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재림할 수 없는가?
유석근 목사
(알이랑코리아 대표, 알이랑교회 담임)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재림은 지연된다. 그로 인해 충만하고 완전한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상에 도래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는 자신이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임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많은 메시아적 기적을 행하셨다. 랍비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벙어리 귀신을 쫓으시고, 날 때부터 맹인인 자를 고쳐 보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이러한 기적은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이어서 이러한 기적을 행하는 이가 있으면 그가 곧 메시아임을 알라고 가르쳐왔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정말로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메시아이신지 아닌지를 물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런 메시아적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고 계셨던 것이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순서로 보아 예수님께서 먼저 행하신 메시아적 기적은 아마도 나병환자를 고치는 일이었던 같다. 레위기 13,14장에 보면 나병환자를 진단하여 격리시키는 방법과 고쳐졌을 때에 그 부정을 벗기는 방법과 제사 드리는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랍비 자신들이 나병환자를 고친 예가 없었기 때문에 고친 사람을 위한 레위기의 규정들은 한 번도 사용된 일이 없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그 규정들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구약에 보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의 기도로 나음을 받았고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하여 나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 레위기 14장에 기록된 규정들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레위기 14:24에 따르면 그 규정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부터 적용되도록 되어 있으므로, 그 이전의 사건인 미리암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나아만의 경우에도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 규정들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처음으로 그 규정대로 행하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3-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알리시기 위하여 이 기적을 행하셨고 또한 제사장들에게 증거하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그가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은 아마도 그의 공생활에 있어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리는 첫 발을 내디딘 중요한 시점에서 그는 다음 하실 일에 대하여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멸시를 받는 곳,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가 나병환자를 고쳤으니 이것은 그들에게 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곧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이 문둥병 치유의 사건을 그들의 규정대로 분별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들의 규정에 의하면 ‘관찰’의 단계를 거쳐 ‘질의’의 단계로 들어간다. 질의의 단계가 끝나면 산헤드린에서 ‘분별’의 최종 결정을 내린다.
누가복음 5:17~26에 기록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살펴보면 나병환자 치유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나사렛의 예수에 대하여 ‘관찰’의 단계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란 전국에서 모여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이와 같이 전국에서 지도자들이 모여든 것은 산헤드린의 결정에 따라 지도자들이 모여 그의 행하시는 일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2:1에 기록된 대로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가버나움이 위치하고 있는 갈릴리 지방의 각 촌에서는 물론이요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서까지 그들이 와서 관찰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들은 아마도 산헤드린에서 직접 파견한 사람들이라고 믿어진다. 지붕을 뜯고 환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벌어진 것도 군중은 물론이려니와 아마도 관찰하기 위하여 모여든 지도자들의 수가 많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의식하여 다음과 같은 비범한 말씀으로 그 중풍 환자를 고치신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임을 그들에게 증명하여 그들이 부인할 길이 없도록 만드셨다. 사람의 죄를 사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아는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보고는 마땅히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들은 마음에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아직은 예수님께 직접 말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 ‘질의’의 단계에 앞서 '관찰'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직접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헐뜯기 시작하였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심으로써 다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시기에 이른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마 12:22-24).
이 기적을 본 무리들은 그가 곧 메시야이심을 알아보고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하여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그 오시기로 되어있는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가 아니냐고 스스로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는다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는 이미 산헤드린의 결정이 내려졌고, 그들은 그의 메시아 되심을 부인할 것을 결정한 때인 것이다. 이때가 바로 그들이 오늘날 이방 나라에 흩음을 받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생활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던 것을 그들이 어찌 알았으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결정을 들으시고 그 결정에 대하여 저주를 내리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1-33).
인자가 사람의 형상으로 오셨으니 사람으로 알고 그를 거역하여도 용서를 받을 수 있거니와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곧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니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나무에 어떻게 좋은 실과가 열리겠느냐. 눈멀게 하고 벙어리 되게 하는 귀신을 쫓아 고쳐주는 좋은 실과가 어찌 좋지 않은 나무에 열리겠느냐. 너희는 좋은 나무를 좋지 않은 나무로 말하기 위하여 그 기적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는구나 하시며 그 죄는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과연 그 죄는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하여 이스라엘은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하여 포위되어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무려 110만의 이스라엘인이 사망하였으며 약 9만 7천명이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 갔다. 또 A.D. 135년에는 로마의 헤드리안 황제에 의하여 그들은 그 땅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으며, 유대인들이 다시는 그 땅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금족령이 내려졌고 예루살렘은 그 이름을 바꾸어 아에리아 까삐또리나(Aelia Capitolina)로 불리우게 되었었다. 그후 유대인들은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는 디아스포라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 누가복음 19:41~44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번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이것은 이스라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였고,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인 것이다. 일찍이 성령의 권고를 받았을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더라면 평화의 길을 갈수 있었으련만 그들은 오히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지도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잘못 이끌어 지은 국가적인 죄였다.
줄거리에서는 조금 벗어나지만, 당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인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행방에 대하여 알고 지나가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초세기 유대인 사학가 요세푸스(Josephus)의 말에 의하면 당시 크리스천들은 이 전쟁에서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다 살아남았다고 한다. 당시 로마의 티투스(Titus)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에 투입되기에 앞서 께스투스 갈루스(Cestus Galus)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이 A.D. 66년에 먼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었다고 한다. 그런데 보급로 확보가 미흡하여 그는 일단 철수 하였다가 다시 오려다 도중에 유대인 게릴라에 의해 피살되어 그 계획이 좌절되었다. 그래서 A.D. 68년에 로마는 다시 티투스 장군을 파견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이 공격으로 A.D. 70년에 이스라엘은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크리스천들은 A.D. 66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을 보고 누가복음 21:20,21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였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 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눅 21:20,21).
그들은 갈루스 장군이 보급로 확보를 위하여 철수한 기회를 타서 모두 요단강을 건너 펠라(Pella)에 피난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전쟁이 끝난 뒤에 모두 제 고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하느님(하나님)의 놀라운 보호의 손길이었다.
로마에 세워진 타이터스 장군의 개선문에 부조된 옮겨지는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들: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포위 함락시킨 후 성전의 금 촛대, 진설병 떡상, 나팔 등을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을 개선문에 부조한 것이다.
진정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여 이러한 재난을 겪어야 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를 영접하는 찬송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그를 믿는 유대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그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다윗의 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줄 알고 예수님을 그 나라의 왕 곧 메시아로 영접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를 메시아로 영접하게 될 때까지 세상에 다시 오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Jesus looks over Jerusalem and ponders its future; based on Matt. 23:37-39; Luke 13:34-35.
구약성경 사무엘하 15장부터 19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 왕에 대한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사건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압살롬이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을 거부하게 선동한 것은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환영했어야 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선동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거부하게 한 것과 유사하다(마 27:17,18).
둘째, 압살롬이 다윗의 신하 중 아히도벨을 통해 다윗을 배신케 했듯이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도록 된 것과 대제사장들의 예수에 대한 음모와 유사하다(눅 22:1-6).
셋째, 아히도벨이 밤중에 군대를 이끌어 다윗을 공격하려고 한 것은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밤중에 잡으러 온 것과 유사하다.
넷째, 아히도벨이 나중에 자살한 것과 가롯 유다가 자살한 것이 같다(삼하 17장).
다섯째, 다윗의 피신 중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다윗을 따랐는데(삼하 15:18~22), 예수님이 유대인의 배척을 받고 오히려 은혜가 이방인에게 임한 교회시대와 비슷하다.
여섯째, 압살롬의 반역사건 실패 후 이스라엘의 여론이 다윗의 복귀를 원했어도(삼하 19: 9~10), 유다족속 중 하나로서 12지파의 왕 노릇을 했던 다윗은 그의 자연적인 골육인 유다지파가 “돌아오소서”라고 할 때까지 환도(還都)하지 않고 기다렸는데(삼하 19:11-15),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신을 좆아 형제 된 유대인들이(롬 9:5) 회개하여 그를 그들의 메시아로 영접하고 환영할 때까지 재림하시지 않을 것임에 대한 표상인 것이다.
이는 아주 중요한 예표이다. 다윗이 복귀하기까지 그의 자연적 골육인 유다지파가 다윗의 환도를 원해야 했듯이,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영접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제까지 지연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영접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시는 바울서신에도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의 타락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안에서 충만히 하느님 앞으로 돌아올 때, 그것은 더 좋은 세계적 복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언 한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 이리요”(롬 11:12).
그러면 그 더 좋은 세계적 복이란 무엇일까? 예수님의 재림이다. 이것은 15절 말씀이 가르쳐 준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롬 11:15).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란 의미는 이스라엘의 회심이 ‘부활’의 직접적인 전조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일치할 것이다(F. F. 브루스, 틴델주석 로마서). 즉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여 하느님께 받아들여짐이 될 때에는 예수의 재림의 시기가 임할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오늘날 유대인들이 여전히 그들의 불신앙으로부터 회심하지도 않았고, 불신앙과 결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스라엘의 회심이 있기 전에는 메시아 예수는 재림하시지 않는다.
이상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아니한 죄를 회개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기를 원하여 그를 다시 찾을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구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재림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땅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영영 도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느냐 안하시느냐는 이스라엘이 회개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하느냐 안하느냐는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여 그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힘을 다 하여야 하는 것이다. ☞관련기사: < 멜기세덱 프로젝트 >
하느님(하나님)께서는 계획을 세우실 뿐 아니라 그 계획을 실현하는 방법까지도 정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중보기도와 우리의 순종이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우리의 기도와 순종 없이는 하느님의 계획이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cafe.daum.net/ALILANG
'선교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유대인이 본 기독교 (0) | 2014.03.13 |
---|---|
[스크랩] 이스라엘의 기독교인 박해 (0) | 2014.03.13 |
[스크랩]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 (0) | 2014.03.13 |
[스크랩] 中 먀오족의 뿌리는 고구려 유민 (0) | 2014.03.11 |
[스크랩] 연변의 민족독립운동과 기독교 (0) | 2014.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