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가 문제인가? CCM이 문제인가?
요즘 찬송가와 복음성가에 대한 이야기나 혹은 CCM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독교 계통의 잡지나 신문 지면에 자주 회자되는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마다 주장이 달라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10여년 전만해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기득권층에서 일반인들이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는 것에 대한 염려나 찬양의 경건함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정도였지 찬송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찬양의 부흥과 그 흐름이 이젠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이 되어 밀려와 무슨 열병처럼 번지다 못해 예배 형태까지 바꾸어 놓을 정도가 되고 보니 이제는 찬송가의 문제점으로 그 칼자루의 위치가 옮겨가지 않았나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찬송가도 아니고 복음성가도 아니라 아무런 기준도 없이 그저 흐름에 따라가는 무의식과 무지함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객관적인 기준과 지침을 내 놓아야 할 신학자들과 교계 기둥들은 다른 가치관에 정신이 팔려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 되어 밀려오는 찬양의 물결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전혀 예측을 하지 못했다. 거기까지는 지난 잘못이니 그렇다하더라도 이 현상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미래에 대한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예배시간에 찬송을 부르며 박수를 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들이 아니라는 것이 한국교계의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특히 주일 낮 예배(혹은 대예배) 시간에는 찬송가만 불러야 했고, 주일 저녁이나 수요예배, 금요예배 정도에는 준비찬송이라는 이름으로 허용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주장은 고리타분한 노인들의 아집처럼 여겨지고 만다.
이 현상은 그 판단 기준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하다. 하나님이 기준이라면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주로 찬송가만 받으시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취미를 바꾸셔서 복음성가도 받으시기라도 하신다는 말인가. 이러한 현상은 철저히 기준이 사람이고, 시대와 문화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시대가 변한다고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기에 더더욱 예배와 찬양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연구하지 않으면 않된다. 이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서도 않되며, 시대와 문화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서도 않되는 것이다. 분명한 성경적인 기준에 의해서 수용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음악 학자들은 교회음악을 분류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놓았다. 첫째는 수직과 수평이라는 간단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이것만 알아도 우리는 쉽게 예배시간에 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구분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Hymn과 Gospel Hymn, 그리고 Gospel Song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Hymn은 노래의 대상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인 것을 말하며, 이것을 한국말로는 찬양, 찬송, 찬미, 혹은 성가 등으로 번역하여 불렀다. Gospel Hymn은 매개물을 노래하거나 성경내용이 가사인 것들을 말하며, 이것을 복음찬미라고 번역하여 불렀지만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Gospel Song은 대상이 사람인 것들로서 복음성가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분류법이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기준으로 찬송가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보고자 한다.
위의 분류법대로 판단해 보면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예배는 대상이 하나님이므로 노래의 대상이 사람인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시대의 상황이 그러하다 해도 진리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고 있는 경배와 찬양의 물결이나 예배의 형태들이 전부 잘 못되었으니 다시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분하고 있는 찬송과 복음성가의 구분방법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찬송가공회’에서 발간한 500여 곡이 담겨진 까만 표지의 ‘찬송가’책 속에 있는 것들은 예배시간에 불러도 되는 찬송이고, 그 나머지 것들은 복음성가로 구분하고 있다. 또는 최근에 창작된 곡으로서 멜로디로만 되어있는 노래들을 복음성가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혼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의 분류방법을 보면 노래의 가사로 방향을 결정짓게 됨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찬송가 책 속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분류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찬송가’ 책 속에도 위의 세 가지(Hymn, Gospel Hymn, Gospel Song)가 다 포함되어있다고 찬송가 편찬위원은 말한다. 오히려 구분하기 쉽게 Hymn과 Gospel Hymn에는 ‘아-멘’을 붙여 놓았다고 설명까지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찬송가 책 속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예배시간에 불러서는 곤란한 것들이 있다는 논리가 성립이 된다. 반대로 아무리 현대적인 음악 스타일로 작곡되었다 할지라도 노래 가사의 방향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칭찬하는 내용이거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내용이면 예배 시간에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도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음악 스타일은 예배와 관련되어질 경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와 예민한 관계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말이다.
아직도 찬송가를 고집하는 어른들이나 클래식음악만이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으며 특히 이민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찬송가 외에 있는 찬양들을 부르면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 예배까지 포기해 버리는 이른바 찬송가 맹신주의자들을 간혹 본다. 물론 찬송가는 이미 수 십 년 내지는 수 백 년 동안 신학적인 검증을 받아 온 것들이니 염려하지 않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찬송가도 잘 살펴보면 무조건 맹신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찬송가 중에 가사는 복음적이지만 멜로디의 작곡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무신론자이거나 심지어는 적그리스도의 비밀결사대(프리메이슨)의 멤버인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를 개사하여 종교개혁을 위한 행사에 썼다는 기록들도 있다. 그런 것이 지금엔 당연히 거룩한 하나님의 노래들로 둔갑하여 버젓이 예배시간에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찬송을 창작하는 부분에 성령의 역사가 찬송가가 창작되던 시대에 끝이나 오늘날에는 성령의 역사로 지어지지 않고 단순히 음악적인 능력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은 지금도 새노래의 당신을 찬양해 줄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찬송의 탄생을 거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무조건 새노래만 부르기를 고집하여서도 않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인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창작한 노래들은 촌스럽게 여기고 영적 사대주의 경향으로 외국에서 창작되어진 것들을 번역하여 부르는 것을 무슨 영적수준으로 여겨서도 않되는 것이다.
아무튼 찬송가가 문제냐 복음성가가 문제냐 하는 것으로 서로의 논리를 자존심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이제는 분명한 개념과 기준을 가지고 무조건적인 문화수용이나 배척보다는 신학적인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준비찬송' 하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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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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