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의 일본 선봉부대는 천주교인
1. 기독교 선교단체에서는 일본을 미전도 종족으로 분류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 전체인구 1%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 많은 기독교인(천주교인)이 전쟁에 동원되었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기독교인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선봉부대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의 기독교의 역사는400년도 더 넘는다는 말이다. 일본의 기독교가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느 시대부터 기독교와 관계가 시작되었을까.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일본의 기독교 전래 - 일본 동경대학 출판회에서 발간한 ‘일본사 가운데의 불교와 경교’에서는 9세기 이미 경교가 일본에 전파되어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일본 역사에서 일반적인 기독교 전래를 살펴보면 16세기 가톨릭 소속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씨가 뿌려졌다. 첫 선교사는 사비엘 선교사로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전도하기시작했다. 그가 뿌린 씨앗은 16세기 일본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일본의 지도자 오다 노부나가의 기독교에 대한 관용정책 때문에 1582년 교회가 200여개에 신도가 15만 명, 1590년에는 30만 명, 1600년에는 50-75만 명 사이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총인구가 약 2천5백만이었던 것을 비교할 때 대단한 성과이다.
3.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일본이 당시 포루투갈과 상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일본은 서양 국가들과 문물(文物)교류가활발했고, 임진왜란 때 사용된 서구 총도 이때 함께 들어왔다.
4. 일본의 역사에서 16-17세기(1549-1683년)의 기독교를 가리켜 기리시단’(吉利支丹;Christia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587년 7월까지 기리시단이나 포루투갈인들에게 관대했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신부들의 추방령과 기리시단의 금지를 선포했다. 적극적인 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예수회 신부들은 기독교인 일본 주들의 보호를 받았다. 임진년을 기점으로 대규모 박해와 순교가 발생했다.
5. 임진왜란과 기독교인 부대 - 1592년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에 동원된 일본군은 약 20-25만 명으로 이중에는 기독교인이 상당수 포함되었다고 한다. 조선 정복의 선두로 나선 일본의 제 1군단장 고니찌 유찌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가 이끄는 선봉부대는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고니찌 또한 ‘어거스틴’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기독교 영주였다. 이 부대는 개전 20일 만에 평양성에서 진격했지만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퇴각하여 경남 웅천에 성을 쌓고 진을 쳤다. 이때 고니찌는 일본 예수회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요청함에 따라 그레고리 세스페데스가 파송되었고, 경남 웅천에 1년간 머무르면서 일본군 진중에서 군인들에게 성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조선침략에 앞장섰던 불교도인 제 2군단장 가또(加藤淸正)가 이 사실을 도요도미에게 알림에 따라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으로 귀국조치를 당했다.
6. 조선인 포로들과 일본 교회의 박해 - 일본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많은 조선인 포로를 일본으로 잡아갔다. 약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포로들은 노예로 팔려가거나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고 극히 일부만 조선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포로들이 잡혀있던 지역은 기독교 활동이 활발한 지역으로 많은 조선인 포로들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앙을 지켜나갔다고 한다. 또한 귀환한 사람 중에서도 일본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7. 16세기 중엽 일본에 기독교(천주교)가 들어온 후 약 50여년 만에 천주교 신자는 50-75만 명으로 늘었지만 박해가 끝날 무렵인 19세기에는 2만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를 시작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천주교의 금지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선봉부대를 천주교인으로 구성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적극적인 탄압하기 시작됐고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다. 260년간 계속될 ‘기리시단’의 박해의 시작에 불과했다. 일본 교인들은 도요도미 사후 박해가 끝난 것으로 보았지만, 도꾸가와의 에도 막부에서는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박해를 참지 못한 천주교인 영주와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8. 이때 포로로 잡혀갔던 많은 조선인 신자들도 순교하게 되었고,포로로 잡혀간 왕가의 딸 중에서도 천주교로 개종한 오타 쥴리아도 이 시기에 순교하였다. 한편 조선인 포로 가운데 일본에서 신학교육을 마치고 조선 선교를 꿈꾸고 입국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6세기 일본에 들어온 천주교는 조직적인 박해로 인해 수십만 명의 순교자들이 발생했고, 19세기 개신교와 더불어 천주교가 선교를 재기할 때까지 일본 천주교 신자들은 지하에서 신앙을 지켜왔다. (기독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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