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Anabaptism)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시기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운동 단체였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성인에게만 세례를 주었다. 재세례파 라는 명칭은 그들을 반대하는 이들이 붙여 준 비난의 명칭이었지만 세례만을 가장 기본적인 논쟁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시행 정부가 교회 개혁에서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그들의 증대되는 확신이었다. 1523년 후반기에 취리히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강력한 논쟁이 있었다. 그 당시 시의회는 신학자들이 믿는 성경에 의하여 요구되는 종교적 변화를 강행할 의사가 거의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취리히의 개혁자인 쯔빙글리는 이러한 태도를 취하였다. 아니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독교 공동체가 의회의 입장을 무시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운동을 시작해야 하는가 ? 쯔빙글리의 과격한 제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했다. 논란이 되는 문제들(미사,세례,십일조)을 계속 토론했지만 두 파의 사이의 차이는 더 커졌다.
결국 1525년 1월 21일 완전히 분열하고 말았다.그날 취리히 시의회는 급진주의자들의 모임과 그들이 그들의 견해를 퍼뜨리는 것을 금하였다. 그날 저녁 급진주의자들은 Zolikon의 근처 마을에 모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시며 그들에게 자비를 나타내시기를 기도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이렇게 해서 현대 최초의 자유교회가 생겨났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법적이었지만 재세례파 운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럽 전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재세례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은 그들 자신이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지 부분적으로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선교사라고 생각했다. 재세례파는 조직적인 전도를 위해 유럽을 여러 지역으로 나눈 후 그곳에 두 명 혹은 세 명씩 짝을 지어 파송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를 듣고 당황했고 어떤이들은 경건하게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다. 1524-25년의 농민전쟁 뒤에 나타난 신비주의와 중세 후기의 금욕주의 그리고 환멸주의는 재세례파의 길을 예비해 준 것들이었다. 1520년대 후반기에 재세례파는 멀리 네덜란드,모라비아,티롤,멕클렌부르그 같은 지역에도 존재하였다.
재세례파는 쉴라이타임에서 1527년에는 신교 종교개혁의 최초의 대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채택된 형제연합 은 대단히 중요한 문서가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유럽 전지역에 살고 있었던 대부분의 재세례파는 그 문서가 명시해 주고 있는 신앙 내용에 동의를 표하게 되었다. 1540년경 전체적 운동의 특징을 드러낸 신앙 단체가 생겼다. 이 신념들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제자도 (discipleship)라고 불렀던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내적 경험과 교리의 용납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깨달은 바대로 제자됨의 결과는 폭 넓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그들은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다.왜냐하면 산상수훈 가운데 잇는 예수의 분명한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그들에게는 참을 말함에 있어서 어떤 단계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두번째 원리는 사랑의 원리로서 이것은 첫번째의 원리로부터 논리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재세례파가 아닌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온화함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들의 박해자들에게 대적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강압 정치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사랑의 윤리는 재세례파 공동체 내에서도 상호간에 도움을 주거나 부를 재분배하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모라비아 재세례파는 일부가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교회에 대한 재세례파의 신념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단순한 개혁에 흥미가 없었고 활기차고 신앙이 훌륭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권위에 대한 회중적인 견해를 상세히 설명했는데 루터와 쯔빙글리도 개혁 초기에 그러한 경향을 띠었었다. 회중의 모든 구성원은 참된 신자여야 하며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의견 결정은 전회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또한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분리되며 사회가 기독교화된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개혁자들은 재세례파가 신교의 설교를 방해하며 그들의 교구민 중에서 가장 열심있는 자들을 미혹시킨다는 소식이 퍼지자 크게 놀랐다. 개혁자들은 또한 신앙뿐만 아니라 생활을 강조하는 재세례파의 주장이 오직 믿음 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도 관심을 표명햇다. 재세레파는 그들의 윤리적 가르침이 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에 대한 필수적 표현이라고 항의햇으나 허사였다. 신교와 카톨릭 양쪽에게 똑같이 재세례파는 위험한 이단인 동시에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 세기의 다음 25년간의 대학살 시기에 수천명의 재세례파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고, 수천 명 이상의 재세례파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철회함으로써 생명을 건졌다. 재세례파에 대한 당국의 박해는 1530년대 중반에 일어난 뮌스터 반란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듯 했다. 1534년 경 천년왕국을 기대한 일단의 재세례파 신자들이 베스트팔리아에 있는 감독도시 뮌스터를 장악하엿다. 주교가 군대를 모아 그 도시를 포위하엿을 때 재세례파는 무력으로 그들 자신을 방어하였다. 포위 공격이 계속됨에 따라 보다 더 극단적인 지도자가 통솔하게 되었다. 뮌스터의 몇몇 지도자들은 새로운 계시를 받는 선지자적 권위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윤리가 여전히 적용된다고 주장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일부다처제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뮌스터에서 주장된 많은 주요 원칙들은 교회의 전형적인 주장이었다.
뮌스터 진압의 영향으로 기가 꺽인 낮은 라인 지역의 재세례파는 메노시온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새로운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전에 사제엿던 그는 북부 유럽에 흩어져 살던 재세례파의 모임을 찾아다녔고 야간의 설교를 통해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평화주의를 가르쳤다. 다른 재세례파 신자들은 티롤과 모라비아 같은 동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알프스 지역을 따라 동쪽에서 티롤까지 말씀을 전파했던 초기의 선교사는 죄르그 카야곱이었는데 그는 성인으로서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인물이었다. 티롤 지역의 카톨릭 당국은 그들을 심하게 박해했으며 많은 재세례파 신자들은 모라비아의 몇몇 예외적인 온건한 군주의 통치 지역으로 피난을 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브루터호프라고 불리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된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부분적으로 그들은 초기 사도 시대의 공동체와 같은 형태를 따르는 데 목적을 두엇으나 또한 실제적인 이유도 추구하였다. 그들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형제애가 자기 자신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쟈콥 후터의 지도 아래 강화되어진 그들의 단체는 후터파 로 알려지게 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로는 세 단체가 정리된 공동체로 생존해 갈 수 있었다. 즉 스위스와 남부 독일 지역의 형제파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메노파,모라비아 지역의 후터파이다. 수세기를 거치면서 그 후손들은 재세례파의 특징 중 많은 부분을 상실하였다. 순수성을 되찾는 가운데 그들은 율법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단순히 생존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들은 복음적 열심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우수한 농부, 선한 사람, 땅의 조용한 사람들 로 알려 졌다. 19세기가 될 때까지도 그들은 부흥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1970 년대에 급속히 성장하였다. 1950년부터 1975년 사이에 메노파의 수가 두 배로 증가하여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도수가 48만 명에 달한다. 많은 메노파 신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종교개혁 속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 자들로 만들었던 영적 활동력과 복음적 열정과 급진적인 제자도를 다시 되찾아 줄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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