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그리스도인의 소명

수호천사1 2014. 6. 22. 21:45

그리스도인의 소명

- 헤르만 바빙크-


우리를 그리스도 자신과 또한 그의 은택들의 교제 속에 들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교회 안에 부어 주신 성령을 사용하시며, 뿐만 아니라 교회를 가르치고 교훈하시기 위하여 그가 주신 말씀도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 둘을 서로 연결시키셔서, 그 둘이 그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직분 수행을 섬기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건전한 사고를 갖거나 혹은 그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언제나 매우 다른 견해들이 있어왔고, 또한 이 다른 견해들이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함께 존재해 오고 있다.

 

한 쪽에는, 말씀의 선포 그 자체로서 충족하다고 생각하며 성령의 역하하심을 부당하게 대하는 이들이 있다. 먼 과거나 최근에나 이런 이단을 따르는 펠라기우스(Pelaglus)의 추종자들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순전히 하나의 교리로만 바라보며, 예수님에게서도 오로지 숭고한 모범만을 보며, 복음을 그저 하나의 새로운 율법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은 죄가 사람을 연약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람이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일과 행위의 모범을 따르게 되기에 족하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에 대한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않고, 그리하여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부인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아주 잘 보아야, 성령을 그저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하나의 힘 정도로, 일종의 도덕적인 기질과 이상적인 목적을 교회에 불러일으키는 힘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그와 전혀 다른 입장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광신자들, 반(反)율법주의자들, 열광주의자들, 혹은 신비주의자들로 불리는 자들로서, 성령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면서 사람의 회심에서 말씀이 하는 역할을 과소 평가한다. 그들은 말씀은, 성경은, 복음 선포는 영적 실체 그 자체가 아니고 그저 그 실체의 증표요 상징일 뿐이라고 본다. 말씀 그 자체는 죽은 조문(條文)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 수가 없고, 새 생명의 원리를 그 마음에 심을 수도 없다고 한다. 말씀은 기껏해야 그저 지성에 빛을 비추어 주는 영향력밖에는 없고, 마음을 변화시키고 바꿀 수 있는 능력이나 힘은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일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사람의 내적 존재 속으로 곧장 들어가 그 사람을 그 실체 속에 참여하게 하지만, 말씀은 그저 그 실체의 표징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며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오직 그런 사람만이 성경을 깨달으며, 조문 이면으로 들어가 그 핵심과 본질을 깨우친다고 한다. 이 신령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성경을 하나의 규범과 지도 원리로 사용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적 지식의 근원은 아니라고 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관적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점점 자라나서 성경을 넘어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영향력을 성경과는 별개로 취급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서와 역사적 기독교 전체에게서 더 멀어지고 독자적으로 서게 된다. 그런 방향으로 더 나아가면, 신비주의가 합리주의로 바뀌게 된다. 성령의 내적 활동을 성경 말씀과 분리시키게 되면, 그 활동이 특별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그리하여 사람의 이성과 양심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상적인 활동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견해는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성령과 더불어 각 사람 속에 거하시며 사람은 날 때부터 마음 속에 기록된 내적인 말씀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이 말씀에게 그저 어느 정도 변화를 주기밖에는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본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근원적인 자연 종교가 된다. 그것은 세상만큼 오래 되었고, 그 본질상 역사상의 모든 종교들의 기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된다. 신비주의가 언제나 합리주의에로 빠지며, 합리주의는 주기적으로 신비주의에 다시 빠져 들어간다. 양 극단은 서로 상합하며 손을 맞잡는 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는 언제나 이런 이단들을 피하고 말씀과 성령의 상호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른 고백들을 통해서 여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예를 들어, 로마 교회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실질적인 은혜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진리의 근원으로만 보며, 이 진리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순전히 찬동(approbation)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구원을 위하여 부족하며, 따라서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의 예비적인 기능 정도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로마 교회는 진정한 구원의 은혜는 성례에서 비로소 처음 베풀어졌다고 보았고, 그리하여 성령의 사역을 무엇보다고 가르침과 목양과 제단에서 섬기는 직분들로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는 데에서 찾으며, 그리고 그 다음으로 성례를 수단으로 하며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은혜와 덕성과 은사들에서 찾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의 구원하시는 활동을 말씀과 분리시키고, 그 활동을 오로지 성례에만 결부시키는 처사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전통을 포함하여 진리의 유일하고 명백하며 충족한 원천으로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은혜의 한 수단으로 높였으며 성례와의 관계에서 말씀의 우위성을 회복시켰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스스로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더 깊이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옛 이단들이 되살아났고 그 이단들을 추종하는 강력한 지지자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소치니파(Socinians) 가 일어나 아리우스와 벨라기우스의 가르침에로 되돌아가서 복음을 하나의 새로운 율법으로 간주하며 성령의 구제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한편, 제세례파(Anabaptists) 가 다시 신비주의의 노선을 취하여 내적인 말씀을 높이고 성경을 하나의 죽은 조문이요 알맹이가 없는 상징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올바른 길을 찾는 데에는 굉장한 노력이 소모되었다.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을 취하였다. 루터 교회는 말씀과 성령을 거의 완전하게 연합시킨 나머지 그 둘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 그 둘 사이의 구별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위험에 처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성령의 구원하는 은혜를 말씀 속에 가두어 두고서 성령이 오로지 말씀을 통해서만 사람에게 임할 수 있다고 보는 데까지 나아갔다. 성경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으므로, 그 성령이 그의 회심시키는 능력을 말씀 속에 두셨고, 이를테면, 그 능력을 마치 그릇 속에 담아 두듯이 말씀 속에 저장해 두셨다. 빵이 영양을 주는 능력을 속에 지니고 있듯이, 성경도 그것을 생겨나게 하신 성령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내적인 영적 능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 교회는 성경이 지성에 빛을 비추어 주고 도덕적으로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시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원시키는 내적인 능력까지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성령은 말씀을 통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일하시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개혁 교회들은 결코 이런 견해를 취할 수가 없었다.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결코 포용하고 납득할 수 없다는 그들의 원리가 이 문제에도 그대로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이 매우 친밀하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으나, 그 둘은 서로 구별되어 있다고 보았다. 성령께서는 말씀 없이도 역사하실 수 있고, 때때로 그렇게 역사하신다. 성령이 친히 말씀과 함께 역사하실 경우는 그가 친히 그렇게 하시기로 자유로이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그는 보통 말씀과 연결되어 역사하시며, 말씀이 있고 또한 선포되는 곳에서, 즉 은혜 언약의 영역에서, 교회에 교제 속에서 그렇게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령께서는 루터파의 생각처럼 성경이나 선포된 말씀 속에 사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으로서의 교회 속에 사시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말씀이 마치 그의 능력의 통로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도 아니다. 말씀의 역사와 자신의 활동을 함께 묶으시기도 하지만, 성령께서는 개별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으시고 그것을 새롭게 하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부흥과 개혁-

출처 :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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