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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순절`은 성경적인가?

수호천사1 2014. 3. 16. 08:40


Posted by 김삼 목사  2010/02/19


'사순절'은 성경적인가? [1]

 

 

  지난 2월 17일은 소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천주교 교회력의 올해의 이른 바 '사순절(四旬節/Lent)'이 시작됐다. 성금요일까지 40일을 금식/묵상 등을 통해 경건으로 채운다는 기간이다.

  요즘 한국 교계를 비롯한 온 세계에 관상(觀想) 영성(contemplative spirituality)이 만연한데, 일년 중 이때 만큼 관상과 관상기도가 강조되는 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계절에 관상가 토머스 머튼과의 '다리 놓기'를 시도한다거나 빅토르 위고의 세속철학적/애욕적인 '관상시편'(Les Contemplations, 1856)의 일부 종교적인 단편을 '재의 수요일' 의식에 비견하기까지 하는 등의 황당한 사례도 있다.

  과연 사순절이 성경적일까? 성경적이라면 얼마나 그러하며, 아니라면 얼마나 아닐까? 이에 관해 짧은 시리즈로 써 보기로 한다.

  참회 및 육욕의 날?

  사순절 속엔 복잡하고 다양한 "거룩한" 명절/절기가 들어 있다. 우선 '재의 수요일' 전날은 '참회 화요일'(Shrove Tuesday, 불어: 마르디 그라스/Mardi Gras)이다. 참회(penance) 또는 고백/고해(confession)를 하여, '면죄'(absolution) 선언을 받는 날이다. 올해는 2월 16일이 그날이었다.


  이날부터 다수의 교회는 강단의 십자가도 보라빛 천으로 덮어 가린다. 이날부터 사순절 기간 동안은 '알렐루야'(alleluia)나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Gloria Deo in excelsis) 등의 찬양도 삼간단다. 너무 화려해서(?)라나...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마저도 간단하지가 않다. 천주교에서는 재의 수요일 직전 일요일을 '참회 일요일'로 삼는다. 영국/아일랜드/캐나다/호주/뉴질랜드/미국(일부) 등의 영국 성공회 계열 교회에서는 단식재(斷食齋) 전의 첫 월요일을, 천주교는 재의 수요일 전 월요일을 '참회 월요일'로 지킨다. 성공회는 '재의 수요일' 전, 일/월/화요일 사흘을 '참회기간'(Shrovetide)으로 지킨다. 동방 정교회 계열은 별도로 그들 나름의 사순절 전 월요일을 소위 '정결 월요일'(Clean Monday)로 지킨다.  

  학자들은 참회 화요일의 역사를 주후 100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천주교 국가에서 육식을 삼가기 전날의 가장행렬 축제인 '카니발' 즉 사육제와도 관련이 있다. 미국에서는 주로 마르디 그라스나 참회 화요일(성공회/루터교/감리교)로 지키곤 한다.

  사순절엔 대체로 육식/지방식을 삼가기에, 참회 화요일엔 마지막으로 팬케잌을 던지며 자축(?)하는 팬케잌(Pancake Day, Pancake Tuesday) 날이기도 하다. 중세엔, 향후 40일간 팬케잌의 주 성분이기도 한 우유/계란/설탕/기름 등의 섭취를 삼갔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성찬(盛餐) 화요일'(Fat Tuesday)이라고도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인가 누군가는 그런 영양가 많은 음식들은 "정력/생식력을 강화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니까 40일의 금식/금욕기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기름진 진수성찬을 왕창 "때려 먹어 치우는" 날이다. 하와이의 '말라사다(튀김반죽) 데이'와도 일치한다. 나라마다 비슷하면서도 이름도 다르고 음식도 조금씩 다르다. 카니발을 지키는 구교 국가에선 단지 술/음식 등 식욕 뿐 아니라 성욕도 미리 왕창 해소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영국령 국가에선 이날 마지막으로(?) 기를 써서 운동을 하자는 양, '대중(Mob) 축구'를 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카니발 풍습이 유명한 브라질에서는 아슬아슬한 반라 차림으로 행진하며 삼바 춤을 춰 대는 여성들('물라타') 탓에 은근히 섹스관광 등 성문란도 심하여 정부가 고심하곤 한다. 해마다 이맘 때가 "물러 터진" 본국인과 외래인 사이의 성교섭 풍속을 부추긴다. 브라질의 악명 높은 성매매 어린이 인구는 약10~50만. 카르니발은 한 마디로 누구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날"이다. 주정과 마약 밀매/사용도 심하다.

  이런 것들은 브라질 뿐 아니라 카니발 때 중남미나 필리핀 등 카톨맄 국가들 일대에 흔한 풍경이다. 다만 올해초 대지진을 만난 아이티는 마르디그라스 카르니발 대신 조용한 애도의 날로 보냈단다.

 

  이 모두가 천주교 절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게 천주교가 "깨끗하고 청빈한 종교"라고 좋아하여 개종한다는 일부 한국 신교 신자들에 대하여 참 할 말이 없다.

  '재의 수요일'은 성경적인가?

  사순절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은 참 묘한 날이다. 천주교/성공회 사제들과 일부 신교 교파/교단 목회자들이 자기네 교인들의 이마에다 검은 재를 십자가 모양으로 발라 주는 날이다. 이 재는 지난 해 '종려주일(일명 성지주일)'에 썼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잿가루이다.  

 

  재의 수요일을 지키는 교파/교단은 다음과 같다. 

    로마 카톨맄교 (일부는 '재의 월요일')
    성공회 (시드니 대교구 제외)
    정교회 (일부)
    루터교회
    연합감리교, 웨즐리언(웨슬레) 교회
    개혁교회
    일부 장로교회 
    그리스도연합교회(일명 회중교회), 기독교회=기독제자교회
    아프리칸감리감독교회(AMEC), 아프리칸감리감독시온교회(AMEZC)
    일부 독립 침례교회
    하나님의교회(앤더슨총회)
    남/북 인도교회, 인도성공회
    나사렛성결교
    그리스도 커뮤니티교회
    자유교회(일부)
    자유카톨맄교회
    모라비아교회

  '정결 월요일(Clean Monday. 일명 Pure Monday, Ash Monday, Monday of Lent 또는 녹색 월요일=Green Monday)':


  다수의 정교회들(그리스/러시아/북미주/몬테네그라/이탈리아/마케도니아/아르메니아/시리아/콮팈/마론/터키/우크라이나/불가리아/루마니아/벨라루스..)과 동방카톨맄교회는 재의 수요일 대신 정결 월요일을 지킨다.

  왜일까? 왜 이래야 하나?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아마도 일부 독자는 과거 구약인들이 회개할 때 머리와 몸에 재를 얹지 않았냐고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신약인들도 그랬다는 기록이 있는가? 없다! 전혀 없다. 독자는 구약인인가? 옛 계명에 살고 있나? 그리고 설령 구약인들이 그랬기로서니 검은 십자가와 무슨 상관인가? 천주교가 만들어낸 발명품일 뿐이다.

  매년 이 맘때 검은 십자가 모습을 한 그들 신도들의 이마를 보면, 경건감은커녕 섬찟한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은 필자만인가. 왠지 이마에다 흑인(黑印)을 친 것 같은, 그들이 이른 바 '성호'라는 것에 의해 어디엔가 종속돼 있고 사로잡힌 듯한 느낌이다. 검은 십자가 인을 쳐서 어떻다는 것인가? 사제에게 그걸 받아서 기분상 더 경건감이 발동하여 더 거룩해진다는 말인가? 생활이 더 조신하게 된다는 뜻인가? 설령 그렇더라도 일종의 자/타 심리조작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검은 십자가 인'은 속죄와도 전혀 무관하다. 영적으로 아무 권능도 없다. 결국 십자가를 그어 주는 사제나 대상자의 심리 만족일 뿐이다.

  흙에서 흙, 재에서 재로?

  성공회나 천주교의 '재의 수요일' 미사 예식사란 게 있다. 그 중 하나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지어다"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진실로 통회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나이다. 비오니 이 재를 (십자성호) 축복하시어 재를 받는 이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 용서를 얻게 하시며,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아멘. (출처: 대한성공회)

  사제는 먼저 이마에 재를 바르고, 교우들의 이마에도 바른다. 사제는 이때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선언하고,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 선언은 창세기 3'19에서 딴 것이다(욥서 34'15, 전도서 3'20 참조).  

  자..그런데 재가 흙이랑 무슨 상관인가? [흙=재]이고 [재=흙]이라면, 인생이 재에서 났으니 재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인가? [흙=재]라는 사상은 오히려 힌두교에 가깝다. 그네들은 장례도 화장으로 하니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힌두교 사람들은 이마에다 뭘 찍기를 잘 한다. 관상이 원래, 고대 광야 수사들이 동양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추정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의 이마에 재 찍기도 혹시 동양 종교에서 오지 않았을까? 일말의 의혹이 가는 대목이다.

  필자는 아둔해선지 흙과 재와의 '상관관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두 번째로는, [인간=흙]이라는 다분히 물질 중심의 인간관은 구약의 인간관이고, 아직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을 위한 인생관이다. 단적으로 다음 성구를 보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고전 15'47-49 표준새번역)

  인간의 본질은 흙이 아니다. 몸만 흙일 뿐이다. 영은 흙이 되려도 될 수가 없다. 사람의 본질 즉 속사람은 영이므로, 영이 살아 있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도 살아 있다. 문제는 영이 정말 살았냐, 죽었냐이다. 하나님과의 친교가 끊겨 영이 죽은 사람들은 그냥 흙덩이 내지 흙가루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흙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 된다. 소돔/고모라 사람들이 아닌 이상, 불탄 재로 사라질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이 인간 본질론을 카톨맄 사람들이 아는지들 모르겠다.

  창세기 3'19은 도무지 재의 수요일에 어울리지 않는 성구다. 그냥 아무 성구나 되는 대로-억지로 끼여 맞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재=흙], [흙=재]의 등식이 생긴 것이고.

  신도들의 이마에 재 십자가를 발라 주면서 사제는 신도에게 회개를 강요(?)하고, 신도는 사제에게 회개를 위한 중재를 은근히 호소한다. 사제는 이 통회기도에서 하나님께 진노를 거둬 달라며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라틴어: '미제레레 노비스')을 의식적(儀式的)으로 거듭 되뇐다.


  지금이 과연 구약 시대인지 신약 시대인지 혼동감이 온다. 신약 시대에 사제 제도가 어디 있는가?

  자..신자라면 성경 말씀대로 평소 죄를 회개하지 않는가? 우리가 죄 회개에서 왜 현대 '사제'들의 도움과 중재를 받아야 하는가? 베드로에 따르면, 신자 각 사람이 왕 같은 사제이다(벧전 2'9). 아이러닠하게도 베드로는 카톨맄교가 '초대 교황'으로 받드는 사도이다. 그런데 초기 교회에도 없던 사제 제도가 왜 갑자기 천주교회에서 도둑처럼 나타났는가?

  우리는 평소 날마다 또는 순간마다 기도할 때 자신의 죄를 직접 믿음과 진정으로 예수님의 보혈과 그 이름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 그것이 영과 진리의 경배다. 주님이 12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모범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탕감해 주듯, 우리 죄 빚을 탕감해 주소서"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사제'들 앞에 나와 그 앞에서 참회/고백을 해야 하고, 번거롭게 이마에다 검은 십자가 재를 발라야 하고, 사제들이 빌어 주는 통회 기도에 동참해야 하는가?

  이건, 소위 '평신도'들을 '사제' 계급 아래 종속시키기 위한 일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런 제도와 의식에 종속감/소속감을 느껴야 일종의 안정감(?)과 만족을 얻는다. 남에 대한 의존도가 종속감으로까지 치닫는 것이다. 여기 참되고 유일하신 중보가 끼여들 자리가 적다. 아니, 없다.

 

  그들은 심지어 일종의 중재자로 자처하는 사제로도 모자라, 마리아를 포함한 죽은 '성인'들과 천사들까지 중보로 동원해다가 "(대신) 빌어 주소서"라고 빌지 않는가? "(오직 주님만이 아닌) 남을 빌어 빌기"인 것이다. 빌(借)지 않으면 빌(祈)지 못하는 것인가?

  이 재가, 정작 거듭나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통회/간구하지 못하고, 만날 남의 도움만 빌다가 언젠가 재처럼 타 버릴 표상이 아니길 바란다.


  신약인인 우리에겐 재 대신 화관이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에게 회개나 통회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님을 독자는 알 것이다. 회개나 금식은 참회 화요일이나 재의 수요일이나 사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수시로 필요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어느 보수계 사람의 글을 보니, 사순절에 앞서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날이 재의 수요일이라고 한다. 푸석푸석~ 하니 재 되어 사라질 무엇처럼 뭔가 포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러고 보니 뭔가 관상 내지 불교 냄새 같은 것이 나려 한다.

  우리가 자기 부인을 해야 함은 사실이다.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기 부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포기가 아니다. 뭔가의 포기가 아니란 것이다.

  자기 부인을 하려면, 때에 따라 육욕과 육정도 저만큼 물려 놓아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동안 육욕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인가? 육욕을 버리려면 음식은 왜 먹는 것이며..가정의 기본인 부부와의 사랑과 아기 출산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가 다들 숫총각, 숫처녀들인가? 수사/수녀나 스님/비구니인 것인가? 그래서 숫총각인 교황과 사제들의 수하에 들어야 하는 건가?

  혼동을 말아야 한다! 잘 분간하고 잘 분별하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과 본분의 하나다. 자칫 혼동하다간 엉뚱한 길로 빠져 들기 쉬운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태 신교에서 신앙생활 잘(?) 하다가 갑자기 천주교로 '개종'한다는 사람이 그런 엉뚱한 사람들이다.  

  의식(儀式, rites)은 주로 구약의 것이며..영과 진리의 경배가 신약의 것이다. 구약의 재의 의식이나 사제 제도나 무용(춤)의 전례 따위는 지키면서, 찬양대의 4성부 합창이나 신약에도 명기된 십일조 등은 '구약적'이라며 반대하는 자체모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사순절'은 성경적인가? [2]

 

 

중세의 사순절 전 카니발

 

 

  카톨맄교는 봄철을 위해선 '사순절'(Lent)을, 겨울철을 위해선 '대강절'(Advent, 일명 강림절/대림절)을 만들어 놨다. 천주교도들을 성경이 아닌 교황과 전통, 제도 중심의 천주교리에 복종시키려고.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사순절을 제대로-율법적으로 철저히 지키는/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사순절이 왠지 필자에겐 '사순절'(死馴節)로 들린다. 삶이 아닌 죽은 전통에 길들이는 계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첫날인 '재의 수요일' 자체가 인간의 필사성(必死性/mortality)을 기억한다는 날이기 때문이다. 자기부인이면 자기부인이지 왜 하필 인간의 필사성인가? 그러면서 왜 인간 영혼의 불사성(不死性/immortality)은 거들지 않는가?

  필자는, 아직 금식을 "즐기는" 경지엔 못 들어서도,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소중히 생각한다. 그러나 40일에 걸쳐 한다는 제도적/율법적/전통적인 절식/금식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義)와는 거리가 멀다.

  혹자는 "모세도 예수님도 40일간 금식하지 않았냐? 그러니 성경적이다!"고 응수할지도 모른다. 모세나 예수님 당시나 구약시대라는 것을 독자는 이해하는가? 우리는 사도들 중 그 누구에게서도 본인이 '40일 금식기도'를 했다거나, 남에게 율법적으로 강요했다거나, 심지어 권장했다는 부분도 발견하지 못한다.

 

  주님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오셨고, 그 과정에서 모름지기 둘째 아담으로서 첫 아담이 졌던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 한 가지가 40일 금식 후 유혹에 대한 승리였다. 이것을 "신자 모두가 본 받을 40일 금식기도"로 이해한다면 큰 착각이다.

  대다수 종교전통은 사람이 만들어낸 속박이요, 거짓 의이며, '종교의 영들'의 장난이다. 사순절은 인본적인 카톨맄교가 빚어낸 또 하나의 종교전통에 불과하다.  

  천주교 신부였다 현재 신교 사역자인 리처드 베넽은 사순절이 비성경적임을 명료하게 지적/비평한다. 그로부터 재인용해 보는 천주교 새교리문답 참회 '파라 1438'은 다음과 같다. 

 

  "전례력(교회력의 의식달력)에 있는 (사순절과 매 금요일 등) 고행/참회 절기와 참회일은 교회의 집중적인 참회 행습 모멘트들이다. 이 기간들은 특히 영적 체험들, 참회 의식(儀式)들, 참회의 표징으로서의 순례과정, 단식/자선 같은 자발적인 자기부정..등에 걸맞다." (필자 역)

  이 고행/참회는 다음 '파라 1435'에도 들어 있다. 

 

  "회심은, 날마다 삶 속에서 화해의 제스처들, 빈민에 대한 관심, 정의와 옳음의 실천/방어, 형제들에 대한 과오 시인, 자애적 교정, 생활 수정, 양심 점검, 영적 지로(指路), 고난 수용, 의를 위한 박해 감수 등을 성취한다. 날마다 제 십자가 지고 예수님 따르기는 가장 확실한 참회의 길이다."

  위에서 우리는, 천주교가 선행/고행/참회/회개/회심 등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 천주교가 믿음보다는 행위 중심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게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받으신 고난보다 사람이 이뤄 가는 고행을 더 강조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베넽이 강조했듯, 에베소 2'8-9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선물인, 그리스도의 객관적 수난과 그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 자신의 공로는 최소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의 사순절 전통은 인간의 주관적 노력과 공로를 최대화하기가 더 쉽다.


  그러나 구약 율법 앞에 인간이 무력하듯, 우리 자신의 공로로 우리의 의를 전혀 이룰 수가 없다! 사순절 기간동안 내가 제 아무리 무슨 노력을 해 봐야 그것이 나의 의를 전혀 이루지 못한다. 사순절 준수 행위를 통한 나의 의(義)의 점수는 제로(0)다.

  천주교 워싱턴DC 대교구가 발행한 미국캐논공회의 캐논(Canon) 1251(1983년)은, 일년 내내 매주 금요일엔 (종교식전 상의 육식이나 음식이 아닌 이상) 주교회가 제정한 대로 절식(음식을 자제)해야 하고,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도 절제/금식을 해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래서 마치 중간기 유대인들이 율법을 이행하기 위한 온갖 복잡다단한 가지 치기식 규율을 만들어 놓았듯, 천주교도 사순절을 효과적으로(?) 지키기 위한 온갖 희한한 관습들이 이 시즌에 난무한다.


  예를 들면, 중세 때는 낙농제품도 금했기에 목장/낙농업계 종사자들이 매일 생산되는 낙농 제품을 처치하기 곤란해서 성당이나 수도원 곁에 쌓아 놓기도 했다. 어떻게든 좀 처치해 보라고. 젖소들이 사순절을 지키긴커녕 전혀 개의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심히/마구 젖을 내기 때문이다! 천주교회가 사순절을 내기 앞서 젖소들을 천주교도로 개종시키는 데 실패한(?) 탓이다. 물론 신교에서는 젖소 신자 만들기 노력을 하지 않을 뿐더러 필요치도 않지만.   

  디모데 4'1-3엔 사실 영락 없이 천주교 관습/전통에 대한 경고예언이 담겨 있다. 천주교도들이 베드로와 함께 그렇게 존중하는 바울(천주교식 발음: '바오로')의 예언이다! 과연 바울의 이 예언대로, 천주교는 교황 그레고리 7세 때부터 사제/수사/수녀들의 결혼을 금지하며, 절기와 전통에 따라 육식을 삼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베넽은 말한다:

 

  "그렇다면, 로마 카톨맄 법과 절기, 참회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그렇다! 로마 카톨맄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그들에게만 참 구원이 있다는 인상을 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뿌리는 로마가 아니라 성령님을 보낸 하늘 예루샬렘이다!

  대언자 이사야는 우리의 선행은 썩은 걸레 쪽 같다(사 64'4-5)고,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곧 인간의 마음이라고 통렬히 지적한다(렘 17'9). 그러니 우리가 행위로써 이룰 의가 뭐겠는가?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나 공로로 이룰 게 전혀 아닌 것이다.

 

  필자는, TULIP으로 요약되는 소위 5대 요리를 비롯한 장 칼뱅의 교훈들을 모두 다 받아 들이는 것은 아니나, 칼뱅이 바로 포착한 것이 있다. 그는 기도와 금식 등을 통한 경건은 믿었지만, 사순절을, 사람들이 금욕적인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은총을 얻도록 해 준다고 믿는 "영적 미신"으로 본 것이다.

 

  학자들의 통찰에 따르면, 카톨맄교의 수많은 전통과 숨은 상징 등은 구약종교는 물론, 이교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존 맥아더는 사순절 전통이 님로드의 아내(알렉산더 히슬롶에 따르면, '세미라미스')가 아들 담무즈를 위해 40일간 애통했다는 전설에서 왔다고 지적한다. 담무즈는 실제로 가나안 족들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이 섬기던 신이었다(겔 8'14). 맥아더는 그러면서 "사순절 준수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단언한다. 

  세계 신교계 최대 종합언론인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올해 사순절 특집으로 '사순절-왜 굳이 하는가? 영적 훈련을 위해서'라는 짧은 글을 올렸다. [ CT는 옥한흠 목사가 주도하여 한국에서도 번역판이 발간되고 있다. 보수계 인사가 어떤 생각으로 진보적인 CT에 홀딱 반해서 한국으로 끌어 들이게 됐는지 모르나 우선은 다 돈 되라고 하는 것일 터. 그 점에서 동기가 별로 순수하지 못하다. 과연 순수하게 한국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 빌리 그래엄이 창간했고, 에큐메니컬 언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CT는 알고 보면, 천주교 사상을 증진시키는 주요 교계언론의 하나다. 관상 영성 보급은 물론이다! 거기 대다수 필진들이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다. ]

  아무튼, CT의 이 사순절 특집은 한 마디로 천주교식 사순절에 대한 찬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중 한 필자는 사도 바울의 편지 일부를 인용했다(ESV 영어표준역 성경). 

 

  "모든 체육선수들은 모든 것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을 월계관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위해서  합니다. 나는 내 몸을 훈련시키고 복종시키니, 그렇지 않는다면 남들에게는 전하고 나 자신은 부적격이 될까 봐서입니다." (필자 역)

 

  사족일 테지만,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핔 관련 보도를 보면, 특히 요즘 남자 선수들은 모든 것에 ‘절제’를 하는 게 아니라, 새 개최지에서 섹스 등 모든 것을 되도록 즐기면서 한다. 물론 잘못된 방법이기가 더 쉽다.

 

  위 성구를 콘텍스트를 고려하지 않고 사순절에다 적용한 것은 아전인수 격이고 넌센스에 더 가깝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율법적인 절기 금식이나 의례적 금욕에 관해 한 말이 아니라..홀몸으로 독자적인 자비량 선교를 하다 보니, 사도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도 활용하지 않고 오직 내세의 상과 금관을 바라고 절제하겠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천주교의 온갖 구속과 전통들도 이미 중세 때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관행에 불과함이 입증돼 왔다. '캔터베리 이야기'나 '데카 메론'에서 보는 성습, 더욱이 오늘날 일부 천주교 사제들의 성적 괴벽은 그 윤리성에 있어 차라리 올림핔 선수촌만 못하다. 이건 굳이 사제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바티칸의 책임이다. 그런데 그 사순절을 지어낸 천주교가 실패한 금욕정신을 신교계 일각에서도 본받는다는 게 참 "거시기" 하다.  

  사순절은 또 성 금요일과 부활절을 정점으로 한 40일간의 '순례여정'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순례여정은 영적인 훈련으로 자주 비유되기 때문. 그런데 중세 때 천주교의 순례란, 히브리서 11장 등에 묘사된 믿음의 사람들의 하늘 나그네 순례를 본받기보다, 주로 '성인'인 고인들의, 신통한 영험이 있다(?)는 유품들이 보존된 성당을 방문, 관람하는 게 고작이며, 순례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로마나 예루샬렘이었다. 지금도 대동소이하지만.

  그런데 이런 고행의 순례는 광야 수사 시대에서 비롯된 것임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들은 본능적인 욕정이나 '불순한 상상'이 일 때면, 스스로를 매로 다스리면서 고행을 한 것이다. 중세 때 수사들은 가느다란 기둥 위에서 오래 지내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이상한 형태의 고행을 했다.

  "아시시의 성자"로 불리는 프란체스코(본명 '지오반니 디 베르나르디네', 프란치스코, 성 프란시스)는 '미카엘마스'(대천사 미카엘 기념일)를 앞두고 40일 고행과 금식기도를 하면서 '성흔'을 받았다고 한다. 미카엘마스? 성흔? 뭔가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그러면서 40일에 더욱 힘을 준다.

  그런데 이 이상한 프란체스코를 신교권에서도 아무 검증 없이 모두 '성자'로 받아 주는 데는 그저 할 말이 없다. 뭐가 성자이고 성인인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다 성자이고 성인이고 성도임을 설교자여, 목회자여, 그대는 알고 있는가? 프란체스코를 깍듯이 '성자'로 부르는 그대는 혹시 성도가 아닌 건 아닌가?

  구약에 40일 숫자가 자주 나타나면서도 신약에서 '40일 고행 개념'을 찾아 볼 수 없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며 유혹을 이겨낸 것도 고행을 통한 구원의 개념을 이루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순절을 굳이 지키련다면 다른 카톨맄 절기들도 다 지킬 일이지.. 카톨맄교가 신교의 참 '뿌리'이기에 사순절을 지키련다면, 카톨맄 의식력에서 몇 가지 절기만 입맛대로 골라 잡아 교인들에게 강조할 게 아니라, 카톨맄 의식력 전체를 지켜야 제 격일 터이다. 왜, (재의수요일)/사순절/종려주일/수난주간/세족목요일/성금요일/부활절..대강절과 성탄절 등만 입맛 따라 골라 잡아 지키나? 그렇지 않은가?


  '참회화요일'도 지키고, '미카엘마스'도 지켜야 '뿌리'를 따르는 것 아닐까?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온갖 명절과 절기들과 의식들로 풍요로운 게 카톨맄의 전례달력이니 말이다. 왜 입맛대로만 지키는가? 우습지 않은가? 골라놓은 것들만 성경적이어선가? 정말 성경적인가?

  그리고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묻는다:

 

  장로교 시조나 다름 없는 장 칼뱅은 분명히, '기독교강요'에서 사순절을 일종의 종교적 미신으로 봤다. 그런데 장로교 대다수는 왜 미신적인 사순절을 지켜 엄수하는가? 이상하고 모양새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개혁가 츠빙글리는 1522년 사순절 전통에 최초로 반발하면서 취리히의 인쇄업자들이 매일 육식을 해야 제대로 일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사순절 규율들이 복음을 순종하기보다 로마를 더 순종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 역시 바른 말이다.

  마르틴 루터 역시 금식으로써 면죄될 수 있고 '구원점수'를 딸 수 있다는 거짓 개념을 신자들에게 심어주는 천주교 가르침을 경계하면서 선행 공로 사상에 근거한 금식을 경계했다.

  필자는, 개혁가들의 사상에 다 동조하진 않아도, 사순절에 관한 개혁가들의 이런 견해가 100%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이처럼 주요 신교 교단 다수가 뿌리도 알지 못하고 제대로 찾지 못한 채 흐리멍덩하게 헷갈려 있는 교계의 실상이 필자는 못내 통탄스럽다.

 


'사순절'은 성경적인가? [3]

 

  지난 회에다 필자는, 사순절이 카톨맄 전통에서 나온 것이며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데다 주요 개혁가들이 반대하거나 금지했다는 점을 밝혔다.

 

  성만찬의 의의를 약화

  천주교 계열 전통으로 굳어져 온 사순절은 특히 성만찬(성찬예식, the Lord's Supper, Communion)의 의의를 강화시키기보다 약화시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엉? 무슨 소릴! 강화시키지 왜 약화시키냐?"고 으레 물을 것이다. 과연 사순절은 성만찬의 의의를 약화시키나, 강화시키나..?

  구교와 신교(일각)의 전통에서..카니발(사육제/謝肉祭)로 시작되는 '참회 화요일'을 거쳐, '재의 수요일'에 시작한 사순절의 절정은 아무래도 소위 '호산나(종려)주일'로 시작하는 '수난주간'과 '성 금요일'일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엔 이 기간동안 으레 성만찬을 한 번 했던 것으로 추억한다. 주님의 고난의 쓰라림을 집중적으로 묵상하고 금욕하면서 수난에 '참여'하곤 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수난일이 시작된 저녁(유대인 전통은 저녁을 하루 일과의 시작으로 삼았다),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그 성만찬의 의의는..주님의 교훈과 아울러 주님께 직접 계시로 받은 사도 바울의 교훈을 한데 조화시키는 데 있다. 이 성만찬은 주님의 살을 상징하는 빵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성도가 나눔으로써 주님을 기념하고, 그 분의 수난과 아울러 주님과 하나로 연합되는 부활을 아울러 기린다.

  그런데 천주교 전통인 사순절의 이 절정기 동안 사람들은 금욕생활의 절정을 거친다. 많은 경우, 금욕은 자학적 경지까지 이른다. 안 먹고 안 마시고 스스로를 괴롭힘으로써 주님의 수난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그런가 하면, 몰래 혼자 또는 동료 신도들끼리 '룰'을 깨기도 하니, 그런 금욕은 의식적(儀式的)이다 못해 외식적(外飾的)이 되기도 한다.

 

  과연 수난 참여가 그런 뜻일까?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의식적/외식적인 금욕을 가리키지 않는다. 나를 주님 앞에 굴종시키고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의 발동이고 선택이고 자발적인 헌신이지, 자학적 금욕이 아니다.

 

  성경적인 자아부정은 나의 살아있는 정욕적인 인간-육아(肉我)를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온갖 육욕과 욕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이 말을 오해하진 말자.

 

  이것은 마음의 가난이지, 물적인 가난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검소한 생활을 잊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이것은 결혼/부부 생활에 필수적인 성욕을 버림을 뜻하지 않는다. 맘만 하나일 뿐, 몸은 하나 되는 게 아닌가? 아기는 어떻게 낳는가?  

 
  이것은 또 중세에 유행했고 요즘 유행하는 관상적인 '비움'과 '내려 놓음'을 뜻하지 않는다.

  천주교 계열은 사순절 기간동안 수사/수녀들의 수도적 금욕/청빈생활에 근접해지길 교도들에게 요구한다. 중세 사순절 관습을 보면, 술은 물론 고기도 못 먹게 하고, 성욕을 부추기는 음식물을 피하는 특수 섭생을 통하여 성생활도 (되도록) 금하거나 줄여서, 사제/수사/수녀들의 삶을 닮길 바라고 있다. 어찌 보면, 사제계급들이 평신도를 단단히 묶어 놓는 기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의식에 사람들을 묶어 놓기, 전통의식에 스스로 포로 되기일지언정 참된 수난 참여의 길이 아니다.

  오해 말라. 필자는 개인에 따라 특별기간 동안의 금식/금욕/검약 등 일시적 또는 규칙적인 자기절제의 미덕과 훈련이 나쁘거나 잘못됐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또 성도의 집단 금식기도처럼 좋은 것도 드물다.


  그러나 날짜를 정한 집단 금식 외에는, 어디까지나 개인에 따라 일시적/규칙적일 뿐이다. 부부 사이도 특별한 뜻이 있어 약정한 금욕 기간 외에는 다시 합방함이 주님의 뜻이다. 계속 금욕하고 분방(分房)함이 거룩한 게 아니다.


  그러나 카톨맄교는 사제/수사/수녀들처럼 금욕하는 것을 가장 거룩한 경지로 여긴다. 더 많은 종신서원자, 독신자/독신녀들이 생기길 바라고들 있다. 그 결과는..초서나 보카치오가 즐겨 고발한 중세 수도원의 성 타락이요, 우리가 보는 미국과 요즘 브라질 성당들의 성추행 폭발 등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 마르틴 루터가 수녀 카타리네 폰 보라와 결혼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간추리건대, 필자의 말은..절기를 지켜 가며 율법적으로 행하는 전통적/의식적인 금욕 관행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절기 지킴은 구약시대로 끝났다.

  초기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빵 떼기 등 애찬을 즐기면서 서로 주님의 만찬도 나눴다(행 2'42,46, 20'7, 고전 10'16). 천주교 계열처럼 사제가 나눠 주는 면병과 포도주를 받아 먹은 게 아니다. 성도마다 왕족 같은 사제인데(벧전 2'9), 우리가 왜 구약시대처럼 특수 계층인 사제들의 이끔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지?

  주님의 만찬은..애찬처럼 함께 빵을 떼며 함께 포도주를 나눠 마시면 되는 것이다(마 26'17-29). 단, 주님의 말씀대로 그 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먹지, 배를 채우려고 배불리 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전 11'23-34). 그런 예가 드물지만. 배불리 먹기는 집에서 하면 된다.

 

  따라서 어떤 '사제'나 진행자/인도자의 지엄하게 찡그린 표정과 빵/잔 높이 쳐들기 같은 과장된 제스처를 포함한 모노드라마 '쇼' 같은 게 필요 없다. 그냥 단순히 순수하게 말씀대로 기념하면 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어릴 적 수난주간 절정에 했던 그 성만찬은 한 마디로 '자기 괴롭히기' 비슷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쿨적쿨적대는 울음소리도 감사와 감격보다는 주님의 아픔을 좀 이해하고 그 아픔을 느껴 보고 함께 나눠 보기 위한, 그런 자학적 감정몰입 같은 성격이었다. 물론 감사 감격하여 우는 사람들도 없진 않았겠지만. "얼마나 아프셨나..?"에 뇌리를 집중하고 명상한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기는 그런 감정 몰입적 금욕, '쥐어 짜내기' 식 의식집중 내지 침잠 보다는 내 십자가 지기, 주님 뜻 따르기, 자기 부인, 주님과의 연합의 의의가 더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천주교회력에 따라, 연중 한 때 40일 동안 하는 사순절 금욕/명상을 통해 사람들은 이런 성만찬의 참 의의를 다지기보다 흐트러 놓는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천주교 고유의 '화체설'이나 미사 때마다 사제라는 특수층이 시행하는 '성체성사'는 여러 모로 비성경적이다.

  그래서, 사순절 동안의 금욕과 생각의 묵상을 통한 '수난 참여'라는 의식은 성만찬의 참된 의의를 감소시킨다. 

  자기 체벌/체형의 금욕

  중세 수사들은 금욕을 위한 자학적 자기 체벌을 하나의 수련으로 여겼다. 초기의 안토니우스(=안토니)를 비롯한 광야수사들로부터 현재의 수사/수녀들, '예수회', '오푸스데이' 멤버까지 그래왔다. 중세 '성화'란 것들을 보면, 안토니우스는 온갖 악령들과의 '투쟁'에 시달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아니,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면 될 것을!), 히에로니무스(=제롬) 등 수사들에 관한 전기적 그림을 보면, 거의 반라가 되어 채찍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영웅적(?) 금욕생활을 하나의 모범으로 그렸다.


[ 우리는 흔히 "자신을 채찍질 한다"는 말을 쓰는데..사실 채찍질은 '주마가편'이란 말처럼 동물에게 쓰는 것이지, 본디 사람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사람에게 채찍질 하기는 과거 노예들이나 중죄수들에게 쓰던 고문 내지 극형이었다. 인권을 중시하는 현대엔 그런 중형이 쓰이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채찍형은 노예나 동물에게 적합했던 극형이었다. ]  

  이를테면, 아마도 자위 욕구 같은 욕정이 치밀 때마다 가학하여 몰아낸 형국인 듯하다. 그러다 못 견디면, 수도원이나 성당 안에서 남녀노소 심지어 동성 간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게 중세로부터 현대의 역사가 말해 주는 '뒷 얘기'다. 전통과 율법이 의와 거룩을 이루지 못함을 입증해 주는 단적인 보기들이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중세 '성화' 속) 신앙 '위인'들은 으레 두골 하나씩을 끼고 있거나 곁에 두고 있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두면서 속절 없는 무상함을 묵상하자는 것인지? 중세인들은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나 사도들을 "본" 받고 더욱 높은 경지의 신비로 나아갈 수 "있을" 줄로 믿었다.

  천주교가 사순절에 추구하는 금욕이나 '경건'이란 것이 대체로 그런 수준이라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다. 그런데 신교 인사 다수는 생각도 없이 그런 전통에 스스로 목을 맨다. 간이나 쓸개는 도대체 어디다 두고 있는 건지?

  이런 극단의 형국들은..성경적인 수난 참여와 자기 부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님의 권능을 활용하지 못한 탓이다.

  호산나(종려)주일? 수난주간? 성금요일? 부활절?

  이런 절기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리고 왜 매년 우리가 꼬박꼬박 이런 절기들을 지키고 있는가? 왜 지켜야 하는가? 혹여 "그것도 몰라? 그야 당연히 성경에서 나온 것이지!"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 우리..말을 하려면, 올곧고 바른 말만 하자. 밑바탕 없고 어정쩡한 말은 삼가자.

  종려주일이 정말 성경에서 나온 건가? 사도들/장로들, 초기 교인들이 언제 '종려주일'이라는 것을 지켰는가? 그들이 언제 특정일들을 '수난주간', '세족 목요일', '성금요일', '부활절'이라고 제정하여 매년 지킨 흔적이라도 있는가? 행전이나 서신서 어디에 그런 기록이 있는지?

  필자는 눈 씻고 봐도 성경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는 모두, 사도나 초기 성도가 아닌 후기 인사들과 천주교의 창작품들이다!

  사도 바울은 절기 준수가 자신의 가르침이 헛될 수 있을 중요한 단초로 보고 경계했다(갈 4'10). 그것은 약하고 천한 것으로 되돌아가는 초등학문이다. 바울도 우리가 사람에 따라 한 날을 중시하여 경건하게 지키는 것은 나름 도움이 된다고 했다(롬 14'5). 그러나 율법적/의식적인 집단전통으로 만들어 절기 준수는 어디까지나 구약적 발상이요 율법에 스스로 예속되는 소치다(갈 4'9).

  따라서 이런 것들은 우리가 천주교를 향해 당연히 거부했어야 할 일이다(골 2'16)! 적어도 개혁가들은 그랬다.  

 

  우리가 참회일, 재의 수요일, 사순절, 호산나 주일, 수난 주간, 세족 목요일, 성 금요일, 부활절을 지킴은 신약적인 의의가 전혀 없다. 모두 구약 절기를 지킴과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이 바람직하고 옳다면..우리는 구약시대로 되돌아가 유월절로부터 오순절까지 레위기에 나타난 모든 명절을 모두 고루 지켜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시온주의에 물들어 그런 구약 명절들을 지키는 인사들도 요즘 흔하다. 역시 시계바늘 거꾸로 돌리기다.) 그리고 천주교 교회력에 따라 천주교의 모든 절기들을 지키는 게 더 바람직할지 모른다.

  그러나..이 모두가 초기교회서 영구적 관행으로서 지켰다는 사례나 전통으로서 마땅히 지키라고 한 교훈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

  매년 부활절 날짜는 천주교식 교회력에 따라 국제적으로 정해지며 거기에 따라 사순절 전후의 다른 절기들도 정해지고 지켜진다. 왜 우리가 매년 천주교를 따르며 그 의식력에 구속 받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이 국제 교계 관례라고 해서, 엄연히 성경에 없는데도 우리가 매년 매번 따라줘야 하는가? 언제까지?? 주님 오실 날까지???

  지난 몇 년간, 나는 신교가 이렇게까지 성경보다는 매년 천주교 전통에 충실한데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품어 왔다. 우리는 왜 아직도 성경 아닌 천주교 전통에 예속돼 있는가? 왜 천주교 명절이 우리의 것이어야 하는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특정 날짜의 '부활절'과 '성탄절'에 우리가 함께 움직여 주고 즐겨 주고 장단 맞춰 주고 함께 어리얼싸 도래춤을 춰줘야 하는가?

  로마 천주교가 신교의 엄마이고 젖줄인가? 천만에! 우리의 모교회는 하늘 예루샬렘일 뿐이다. 우리의 어머니라면 성경 말씀이고 성령님일 뿐이다. (성령님이 여성이란 의미는 아니다.) 천주교회를 어머니교회로 여기는 사람들은 앞으로 언젠가는 마리아도 '어머니'/여신,('성4위일체'의 제4위)으로 받들 날이 올지 모른다. 천주교가 그런 방향을 추구해 가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천주교를 부정하면, 교회의 뿌리를 통째로 부정하는 양 여기는 신교 '신학자'나 '역사가'들이 흔하다. 자기정체성 혼동 현상이랄까.

  성경이 말하는 바 우리가 수시로 기념해야 할 전통적 관행이란 성만찬 밖엔 없다. 그것은 침례(세례)와 함께 교회의 아름답고 은혜로운 경배의식의 일부이다. 이와 함께 교회는 마땅히 다양한 은사들의 활용, 신유와 악령 내쫓기, 빈민/고아/과부 돌봄 사역도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과 사도들, 초기교회가 맨날 하던 사역이 그런 것이다.

  교회는 걸인/주정뱅이/마약중독자/성매매자/동성애자/성전환자 등도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들여 거듭나게 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들도 다 죄인이다. 우리도 거듭나기 전엔 그들과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그런 사역을 꺼리다 못해 추하게 심지어 추악하게 보는 게 오늘날 교회 풍토다. 화려한 명절/절기 지킴이는 될지언정.

  교회는 야고보의 교훈대로 목회자들을 비롯한 장로들은 환자 교우들을 기름 부어 병 고침의 은총을 누리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제/목사/장로들은 그런 섬김이보다는 명예와 특수 '파워', 또는 돈 많고 신력(信歷) 끈이 긴(?), 계급사회의 일원들이 되어 있다.

  바른 교회는..전통과 명절이나 꼬박꼬박 지키고, 교우들이 피땀 흘려 바친 헌금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행사나 거창하게 치르는 프로그램 장이 아니다. 죄인들이 몰려 들고 변화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전통과 절기 지킴이가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되, 그 살과 피를 기념하는 곳이어야 한다. 늘 하는 말이지만, 교회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만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춰야 올바른 교회이다.

  사순절 묵상과 관상

  천주교 계열은 물론, 신교에서도 사순절을 위한 특별 명상집, 묵상모음을 내놓곤 한다. 거기 적힌 명상문들을 그 자체가 성경구절이라도 되는 양 깊이 묵상하고 천주교의 미사 경문이나 의식문처럼 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일종의 간증 같은 개인의 나름 해설이다. 그런 것들이 훗날 'QT'나 '디보션'으로 발전했다.

  이런 명상 방식은 주로 천주교의 '렉치오 디비나' 관행에서 왔다. 물론 사역자들이나 신학자들의 생각들을 간추린 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묵상 다수는 관상(觀想) 영성을 시사하거나 강요하는 내용들이 흔하다.

  사실은 관상 영성 대부분은 사순절 전통에서 비롯됐다. 관상 자체가 수사들에게서 비롯된 영성 관행인 데다 사순절의 금욕 및 묵상 관행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수도원적 청빈 사상이나 금욕 관행처럼 관상이나 관상기도, 향심기도 등은 성경적인 뿌리가 없는 비성경적적 영성훈련이다. 모두 천주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관상이 있는 곳에는 으레 예외 없이 종교다원주의가 있다. 현금에 관상이 세계 교계에 만연하고 있음은 장차 뉴에이지 중심의 세계 종교 단일화의 기미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주님 오시기까지 평생 사순절을 잘 지켰다고 내세에 '사순절 지킴이 특별상'이라는 시상을 따로 하시지 않는다.

  사순절이 성경적 신자들 또는 신교의 사순절(死殉節)이 되지 않기를 열망한다.

 

 

 

[ 관련기사 링크 ]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인가?

 

종교개혁 시대에 폐지된 사순절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cafe.daum.net/ALILANG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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