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동방박사들의 고국과 마지막 세기의 동방박사들[5]

수호천사1 2014. 3. 29. 20:46

 

 

동방박사들의 고국과 마지막 세기의 동방박사들⑤ 

  


  동방박사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신 목적


  앞서 상고한 바처럼 하느님은 마지막 때에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동방 먼 나라, 곧  극동의 코리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복음전도자들을 보내실 것이다. 실로 그것은 세계 구속의 절정에 해당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유대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여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차 욕단계 천손민족 한국인이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가 유대민족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아주 중요한 구원사적 과업이다.


  그러니만큼 하느님은 2천 년 전에도 동방의 먼 나라에서 일단의 현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시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유대민족에게 전하게 하심으로써 말일에 예정된 그 종말론적 대사건을 ‘예시적으로’ 보여주시길 원했던 것이다. 즉 동방박사 이야기는 종말에 있을 한국교회의 예루살렘 복음전도운동을 미리 예시한 사건이었다. 즉 하느님은 계시적, 예언적 목적 아래서 동방박사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우리 한국 백성은 자신에게 부여된 구원사적 사명, 곧 유대민족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1세기의 사건은 예표(모형)요, 마지막 세기에 있을 사건은 원형(실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동방박사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목적 중 하나이다.


  아울러 신실하신 하느님은 이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하여 그가 일찍이 동방에 숨겨두신 욕단계 천손민족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계시하고자 했다. 이 또한 동방박사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이와 같은 특별한 목적들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며 대단히 중요한 계시의 기록이다.


  하느님께서 동방박사 이야기를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에 기록하신 것은 당신의 심오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동방박사 이야기가 성경에 꼭 기록되어야만 할 필연성은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동방박사 이야기는 굳이 성경에 없어도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고 구원받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동방의 현자들


  동방의 현자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메시아의 별을 발견하고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 차렸다. 그리고 곧바로 예물을 준비하여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자 유대 땅을 향하여 긴 여행을 떠났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메시아가 탄생한 사실을 알고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한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베들레헴 인근에서 밤중에 양을 지키던 소수의 목자들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이었던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들은 동방박사들처럼 별을 보고 안 것이 아니었다. 초자연적으로 천사들이 나타나서 자세히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8~14).

 

 

  천사가 곁에 와서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 11절)고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심지어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고 하면서, 구주로 탄생하신 아기를 능히 알아볼 수 있도록 ‘표적(Sign)’까지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자세히 메시아 탄생 소식을 전달 받고 아기 예수께 찾아가 경배하는 일은 용이한 일이다.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다. 게다가 그것은 ‘초자연적’으로 천사로부터 얻은 정보였다. 더욱이 천사는 하나도 아니었다.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합창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누구든지 그와 같은 체험을 한다면 즉시 메시아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목자였다면 당장 온 동네 마구간을 몽땅 뒤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은 그렇게 상세한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비한 체험’을 하지도 않았다. 동방박사들은 단지 별만 보았을 뿐이다. 천사가 나타나서 “저 별은 메시아의 별이야,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뜻이지”라고 설명을 해준 것도 아니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오직 별만 보여주셨다.


  실로 목자들이 받은 계시에 견주어 볼 때 동방박사들이 받은 계시는 아주 작은 계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동방의 현자들은 그 작은 계시, 곧 별 하나만을 의지하여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얼마나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인가!


  뿐만 아니라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참으로 신실했다. 진정한 믿음은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순종이요 행함이다. 그래서 2천 년 전에 예루살렘에 찾아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한 동방박사들은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혜도 믿음도 유대인을 능가했었다.


 욕단계 선민을 다루시는 하느님의 방식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탄생했을 때 하느님은 유대인 및 이방인 중에서 소수의 사람을 선택하여 아기 예수 앞으로 인도하셨다. 유대인으로서 택함 받은 사람은 밤중에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가난한 목자들이었다(누가복음 2장). 이방인 가운데서 부름 받은 사람은 한밤에 별을 관측하던 동방의 현자들이었다(마태복음 2장).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 앞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방식은 전혀 달랐다. 유대인은 천사를 통해서,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해 인도하셨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 두 가지 방식을 반대로 사용하셨어야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즉 메시아의 별은 목자들이 발견하게 하시고, 주의 사자(Messenger)인 천사는 동방박사들에게 보내셨어야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세주 탄생 사실에 관해 좀더 자세한 계시와 신뢰할 만한 증거가 필요했던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이었지 유대인인 목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목자들이 어느 날 밤중에 들에서 양을 지키다가 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별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들은 그 별이 메시아의 별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방인이 메시아의 별을 알아볼 수 있었다면, 유대인이었던 그들은 더 잘 알아봤을 것이다. 왜? 유대인에게는 기록된 계시인 성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방인보다 월등히 우월한 입장에 있는 것이 유대인들인 것이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민수기 24장 17절의 예언에 근거해 메시아가 탄생할 때에는 특별한 별이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유대인인 목자들을 ‘별’을 통해 아기 예수 앞으로 인도하시고, 반대로 ‘천사’들은 이방인인 동방박사들 곁으로 가서 섬기도록 하셨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즉 메시아 탄생 소식을 천사로부터 자세히 들었어야 할 대상은 목자들이 아니라 동방박사들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동방박사들을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보내셨다면(하느님은 분명히 그랬다), 그들 곁에 천사를 보내어서 메시아 탄생 소식을 자세히 전달하도록 해서는 아니 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느님은 동방박사들을 오직 별을 통해서만 인도하셨다. 그들은 천사를 보내어 초자연적으로 명료한 계시를 주시며 인도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차별 대우를 하셨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동방박사들에게도 직접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2). 이 구절에서 보듯이 하느님은 동방박사들에게도 특별수단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음성을 직접 들려주시기도 하였다. 하느님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그렇게 친히 꿈을 통해 인도하셨다(마 2:13, 19, 22).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단순히 별만을 사용하시어 동방박사들을 메시아 앞으로 인도하셨는가? 왜 그들에게는 초자연적으로 천사를 보내어 음성을 통해 상세히 계시해 주시지 않았는가? 그 까닭은 말 그대로 그들은 ‘현자들(wise men)’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동방박사들에게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별 하나, 곧 ‘작은 계시’만 주어졌지만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능히 깨달았다. 그리고 별 하나만을 의지하여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찾아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유대인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아주 놀라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하느님이 욕단계 선민 한국인을 다루시는 방식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들에 관한 계시는 성경에 아주 작게 기록되어 있다(창 10:21~30; 대상 1:17~23). 그러나 2천 년 전 동방의 현자들처럼 말세의 한국인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부어주신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미암아(엡 1:8, 17), 자기들이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 곧 욕단계 선민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 계시에 반응하고, 민족적 소명에 순종한다.


  Once again go to jerusalem!


  마지막 때에 동방의 성민 한국인은 사도 요한과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2천 년 전의 동방박사들처럼 다시 한 번(Once again)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복음 들고 힘차게 달려갈 것이다(사 41:25~27, 46:1~13, 52:7, 55:·1~9; 계 7:1~8).

 

  바로 그 때에 유대 민족은 과거에는 결코 목도할 수 없었던 큰 규모로 회개하고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 민족이 구원 받으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다시 오실 왕의 대로를 수축해야 할 구원사적 사명이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명인가!


  그러므로 한국교회에 합당한 구호는 “Once again go to jerusalem!”(예루살렘에 다시 가자!)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Back to jerusalem”이 아니라 “Once again go to jerusalem!”(예루살렘에 다시 가자!)이라는 모토 아래 아시아 서쪽으로 복음을 들고 진격해 가야 한다.


  2천 년 전에 이 땅에서 동방의 현자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갖고 예루살렘에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큰 소동이 일어나게 했듯이(마 2:3), 장차 욕단계 선민 한국인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복음을 들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또 한 번 성지(聖地)에서 거룩한 소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실로 그들은 “마지막 세기의 동방박사들”이라고 할 것이다. 할렐루야!

 

 

 

성민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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