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목사와 성도의 생각 차이(4)

수호천사1 2014. 3. 24. 20:24

예수가좋다오

목사와 성도의 생각 차이(4)

글/ysong777

 

지난번 글에 연속 된다.....

 

1). 평생 충성하겠다는 집사의 맹세.

우리 교회에 구 안기부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는 60이 넘은 집사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상당한 지식을 가진 인텔리로써 나이도 먹었을 뿐 아니라, 점잖은 그의 언행 심사로 인해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이 였다. 그는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와 여러 교회를 다녀 보고 부부가 함께 등록을 했고 그의 자녀들도 함께 교회를 나와 여러 부서에서 봉사를 잘해 주어 교회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조용하게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와 그는 공원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지나 간 세월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교회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여러분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처럼 진실하시고 솔직하신 분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목사님께서 문학을 전공하셨다고 하니 정말 마음에 듭니다. 내 비록 목사님 보다 연상이지만 나이를 떠나서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제 집 사람과 의논을 하고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장황히 늘어놓는 낯뜨거운 칭찬에 할 말을 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하는 말씀인데요. 우리 부부와 우리 자식들은 평생 목사님을 모시고 살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라기보다는 형제와 같고 어찌 보면 백년을 사귄 친구와도 같은 정을 느낍니다.]

나는 정말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럼 비슷한 말을 여러 번들은 일이 있고 그런 말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흥분될 수는 없었다. [집사님의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저를 도와 힘이 되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저 교회 사랑해 주시고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약속은 얼마 되지 못해 언제 그랬느냐 싶게 변질이 되어 버렸다. 우리 교회가 그의 집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되는 곳으로 장소를 넓혀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에 한 두 번 나오던 그들과 가족들은 교회를 떠나 가까운 곳으로 가 버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으레 그렇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교회를 잘 나오도록 계속 권하는 나와 우리 성도들의 바램을 일언 지하[ 거절해 버리는 그들의 싸늘한 반응에 쓴웃음을 짓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의 약속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셨는가 보다. 

 

(마5:33-34)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2). 평생 선물을 드리겠다는 집사의 약속

우리 교회에 강집사가 있었다. 어느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집에 와 쉬고 있으려니 강집사가 찾아 왔다. 그는 아주 좋은 과일 한 상자를 가지고 왔는데 와서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저는 우리 교회에 나오기 전에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물른 주님도 영접치 못한 나일론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목사님께 은혜를 받고 정말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확실히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저의 친부모보다 더하고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합니다. 목사님은 우리 가정을 구해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비록 약소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목사님의 가정에 제일 좋은 과일 한 상자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계속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만 들어도 저는 보람과 기쁨이 넘칩니다.]  [아니요. 저의 정성이요 고마운 마음의 표시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 집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좌우간 체집사님이 그렇게 건강해 져서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강집사의 아내인 체집사는 아들 형제를 기르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기르노라고 힘이 들어 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알 수가 없으나 정신병 증세가 있었던 사람인데 우리 교회에 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아주 말끔히 병세가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구역 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 집사의 이와 같은 사랑과 친절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몇 달 후에 사 알았다. 그는 약속한 데로 두어 번 사과니 배를 집에 가져 왔다. 그런데 교회가 신년 들어 예산을 새로 세우고 교회 직원들의 인사 이동을 하게 되었을 때에, 나는 강집사가 교회 회계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교회 여러 성도들의 의견과 그의 직장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고 마땅치 않게 생각이 되어 회계 감사로 임명을 하고 그가 원하는 회계를 맡기지 아니했다.

 

그런 후에 그는 시험에 들기 시작을 했다. 분기마다 실시되는 그의 회계 감사는 회계를 보는 집사를 무척 괴롭히는 것이 되어 버렸고 감사인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교회 제정에 깊이 관여하여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여러 성도들과 나에게 부담으로 작용을 했다. 그는 장말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는 일들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는 껄끄러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그를 그렇게 조치를 한 것은 그에게 너무나 많은 시달림을 받던 회계 집사 부부가

[목사님. 강집사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다 드리지는 못했지만 강집사는 결코 목사님과 교회에 유익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이번에 다른 교회로 교회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목사나 교회에는 유감이 없지만 강집사 부부 때문에 교회를 더 이상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 이웃 교회로 가 버렸다.

 

나는 이 일로 얼마나 많이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최 집사를 감사되게 한 일을 크게 후회했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교회를 그들은 정말 착실하고 성실한 성도들로써 분인 집사는 우리 교회 여전도 회장까지 했던 사람이 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해 직원 임명에는 주일학교 부장을 시키면서 제정 부에서 손을 떼도록 했다. 나는 그는 이런 목사의 조치가 매우 섭섭했던 모양이다. 물른 사과 상자는 이미 오래 전에 배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늘 목사의 하는 일에 시비를 걸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이 그런 성도답지 못한 교회 제정 장학하기 작전은 실패를 했지만 목사를 괴롭히며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은 그가 부산?막? 발령을 받아 직장을 옮겨 갈 때까지 계속이 되었다.

 

나는 평생에 성도들이 목사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시침이를 떼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들은 목사에게만 그런 거짓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도 그런 거짓 말을 떡먹듯이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하여 거짓 말을 하는 것은 비단 성도들만이 아니라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목사들도 하나님께 거짓말을 아주 잘한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서원하고 약속한 일들을 실천하지 않고 넘어 가 버리는 거짓 말들, 이 핑계 저 핑계를 데 가며 거짓 말을 하는 경우, 할 수 없이 거짓 말을 하게 되는 일들, 약속을 해 놓고 완전히 잊어 버리는 일들, 헌금에 대한 거짓 말, 심방에 대한 거짓 말, 실수로 하는 믿을 수 없는 약속들------

 

우리는 기도를 하고 지키지 않고 스스로 맹세하고 지키지 않으며, 약속을 하고 오리발을 내 미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중에는 으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변명하고 위로 받다가, 결국 거짓 말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버리는 경지까지 가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거짓 말들을 낱낱이 [기념 책]에 기록하셔서 우리들의 말과 행위를 저울질하실 것이다.

 

목사는 성도들의 말을 믿지 말라.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가 아니며 오로지 사랑의 관계다. 그래서 성경에는 한 번도 목사들이 성도들을 믿고 살라는 말씀이 없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라는 말씀만 이 존재한다. 신실하지 못하고 어리석고 약해서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목사들이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말 것이며 약속한 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도록 해야 한다. 하다가 힘이 부처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정 못하면 못하게 된 우리들을 이해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에 최선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속이면 하나님을 속이는 자의 받을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 나느니라"

 

6. 목사는 목사의 생활 수준이 교회가 허락한다면 자기의 경륜과 수고에 걸맞는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성도들은 자기들만큼만 살기를 바란다. 성도들은 목사가 자기들만큼만 살기를 바란다. 목사의 나이, 연륜이나 노력의 성과나 학업의 성취도,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늘상 자기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던지 아니면 조금 자기들 보다 못 살아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한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아가는 것, 자식들 커 가는 것, 목사의 환경, 목사 가족들의 문제들을 자기들의 그것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부러움과 시기 질투를 분별하지 못하며 무조건 비평하고 기분이 나빠한다. 그러나 극도로 이런 그들의 심리를 자제한다. 목사는 이런 성도들의 심리를 알고 생활의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간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리석게도 우리 성도들은 목사인 나와 우리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일상적인 목사에 대한 사랑은 지극 정성이다. 그러나 그런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우리 가족들이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정신없는 목사의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더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목회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을 것이다.

 

목사의 생활이 자기들 보다 윤택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성전 부지를 이미 몇 해전에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교회 건축비만 있으면 예배당을 건축할 수가 있었다. 나는 부흥회를 한다 든지 다른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여 건축 헌금을 작정하지 않기로 오래 전에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교회당 건축할 계획을 가졌다. 그래서 교회의 재정을 긴축하면서 건축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은행이나 다른 곳으로부터 빗을 얻어 좀 모자라는 돈으로 아파트를 한 두체 사기 시작을 했다.

 

이 문제는 성도들에게 매우 민감한 부분이 였기 때문에 여러 번 숙의를 하고 조심스럽게 추진을 했다. 물른 성전 건축비용을 성도들이 한꺼번에 부담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고 누차에 설명도 했다. 아파트를 사 놓는 것은 성전을 건축할 경우 자금의 유동성 때문이다. 아파트는 팔려고 내 놓으면 한 달 내에 현금으로 전환이 되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며 좀처럼 원금이 줄어지지 아니하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대료를 받게 되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집을 살수가 있다. 이와 같은 숙제를 가지고 있을 때에 성도들도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교회 제정을 사용하는데 있어 신중을 기할 수 있겠다는 다른 전략도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아파트를 새로 분양을 받아 새 집으로 무리가 이사를 했다. 그런데 성도들은 새 집으로 이사를 하는 목사의 꼴을 보지 못했다. 새 집으로 목사가 이사를 가야 하는 이유도 많았다. 당국에서는 교회가 주택을 마련할 경우 한 주택에 대해서만 세금을 감면하는 혜택을 준다. 또한 집의 등기를 한 집에만 국한해 허락하고 있다.

 

그래서 집을 도체 이상 마련하려면 어떤 개인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야 하는데 장로의 이름으로 할 수도 없고(만일의 사태를 위해서 불안하다.) 더욱이 집사나 전도사의 이름으로 등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목사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3년 동안은 그 집을 팔 수가 없다. 만일 3년이 안 되였는데 임대를 하거나 매매를 할 경우는 법에 걸려 많은 세금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살던 집의 전세 보증인을 빼서 집 값을 주고 우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은 목사 보다 성도들 자신이 너무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이런 행사를 싫어했다. 처음에는 별로 심하지 않더니 좀 넒은 집으로(42평)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에는 노골적으로 이 일을 비방하고 반발했다.

[우리 목사님은 욕심이 많아 자기 이름으로 집 등기를 하고 대궐 같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목사가 꼭 그렇게 잘 살아야 돼] [목사 이름으로 등기를 해 놓은 것은 좀 불안하지 않아?]

[교회 재산이 목사의 개인 재산이 되는 거 아녀?] [우리는 이렇게 사는데 목사님만 많이 발전하시는군]

 

이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우리들 자신들을 많이 돌아보았다. 살던 집의 전세금을 빼서 새 아파트의 집 값으로 지불을 하고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 이름으로 등기가 불가능해서 목사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야 했으며, 새로 마련한 지을 임대했을 경우에 임대 자에 대한 불안 요소도 있고, 3년 안에 집을 팔면 많은 세금을 불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 목사가 이사를 할 수밖에 없다라는 설명을 나도 하고 장로도 하고 집사도 해서 공공연히 공증이 되었는데도, 그런 설명과 말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떤 성도들은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마련한 새 집에 이사가시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목사님이 가 사셔야 되지 장로가 가? 집사가 가? 이왕지사 임대를 하자면 불안한 일도 있고 또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임대료를 빼서 집 값을 주는 것인데 그게 그거라면 목사님이 세 집에 사시는 게 좋은 일 아닌가?]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도 어떤 성도는 무조건 목사가 새 집만 찾아다닌다면서 우리를 비방했다.

 

이런 성도들의 심리에는 목사는 자기들과 비슷하게 살아야 하며, 조금 못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상한 심리가 있다. 그런데 그런 심리가 사실상 우리 한국 성도들에게 만연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50이 넘어 35평의 아파트에 사는 것과 이제 30이 넘어 25평에 사는 자기들과의 차이가 삶의 연륜이나 수고의 대가로 인한 차이점일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기 보다 15살이나 더 많은 직장의 부장이 40평에서 사는 것을 비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나이가 자기 보다 많고 직장에서 그만큼 많은 연륜을 쌓은 상사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도 그만한 나이가 되면 최소한 그 정도는 살 수 있고 잘 하면 그 보다 훨씬 더 성공해서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무 저항이 없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일들이 교회에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이 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 보다 더 큰집에서 목사가 사는 것은 목사의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나이 30에 25평서 살면 목사는 나이 50이 되어도 25평에서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전세를 살면 더 좋다. 나이 40이 되어 35평에서 사는 사람들은 목사가 15년 연상이어도 35평 정도의 임대 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다. 즉 자기들의 생활과 비슷하거나 그 보다 더 못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상이 되면 목사가 푼수에 맞지 않게 사치를 하며 돈을 좋아하고 현실에 맞지 않게 산다고 생각한다.

 

물른 목사는 그들이 생각하는 데로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주변의 목사들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집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대 부분이다. 그것 자체를 죄악으로 보는 견해가 이제까지 많았다. 목사의 등기가 되어 있는 집을 가지는 것은 죄악이다? 통장도 그렇다. 교육 보험도 그렇다. 오로지 교회가 주는 것 이상으로 먹지 말고 쓰지 말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요 탐욕이요 죄악이다.

 

그런 생각을 목사들은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목사의 모든 것들,― 사는 것, 아이들 공부 가르치는 것등등 ― 을 교회에서 책임져 주기를 바라고 살았다. 그러나 교회에서 목사를 위해 책임을 져 주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우선 아이들의 공부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사의 주택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목사는 언제나 임대 주택에서 살수밖에 없다.

 

재래 시장에 다니는 주부들은 목사 사모가 백화점에 다니면 죄를 짖는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대학밖에 보낼 수 없는 성도들은 목사의 자식이 대학원에 가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사들은 그런 성도들의 심리를 알지 못하고 터부니 없는 착각을 한다.

 

목사가 좋은 집에 살면 성도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녀도 성도들이 목사에게 잘 해 준다고는 자부심을 가질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이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유학을 가면 성도들이 자기 자식이 그런 것처럼 기뻐하리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식을 성도들에게 자랑하고, 번쩍거리는 중형차를 타고 다니며 좋은 집에서 살면서 고맙다는 표시로 성도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기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저질렀던 나의 과거를 다른 목사님들을 되풀이 말기를 바란다.

 

목사의 사 생활을 말하지 말라. 좋은 것을 자꾸 말하면 시기와 질투를 하고 어려운 것을 자꾸 말하면 부담스러워 한다. 자식들에 대한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좋은 식당에 드나들지 말 것이며, 혹 성도들이 초청해서 고급 식당에 들어 갈 일이 있거든 촌놈처럼 처신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좋아한다. 좋은 옷을 입고 자랑하지 말 것이며, 좋은 차를 광을 내서 타고 다니지 말라. 목사의 노후나 자식들을 위해 집을 마련할 경우에 절대 비밀로 하는 것이 좋다. 감사 헌금은 무명으로 하라. 하나님께 공개해도 좋을 일들이 사람에게 공개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많다. 공개 안하는 것은 거짓 말이 아니다.

 

바울은 "(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지만 사실 그의 생활에서 많은 부분이 성도들을 위해 스스로 제재를 받고 있었다.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하신 것도 한 예이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덕을 끼치도록 해야 한다. 덕이란 성도들에게 유익한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목사의 모든 생활의 공개가 덕이 되지 않을 수가 많고 오히려 숨기는 것이 덕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숨기시는 것이 많다. 계시는 부분적이지만 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알려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만큼만 아는 것이다.

 

목사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목사를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믿음을 버려라. 절대 그렇지 아니하다. 그리고 성도들이 바라는 그런 수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절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대로 살다가 자식들과 부인들에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고도의 생활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에 우리 목사들은 와 있는 것이다. 다른 무슨 대안이 있는가?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다음편에 계속 된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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