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다툼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오늘도 말씀을 사랑하시어 주님의 성전을 찾으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이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스물 세 번 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좀 특이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제목이 어떤 제목입니까?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다툼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예 다툼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다툼과 분쟁이 더욱 많아 집니다.
크게는 나라간의 분쟁이 있고요.
그리고 작게는 나라 안에서 정당끼리의 분쟁들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정적끼리의 싸움은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기업을 흥하게 하려는 전쟁도 무시할 수가 없고요
임금을 많이 받르려는 그리고 적게 주려는 노사갈등도 끝이 없습니다.
이웃들과의 다툼과 분쟁도 있습니다.
아파트 아래층과 윗층의 소음분쟁도 보통이 아니죠.
이러한 분쟁과 다틈이 있어서는 안 될 어디도 있습니까?
예 교회 안에서도 있다는 것입니다.
없어야 될 거룩한 사람들의 분쟁? 다툼. 좀 심하게 말하면 싸움 좀 이상한 말입니까?
왜 사도행전15장 초반에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 내용이 기록되었다가 15장 끝나지도 않은 마지막 부분에는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과 같은 사도들의 다툼의 기록이 있을까?
이런 내용들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이질 않을까요?
성경은 위대한 믿음의 거룩한 사람들의 연약한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죠.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창하셨던 노아의 추한모습.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졸장부와 같은 모습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야곱의 야비한 모습
위대한 사도들의 싸움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이 우리에게 다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모습도 아브라함의 모습도 야곱의 모습도 다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위대한 사도들의 기록되지 말았으면 더 좋은 것 같은 다툼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느끼면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채움 받으시는 복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1,복음의 확산의 방법으로 사용하신다.
첫 번째로 생각하고 싶은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다툼을 복음의 확산의 방법으로 섭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총회에서 돌아온 후 특별한 일 없이 안디옥에서 평범한 목회 일을 해 나갑니다.
성경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여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이곳에 유하여 라는 말씀은 얼마의 기간인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울이 36절의 기록처럼 바나바더러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복음을 듣고 믿음을 받아들인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방문하자 라고 합니다.
그러니 바나바도 오케이 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동행하여 함께할 것인가라는 의견에는 서로의 생각들이 좀 달랐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생질인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 합니다.
그러니 바울은 노 합니다.
노-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나바가 물으니 1차 선교 여행 때 힘이 든다고 자기들을 배반하고 돌아간 것이 바람직한 선교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데리고 갔다가 다시 그렇게 돌아간다면 우리의 계획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말이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이죠.
그래서 많은 경우는 틀린 말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맞는 말 바른 말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떤 말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틀린 말이 아닌 바른 말 그리고 맞는 말로 인하여.
그런데 우리는 틀린 말 때문에 언제나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통해서 아 바른 말로 인하여서도 다툼은 일어날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님들이시여 바른 말이라 할 찌라도 맞는 말이라 할 찌라도 무리하게 주장하지 말길 바랍니다.
구원과 관련된 내용이 외에는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내용 외에는 바른 말이라 할 찌라도 맞는 말이라 할 찌라도 한걸음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시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말에 대하여 이러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맞는 말 바른 말보다 때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이 더 나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들도 성령의 은혜를 담은 말들이 되어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하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바울은 이제 바른 말을 하고 바나바는 바울이 하는 바른 말 때문에 더 이상 대꾸도 못하고 속만 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연약한 자를 돌보는 것이 믿음의 선배 된 자들의 모습이 아닌가라고 바나바가 말 했겠죠.
두 사람 다 한 걸음도 양보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다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얼마나 다투었으면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누가가 기록하였을까요?
어느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닌 서로 심히 다투었다는 내용을 보면 피차 서로 한 걸음의 양보도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이들 무엇 때문에 다투게 되었습니까?
돈버는 일 때문에 다투었습니까?
서로 많이 먹으려고 싸웠습니까?
권력 때문에 다투었습니까?
아닙니다. 영혼 구원하는 일을 하려다가 다투었습니다.
누가 다투었습니까?
오늘날 개신교회의 성도들이 다 부러워 하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툴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다툼들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대부분들의 다툼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다투었다는 것도 느끼게 되고요 바른 말이라 할찌라도 그렇게 유익되지 못한 것들을 주장하다가 일어난 결과들임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시여 바른 말이라 할 찌라도 나의 주장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 귀중한 주님의 마음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투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것을 얻은 결과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함께 가면 한 팀이였지만 다툼으로 갈라지니 전도팀이 몇 팀이 되었습니까?
전도팀이 두 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울산에 거래처 중에 우리 교회 장로님 아드님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습니다.
교회는 혹 한 번씩 나가고 부모님 눈치 때문에 나가는 그런 분입니다.
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교회를 새로 지으려는 모양이라고요.
근데 그게 잘 되지 않는 모양이라 했습니다.
목사님이 바짝 이끌어주면 어떻게 될 텐데 그렇지 못하신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다시 그 병원을 들렸는데 또 그분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두 패가 나뉘어졌다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두 파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나누워 집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이고요 교회도 그런 것 같습니다.
보수파는 신중론을 주장하고요 진보쪽은 너무 신중한 생각은 교회 부흥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진보 쪽으로 기울어지는 분들이 분가하기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200명가까이 되는 교회에서 80여명이 나와서 9억을 주고 교회를 구입하여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그 목사님 전임지의 장로님을 만났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이 아 그 목사님 정말 대단한 분이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했더니 부임하시어 얼마 되지 않아서 교회를 하나 개척을 하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속으로 아 그렇게도 생각할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울산에는 지금 교회가 시내에 세 곳이 있습니다,
남구가 많이 넓어서 한 곳 더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뜻밖의 교회의 분란이 교회가 하나 탄생하는 일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다툼이 없이 교회가 커지면 분가시켜 또 다른 하나의 교회가 개척되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땐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 교회를 반대하는 안티 네티즌들이 세월호의 사고도 하나님의 섭리인가라고 비웃음조로 질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어떤 대답을 하여야 좋을까요?
예 하나님 섭리입니다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살인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섭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성경에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는 다면서요 라고 합니다.
무엇이라고 하면 적절한 답이 될까요?
그 일이 하나님의 뜻하신 섭리는 아닐찌라도 어떤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저는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성도님들이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방문해서 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되죠. 나의사고 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더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란을 통해 교회를 개척하도록 역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분란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싸우고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것 까지도 하나님께서는 헌신한 백성들이 있는 곳이서는 하나님께서는 섭리하시어서 가장 좋은 길로 가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심한 다툼으로 서로가 함께할 수 없었던 이 두 사람을 섭리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두 선교팀을 만들어 선교여행을 각각 떠나게 됨으로 전도를 배로 증가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거룩한 재림성도님들이시여 나의 생활이 꼬일 때에라도 그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지만 그 일들을 통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 주실 주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는 그리고 신뢰하는 은혜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2,분리의 아픔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은혜
두 번째 생각할 내용은 분리의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분리의 아픔의 사랑을 알아가는 은혜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른 길을 갔지만 서로의 마음들이 평안 하였을까요?
이들은 어떤 사이였습니까?
시간은 수년전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이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유대교에서 예수를 믿는 교회로 개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에 활동이 너무나 두드려져서 어떤 사람들도 특히 사도들까지도 그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울의 개혁을 좋지 않게 보았던 유대교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성경은 이렇게 보여줍니다.
행 9:29-30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다소는 어디입니까?
바로 사울의 고향입니다.
고향에 갈 땐 어떻게 가고 싶나요?
좀 성공된 모습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사울에게도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사울은 촉망받던 정치인에서 그리고 종교지도자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빈털터리로 고향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그의 모습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는 그 유명한 안디옥 교회에 사역자가 필요한 것을 알고 바나바를 그곳에 파견합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그곳에서 봉사하다가 누군가의 도움을 느끼고 그 적임자를 사울로 꼽았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모습에서 바울을 보게 된 것이죠.
그리고 사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울과 함께 안디옥에 머물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이 바울이 되는 과정 속에 누가 결정적인 일을 하였습니까?
바나바가 결정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바울을 교회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다리 역활을 한 사람이 바나바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사람이 바나바였다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몰론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의 다툼에서 누가 더 섭섭함을 느꼈을까요?
바울이 바나바에게 그렇게 해서 안 될 사람이 아닙니까?
지가 다소에서 알려지지 않은 땅에서 묻혀 살 것을 누가 가서 데리고 와서 복음 사역의 길을 걷도록 하였는데 배신을 해 그만한 것도 양보하지 못하는 번데기 속이였는가라고 바나바는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 성경에는 전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죠.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이 친족들을 끼고 다녀야 되는가 입니다.
조카라면 좀 따끔하게 혼 줄을 내어서 다시는 그런 행동하지 못하도록 해서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록도 그런 내용 전혀 나오질 않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의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음 바나바는 등장하지 않지만 걔 때문에 다투었던 그 아이 마가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펀지 중에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중 정말 잊지 못하는 친구들의 모습도 떠오르겠죠.
가장 잊지 못할 친구가 있었다면 바나바였다고 생각합니다.
바나바가 정말 잊지 못할 친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아니면 다른 먼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지는 알 수가 없어도 그의 생질 마가요한이 디모데 가까이 있는 것을 알고 그를 데려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일에 유익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 더 젊은 마가에게 한 것을 후회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분리해서 살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원수지고는 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하늘가면 난 안가 그런 말들 그리스도인에게는 합당한 언어가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편하지 않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먼저 손을 내 밀어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먼저가 아닌 상대방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주길 바라고 있죠
우린 다 그런 일에 익숙하지만 먼저 손을 내 미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 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가사가 좋습니까?
내가먼저 손내미는 성도님들 다 되길 소원합니다.
성경에는 화해하지 못해 고통당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 야곱은 형과 좀 더 일찍 화해하지 못함으로 그렇게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를 평생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어쩌면 바울과 바나바도 그렇게 헤어지고 평생 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를 볼 때마다 바나바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후에 마가는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히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골로세서에서 그런 정보를 얻게 됩니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바나바의 끈기와 인내로 마가요한은 휼륭한 그리스도인의 군사청년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성탄 전야, 벨기에 이프르란 곳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 전쟁터는 독일 작가 에리히 레마르크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란 그의 책에 묘사했던 대로 처참했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겨누던 소총을 내려놓고 참호 속에서 나와 캐럴을 함께 부르며 시신들을 거둔 이른바 ‘크리스마스 휴전’이 펼쳐졌습니다.
두 나라 군 지휘부는 적과 ‘내통’하는 자들을 처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휴전은 열흘, 길게는 한 달 동안 이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더욱 극적인 얘기가 더해집니다.
두 나라 병사들이 한데 어울려 축구 경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죽여야 하는 전쟁 마당에서 있을 법한 예기입니까?
영국의 전쟁을 반대하는 자들이 만든 ‘얼마나 사랑스러운 전쟁인가’ 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보면 진흙탕의 무인 지대에 골대를 세우고 병사들이 축구 경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BBC 월드서비스는 25일 랭커스터대학의 역사학자 이언 애덤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99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얘기가 상당히 부풀려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애덤스는 “40㎞에 걸친 전선 가운데 25㎞ 정도에서 이런 간헐적인 휴전이 이어졌다”며 “병사들이 축구를 한 것은 맞지만 축구 경기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제까지 총구를 겨누던 독일 병사들이 참호에서 빠져나와 무장을 벗은 채 영국군 병사들이 배낭에서 꺼낸 축구공으로 경기를 벌인 것은 아니었다고 애덤스는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총성이 멎은 전장에서 무료해진 병사들이 적군이 아닌 전우들과 깡통을 차서 주고받거나 미니 게임을 벌인 정도였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이 함께 예배를 본 뒤 시신을 수습하고 어울려 찍은 사진이 이듬해 1915년 1월 8일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에 실려 온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무엇만이 가능케 하는 이야기 입니까?
십자가만이 가능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쟁터에서도 화합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화합을 하시기 위하여 아버지와 영원히 분리될 수도 있는 그러한 길을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를 6000년덩인 김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로 아버지와 하나 되고 이 땅의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 이였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화합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이끄심이 여러분들의 삶을 주관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저는 다툼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제목으로 두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는,복음의 확산의 방법으로 사용하시드라.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도록 하시드라.
이러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열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나를 위해 아버지와 분리되신 예수님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넉넉한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행 15:35-41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여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전도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앙의 이유1 내가 예수 믿는 이유 (0) | 2014.09.18 |
---|---|
[스크랩] 24. 복음사역의 주역 성령 (0) | 2014.09.18 |
[스크랩] 영주 분처상(分處像)의 비밀 (0) | 2014.09.12 |
[스크랩] 환생설(說)의 시초는? (0) | 2014.09.03 |
[스크랩] 신라시대때 들어온 기독교 증거물들 (0) | 2014.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