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원칙과 관계

수호천사1 2014. 3. 24. 22:27

원칙과 관계

레너드 스위트는 “관계의 영성 (Out of the Question...Into the Mystery)”이란 그의 저서에서
“관계란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하나님이 하나님다워지는 작업 그 자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더 많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른 관계를 위해 사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관계인 우리는 *원칙에 충실한* 부분은 좀 줄이고 대신 *관계*에 훨씬 더 충실해야 한다.“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원칙을 아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그는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경구절을 하나하나 외워 간다든가 그것들을 제대로 지키는지 점검받는 생활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축적된 하나님의 이야기들과 맺어 가는 관계의 총합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관계를 지키기 보다는 저마다 자기가 옳다는 바람에 교회가 세상 문화에 대해 신뢰를 잃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내 입장이 옳고, 내 판단이 옳고, 바른 성경해석도 내 방식이 옳다고 우긴다. 
같은 신앙을 가진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보다는 내가 이겨야 직성이 풀린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행태임을 그는 고발합니다.

예수님은 관계를 중히 여겼습니다.

바리세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원칙)을 중히 여겼습니다.(마15:1-2)
그러나 예수님은 관계를 더 중히 여겼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의인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기꺼이 되셨습니다.(마11:19, 눅11:34)
그 것은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관계)이 죄인을 구원하시는데 더욱 중요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요4:9) 원칙을 무시하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하시므로 사마리아인들이 쉽게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요4:5-42) 
만약 예수님께서 관계를 중히 여기지 않고 원칙을 중히 여겼섰다면 기독교는 복음이 아니라 율법주의가  되었을 것 입니다.

원칙을 중히 여기는 자들의 행태 

여기 원칙을 중히 여기는 자들의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교회가 지금 있는 예배당을 헐고 새 예배당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원칙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한 편은 “예배당이 좁고 앉을 자리가 없으면 예배당을 크게 지어야지요. 그러나 아직도 빈자리가 많이 있는데 왜 멀쩡한 건물을 헐고 다시 지으려 합니까?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할 원칙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원칙을 지켜야지 원칙을 어기면 안 됩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 성장 측면의 안목이 있다면 그런 구시대적 발상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성장한 대형 교회들을 보십시오. 모두 구식 낡은 건물을 헐고 현대적 대형 건물을 지은 교회들입니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교인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절대로 교회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 성장의 대 원칙입니다.”라고 서로 입에 거품을 물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게 됩니다.

논쟁은 이렇게 또 계속됩니다.
“교회를 새로 짓는 것에는 찬성입니다. 그러나 교회 건축 재정을 충분히 마련한 후에 공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재정 확보 없이 은행 융자로 건축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정성껏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은행 배불리는데 다 들어가고 말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반대편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은행 융자 없이 건축하는 교회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믿음이 그렇게도 없이 무슨 일을 합니까? 믿고 기도하고 나가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기본 원칙입니다.”
이렇게 서로 자기 주장을 원칙이라고 고집하면서 한 교회 교인들이 양보 없는 싸움으로 허구한 날을 보냅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분쟁에 휩쓸리게 되고 교인들은 신앙에 큰 상처를 받게 되며 또한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일을 할 때는 각자의 원칙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온 성도가 더욱 돈독한 관계를 이루어 나가도록 교회 지도자들이 나서야 합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12:14-20) 

*p.s 이글은 비진리와도 관계를 맺으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자기 중장이 원칙이라고 우기고 싸우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전에 올린 글 "진리의 양면성"을 참조)

원로 Essay 중에서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http://cafe.daum.net/y9144
http://y9144.com.ne.kr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예종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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