큼 귀중한 시간을 주셨사오니 이 삶을 통하여서 날마다 우리 하나님을 알고 또 체험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징표 가운데서 우리 구원을 확인 할 수 있는 귀한 삶을 허락해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God`s Will 글쓴이 서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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