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를 따라 섬기라. 글 / 이상은 목사
(롬 12:6-8)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음으로 할 것이니라』
Ⅰ.서론
하루는 당나귀가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그 집의 강아지가 주인의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나귀는 은근히 샘이 났다. 자기는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강아지는 일도 하지 않고 피둥피둥 놀고 있다가 주인이 오면 온갖 아양을 부리며 그 품에 안겨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자기도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다. 주인은 마당에 홀로 앉아서 한가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강아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틈을 놓칠세라 당나귀는 주인에게로 얼른 달려갔다. 그리고 강아지처럼 자기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그 육중한 몸을 날려서 주인의 무릎 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가련한 당나귀는 불경죄로 그 날 주인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다.
괜스레 다른 사람을 흉내낼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강아지는 아양을 떨고 꼬리치는 것이 은사이고 당나귀는 일 잘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시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여러분은 어떤 은사를 받았는가?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라. 여러분, 재능과 은사의 차이점을 아는가? 예컨데 어떤 사람이 선천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이다. 재능이란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좋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것은 은사이다. 은사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영적인 선물이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분만 주시지 않고, 그 직분을 효율적으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사도 함께 주신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수의 일을 맡겼다고 가정을 해 보자.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맨손으로 일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신다. 목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연장도 함께 주신다. 톱도 주시고, 끌도 주시고, 대패도 함께 주신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첫째로, 은사의 다양성, 둘째로, 은사의 소중성, 셋째로, 은사의 섬김성에 관한 것이다.
Ⅱ. 본 론
1. 은사의 다양성 오늘 본문 6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똑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각 다르다. 예컨데,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은혜라는 큰 선물 보따리 주셨다. 그런데 그 보따리를 풀어 보니까, 그 속에는 각종 선물상자들이 가득 차 있다. 그 선물상자에는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 곧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준 선물이 들어있다. 그 작은 선물 상자의 이름이 곧 은사이다. 그래서 그 은사는 다양하다.
오늘 본문은 일곱 가지 은사를 열거하고 있다. 첫째 은사는 예언하는 은사이다. 둘째 은사는 섬기는 은사이다. 셋째 은사는 가르치는 은사이다. 넷째 은사는 권위 하는 은사이다. 다섯째 은사는 구제하는 은사이다. 여섯째 은사는 다스리는 은사이다. 일곱째 은사는 긍휼을 베푸는 은사이다.
첫째,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말씀했다. 둘째,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다. 셋째,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다.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다. 책이 따로 없었다. 따라서 교사 역할이 그만큼 소중했다. 넷째,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다. 욥의 세 친구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를 위로하러 왔다. 위로하러 왔으면 위로해 주어야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오히려 욥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말았다. 권위 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권위 하는 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다섯째,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된다고 말씀했다. 여섯째,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말씀했다. 다스리는 자는 본이 되어야합니다. 다스리는 자가 부지런해야지 함께 일하는 사람도 역시 부지런할 수 있다. 그저 팔짱만 낀 채 말로서만 지시하려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솔선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일곱째,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은 죄악 가운에 있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니다.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어느 은사가 더 나은 은사인가? 여러분은 어떤 은사를 받고 싶은가?
그런데 고전12장에는 은사들이 아홉 가지로 기록되어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은사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사는 이외에도 얼마든지 더 있을 수가 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는 의도는 은사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다양성과 더 나아가서 그 소중성을 강조하고 있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다는 것이다. 똑같이 소중하다.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가 아니고 받은 은사를 가지고 얼마나 충성했느냐는 것이다.
2. 은사의 섬김성과 자세 은사를 왜 주셨는가?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이다. 다른 지체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이다. □ 하루는 하늘나라 천사가 잠시 세상으로 내려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찾아서 그 손에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팔찌를 걸어주기 위함이었다. 천사는 자기가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팔찌를 걸어줄 아름다운 손을 찾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는 숲 속에 있는 한 외딴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그 집안에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천사는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저는 하늘나라 천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찾아서 그 손에 이 하늘나라의 팔찌를 걸어주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첫째 딸이 얼른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사님, 제 손을 좀 보세요. 얼마나 예쁜 손입니까? 제 손은 예쁠뿐만 아니라 이 손으로 늘 화원의 꽃을 만지기 때문에 제 손에는 아름다운 꽃향기도 난답니다."
그러자 둘째 딸이 질세라 이렇게 말했다. "천사님, 제 손도 좀 봐주세요. 얼마나 깨끗한 손입니까? 저는 제 손에 먼지만 묻어도 곧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로 제 손을 깨끗하게 씻는답니다." 이번에는 셋째 딸이 말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도 셋째 딸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소곳이 한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그래서 천사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셋째 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자매님, 자매님은 왜 아무 말이 없습니까? 자매님에게는 손이 없습니까?"
그러자 셋째 딸은 얼굴을 붉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사님, 제 손은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천사님에게 보여드리기가 민망스럽습니다. 저는 날마다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하기 때문에 손이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찬물에 빨래를 하다 보니 손이 얼어서 터진 곳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천사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러더니 그 천사는 얼른 자기가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팔찌를 꺼내서 그 셋째 딸의 손목에 걸어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섬기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일 것입니다." 그렇다. 섬기는 손이 아름다운 손이다. 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은사들을 살펴보면 다 섬기는 것이다. 예언하는 은사로 섬기고 가르치는 일로 섬기고 권위 하는 일로 섬기고 구제하는 일로 섬기고 다스리는 일로 섬기고 긍휼을 베푸는 일로 섬기라.
섬기되 섬김의 자세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섬겨야 한다. 3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팔자 타령하지 말라. “아니고 내 팔자야!” * 부모를 잘못 만나서 * 내가 공부만 좀 했더라면 * 저놈의 영감테기만 안 만났으면... *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그런 생각은 지금에 와서 여러분이 할 생각이 아니다. 겸손은 무엇인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주제, 자기의 분수를 잘 지키는 것이다. 자기의 위치에서 묵묵히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루스벨의 문제점 (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그가 앉고 싶고 오르고 싶은 자리는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3절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았다.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았다.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적게 받은 달란트 때문에 끝내 불평만 하고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사장시켜 버렸다. 땅 속에 파묻어 두었다.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지나치게 平價切下 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를 받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했느냐를 물으신다.
구두수선공 무디 - 무식 한번 설교하는데 문법이 45번이나 틀리게 말했다. 무디는 설교 후에 어느 신자에게 날카로운 지적을 받았다. 목사님, 오늘 설교 중에 문법이 몇 번이나 틀리게 말했는지 아시나요? 무려 45번이나 틀리게 말했습니다. 무디가 그 말을 듣고 정중히 사과했다. “제가 문법을 틀리게 말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렇다면 선생님, 선생님은 그 틀림없는 문법 실력을 가지고 몇 사람이나 예수님을 소개했고, 몇 사람을 개심 시켰습니까?“
그렇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속상할 이유가 없다. 마음에 상처를 받을 이유가 없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일에만 힘쓰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섬김의 자세요 지혜이다. 하루는 인도의 수녀 테레사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수녀님, 수녀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돕지 않고 자기만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속상하지 않습니까? 그때 테레사 수녀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 "허리를 굽힌 채 일하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겨를이 없답니다." 교회는 일하는 종이 필요한 집단이지 지도자가 필요한 집단이 아니다.
일꾼 필요하다. 지도자는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우리가 존경할 사람이 없어서 목사를 세우고 수석장로를 세우는 것 아니다. 그게 그리운 사람은 밖에 가서 자기성취를 하라. 국회의원에 도전하고 별을 따 장군이 되든지 회사를 경영하여 회장이 되시든지 학교를 세워 총장이 되시든지... 왜 교회 와서 가오를 세우고 왜 교회 와서 거드름을 피우려 하는가? 다 종이어야 한다. 다 그리스도의 노예이어야 한다. 다 그리스도의 몸종들이어야 한다. 그 이상은 아무도 필요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목사들은) 그들의 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주님보다 그들 스스로를 높인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회심하지 않고 목사에게 회심한다.
옛날 평양의 산정현 교회를 시무하셨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의 겸손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하루는 장로님께서 마산에 있는 문창교회를 찾아가셨다. 그 당시 그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주기철 목사님을 자기교회로 청빙해 오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다. 고당 조만식 장로님께서 오산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그 학교 학생이었다. 그런데도 노 장로님은 젊은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장로님, 편히 앉으십시오." 목사님의 말에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전에는 목사님이 학생이셨고 제가 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귀하신 종이 되었고, 저는 그 종을 받들어 섬기는 장로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편좌하라 말씀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노 장로님의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이었다. 목사님은 장로님의 겸손에 너무나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장로님의 권유에 따라서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하게 되셨다.
어느 주일이었다. 장로님께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다. 그래서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그만 예배시간에 늦어졌다. 장로님은 부랴부랴 교회를 뛰어왔지만 이미 예배가 시작이 되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장로님은 조용히 자리를 찾아서 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다 마시고 장로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노 장로님에게, 그것도 옛 스승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님은 그 말에 그대로 순종했다. 설교가 끝났습니다.
목사님께서 다시금 장로님에게 말했다. "장로님, 앞으로 나오셔서 기도하십시오." 장로님께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울먹거리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죄인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죄인이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면 설교하던 도중에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울먹거리는 장로님의 기도를 듣고 모두가 울었다. 목사님도 울었다. 성도님들도 울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똑같이 칭송을 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요, 그 목사에 그 장로로다."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할 겸손이 이것이다.
둘째로,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다. 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온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는 서로 협력한다.
♧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졌다. 발에 멍이 들었다. "발아! 네가 잘못했으니까, 너 혼자 책임져."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눈으로는 발이 어디를 상했는지 얼른 살펴보자. 손으로는 만져준다. 약을 발라준다. 입으로는 "호~"하면서 불어준다. 이와 같이 우리 몸 속에 있는 지체들은 서로 협력을 하면서 같이 고통을 당한다. 지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붙어있다.
그러면서 그 기능을 발휘한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지면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예컨대 우리 팔이 자기를 너무 과대 평가를 했다고 치자. "이까짓 몸에 나는 붙어있을 수가 없어." 그러면서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각 지체이다. 우리는 교회를 떠나면 그 순간 우리는 쓸모 없는 시체조각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 그래서 [사지 백체]라는 말을 쓴다. 많은 지체가 있지만 인체는 서로 유기적이다. 싸우거나 다투지 않는다.
하루는 우리 얼굴에 있는 입과 코와 눈이 서로간에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었다. 말 많은 입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야, 나는 음식을 넣어주는 일을 하고, 말도 하는데 왜 너희들보다도 언제나 맨 밑에 위치해 있어야 되는 거야?" 그러자 코가 이렇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숨도 쉬고, 냄새도 잘 맡고, 생긴 것도 오똑하게 잘 생겼지만 기껏해야 얼굴의 중간에 위치하는데." 그러자 눈이 우쭐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그런 말들 하지 마. 내가 너희들보다 위에 있는 이유가 다 있어. 내가 없어 봐. 너희들은 단 한시간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을 거야."
그러면서 그들의 시선이 불현듯 눈 위에 있는 눈썹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언짢다는 듯이 이렇게 눈썹에게 물었습니다. "어이, 눈썹 친구! 자네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리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잘난척하면서 뻐기듯이 있어?" 그러자 눈썹이 이렇게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 말이 맞아. 나는 언제나 중요한 일들을 하는 너희들 앞에서 늘 미안한 심정으로 그저 내 자리를 열심히 지키고 있을 뿐이야." 눈썹이 쓸모가 없는가? 눈썹을 밀어보라. 지붕 없는 집 같다. 처마 없는 집 같다.
눈썹은 우리 눈 위에 작은 산맥처럼 옆으로 뻗어나 있다. 1) 차양 2) 먼지받이 3) 땀받이 어디 그뿐인가? 눈썹은 그 이상 자라지도 않고 짧아지지도 않는다. 항상 그 길이를 유지한다. 예컨대 이 눈썹이 머리카락처럼 계속해서 자란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 눈을 덮어버리고, 입을 덮어버리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은 서로 유기적이고 협조적이다. 그래서 한 몸을 이룬다.
□ 인체에 대하여 1. 눈의 근육은 24시간 동안 약 100,000번 움직인다. 2. 눈을 한번 깜빡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1/40초이다. 3. 모든 인간은 코에 극소량의 철(Fe)을 가지고 있어서 커다란 자장이 있는 지구에서 방향을 잡기 쉽도록 해준다. 빛이 없을 때 이 것을 이용해서 방향을 잡는다. 4. 두개의 콧구멍은 3 - 4시간마다 그 활동을 교대한다. 즉 한쪽 콧구멍이 냄새를 맡는 동안 다른 하나는 쉰다. 3. 혀에 침이 묻어 있지 안으면 절대로 맛을 알 수 없고, 코에 물기가 없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다.
6. 단어 한 개를 말하는데 650개의 근육 중 72개가 움직여야 한다. 7. 재채기는 시속 160Km의 속도로 퍼지는데, 이는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보다 훨씬 빠르다. 8. 인간의 혈관을 한 줄로 이으면 112,000Km로서 지구를 두 번 반이나 감을 수 있다. 피가 몸을 완전히 한바퀴 도는 데에는 46초가 걸린다. 9. 자동차를 만드는 데에 13,000개의 부품이, 747제트 여객기를 만드는 데에 3,000,000개의 부속품이,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데에는 5,000,000 개의 부속품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 인간의 몸에는... * 10.000.000.000.000 개의 세포 조직이 있다. 셋째로, 우리가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4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한국의 전황을 살피기 위해서 부랴부랴 한강 인도교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쌍안경을 가지고 인도교 건너편의 형편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미 이때는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있었고, 강 건너편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강 건너편을 보게 된 맥아더 장군의 눈은 문뜩 강 이쪽편에 서있는 부동자세의 군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가 탄 지프차를 타고 이 병사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병사에게 물었다. "왜 끊어진 다리 앞에 서 있느냐?" 이 병사가 대답했다. "이것이 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언제까지 여기 서있을 작정인가?" 이때 이 병사는 부동자세 한 자세로 대답했다. "새로운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입니다."
전세는 위급하고, 지휘 계통은 사라지고, 지휘관들도 도망하는 형편에서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데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는 이 병사의 투철한 군인 정신을 목격한 맥아더 장군은 감탄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이런 군인이 있는 이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는 그날로 당장 미군 병력의 출동 명령을 내리고, UN군이 참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전투를 뒤집어 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Ⅲ. 결 론
□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났다. 독일의 대학생들 여러 명이 영국으로 건너갔다. 독일군의 폭격에 파괴된 영국의 어떤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교회 앞뜰에는 예수님의 동상이 서 있었다. 본시는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동상의 밑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Come unto me (내게로 오라)." 그런데 예수님의 두 팔이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서 완전히 잘려져 나가 버렸다. 그래서 함께 의논을 했다. 이 동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예수님의 두 팔이 잘려진 채 그대로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그 대신에 밑에 적혀져 있는 글귀를 이렇게 바꾸었다. "Christ has no hands but ours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리의 손들만을 가지고 계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섬겨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어서 예수님의 섬김을 이어 받겠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가 가지신 것 중에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없다. 한가지도 없다.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 –눈, 팔, 손, 발, 심장 물과 피 진액 사랑 모든 것 이제는 우리가 드릴 차례다. 겸손 충성 양쭝 몸 마음 정성 사랑 순결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섬김의 삶이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셨다. 그리고 못난 우리들까지도 섬겨주셨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이 땅으로 오셨다. 말씀으로 우리를 섬기셨다. 기도로 우리를 섬기셨다. 병든 자를 고쳐 주시면서 우리를 섬기셨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기셨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 버려 피 흘려 우리를 섬기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계속해서 섬기고 계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삶은 철저한 섬김의 삶이다.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뜻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간에 이 직분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자.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하자. 겸손하게 섬기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려 우리를 섬겨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요 형제요, 자매들이다. 서로 아껴주면서, 사랑하면서, 존경하면서, 협력하면서, 기쁨으로 섬기자. 우리도 몸을 드려 형제들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자. 퇴계원교회 -ⓗ
|
'설교. 신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종교생활 아닌 신앙생활* (0) | 2014.04.30 |
---|---|
[스크랩] 기도, 믿음의 긍정 길* (0) | 2014.04.30 |
[스크랩] 계시록 오해와 편견 깨기 (0) | 2014.04.30 |
[스크랩] 다니엘 김 선교사 초청집회 1~3 (사랑과진리교회) (0) | 2014.04.28 |
[스크랩] 요한계시록설교를 자주하라 (0) | 2014.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