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종말

[스크랩] ‘하나님의 인’과 인침 받은 무리

수호천사1 2014. 7. 20. 23:01

666과 적그리스도 [30]


‘하나님의 인’과 인침 받은 무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창시자들 중 하나이며

초대 의장을 역임한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 목사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강해할 때 이런 기도를 했다.


오 주님, 우리의 약함을 도우사

주님을 배반한 큰 배도자를 기다리고 있는

멸망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하소서.

우리는 로마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침해할 것에 대해

성경에 분명하게 지적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연합하지 않고

매우 가증한 그들의 배교에 대해

계속 굳건하게 대항하도록 하여 주소서.”

  

 

  하나님 또한 그 분의 소유되시는 자들에게 인을 치신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린다면 짐승의 표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 17장 10절을 보면 육체의 할례는 아브라함과 약속한 표 즉 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을 치다’라는 동사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보장하다, 확인하다, 시인하다, 맹세하다, 확증하다’로 설명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겔 9:3,4).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한 북쪽으로부터의 심판이 행해질 때에 관한 예언적인 구절이다.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란 불의와 야합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남은 자’를 뜻한다. 하나님은 그 귀한 성도들의 이마에 표시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남아 있는 의로운, 인 맞은 무리를 소유하고 계신다.


  계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계 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계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계 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기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니(3절), 전 세계의 구원 받은 성도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누구인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이다(4절). 여기에서 ‘여자’란 계시록 17장의 ‘음녀’를 뜻한다. 그렇다면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곧 로마 카톨릭, 바벨론, 계시록의 음녀와 음행의 딸 되는 교회들의 악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들이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순결한 자들이다.

 

 

“그녀로부터 네 길을 멀리하고, 그녀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잠 5:8 * KJV)

  

  오늘날 지난 시대의 성도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수호했던 성경의 진리들이 연합이라는 미명 하에 타협되며, 또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오류로 가득한 로마의 교리를 묵인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받고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피를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로마의 교리에 동의한다면

순교자들의 피를 부인한다는 것을 매우 진지하게 경고하고자 합니다!”

- 마틴 로이드 존스 -


  거룩하신 하나님은 순교자들의 피를 갚아 주신다(계 6:9~11).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피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천주교의 비성경적 행습과 교리에 침묵하면서 바티칸과 야합하는 기독교 목사들 및 신자들이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란 그 음녀와 사귀지 아니하는 정절이 있는 자들을 뜻한다. 유니티(Unity 연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퓨리티(Purit 순결)이다. 일치라는 미명 아래 매춘부와 교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연합이 아니라 야합이다. 바울은 사도들의 교훈을 거역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배교자들과의 분리는 분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무엇도 거짓된 것들과의 단절보다 더 강하게 참된 신앙인들의 통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오류를 허락해 주거나 부패해 가는 영혼에게 주어야 할 ‘생명의 떡’을 주지 않는 그러한 자들로부터의 분리는 분열이 아니라, 진리와 양심과 하나님이, 진실되게 발견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로부터 기대하시는 것이다.”


  나는 최근 어느 집회에서 강사로 초청된 모잠비크 국적의 한 흑인 목사가 설교 중에 자신이 바티칸과 특별한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공중에 거대한 천사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도 떠들었다. 나는 즉시 그의 영을 분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로마 교황에게 돌리고 바티칸으로 향하게 하는 영은 단언하건대 성령이 아니다. 그는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물을 내는 자였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였다. 음녀와 사귀는 것을 자랑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나의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4 * KJV)

 

  우리는 다윗처럼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로다”(시 101:3하) 라고 다짐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알게 모르게 종교 통합운동을 주도하며 음녀와 연합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악한 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향해 설교의 왕자(Prince of Preachers)요 은혜의 복음만을 전파했던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 사진) 목사는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성을 건축하는 자는 주님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수 6:26)*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대해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악마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의 은혜로 쓰여진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From “Evening By Evening” by Charles Spurgeon, Uhrichsville, Barbour and Company, 1991)

 


  

  음녀와 애정을 나누며 자신의 영을 더럽히는 위선자들이 경청해야 할 예언적 음성이다. 오늘날 그들 중에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도 있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도 있으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이 꼭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마틴 로이드 존스(사진)는 성경에 유일한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타협이 있을 수 없고 필연적으로 개혁자 루터의 길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래는 「Unity in Truth」라는 그의 강연집에서 발췌한 예언적 메시지이다.

 

  “…합동과 연합을 말하기 전에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첫 번째 질문을 제기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면 마틴 루터가 밟는 길을 따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왜일까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이런 경험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즉 성경에 유일한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로마 교회와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영적인 해답을 발견하는 사람은 로마와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또 다른 복음’에 대해 가르칩니다. 그것은 전혀 다릅니다.


  주교를 교회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타협을 할 수 없습니다. 복음주의자가 감독의 서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진실로 서품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타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주의자와 신성 모독적인 ‘미사’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주의자와 침례에 의한 거듭남을 믿는 사람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루터는 로마서와 시편과 갈라디아서를 연구하고 강의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단절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런 사람들과의 타협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부인하는 교회내의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호모였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함께 멍에를 매는 것 역시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주의자들과 그런 가르침 사이에는 일치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과 어두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항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로마 교회가 변하고 있음을 잊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루터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20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로마 교회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까?”


  그 변화를 시험해 봅시다. 로마 교회는 오늘날 루터 시대의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그 이후 로마 교회는 ‘교황 무오설’의 교리를 확실하게 공표 했습니다. 그것은 1870년에 행해졌습니다. 또 다른 것은? 로마 교회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론’과 ‘성모몽소승천’교리도 확실하게 공표 했습니다. 더구나 성모 마리아 숭배는 굉장히 증가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 교회와 현재의 로마 교회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지금이 훨씬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루터 시대 이후로 면죄부의 악습 문제를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교리의 가치를 절하하여 루터 당시보다 훨씬 더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맙시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태도는 어떤가?’ 그것을 살펴봅시다. 여러분은 로마 교회의 성경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주로 고등 비평적인 태도이며, 로마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복음주의가 아니라 근대사상, 자유주의, 고등비평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친구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그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진상입니다.


  …이제 한 가지를 여러분에게 간구함으로서 마칠까 합니다. 우리 주변의 상황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날마다 발전하고 있으며 로마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위대한 메서디스트 구약 교수인 노만 스네이스(Noman Snaith)가 최근에 그것을 책에서 기술했습니다. ‘그것은 로마를 향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은 로마뿐만 아니라 소위 세계 종교라고 하는 것과의 통합을 꾀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거대한 세계 종교 협의회 - 권력과 권세를 쥐기 위한 무엇인가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각 지방의 지역 교회협의회는 복음주의 원리들을 타협하는 대가로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조직된 교회,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에 스며들어 개혁하고 복음적인 교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입니다. 어떤 단체도 일찍이 진정으로 개혁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평가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중립을 지키는 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자인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제 대답은 우리가 요한계시록 18장 4절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는 위대한 훈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 KJV). 거기서 나오라! 그러나 같은 마음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제하는 데로 들어가십시오. 진리를 수호하고 타협과 주저와 중립과 로마 카톨릭의 계획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기여할 뿐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복음주의 협의회와 같은 연합체로 들어가십시오. 나와서 들어가십시오!”(마틴 로이드 존스,「진리로 하나」, 목회자료사, 1998, 61~63쪽)

 

  여기서는 인용을 못했지만 존스 박사는 이 연설에서 “연합의 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 말을 사용함으로서 ‘저급한 분열’을 옹호하고 종파주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의 일치와 교회의 순결에 있었던 것이다. 음녀와의 일치운동은 “연합의 죄”다.

 

  2007년 교황 베네딕토(Benedict) 16세는 로마 카톨릭 이외의 기독교 교파들을 “올바르지 못한 교회(not proper churches)”로 규정한 문서를 발표해 해당 교파들을 현저히 모독했다(2007년 7월10일). 교황청은 16쪽 분량의 그 문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지구상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웠고 이는 카톨릭 교회로 존재한다”며 “(개신교·영국성공회·정교회 등) 다른 교파들에 과연 ‘교회’의 자격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밝혔다.

 

교황 베네딕토(Benedict) 16세

 

  이 문서는 또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결함이 있다(defective)”고 묘사했고, 개신교 등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기독교 공동체들(주-로마교는 개혁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라고 부른다)도 “교황의 존재를 시인하기를 거부하고, 성찬식(聖餐式)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등 올바른 의미에서의 교회라고 볼 수 없다”고 적시했다.

 

 

                             

  가위 적반하장이다. 가라지가 알곡을 자처했으니 말이다. 사실상 교황은 전 세계의 개혁교회를 향해 작심하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모든 교회를 홀로 지배했던 중세 암흑시대의 위상을 되찾고 싶은 게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적 개혁교회들은 다시 로마를 향해 말씀, 곧 성령의 검을 높이 들어야 할 때다. 미혹의 영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다. 개혁교회는 계시록의 ‘짐승’이 교황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고발해야 한다.

  

 

  천주교회만 구원이 있는 진정한 교회이며, 나머지 교파들은 다들 덜떨어진 ‘모자라는 교회’, 아니 숫제 교회 축에도 끼지 못할, 단순히 ‘교회적 공동체(ecclesiastical community)’라는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교설은 지난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 때의 ‘도미누스 예수스’ 선언에서 한 망언과 다름없는 재탕이었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00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카톨릭이 다른 교파보다 우위에 있으며 기독교 통합의 토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이날 성 베드로 광장에서 카톨릭 신도들에게 “로마 카톨릭이 여타 교파에 견주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기독교 통합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면서 이 같은 사실을 명확히 하지 않고서는 교파 통합을 위한 대화는 말의 성찬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문에서 “세상에는 카톨릭 교회에 기반을 둔 유일한 기독교회만이 존재하며, 한 교파가 다른 교파와 같다는 생각은 기독교회 본래의 메시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편협한 종교가 천주교이다. 카톨릭의 교리는 온갖 교리들 중 가장 관용이 결여되어 있다. 옹졸함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이 추구하는 ‘교회일치’라는 게 ‘로마 카톨릭적 일치’ 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일치를 주장하지만, “우리 기준에 맞춘 다음 우리 안으로 들어오라” 또는 “우리 기준에 맞으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집단과 어떻게 일치와 연합이 가능하단 말인가?

 

‘No Salvation’ Outside Catholic Church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1월 18일(일) 오후 4시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 홀에서는 개신교와 카톨릭 신도 4천 명 이상이 모여 소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라는 행사를 함께 개최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는 세계교회협의회에 속한 개신교 교회들과 로마 교황청 아래의 교구들이 연합해 진행하는 기독교 일치운동이다.

 

  이 얼마나 위선적인 이벤트인가? 바티칸은 교황의 존재를 부정하는 개혁교회는 올바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런 망언을 사과한 적도, 취소할 의사도 전혀 없다. 더욱이 존스 박사의 지적처럼 로마 교회는 종교개혁 당시보다 상태가 더 나빠졌다. 오류들이 더욱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런 독선적인 배교 교회와 무슨 일치 기도회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기만하는 것이다.

 

  음녀와 함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 가증한 기도회에 참가한 자들은 부적절한 연합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회를 조속히 개최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음녀와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는 주님이 들으시기에 소음이요 가증한 기도회다. 누구든지 주님을 바르게 섬기고자 한다면 그러한 거짓된 연합에서 돌이켜 “그들에게서 나와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고” 성별해야만 한다(고후 6:17).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 광경


   로마 카톨릭과 일치운동을 하는 인사들은 하나님보다 더 관대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음녀와 연합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관용’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다. 이들 때문에 교계에 심각한 폐해가 발생한다. 많은 성도들이 천주교를 올바른 교회라고 오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로 개종까지 한다. 그렇다면 바티칸과 일치운동을 하는 인사들의 죄는 더욱 크다. 어린 양들을 실족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이 새겨둘 주님의 말씀이 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6~7). 

 

  가장 편협하면서 무한히 관대한 척 ‘평화’와 ‘일치’를 꾸준히 외치는 로마 카톨릭의 속셈은 무엇일까? ‘화해’와 ‘일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독교를 미혹하여 바티칸의 지배 아래로 끌어내려는 데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속지 말아야 한다. 로마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렘 51:9). 그러므로 우리는 “관대하지 못하다, 편협하다”는 비난과 오해를 조금도 개의치 말고 로마의 간교한 전략에 넘어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해 구영재 선교사는 「자유와 관용이라는 우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미국인들은「유럽」인들에 비해 희생적이고 인내심이 많음을 볼 수 있다. 남의 것을 빼앗고 식민지화한 후에 착취를 일삼아 온「유럽」의 정신에 비하면, 청교도 정신 위에 선 미국은 정신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다. 독자는 ‘자유’와 ‘관용’이란 두 단어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사탄의 세력이 미국의 자유정신을 유린하는데 사용하는 두 단어가 바로 ‘자유와 관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제한 없는’ 방종의 자유 위에 서있는 종교의 자유 아래「사탄」교(敎)까지도 인정한 곳이 미국이다. 미국인들은 ‘너그럽지 못하다’든지 ‘편협하다’는 말을 견디지 못하며, 감상적이다 못해 무엇이 참으로 ‘부정적’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비판과 비난이 구분되지 못하며, 인간의 선과 완전성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인 미국인의 정신은 ‘교조적인(종교적인) 믿음’에 가깝다. 바로 이 두 정신이 미국을 기울게 하고 있다.


  1960년 벌어진 미국 선거는 이 사실을 바로 증언하고 있다. 미국의 첫 천주교 대통령「존 케네디」대통령이 출마를 하였을 때, 제대로 조직도 정비되지 않았고 「프로테스탄트」를 제압할 다른 방도가 없었던 천주교는 종교를 이용하여 이러한 미국인들의 감상을 이용, ‘편협함’이라는 간교한 말을 사용하여 미국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림으로써 승리하였다. 편협하다는 비난이 듣기 싫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에게 표를 던지도록 유인함으로써「케네디」는 대승하였다. ‘편협한’ 사람에 대한 비난은「매스미디어」를 통해 곧 자유롭게 대중화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자유정신 위에 건국된 미국에서 벌인 천주교의 개척은 주효하여, 미국 역사상 첫 로마 카톨릭 대통령을 내었다. 그리하여 미국 건국 200년사에 최대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미국 공립학교의 성경 공부가「케네디」대통령 재임시에 폐지되는 불운이 일어났다. 오늘날 미국의 가정, 사회, 국가의 정치, 경제 등의 모든 문제는 자유와 관용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본적 감상주의의 결과의 한 부분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협한 종교인 로마 카톨릭교가 ‘편협하지 말자’는「프로파간다」를 가지고「프로테스탄트」교회의 담을 무너뜨렸던 것이다.”(구영재,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 안티오크, 2001, p.98)

 

 

Assisi 에큐메니칼 기도 모임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달라이 라마를 비롯 타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있다.

 

  카톨릭은 한 편으로는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어정쩡한 유화 제스처를 해왔다. 1965년 바티칸 공의회 때의 "비 그리스도교 선언"은 충격 자체였다. 그것은 배교 선언이었다. 타종교와의 화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다른 종교에서의 구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네만 참 구원이 있다는 말은 뭐고,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또 뭔가? 결국, 기독교공동체 내 신교를 비롯한 타 교파는 일단 ‘구원 없는 교회’로 따돌려놓고 보겠다는 것이다. 전체 기독교의 대표권, 구원권은 카톨릭이 틀어 쥔 뒤에 타 종교도 상대하겠다는 속셈이다. “구원의 전권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있으니 타 종교인들도 로마 카톨릭으로만 들어오라. 그럼 구원도 받을 것이다.” 이런 식의 설정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얘기는 “모든 길은 로마로”란 말대로 세계종교 통합을 위한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 세상을 다시 바티칸의 지배 아래 두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실로 마틴 로이드 존슨이 지적한 바처럼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뿐이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으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진리의 성령의 바람이 불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고, 온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 개혁운동이 일어나, 우리와 하나 되게 하옵소서!”

 

  얼마 전 한국 카톨릭교를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났다. 카톨릭교에서는 그가 사망하자 선종(善終)했다는 발표와 더불어 곧장 장례에 돌입했다. 그러자 상당수 기독교 단체와 지도자들 역시 그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며 그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선종(善終)이란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선생복종’이란 로마교에서 사람이 임종할 때 성사(聖事)를 받아 대죄(大罪)가 없는 상태에서 죽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용어는, 기독교인들이 적절한 해석 없이 아무렇게나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고 김 추기경은 생전에 자신이 종교다원주의자임을 밝혀왔다. 그는 이른 바 종교에 관한 수용 폭이 매우 넓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정통 기독교의 주장을 부인하던 인물이었다. 구원에 대해 독선적인 기독교를 비판했으며 모든 종교는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TV방송에 출연해서 그런 사상을 표출하기도 했다.

 

  2004년 도올이 진행했던 KBS1 TV의 “도올 논어 특강”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하는 특별대담 형식으로 편성된 적이 있다. 이 프로에서 고 김수환은 말하기를 “불교인이거나 유교인이거나 어떤 종교,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의 삶을 살면, 즉 사람들을 사랑하고 착하게 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 얻는 삶을 산다”고 했다. 그러자 김용옥은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선언이라고 격찬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피력한 것은 모든 종교는 다 가치 있는 것이며, 각각의 종교에 속한 개인은 자신이 믿는 믿음에 따라 참되게 살아가기만 한다면 모두다 그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도올은 이러한 김 추기경의 주장에 맞장구치면서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매우 편협된 것이라며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표명했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상은 제1계명에 반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7계를 범한 죄보다 더욱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의 여러 단체들에서는 공적으로 고 김 추기경의 사망을 종교적으로 애도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등을 비롯해 소위 한국을 대표한다는 거의 모든 기독교 단체들이 그와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소위 유명하다는 기독교 인사들은 앞 다투어 그에 대한 종교적 영웅화를 시도하듯 깊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고 김 추기경에 대한 기독교 목사들의 평가를 보면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성직자의 표본’,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종교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인 분’ ‘커다란 별을 잃은 슬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 보이신 분’ ‘위대한 주님의 사도’ ‘한국기독교의 자랑’ ‘천국에 계시는 분’ ‘주님의 품에 안기신 분’ ‘그를 위한 동상을 만들자’… 이는 기독교 단체와 지도자들이 쏟아낸 말들이다.

 

  성경보다, 하나님보다 더욱 관대한 일부 교계 인사들의 그와 같은 행태에 관해 이광호(조예신학연구원)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일갈(一喝)했다.

 

  “어리석은 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뒤로 한 채 현실에 대처하는 방편으로서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급급하다. 그런 자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들을 나열하며 그것을 통해 더 큰 것을 얻고자 한다. 그것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타협을 통해 자신의 종교세계를 구축하려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표현하고 있다(웨신25.6). 해석 여부를 뒤로 한다고 치더라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로교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경과 가장 잘 조화되는 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지금 천주교와 고 김 추기경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분별한 자세를 가진 기독교계와 지도자를 지칭하는 일부를 향해 쓴 소리를 보낼 따름이다. 고 김 추기경의 삶에 대해 최상의 용어들을 아끼지 않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악한 세태의 눈치를 보며 자기의 목적을 위해 약삭빠른 행동을 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죽음 자체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은 그 뒤에 반드시 따르게 될 심판이다. 물론 율법을 기초로 한 그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엄하게 이루어진다. 그 심판의 날이 두렵지 않은가!”(「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기독교의 굴절된 태도」, 2009년 3월 8일자 교회연합신문 3면)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이런 배교자를 교계 인사들이 칭송을 아끼지 아니하며 집단적으로 조문한 것은 신사참배에 비견되는 죄악이다- 그런 악한 사상을 가진 자를 “위대한 주님의 사도”라고 칭송하는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런 아첨성 발언이 사람의 귀는 즐겁게 해주겠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아니올시다' 이다. 인기에 영합하는 이런 부류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하나님은 우리가 음녀와 짝하지 말라고 훈계하신다. 그래야만 정결한 처녀로서 신랑 예수를 맞이할 수 있는 휴거 성도, 신부 교회가 될 수 있다.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 4:12).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 이는 신부의 정절을 뜻한다. 술람미의 사랑은 솔로몬 한 사람에게만 국한 시킨데 있다. 신부의 사랑은 배타성을 갖는다. 이처럼 신부 교회는 순결해야 한다(고후 11:2). 음녀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자는 신부 교회의 일원이 되는 자격을 상실한다.

 

  우리는 성도 개개인이 아닌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의 지대한 관심은 그가 피로 값 주고 사신 공동체적 존재인 교회가 정결한 신부로 단장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요즈음 유행하는 소위 ‘신부의 영성’ 운동은 자못 취약한 측면이 있다. 왜? 신랑 예수와의 친밀함을 강조하면서 신자 각 사람의 개인적 영성을 고양하는 쪽으로 편향돼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 나는 IHOP을 위시해 ‘신부의 영성’ 운동을 하는 그룹들 가운데 교회들을 신부 교회로 단장하고자 ‘음녀’ 곧 로마 카톨릭 교회와 야합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단체를 전혀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 중에 천주교의 사제나 수녀를 강단에 세우고 음녀와 교제하는 단체를 목격했을 뿐이다. 그것이 ‘신부의 영성’이란 말인가?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창녀와 사귀는 자가 어떻게 신부란 말인가? 그들이 과연 신부의 군대인가? End time에 대한 바른 계시와 신부의 영성이 있는 순결한 교회는 음녀를 혐오하고 멀리 할 것이다.

 

천주교 수녀를 강사로 초청해 집회를 연다는 한 기독교 단체의 광고.

음녀(배도교회)와의 연합에 앞장서는 이런 단체가 있기 때문에

순진한 성도들이 로마 카톨릭을 참된 기독교로 오인하고

천주교로 개종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성령세례를 받은 가장 큰 열매가 "마리아를 향한 신심"이라고 가르치는 자들과

교제하는 것은 성경이 금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고 명했다.

 

  천주교도 성령운동을 한다고? 앞서 지적했듯이 천주교에서 소위 성령쇄신운동에 종사하는 신부나 수녀들의 일치한 교훈은, 그들의 집회에 참가해서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모님, 곧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크게 고양된다"라는 것이다. 천주교 성령쇄신운동 지도자들은 성령을 받은 가장 현저한 열매가 마리아 숭배라고 가르친다. 물론 이런 더러운 사상을 가진 신부나 수녀들은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마리아를 숭배한다. 이런 자들과 사귀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영은 마리아 숭배를 혐오하고 책망하신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명했다: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살후 3:6 하)

 

  공중에서 신랑을 영접할 신부 교회는 음녀와 교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승리를 위해 검을 높이 들고 전쟁 가운데 나아가야 한다. 전쟁 없이 승리 없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이지만 동시에 주님의 강한 군사이다. 우리는 음녀의 정체를 폭로하고 대적하는 군화 신은 신부가 되어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경보를 발하라(Sound an alarm)」라는 제목의 연설 가운데 다음과 같이 도전하였다.

 

음녀는 신부가 아니므로 공중에서 신랑을 영접할 수 없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복음주의적인 개신교 입장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교리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로마 교회의 공식 대변자들이 전략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분리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이런 종류의 상황을 다루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그들이 변장하지 않고 오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데 우리의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위대한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스티븐 닐 감독은 어떤 점에서는(사회적인 면에서) 로마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더 우리에게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우호적으로 접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덧붙여서 사실상 교리적으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보다 지금 우리와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에큐메니칼 운동과 세계교회협의회를 믿는다 하더라도 그는 상황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 대 전쟁에 가담했으며 여러분은 이 전쟁에 직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로마 교회와 마리아 숭배라는 이 의심스런 태도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입니까? 교황은 10월 한달 동안 특별히 마리아에게 기도하라고 교인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것이 사소한 문제입니까? 우리는 이 전투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는 싸우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평신도들이 동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어서서 말하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회의 전반적인 미래를 위해 대전(大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제가 날마다, 달마다, 이 글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을 읽으면서 여기서 찾아낸 것은 명령입니다. 경보를 발하라! 경보를 발하라! - 너무 늦기 전에! “목소리를 힘차게 높이십시오. 두려워 말고 유다의 성읍들에서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말하십시오.”


“주저 말고 나팔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보여 주라.”

일찍이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지금이 그 때입니다.


  그 부름은 무엇입니까? “크게 외치라, 크게 외치라” - 분명하게. “주저 말고 나팔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보여 주라.” 일찍이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지금이 그 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복음주의를 부인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나는 복음주의자이다. 난 지금 복음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나팔이 불분명한 소리를 내면 아무도 전쟁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이 말을 해야 하며 우리는 죽은 자들을 깨울 수 있는 목소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크게 외치고 경보를 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영광의 외침이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안다면 어찌 나팔 소리를 죽이고 작은 평화와 인기에 영합하여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수정하거나 적들과 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분명한 나팔 소리가 들려야할 때가 있었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협력합시다! 함께 헌신합시다. 그리고 나팔의 분명한 소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며 초대교회를 수립하라는 분명한 소리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외쳐야만 합니다. 이 악하고 왜곡된 세대들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 주님의 편에 있나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선언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것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할 준비를 하게 합시다. 주님의 편에 누가 서 있나요? 여러분이 어디에 있는 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하나님으로 모신다면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바알을 섬긴다면 그를 따르십시오.’ 여러분이 신약 성경적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임을 믿는다면 확고하게 그 입장에 서십시오.”(마틴 로이드 존스,「진리로 하나」, 목회자료사, 1998, 118~119쪽, 126~128쪽)


  작은 평화와 인기에 영합하여 음녀를 품에 안고 일치운동을 하는 자들은 신부의 자격을 포기한 자들이다. 순결한 여자만이 주님의 신부이다. 음녀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그들의 이마에 있는 표, 즉 인은 무엇인가?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는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하나님의 성령은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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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리고 성에 대한 저주의 성취: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점령한 다음 여리고 성에 대해 이런 엄중한 저주를 하였다. “이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사람은 여호와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이성의 기초를 쌓는 사람은 맏아들을 잃을 것이며 누구든지 성문을 세우는 자는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저주는 5백 년 후 이스라엘 왕 아합 시대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때 벧엘의 ‘히엘’(Hiel: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뜻)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재건하다가 그 기초 공사를 할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여리고를 저주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수 6:26 ; 왕상 16:34).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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