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그리스도인의 삶 (The Life of True Christian)
존 칼빈
<목차>
제1장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 (겸손한 복종)
제2장 자아부인(Self-denial)
제3장 십자가를 지면서 인내함(Patience in Crossbearing)
『본문은 존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 중 일부를 좀 더 쉽게 설명한 지침서인 The Golden Booklet of the Life of True Christian을 편역한 것이다.』
제 1 장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생활 (겸손한 복종)
I. 성경은 생활의 규범이다.
1. 새 생활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통한 멜로디와 하모니를 나타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무슨 멜로디인가? 하나님의 공의의 멜로디이다. 무슨 하모니인가? 하나님의 의와 그에 대한 우리의 복종 사이에 생기는 하모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아름다움 안에서 행할 때에만 양자임이 증명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충분한 회복인 새 생활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본래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에 안내하는 지침을 따르려는 노력에 자극을 받거나 도움을 받아야한다. 마음에서 나온 참된 회개가 바른 길을 떠나 방황하거나 잘못하는 것까지 막아 준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을 개혁하는 근거가 되는 원리를 알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2. 성경은 많은 권면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토론하기에 너무 방대한 책이다.
교회교부들이 아첨하지 않는 진실한 말을 많이 남겨 주었다 해도 그들의 어떤 학적논문도 성경의 심원성을 다 규명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참된 경건 생활을 위하여 교부들의 탁월한 작품을 꼭 읽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근본적인 표준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하다.
3. 크리스챤의 규범을 말하는 그 책은 단순성 때문에 다른 것들과 열정적으로 토론하지만 철학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비록 일반적 원리와 특별한 규율을 말하는데 익숙할지라도 그러나 성경은 모든 규범 자체를 가지고 있다. 철학자들은 세밀한 명료함과 세심한 정교함을 보여주는 야망의 목표를 갖지만 성경은 아름다운 일치와 모든 철학자들을 능가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들은 허식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성령께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직접적이고 명백한 말로 된) 다른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II. 거룩은 중요한 원리이다.
1. 크리스챤 생활에 있어서 성경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우리가 본래 불의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의를 사랑하게 하려고 율법으로 교훈하는데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신앙경주에 흔들리지 않게 하는 간단한 규칙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추천할 만한 많은 말 중, “나도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원리만큼 더 나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흩어진 양처럼 각기 제 길로 나아가 세상의 미로에서 방황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려고 우리를 불러 모으셨다.
2.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러운 연합에 대한 어떤 말씀을 들을 때 바로 거룩이 연합의 통로(Channel)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거룩은 우리가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공로가 아니라 그에게 달라붙어 그를 따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그가 죄악과 불의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의 영광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초청에 주목하기 위하여 이것을 명심해야한다.
만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세상에서 탐닉하고 싶어한다면 이 세상의 죄악과 부패의 수렁으로부터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고 싶어한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예루살렘 도시에 거해야만 된다고 우리를 견책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 불의한 자에 의해서 더럽혀질 수 없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장막에 거할 자는 올바로 살고 의롭게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거룩하신 분의 성소는 흠 없이 보존되어야만 한다. (레19:2, 벧전1:16, 사35:10, 시15;1,2, 24:3,4)
III. 거룩함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1. 성경은 거룩의 원리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거기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보인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화목케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으로 삼으셨다. 유일한 도덕적 의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철학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복종하고 따르는 것보다 더 탁월한 계획을 보여달라고 말해 보라. 철학자들의 가장 고상한 덕은 본성의 삶을 사는 것이지만 성경은 우리의 본으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 생활에 나타내야한다. 이런 깊은 사색 외에 더욱 더 효과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2. 주님은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닮는 조건으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으셨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따라서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창조주를 반역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를 우리의 구주로 인정치 않는 셈이 된다.
3. 성경은 권면과 아울러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과 우리를 둘러싼 구원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로 계시하실 때 우리가 그의 자녀로서 행하지 않는다면 가장 비열한 배은망덕의 죄를 범하는 셈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말미암은 세례로 청결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육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의 지체로서 연합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허물로서 그를 불명예스럽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육적 욕망을 뒤로 밀쳐내고 그에게 마음을 향하게 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고 도리어 그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썩지 않고 결코 쇠하지 않는 면류관을 물려주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날까지 순전하고 순결하게 지켜야한다. 이것이 적절한 행동규범의 최상의 기초이다. 철학자들은 인간 본래의 위엄에 결코 올라갈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죄 없는 우리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킨다.(롬6:4이하 8:29)
IV. 외적인 기독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1. 단지 교인자격을 소유한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물어보자.
아무나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고 오직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그에 대한 참 지식을 받은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거짓된 정욕으로 더럽혀진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도록 가르쳐지지 않은 사람이 현실적으로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외적 지식은 거짓과 위험스러운 인위적인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거침없는 웅변적인 입술의 종으로서 복음을 말할 수 있다.
2. 복음은 말의 교훈이 아니라 삶의 교훈이다.
그것은 이성과 기억으로 배워질 수 없고 영혼 전체를 점령하고 마음의 내적 깊숙한 곳에 투영할 때 충분히 이해되어진다.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아닌 것을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주되신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자.
우리는 신앙에 대한 지식을 첫자리에 두어야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 우리의 습관에 스며들어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놓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무익한 것이다.
3. 철학자들은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고 실제로 헛된 수다쟁이의 무리들로부터 나오는 불명예로 인해 정죄 받아 사라진다.
그 이상의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입술로만 복음을 가지고 마음에는 복음이 없는 사람들을 미워해야한다. 철학자들의 권면은 참 신자들의 확신, 애정, 끝없는 능력과 비교할 때 냉혹하고 생명력이 없다.(엡4:20이하)
V. 영적 진보는 필요하다.
1. 우리는 타락한 그리스도인 안에서 복음의 절대 완전성을 주장해서는 안 되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얻으려고 심혈을 기울여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기 전에 복음의 완전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 중 최상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상에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절대적인 완전의 표준에 이른 교회가 없음으로서 발전이 더딘 많은 사람들을 거절하려 해선 안 된다.
2. 완전이란 우리가 목표로 하는 마지막 마크이며 우리가 싸워야하는 목표이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무를 이루려하고 다른 편으로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 의무를 생략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타협하는 것은 부당하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은 섬김에 있어서 진지함과 악과 거짓이 없는 마음의 단순함을 원하신다. 이중적인 믿음은 거룩과 의를 찾으려는 하나님에 대한 거짓된 헌신을 뜻하기 때문에 영적 생활과 모순된다. 세상 육체적 감옥에서 근신으로 절제하려는 충분한 능력을 가진 자란 아무도 없으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저하고 정지하며 땅에 기어 다니며 발전이 별로 없는 매우 약한데 처해있다.
3. 그러나 주어진 능력에 의해서 나아가게 하고 시작한 이 여행을 계속하자.
진보가 없는 적은 사람치고 행복할 자란 없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 가기 위하여 지극히 높은 것을 파수하는 것을 금하지 말고 성취가 적다는 이유 때문에 절망하지 말아야한다. 비록 실족했다해도 우리의 수고는 오늘이 과거를 지나치지 않을진대 결코 잃어지지 않을 것이다.
4. 영적 발전의 한 가지 조건은 우리가 진지하고 겸손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생각 속에 우리의 목적을 지키고 우리의 목표(goal)를 향하여 전진하자. 교만에 빠지지 말고 죄악의 열심에 집착하지 말자. 우리가 사는 동안 구하고 찾으며 세상의 모든 유약함에서 자유할 때만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와의 충분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완전한 선에 도달하기까지 더 높은 거룩의 경지에 이르도록 자신을 확고하게 세워나가자.
제 2 장 자아부인 (Self-denial)
I.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1.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질서있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탁월한 핵심적 원리로서 사람을 지도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거룩하고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일한 참 예배입니다. 거룩의 원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권면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희생되고 헌신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묵상하고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을 위해 사용될 수 없으며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잘못을 피해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가 자명해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의 안일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유익을(ourselves and our own interests) 잊어버려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오직 그를 위하여 살고 그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들이 유일한 합법적인 목표이신 그 분께 향해야 합니다.
3. 스스로가 지신의 주인이 되지 않고 또 자신의 이성으로 지배를 받지도 않고 자신의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 항복시키는 법을 배우기에 이른 사람은 큰 진전을 성취한 것입니다.
사람을 파멸로 인도하는 가장 치명적인 독약은 자신과 자신의 지혜 그리고 자신의 의지력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안전한 도피처는 주님의 인도를 단순히 따르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첫 걸음은 자신을 떠나서 온 힘을 기울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4. 주님을 섬기는 것은 내적인 복종뿐만 아니라 즐거이 죄된 욕망을 던져버리고 성령의 지도에 전적으로 항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마음의 갱신이라고 지칭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의 변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시작이지만 불신 철학자들에게는 전혀 생소합니다. 불신 철학자들은 이성을 생활과 지혜와 행동의 유일한 안내자로 설정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우리의 이성을 성령님께 항복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뜻합니다. (롬12:1, 엡4:23, 갈2:20.)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에베소서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I.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자아부인을 뜻한다.
1.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그의 영광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을 추구합시다.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모든 이기적인 것들을 멸시하는 것에는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럴 때만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과 그의 명령에 신실하게 몰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모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부나 권력 그리고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거짓된 야망, 인간적인 영광, 그외 은밀한 죄악들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은 전 생애에 걸쳐 모든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평가해야 하며 은밀한 생각들 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모든 헛된 욕망에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그의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명령하신 자아 부인은 마침내 우리 마음의 모든 욕망을 지배할 것입니다. 자아 부인은 자만, 거만이나 혹은 헛된 영광뿐만 아니라 탐욕, 방종, 사치, 음란, 그외 이기적 동기에서 나온 어떤 죄악도 자리 잡을 틈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자아부인의 원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가장 큰 죄악에 빠지게 되고, 혹시 겉보기에 어떤 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악한 욕망 때문에 부패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아부인에 대한 주님의 법을 믿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덕을 행하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보여주십시오.
3. 자아부인의 원리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오직 칭찬을 사랑하기 때문에 덕을 따라갔습니다.
심지어 덕이란 그 자체로서 바람직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들도 교만에 빠져서 그들이 덕을 원하는 것은 오직 교만해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나 교만과 허황된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상을 받았다”, 또 그런 사람들보다 창기와 세리들이 하늘나라에 더 가까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4. 옳은 것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아부인으로부터 물러서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인간 영혼 속에는 악의 세계가 숨겨져 있고 그 모든 것을 치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아부인 밖에 없다는 사실은 예로부터 행해진 참된 관찰입니다. 구원은 오직 자신의 이기주의를 포기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III. 자아부인의 요소는 근신과 의와 경건이다.
1. 사도 바울은 잘 통제된 생활을 다음과 같이 디도에게 요약해 주었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가난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도서 2:11-14)
바울은 우리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꼭 필요하며 참된 예배를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 장애물은 첫째, 강하게 본성적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불경건, 둘째는 우리를 압도하려는 세상적 정욕입니다. 불경건은 미신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경외심을 방해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 정욕은 육체의 정욕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십계명과 모순되는 육적 욕망, 그리고 자신의 이성과 의지의 명령을 저버리라고 촉구합니다.
2. 바울은 새 생활의 모든 행동을 근신, 의, 경건, 세 종류로 요약합니다.
근신이란 순결과 절제뿐 아니라 현세적인 축복들을 순수하고 검소하게 사용하고 빈곤 속에서도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란 모든 사람이 정당한 댓가를 받기 위하여 공의의 모든 의무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은 우리를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참된 거룩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킵니다. 근신과 의와 경건이 단단하게 연결될 때 그것들은 절대 완전을 생산할 것입니다.
3. 모든 육적 생각을 버리고 거짓된 욕망을 굴복시키고 포기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우리 형제에게 몰두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천사의 삶을 산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모든 올무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바울은 우리의 관심을 복스러운 영생의 소망에 두라고 촉구하면서 우리의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다고 격려합니다. 그리스도가 전에는 구속자로 나타나셨지만 다시 오실 때에는 그가 얻은 구원의 유익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천국의 영광을 바라는 열정을 가지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우고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리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늘의 기업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이방인과 순례자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디도서2:11-14)
<디도서 2:11-1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IV. 참된 겸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1. 자아부인은 부분적으로 사람과 관련이 있고 대부분은 하나님과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 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증진시키는데 전심전력 하라는 성경의 명령은 먼저 우리의 마음이 치료받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입니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자기사랑으로 눈이 멀고 제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은 자기와 비교해서 가치가 없다고 여길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탁월한 은사를 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업적이라고 생각하여 자만에 빠져 으시대곤 합니다.
2. 우리는 자신의 속에 가득 찬 악을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조심스럽게 숨기면서 그것들이 작고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에게 아첨을 떨 뿐 아니라 때로는 그것들이 덕이라고 우겨대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예찬하는 재능이나 더 나은 재능이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되면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우월함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아주 악한 생각으로 그것들을 경멸하고 무시해버립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예리하고 심각하게 비판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증오심에 불타서 그것들을 과장합니다. 우리가 타인보다 우월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보통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할 때 증오가 자라서 오만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교만을 떱니다.
3.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평민은 권력자에게, 종은 주인에게, 무식자는 학자에게 굴복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우쭐대기를 좋아하며 가슴에는 하나의 왕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독선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이상과 행동에 대하여 경멸한다. 그리고 어떤 다툼이 일어나면 독이 화산처럼 분출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즐거울 때면 점잖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좋은 유머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4. 거짓된 욕망과 이기적인 자기사랑을 즐기며 사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뿌리째 뽑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듣는다면 우리의 달란트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재능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부족을 증거하는 셈입니다. 바울은 “누가 너를 다르게 만들었는가? 그 모든 은사들을 받았다면 왜 마치 그것들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자랑하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살펴보고 인정하며 진실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헛된 교만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야 할 큰 이유를 가지게 됩니다.
5. 한편 다른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 은사들과 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예를 도적질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악함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허물은 너그럽게 눈감아 주어야 합니다. 결코 아첨으로 그들을 격려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 하는 것을 보고 결코 그를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든지 남들의 명예와 평판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중용과 착한 마음, 그리고 친절과 우정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남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높이는 길 외에는 참된 겸손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롬12:10, 빌2:4 고전4:7.)
<롬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분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가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V. 우리는 다른 신자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1. 만일 당신이 모든 이기적인 생각들, 심지어 자아를 온전히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고 이웃에게 헌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울이 가르친 사랑의 수고의 의무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2. 만일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만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의 전부라면 우리는 강력한 힘으로 이기적인 자기사랑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본성에 아무런 압력도 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자원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의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이든지 그것은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함을 조건으로 맡기워졌다고 가르치고 경고합니다. 주님의 모든 은혜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길은 너그럽고 친절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저축이라는 것은 확실하고 강력한 교훈입니다.
3.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개인적인 재능은 인간의 지체의 능력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어떤 지체도 그 자체를 위해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 자신의 개인적인 용도를 위해서 그 힘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이와같이 교회의 지체 역시 자신의 활동으로는 스스로가 유익을 얻지 못하고 전체 몸의 연합을 통한 상호 협력을 통해서 유익을 얻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언제나 우리자신의 계산서를 어느 날 제출해야 하는 청지기로서 행동합시다. 그리고 유익의 분배는 사랑의 법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4. 사랑의 법은 큰 일 뿐만 아니라 삶 속의 작은 것들에도 적용되어야 함을 기억하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는 어떠한 축복도 누려서는 안 된다는 엄숙한 증표로서 첫 곡물을 바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악하게 오용하는 것입니다.
5. 반면에 우리는 재능과 선물들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부요케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선은 주님에게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행하는 사랑의 행위는 구약의 율법 아래서 드려진 제사를 대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성경은 구제를 거룩한 제사로 비유했습니다. (고전13:4-8 시16:2,3)
<고전 13:4-8>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 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 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시편 16:2-3>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VI. 우리는 친구든지 원수든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1.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피곤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라면 선대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린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선을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람의 실존적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다만 우리 모두가 경외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 생각하라고 가르침으로써 탁월한 논의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권속들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회복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당신의 친절한 봉사를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당신은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그가 낯선 사람이라고 합시다,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인을 쳐서 당신과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 자신의 혈육을 멸시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가령 그가 아주 멸시받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황송스럽게도 주님은 그를 자신의 형상으로 단장할 만큼 귀하게 여기십니다.
가령 당신이 섬길 의무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많은 축복을 받은 당신은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당신으로부터 최소한의 선행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자아를 죽이고 당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주도록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아무런 친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오히려 그는 당신에게 상처와 모욕을 줌으로써 당신을 분노케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않고 모든 친절을 베풀지도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오직 모든 사람의 모든 무례함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3.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해 받은 것을 친절로서 갚고,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잘못을 덮고 지워버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마5:44, 눅17:3,4)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VII. 사회적 선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1. 우리가 사랑의 모든 의무를 전부 실천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부인을 실행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아부인은 사랑의 의무를 단 한 가지도 빠뜨림이 없이 실천했다고 해도 단지 겉으로만 실천한 것은 참으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순수한 사랑의 원리로 실천하는 사람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왜냐하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서 의무를 수행해도 마음이 가 있지 않으면 목표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주 너그럽다고 알려진 사람이라도 남에게 베풀 때는 책망, 교만, 그리고 오만으로 행합니다. 이 시대는 교만과 경멸함이 없이 순수하게 베풀어지는 구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시대는 불신자들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부패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실천할 때 웃는 얼굴, 즐거운 기분, 그리고 공손한 언사 이상의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고난 속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을 동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참된 동정과 인정을 가지고 자신에게 하듯이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의 동정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 대한 교만과 멸시하는 마음을 ?아버립니다. 우리 몸의 한 지체가 병들어 몸 전체가 건강회복을 위하여 수고할 때 우리는 이런 병든 지체를 경멸하지 않고 의무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병든 지체는 온 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3. 자연법칙에 의하면 몸의 지체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상호도움은 어떤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상호도움을 거부하는 것은 잔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 가지 봉사를 수행했다고 해도 다른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자가 재산의 일부를 남에게 베풀고 나서 다른 의무는 등한히 한다면 그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웃에게 빚진 자임을 인정해야하며 사랑은 최선을 다 할 것을 요구함을 알아야 합니다.
VIII. 하나님의 축복 없이 행복이란 없다.
1. 자아부인의 중요한 측면 즉 자아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참된 자아부인이 얼마나 우리를 평온하게 하고 인내하게 하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먼저 성경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평온과 고요함을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정복자요 주인이신 그분에게 우리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부와 명예에 대한 탐욕, 권세의 추구, 부의 축적, 모든 헛된 것을 축적하는 것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으며 억제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가난과 박해와 모욕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며, 얼마나 많은 잔꾀를 시도하고, 자신의 욕망과 탐욕이 목적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2. 만일 경건한 사람이 이런 올무 속에 잡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길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번영은 바라지도 말고 원하지도 말고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되어 있음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자신의 근면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다른 사람의 호의들을 통하여 영예와 부에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지혜나 노력으로는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다만 주님이 축복하시는 만큼만 나아가야 합니다.
3. 반면에 하나님의 축복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행복하고 번성하게 만드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이 큰 부와 명성을 획득한 것을 날마다 목격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 얼마간의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은 최소한의 행복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며, 만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저주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을 원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IX. 우리는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노심초사해서는 안 된다.
1.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축복만이 바람직한 번영의 유일한 원인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다만 불행과 비참뿐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근면과 영민함, 다른 사람들의 호의, 또는 행운이라고 하는 것에 의존해서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노심초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두신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금지된 행동, 거짓되고 죄악 된 속임수, 우리의 이웃을 약탈하고 해롭게 하는 일을 통해서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서둘러서는 안 되고, 순결한 길을 벗어나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범위에서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도록 우리 자신을 제한해야 합니다. 어느 누가 기만과 약탈과 다른 악한 행동들을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2. 하나님의 축복은 깨끗한 생각과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임한다는 사실은 불법과 부패에서 떠나려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를 축적하려는 강렬한 욕망과 명예를 추구하는 잘못된 욕망을 억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들을 간절하게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이 도우실 줄로 믿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입으로 저주하신 것을 축복하셔서 번성케 하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십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의 욕망과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내,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대한 만족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내하지 못하고 환경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자기의 뜻대로 부와 궁핍, 명예와 멸시를 분배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말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욕심내는 것들을 열정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하는 천한 수단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참 그리스도인은 번영의 원인을 자신의 근면이나 성실, 또는 행운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인정할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별로 발전이 없고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비해서 자신은 빈곤한 가운데 뒤처져 있다고 해도 세상 사람이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보통수준의 성공밖에는 거두지 못했을 경우에 느끼는 기분보다는 훨씬 더 평온하고 온건하게 궁핍을 견디어 낼 것입니다.
4. 참된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부나 권세보다 더 달콤한 만족을 주는 위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은 자신의 구원을 증진시키도록 주님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자신을 그의 통치에 완전히 맡기고 그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다윗은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내 눈이 높지 아니 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131:1,2).
X. 주님은 모든 면에서 공평하시다.
1. 이 진리가 경건한 사람들이 조용히 인내해야 할 유일한 근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상황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온통 주님께 헌신하고 작은 것들까지도 주님의 기쁘신 뜻에 맡기지 않는다면 올바로 자신을 부인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그와 같은 마음의 체계 속에 집어넣는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운명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 우리에게 부딪치는 무수한 사건들을 생각한다면 우리자신을 이와 같이 훈련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온갖 질병이 우리에게 덮쳐오며 하나가 지나면 또 다른 것이 찾아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전염병과 전쟁의 참화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때로는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집어삼켜버려서 우리는 궁핍의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편, 아내, 부모, 자녀 또는 친척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에게 빼앗기기도 합니다. 때로는 집이 화재로 소멸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불평하고 자신들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태양과 별들을 비난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잔인하고 불의하신 분처럼 원망하고 모욕하기까지 합니다.
3. 그러나 신실한 신앙인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아버지처럼 선하심을 묵상할 것입니다.
만일 친척들이 떠나가고 가정이 고독하게 될 때라도 주님을 찬양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고 오히려 그 가정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정으로 부터 떠나서 황폐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위협적인 서리나 우박, 또는 가뭄으로 밭이나 포도원이 파괴된다면 그는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고 우리는 그의 목장의 양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을 친히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위에 서서 견디어 나갈 것입니다. 만일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불평에 가득차서 마음이 부서지거나 오래 참지 못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공의와 선하심을 생각하고 징계를 받고 교정을 받는 동안 인내함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4. 요컨대, 어떠한 일이라도 모든 일이 주님에 의해 작정되었음을 앎으로써 신자는 교만하게도 자신과 모든 소유를 헌신한 주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 모든 일들을 평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행운이나 운명을 탓하며 역경에 거스려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불신 철학자들의 어리석고 사악한 위로를 결단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는 가치가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든 사람들을 때리는 맹목적이고 잔인한 세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의 원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번영과 역경의 안내자요 통치자이시며 서두르지 않으시고 모든 선과 악을 가장 공평하게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시79:13)
<시79: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제 3 장 십자가를 지면서 인내함
I.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아부인보다 더 어렵습니다.
1.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더 높은 수준 즉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청하신 수준까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의 택하심을 받고 성도의 회중 가운데 영접을 받은 모든 성도는 힘들고 어렵고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찬 생활을 각오해야합니다. 이와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연단하시는 것은 거룩한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는 먼저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시작하셨고 모든 자녀들에게도 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항상 기뻐하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관대하고 부드럽게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는 지속적인 십자가였습니다.
2. 사도는 예수님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말함으로써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고난을 피해야 합니까? 사실 주님의 복종은 우리에게 인내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겪으신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그를 닮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으로써 주님이 모든 악의 수렁을 피하여 하늘의 영광에 이르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같은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감당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3. 바울은 "우리가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게" 되면 “부활의 능력”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의 죽으심에 참예하는 것”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볍게 하는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 말입니까! 우리가 역경으로 고난을 받을수록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더욱 확고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교제로 말미암아 역경 자체는 우리에게 복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크게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마16:24, 마3:17, 17:5, 히5:8, 롬8:29, 행14;22, 빌3:10).
II. 십자가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1.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질 것을 강요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께 대한 복종을 증명하셔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는 자연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실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과장된 생각을 가지며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우리는 당연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하게 만드는 온갖 어리석고 헛된 육적 확신에 빠져서 마치 주님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와같은 허망함을 억제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극도로 연약함을 경험으로부터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모욕, 궁핍, 친척의 죽음, 질병, 또는 여러 가지 참화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 밑에 파묻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된 우리들은 고난의 짐 아래서도 우리를 든든히 서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도움인 주님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부르짖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2.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위대한 성도들조차 자신의 용맹과 담력에 대하여 과장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생의 환난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더 깊은 지식의 길로 인도해 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생각은 다윗의 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번영이란 너무나 생각을 어리석게 만들고 감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그가 의존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는 결코 넘어질 수 없다는 망상 속에서 자신을 신뢰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다윗같이 위대한 선지자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두려워하며 조심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번영 중에 있을 때에는 잘 견디고 인내하지만 역경이 그들의 인내를 부수어 뜨리면 그들은 스스로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와같은 영적 질병의 증거들에 의해서 경고를 받은 신자들은 생의 참담함 속에서 유익을 얻습니다. 그들은 육체에 대한 어리석은 확신을 박탈당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도피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견고한 요새이신 하나님의 보호가 가까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시30:6-7)
<시 30:6,7>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III. 십자가는 우리를 소망하도록 만듭니다.
1.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만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환난 중에 신자를 도와주시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내할 때 그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는 언제나 약속대로 도와주신 것을 성도에게 증거해 줍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그들의 소망을 견고하게 해 줍니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로부터 얼마나 큰 은택의 강물이 흘러넘치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덕에 대한 거짓된 견해를 버리고 우리를 아첨하는 자리로 잘못 인도하는 외식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자연적이고 치명적인 교만은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참하게 될 때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넘어지거나 절망 중에 침몰해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승리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약속을 성취하실 때는 미래를 위해서도 진리를 확증하시기 때문입니다.
2. 비록 이것이 유일한 이유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시련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IV. 십자가는 복종을 가르칩니다.
1. 주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또 다른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내를 훈련하시고 복종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주님이 주신 복종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감취어지고 쓸모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은혜를 이런 방법으로서 나타내시고 시험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 속에서 강직하고 견고한 은사를 밝히 나타낼 때 하나님은 그들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사"라는 표현은 그의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거절하지 않는 사실로부터 그의 헌신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금이 용광로의 불로 연단을 받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환난으로 연단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2.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탁월한 은사인 인내의 은사를 계발하기 위한 연습의 필요성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인내를 결코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덕들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서 그것들이 모호하고 쓸모없게 되지 않도록 방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을 단련하시는 최선의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시련이 없다면 인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또한 그들은 십자가에 의해서 순종에 대한 교훈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따르도록 가르침받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일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네카는 “하나님을 따르라”는 격언으로서 인내로 역경을 이겨나가도록 사람을 권한 것은 고대의 관습이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린아이같은 겸손으로 징계를 받아드릴 때만이 하나님이 지워주는 멍에에 순복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만일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께 대한 복종을 보여주는 것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순종에 길들이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창22:1,2, 벧전1:7)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V. 십자가는 우리를 징계합니다.
1. 우리가 부드러움과 관대함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육이 얼마나 강렬하게 주님의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런 복종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인의 고삐에 잘 순종하던 말을 마음대로 먹게 내버려두자 점점 사나워지고 길들일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마침내 주인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불평하셨던 것들이 우리 각자에게 계속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찌우고” “기름으로 덮여 있을 때” 우리를 먹이고 기르신 하나님을 발로 차버립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생각하고 사랑하도록 인도해야 마땅하지만 우리는 너무 배은망덕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관용이 계속해서 우리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겁게 순종할 수 있도록 징계로 통제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가 부를 얻을 때 교만하지 않고, 명예를 가질 때 자만하지 않으며, 번영과 건강의 복을 받을 때 무례하지 않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의 육적 교만을 대적하고 통제하고 굴복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유효적절하게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다양한 도구들 중에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유용하고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은 질병으로 고난을 받거나 심각한 치유를 받아야 할 필요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십자가로 훈련을 받는 것을 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신령한 의사는 모든 환자의 건강을 돌보십니다. 그는 어떤 환자에게는 부드러운 약을 주고 다른 환자에게는 충격적인 치료법을 사용하실 뿐이지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신32;15)
<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VI. 십자가는 회개를 가져옵니다.
1.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미래의 약점을 예방하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허물을 고쳐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즉시 과거의 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그와같은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인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훨씬 더 좋은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2. 그러므로 혹독한 고통 속에서라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유익을 증진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파멸로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세상의 정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생각은 우리를 또 다른 성경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히12:5,6)
우리가 아버지의 채찍임을 인정한다면 악행으로 강퍅케 된 절망적인 사람들을 반역적으로 닮기 보다는 유순한 자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돌이키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파멸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12:8)
3.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사랑을 보여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큰 관심을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인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지극히 사악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지적해 줍니다. 불신자는 불치의 사악함으로 오래전부터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징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고귀하게 출생한 자녀와 같이 회개와 교정으로 유익을 얻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고전11:32, 잠3:11, 12, 히12:8)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잠 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잠 3: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VII. 박해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합니다.
1. 우리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탁월한 위로의 원천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봉사자라는 증거로 단장되는 놀라운 영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은 복음을 방어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의로운 목적들을 지지하기 때문에 반대를 받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사탄의 거짓과 맞서 하나님의 진리를 방어하거나 혹은 불의와 손상에 맞서 선량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보호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증오와 혐오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우리의 소유, 우리의 평판이 위협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헌신할 때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입으로 우리를 가장 복되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가난 그 자체는 고통이요. 추방, 경멸, 수치, 투옥도 고통입니다. 모든 재난 중에도 죽음은 최후, 최악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은혜를 부어주시면 모든 일은 합력하여 우리의 행복과 번영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의 거짓 견해에 동조하기보다 그리스도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언제나 사도들처럼 기뻐하게 됩니다. (행5:41)
2. 그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무죄한 가운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가운데 악인의 악행에 의해서 재산을 약탈당하고 궁핍하게 되었다면 그것 때문에 하늘에 있는 참된 부요가 증가될 것입니다. 우리가 조국에서 추방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문을 당하고 멸시를 당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도피하여 그리스도 안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난과 수치로 뒤덮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학살을 당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림자 같이 지나가는 이 세상의 즐거움보다 영원한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마2:10, 행5:41)
<마 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VIII. 박해는 영적 기쁨을 가져옵니다.
1. 성경은 우리가 의로운 목적을 수호하기 때문에 모든 학대와 불행을 겪는 우리를 위로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같은 고난이나 십자가는 신자에게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와같은 역경들을 자아포기와 영적 기쁨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극도로 배은망덕한 행위라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우리의 고난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고상하고 자립적인 마음에 대한 거만한 공격은 백번 죽는 것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모욕이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핍박뿐만 아니라 환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도 그의 본을 따라서 “악한 보고와 선한 보고”를 만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2. 더욱이 우리는 기쁨이 충만하여 모든 쓰라리고 슬픈 감정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슬픔으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비통함으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감당하면서 아무런 인내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 속에 고난이 없고, 질병 속에 고민이 없고, 모욕 속에 고난이 없고, 죽음 속에 공포가 없다면, 이런 고난을 대범하게 여기는 것이 무슨 용기나 덕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고난들 하나 하나는 저마다의 쓰라림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굴복시키기 때문에 신실한 성도는 아무리 많은 수고가 따르더라도 슬픔을 저항하고 극복함으로서 참된 능력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들은 예민하게 자극을 받을 때 인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그들이 무절제한 폭발을 하지 않도록 억제시켜 줄 것입니다. 슬픔과 서글픔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적 위로 속에서 안식할 때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벧전4:14 딤전4;10 고후6:8)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IX. 십자가가 우리를 무관심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1. 바울은 신자가 자연적인 슬픔을 거스려 싸우는 싸움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인내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아무런 슬픔의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고대의 스토익 철학자에 의하면 마음이 큰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을 제거해버리고 역경이나 영화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차가운 돌처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교만한 지혜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일찍이 사람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인내를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은 탁월한 형태의 인내를 찾으려는 욕망 때문에 인간의 삶에서 인내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2. 오늘날 크리스찬들 가운데는 고민하고 울고 외로움 가운데 슬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현대 스토익 파들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극단적인 견해는 실제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몽상가들, 그래서 허구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옵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말씀과 모범으로 정죄하신 잔인하고 가혹한 철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웃의 참화뿐 아니라 자신의 참화를 앞에 두고 애통하며 슬퍼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도 달리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기뻐하겠으나 너희는 울며 애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슬픔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4. 만일 그가 모든 눈물을 정죄하셨다면 자신의 몸으로부터 피눈물을 흘리신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모든 두려움이 불신앙으로 매도된다면 우리는 주님을 절망케 하고 놀라게 한 근심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만일 모든 슬픔이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그의 영혼이 “죽기까지 고민하였다”는 고백을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요16:20, 마5:5, 눅22:44)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X. 십자가는 복종을 배우게 합니다.
1. 헌신된 자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한 슬픔에 대한 자연적 경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내를 향한 그들의 소원을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언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망은 인내가 지나쳐 무감각하게 되어버리고 그래서 자신을 무감각한 벽돌처럼 만들면 가장 강하고 용기있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종착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정반대로 성경은 역경으로 심한 고난을 당할 때 부서지지 않고 그 고난에 압도당하지 않는 성도들의 인내를 예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극심한 고난을 당하지만 신령한 기쁨으로 충만하고, 근심으로 짓눌리고 지쳐도 하나님의 위로로 인하여 기뻐 뛰는 성도들을 예찬합니다.
2. 동시에 우리의 본성적 감정은 경험에 적대적인 것들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에 대한 열정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난관을 무릎쓰고 애를 씁니다. 이와같은 갈등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21:18).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억지나 혐오감을 가지고 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순교는 별로 칭찬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큰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 해도 자기의 인간적 감정을 벗어버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내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가 자기 앞에 준비된 피의 죽음을 생각했다면 두려움에 압도되어 빨리 도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서 부르셨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이런 두려움들을 억누르고 주저함이 없이 아니 오히려 기쁨으로 순복할 수 있었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대한 큰 경외심과 무한한 복종으로 채우려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반대되는 경향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이 닥쳐오고 마음에 큰 시련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역경은 언제나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는 치료를 위해서 애통하며 부르짖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에 짓눌릴 때는 외로움과 슬픔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불명예를 당하거나 멸시를 모욕을 당했을 때는 마음에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친구들의 장례식에 참석해서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4. 그러나 우리는 항상 다음의 위로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슬픔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뜻에 순종하자” 슬픔, 탄식, 눈물의 고통 속에서라도 우리는 위의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면 폭풍이 우리의 머리위로 지나갈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요21:18)
XI.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합니다.
1. 지금가지 우리는 십자가를 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철학자의 인내와 크리스천의 인내의 차이점을 간단히 증거 하겠습니다.
극소수의 철학자들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높은 경지의 이해에 도달하였습니다. 심지어 그와 같이 이해하는 사람들도 포기가 필요악이라는 것이라는 이유 외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소용이 없으니 순종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만일 우리가 필요성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로부터 도피하자마자 복종을 중단할 것입니다.
2. 성경은 다른 빛, 즉 첫째 공의와 공평성이라는 관점에서, 둘째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권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이나 추방이나 투옥이나 책망이나 질병이나 가족의 죽음이나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참화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없이는 발생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하게 일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짓는 무수히 많은 죄는 지금까지 긍휼로 내리신 징계보다 훨씬 더 많은 징벌을 받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적 충동이 우리에게서 최선의 것들을 빼앗아 가고 우리를 방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육체가 굴복되고 우리는 멍에에 길들여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불평이나 반역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필요성에 복종해야 한다는 철학자들의 냉혹한 말장난에 더 이상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불순종하는 것이 그릇되기 때문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생동감 있고 효력있는 호소를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인내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로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유익하고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우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증진시키신다고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만일 역경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우리는 감사한 마음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역경을 인내로 잘 감당하면 우리는 필요성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에 복종하는 셈이 됩니다. 이와같은 논의의 결론은 우리가 십자가를 더 많이 질수록 영적 기쁨이 더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에는 반드시 뒤따릅니다. 주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는 오직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한 마음에서 솟아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성령의 기쁨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물리치십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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