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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판 십자군 전쟁 壬辰倭亂

수호천사1 2014. 8. 18. 00:50

한국판 십자군 전쟁 壬辰倭亂

 

 

 1592년 출동을 나서기 전 고해성사를 마친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는 제1선봉장이 되어 1만 8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들어섰다. 고니시의 軍旗에는 십자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1400여년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판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온 때는 스페인 신부 사비에르에서부터였다.

 1549년 사비에르는 일본으로 건너가 1563년 가고시마 지방의 오무라 스마타다(大村純忠)로부터 시작하여 신자수를 30만명으로 늘렸다.

 

 이에 1569년 오다 노부나가는 기독교의 포교를 공인하게 된다.

 

 노부나가의 기독교 포교 공인은 그의 배불정책에 기인한 불교사원의 견제가 그 첫째요, 포르투칼과의 무역을 통한 대포와 화약구입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1)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교사원을 재건하고 불교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천황을 믿는 일본내에 야훼라는 이질적인 신을 믿는 기독교세력이 큐슈지방을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1587년 7월 반천련(신부) 추방령을 내렸다.2)

 

  추방령이 내려졌으나 포르투칼 신부들은 일본땅에서 못 빠져 나가고 기독교 영주들에게 숨어들어 선교하였다. 히데요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까지는 막지 않고, 묵인해 주었다고 한다.

 

 조일전쟁이 일어나기 6년전인 1586년 히데요시는 예수회 일본 대교구 부사(副師) 코엘류와 가스빠르의 면담에서“제국의 전역을 정복한 후엔 중국을 꼭 정복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했으며, 대만에도 복속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어 이미 전쟁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고니시를 비롯한 수많은 기리시단이 조일전쟁에 출동하였고, 신부들을 종군사제로 조선에 보냈으며, 조일전쟁에 출전했던 기리시단은 전체 일본군의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이 수치는 당시 많은 다이묘들이 기독교신자였다는 말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추방령이 지켜지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히데요시가 예수회 신부들을 조선으로 출병시켜 더 이상 그들로 하여금 일본내에서의 포교를 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3)

 

 고니시 유키나가는 단숨에 한성을 점령시키고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명나라 원군의 출현과 이순신장군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섰다. 이에 고니시는 일본 천주교 관구장인 고메즈(Petrus Gomez)에게 종군신부를 요청하여 세스뻬데스(Gregorio de Cespedes)가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세스뻬데스의 파견은 일본병사에게 위안을 주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간혹 우리나라 천주교전파에 대해 임진왜란시 세스뻬데스에 의해 전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세스뻬데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미 히데요시에 의해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였기 때문에 일본 군영에서도 자유롭게 포교를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고니시의 경쟁자였던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는 히데요시가 천주교 포교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고니시가 종군신부를 데려온 것을 보고 히데요시 사실을 보고하여 세스뻬데스를 내쫓게 하였다. 세스뻬데스가 조선에 머문 기간은 1년도 채 못되었으며, 그것도 비밀스럽게 밤에만 행동했었기 때문에 조선에 천주교 포교를 했을 리 만무하다.

 

 기리시단이 일본군 전체의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나, 그들의 악행은 전혀 다른 일본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전쟁에 출전하기 전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안위를 지켜주고자 빌었던 것이었을 뿐 그들의 잔인함은 여느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리시단의 십자가 깃발아래 귀베기, 코베기 등의 온갖 살상을 저지른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흔히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진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상 수 많은 인간들이 기독교를 이용하고 악행을 저질렀다. 그렇다면 아무리 진리를 지닌 종교라고 하더라도 인간에 의해 악용되는 진리 따위는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1598년 일본 예수회 부관구장 고메즈의 비서였던 프란시스코 파시오가 임진왜란에 관해 언급한 것을 소개하고 마치겠다.

 

 『전쟁이 시작된지 7년이 되는 아주 장기에 걸친 조선전쟁은 종결될 것입니다. 이 전쟁으로 그리스교도들에게 아주 많은 노고와 경비지출을 요하게 되었지만 전쟁이 없었더라면 다이고(히데요시)는 틀림없이 지금까지 일본의 거의 모든 영주들에게 해온 것처럼 그들의 토지를 빼앗고 아주 열악하고 적은 다룬 토지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그리스도교계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됨으로 우리들은 주님에게 한 없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말하자면 다이고가 조선인에 대한 이 전쟁을 실행함에 있어 저지른 부정의에 대해 주님이 그와 같은 특별한 배려로 그리스도교계를 유지시키려고 전력을 다했기 때문입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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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현섭《지금도 일본은 있다》

 

2) 추방령의 내용을 소개하면

  1.일본은 神國이므로 기독교국에서 邪法을 전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2.그들이 일본인을 신자로 하여 神社, 佛閣을 파괴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다.

  3.반천련이 그 지혜의 법으로 자유로이 신자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의 불법을 파괴하는 이상, 일본 당에서 그대로 둘 수 없다. 오늘부터 20일 이내에 준비하여 귀국하지 않으면 안된다.

  4.黑船(포르투칼 선)은 상업적인 일이기 때문에 다르다. 오래오래 여러 물건을 매매해야 한다.

  사와 마사히코《일본 기독교사》P48~49

 

3) 에기 다카토 라는 일본학자는 사제의 파견의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히데요시는 서로 질투심에 불타고 있는 그러나 임직(任職)이 없는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일본 국내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들의 무력을 행사할 곳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천주교도들을 멀리 떨어져 있는 외방(外邦)의 전쟁에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수를 느끼게 함으로써 앞으로는 일본 내 있어서 평화적인 삶이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 것인가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파견의도이다.』

  그리피스《은자의 나라 한국》P149

 

4) 이형래《예수를 배반한 기독교》P43

 

 

- 출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 -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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