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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수호천사1 2014. 3. 8. 14:38

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①

( 역사적 배경 연구를 중심으로)





2000. 3. 30. 발표자: 신원균 강도사



서론.



우리는 종교개혁의 교회역사 이후에 오늘날 교회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는 커다란 특징을 언급해 보면 베트너의 "개혁교회의 목사 및 교사들 대부분이 이 교리를(예정론) 담대하게 고백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비(非)성경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음을 보는 동시에 칼빈주의를 주저하지 않고 기탄 없이 말하는 자들을 만나기가 어렵다"라는 말처럼 정통적 개혁신앙에 대해서 담대하게 드러내는 형편을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려운 형편을 맞이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우리의 형편은 베트너가 톱레이디(Toplady)가 영국 교회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교역자치고 칼빈의 예정교리를 설교하지 않는 자가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현대 교회는 대체로 종교개혁의 원리를 버린 셈이다. 따라서 「이가봇」 즉 「영광이 떠났다」(삼상4:21)가 우리의 설교단과 교회 정문의 대부분에 쓰여졌다"라는 지적이 오늘날 우리의 형편이라고 제시한 것이 더욱 정확하게 맞을 것이다.1)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신앙인 들이 칼빈주의를 낡고 진부하고 극단적이며, 고리타분한 것으로 대부분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장로교 안에서조차도 이미 암암리에 철저한 칼빈주의의 신학적 내용들이 오늘날 사회와 교회와 성도에게 부적당하다고 인정하고 있기에 이런 베트너의 지적은 우리의 형편을 더욱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칼빈주의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가운데서 외면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 예정론은 더욱 그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즉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예정론을 설교하고 가르치게 되면 많은 성도들이 당황하고 거북스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누구든지 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가르침에만 귀를 기울여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고 또한 어떤 사람을 영원히 버리셨다고 하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본 논고는 이처럼 예정론의 내용이 크게 혼탁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실정을 감안하여 바로 예정론의 설명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선 교리사적으로 예정론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역사 속에서 예정론이 어떤 이단들과 가장 심각하게 논쟁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형편은 이와 같은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하며, 둘째로 이 이단들 중에서는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알미니안적 예정론을 살펴보면서 칼빈주의 예정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 알미니안적 예정론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예정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언급해 보면서 예정론의 연구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예정론의 이해와 접근 방식



먼저 예정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칙과 질서가 반드시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유한(有限)한 인간이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접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헛된 호기심이나 상상으로 접근하면서 이해하고자 했을 때는 깊은 어두움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칼빈은 이런 질서와 규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예정론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거룩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태연하고 자신 만만하게 이 곳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 속에 들어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시기로 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생각하거나, 가장 영원하고 숭고한 지혜를 사람이 억지로 풀어내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써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의 비밀의 뜻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셨다. 즉 우리에게 관계되며 유익하리라고 생각하신 범위 내에서 말씀 가운데 드러내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2)



이처럼 칼빈은 예정론이란 주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는 겸손과 경외감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 가르쳐 주신 것만을 알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칼빈의 자세에 대해서 베트너는 "칼빈은 성경이 인도하는 곳까지만 갔고 성경이 머무는 곳에서는 머물렀다. 그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은 넘어가지 않으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수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선언(宣言)은 결정적이며 적극적이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칼빈의 신앙적 정신은 개혁신앙의 모든 내용을 접근하는 기본정신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질서와 규칙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생각과 말과 행동하는 모든 것을 오직 「성경신앙」을 통해서만 하고자 하는 정신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마음과 귀를 열고 듣는 것을 우리는 허락해야 한다. 다만 제한 조건은, 주께서 입을 여시지 않을 때에는 신자도 즉시 모든 탐구의 길을 닫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침착한 태도의 한도는, 배울 때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그치실 때에는 우리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3)라고 지적하면서 이 질서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예정론을 가장 바르게 이해는 열쇠가 됨을 제시해 주고 있다.



2.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위치와 역사적 가치



1) 예정론의 위치



우리는 먼저 예정론이 개혁신학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은 거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에서 예정론이 무시되고 가르쳐지지 않고 있는데 과연 역사적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는 예정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베트너는 먼저 예정론의 위치를 제시하기에 앞서서 주의해야 할 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예정론이 지극히 위대하고 복된 성경의 진리요 모든 교파의 근본적인 교리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개혁주의 신앙의 전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카이퍼의 말과 같이 예정론이나 성경의 권위에서 칼빈주의의 특성을 발견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 이 교리가 다른 진리와의 필연적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단독으로 표시된다면 필경 이 교리의 효과는 과장되고 또한 그 체계는 왜곡되어 잘못 전달될 수밖에 없다. 어떤 원리의 서술이 참이 되려면 그것이 그 소속 체계의 다른 모든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제시되어야 한다".



위의 베트너의 지적을 보게 되면 예정론이 비록 개혁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것 자체만이 개혁신학을 대변하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개혁신학은 더 풍부한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주제만을 강조하게 되다 보면 다른 중요한 주제들이 축소되거나 소멸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주제와 함께 조화를 잘 맞추어서 제시해야 개혁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바른 위치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조화를 가장 잘 이루어 제시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조와 내용임을 더불어서 지적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베트너의 이런 지적을 통해서 소위 「칼빈주의」 또는 「개혁파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풍부한 하나님의 진리체계와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트너가 지적하고 있는 이런 칼빈주의 체계가 왜 중요한가를 핫지(A.A. Hodge)의 지적을 통해서도 더욱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이단들이 모든 기회에 나타나서, 성경을 곡해하며, 말씀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고 다른 중요한 부분을 버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거짓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정확히 정리해서 잘못된 것을 밝히고, 모든 거짓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 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의 전체 내용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잘 정리하므로 써 말씀의 어떤 부분이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또는 제거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4)



베트너는 이 진리의 체계와 관련하여 계속해서 지적하기를 이제 이런 진리의 체계를 간직하고 세워 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체계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해서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그는 이미 자신의 본 책이 "특정한 한 교파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총괄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그 적수로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진리 체계가 가장 심각하게 도전 받고 또한 위협받는 형태는 역사적으로 알미니안주의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베트너가 이토록 알미니안주의의 심각성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후에도 제시되겠지만 이들은 예정을 아주 부정하지는 않고 「예지예정」이란 형태로 바꾸어서 자신들도 마치 예정론을 믿는 자들처럼 제시해 왔기 때문에 성경적인 예정론의 내용인 「예정예지」의 내용이 이들에 의해서 가장 심각하게 변질되어 왔기 때문에 예정론의 언급에 있어서 알미니안주의의 문제점을 함께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베트너의 지적은 오늘날도 신학적으로 우리 장로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생각할 때, 예정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알아 가는 것이 성경적인 바른 예정론의 형태인지를 더욱 고민하며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예정론의 역사적 가치



(1) 어거스틴

먼저 초기 기독교의 시대 속에서 예정론이 교회의 신앙 가운데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어거스틴을 언급할 수 있는데 어거스틴 당시의 예정론의 형태는 예정론 자체의 문제보다는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더 부각됨으로 인해서 예정론의 언급은 구원론의 내용을 제시하고 확증해 가기 위해서 그 속에 스며들거나 또는 기초로 전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더 자세히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 당시에 펠라기우스파를 통해서 성경적인 인간의 죄와 구원문제가 심각하게 변질되었다. 이들은 벌콮의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구원이나 저주로의 예정은 예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절대 예정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점에서 「조건(예지)예정」을 인정하였다"5)라는 지적처럼 구원은 어떤 절대적인 권한에 의해 결정된 예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역시 베트너도 펠라기안파들이 하나님의 특정한 결정이나 계획이 선행하는 사실에 대해서 부정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초대 교회 역사 속에는 벌콮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반(半)펠라기우주의도 성경적인 예정론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가장 큰 세력으로 교회에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어거스틴의 내용을 거부하고 구원에 있어서 신적인 은혜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예지에 근거한 예정론을 거듭 주장했던 것이다.6) 결국 이들의 이런 중간적인 입장은 곧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큰 인기를 얻게 되어 교회는 변질된 예정론의 내용으로 큰 혼란을 격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의 주권적 특성에 관한 깊은 성찰로 말미암아, 예정은 결코 인간 행동들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적인 예지의 기초라고 제시하면서 「예정예지」의 내용을 확고히 세웠던 것이다.7)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입장을 칼빈은 어거스틴 자신의 말을 빌어서 다음과 같이 확증해 주고 있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 오류를 고집하는 것을 비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가 이 궤변(펠라기우스주의)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는 아직 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롬9:14)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예견하신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과 긍휼을 피난처로 삼았다". 또다른 곳에서는 그는(어거스틴) 선택 이전의 모든 공로를 일체 배격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예지를 변호하는 사람들의 이론은 여기서 확실히 무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창세 이전에 선택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하게 되리라고 예견하셨기 때문이요, 우리를 선하게 만드시려고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라고 말씀하신 분은, 선한 것을 미리 보셨다는 말씀을 결코 하시지 않으시고 계신다.8)



이처럼 칼빈의 지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어거스틴은 펠라기안파의 주장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반(半)펠라기안파의 주장까지 철저하게 배격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발견(예지)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예정) 것이다"9)라는 어거스틴의 말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참된 진리의 내용이라고 확증해 주고 있다.10)



(2) 칼빈

칼빈이 자리하고 있는 시기는 종교개혁 시대이기 때문에 이 종교개혁의 시기에 예정론이 개혁교회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벌콮의 지적처럼 어거스틴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증되었던 예정론 교리는 중세 1000년 동안 반(半)펠라기안파들에 의해 전체 교회 안에 팽배하였으며 많은 신학자들도 철저한 예정론에 대한 바른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교회의 혼탁함 가운데 종교개혁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교리들이 바른 성경적인 의미로 회복되는 가운데 예정론도 획기적인 회복의 시기를 맞이한다.



우선 루터나 멜랑히톤도 예정론을 받아들였으나 일관적이지 않고 앞에서 제시했던 바른 체계 가운데서 확립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빛을 보았으나 반(半)펠라기안파의 입장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 것을 보게 된다11). 그러나 우리는 칼빈에게서 성경적 예정론의 분명하고 명확한 내용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1552년 피기우스(Albert Pighius/1490-1542)와의 논쟁을 통해서 제시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를 작성하면서 예정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그는 피기우스의 "자유의지에 대하여"란 논고를 논박하면서 피기우스가 중세 반(半)펠라기안파의 입장을 다시 교회 안에 들여놓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칼빈은 피기우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 있는 은혜에 참여하느냐 안 하느냐는 우리들의 자유이다. 누가 선택되고 누가 버림받느냐 하는 것의 신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자기의 의지 여하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그밖에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의 개인적 의지에 의하여 이같은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다".12)



칼빈은 이런 피기우스의 논고에 대해서 "광기와 철면피 얼굴을 겸한 사나이 간벤의 아들 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립하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에로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에로 정하신 바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지를 전복(轉覆)하려고 노력하고 있다"13)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입장을 논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칼빈은 피기우스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를 파괴하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서 이런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 중요한 일인지는 다음의 말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피기우스는 내 이름을 들어서 공격하였으며 또한 내 사타구니를 통해서 경건하고 건전한 교리를 찌르고 쑤셨기 때문에 나는 이 사람의 모독적 광기를 억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14)



이 외에도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이 예정론을 침묵하거나 또는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해서 이것을 부인하는 행위가 얼마나 악한 행위인지를 날카롭게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는 표현들을 통해서 칼빈이 이 예정론을 바르게 교회 가운데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당시 교회를 세우는 기초로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 그러나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 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우습게 여기는 자로 우리는 보여지게 될 것이다.

불경한 사람들은 예정에 관해서 갑자기 어떤 점을 붙잡고 비난하며 욕하며 떠들어대며 조롱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 그들은 이 예정론 논의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방해하며, 믿음을 흔들며 속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거스틴도 예정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을 여지없이 반박했다. -- 다만 내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점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약한 영혼들을 어지럽게 할까 해서 조심하기 때문에 또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정을 아주 묻어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어리석고 사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그 교만을 어떤 애매한 구실로 덮을 것인가? 그들의 태도는 마치 자기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성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시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로운 일을 지각없이 누설하셨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이다.15)



이처럼 칼빈은 성도들에게 예정론을 가르치지 않거나 또는 어렵다고 해서 이상한 형태로 변질시켜서 가르치는 행위를 분명한 죄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정론을 가르치는 자가 교회에서 가장 이상한 목사로 취급을 받고 있으니 우리의 신앙내용이 얼마나 종교개혁적인 정신에서 멀어져 있는지를 더욱 느끼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칼빈이 이 예정론이 성도의 전체 신앙적 체계 가운데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강조한 말을 지적하면서 본 항을 정리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한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 원칙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며, 진정한 겸손을 얼마나 감소시켰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6)



(3) 신앙고백서(도르트 신조)

칼빈을 통해서 참된 성경적인 예정론의 교리가 개혁교회 안에 밝히 드러났고 또한 그 자리를 정립하게 되었는데 교회의 역사는 오래지 않아 또다시 반(半)펠라기안적예정론 때문에 큰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1618-9년에 소집된 도르트 총회의 역사이다. 본 총회는 "도르트 신조" 또는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명칭으로 더욱 많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 총회의 교리사적 가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제의 발단은 야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예정교리에 '타락전 선택설'을 첨가했던 베자에게 베웠으며, 158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목사가 된 후, 그는 벨직 신앙고백의 개정작업에 참여한 바있는 유니우스(Francis Junius)의 계승자로 1603년에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17) 이런 가운데 자유사상가 더크 쿠른헤르트(D. V. zoon Koornheert)는 개혁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예정론'을 부정하는 일이 일어났다. 따라서 그의 저서를 검사하라는 암스테르담 시장의 요청을 알미니우스가 받았는데, 오히려 알미니우스는 그 내용이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하고 보편적 은총과 구원에 있어서의 의지의 작용을 역설하였다. 그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부인하고, 원죄교리를 약화시켰으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벨직 신앙고백서의 수정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철저한 예정론을 고수하고 있던 당시 동료 교수 프란시스 고마루스(F. Gomarus)와 공개적인 논쟁을 하였는데, 사실 고마루스는 알미니우스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었으나 최대의 적수가 되고 만 것이다.18) 이러한 논쟁이 불붙어 가자 그는 정부가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공적으로 논쟁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처럼 알미니우스와 개혁교회와의 논쟁은 1609년 알미니우스가 사망하므로 써 잠시 중단되었다. 그로 인해서 알미니우스 신학은 17세기 초엽에 철저히 개혁교회에 의해서 분석 당했고 그의 주요 저서는 대부분이 출판을 금지 당하게 되었었다. 그 후에 요한 위텐보가르트(John Uytenbogaert)가 이끄는 43명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은 1610년에 희합을 가지고 탄원서 즉 항변서를 작성했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해 줄 것을 홀란드 정부에 요구했다. 아울러 그들은 (당시 화란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벨직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신조가 항변서의 입장을 따르도록 변경해야 한다고 교회에 청원하기까지 했다.19)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5가지로 천명했는데, 그 다섯 가지 내용 중에 비(非)성경적 예정론이 핵심적으로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믿고자 하고 이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 성경이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그 기쁘신 뜻대로 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뽑으셨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가능한 조건들로부터 또는 모든 사물의 질서로부터 믿음의 행위를 주셨다는 뜻이다. -- 믿음에 이르도록 선택을 받는 조건에 있어서는 먼저 인간은 영생을 얻는데 합당한 올바른 본성을 가지며 경건과 겸손과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 하는데, 마치 선택은 이러한 성품들에 의존해 있는 것과 같다. --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불완전하고 비(非)결정적인 상태로 택함을 받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예지된 믿음과 회심, 거룩함, 경건함 등의 생활 등을 이미 시작했거나 얼마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20)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 구성된 알미니안주의의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에서 평가해 볼 때, 도르트 총회의 평가처럼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와 반(半)펠라기안주의의 재현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알미니안주의 신학은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고유의 권한과 능력을 축소시키고 오히려 인간의 자리를 더욱 높이 제시하려고 했던 인간중심적 신학체계를 세우고자 했던 시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알미니안주의는 당시 17세기에 시작된 사상이 아니라 교회역사의 초기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던 사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의 예정론에 대한 평가를 확인해 보면서 이들이 정통적으로 가르쳐져 왔던 예정론의 내용을 얼마나 악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도르트 총회의 선언문에서 알미니안주의 자들이 정통적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고 요약해 주는 말에 다음과 같이 잘 제시되어 있다.



예정론과 여기에 첨가된 몇몇 요소들에 관한 개혁교회의 교리는 그 특징적인 경향에 비춰 볼 때 사람들에게서 모든 경건한 신자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고 있으며, 이 세상적인 사단에 의해 조작된 일종의 마취제이다. 또한 이것은 사단의 견고한 요새이며, 여기에서 사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며 실망과 나태함의 화살로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며, 하나님을 죄와 불의의 원인으로 돌리며 또한 하나님을 폭군이요, 위선적인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 이 예정 교리는 그 어떤 것도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을 방해할 수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온갖 흉악한 범죄를 마음대로 자행하도록 유도되고 있다.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말을 보게 되면 이들이 정통적인 개혁교회의 예정론을 얼마나 싫어하고 거부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사단에 의해 조작된 일종의 마취제"

라는 표현은 이들의 악함에 대한 최고 절정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도전이 교회를 더욱 혼란하게 한 이유는 위에서 본 것처럼 이들이 겉으로는 예정론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통적으로 개혁교회 안에서 인정해 온 예정론인 「예정예지」의 형태를 주장하지 않고 이것을 변형시켜서 「예지예정」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더욱 깊은 주의와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정론을 말하면서도 알미니안적방식의 예정론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들의 이런 입장을 정통적 교회가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르트 신경은 벨기에 교회에서 논쟁되어 왔던 다섯 조항에 관한 정통 교리를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선언한 것이며, 동시에 얼마 동안 말썽을 일으켰던 잘못된 주장을 지적하여 이를 배격한 것이다. ---이 도르트 신조는 모든 진리와 공의와 은혜를 거스린 채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말로 현혹시키려는 몇몇 사람들의 잘못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이상과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 즉 개혁교회가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 더 나아가 종교 회의에서는 개혁교회의 참 신앙고백을 중상 모략하고 거짓 증거를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개혁교회에서는 예정론을 아예 거부하는 펠라기안적 내용이나 또한 예정론을 변형된 형태로 받아들이는 반(半)펠라기안적이며, 알미니안주의적인 내용들 모두를 비(非)성경적인 거짓된 가르침으로 철저하게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격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도르트 신조의 입장은 1647년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다시 한번 역사적 개혁교회의 참된 신앙 내용으로 즉 사도적인 전통을 따라 이어져 내려온 참된 성경의 내용임을 재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들어오게 되면 도르트 신조에서보다 더 명확하게 예정론에 대한 바른 의미가 확고하게 정립되어 고백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즉 앞에서 베트너의 지적처럼 칼빈주의 안에서 바른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예정론이 전체 교리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그 독특성과 중요성이 정확하게 이 신앙고백서 안에 제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핫지(A. A Hodge)의 지적처럼 철저하게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을 배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당시의 왕실파가 칼빈 사상을 버리고 이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당 시대의 주 세력으로 등장한 카톨릭의 신앙표준서들의 신학적 입장은 아르미니우스 사상이다"21)라고 지적하면서 영국에서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고백하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이 알미니안적인 예정론을 배격하려고 했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4) 현대 교회에서의 예정론 가치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정론의 입장은 17-18세기를 거쳐오면서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즉 17세기와 18세기 동안에 성장해 나간 모든 소종파들과 종교운동들이 거의 모두가 그 성격상 알미니안주의적 예정론에 그 기초를 마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자연신론(deism), 퀘이커 사상(Quakersim), 경건주의, 감리교 사상(methodism), 신비주의, 은사운동 등에 다 적용되고 있음을 바빙크는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22) 이로 인해서 바빙크의 다음과 같은 지적처럼 19세기에 이르러 서는 정통적인 역사적 개혁교회의 예정론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전의 모든 시기의 모든 개념들이 오늘날의 신학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영원히 시간 이전의 기간이라고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근거에서 예정의 작정을 완전히 부인하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고, 준비되어졌다고 여겨서는 안되고, 선택과 유기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예정은 시간 내에서 계시된 영원하고 내재적인 신적 활동과 통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작정은 역사의 사실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시간과 영원,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 모든 구별이 사라지고 유신론이 범신론으로 대치되어졌다.23)



특히 19-20세기에 와서 정통적 개혁교회 예정론을 변질시킨 형태로는 벌콮의 지적처럼 슐라이어막허와 칼 바르트를 들 수 있다. 먼저 벌콮은 슐라이어막허에 의해서 예정론이 다음과 같이 변질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슐라이어막허의 시대 이후로 예정론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했다. 종교는 절대 의존 감정으로, 즉 모든 인간의 결심과 행동들을 미리 결정하는 불변적인 법칙들과, 이차적인 원인들을 가진 자연질서에 고유한 인과율(cauality)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예정은 자연히 세계 내에서의 보편적 인과 관계나 이러한 선(先)결정(범신론적 운명론)과 동일시되었다"24).



다음으로는 바르트의 예정론을 지적하고 있는데 벌콮은 비록 바르트가 예정론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의 예정론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예정론과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바르트는 이 예정론이 하나님의 선택과 계시, 소명 등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기는 하나 바르트는 예정에서 사람들의 예정된 분리(선택과 유기)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선택을 특별한 선택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25)



이처럼 바르트는 예정론에 있어서, 그는 선택이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가 선택되었다고 진술하면서, 역사 선상에 나타난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속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대신한 유기의 대상이면서, 선택의 대상이요, 선택의 주체라고 언급한다. 이런 그의 입장은 오토 베버가 요약한 『칼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란 저서를 보면, 바르트(Barth)는 칼빈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결국 분리시켜 놓았다는 비판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은 없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언급한 표현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선택받은 인간'이라서 인간에게는 첫 번 것 즉 선택과 축복과 생명을 허락하셨고, 자신에게는 둘째 것 즉, 저버림과 형벌과 죽음을 돌리시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시 택함 받은 자와 저버림 받은 자 사이에는 구별이 없고 불경(不敬)한 자와 믿는 자 사이에 구별이 있다"라고 언급한다.26)



이와 같은 슐라이어막허와 칼 바르트를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신학적 성격은 역사적 개혁교회의 성경적 예정론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미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펠라기안파와 반(半)펠라기안파의 신학적 입장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알미니안적인 예정론의 성격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알미니안주의와 칼 바르트의 입장을 거의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재 한국교회의 현장을 생각할 때 칼빈주의적 예정론이 거의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신비주의를 통한 알미니안적 영향들 때문에 오늘날 성경적 예정은 극단적이고, 무익하며, 교회에서 가르쳐서는 안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론



지금까지 본인은 예정론의 교리사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참되고 바른 성경적 예정론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질시키려고 했던 펠라기우스도 문제가 되지만 반(半)펠라기우스와 그리고 그 성격을 같이하는 알미니안주의가 더 심각하게 이 예정론를 변질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연구해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알미니안적 예정론과 개혁신학적 예정론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잘 정립하는 것이 매우 큰 과제로 남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칫 예정론을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면 여전히 알미니안주의의 방식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한국의 모든 교회가 신학적 성격으로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는 풍토 속에서는 더더욱 이 차이를 명확히 정립하면서 역사적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오늘날 알미니안주의의 예정론 선에서 예정론을 언급하면서 중도적인 선을 표명하고자 하는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이런 입장도 철저하게 배격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예정론의 교리사적인 고찰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참된 성경적 예정론이라고 인정되었던 역사적 개혁신학 안에서의 예정론은 이런 방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배격한 방식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처럼 철저하게 역사적 개혁신학의 선에서 예정론을 말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주의의 예정론 형태가 전교회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말하고 가르치고자 했을 때는 위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희생과 순교의 각오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런 길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어도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 진리의 내용이 참된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분의 진리가 가리워지거나 변질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미주



1) Loraine Boettner, 칼빈주의 예정론, 김남식, 홍의표역, 베다니, 1996, p. 17.

2) Inst 3.21.1.

3) Inst 3.21.3

4) A.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 2.

5) Louis Berkhof, 조직신학(上), 권수경, 이상원역(譯),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 311.

6) Ibid. p. 312.

7) Ibid.

8) Inst 3.22.8.

9) Inst 3.22.8.

10) 벌콮도 이런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예정의 열매인 이 은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선에 따라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요, 인간의 공로에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Louis Berkhof, 기독교교리사, 신복윤역, 성광문화사, 1994. p. 239).

11) Louis Berkhof, 조직신학상(上), op. cit., p. 312.

12) John Calvin,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죤칼빈의 신학논문), 김진수,김기수역, 생명의 말씀사, 1991. p. 315.

13) Ibid. p. 313.

14) Ibid. "이 이상한 전염병(피기우스의 논고)이 퍼지지 않도록 저들이 좋게 나쁘게 저들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고 있는 쓸데없는 반대론을 묶어서 손쉽게 논파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Ibid. p. 314).

15) Inst 3.21.3-4.

16) Inst 3. 21. 1.

17) "네덜란드의 칼빈과 칼빈주의", W. Robert Godfrey저, 칼빈이 서양에 끼친 영향, 스탠포드 리드편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p. 122.

18) 성경과 신조, 박해경저, 아가페문화사, 1991. pp. 184-185.

19) 칼빈주의의 5대 강령, 데이비드 스탈리, 커티스 토마스공저, 생명의 말씀사, 1990. p.15.

20) P. Sachff, The Creeds of ChristendomⅢ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Co, 1998). pp. 556-558.

21) A.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 17.

22) Herman Bavinck,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 514.

23) Ibid. pp. 530-531.

24) Louis Berkhof, 조직신학(上), op. cit., p. 313.

25) Ibid.

26) 오토 베버저,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김광식역,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107-108.

 

 

 

 

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②

( 교리적 연구를 중심으로)





2000. 5. 4. 발표자: 신원균 강도사



서론



우리는 지난주에 예정론의 역사적인 성격을 함께 고찰해 보면서 예정론에 대한 이해가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았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예정론을 가르치는 목회자가 희귀하고 또한 예정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려고 할 때 수많은 핍박과 조롱을 감수해야 때에 이 예정론에 대한 연구는 더욱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역사적 개혁교회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예정론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게 되면 교회는 온통 인본주의적인 성격으로 변질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중요성을 기초로 하면서 이제 예정론에 대한 두 번째 연구를 시작하고자 한다. 본 논고에서는 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예정론의 성격을 자세하게 고찰하면서 전체 개혁신학에서 확립한 예정론의 교리적인 특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예정론의 형태.

1) 본문 요약

가장 핵심적인 논점의 요약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개혁파의 입장
항론파의 입장

ⓐ항: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

ⓑ항: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항: 인간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이 복음을 주시는데

ⓓ항: 그들에게 주어진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되는 것이다.

ⓔ항: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이 불신앙의 원인과 그 죄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로서 다음과 같다(엡2:8)

ⓕ항: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항: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항: 이 선택에는 다양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관한 하나의 동일한 작정이 있을 뿐이다.

ⓙ항: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 선택의 선행 조건이나 원인 등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 따라서 선택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선행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선택받음으로 인하여 믿음과 거룩함과 그 밖의 구원의 은사를 얻게 되어 결국은 그 열매로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항: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 은혜로운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데,

ⓛ항: 그가 행하신 선택은 중단되거나 변하거나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또한 택함 받은 자는 버림받거나 그 수가 감소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항: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정도와 그 방법은 다양할 수 있긴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 불변한 택정함의 확신을 얻는 것은 --- 그것은 성령의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바 구원받는 자의 확실한 열매를 잘 지켜 나감으로 이루어진다.

ⓝ항: 이 선택을 잘 깨닫고 확신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 겸손해지며, 자비로우심을 경외하며, 나태한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며, 세속적인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며, 그 뜨거운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


ⓐ항: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항: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 따라서 선택은 불완전하고 취소될 수 있으며 미결정적이고 조건적이든지, 또는 완전하고 취소될 수 없으며 결정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항: 오히려 모든 가능한 조건들로부터(이 중에는 율법의 행위들이 포함되는데) 또는 모든 사물의 질서로부터 믿음의 행위를 주셨다는 뜻이다.

ⓓ항: 믿음에 이르도록 선택을 받는 조건에 있어서는 먼저 인간은 영생을 얻는데 합당한 올바른 본성을 가지며 경건과 겸손과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 하는데, 마치 선택은 이러한 성품들에 의존해 있는 것과 같다.



ⓔ항: 비결정적인 상태로 택함을 받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예지된 믿음과 회심, 거룩함, 경건한 등의 생활 등을 이미 시작했거나 얼마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선행(先行)으로서 요구되는 조건이다. 그런데 이 조건은 완전히 선택될 사람들에게 보여질 일이며, 이러한 요소가 없다면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택은 일어날 수 없다.



ⓕ항: 하나님의 작정에도 불구하고 택함받은 사람들 중의 얼마는 여전히 멸망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그러하다.



ⓖ항: 선택받은 자의 열매나 자각(自覺)이 없으며, 더욱이 이에 대한 확실성도 없고 다만 가변적이며 불명확한 조건이 있을 따름이다.



ⓗ항: 그 누구도 --- 저주를 받게 하지도 않으셨고 ---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사귐에서 벗어나도록 하지도 않으셨다.



ⓘ항: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보다는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낫고 가치 있기 때문이다.




개혁파의 입장

ⓞ항: 또한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졌듯이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시간과 장소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 그 거룩한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북돋우고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일어남을 알 수 있다.

ⓟ항: 그 외의 사람들은 --- 스스로 파멸에 빠져 구원의 믿음과 회개하는 은총을 받지 못한 채, 그들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자조하여 끝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지은 모든 죄악으로 인한 결과이다.

ⓠ항: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이 방법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 인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이를 행하되 풍성한 은혜를 기다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비록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돌아와서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고 사망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거룩함과 온전한 신앙에 이르기가 어렵다.

ⓡ항: 그러므로 믿는 자의 자녀는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계약으로 인하여 그 부모의 믿음을 따라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들은 --- 자녀들이 택함 받아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항: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엄한 유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2) 개혁파의 평가

개혁파의 입장에 반(反)예정론적인 자세를 가진 항론파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평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도르트 신조의 최종 합의된 본문 조항에 나타난 평가와 당시 총회에 참석한 개혁신학자들 중에서 지역별로 평가한 입장을 세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합의된 조항의 평가

①항: 첫 번째 정리된 내용은 구원의 대상에 대한 입장으로 항론파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개혁파는 "영원 전부터 특정한 수를 택하여 뽑으셔서"라고 증거 하면서 성경에서는 제한된 특정의 대상을 구별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요17:6),(행13:48),(엡1:4).



②항: 본 항에서는 항론파가 선택의 종류를 다양하게(불완전한 것, 완전한 것) 나누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하면서 성경에서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제한적으로 선택한 특정한 사람들만이 구원의 과정을 성취해 가는 것으로 확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구원의 과정을 뒤바꾸는 것은 "구원의 보배로운 줄을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해 주고 있다.



③항: 본 항에 있어서 항론파들은 구원의 성격에 대해서 제한된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을 부정하며 또한 일반적인 선택도 믿음의 행위에 의한 구원임을 즉 조건에 의한 구원임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개혁파는 이들의 이런 논점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게 되었다고 오히려 역설하고 있다. 즉 디모데 후서의 말씀을 증거로 해서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라고 제시하면서 구원의 성격은 절대적인 은혜의 성격임을 증거하고 있다.



④항: 본 항에서는 위 항의 구원의 성격에 있어서 그 근거를 항론파가 본성과 경건과 겸손과 성품에서 찾으며 선택은 이런 조건들에 의존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개혁파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즉 이런 입장은 펠라기우스의 입장임을 지적하고 오히려 성경은 에베소서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라는 말씀처럼 구원은 오직 은혜와 선물의 성격임을 다시 확증해 주고 있다.



⑤항: 본 항에서는 구원의 내용들에 대한 언급으로서 항론파들은 믿음과 이 믿음에의 순종, 거룩함, 경건함, 견인 등은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선택에 이르는 조건이라고 증거 하는데 개혁파에서는 이런 가르침은 성경과 모순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즉 에베소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라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선택은 거룩함에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부르심이지(목적) 거룩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조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선택의 열매로서 거룩함이지 조건에 의한 선택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⑥항: 본 항은 구원의 확실성 즉 성도의 견인 에 대한 언급으로서 항론파들은 "구원받은 자도 여전히 멸망할 수 있다"라고 언급하지만 개혁파는 이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즉 이런 주장에 의해서 하나님이 증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변덕스러운 분"으로 묘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성도의 궁극적인 위로"를 무너뜨렸다고 반문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 6:39)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완전히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⑦항: 본 항은 위 항의 내용과 연결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내용을 증거하고 있는데, 항론파들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증거 하는 개혁파는 이들의 "불확실한 확실성"이란 말 자체가 모순된 말이라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라는 말씀처럼 성경에서는 성도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음이 명백히 증거 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라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것으로 큰 소망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⑧항: 본 항에서는 1항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즉 구원의 대상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멸망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고 항론파들은 주장하지만 개혁파는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13:11), (롬9:18), (마11:25-26)라는 말씀들을 통해서 대상은 분명히 제한되어 구별되어 있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⑨항: 마지막 항은 선택의 실제적인 결과, 즉 구원받고, 받지 못하는 현상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가치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항론파들은 주장하지만 개혁파는 "여호와께서 오직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4-15)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인간의 어떤 가치에 의해서 구원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과 의지에 속한 것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1)



(2) 각 지역별 평가

① 네덜란드 입장2)



ⓐ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의 입장



그는 예정(선택과 유기포함)은 두 가지가 아니라 단일한 예정임을 증거하고 있으며, 신자들을 구원하는 첫 기초(원인)는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과 하나님의 선택이 그 원인이요 구원뿐만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는 모든 신앙의 기초라고 증거하고 있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인간의 예정은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하고 그 자체가 역시 절대자유롭고 참되고 은혜로우신 주의 기뻐하심에 따라 그의 영광의 찬양을 위해서 온 인류 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능력 있게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결정이다라고 증거하고 있다.3) 그리고 선택의 원인에 대해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선택의 추진하거나 움직이는 원인은 오직 전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요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요 하나님밖에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증거하고 있다.4)



그리고 선택의 열매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도 그는 "그리스도로 선물하시는 은혜, 소명, 양자로 삼음, 견인의 은혜는 어떤 수단으로서 구원 자체에 선행한다. 즉 이 신앙과 그와 같은 순종, 그 안에서의 견인은 택함을 받을 자들 안에 있는 선택을 위해서 미리 예견된 어떤 조건이 아니요, 역시 그것 없이 그런 일이 없는 원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선택의 고유한 역사(열매)이다"라고 증거하고 있다.5)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한 번 주어진 택자들의 신앙은 그들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 때문에 그들 안에서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비록 어떤 때에 그것이 적어지거나 커질지라도, 그것 자체가 잃어버릴 수 있고, 잃어 버렸어도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6).



다음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구원받은 선택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견인할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견인에 대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으로부터(렘32:40, 요4:14), 그리고 택자들에게 고유한 신앙의 특별한 느낌으로부터(딛1:1, 살후3:2), 구원의 날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에 대한 인치심으로서의 성령으로부터(엡1:13-14), 진지한 기쁨과 선행들과 믿음과 사랑의 성찰로부터(벧후1:10) 확신하기 때문이다"7)



ⓑ 루베르투스(Sibrandus Lubbertus), 폴리안더(Johannes Polyander), 티시우스(Antonius Thysius), 발레우스(Antonius Walleus)의 입장.



먼저 선택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특별한 사람들의 선택의 원인은, 그것에 의해서 오직 스스로 행하시는 주께서 하나의 원인이나 조건, 혹은 어떤 능력이나 가치로서 앞서서 있어야 할 신앙이나 순종, 완전성을 고려함이 없이 저보다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주고자 하셨던,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의논과 그의 뜻의 기뻐하심이다"8).



그리고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사람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의 결정으로서 다시 부름을 받거나 깨어질 수 없다. 그 때문에 택자들의 수는 그렇게 확실하고 명백하여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소수이고 다수의 유기자들에 비해 적은 무리일지라도, 성경에는 셀 수 없다고 언급되고 있다"9)



또한 유기자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운명에 합당하고 정당한 원인 이외에 다르게 아무도 내버려두지 않으실 지라도, 택자들도 그들의 선택 전에 주 앞에서 비참성의 같은 상태에 있었던 대로, 어떠한 이와도 결합되지 않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와 주께서 원하시고 자신의 백성과 관련된 자신의 능력 이외에, 왜 주께서 저들보다 이들을 버리실 만한 다른 원인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유기자들을 어떤 진노의 단계로 심판하셨던 원인은 정당하게 그들의 불복종과 불신앙에 있도록 하였다"10)



② 독일

ⓐ 헷센(Hessen)의 입장11)



우선 구원에 이르는 선택의 결정에 세 가지 내용을 포함시켜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첫째로 타락한 인간들 중에서 그 수가 하나님께만 알려진 확실히 정한 사람들을 그의 뜻의 자비로우신 성향에 따라 그의 영광의 찬양을 위해서 스스로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그들을 자신이 내던져진 그 안에서 일반적인 비참으로부터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둘째로 선택의 의미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지극히 높은 축복으로 영생과 영화와 구원에 이르도록 정한 것이며, 셋째로 그것을 통하여 의도된 목적에 이르도록 하는 어떤 수단들에 대한 묘사와 정하심이 능력 있게 택한 자들에게 주셔서 그들이 그 수단들을 통해서 실패함이 없이 영원한 축복에 이르도록 하는 수단들에 대한 결정이다. 그리고 성경에 따라 영생에 이르는 선택은 하나님의 의지의 기뻐하심에 따라, 순수한 은혜로부터 친히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타락한 인류로부터 긍휼히 여기시고 그 같은 자들을 죄의 일반적인 곤고함과 그 부패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고 그 수단들을 그가 택자들에게 능력으로 선물하시는 확실히 정한 수단들을 통하여 미리 정한 목적인 영생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고 실패 없이 이끄시고자 하셔서, 영생에 이르기로 완전히 택한 바 된 모든 이들이 영원 전부터 수단들을 통하여 때가 되어 같은 것에 필연적으로 그리고 실패함이 없이 이르게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이다"12)



ⓑ 브레멘(Bremen)의 입장13)



신적인 선택의 결정은, 하나님께서 그의 특별한 긍휼과 영광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전 인류의 부패된 자들 중에서 확실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동일한 자들을 그의 은혜의 교통을 위해서 능력으로 부르시며 외롭게 하시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안에서 영화롭게 하시기로, 영원 전부터 세상의 기초 전에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그 유일한 기뻐하심으로 결정하셨던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선택에 대한 명확하고 완전하며 전적으로 유일한 결정이다. 이 결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만큼 전적으로 자유롭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하시는 중보자요 인간의 화해 자로 삼으셨을 때, 전적으로 외로우시며, 두 분의 의도가 즉 구원의 은총과 영광을 주기 위함인 대로 전적으로 자비로우시다.14)



선택은 우리가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채택되거나 혹은 능력 있게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살고 영원한 영광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얻을 것임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다. 또한 이 생에서 이런 선택의 열매는 확실하고 커서, 우리가 소명과 칭의 후에 우리 안에서 느껴지고 이 곤비한 생에서도 확고한 것이다. 죽음 후에는 더하고 영광의 부활 후에는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하다.15)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 죽은 신자들의 자녀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자들을 사랑하시는 동일한 기뻐하심으로부터 그들도 사랑하신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그들도 언약에 근거하여 거룩하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들은 거룩한 세례에 의해서 환영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한다.16)



그의 의와 그의 능력을 찬양하도록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영원 전에 인류 중에서 타락한 어떤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그들의 죄와 진노 가운데 내버리시고 진노하실 것을 결정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신구약의 시대를 통하여 영원하고 불변하며 완전하고 전적이며 유일한 결정이라 하며, 특히 유기에 대한 결정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저주를 받은 모든 이들은 모두가 함께 공의로이 그 죄들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자들 중에서 어떤 정한 사람들을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부르시는 원인은 그의 의지의 긍휼이시다. 부름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그의 의로운 판단과 그의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의지에 따라 내버리시기로 결정하신 자들이다.17)



2. 웨스트민스터에 나타난 예정론의 형태.

1) 정의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 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며,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시는 이도 아니시다. 제 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을 제거시키지 않고, 오히려 확립하시는 분이시다(3장 1절).

하나님께서는 장차 일어날 듯한 혹은 일어날 일을 무엇이든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을 작정하실 때, 그것이 장차 있을 것으로 예지(豫知)하셨거나, 또는 그 가정된 조건들에 근거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지 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3장2절)





본 항에서는 첫째로 예정의 주체는 영원 전에 자신의 뜻 가운데서 변함 없이 정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럴 때 죄와의 관계와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체적 자리를 핫지(A.A. Hodg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총괄적인 목적은, 그 전체에나 그 어느 구성 요소에나,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 목적이 포함하지 않으며 결정하지 않는 사건들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최고 주권적인 목적이며, 오직 '그의 뜻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의존할 뿐이다. -- 하나님의 총괄적인 목적에는 원인과 조건들을 포함하며 결정할 뿐 아니라, 그 조건들에 의존하는 사건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건들의 의미 있는 성격과 그 상호관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결정한다"18)



그리고 이어서 고백되는 『예정예지』에 대한 내용은 다분히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에 대한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즉 알미니안 자들은 하나님이 자유 행동을 확실히 예지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행동들을 결정하신다는 것은 부인한다. 그러나 개혁파는 하나님이 자유 행동을 장차 있도록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확실히 장차 있으리라는 것을 예지하신다고 주장하게 된다.19)



2) 목적과 확실성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3장3절)

이 천사들과 사람들은 이와 같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리고 변치 않게 계획되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의 수효는 확실하고 확정적이므로, 그것은 더하거나 뺄 수가 없다.(3장4절)



본 항에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궁극적인 목적 또는 동기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 최종적인 목적은 인간의 공로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의 찬란한 은혜에 찬양이 돌아가게 하시려는 것으로 확정짓고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선택의 확실성에 대한 강조로서 선택자들의 불변적인 숫자의 확정성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3) 선택의 원인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 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 그러나 믿음, 또는 선한 행위,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인내, 또는 피조물들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들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저희들을 선택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이 아니다.



본 항에서는 알미니안과 계속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선택의 원인에 대한 내용이 명확히 정리되고 있다. 즉 선택의 원인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뜻에 기초한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그 목적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향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믿음, 경건, 거룩함 등도 절대로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핫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알미니안파는 확실히 예지된 믿음과 회개를 조건으로 그 개인들을 선택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은 그의 최고 주권이 기뻐하시는 대로 어떤 개인들을 선택하셔서 영생과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과 조건을 얻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믿고 회개하도록 선택하시는 것이지 그들이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다"20)



4) 수단과 방법까지도 예정(선택의 열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意思)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미리 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 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 때를 따라서 역사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되며, 성화되며,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 되거나, 성화 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3장 6절).



본 항에서는 예정의 범위에 대한 고백으로서 예정은 예정의 내용을 성취해 가는 모든 수단과 방법들까지도 예정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은 이미 도르트 신조에 있어서도 항론파들이 믿음을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여러 가지 구원의 열매들을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조건이라고 계속 제시했던 내용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 고백서에서도 도르트의 입장에 따라서 수단과 방법도 선택의 내용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선택의 열매로서의 특징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핫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하고 총괄적인 의도지만, 거기 포함된 여러 가지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각각 서로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성취하시려는 목적들을 정하실 때에, 동시에 그 목적을 위한 수단들을 정하신다. 개개의 목적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총괄적 목적은 필연적 논리적 순서로 개개의 목적을 위한 수단들보다 먼저 있으며 그 수단들의 방향을 정한다".21)



5) 유기의 원인과 목적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 위에 행사하시는 그의 주권적인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는 바, 택함 받은 자 이외의 나머지 인류에게는 그 자신의 뜻을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버려두시고, 그리고 그들이 치욕과 진노를 당하도록 작정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이는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미케 하려 하심이다(3장7절).



본 항의 유기자의 선택 원인과 그 목적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다. 먼저 그 원인은 선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되어진 것이며 그 목적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움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죄의 책임에 대한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지만 웨스티민스터의 입장은 철저하게 유기의 원인을 단순히 인간의 죄책에만 두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두고 있으며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에 의해서 죄의 조성자가 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죄인들 자신의 죄책으로 인해서 멸망하도록 하셨음을 조화롭게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런 유기의 작정에 대한 내용이 오늘날에 와서는 많이 퇴색되어 '선택은 하나님께서 작성하셨으나 유기는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라는 "일방예정"으로 소개되기도 하며, 또한 유기의 원인은 '단지 인간 자신이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뿐이다'라고 하면서 유기의 원인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지 않고 단순히 인간의 죄에만 돌리려는 형태로 제시되기 한다. 이런 내용은 정통적으로 개혁파에서 제시했던 유기의 원인과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칼빈은 유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창조된 바 최초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타락하였음으로 그 멸망의 원인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상황에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묘하신 뜻으로 말미암아 이같이 스스로 초래한 파멸이 인류 및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 있어서 예외 없이 겸손의 이유가 되도록 작정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이 타락한 것은 인가 자신의 의지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22)



6) 예정론의 실천적 효과



아주 신비한 이 예정의 교리는 특별히 신중하고 조심성 있게 다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그의 뜻에 유의하고, 그리고 거기에 순종하여 그들이 받은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감으로, 그들의 영원한 선택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교리는 복음을 성실하게 순종하는 모든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찬미와, 경의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며, 또한 겸허와 근면과 풍성한 위로를 허락해 줄 것이다(3장8절).



본 항에서는 예정론의 실천적인 효과에 대해서 다양하게 정리를 해 주고 있다. 먼저는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할 수 있게 하며 또한 겸손함을 갖게 하여 감사를 드리며, 근면함을 주게 되고 마지막으로 가장 심한 핍박과 고난 중에서도 실제적인 위로와 격려를 얻게 하는 것으로 고백되어지고 있다.



3. 반대자들의 대표적인 주제들.

다음으로는 예정론을 다루는데 있어서 늘 공통적으로 반대되는 반론들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아래의 주제들은 현재도 역사적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세워 가려고 할 때 가장 방해가 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정립을 해야 할 것이다.



1) 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본 주제에 대해서 가장 대표적인 표현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엽게 한 일도 없는데, 무슨 권리로 그들에 대해서 노하시는가? 원하시는 대로 사람을 멸망에 내어 주신다는 것은 재판장의 합법적인 선고라기보다는 폭군의 변덕과 같다고 의문을 갖는다"23). 이런 질문은 오늘날도 예정론과 관련해서 가장 심각하게 도전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결정권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에 대해서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최고의 표준"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뜻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심히 악한 짓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그러해야 마땅한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義)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왜 그것을 원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며, 그것을 찾아 볼 수 없다"24)



이와 같은 칼빈의 지적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비록 그 결정이 인간의 이해로 모두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인간이 보기에 불합리해 보여도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이기 때문에 가장 의롭고 공의와 정직을 가지며, 또한 아무 허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성의 최고 표준이 되며, 모든 법의 법이 됨을 깨닫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답변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25)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의 호기심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으로서 칼빈은 다음의 성경구절의 내용을 최고의 답변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20),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2)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

본 주제와 관련해서 반대자들이 제시하는 내용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은 일들을 왜 사람들에게 죄로서 전가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해야 좋은가? 그것은 전연 불가능한 일이므로 해보아도 무익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원인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26). 이와 같은 반대자들의 논점은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현재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피할 수 없이 하는 일 때문에 벌을 받아서는 안되다는 주장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면 어떻게 죄인들의 죄와 상관이 없는가? 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반대자들의 주장은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인 관점에 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이 주제는 개혁교회 역사 속에서도 가장 첨예하게 논쟁이 되어 왔던 주제이기도 하였다. 즉 이미 어거스틴 당시에도 죄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논쟁이 정리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미 이 논쟁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죄와 상관이 없다고만 말해도 비성경적인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주관하신다고만 해도 비성경적이라고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의 조성자는 아니지만 죄에 대한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결정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양쪽의 내용을 가장 조화롭게 정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27). 이런 칼빈의 입장의 어거스틴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것으로서 죄의 문제를 단순히 "허용"의 개념으로 피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의지로 작정하시고 주관하신다고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단순히 허용적 개념으로 이 어려움을 피해가려고 하는 태도는 "매우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짓으로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망대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고 단지 우발적인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으로,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실제적으로 인간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는 형태로 전락시키게 된다"28)고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칼빈은 3중적인 사역으로 풀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는 같은 한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각각 동시에 사역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은 한 동일한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고 사탄과 사람도 나름대로의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인간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이 해결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은 사역하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일이 진행되어지면서도 각각의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칼빈은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동일한 이 일을, 사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거나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만드는 일이 없이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같이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우선 행동의 목적을 생각하고 다음에 행동하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해결은 쉽다. 주의 목적은 재난으로 자기의 종의 인내심을 단련하려는 것이었고, 사탄은 욥을 절망 상태에 몰아 넣으려고 애썼고, 갈대아 사람들은 법과 공의를 어기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이익을 보려고 했다. 목적이 아주 다른 것이 벌써 행동의 특색을 뚜렷이 나타낸다. 방법도 거기 못지 않게 다르다. 즉 주께서는 자기의 종을 사탄이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시며, 심부름꾼으로서 갈대아 사람들을 택하여 사탄의 지배 하에 넘겨주신다. 사탄은 독을 묻힌 창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자극하여 그 악행을 실천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범죄로 돌진해서 온 지체를 죄로 물들이며 더럽힌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사람들 위에 사탄이 지배력을, 즉 악한 지배력을 행사할 때에, 사탄이 그들 속에서 역사 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독자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 그러므로 같은 행위를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에게 돌리는 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으며, 목적과 방법을 구별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아무 흠 없이 빛나며, 사탄과 사람의 추악한 행동이 그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29)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역에 대한 관점은 역사적 개혁신학의 예정론에 대한 핵심적인 이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45:7) 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30)31)



3) 선택 교리는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한다.

다음의 주제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이 사람들에게 나태를 조성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즉 선행에 대한 열심과 노력을 좌절시킨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가르침은 자신의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반대자들의 논점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선택된 목적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엡1:4). 만일 선택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에 있다면, 선택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는 구실을 우리에게 준다기보다,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 구원을 얻기에는 선택으로만 충분하다고 해서 선행을 중지하는 것과, 선택을 해 주신 목적인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는 것,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비교해 보라!32)



이런 칼빈의 주장은 도르트 총회에서도 가장 논쟁이 되었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은 성도들을 "거룩함으로 이끌기" 위한 예정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즉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그 조건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라는 말씀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예정론은 우리의 교만이 꺽여지고 제거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겸손하게 떨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바르게 경외하며 찬양하게 되는 기초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4)선택 교리는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본 주제도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처럼 예정론의 주제에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주제와 관련해서도 반대주의자들은 예정론이 경건한 생활에 모든 충고를 불가능하게 하므로 예정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늘 말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그 논점이 집약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도 악에 대한 해결 방식에서 칼빈이 3중 방식의 사역으로 제시했던 내용을 정리하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성경의 증거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즉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께로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신다"(요6:65)라고 증거하고 있지만 또다른 면에서는 "복음을 들어야 한다"(마13:9)라고 충고하면서 양면을 함께 말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 건전하고 엄격한 책망을 의약품처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서 그들 자신이 멸망하지 않도록 또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 예지 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책망이 유익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33)라는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시지만 인간의 의지가 억압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립하시는 방식으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자신의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해 가야 하는 것을 이해하면 위의 두 가지가 조화 있게 제시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4. 예정론의 실천적 효과들

본 항목에서는 예정론이 단순히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성도의 전 삶에 실제적인 원리와 기초가 되는 실천적인 것임을 정리하므로 서 예정론을 보다 더 우리의 삶에 가까이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8절에서 언급된 바 있지만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한다.

예정론의 가장 실천적인 내용은 바로 성도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도록 한다는데 있다. 성경은 이 내용과 관련해서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3:14)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정론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가장 깊이 경외하게 하는 원리가 됨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에베소서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5-6)라는 말씀을 통해서 정리하기도 했다.

칼빈은 이런 예정론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34). 또한 그는 이 예정론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켰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2) 구원의 확신을 심어 준다.

다음으로 예정론에 대한 이해는 성도에게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강한 확신을 심어 주기 때문에 구원의 소망과 위로를 갖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웨스트민스터에서는 베드로후서의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1:10)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예정론이 성도에게 얼마나 큰 구원의 확신을 주게 되는지 제시한 바 있다.



칼빈은 이 주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감화를 체험하는 곳이다. 그리고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위로를 준다. 불안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도리어 안정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느낀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평화로운 것을 제공하신다. 그리고 안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곧 우리들의 진정한 안식이 되는 것이다"35). 또한 칼빈은 이처럼 귀중한 구원의 확신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악한 것으로서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36)라고 말해 주고 있기도 하다.



3) 겸손하게 한다.

예정론을 통해서 계속해서 증거 되고 있는 말씀은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심 가운데서 전적인 은혜와 선물로 거저 주어진 것"(엡1:6, 2:8)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 할 때만이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고 그러므로 겸손함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런 겸손함을 배우게 될 때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기초가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37)라고 말하면서 이 교리가 인간을 낮추어 겸손케 하는 기초가 됨을 지적하고 있다.



4) 근면함을 심어 준다.

이 내용은 이미 베드로후서1:10에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라는 내용과 에베소서 2:10 "우리는 --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내용을 통해서 확인한 바 있는 것처럼 선택이라는 것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정론 자체에 거룩함으로 세워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성도는 결코 게을러 질 수 없고 오히려 최고의 노력을 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에베소서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라는 말씀은 가장 핵심적인 성경의 증거로 늘 제시되고 있다.



5) 실제적 위로를 제공해 준다.

이 예정론의 교리는 핍박과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으로 위로를 줄 수 있는 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은혜로 선택해 주시고 그 선택하신 자들과 함께 하시고 또한 마지막까지 버림받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고난도 문제될 수 없는 정신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이미 칼빈이 당시 핍박받는 교회의 성도들을 변호하고 위로를 주기 위해서 기독교 강요를 작성했던 것처럼 이 예정론은 핍박받는 교회를 위해서 가장 마지막까지 최고의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실제적인 위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롬8:33-39)



6) 선교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본 주제는 예정론을 반대하게 될 때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이기도 하다. 즉 예정론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 사역에 있어서 방해가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것을 침묵하거나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특히 미국장로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려고 할 때 예정론이 선교사역에 방해가 된다는 사상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급기야는 3장의 예정론 내용을 역사적 개혁신학의 선에서 해석하지 않고 보편구원론적인 개념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더 나가서 "선교장"이 추가되기 했다. 먼저 3장의 바뀐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관한 교리는 전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의 교리와 조화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의 아들의 은사는 모든 세계의 죄를 위한 화해로 이해하며, 그의 구원의 은혜를 구하라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멸망한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은, 하나님은 어느 죄인의 죽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구원을 준비하셨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제공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가 범한 죄 이외의 죄 값으로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체의 내용이 알미니안적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은 모든 인류가 구원받도록 하는데 있어서 "조화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장"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로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3장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를 정확하게 하면 예정론은 복음전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마지막까지 선교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선택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악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일지라도 전도의 손길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굳이 "선교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33개 조항 전체가 이미 예정론을 밑바탕으로 해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예정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모든 장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과 복음전도에 대한 가장 깊은 초석으로 이미 예정론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예정론과 관련해서 좀더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

1) 조직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위치

오늘날 개혁신학을 주장하는 학자들 안에서도 예정론의 위치를 "신론"과 "구원론" 중에 어느 쪽에 두는 것이 좀더 바른 개혁신학의 선에 있는 것인가?를 정하는데 있어서 많은 논점들이 있다. 이미 베트너와 같은 신학자도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전개함에 있어서 첫 부분에서 예정론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유의할 만한 일이다. 그는 먼저 기독교 체계의 다른 교리들만 전개시켰고 심지어 당연히 이 교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일곱 군데에서조차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교리를 충분하게 전개시킴으로써 그 전 체계의 최후를 영광스럽게 장식하였다"38)라고 언급하면서 예정론을 구원론에서 다루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예정론을 신론에서 다루어 왔고 또한 그렇게 신론에서 다루게 될 때 개혁신학의 본질적인 특성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바빙크의 지적을 통해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면 베트너의 주장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예정론은 비록 기독교 강요에서는 구원론적인 내용에서 포함되어 있으나 칼빈의 신학사상체계를 보게 되면 이미 1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전장에 골고루 이 예정론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원론에만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오히려 칼빈의 주석을 통해서 보면 예정론이 신론에 더 깊이 기초되어 전신학의 내용의 기초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에 좀더 깊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런 내용에 대한 역사적인 형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루터는 쯔빙글리나 칼빈과 같이 예정론을 옹호했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 들면서 예정론의 이해가 이신칭의를 강조하면서 구원론에 집중하면서 예정론의 형태가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구원론에서 예정론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은 결국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부터 보다는 사람의 잃어진 상태로부터 예정을 이끌어 내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39)



이렇듯 점차적으로 루터의 초기 입장과 전체 종교개혁의 입장을 희생시켜 나간데 비해서, 개혁파의 입장은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그의 논의를 단순히 인간학적 근거에만이 아니라, 특히 신론적 근거에 두면서, 즉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그 논의를 이끌어 내면서 예정론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이점에서 그들은 로마서 9-11장에서 죄론과 은총론에서 시작하여 선택론에로 나아가고, 에베소서1:3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은 사도 바울의 예를 따라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바울이 선택을 언급하면서 신론에서 구원의 모든 축복을 선택으로부터 이끌어 내었던 것과 같이(롬9:29이하, 엡1:4이하) 개혁신학자들은 신론에서 예정론을 제시하는 구조를 확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40)



곧 신앙의 생활은 참으로 선택론을 고백케 하는 조건이 되나, 선택의 사실은 모든 영적 은사의 원천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과 첫 원인인 것이다. 이것은 칼빈만이 아니라, 해밍(Hamming), 부쳐, 올레비아누스 등의 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정이 신론의 한 부분인가(선험적 순서), 아니면 구원론의 시작과 중간에서 다루어져야 하는가(후험적 순서) 하는 것이 꼭 원칙상 본질적 차이를 함의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개혁신학자들은 선험적 순서(신론)를 따랐고, 루터파와 알미니안, 그리고 로마카톨릭과 대부분의 근대 교의학자들은, 점차 후험적 순서(구원론)를 취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 차이는 개혁파가 예정론을 선험적이고, 철학적이며, 결정론적인 신론 개념에서 이끌어 낸 것에 있었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은 신론과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칠 때마다 성경의 교리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정신은 더욱 철저하게 구별되어 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차이의 참된 원인은 칼빈주의에게 있어서 예정론이 단지 인간론적이고 구원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특히 신론적 의미를 갖는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는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예정론의 가장 주된 목적으로 확립되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42)



따라서 조직신학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의식보다는 성경의 계시에 더욱 충실하여 우선 순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을 우선한다면, 신론이든, 삼위일체든, 인간론이든 모든 교의가 구원론 이후에 자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교의학을 다룰 때에, 진리를 신자들의 의식에 주관적으로 들어온 것인 양 다루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계시한 것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바빙크는 이러한 방법만이 종교적 관심으로서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타당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43)



2)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우리는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을 살펴보면 모든 조항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정확한 일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제 1 조항에 대해서 즉, 항변파의 예지예정은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거부하는 내용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이 타락전이냐, 타락후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이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참여자들의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도르트신조의 공식적 입장은 '타락후 선택설'로 종결지어졌다. 그러나 화란의 엄격한 신학교수의 고마루스(F. Gomarus)는 '타락전 선택설'을 고집하였다. 고마루스 외에도 마코비우스(Maccovius)가 있었다. 그리고 남부 화란, 오베리셀(Oversel), 그리고 프리슬란드에서 온 대표자들은 이 문제를 결정치 말고, 양 파 모두를 만족시키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선호했었다. 곧 도르트회의 '타락전 선택설'을 반대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은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이 당시에 참여했던 다른 화란 신학자들은 4명인데, 그 중에서 3명(Johannes Polyander, Antonius Thysius, Antonius Walleus)의 공통된 입장과 이에 서명한 Sibrandus Lubbertus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여기에 F. Gomarus는 서명하지 않은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예정은 주께서 은혜로우신 그의 뜻의 기뻐하심에 따라(엡1:5,11; 롬11:5) 온 인류로부터 죄로 타락하여 이렇게 잃어버렸던 어떤 사람들을(롬9:15,16)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던 영원하고(엡1:4; 마25:34) 완전 자유롭고(롬9:15) 불변한(롬9:11; 롬11:28,29) 하나님의 결정이다."44)

위에서 언급한 진술을 정리하여 언급하자면, 타락전 선택설은 선택이 타락의 작정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타락의 작정을 예정의 가치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타락후 선택설은 타락이 선택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들 양 주장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강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타락후 선택설'의 강점45)은 이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두 죽게 되었지만, 그 중에, 선택이라는 '은혜'와 나머지는 아담 안에서 그 죄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른다는 '공의'가 타락전 선택설보다 더 강하게 논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성이 잘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주의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무 계획 없이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리고는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신 다음에야 선택과 유기를 하셨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지와 죄에 대한 작정은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예정의 대상에 대하여 타락의 작정에 선행하는 더 깊은 신적 작정이 있는 것이다. 이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는 것은 타락전 예정론이다.



타락전 예정론의 강점46)은 타락후 예정론의 "은혜와 공의"에 비하여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있다. 전자와 후자가 모두, 모든 유기자는 자기 자신의 죄가 그의 저주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점에선 의견을 같이하나(인간론), '타락전 선택설'론자는 유기의 궁극적인 원인은 타락에 선행하는 '은밀한 신적 작정'(신론)에 있다고 하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신학자들이(쯔빙글리, 칼빈47), 베자, 피스카토르, 퍼킨스, 호민스(Hommins), 보게르만(Bogerman) 등이 때때로 강력한 표현들을 사용했다.48) 최종 목적은 '타락후 선택론의 은혜와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택자에 대한 은혜와 죄인에 대한 공의'는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후의 대부분의 교회가 신조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은혜'와 '공의'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타락후선택설'이 선호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이 타락전선택설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49) 이와 같은 차이점을 발견하면서 본 저자는 타락전 선택설이 중심이 되면서 여전히 타락후 선택설의 내용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형식이 낫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결론



우리는 예정론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칼빈주의 신학의 출발점은 항상 인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완전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베트너의 지적처럼 이 체계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진리의 유일한 체계요, 전 세계에서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가장 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체계라고 확신한다. 또한 워필드의 지적처럼 "가장 논리 정연한 유신론이요, 가장 순수하고 건전한 복음주의요, 최고의 종교개념을 갖고 있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의 장래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칼빈주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세계에서 기독교가 전진해 가는 만큼 이 교리 체계도 점진적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우리는 소망할 수 있다.50)



이제 본 예정론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와 교리적인 연구를 마치면서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즉 오늘날 칼빈주의를 자신있게 말하는 자가 많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그 진리의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할지라도 그 참된 진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결코 무너지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기쁘신 뜻 가운데 오늘도 그 진리를 사랑하는 자를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며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일하실 것이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다룬 예정론의 논고를 마치면서 김영규교수의 다음과 같은 예정론의 가치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제시하면서 그 중요성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며 이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예정론을 통하여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고, 그런 예정론은 보이는교회 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 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특별히 순전히 영적으로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로 남아 있는 예정론 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 받는 자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 부패에 대해서 비판 정신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 칼빈은 예정론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정의함으로 복음의 순교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즉 예정론은 개척하는 교회에 신실과 정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개척된 교회에 내적인 성숙을 가져다준다. 권징에 있어서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되게 한다.5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



Q&A(교수님이 정리하신 내용)



1. 타락전 선택과 타락후 선택에 대한 정리.

타락전 선택과 타락후 선택은 모두 창조론과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 가운데서 (창조, 행위계약, 타락) 등을 결정하시기 전에 선택하셨는가? 아니면 이 결정을 하시고 선택하셨는가? 에 대한 차이인 것이다. 즉 실제적인 창조사건 이후에 선택했는가? 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오늘날 타락후 선택론의 개념이 이것으로 많이 오해되고 있다)



이 말은 시간적으로(역사적으로) 창조사건이 일어나기 전 즉 무(無)시간의 상태에 있던 영원 전에 타락전이나 타락후 모두 설명이 되는 것이다. 결국 두 개념 모두 하나님의 신적작정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52) 이것은 모두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서 되어진 일이기 때문에 장소와 시간에 국한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데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전 신적작정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논쟁의 내용으로 다루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역사적 순서와 논리적 순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역사적 순서에 있어서는 타락후 선택설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리고 전천년주의자들이 이 입장을 많이 따르게 된다. 다음으로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는 타락전 선택설이 더 합리적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천년주의자들이 이 입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미주

1)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7:7-8)

2) 네덜란드의 입장은 도르트 신조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도르트 신조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기 때문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와 루베르투스(Sibrandus Lubbertus), 폴리안더(Johannes Polyander), 티시우스(Antonius Thysius), 발레우스(Antonius Walleus) 등과 같은 신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들의 세부적인 입장을 더 깊이 살펴봄으로서 도르트 조항에서 합의된 내용의 성격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J.H. Donner en van S.a. Den Hoorn, Acta of Handelingen der Nationale Synod te Dordrecht ten jare 1618 en 1619(The Leiden Bij D. Donner, 1669), p. 616.(이후 Acta라함) 김영규, 도리트신조 연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미간논문, 1988. p. 71에서 재인용.

4) Ibid. p. 72.

5) Ibid.

6) Ibid.

7) Ibid.

8) Ibid. p. 41.

9) Ibid.

10) Ibid. p. 42.

11) 헤센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Georgius Cruciger(1575-1637), Paulus Steinius(1585-1643), Daniel Angelocrator(1569-1635), Rodolphus Goclenius(1547-1628).

12) Acta., pp. 363-369. 김종교,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정론에 끼친 영향 고찰, 안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pp. 26-27에서 재인용.

13) 브레멘에서 온 신학자는 다음과 같다. Matthias Martinius(1572-1630), Henricus Isselburg(1577-1628), Ludovicus Crocius(1586-1653)

14) 김영규, 도르트 신조 연구, op. cit., p. 73.

15) Ibid.

16) Ibid.

17) Iibid. pp. 73-74. 이 외의 팔쯔(Paltz)의 신학자들(Abrahamus Scultetus, Paulus Tossanus, Henricus Alting)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것은 복음을 듣는 모든 이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고자 하셨다. 복음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공동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순수한 은혜로부터 그가 원하는 신앙의 은사를 주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타락한 인류로부터 어떤 사람들을 자신의 소유처럼 택하셨다. 신앙은 선택의 열매이다. 선택의 원인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았을 때, 그의 자유로우신 의지와 은혜로부터 결정하였던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 이런 선택은 확고하여서 성도들이 타락할지라도,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이 누구인지를 안다"(Ibid. pp. 66-67),

18) A.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 65.

19) Ibid. p. 66.

20) Ibid. p. 70.

21) Ibid. p. 72.

22) John Calvin,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죤칼빈의 신학논문), 김진수,김기수역, 생명의 말씀사, 1991. p. 374.

23) Inst. 3.23.2.

24) Inst. 3.23.2.

25) (시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26) Inst. 3.23.6.

27) Inst. 3.23.7.

28) Inst. 1.18.1.

29) Inst. 2.4.2.

30) (출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잠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암3: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31)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명확하게 언급해 주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의지가 모든 것들의 첫 그리고 최고의 원인이라고 하나님께서 마귀와 불신자들을 그의 자유의지대로 복종케하실지라도, 하나님이 결코 죄의 원인이라고 부를 수 없고 악의 저자이거나 잘못에 대한 죄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참으로 미워하시고, 인간들 안에 있는 불의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불쾌해 하시기 때문에 진노하실 지라도, 그의 순수한 허락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역시 뜻과 신비한 작정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일들을 다스리신다. 비록 마귀와 유기자들은 하나님의 배역자들이고 도구들이며 그의 신비한 심판으로 종결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 하셔서 어떠한 것도 그들의 타락의 부패성은 축소되지 않도록 하셨다. 이는 비록 그 방식은 종종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그들의 악이 선한 목적에 바르고 정당하게 유익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CO Ⅸ, 713-4).

32) Inst. 3.23.12.

33) Inist. 3.23.14.

34) Inst. 3.21.1.

35) Insrt. 3.24.4.

36) Inst. 3.24.4.

37) Inst. 3.21.1.

38) Loraine Boettner, 칼빈주의 예정론, 김남식, 홍의표역, 베다니, 1996, p. 17., p. 428.

39) 개혁주의 신론, 헤르만 바빙크, 이승구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p. 511-512

40) Ibid. p. 514.

41) Ibid.

42) Ibid. p. 518.

43) Ibid.

44) 김영규, 도르트 신조 연구, op. cit., p. 40.

45) 바빙크가 생각하는 타락후선택설의 강점은 이렇다. "신적 작정들이 통일성만이 아니라 다양성도 나타내며, 이 작정들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인과적 순서도 드러내며, 창조와 타락이 단지 한 목적에 이르는 수단으로 여겨질 수 없으며, 죄는 진보의 요소가 아니라 우주에서의 교란의 요소로 여겨져야 하며, 따라서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바빙크, op. cit., p. 563).

46) 바빙크가 생각하는 타락전 선택설의 강점은 이렇다. "신적 작정들이 통일성만이 아니라 다양성도 나타내며, 이 작정들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인과적 순서도 드러내며 창조와 타락이 단지 한 목적에 이르는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하나의 종국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계시며, 우주에의 죄의 유입은 하나님께서 전혀 생각지도 못하셨거나 전혀 돌아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죄를 의도하셨다는 것, 그리고 창조의 사역은 곧 하나님의 구속 활동에 적용되어져서, 타락 이전, 즉 아담의 창조 때에도 그리스도의 오심이 분명히 고정되어 있었다는 사실들을 강조한다는 데에 있다(Ibid. p. 563)

47) 칼빈은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킬빈은 종종 타락후 선택론적 추론을 따랐다(Ibid. p.519); 칼빈의 타락전 선택설 입장은 그의 자필로서 기록된 짧고 명료한 예정에 대한 고백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인간의 창조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의논에 의하여 온 인류에 대해서 무엇을 행하고자 하시는지를 결정하셨다. 이런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논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자신의 순수한 상태로부터 타락하였고 그의 결함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영원한 죽음의 진노 가운데 몰았다. …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순서에 있어서 주께서 우리를 자신의 것들로 결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는 일보다 앞선다.(Tamtsi in Christo eligimur, ordine illud prius est ut nos Dominus in suis censeat, quam ut faciat Christi membra)" (CO 9권, 713-714).

그의 타락후 선택론의 입장은 그의 설교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할 때, 그가 다음과 같은 올바른 전제를 세우고 있음에 주목합시다. 즉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악 외에는 어떤 것도 보실 수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발견하실 수 있는 어떤 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에베소서강해, 상권, 존 칼빈, 김동현역(서울: 솔로몬, 1995), p.72)

48) 타락전 선택설의 강력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들은 정죄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순수하게 보이는 이들도 유기되고 정죄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은 죄와 상관없이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 짓는 사실을 의도하셨고, 그것이 발생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부르심에는 신실하게 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표현들이 항론파들에게 오용되었다. 그래서 도르트 회의의 회원들은 그렇게 너무 강력한 어구들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즉 영국, 브레멘, 헤센 등지에서 온 대표자들이 이들 표현들은 정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르트 회의는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비록 전택설이 이 고백서에 나타나 있지는 않아도 정죄 받지도 않은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도 고의로 이 문제를 결정하기를 거부하였고, 전택설과 후택설이 어느 한편을 들기를 거부하였다(바빙크, p.526-527); 루이스 뻘꼽은 도르트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둘 다 타락 후 선택론적인 견해를 표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의 타락전 선택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뻘꼽이 이러한 표현은 오해일 수 있다. 즉 "간과를 타락 이전에(소극적 유기), 정죄를 타락 이후(적극적 유기)에 놓음으로써 그것들을 분리한다는 점에서 비논리적이라고 언급된다"(조직신학, 상권, p.326)

49. 루이스 뻘꼽은 도르트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다 같이 타락 후 선택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진술했고(조직신학, p. 326; 7항을 보고 이런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바빙크는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전택설과 후태설 어느 한쪽을 결정하기를 거부하였다고 진술하였다(바빙크, p. 527), 그리고 김영규교수는 바빙크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제3장 6항에서 표현된 것은 분명히 선택의 대상이 타락한 인간으로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곧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진술한 것이다.

"선택되어 아담 안에서 타락한 그들은(Wherefore they are elected being fallen in Adam)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고 유효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되매 역사 하시는 그의 영에 의해서 믿음으로 부름을 받으며 의롭게 되고…(As God hath appointed the elect unto glory, so hath he, by the eternal and most free purpose of his will, foreordained all the means thereunto. Wherfore they who elected being fallen in Adam, are redeemed by Christ; are effecually called unto faith in Christ by his Spirit working in due season; are justified, adopted, sanctified, and kept by his power through faith unto salvation. Neither are by other redeemed by Christ, effectually called, justified, andopted, and saved, but the elect only)"란 표현은 인간과 천사들의 수가 가감함이 없이 영생을 위해 예정된 이후 영광을 위한 그 선택에 따라서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예정하였다는 의미에서 진술된 것들이다.

따라서 창조 전에 이미 택자들과 유기자들은 예정되었고 그 수단들도 예정되었으며 이제 6항에 와서 그 수단으로 타락과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이 기술되어 있다면, 분명히 타락전 선택설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와 헤르만바빙크의 신학" 김영규(개성연세미나 여름세미나, 1998), p. 14). 이렇듯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을 보는 시각이 다양할 정도로 그 입장이 분명히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오히려 라틴어역에서는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Quapropter electi, postquam(afther) lapsi essent in Adamo, a Christo sunt redempti(살전5:9 10; 딛2:14);…"(개혁교회신앙고백서, 최병섭엮음에서 인용).

50) Loraine Boettner, op. cit., pLoraine Boettner,p. 414-415.

51) 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개혁 정신(한국 교회가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미간논문, 1998. pp. 48-49.

52) 이것을 김영규 교수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개념으로 타락전과 타락후를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시간적 개념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창조사건 전에 또는 그 사건 후에 역사적으로 시간과 함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념 모두 영원 전에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영원 전에 타락의 결정 전의 인간을 선택하셨는가, 아니면 앞으로 타락의 결정 후의 인간을 선택하셨는가? 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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