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찬송가가 문제인가? CCM이 문제인가?

수호천사1 2014. 7. 3. 09:20

찬송가가 문제인가? CCM이 문제인가?

 

 

 

 

  요즘 찬송가와 복음성가에 대한 이야기나 혹은 CCM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독교 계통의 잡지나 신문 지면에 자주 회자되는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마다 주장이 달라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10여년 전만해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기득권층에서 일반인들이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는 것에 대한 염려나 찬양의 경건함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정도였지 찬송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찬양의 부흥과 그 흐름이 이젠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이 되어 밀려와 무슨 열병처럼 번지다 못해 예배 형태까지 바꾸어 놓을 정도가 되고 보니 이제는 찬송가의 문제점으로 그 칼자루의 위치가 옮겨가지 않았나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찬송가도 아니고 복음성가도 아니라 아무런 기준도 없이 그저 흐름에 따라가는 무의식과 무지함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객관적인 기준과 지침을 내 놓아야 할 신학자들과 교계 기둥들은 다른 가치관에 정신이 팔려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 되어 밀려오는 찬양의 물결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전혀 예측을 하지 못했다. 거기까지는 지난 잘못이니 그렇다하더라도 이 현상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미래에 대한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예배시간에 찬송을 부르며 박수를 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들이 아니라는 것이 한국교계의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특히 주일 낮 예배(혹은 대예배) 시간에는 찬송가만 불러야 했고, 주일 저녁이나 수요예배, 금요예배 정도에는 준비찬송이라는 이름으로 허용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주장은 고리타분한 노인들의 아집처럼 여겨지고 만다.

 

  이 현상은 그 판단 기준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하다. 하나님이 기준이라면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주로 찬송가만 받으시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취미를 바꾸셔서 복음성가도 받으시기라도 하신다는 말인가. 이러한 현상은 철저히 기준이 사람이고, 시대와 문화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시대가 변한다고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기에 더더욱 예배와 찬양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연구하지 않으면 않된다. 이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서도 않되며, 시대와 문화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서도 않되는 것이다. 분명한 성경적인 기준에 의해서 수용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음악 학자들은 교회음악을 분류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놓았다. 첫째는 수직과 수평이라는 간단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이것만 알아도 우리는 쉽게 예배시간에 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구분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Hymn과 Gospel Hymn, 그리고 Gospel Song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Hymn은 노래의 대상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인 것을 말하며, 이것을 한국말로는 찬양, 찬송, 찬미, 혹은 성가 등으로 번역하여 불렀다. Gospel Hymn은 매개물을 노래하거나 성경내용이 가사인 것들을 말하며, 이것을 복음찬미라고 번역하여 불렀지만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Gospel Song은 대상이 사람인 것들로서 복음성가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분류법이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기준으로 찬송가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보고자 한다.

 

  위의 분류법대로 판단해 보면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예배는 대상이 하나님이므로 노래의 대상이 사람인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시대의 상황이 그러하다 해도 진리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고 있는 경배와 찬양의 물결이나 예배의 형태들이 전부 잘 못되었으니 다시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분하고 있는 찬송과 복음성가의 구분방법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찬송가공회’에서 발간한 500여 곡이 담겨진 까만 표지의 ‘찬송가’책 속에 있는 것들은 예배시간에 불러도 되는 찬송이고, 그 나머지 것들은 복음성가로 구분하고 있다. 또는 최근에 창작된 곡으로서 멜로디로만 되어있는 노래들을 복음성가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혼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의 분류방법을 보면 노래의 가사로 방향을 결정짓게 됨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찬송가 책 속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분류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찬송가’ 책 속에도 위의 세 가지(Hymn, Gospel Hymn, Gospel Song)가 다 포함되어있다고 찬송가 편찬위원은 말한다. 오히려 구분하기 쉽게 Hymn과 Gospel Hymn에는 ‘아-멘’을 붙여 놓았다고 설명까지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찬송가 책 속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예배시간에 불러서는 곤란한 것들이 있다는 논리가 성립이 된다. 반대로 아무리 현대적인 음악 스타일로 작곡되었다 할지라도 노래 가사의 방향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칭찬하는 내용이거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내용이면 예배 시간에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도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음악 스타일은 예배와 관련되어질 경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와 예민한 관계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말이다.

 

  아직도 찬송가를 고집하는 어른들이나 클래식음악만이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으며 특히 이민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찬송가 외에 있는 찬양들을 부르면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 예배까지 포기해 버리는 이른바 찬송가 맹신주의자들을 간혹 본다. 물론 찬송가는 이미 수 십 년 내지는 수 백 년 동안 신학적인 검증을 받아 온 것들이니 염려하지 않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찬송가도 잘 살펴보면 무조건 맹신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찬송가 중에 가사는 복음적이지만 멜로디의 작곡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무신론자이거나 심지어는 적그리스도의 비밀결사대(프리메이슨)의 멤버인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를 개사하여 종교개혁을 위한 행사에 썼다는 기록들도 있다. 그런 것이 지금엔 당연히 거룩한 하나님의 노래들로 둔갑하여 버젓이 예배시간에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찬송을 창작하는 부분에 성령의 역사가 찬송가가 창작되던 시대에 끝이나 오늘날에는 성령의 역사로 지어지지 않고 단순히 음악적인 능력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은 지금도 새노래의 당신을 찬양해 줄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찬송의 탄생을 거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무조건 새노래만 부르기를 고집하여서도 않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인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창작한 노래들은 촌스럽게 여기고 영적 사대주의 경향으로 외국에서 창작되어진 것들을 번역하여 부르는 것을 무슨 영적수준으로 여겨서도 않되는 것이다.

 

  아무튼 찬송가가 문제냐 복음성가가 문제냐 하는 것으로 서로의 논리를 자존심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이제는 분명한 개념과 기준을 가지고 무조건적인 문화수용이나 배척보다는 신학적인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찬송'은 영적이고 '노래'는 세속적이다?

  교회음악을 혼돈 속에 빠뜨린 원인 중의 하나는 용어의 사용에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준비찬송'이라는 말이 가져다 주는 혼돈에 대해 설명했지만 이러한 용어의 오용으로 인한 개념의 혼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 또 하나가 바로 '노래'와 '찬양', '찬송'이라는 말의 개념혼돈입니다.

  흔히 우리는 찬송이나 찬양은 하나님과 관계된 영적인 것이고 노래는 세속적인 것으로 개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노래는 말 그대로 노래일 뿐이지 그것이 세속적인 개념만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는 찬양이고, 세상의 개념으로 된 노래는 대중가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래라는 말을 쓰면 왠지 속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찬송이나 찬양이라는 말을 써야만 영적인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착각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인 '찬양'과 신앙의 내용을 담고는 있지만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복음성가'를 신앙적이라는 이유로 다 '찬양'이라고 불러서 심각한 개념혼돈을 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을 하던 교회의 어느 권사님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셨고, 평생을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겨오신 분이었는데 제가 예배시간에 '우리 하나님을 노래로 찬양합시다.'라든지 '지금 이 노래로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신경에 거슬리셨는지 고민 끝에 항의해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에 노래라는 말이 최초의 찬양예배인 출애굽기 15장 1절(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을 위시하여, 시21편 13절(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시96편 1절(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 할 찌어다), 에베소서 5장 19절(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계시록 15장 3절(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 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등 성경전체 176절에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이라는 말은 81절에서, '찬송'이라는 말은 208절에서 '노래'라는 말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찬송'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거룩한 노래'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교회음악학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 내용의 노래들을 찬송, 찬미, 찬양, 혹은 성가 등으로 명명하고 있으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전도의 내용이나 위로의 내용을 가사로 담고 있는 노래들을 '복음성가'라고 구분을 합니다. 이 구분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가사의 노래를 부를 때 '찬양'이라는 말을 제한하여 쓰고, 사람이 대상인 노래를 '복음성가'(음악형태가 구분점이 아니다.)라고 정확하게 개념을 가지고 구분하여 명명할 때 신성모독도 범하지 않을 것이며, 방향성이 확실한 예배 행위를 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 방법이 보편화되지 않아서 우리 모두가 혼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선 목회자들이 이 개념을 분명히 가지고 음악사역자들과 협력하여 성도들에게 개념을 가르쳐야만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목사이지만 신학시절에 이러한 내용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사역을 주된 사역으로 하면서도 이 개념을 깨달은 것은 많은 세월이 흐른 후였습니다. 그것도 찬양에 대한 세미나와 강의를 부탁 받고서 연구해서 깨달은 것이지 어디서 배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음악사역을 하면서 이러한 개념을 갖고있지 못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며 심지어는 교회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잘났다는 교만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고, 어느 누구를 헐뜯기 위함도 아닙니다. 전공을 했는데도 모른다고 비난을 해서도 안되고, 사역을 하면서도 몰랐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이 개념을 바로 세우고 우리 모두 혼돈에서 벗어나 온전한 사역을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예배인도자는 '우리 모두 찬양합시다.'라고 말해놓고 가사의 대상이 사람인 노래로 하나님을 실망 시켜드려서도 안되고, 사람들이 모여 교제하는 시간에 교회모임이라는 이유로 가사의 방향이 하나님인 노래를 불러 사람들로 신성모독을 하게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음악사역을 할 때 이 혼란에서 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꼭 '노래'라는 말을 씁니다. 제가 부른 '주만 바라볼찌라'라는 노래는 가사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일깨우고, 주님만 바라보며 살라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지 이 노래를 할 때 사람들은(그것도 찬양예배에 훈련이 잘 된 사람일수록) 눈을 감고 손을 높이 들고 부릅니다. 눈을 감고 손을 든다는 것은 이 노래로 하나님을 높인다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이 노래는 자신을 향하거나 아니면 옆에 있는 사람을 향해서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노래를 할 때마다 '이 노래로 여러분을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두 손을 가슴에 얹으시고 이 가사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방향을 분명히 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내용의 노래를 할 때는 '이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심령에서 나오는 고백으로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라고 방향을 이끌어 줍니다. 그래야만 노래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래'라는 말은 세속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노래하는 사람도, 인도하는 사람도 방향을 확실하게 잡아 노래의 영적인 힘을 정확하게 목표에 도달하게 하여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준비찬송' 하지 맙시다!
'준비찬송' 하지 맙시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신앙의 행위들 중에는 무의식으로 행해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도의 경우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모두가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기도의 방법이나 형태를 살펴보면 하나님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거나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발견하게됩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행위를 해놓고도 자기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거나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부류의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한 무의식은 찬양의 행위에도 많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준비찬송'입니다. 이제까지의 글에서 계속 되새김질했던 것이 바로 찬양의 방향성과 하나님을 향했을 때에는 찬양 자체가 예배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찬양하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여기며 불러왔지만 실재의 내용은 사람이었던 것이 많았음을 지적했습니다. 사람을 향한 것이 필요치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향해야 할 대상에 따라 노래를 ?선택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위한 시간에는 오히려 가사가 하나님을 높이며 칭찬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향하여 격려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를 해야 합니다. 그런 시간에 교회라는 이유로 모임의 분위기를 위해서 생각 없이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부른다면 심각하게 말해서 신성모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해놓고는 사람을 향한 노래를 부르다 보면 우리를 찬송 부르도록 지으셨고, 우리가 찬양할 때마다 흥분하실 정도로 좋아하시며 기대하시는 하나님께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준비찬송'은 대부분 예배나 집회 전에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 행해집니다. 이때에도 사람을 향해 교제를 제안하며 부를 수도 있지만 이 시간은 세상에서 혼란했던 마음들을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게 해서 차분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어떤 모임이든지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며 특히 종교적인 모임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행위가 아무런 생각 없이 행해지는 무의식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어수선한 분위기를 잡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거나 아니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 그리 잘못될게 있냐고 반문하실 지 모르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어떠한 이유에서건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불렀을 경우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들으셔야 하며, 실제로 이스라엘의 찬송 가운데 임재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런데 준비찬송에 임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그 노래를 들으시기 위해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 않는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찬양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내용일 경우 예배가 된다는 것을 수도 없이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준비 찬송하는 동안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부르는 노래의 가사 대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것보다는 다른 준비에 바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준비 찬송은 예배시간에 늦거나 미쳐 예배 준비를 마치지 못한 사람들에게 너무너무 고마운 시간일 뿐 하나님께는 오히려 섭섭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찬양은 그 자체가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드리는 그 순간부터 예배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기대하고 찬송을 받으시려 하는데 부르는 사람들은 다 딴 맘으로 자신들의 일에만 신경 쓰거나 찬양하는 내용과 마음이 완전히 따로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참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다혈질인 분이라면 아마도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수없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의 예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찬양예배라는 것이 특별한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하던 이른바 '준비찬양'이라는 명칭을 없애고 그것을 예배의 시작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따로 사역자를 모시거나 사역자 수준으로 훈련된 찬양팀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시작을 찬송으로 하되 준비찬송이라는 말을 하지말고 이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을 높이며 예배를 하자고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예배를 진행해 나가면 훌륭한 찬양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찬양을 하면서 서서히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지게 되는 것도 사실 맞습니다. 하지만 '준비찬송 합시다'는 말을 듣고는 이제까지의 무의식적인 신앙의 행위들이 재현될 뿐입니다. 그 시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미쳐 준비하지 못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여전히 분주할 뿐입니다. 차라리 '우리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마음을 모읍시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예배자들로 하여금 준비하게 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 준비찬송 하지 맙시다.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십시다. 

 

 

 

                    주일예배를 '경배와 찬양'으로 해도 됩니까?

 

    

이제까지 몇 번의 글로 찬양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잡히셨으리라 봅니다. 지난번 글에서 찬양의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찬양은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거나 존경하는 말 또는 그 행위"라고 정의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연결시키는 음악이나 노래의 개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광의적인 것임을 누구나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연결해서 경배 혹은 예배의 정의는 "인간이 절대자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일체의 행위"라고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두 가지 정의를 비교해 보면 단어만 조금 다를 뿐 의미는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찬양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노래나 음악의 개념으로 국한시켜 놓았을 뿐이지 원래는 예배의 개념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이라는 행위는 그저 노래나 부르고 말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예들은 성경을 통해서도 그렇고 신앙의 선진들의 간증을 통해서도 많이 접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불렀던 찬송은 위대한 예배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춤추며, 소고치며, 소리지르며 드렸던 찬양은 성경 최초의 찬양 예배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 또한 노래 한 곡을 통하여 훌륭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수도 없이 많으며, 같은 사역을 하는 동역자들이나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적을 체험한 성도들의 간증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찬양을 통한 예배 즉 '경배와 찬양'은 음악이라는 도구를 주로 사용하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그저 신앙적인 집회일 뿐이라는 보수적인 분위기가 아직도 한국교회에는 만연합니다. 한국 땅에 찬양예배를 심은 단체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전도단'은 지역교회가 아닌 선교단체로 화요일에 젊은이들 중심으로 모였으며, 온누리 교회에서 시작된 '두란노 경배와 찬양(지금은 올 네이션스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도 처음에 '목요 찬양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에 의해 시작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에 극동방송의 전국복음성가 경연대회 출신 복음성가 가수들과 기존의 찬양 간증자들로 일어나기 시작한 찬양의 붐으로 음악사역에 관심이 증대되면서 서서히 경배와 찬양모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부흥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른들에게는 생소한 집회정도로 인식이 되었지 예배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교회의 성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다가 빈야드의 예배를 경험한 목회자들로부터 교회의 예배가 바뀌기 시작하였고, 오늘날에는 철학도 없이, 의미도 모른 채 너도나도 받아들이더니 아예 '열린 예배'의 유행과 열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경배와 찬양이 예배로 인식되어진 것은 바람직한 현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경배와 찬양은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예배의 한가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예배를 통해서는 도전을 받지 못하던 세대 다시 말해서 문화의 요구를 다양하게 충족시키며 자라온 젊은 세대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구원의 소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먼저 시작된 유럽도 그랬고, 이곳 미국 땅도 문화가 발달하면서 다양해진 문화적 욕구를 가진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그것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자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경배와 찬양이라는 예배 방법으로 그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도 그나마 경배와 찬양을 하는 교회는 젊은이들이 남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여건의 시골이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기존의 예배 스타일을 고집하는 교회들은 젊은이들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연령의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장년들은 찬양을 통한 예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불러왔던 찬송가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리듬도 따라하기 힘들며, 조용하게 예배를 드려오던 분들에게는 전자 악기들과 높아진 볼륨을 견디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하나님을 섬기지만 민족들마다 정서가 달라 예배의 방법 또한 다르듯이 세대와 세대간의 문화적인 격차에서 오는 요구와 정서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과도기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서로의 다른 방법을 인정하고 각자가 예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교회는 전통 스타일의 예배와 컨템포러리 스타일의 예배를 함께 세워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규모가 어느 정도 가능하고 자체 건물을 가진 교회의 경우이고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어른들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면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경배와 찬양 형태로 하면 어른들의 불만에 부딪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예배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배와 찬양이 예배의 방법임을 알고 교인들은 설득해야 할 것이고, 신구세대의 요구의 조화를 잘 이루어 곡을 선정하고 예배를 지혜롭게 잘 세운다면 오히려 세대간의 격차를 줄여 가장 바람직한 예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예배시간에 경배와 찬양을 그저 '준비찬양' 정도로 취급해 버리면 그 의미도 잘못되었지만 젊은이들을 만족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어른들에게도 그 시간이 지나서 예배실에 들어오게 하는 결과만 낳습니다. 찬양의 시작이 예배의 시작으로 인식시켜서 한 두 곡은 현재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불려지는 찬송을 선곡하여 어른들에게는 배우는 기회를 만들게 하면 자연스럽게 수용이 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늘 불러오던 찬송가만 고집하는데 성경은 새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있으니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된다고 자꾸 격려를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예배 시간에 함께 찬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야 15분에서 20분 정도이기 때문에 새로운 노래 2곡과 찬송가 2곡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의 의전적인 흐름과 일치하는 선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주장한 것들이 많지만 보편적인 흐름을 간단히 말씀 드리면 경배(입례)-회개와 간구-말씀선포-감사와 헌신 순서입니다. 교회와 목회자의 예배 철학에 따라 이 내용과 일치하는 노래를 잘 선곡하셔서 목사님이 인도를 하시면서 돕는 사람들을 세운다면 예배에 대한 이해가 없는 워십리더를 세우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도 됩니까?

예배 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도 됩니까?

 

찬양과 관련된 세미나를 시작한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학위가 있어서가 아니고, 80년대 말 강하게 한국 땅에서 일어난 찬양의 붐과 1987년에 시작된 두란노 경배와 찬양(그때는 '목요찬양모임'이라는 명칭이었다.)이 활성화되면서 찬양예배라는 말이 생겨졌습니다. 생소한 용어에 대한 의문이 강해지면서 당시 전문가가 없던 시절이라 목사이면서 찬양사역을 하고 있던 제게 이러한 세미나의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세미나를 준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에 관한 서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음악에 관련된 책은 다 클래식을 전공한 분들에 의해 지어졌고, 그 속에 복음성가를 가볍게 다루어 놓은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겪게된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불과 4, 5년 전 만해도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도 됩니까?"라고 물으면 거의가 "않된다!"고 단호히 대답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가 "당연히 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4, 5년 전의 사람들이 맞습니까? 아니면 오늘의 논리가 맞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이 현상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찬양과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열납 유무가 기준이 되어야 함을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4, 5년 전 만해도 하나님께서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받지 않으시다가 최근 들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복음성가를 받기 시작하신 겁니까?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면 않되던 시절에도 주일 대예배(?) 때에는 찬송가만 부르고,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일, 금요일에는 복음성가도 허용을 하는 예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일 낮 예배는 찬송가만 받으시고, 나머지 예배 때는 복음성가도 받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가요? 이 모든 현상의 기준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기준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식견이 없는 상황에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했다가는 교회성장도, 목회성공도 보장받을 수 없게되자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치봐가며 너도나도 예배를 바꾸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니 오히려 바꾸지 않는 교회를 바라보며 시대의 흐름도 모르는 무식한 교회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음악 학자들은 교회음악을 분류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놓았습니다. 첫째는 수직과 수평이라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구분하는 방법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우리는 쉽게 예배시간에 쓸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구분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분류법만으로도 지난주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Hymn과 Gospel Hymn, 그리고 Gospel Song로 분류하는 방법입니다. Hymn은 노래의 대상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인 것을 말하며, 이것을 한국말로는 찬양, 찬송, 찬미, 혹은 성가 등으로 부릅니다. Gospel Hymn은 매개물을 노래하거나 성경내용이 가사인 것들을 말하며, 이것을 복음찬미라고 번역하여 불렀지만 일반화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Gospel Song은 대상이 사람인 것들로서 복음성가라고 불립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분류법이 있지만 필요하다면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분류법대로 판단해 보면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서는 않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대상이 하나님이므로 노래의 대상이 사람인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대의 상황이 그러하다해도 진리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타협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종교집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표정이 두 종류로 나누어지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은 희색이 돌겠고, 열심히 찬양예배를 드리고 계신 분들은 난감하다 못해 서서히 분노로 변해가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뭔가 항변을 하고 싶은데 제가 앞에 없고, 독선적(?)이기까지 한 저의 주장만 있기 때문입니다. 늘 세미나 동안에 보아왔던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논리는 정확한 것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남아 있다는 것도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분하고 있는 찬송과 복음성가의 구분방법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한국찬송가공회'에서 발간한 500여 곡이 담겨진 까만 표지의 '찬송가'책 속에 있는 것들은 예배시간에 불러도 되는 찬송이고, 그 나머지 것들은 복음성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또는 최근에 창작된 곡으로서 멜로디로만 되어있는 노래들을 복음성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위의 분류방법을 보면 노래의 가사로 방향을 결정 짓게 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찬송가 책 속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분류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가' 책 속에도 위의 세 가지(Hymn, Gospel Hymn, Gospel Song)가 다 포함되어있다고 찬송가 편찬위원들은 말합니다. 오히려 구분하기 쉽게 Hymn과 Gospel Hymn에는 '아-멘'을 붙여 놓았다고 설명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찬송가 책 속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예배시간에 불러서는 곤란한 것들이 있다는 논리가 성립이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현대적인 음악 스타일로 작곡되었다 할지라도 노래 가사의 방향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칭찬하는 내용이면 예배 시간에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도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음악 스타일은 예배와 관련되어질 경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와 예민한 관계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말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도 되느냐?"하는 질문에 이제는 분명히 개념을 가지고 대답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찬양예배를 하는 교회도 선곡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신학의 기준이 무너져서는 안됩니다. 물론 기준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개념의 혼란이었지만 말입니다.

 

 

                           찬양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찬양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건방지고 뚱딴지같은 질문이냐고 하실 지 모르지만 사실 너무나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가 찬양 집회를 초청 받아 가면 요즘은 시대의 분위기상도 그렇고 제 직분 상으로도 아예 집회 시간 전체를 내어 주지만 초창기에는 꼭 제 시간 전에 짧은 예배 순서가 있었습니다. 보통 주관하는 부서장이 사회를 보고 찬송가를 한 장 부른 후에 대표기도가 있고, 그 다음에는 담임목사님의 능력과 감각이 시험대에 오르는 이른바 '5분 설교'가 진행이 되곤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성경본문을 시편 150편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 하셨고, 때때론 엡5:19 이나 골3:16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가지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한 번도 빼 놓지 않고 들은 찬양에 대한 정의는 '곡조 있는 기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마디로 찬양을 완벽하게 정의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신다면 과연 여러분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지난 번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즘 모든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까지 표현되는 이 '찬양'이라는 것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부화뇌동하는, 방향 없는 신앙생활이나 목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굉장한 신학적인 논리를 전개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신앙의 행위들에 대한 뚜렷한 의식과 방향은 알고 행하자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찬양'이라고 하면 노래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사전이나 교회음악 관련서적에서 말하고 있는 찬양의 정의는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거나 존경하는 말 또는 그 행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음악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개념 속에는 '찬양'이라고 하면 노래를 연상하고 있습니다. 사실 찬양은 음악과 동일시된 것이 아니라 음악을 포함하고 있는 큰 개념입니다. 음악으로도 찬양할 수 있고, 글이나 몸으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찬양은 하나님을 칭찬하는 다양한 행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몇 가지 사실들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찬양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삼척동자도 아는 당연한 것을 무슨 대단한 것인 양 떠드느냐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이 방향을 무의식으로 넘기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흔히 교회에서 사역자이건 평신도이건 간에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분이 '다 함께 찬양합시다.' 라고 하면 모두 하나님을 향해 노래로 찬양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노래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발걸음 무겁게-(중략)-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이 노래들은 하나님이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대상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노래의 가사대로라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고 있거나, 건방지게 하나님을 위로하고 있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두 곡을 들었지만 우리가 찬양시간에 부르는 곡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해놓고 사람을 향한 것인지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눈을 감고 손만 멋있게 들고 불러 젖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노래들은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일 경우에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최선을 다 해 드릴 때에는 우리를 찬송 부르도록 지으신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우리의 찬송을 열납 하신 하나님은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당연히 한 것뿐인데도 성경에서 약속하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 같은, 빌립보 감옥이 무너진 것 같은 모든 기적과 축복들을 주십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수만큼이나 많은 찬송을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축복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찬양이라는 행위를 했지만 정작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는 결론 밖에 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노래일 경우에는 지금 이 모임 가운데 임재 하셔서 우리의 찬양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심령에서 나오는 신앙의 고백으로 진지하게 해야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열납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에서는 찬양의 가사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딴 생각을 하고 있거나, 마음 없이 그저 분위기를 위해서 부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입을 다물어 버리기도 했고, 시간이 길어지면 짜증을 내기도 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고도 하나님이 받으시길 기대하신다면 엄청난 착각일 것입니다.

언젠가 북한의 상황을 보여주는 방송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미 그들의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굶고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초 호화판 행사를 열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유명인사들을 초청한 능라도 운동장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사를 보며 놀라고 있었는데, 드디어 주인공인 김일성이 나타나자 축하의 함성이 우뢰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천상의 예배처럼 말입니다. 열광하는 주민들 중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네들이 화면에 크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손에 꽃을 들고서 펄쩍펄쩍 뛰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얼마나 회개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한 인간을 위해서, 그것도 거짓말쟁이를 위해서 굶어가면서도 눈물까지 흘려가며 찬양을 하는데, 나는 과연 날 위해 십자가에서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어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던가. 눈물은 흘렸지만 내 죄를 통회할 때나 내 서러움에 울었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울어 본적이 얼마나 있었나를 돌아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노래의 방향이 사람일 때는 그 노래의 가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면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을 가지고 부를 때 그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감동이 되어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노래가 사람을 위로하는 내용이면 내 신앙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노래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의 사역 가운데는 이러한 경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가 막힐 정도의 논리로도 전도가 되질 않던 강퍅했던 마음들이 녹아져 예수를 영접하기도 하고, 자살하려던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예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은 제가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이 아니라 찬양의 기본적인 개념을 늘 마음에 염두에 두다 두고 정확한 방향으로 최선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저 같은 찬양사역자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찬양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의 찬양을 통해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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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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