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기도, 믿음의 긍정 길*

수호천사1 2014. 4. 30. 13:16

예수가좋다오

기도, 믿음의 긍정 길

시편 28:1-9 / 양의섭 목사

 

[시편 28: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3.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4.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5.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8.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1. 어느 교회 청년부에서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회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의 기도는 너무 이기적인 기도였습니다. 앞으로 기도할 때에는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자신을 넘어서 부모님이나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설교 후, 청년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기도하는데, 한 자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자매는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그 동안 저는 자신만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저의 부모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무엇보다도 인품이 훌륭하고 재력이 있는 사위를 보기 원하십니다. 부디 좋은 사위를 맞이하여 그들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 행복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이게 누구를 위한 기도입니까?

 

2. 그러나 어쨌거나 기도에는 큰 권세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아마도 네 믿음대로 되리라 하신 예수님의 축복은 ‘네 기도대로 되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 그 기도에 하늘의 군대, 불 말과 불 병거가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서울노회 임원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중부 자바의 게까이 교단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방문길에 자카르타에 기도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자카르타 시내 한 복판에 28층의 빌딩, ‘City Loft’ 빌딩인데, 맨 위층에 두 개의 사무실을 어느 기독인 사업가가 사서는 기도실로 내놓았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이들은 찾아와 기도할 수 있답니다.

 

다만 개인기도는 그곳에서 하지 않는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전면 대형유리로 탁 트인 전망이 자카르다 시내가 다 내려다 보였습니다. 방에는 인도네시아 지도와 지구본, 그리고 신문과 잡지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유리 창에서 손을 들고 자카르타 시내를 바라보며 기도하고, 그 후, 인도네시아 지도와 지구본을 보며 인도네시아와 세계를 위해, 그것도 정치와 사회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기도 탑이 인도네시아에는 총 78개가나 있다고 합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도시를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데, 놀라운 일은 기도의 응답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답니다. 인도네시아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 현장에서 한국 목사와 장로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통성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기도탑 사역을 책임지고 있는 토니 물리야(Rev. Tony Mulia) 목사가 큰 감동을 받은 눈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자기들이 이런 기도의 열심을 어디서 배웠는지 아느냐고. 어디냐 했더니 그럽니다. ‘한국교회에서 배웠습니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기도, 구역예배 등등을 통해 그 기도 열정을 배웠답니다. 그야말로 한류가 인도네시아에서는 교회까지 거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뿌듯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곧 심한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왜? 오늘날 한국 교회의 기도 열정은 거의 사그라지지 않았습니까? 예전엔 교회마다 철야 기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하나님의 전에서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자녀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이들이 가득하였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가 되어 새벽 기도하지 않으면 부끄러워할 정도였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회 가는 이들로 새벽길이 채워졌습니다. 철야기도엔 교회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교회는 밤중, 깜깜합니다. 기도의 불길이 사그라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불을 다시 지펴야 합니다. 주의 전에 나와 기도해야 합니다. 성공하기를 원해서만 기도하십니까? 나라와 주의 복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을 원하십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뻗어나가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그것을 이룰 수 있을까요? 기도해야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역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들으시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기도의 불길이 치솟아 올라갈 때 내 소원하는 복과 역사도 함께 치솟아 올라갑니다. 기도의 힘을 얻을 때 세상사는 힘도 함께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잘 된다구요? 그거 두려운 일입니다. 그건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미끼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내 기도든, 남의 기도든 어쨌거나 기도를 통해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3. 믿음이 있는 긍정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믿음이 있는 긍정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어려움이 생길까요. 안 생길까요? 안 생기길 바라지만 생길 것입니다. 복받았음에도 아픔이 생길 것입니다. 안 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도리어 무너지는 듯한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삶의 현장이 펼쳐질 것입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시편은 성도들의 삶의 이야기, 노래, 기도문입니다.

어떨까요? 복받은 성도들의 이야기이니 신나고 좋은 일들만 가득할까요? 오늘 본문인 시 28편 앞에 있는 시편에서 추려보면 이런 기도문들이 나옵니다. “주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시3:1)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6:6-7) “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시7:1-2) “내가 주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시11:1-2) “주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시12: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13: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22:1-2)

 

이 정도 되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만날 대적들이 일어나 시비를 걸고, 약점을 찾고, 그런 분위기 때문에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수척해지고, 밤마다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며, 그럼에도 자신의 인생은 찢겨지기 직전의 종잇조각 같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분하고, 자신이 없고, ... 이런 현실이라면 뭘 바라고, 뭘 기대고 살겠습니까? 힘들고 지쳐서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시작합니다. “주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1)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그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아 자신의 삶이 매우 흔들리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심한 지진을 만난 것 같이 흔들립니다. 자신은 마치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암담하고 침울합니다.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3)

 

말하는 것은 지극한 화평이요 평화요 정의요 진리 같은데 실은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어 어떠하든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4)

 

얼마나 분한지, 저들이 행한 대로 저들에게 그대로 다 갚아주십시오 하고 유치할 정도로 기도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5)

 

얼마나 무례하고 교만한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역사들까지 파괴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되든, 가정이 어떻게 되든 자기감정, 자기주장만 실현되면 된다는 듯이 기존의 모든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무시하고 파괴합니다. 그러니 그걸 바라보아야 하는 시편 기자는 얼마나 힘들고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곧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합니다.

 

7절 이하, “주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주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비통함과 절망감과 깊은 한탄이 어째서 갑자기 이런 찬양으로 바뀌는 걸까요?

 

그 전환점이 6절에 보입니다.  “주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간구하는 소리, 즉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앞에도 그런 단어들이 나옵니다.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2절,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그렇습니다. 시편은 성도들의 삶의 노래, 삶의 애환이 그려진 기도문입니다.

 

시편을 묵상하다보면 자신의 이야기가 그곳에 적나라하게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시편이 탄원시입니다. 이 탄원시는 기막힌 눈물과 아픔과 불평과 고통, 절망으로 시작하는데 끝날 때에는 언제나 희망과 소망과 찬양, 감사로 끝이 납니다. 단순한 탄원, 아픔, 하소연, 신세한탄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시작하고는 결국 감사함으로 끝이 납니다.

 

비결이 뭘까요? 아무리 아프고 힘들고 어렵고 두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전에 찾아 나와 기도할 때 그 기도 중에 성령의 도우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시 18:4 이하,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4-6)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20:1-2)

 

여러분, 하나님의 성소, 성전, 교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서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이 그곳에서 기도를 할 때 반드시 하늘에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난 헌신과 축복의 새벽기도 첫날에 은혜를 나눈 것처럼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의 성전에서 만나주시고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외치셨습니다. “...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마21:13) 

교회당은 기도의 약속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이기에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일어서면 하나님과의 소통 속에 힘과 위로와 답을 얻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엔 출근할 때, 퇴근할 때 그 때마다 교회에 들려 기도하고 가는 이들이 많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새 예배당에 입당한 이후, 매일같이 오전 10시쯤 되면 나타나는 젊은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불쑥 나타나서 2층 기도실에 들어가더니 한 20-30분간 있다가 나오곤 합니다. 아마도 근처에 직장이 있는 젊은이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우리 예배당에 나아와 기도하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이인지는 모르겠는데 한가지는 분명한 젊은이 같습니다.

 

예배당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기도하는 집이란 사실을 분명히 아는 이였습니다. 아무리 믿음의 긍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삶의 현장에는 늘 돌부리가 있고,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암초가 있고, 걸림돌이 생기고, 생각지 못한 폭풍이 일어나고 두려움이 가증됩니다. 어떻게 할까요? 기도가 해결책입니다! 어차피 삶의 바다에 광풍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좀 더 기도합시다. 기도할 때 마침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광풍을 고요하게 하실 것이고, 물결을 잔잔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 은혜와 역사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 어느새?’하며 주님께서 우리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원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뭔지 아시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쉬지 말고 기도함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침내 긍정의 열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키입니다. 기도가 열쇄요 비결입니다. 기도가 살아있는 성도는 삶이 살아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고, 풍랑이 일어도 기도하고 간구하는 성도에게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하늘 권세가 주어질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 아무리 마음속으로 골백번을 외우고, 자기 암시를 하고, 다짐에 다짐을 하여도 기도가 따라오지 않으면 그 긍정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일 것입니다. 찾기 힘들 것입니다. 긍정이 부정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권세가 생길 것입니다. 올해 권사회에서 제일 먼저 기도 운동을 시작했는데, 111기도 운동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예배당에 나와 1시간 기도하기입니다.

 

오늘은 중보기도대를 모집하는 광고도 나갔습니다. 무엇을 하든 기도실로 들어가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조금 더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조금 더 평강과 감사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망하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가 있는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기도하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올해는 조금 더 기도합시다. 기도, 그것은 긍정의 역사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길입니다. 기도함으로 늘 긍정의 역사 한 복판에서 하나님 주시는 복을 누리는 복된 백성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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