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이 마지막 때는 아니다
지금이 말세 중의 말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예수님 이후 모든 시간이며,
역사적 ․ 영적 ․ 미래적 입장에서 균형있게 이해돼야 한다.
박수암
장신대 신약학 교수
이 시대는 말세 중에서도 말세라 여겨진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보여지는 급속한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운송수단의 고속화는 다니엘서 12장 4절의 말세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이스라엘의 회복(눅 21:24), 지진, 기근, 내란(쿠데타), 전쟁, 기독교 박해, 오염, 공해의 증가 등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마24장, 막13장, 눅21장),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확증된(계6장, 8~9장, 16장) 말세의 징조들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확실히 마지막 때임을 알리는 묵시적인 징조, 물리적 ․ 기술적 ․ 생태학적 ․ 경제적 ․ 사회학적 ․ 영적 ․ 교회적 ․ 정치적인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는 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만이 마지막 때라고 보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무리가 있다고 본다.
성경의 종말은 그리스도 중심이다
성경은 종말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메시아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때를 마지막 때로 이해했다. ‘그날’(호 2:16~23), ‘그때’(사 35:5), ‘말일’(사 2:2, 미 4:1), ‘여호와의 날’(암 5:18), ‘그후에’(욜 2:28), ‘말세에’(행 2:16), 등은 모두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종말’(End)의 때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자체가 종말적인 사건이요, 말세가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때를 종말의 때로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6). 부활은 종말에 가서 하나님 나라가 왔을 때에 일어나는 사건인데(단 12:2), 이런 사건이 벌써 예수 시대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재림의 임박함도 말씀하셨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막 13:30).
이 말씀들에 나타난 재림의 임박성은 문자적 ․ 연대기적 견지에서 나타나는 임박성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예언적인 견지에서 자신의 재림과 현세 사이엔 극히 짧은 시간의 간격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무도 종말적인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시간과 비교할 때 재림시까지의 인간의 시간은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 중 얼마가 살아있는 시간에 해당하며, 예수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의 시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의 시한부 언급이 문자적인 언급이 아님은 예수님의 다른 말씀들을 고려해볼 때 확실해진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7~8).
여기 첫번째 말씀에서 예수는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모르며, 그러기에 자신이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어떤 이들이 죽기 전에” 혹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라고 한 말씀들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님을 보인다. 두 번째 말씀에서 “속히”란 말이 신자들의 믿음이 식어질 만큼의 오랜 세월이 지나는 것을 포함하는 “속히”란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은 말세적 징조가 농후해졌다 해서 오늘 이 시대만이 마지막 시대라고 보는 견해를 불가능하게 한다. 마지막 때는 예수 시대부터 시작되고, 현재에는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완성될 때인 것이다.
예수님 이후 모든 시대가 말세
이상과 같은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 이해는 초대교회의 종말 이해에서도 보여진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자신의 때를 예수의 재림이 임박한 때라 생각한다(살전 4:14~18). 그는 자신과 많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살아서 재림하시는 예수를 맞이할 줄로 생각했다(살전4:15).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생각하는 종말의 때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 오는 때임을 밝힌다(살후 2:3). 그는 자신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언급했던 임박한 재림의 때가 배도하는 일이 생겨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사건을 포함하는 때라고 해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마지막 때가 어떤 한 시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때로부터 시작하여 재림시까지 반복하여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의 때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라 하였다(벧전 4:7).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는 이 마지막 때가 다소간 오래 계속될 것을 전망한다(벧전 4:12, 벧후 3:3~4). 이러한 사실은 ‘말세’가 어느 한 시간의 지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모든 시간들을 가리키며, 이 시간들에는 말세의 징조가 순환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세징조는 순환적으로 반복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들을 “반드시 속히 될 일”(1:1),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1:19), “이후에 마땅히 될 일”(4:1)이라 한다. 여기서 ‘속히’란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풀이되어야 한다. 그것은 요한 당시의 입장에서 미구(未久)에 될 일과 장차 될 일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것은 시대사적(역사적) 입장에서, 교훈적(영적) 입장에서, 그리고 예언적(미래적)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하는 말이다.
계시록은 “미구에 발생하기 시작할 일들과 세상 끝의 일들과 및 내세의 일들을 포함하는 예언이다”(Greijdanns). 묵시가들은 시간을 양적인 면에서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보았다(바룩2서 17:1, 에녹2서 43:1, 2 등).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시대가 세상종말론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시대라는 자각에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 묵시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면 시간의 경과에 상관없이 그것이 곧 말세가 되었다는 표로 이해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모든 사건들은 요한 당시로부터 재림시까지의 신약 시대의 모든 시대들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요한이 자신의 시대를 보고 말세라고 한 것은(1:3, 2:6~7, 10, 20) 요한 이후 모든 시대에도 적용되는 것이며,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은 가까이는 요한 당시의 로마제국을 가리킨 것이었지만,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 재림 때까지의 모든 시대의 적그리스도 권력에게도 적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재림이 가까워짐으로 해서 나선형(spiral)의 점진적인 반복(progressive reiteration)이 이들 상호간의 관계라 할 것이다.
이상의 이유에서 우리의 마지막 때를 신약시대의 어떤 한 지점에만 한정 시키는 것은 바른 성경적 통찰이라고 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종말을 가져오셨기에 그 후에 재림시까지의 모든 시대는 언제나 마지막 때이며 말세인 것이다. 현대의 칼빈주의 신학자 리델보스(Hermann Ridderlbos)는 종말관에 있어서 주님의 초림과 재림을 서로 격리시키지 않고 그 둘을 일체시킬 것을 주장했다. 즉 주님의 초림 사역은 바로 장차 나타날 그의 재림의 선구자인 만큼 그 둘은 일체에 붙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점에서 신약 계시를 바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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