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종교다원주의와 목회자의 자세

수호천사1 2014. 4. 11. 10:15

종교다원주의와 목회자의 자세




목 차

Ⅰ. 서론
Ⅱ. 종교다원주의의 역사
1. 종교다원주의의 정의
2. 종교다원주의의 태동
Ⅲ. 종교다원주의의 구심점과 오류성
1. 종교다원주의의 근거
2. 종교다원주의의 오류성
Ⅳ. 다원화시대의 목회자의 자세
Ⅴ. 결론 및 제언


* 참 고 문 헌 *

Ⅰ. 서 론
최근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기독교7와 다른종교의 관계문제가 크나 큰 논쟁거리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열렸던 감리교 제 19차 특별총회에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며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 감신대의 변 선환, 홍 정수교수가 총회가 총회로 부터 교수 및 목사자격 박탈을 결의 당함으로 해서 그 여파가 감리교단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전체에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며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는 역사속의 어느 요소도 절대적으로 보지 않는 이 시대의 흐름인 "상대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종교에 까지 마침내 이 상대성의 원리를 적용하려고하고 있다. 이같은 사상이 오늘 기독교에 까지 도입되었고 일부 신학자들이 이것을 수용하면서 마침내, 기독교도 이제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것으로 오인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현실의 측면에서 세계선교의 큰 몫을 담당해야 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은 이런 종교다원주의의 침투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가? 사실 이런 문제들로 이해 목회상의 하나의 걸림돌이 되어진 것은 사실이며, 만약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교회의 역활이나 필요성이 상실되게 되는 것이다.
세계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남에게 내가 다가서기 위해서는 분명 그들과의 접합점이 있어야 되겠고, 또한 그들의 문화나 종교에 대한 이해와 상호간의 대화가 필요한다. 그러나 이런 대화의 한계선을 어떻게 확연히 그어야 될 것이며, 그 책임을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종교다원화 사회에서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를 종교다원주의를 분석해 가며, 알아보기로 하겠다. 

Ⅱ. 종교다원주의의 역사

1. 종교다원주의의 정의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 관한 이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독교절대주의 (Christian absolutism)는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으로 기독교만을 참 종교요 절대종교로 믿는 것이다. 라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포괄주의 (inclusivism)는 기독교 절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절충하는 입장으로서 다른 종교나 타 문화권에 있는 경건한 사람들은 사실상 기독교인이므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라너(Karl Rahner)의 "의명의 크리스챤"(anonymous Christian)이나 파니카(Raymond Panikkar)의 "미지의 그리스도"(unknown Christ in Hinduism),큉(Hans kung)의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pre christian)의 개념이 그것이다. 그러면 종교다원주의는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종교다원주의 (religious pluralism)란, 진정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 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구원의 길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종교의 다원주의는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로 인식되고 있다.현대는세속화 시대인 동시에 종교부흥의 시대이기도 하며 아울러 혼합주의가 기독교에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화란의 신정동구의 선교학자 헨드릭 크래머는 1954년에 이미 "인류역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혼합주의에 직면하게 될 것인데 그런데 기독교는 혼합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혼합주의는 종교와 선교의 문제이다." 라 지적하였었다. 그는 1938년 마드라스 선교대회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노선을 따라 타종교에 대해 부정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그것은 허공은 치는 소리에 불과하고 세계 기독교운동에서 역사적 기독교의 뿌리를 흔드는 혼합주의에 가까운 종교다원주의가 등장하여 기독교의 독특성은 물론 선교를 휘협하고 있다.

2. 종교다원주의의 태동 
현대에 와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문제가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고 전통적인 기독교 절대주의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종교다원주의의 태동은 두가지 측면에서 추적될 수 있다. 그 첫번째로 지금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WCC의 종교연합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과 비교종교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를 재기했다. WCC안의 다원주의적 동향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한 제 2차 세계선교협의회 (IMC)에서 이미 폴(K.T.Paul)과 차오(T.C.Chao)에 의해서 나타났다. 이들은 기독교가 힌두교지역과 유교지역의 국민들과 함께 서구 세속주의에 저항해야 하는 공동적 사명을 위한 대화가 제시했었다. 이러한 제시는 20세기 후반기에 와서 세속주의와 손을 잡은 WCC의 세속주의 운동과는 달리, 세속화를 저항하기 위한 종교연합운동을 시도했던 것이다. 원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공인받게 되고 데오드시우스 황제치하(379-395)에서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로마제국과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왕국이 되었음벼 제국의 안정은 교회의 안정과 직결되고 제국의 적은 동시에 기독교의 적이 되었다. 이에 근거한 18.19세기의 기독교 선교 정책은 서구의 식민주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선교정책이었다. 서구의 군대가 동양의 나라들은 점령하면, 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기독교로 그 지역의 종교를 점령하는 정책이었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선교의 목적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전파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식민지정책이 종식되고 식민지들이 독립을 획득하게 되자 정복식의 선교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정부는 개종을 주 목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 그후 선교사들은 중국, 앙골라, 아랍세계등에서 동일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선교상황이 이론과 실제 영향아래,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는 공존의 논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한편, 두번째 이유는 과학의 발전에 의한 종교적 다원주의 태도의 촉진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콜롬버스, 마젤란 등이 기독교 세계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곳에 기독교와 상이한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역사, 인류, 과학연구가들은 인류의 기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세계의 다른곳에도 종교의 유형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동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자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문제가 긴급하게 일어났다. 특히 비교 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 종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Ⅲ. 종교다원주의의 구심점과 오류성.
1. 종교다원주의의 근거
일반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각각 다른 근거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일반적인 입장이 기초하고 있는 토대는 세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신념이다.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한 19세기 종교사학파의 트릴치(Ernst Troeltsch)가 이를 대변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으로 어느종교나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없다. 동양인에게는 불교와 힌두교가 동일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 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이 트릴치의 근본 신념이었다.
둘째,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신념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와 상황속에서 이일을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깊이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길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인것, 문화적인것, 시대적인것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모든 문화성과 우연성 배후에는 하나의 신, 즉 공동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 스미스 등이 이를 대변한다.
셋째, 모든종교는 공동의 심리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각 개인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과정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무의식 속에 기원을 가진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일부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써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이 그 대표자이다.
종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이 일반적인 견해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류 역사상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전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모든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그리스도아네 주어지 계시의 유일회성과 규범성 및 궁극성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거나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공동의 심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융의 주장은 종교를 지나치게 부관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예수의 유일회서을 부정하고 단지 여러 구원자 중 하나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비기독교적이며 비성서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는 일반대주을 비롯하여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학자들에게 직접,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유형의 종교 다원론을 주장한 개신교신학자는 영국출신의 장로교회목사로 현재 미국 클레마운트 신학대학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존 힉(John Hick)을 들 수 있다. 그는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규범과 모든 종교의 중심을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으로 전환하는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주장했다. 그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화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오직"예수안에서만 만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참으로" 만나질 수 있다는 식으르 기독교 전통신앙을 재 해석했다. 그 고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은 동일한 신을 섬기고 있다는 극단적인 견햬를 제시했다.
특히(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 God Has Many Names. 1980)라는 저서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힉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다른 신이 아닌, 동일한 신을 예배하며, 그 신은 여러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가 있으며, 기독교는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God)으로, 유대교는 아도나이(Adonai)로, 모스렘교는 알라(Allah)로, 힌두교는 라마(Rama)날 크리슈나(Krishna)로 부른다. 그러므로 힉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교리로부터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새로운 주장에로의 일대 전환을 제안했다.
이러한 힉의 견해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예배현상의 유사성으로 부터한 하나님의 개념을 이끌어 낸 것으로 다른 종교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힉 이외에도, 종교적 다원주의에 가까운 인물로 틸리히(Paul Tillich),스미쓰(Wilfred Cantwell Smith), 레이스(Alan Race), 사마르타(Stanley Samartha)등이 있다. 가톨릭 신학자로는 니터(Paul F. Knitter),파니카, 라너,큉을 들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 2차 비티칸공의회(1965)선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신도를 포함시키려 함으로써 포괄주의적인 입장을 공시적으로 천명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기 양신의 소리에 귀를 귀울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2. 종교적 다원주의의 오류성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유일한 참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점과 결정적인 오류는 무엇인다?
종교다원주의는 비성서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동시에 오류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성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끝에 그리스도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비성서적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면 세셰 인구의 70-80%에 달하는 비 기독교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이것은 한스 큉이나 감신대의 변선환, 홍성수 의 글에서도 입증된다. 큉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기독교 민족이 서구의 기독교 민족을 수적으로 훨씬 앞질러 각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를 생각할때도 당신들은 여전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라 반문했다. 변교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면 인류의 대다수는 신의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함으로, 기독교인만 구원 받는다는 기독교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큉의 주장을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했다. 홍교수는 "우리의 신은 제 자식만 사랑하는 편협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가? 아니면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자비를 베푸는 가없는 은총의 신인가?... 하나님께서 만일 무신론자나 이교도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와 같이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종교의 신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실제로 동일한 신이라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곤 한 성경말씀이 이를 입증한다(출 20:3, 23:24-25, 시 96:5,사 44:6-8).
둘째,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했다. 인간의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적인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전 1:21).
셋째, 종교다원주의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과 좁은 문을 넓히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생에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요 14:6),"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Ⅳ.다원화시대의 목회자의 자세
오늘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Post - Modernism)을 타고 들어오는 다원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에까지도 혼합주의와 다원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오고있다. 이러한 싯점에서 과연 목회자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는가?
현대의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신학의 형성이 되기도 전에 인접학문(심리학, 교육학,사회학, 행정학, 경영학 등)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랑한다. 그럴바에야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것이지 왜 목회자는 그 분야에 아무리 조예가 깊다고 해도 그것은 신학 외의 보조학문이며 어디까지나 그 분야의 '아마츄어'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의 다원화시대의 복회자는 그 인접학문의 지혜를 꿰뚫어 목회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잇는 신학적, 성경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학자들 중에는 목회하는 목사를 무식한 박수무당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목회자들 중에는 신학자를 신문의 가십란이나 읽고 외우고 다니면서 거창하게 떠들고 다니는 얼간이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양쪽은 다 목회 신학자(Pastor- Theologian)가 되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의 소용돌이는 목회와 신학사이에 문제점을 지니고 표류되고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목회와 신학의 장(場)은 교회이다. 그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이 무시되고 사념화되고 있다. 이런데서 파생하는 종교형상주의적 유사주의나 샤마니즘적 기복신앙 일변도의 목회 행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책임은 바로 이런 교회의 현실속에서 진리를 밝히고 기독교의 이단화의 길을 막아주고 세속화를 늘 경계하는 교육을해서 올바른 길을가도록 잡아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교단 신학교의 책임과 기능은 대단히 중요하다. 목회를 무시하고 신학행위는 이미 교회를 잃어버린 신학이된다. 신학이 없는 목회는 머리 없이 가슴만 뛰는 꼴이 되지만, 목회없는 신학은 몸 없는 머리와 같다. 그러면 죽은 것이 아닌가! 이제는 목회와 신학이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안에 들어와서 자기 자리를 지킬때이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 이 종교 다원화 시대에 정말 중요한 작업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의 신학 현실도 목회 현실 못지 않게 신학 아닌 신학이 난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분별한 수입신학의 사조에 얼마나 교회가 오염되고 있는가? 오늘 20세기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을 타고 다원주의(Pluralism)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다. 그 현상은 영국, 불란서, 남미 그리고 제 3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분야에 있어서도 건축양식, 문학, 예술,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 등 문화 전반에 퍼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저변에 흐르는 철학이나 비평양식들은 우리 삶의 방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절대 이념의 와해, 개성의 중시, 논리의 다원화, 다국적 기업 소수 민족 운동, 여성운동, 소유로부터 탈출 등, 이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성경의 하나님 신앙을 저버리는 배교가 되기 쉽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종교혼합주의(Sy - Mcretism)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 종교다원론 주장자들은 '기독교는 기독교로서, 불교는 불교로서 그 독특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유지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종교혼합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권능한 존재가 아니며, 삼손처럼 머리가 깍이지 않는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왜 확실한 길을 두고도 희미한 길을 가야 하는가? 왜 밝고 빛나는 길이 있는데도 어둡고 희미하여 분간할 수 없는 길을 갈려고 하는가? 예수께서 그런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가? 목회자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일찍이 예언적인 말씀을 하셨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Ⅴ.결론 및 제언
오늘날 세계 선교적 측면에서 기독교 전파와 교회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는 사회정의와 가난과 공해 등 사회 경제적인 차원도 무시할 수 없으나,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현상은 더욱 더 교회의 본질을 뒤 흔드는 것이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주장하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부인하게 되는 엄청난 파급효과가 마치 폭풍우와도 같이 밀려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서구 기독교 세계는 비기독교 종교가 기독교 선교로 말미암아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오히려 서구에 비기독교적 종교가 날로 번성하여 그야말로 종교의 다원화 시대로 일방통행적인 선교를 하던 시대는 이미 사라지고 선교의 쌍방 통행 시대가 되고 말았다. 토인비는 세계구원을 위하여 기독교와 동양종교가 혼합된 세계적 종교의 출현을 예견하면서 기독교만이 절대라는 전통적 서구적 신앙을 기독교에서 숙청해야 한다고 하였다. 종교의 절대주의는 정치의 독재만큼 현대인들이 증오하고 있다. 여기에 WCC의 일부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종교신학의 이름으로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하다가 종국에는 타종교에 구원을 부여하는 단계로 비약하였다.
성경은 물론 구원의 범위는 세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또 때로는 이스라엘 밖에도 특별한 계시를 주신 일이 있다. 그러나 반면 진리를 거짓으로, 참신을 우상으로 대처하는 이방종교와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아나테마"를 말하셨다. 복음주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성경의 진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종교는 진리를 억누르고 비진리로 대치한데 대해 유감을 표하지만 그러나 타종교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개인적으로 대화를 통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J.C 라일이 말한 것 같이 신자라도 성령의 열매를 보지 못할 때는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말을 명심하면서 신자는 개인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보이며 아울러 제도권의 교회는 항상 자체의 갱신에 힘뜨며 전도와 봉사가 함께 하는 통합적 선교로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참 고 문 헌

1) 유동식, 종교다원주의와 신학적과제 p.54
2) 변선환,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 현대사조 2, 1978, p.88
3) H. kracmer, "Syncretism as Religious and Missionary Problem",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43(July, 1954, p.253
4) 목회와 신학 1991, 8월호 포스트모던한 문화현상과 신앙고백 p.10
5) Hallencreutz C.F., Der Dialog in der Geschichte der kumenishcen Bewegung,
in:Dialog mit anderen Religionen, Frankfurt 1972, S.58.
6) Ernst Troeltsche, "the Place of Christinity among the world religions", John
Hick and Brian Hebbleth waite,ed. Christianity and Other Religions, p.27
7) see Christianity and World Religions,p.172(IVP, 1984)
8) God Has Many Names, p.50
9) The Second Christiantys, p.85-86
10) Mac Millan 1980.
11) 윤동식, 한국종교와 신학적 과제, p.28.
12) 존 힉, 종교철학(서울:종로서적사, 1980),p.206.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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