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병고침에 대한 성경적 인식을 새롭게 하자 - 손기철 장로에게 드리는 글

수호천사1 2014. 5. 24. 07:36

병 고침에 대한 성경적인 인식을 새롭게 하자


병은 인간에게 극복해야할 과제입니다. 누구나 병이 들었으면 고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하실 때 사람들의 절실한 이 병의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오는 모든 병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일일이 고쳐 주셨습니다.


교회가 오늘날 성도들의 병을 어떻게 치료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숙고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병고침에 대하여 몇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죄를 짓지 말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말씀과 간구함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시대와 사도 시대의 성경에 기록된 병 고침은 표적으로서의 병 고침이었습니다. 표적은 하나님(예수그리스도)이심,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은 사도됨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은 중풍병자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온전하게 되며 문둥병자의 피부가 즉석에서 깨끗하게 되며, 죽어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사람이 살아 일어났습니다. 소경된 자에게 진흙을 바르니 온전한 눈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를 즉석에서 일으키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옷깃을 스쳐도 병든 자가 낫기도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표적으로서의 병 고침이었습니다. 표적의 목적은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증명, 하나님 말씀( 복음 )임을 증명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직접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시고 계심을 몸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보이시고 천국에 돌아가심을 보임으로서 그의 성자 하나님 됨을 증명하는 일을 완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표적을 행할 권능을 주시고 각종 표적을 행함으로서 그들이 사도됨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 눅 9 : 1 )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 고후 12 : 12 )


그리고 마침내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66권이 확정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66권은 바로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 그분의 구속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서입니다. 이 증서 말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는 것은 어떤 다른 것도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못 믿으니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한다면, 그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서 선택되지 못한 백성일 뿐입니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며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 살후 2 : 10 )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 세대에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며,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마 12 : 39 ) 라고 하시는 말씀은 부활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 막 8 : 12 ) 하시며 표적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말해 주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 마 16 : 4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 마 24 : 24 )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 살후 2 : 9 )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 계 19 : 20 )


이와 같이 표적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징표로서 성도들이 경계하여야 하고 분별해야 할 것으로서 성경은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표적을 완성하였으며, 사도들은 정경을 완성함으로서 하나님 말씀의 증명을 완료하였습니다. 표적이 더 이상 존재할 목적성이 없어진 것입니다. 사도 시대를 넘어 서신서의 시대로 감에 따라 현저한 표적의 빈도수가 줄어드는 것은 바로 목적성의 소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정경 )이 거의 확정이 되어 가는 시대에 살았던 마지막 사도 바울은 그의 육체의 가시를 고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나았던 표적을 일으켰던 바울이 그의 동역자들의 병을 표적적으로 치료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도 시대를 넘어 서신서의 시대로 감에 따라 현저한 표적의 빈도수가 줄어드는 것은 바로 목적성의 소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 빌 2 : 27 )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 딤 5 : 23 )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 딤후 4 : 20 )


그러므로 오늘날 병고침은 표적으로서의 일어날 수가 없다고 봅니다. 표적으로서의 병고침은 현장에서 즉시적으로 증명하여 보인다( demonstratively manifest )라는 성격을 띱니다. 그런데 오늘날 강단에서 병고침을 즉시적이며 표적적으로 행하여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해보이는 의도로 행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지도 않을 것이고, 결국 거짓 병고침으로 끝날 것이며 표적을 보이려는  그는 거짓 표적을 행한 거짓 선지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병을 방관하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 절대로 그렇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병자들과 함께 사시다시피하며 병자들에게 관심을 쏟고 하나 하나 마다하지 않으시며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병에 대하여 얼마나 긍휼의 마음을 쏟았는지는 사복음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곧 성령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 성자 하나님의 마음과 다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을 견인하고 병을 치료하는 임무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성령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고 전지 전능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에 내주 하시며 그의 인생을 도와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령님의 성도에 대한 역사하심은 그의 영혼의 구원이 제일 목적이 됩니다. 성령의 모든 역사는 바로 이 구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도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과정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병의 치료가 성도의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많은 믿음의 일꾼들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병들어 죽는 경우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 하나도 선교지에서 병이 들어 40대의 나이에 운명하였습니다. 신실한 주의 종들도 암이라는 병으로 명을 다하지 못하고 하늘 나라로 가는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인 일본은 평균 수명이 80세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병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병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영혼의 구원 문제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절대적인 목적은 영혼의 구원에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병들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의 중요한 포인트는 성령님의 생각과 같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병 없이 잘사는 일( VISIBLE WELLBEING )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구원 받느냐 아니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병 고침은 사역의 부수적인 일에 해당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성령님의 치료하심은 시간과 공간과 방법의 제한성을 갖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요란한 음악과 주문(방언)으로  집회에 불러내어 사역자의 영적 중매행위를 통하여 그들을 치유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성령의 자의성과 무제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프리카의 정령 숭배자들의 음악과 춤으로 초혼하고 병을 치료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자유성, 무제한성, 지배권을 구속하는 일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다른 나라에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가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구역 식구가 병이 들었을 때 서로의 중보적 기도로서 병이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병든 성도가 과거의 거룩하지 못한 생활을 청산하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생활을 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병든 한 성도가 목사님의 안수 기도에 의하여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나며 교회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의 목적인 교회의 덕을 이루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병고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안수하여 병든 자가 낫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은사라는 것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신유의 은사는 표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병을 다룰 줄 아는 은사( talent : 재능 )를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람이 그야말로 나름대로의 치료 행위를 하여 치료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신유의 은사를 어떤 병 고침의 표적을 행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병든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볼 줄 아는 사람이며, 그의 영을 바로 세워주고 마음을 치료하여 그의 육신도 치료될 수 있도록 하는 영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병을 치료함에는 반드시 영적인, 정신적인, 감정적인 치료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유의 은사를 받은 자는 긍휼의 마음이 풍성하고 다른 사람의 영적 정신적 상태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교회에 의사와 한의사나 기타 자연 치유적 치료의 재능을 가진 사람도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안수하였는데 병을 고치지 못하였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으며 그를 은사가 없는 사람으로 매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은사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대상자가 신령한 은혜를 받도록 하는 일입니다. 아픔 가운데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이며, 오히려 기쁨가운데 아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유의 은사가 아니겠습니까 ?


성경은 병을 고치는 모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약 5 : 14 ) 기름을 바른다는 행위는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있어서는 치료 행위의 하나로 보았을 때, 오늘날의 의료 행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유의 집회에서 보는 바의 병 고침 행위는 성경에서 말하고 권고하는 병고침 행위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소위 신유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대중적인 집회 속에서 병자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이려 하며 표적적으로 이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보이는 병 고침은 반드시 100% 치료율을 보이며 실패가 없다는 것을 가장하려고 합니다. 필자는 많은 병든 성도들이 신유 집회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한 경우, 집회 당시 치료를 받았지만 나중에 그 병이 원상태 그대로인 경우등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유를 사역의 중심으로 두는 교회들이 대부분 불건전성에 빠지고 마는 것을 봅니다. 김 계화의 할렐루야 교회, 이 재록의 만민중앙교회, 김 기동의 성락교회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봅니다. 또한 신사도 운동가들이 자신을 (신)사도로 자칭하며 사도시대와 같은 표적적 병고침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 병 고침들의 많은 부분에 사위성, 작위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신유 집회에서의 소위 신유은사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화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역자가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려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으로 종결 짓고 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역자를 자고하게 만드는 기회만 제공합니다. 신유의 은사자들이 많은 대중을 끌어 모으는데는 성공하지만,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드는데는 실패하고 있으며, 결국 그들을 은사(신비)주의에 열광하게 하고, 기복주의에 빠지게 하며, 사역자 자신도 부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은사의 집행의 제일 요건은 겸손입니다. 병 고침의 은사 받은 자가 수만 대중을 모아 놓고 수없는 사람을 강단에 쓰려뜨려 놓으며 거대한 표적을 일으키는 듯이 모인 사람들에게 보이려하는 것은 결국 그를 자고함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 사역자의 겸손이 있을 수 없으며 겸손이 없는 집회에 성령께서 임재하실 리 만무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병든 자의 집( 병원 )을 찾아가, 비통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그를 안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병고치는 은사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병든 자를 위하여 한번의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으며 기도를 계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겸손과 진정성 그리고 섬김이 없는 은사는 거짓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거대함, 많음이 아니라 순전함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목자의 자세는 한 마리 잃은 양에 대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소위 신유의 은사를 가졌다하며 그것을 선전하고 교회의 수적인 증가를 위해 이용하는 것은 심히 비성경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점쟁이 무당들이 자신을 용하다고 소문내며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과연 그렇게 하여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하는 것과 많이 모인 사람들로부터 거둬드린 돈을 가지고 큰 교회를 짓고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 7 : 21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마 7 : 22-23 )

 

그가 진정으로 치유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아픈 사람들이 많이 사는 쪽방촌, 복지 시설, 정신 병원, 병원, 농어촌 지역, 복지 아파트촌등 의료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거나 치유를 절실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며, 그들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치유 사역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 하나 치유하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택하신 백성들이 구원받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공을 들이고 성자 하나님의 피를 흘려서까지 이뤄 놓은 복음을 잘 배우고 가르쳐서, 그 말씀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말씀을 잘 가르치고 지켜 행하게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 혹은 그렇게 하는 척하고 ) 실은 신유의 은사를 내세워 교회의 수적 팽창에 주력하고 신유자의 금력과 권위를 높이고 있는 상황으로 흘러가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 28 : 20 )


출처 : 바른교회 바른신학 바른믿음
글쓴이 : 푸르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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