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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의 예배 전망

수호천사1 2014. 3. 8. 14:32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의 예배 전망 
 

 

Ⅰ.서론

Ⅱ.본론

1.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와 미래 사회 변화 전망

1) 멀티미디어란?
(1)정 의
(2)특징

2)미래사회 변화

2.예배란 무엇인가?
1)예배의 본질
2)예배의 형식
3)예배의 특성

3.예배의 변천사 고찰

4.멀티미디어의 예배선용
1)사이버 예배
2)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교회 예배
3)노 미디어 예배 제안

5.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에 따른 예배 전망

Ⅲ.결론






Ⅰ. 서 론

멀티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사회의 변화를 예측할 때에 미래의 사회는 정보화 시대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멀티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정보화 시대는 기독교의 가치관과 종교적 예식과 관례들에 적지 않은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예상 속에서 본 논문은 예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예배의 대안’이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안이라 하면 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대안이라는 의미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즉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가 미치는 영향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단정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배 전망이라고 명명하였다.
오순절 다락방의 경험을 기독교의 시작으로 볼 때. 기독교는 교회와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예배가 없는 기독교 시대란 생각할 수수도 없다. 예배를 드리기를 포기한다면 기독교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한국의 기독교가 성장을 멈추었다고 이래기 할 때, 바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숫자가 더 이상 늘지 않으며,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예배라는 것은 고정된 형식을 갖기보다는 시대와 정소에 따라 다양하게 행하여져 왔다. 구약과 신약의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예배의 형식이다. 중세와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를 구분한다면 예배가 그 중의 하나이다. 이렇듯 역사 시대의 구분에는 예배의 변화가 동반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앞둔 지금, 포스트 모더니즘과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의 물결을 경험하기 시작한 지금, 다가올 세기의 예배를 전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배의 형식은 변하게 되어있다.그렇지 않고 기존의 예배 형식만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20세기에 머무르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본 논문은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를 가치 중립적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멀티미디어라는 것은 인격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이지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가 선악의 가치를 본질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인류가 시대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변화가 신앙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로서의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하여야만 하는 예배를 전망하고자 한다. 즉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의 최대의 장점은 부각시키고, 반면 예상되는 단점을 극소화시키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4단계로서 전개하였다. 첫째는 먼저 멀티미디어와 정보화 시대란 무엇이며, 이 시대의 예상되는 변화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예배의 본질을 살펴보고, 예배의 시대적 변화들을 간략히 언급하고, 멀티미디어를 예배에 선용할 수 있는 분야를 개발하고, 이에 따라 예상되는 문제점을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에 따른 예배의 변화를 전망하며, 이에 따른 장, 단점을 연구하였다.

Ⅱ.본론

1.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와 미래사회 변화 전망

1).멀티미디어란?

(1)정의 . 김진년, “크리스챤, 인터넷, 멀티미지어”, 크리스챤 다이제스트,1996.pp.173.

멀티미디어의 사전적인 뜻은 여러가지 매체 또는 다중매체이다.
Mutimedia란 multi(복합, 다양함)와 media(매체, 미디어의 복수)의 합성어로써, 다중매체, 혹
은 복합매체란 뜻이다.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미디어의 시대적 역사발전을 보면 쉽게 알수 있다. 1960년대 이
전의 활자미디어시대에는 신문이나 잡지, 서적등에 활자로 정보를 기록하고 저장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전화나 라디오등이 전파미디어를 통하여 음성정보를 시간과 거리의 개념을
초월하여 전달하는 전파미디어시대였다. 1980년대는 T.V나 영화등과 같은 음성정보와 영상정
보를 동시에 전달하는 영상미디어시대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의 미디어 형태를 개조하거나 복합하여 새로운 기능을 하는 CATV등
의 뉴미디어가 등장하였다. 현대는 인간의 의사소통의 여러 수단들, 즉 음성, 영상, 그림, 문
자등을 통합시켜주는 시스템으로 여러가지 미디어를 모아서 하나로 통합한 것이 멀티미디어
이다. 좁은 의미로 멀티미디어란 음성, 영상, 문자 등의 다양한 미디어들을 컴퓨터라는 하나
의 매체로 통합하여 상호작용성 즉 대화성 등의 총체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컴퓨터시스템으로
정의한다.

(2)특징(4가지). 위의 책,pp.174-177.

①디지탈화
아날로그(자연상태의 정보)정보를 디지털방식으로 처리하여 다양한 정보를 처리한다.
아날로그정보는 다양한 수치로 표현되는 연속적인 정보이다. 컴퓨터에서 이정보를 활용하려
면 디지털정보로 변화해야 한다. 디지털방식으로 처리하면 아날로그방식의 기존미디어와는
달리 문자, 그림, 영상, 음성등의 다양한 정보를 컴퓨터로 처리하여 다양한 정보를 활용할수
있다.

②통합성
하나의 기기로 문자, 음성, 그림, 영상등의 4가지 종류의 정보를 동시에 기억하고 조작할수
있는 하나의 통합적 기능인 것이다.

③쌍방향성
화면과 대화가 가능하다. 일방적인 정보전달 장치가 아닌 서로 주고 받는 쌍방향성을 특징 으로 한다. 수동적인 정보수집에서 탈피하여 정보를 주고받는 정보교환을 매개로 하는 혁명 적수단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 기계와 기계사이에 쌍방향성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정보교환을 매개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④네트위크화이다.
현재의 전화선은 아날로그신호를 전송한다. 일반 전화선을 통하여 디지털 신호를 전송하려 면모템이라는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전화선으로 디지털을 전송할수 있도록하는 통신기술이 종합정보통신망(ISDN:Integrated Seruice Digital Network)이다. 종합정보통신망 이필요한데 이것은 정보고속도로 건설과 가능케 될 것이다.
특성을 종합해 볼때 멀티미디어란 컴퓨터, 통신, 가전제품의 기능등이 하나의 기기로 통합되
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이 기기를 통하여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디지털신호로 가공, 저장
편집하여 전송하는 체계를 가진 종합적인 시스템이라고 할수 있다. 위의 책,pp 177중간 부분 참조..


2).미래사회 변화 전망. 이성희, “미래사회와 미래교회”,대한기독교서회,pp.88-161의 내용을 참조함.

現代사회는 후기 산업사회, 혹은 탈근대 사회등으로 불린다. 허나 이말로는 미래사회를 예상하
고 현실을 진단하는 데에는 한계를 느낄수 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연구는 1900년대 후반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60년대의 Daniel Bell과 Herman Kahn을 중심한 낙관론적 미래론자들과
이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는 비관론적 미래론자들이 있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는 급진전하였다. 탈냉전으로 인한 세계권력구도의 변화, 독일통일,
남북예멘의 통일과 재분열등은 마치 전쟁의 종식과 세계평화의 실현이 현실화하는 듯이 보였
다. 세계가 하나되는 듯한 중심지향적 구심운동과 변경지향적 원심운동이 동시에 일어나 새로
운 갈등구조가 형성되고 세계기상이변으로 인한 종말적현상, 인구과잉, 식량부족, 자원고갈, 환
경파괴등과 같은 암울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누구도 미래에 대해서 단정할수
없다. 미래학자들은 낙관도 비관도 아닌 단순예측에 관심을 집중시킬뿐.
정보화시대라는 연구를 독립적으로 떼어서 연구키보다 미래의 사회변화의 여러특징들(단순예
측)가운데 중요한 한 부분으로 연구해 보았다.

(1)정보사회. 위의 책,pp.115-126.
농경시대에는 노동력이 한 집단의 힘이었다. 산업시대에는 기술과 물류운송을 감당하는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사회의 힘, 정보화 사회는 정보가 곧 국가와 기업의 힘이다.
산업화사회에서는 Know How가 중요하였다.
허나 정보화사회에는 누가 빨리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아 내느냐는 Know Where가 더
중요하다. 정보사회를 지칭하는 표현도 다양하다. 정보는 지식을 의미한다. 지식에 의존한 사
회이므로 지식사회라 한다. 정보기술이 사회 제반활동의 동인이 된다고 하여 전자기술사회라
고도하며 지난 물결시대와의 차별성을 의미하여 후기산업사회라 부르기도 하며, 새 산업사회. Alvin Toffler, 제 3의 물결에서 인용.,
고도기술사회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미국내의 일반대중을 위한 정보공급체인 ‘국가정보인라’ 를 구축해가고 있으며 세계적차원에서 ‘세계정보인프라’계획까지 갖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5 년을 완공목표로 44조 8천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정보고속도로를 건설중에 있다.아울러 최첨 단정보와 통신도 극도로 발달될것이다.정보통신의 발달로서의 정보는 신속하게 습득되고 동시 에 신속하게 변화할 것이다.선진국에서는 케이블 TV시대를 지나서 위성TV시대를 맞이하고 있다.위성TV시대가 되면 수백개의 채널을 동시에 가지느 시대가 되어 정보의 유입은 더욱 가 속화 될 것이다. 정보시대는 인간의 위상이 변화하는 시대이다. 즉 인간이 모델이 되는 시대 1 차혁명인 농업혁명시대는 자연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던 시대이다.2차혁명시대는 기계 를 모델로 한 지식이 모든것을 지배한 시기이다.허나 3차 혁명인 정보혁명시대는 사람을 모 델로한 지식이 지배하게 되었다.기계가 고장나서 공장이 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고장나서,노 사분규때문에 노는 시대,인간의 마음을 터득하고 교환하는 기술이 없으면 움직일수 없는 시대 이다.

인력변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일의 종말(The End of work)」에서 정보화 시대에는 공장의 근로자인 블루칼라의 숫자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2025년 에는 전세계 노동력의 20%만이 블루칼라로 남게될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인간이 모델로 되는 정보화사회의 진보는 지적 소유권이라는 기능적사회에서 점차로 정신적
문화중심의 사회로 체계의 변화를 가져올것이며, 자연히 기업내부의 노사나 주종의 구별은 소
멸되고 모두가 기업공동체의 주인으로서 각자가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완
전한 민주화한 조직형태가 나타날것이다.
정보화사회는 서비스업분야로 치중하게 되며 지식의 계층화 현상과 정보화시대의 낙오자가 속
출하게됨로 또다른 사회적 문제를 낳게 될것이다.
정보화사회는 또한 철저한 개인화현상, 관계성립의 부조화현상을 가져올 것이다.

(2)신세대와 미래형인간. 이성희, “미래사회와 미래교회”의 92쪽에 있는 제목을 그대로 인용.
신세대는 우선 탈근대주의와 탈구조주의에서 산다. 흔히 ‘X세대’라고 불리는 신세대는 1990년 대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소비형태와 문화 형태를 창조한 이들이다. 신세대의 특징을 PANT.S 신드롬이라고 한다.

①신세대는 개인적이다. 개인화현상, 자신들의 삶의 질을 최대한 존중하고 최고의 가치로 인
다. 딩크(DINK:Double Incone No Kids)족이라하며 둘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아이를 갖지않 는 사람들이다. 미래는 자녀 중심의 가정에서 어른중심의 가정으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
②흥미위주(Amurement)이다. 현대는 아이들을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 파베르로 만든다. 기능 적인간, 공작인, 인격과 신앙의 교육을 받지못하고 기술만을 습득한 이들을 지칭한다.
③자연스러움을 좋아한다. 자신의 삶을 구속하고 그 어떤 제도도 거부한다. 남 눈치도 보지 않 는다.이는 패션에서 두드러진다. 성별구분이 모호해지고, 전통이 소외되는 자유함이다.
④성별구분이 모호하다. 패션에서 사고방식까지 성별구분이 모호하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성 개념보다는 공통점을 더 많이 지배하고 있다.
⑤자기사랑이 강하다.누구와 같기보다 차별화되길 원한다. 20代초반은 ‘X세대’, 10代후반의 세 대들은 'Y세대‘라고 자칭한다. 공주병, 왕자병하는 유행어의 배면에는 신세대들의 자기사랑 의 정신이 갈려 있는 것이다.

(3)가속화 변화(속도감의 변화)
미래사회의 가장 뚜렷한 현상은 속도감의 변화이다. 이러한 역사변화의 가속적발전은 미래충격
의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엄청나게 빨라지는 가속화 현상은 적응력을 상실한 미래인간에 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고 이 미래 충격에 걸린 사람은 제일 먼저 미래 사회의 낙오자가 될것
다. 생물학자 헉슬리는 “역사가 기록된 기간의 인간 진화속도는 인류존재 이전의 진화보다 적 어도 10만배 이상 빨라졌다.”고 하였다. 위의 책, pp. 97-98.. 미래사회변화의 가속화 현상의 주도적 역할은 교통 수단의 발달이다. 미래사회의 가장 분명한 고대현상은 교통과 지식이다. 맥헤일은 교통수단의 발전은 다음과 같이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다. 이월선, “21세기 목회환경 변화의 주된 특성”, 목회와 신학(67권, 1950년 1월), pp.44.

(1)선사시대에서 1840년을 마속시대: 10Km의 시대
(2)1840-1930년을 기차속대시대: 시속65Km의 시대
(3)1950년대를 프로펠러비행기시대: 시속400Km시대
(4)오늘날을 제트기시대: 시속800Km시대
앞으로는 뉴욕과 서울의 시간이 2시간 정도로 단축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일일생활시대가 머지않았다. 또하나는 기술의 가속화 현상이다. 대량생산체제 구축으로 생산의 가속화를 가져 왔으며 최근에 와서는 자동화체제를 통해서 가속화현상이 한목하고 있다.
대중문화의 변화는 문화의 가속화현상을 가져왔다. 신세대들은 대중문화에 민감하다. 또한 대 중 문화의 인기지속력이 짧다. 계속적으로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원하기때문이다.

(4) 시간의 가속화
앞서 언급한 가속화 변화의 시대와 중복될수 있는 부분이다. 허나 앞서 언급한것은 시간적개 념에서 본것이다. 여기에서는 좀더 포괄적이며 공간적개념속에서 기술혁명과 과학의 발달이 불러온 미래사회를 살펴보고자한다. 신산업혁명을 주도한 두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로보트와 컴퓨터일것이다. 컴퓨터를 통한 지식정보의 체계와 로봇을 통한 자동화체계이다. 컴퓨터의 발 달은 산업화에서 정보화로 사회의 변동을 가능케했으며, 고도화된 정보통신체계를 만들었다. 미래사회의 기술은 로봇과 인공지능을 통하여 일하는 장소들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것이고 빠른속도로 과제들을 처리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로봇을 발달을 보자. 로봇은 세종류가 있다. 단순작업을 하며 고정적인 산업로봇이 하나요.사 람들이 꺼리는 위험하고 어려운 일들을 리모콘조정으로 수행하는 필드로봇이 또 하나요.현 기 술개발단계에 있는 지능로봇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이 지능로봇은 공상영화로 치부했다. 스타워 즈나 로보캅과 같은 지성과 감성을 갖은 로봇인간을 뜻한다.

다음은 과학의 혁명이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이른바 과학주의를 탄생시켜 과학에 대한 믿 음이 한층 증가하고 과학만능주의의 신사고를 출현케 하였다. 과학주의란 자연과학의 방법이 철학을 비롯한 인문과학과 모든 분야의 연구에 적용되어야 하
며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적용이 지식의 개발에 유일한 효율적 방법이라는 견해이다.. 과학의발달은 수천년동안 인 간의 사고를 지배해온 철학을 인간의 사고영역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문명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과학의 발달로 찾아온 가장 큰 우리의 위기는 생태학적위기이다. 환경오염, 땅에 황폐 화, 기근, 인구폭발, 자원고갈등이 계속되어 600년안에 과학은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칸을 비롯한 미래학자들은 과학의 발달이 현안의 과제들을 극복할 수 있을것이라는 과학주의 를 신봉한다. 허나 과학기술의 발전은 현실적으로 위에 열거한 인간의 당면 과제를 해결할보 장이 없으며, 위기의 창조의 주된 원인이 과학임을 명심해야 한다. 과학의 산물중 복제인간에 대한 문제 또한 시급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결국 과학의 발달은 하나님의 절대 영역인 생명 에까지 인간이 손을 뻗치게 될것이고 심각한 윤리적, 신학적과제를 동반하게 될 것이다. 과학 의 발달은 인인간의 과학과 기술이 초고도로 발달하여 인간에게는 편리한 삶을 제공하지만 결 코 과학의 발달 만의로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적체젤ㄹ 구촉하지는 못 할 것이다. 과학의 발달 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불만과 갈증이 가득한 세계로 만들것이므로 교회의 역할과 대비는 더 욱더 중요한 것이다.

(5).인류공동체의 보편화현상과 새로운 우주관현상
인간의 자연관의 변화는 지구의 인구폭발과 필연적상관관계를 가진다. 이성희, 미래사회와 미래교회에서 149쪽을 인용함.. 인구폭발로 인해 예 상되는 문제들은 여러가지있다. 첫째는 식량문제이다. 둘째는 인구폭발과 연령층의 변화를 새 로운 미래사회의 한 특징이다. 노인의 증가현상과 성별의 변화현상이 예상된다. 미래사회는 인 류공동체 보편화하는 사회이다. 하나의 생활문화권이 형성되어간다. 다채널시대가 되면서 언어 가 동일되게 되고 문화의 이질간의 폭이 작아지면서 인류의 보편화 현상이 일어날것이다.이유 의 개념이 모호해 질 것이다. 이로인해 더욱 더 나홀로 삶이 심화될 것이다. 세게가 하나라는 큰 울타리안에 나환자의 세계를 지키려는 고립감이 크게 나타난다.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모든 업무(사무)형태가 잡안에서 형성되다(자택근무,화상회의 등)
이상으로 멀티미다어 정보화시대(미래사회)에 대한 예상되는 변화를 예측해 보았다.결론작으로 말해서 어느 누구도 미래사회에 대하여 이것이다라고 단장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미래 는 미래라는 사실로 이해하길 바랄뿐이다.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람 본명히 찾아올 미래세 계에 대한 이해와 준비만이 낙오자 대열에 서지 않을 것이다.



2. 예배란 무엇인가?복음적 예배의 이해, I.T.존슨, 정장복옮김, 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 p. 15-16

1) 예배의 본질
요한복음 4:23절상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24절 후반에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다. 이제 참된 예배의 본질 두 가지 요소인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살펴보도록하자.

(1)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인간의 영-속 사람을 뜻한다.우리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은 적절한 장소, 적절한 시간, 적절한 말, 적절한 태도, 적절한 의복, 적절한 형식, 적절한 행동, 적절한 음악,적절한 분위기 등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마음-영혼에 있다하겠다.. John MacAthur, 「참된 예배」, (도서출판 두란노) pp.103-104.
바울은 “내가 내 심령으로 섬기는(헬라어로는 ‘라트레우오’ 즉 “예배”)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1:9)라고 말했다. 즉 바울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또한 구약의 다윗도 시편103:1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외적인 제사에 관심을 갖고 계시지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외적 제사는 단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 즉 마음을 상징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자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계셔서 예배자의 마음을 자극하고, 움직이며, 깨끗하게 하고, 가르칠 때 예배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2)진리로 드리는 예배
모든 예배는 진리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느낀 감정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진 반응이다. 빌라도는 예수께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이제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요한복음 17:17절하에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말씀 즉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다”에서나, 또는 시편119편에 시편 기자가 “주의 법은 진리로서이다”(142절하),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160절상)에서 찾을 수 있다. 만일 진리로 예배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한다.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려 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분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곳은 그분의 말씀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근거가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a). 로마서1:18-19,25에서는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피조 세계와 양심 속에서 드러내셨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명백하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하려면 우리는 성경에 규정된대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b). 시편477절하에서는 모든 예배는 반드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이는 시편47:7절하에서 시편 기자가 “...지혜의 시로 찬양할 찌어다”라고 말한데서 볼 수 있다.

2) 예배의 형식

가. 형식의 자유함(Freedom of Form)
신약성경은 ‘예배 헌신’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초대교회는 분명히 세례식과 성만찬을 시행했다. 그러나 교회의 모임들에서는 성경을 읽었고, 가르치시며 설교했고(딤후4:2), 기도했고(딤전2:8), 찬양했고(엡5:19), 감사를 드렸다.(히13:15). 바울은 '반복되는' 헌금조차도 예배행위로 기술하고 있다.. David Duggins, "Moody", (March/April1996).pp.26-32 "에바브로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예배순서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형식의 그 자유함은 구약에 자세히 기술된 제사의식과 분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나. 진보(Making Progress)
예배의 진보를 이루는 방법은 예배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진실된 예배의 가능성에 대해 목회자들이 연구와 교육을 받아야 한다. 예배는 주위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자가 선택하는 어떤 것을 통해서도 예배할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라도 의도적으로 예배자의 생각을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이루셨는가에 모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Ibid, p.27.

다. 어디서든지(Anywhere at All)Ibid, p.32.
예배가 무엇인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의 적절한 의식과 장소들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저 하나님의 성품을 지적해주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4:24) 청교도인 스테반 샤녹은 “예배의 올바른 행위는 하나님의 영성에 기초를 두며 그것에서 일어난다. 첫째 근거는 그분 본성의 무한한 우월하심(infinite excellency)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구분이 지혜롭고 선하시고 공의롭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각을 무한히 뛰어넘는 모든 것들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은 “예배드린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양심(conscience)을 깨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로 생각(mind)을 먹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상상(imagination)을 몰아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의지(will)를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같은 예배는 더 이상 예루살렘만의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디서도 일어날 수 있다.John MacAthur, “참된 예배”,(도서출판 두란노) p.104

3) 예배의 특성과 결과

가. 예배의 특성
예배는 찬양과 기도, 노래, 헌금 그리고 생활 가운데서 우리 속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항상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기초한다.(요4:23-24) 또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흘러넘치는 것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예배자가 말씀을 연구하고, 그 진리를 발견하며, 그것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나누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열리고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 결과 예배가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나. 예배의 결과Ibid. pp. 107-110.
(a).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시편 53:23상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나와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b).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된다.
시편 24:3-4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정결하며...”라고 말한다. 예배하는 교회는 정결한 교회이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된다.
(c). 교회가 세움을 받는다.
사도행전 2:47을 보면 초대교회가 예배를 드렸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 또한 받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되며, 교회가 세움받는 것이다.
(d). 안믿는 자들이 구원받는다.
고전 14:23-24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만일 너희가 단지 예배의 형태를 갖추고 마땅히 드려야할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면, 너희 가운데 들어온 불신자들이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안믿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고 그리스도인이 깨끗케 되며 교회의 품성이 높아지고 잃어버린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3. 예배의 변천사 고찰Ibid p.17


1) 구약성경의 자료들
여기서의 연구는 신약성경의 예배에 영향을 미친 네 가지의 구약성경 자료들에만 국한시키기로 한다. 시내산 사건, 성전, 회당, 절기들 등이 그것이다.

가. 시내산 사건 출애굽 사건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그들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가셨다. 출19-24장에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러한 만남은 그것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만남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공중예배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이 요소들은 후에 유대교와 기독교 예배의 보다 상세한 설명들속에 발견된다.
첫째로, 그 만남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것이었다. 둘째로, 백성들은 책임의 비중에 따른 구조로 배열되었다. 이는 회중 모두의 참여(participation)라는 예배의 근본적인 측면을 지시한다. 세째로, 이 만남은 말씀의 선포에 의하여 특징지워진다. 네째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양전승 속에 나타나는 본질적인 예배의 측면은 개인적인 헌신의 계속적인 갱신에 있다. 다섯째로, 그 만남은 계약 봉인에 대한 극적인 상징, 즉 피의 제사에 의하여 절정을 이루었다.

나. 성전의 특징들
성전에 있어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첫째로, 성막과 성전은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강조하였다. 둘째로, 그것의 상징적인 성격인데, 거룩한 공간 감각, 거룩한 예식들, 거룩한 제사장들 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이러한 거룩한 상징들의 현저한 특징은 그것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되었다는 데 있다.
셋째로, 성전의 거룩한 직분에 의하여 특징지워졌다.

다. 회당
회당의 예배는 성전예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은 거룩한 예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거룩한 직분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회당예배는 신앙의 확인, 기도, 성경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각각 쉐마(shema), 테필라(tefillah), 율법(Torah)이다.설교는 낭독된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적용하였다. 이는 토라 속에서 교훈을 찾는 “탐구” 행위, 즉 데라샤(derashah)이다.설교자는 “탐구자” 또는 데라샨(derashan)으로 불리워졌다.

라. 절기들
세 개의 중요한 절기들 -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 중에서 두 개가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먼저 유월절(Passover)는 출애굽과 관련이 있고, 주께서 “넘어가셨다”(passing over)는 사실로 부터 유래했고 유월절의 의미는 가족식사의 맥락 안에서 가르쳐져야 했다. 기독교인들은예수께서 유월절 절기 때에 주의 만찬을 주관하셨다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는 주의 만찬을 새로운 계약의 중심적인 예식을 강조한다. 칠칠절(feast of weeks)라 불리는 오순절(Pentecost), 기독교인들은 성령께서 오신 이후 교회의 시작을 오순절 때 생겨난 제도로서 구별하였다.

2). 신약시대의 발전과정

신약시대의 예배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서 예수 주변의 사건들과 관련하여 생겨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서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주목함으로써 1세기의 기독교 예배의 시작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1. 신약성경 예배의기초
1)예배에 대한 예수의 태도
예배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는 구약성경의 예배를 지지하였다. 둘째로 예수는 구약성경의 예배제도들이 자신을 지칭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세째로 예수는 유대예배의 관습들을 재해석할 권리를 주장하셨다는 원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그리스도 사건
구약성경의 예배가 시내산 사건을 경축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예배도 제2의 출애굽 이야기,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일을 선포하고 있다.

2. 예배에 관한 기술들
기독교는 아람어를 말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헬라적인 유대공동체를 거쳐 마지막에는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사도시대 이후의 기독교의 발전뿐만 아니라 이상의 세 집단도 역시 싱약성경 예배의 발전에 대한 연대기적이고 문화적인 통찰을 지공해 준다.
아람어 계통의 예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같고 있다. 첫째, 아람어 계통의 기독교 예배는 성전예배의 연속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둘째, 유대교적인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 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추가로 집에서도 예배를 드렸다는 것에 암시된다.
헬라적인 기독교 예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첫째, 헬라적인 예배는 유대교의 의식주의(Ritualism)을 배척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둘째, 유대교의 예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방인 기독교의 예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보다 유익한 자료로서 예배에 관한 교훈적인 진술들이 있다. 첫째로, 바울은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둘째로, 예배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내용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3). 초기 기독교의 예배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W.맥스웰, 정장복 옮김, 장로회신학대학,p13-18

구약과 신약은 공히 초기 교회의 예배유형에 기여하였다. 당시에 나타났던 규범적 유형은 다음과 같은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인 특징들을 포함하였다.
첫째 기독교 예배의 내용(content)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 구약의 성취, 그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의 내용이 있고 둘째 기독교 예배의 구조(structure)는 말씀과 성례전인데 기도, 찬양, 송영, 축도, 응답 등이 성례전에 포함된다. 셋째 기독교 예배의 맥락(context)은 하나님께서 예배하도록 부르신 기독교회 안에 있으며, 교회의 각 구성원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예배자는 응답한다. 교회의 모임은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상징 아래 현존하시는 주의 만찬을 통해서 봉인된다.

4). 고대와 중세의 예배Ibid. p.26-30

즉 기독교 예배의 근간은 말씀과 성례전인데, 성례전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한다. 이 두 중심점의 주위에는 교회의 기도와 찬양의 말씀이 있다. 교회의 이러한 두 가지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현실화되고 그의 왕국이 기대된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예배는 점증하는 의식의 증가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에 의해 거세당했던 신비종교의 미묘한 영향력에 의해서 서서히 변화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강조점들은 중세에 이르러 보다 첨예화되어 나타났다. 비록 예배의 기본적인 구조와 내용은 과거의 예배와 연속성상에 있지만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있어 예배의 의미는 공히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예배는 하나님이 임재(현현)하시는 하나의 “신비”(Mistery)가 되었다. 이것은 미사에 대한 은유적인 해석과 빵과 포도주에 예수께서 육채로 현존하신다는 교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사는 희생제사의 성격을 취하게 되었으며,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유익을 위해 드려지는 성격의 것이 되었다.(미사의 남발과 남용의 초래함)

5). 종교개혁과 근대 개신교의 예배전례ㅡ이 역사, 김인영 옮김, B.노인호이저, 분도출판사. P117-127

당시의 예배는 첫째, 개혁자들은 고전적이 예전과 초기 교회의 교부들이 주장하였던 성경적인 예배의 원리들이 회복되기를 원했다. 둘째, 근대 개신교 예배의 역사는 예배자의 주관적인 필요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 개신교는 수많은 개혁자들이 물려준 예배의 형태에 아무런 평가를 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답습하면서 수백년의 역사를 지내왔다. 그러는 동안 예배의 본질적 문제와 그 깊은 신학의 결여는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예전보다는 단순한 ‘설교의 장’으로 예배는 계속되었다.

6).예배갱신의 필요성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예배할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를 원하며 확실한 경험을 갖를 희망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유용한 예배를 발견해야할 급박한 필요성은 예배의 객관적인 내용과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험해야 할 복음주의자의 필요성을 공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속적인 예배의 갱신은 예배 현장과 예배자의 경험의 결합을 통하여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 두가지 모두가 중요하다.
예배갱신의 필요성에 있어서 첫째로 역사적인 기억상실증의 결과, 예배의 기술 상실하고 둘째로 합리주의, 감정주의 또는 오락주의의 침투를 갱신해야 하며, 셋째로 교회적인 삶의 모든 측면들의 균형유지에 실패 넷째로 신체적 장애나 부득이한 처지의 신자를 위한 예배적 배려의 요청이라고 볼 수 있다.
예배 갱신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자료들은 앞에서 살펴본대로 먼저 성경 안에서 발견되며, 그 다음에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발견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예배의 원리들은 신,구약성경에서 공히 이끌어 내어질 수 있고, 구약성경의 예배형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볼 수 있다. 셋째로 신약성경의 예배 역시 형식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21세기를 불과 몇 년 앞에 두고 고도의 발전된 문명(멀티미디어시대)을 갖게 된 오늘의 성도들도 멀티미디어 사회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엄청난 정보와 약속, 휴식의 필요성 증가, 짜증나는 교통체증 그리고 주일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불가피한 일과 사고가 많아지는 것이 오늘날의 크리스쳔들이 겪는 부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득이하게 예배를 못드리는 성도들을 위한 목회차원의 배려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예배형태의 변화는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성서는 장소와 방법과 이유를 떠나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다음 장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예배의 전망을 하여 보기로 한다.


4.멀티미디어의 예배 선용

1) 사이버예배
가상현실과 사이버스페이스가 현실화되어가고 있다. 이에따라 사이버처치가 생겨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사이버처치라는 개념은 홈페이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멀지않은 장래에 가상현실 멀티미디어 서비스로 예배를 드릴 것으로 기대된다.
사이버예배가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예배인가 아닌가를 논의하기 이전에 사이버예배는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 사이버예배는 기존의 예배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배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사이버예배의 선용. 김진년, “크리스챤, 인터넷, 멀티미디어”, 크리스쳔 다이제스트,1996.8,pp.109-113.
(1) 공간의 극복
멀티미디어의 발달은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있으며, 사이버스페이스는 멀티미디어의 공간을 감각적으로 실존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초보적인 단계로 쇼핑이나 교육분야에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실제적으로 우리 나라의 경우 학교시설이 부족한 강원도 내촌 초등학교는 원격화상교육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의 활용이 예배에서도 현실화가 가능하리라 생각되며 그 활용 방안도 기대된다.
사이버예배는 농어촌 산간 벽지의 교역자를 모시기 어려운 교회에서 감동적인 예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또한 교회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예배를 드리기 어려운 낙도거주자, 군부대, 등대지기 등과 같은 특수직업 종사자에게 예배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사고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도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공간적인 제약으로 교회의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랃들에게 예배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단순히 케이블TV나 라디오방송을 통한 예배와는 차원이 다른 예배이다. 마치 예배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2) 시간의 극복
주일에 근무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일예배를 강요하기란 생업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물론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면 직장을 바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주일근무를 무조건 반대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
사이버예배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일성수를 가능하게 한다. 아무리 바쁜 직업이라도 주일의 24시간 동안 계속해서 업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일 근무자는 자신의 편리한 시간에 한시간 남짓한 시간을 활용하여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거의 같은 감동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된다. 한번 드려진 사이버예배는 그 날 하루동안은 그 날의 예배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촌의 시간차를 극복하여 예배에 참여할 수도 있다. 해외출장이나 근무자의 경우 12시간씩 차이나는 지구촌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예배당의 같은 오전예배나 오후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2) 사이버예배의 단점
(1) 사이버처치와 사이버크리스쳔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라는 질문은 신도들 간에 흔한 인사말이다. 지금까지는 누구나 모교회에 속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교회에 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사이버예배로 때우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사이버크리스쳔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양육받아지는가가 문제이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자기의 기호에 맡게 취사선택된 예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교회에서 균형있게 목자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신앙하고 예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이 잘못되어질 경우 중재하고 계도할 수 있는 대책이 부재할 수 있다.

(2) 사이버사이비교단
잘못된 신앙을 강요하는 사이비교단이 사이버처치로 등장할 경우 문제는 심각하여진다. 사이버 사이비의 활동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전면 추적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리고 사이버사이비에 감염된 사이버사이비교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누가 사이버사이비교단을 사이비로 규정할 것이며, 그들을 어떠한 수단으로 저지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와 유사한 사상으로 개설되는 사이버사이비들은 공공연하게 사이버스페이스를 활보하여도 비기독교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중소교회의 몰락
사이버예배가 제공하는 예배는 다양하고 웅장한 규모로 감동적으로 드려질 수 있다. 따라서 사이버예배에 중독된 사람의 경우는 물론이고, 한번쯤 사이버예배에 노출이 된 사람이라도 중소교회의 초라한 예배에 참여하느니 대형교회나 사이버처치회로 옮길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중소교회는 몰락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각종 미디어를 활용하여 예배를 드리며, 동시에 사이버예배를 개설할 수도 있는 대형교회의 경우는 교인들이 날로 더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국내의 문제만이 아니다. 국제적인 문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사이버예배는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기에 아주 유용하기 때문에 국경을 초월하여 중소형교회들은 잠식당하기 쉽다.


2)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교회예배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책이 귀중하였고 사람들이 책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인쇄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책이 많아지자 책이 그다지 귀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다. 뿐만아니라 텔레비젼의 등장은 독서습관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들을 TV중독에 빠트리고 있다. 일단 TV에 중독된 사람들은 책을 읽기 싫어한다.
이제 멀티미디어가 보편화 되어가면, TV 보다 더욱 심한 중독에 빠지게 될 것이다. 멀티미디어는 훨씬 더 간편하고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21세기에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예배를 드릴 것이다. 이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예상해 봄으로써 21세기의 예배를 준비하고자 한다.

1) 멀티미디어 시대의 사람들

(1) 다체성
멀티미디어에 노출될 수록 다양한 메뉴가 제공되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기존의 미디어는 단일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하였지만, 멀티미디어는 다양한 방식을 동시에 활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음성과 문자와 동화상을 동시에 주고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체성은 그 활용 범위가 방대하다. 예를 들어 성악곡을 멀티미디어로 듣는다고 하자. 눈으로 성악연주자를 보면서 들을 수 있다. 동시에 그 곡이나 가수에 대한 정보를 문자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케스트라를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바꿀 수도 있으며, 무대를 영상화면으로 대치할 수도 있다.

(2) 즉결성
멀티미디어를 통하여 오늘의 뉴스를 보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화재의 현장을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제공되는 화면에 의지하려니 답답하다. 이러한 때에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하여 현장에 실존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리고 화재현장과 관련된 상세정보를 뉴스를 보면서 자신의 단말기나 송수신망을 이용하여 자료를 즉석에서 제공받을 수 있다.
동시에 여러가지의 정보를 한번에 처리할 수 있으며, 궁금한 것은 그 때 그 때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순간적인 욕구에 의해서 움직이기가 쉽고, 우선 실행시켜 보고 안되면 그만이다는 가치관도 팽배할 수 있다.

2)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교회예배

(1) 음악
다체로운 기호를 만족받기 원하는 예배자들에게 다체롭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령 교회음악의 경우다. 피아노나 오르겐은 한 가지의 음색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의 음색만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먼저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상당히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가며, 장소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신디사이저와 같은 것으로 부터 앞으로 급속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멀티미디어 음악은 좁은 공간과 저렴한 예산으로 엄청나게 다양한 음악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2) 스크린
1> 교회에서의 OHP의 사용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단순하며 메모지를 확대한 수준에 있다. 앞으로는 최소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부응하는 영상 스크린 정도는 설치되어야 한다. 그래야 찬양을 드려도 찬송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복음성가와 미수록 찬송이나 외국 찬송까지도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2> 설교에서의 멀티미이어 스크린 활용은 엄청난 것이다. 성경구절인용에 활용할 수 있으며, 설교의 내용이 동시에 여러 나라의 말로 문자화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설교에 필요한 그림자료, 사진자료 그리고 영상자료 등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외국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음성과 연결시키기만 한다면 외국인들이 자국어로 듣고 보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애자들에게 선용될 수 있다. 언어장애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으며, 청각장애자는 문자를 이용하여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3> 타지방이나 해외에 있는 교인들 다수와 동시에 예배시간에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의 소식을 멀티비젼 방식으로 교회에 전하고, 이들과 동화상 다중 동시 통화를 간단하게 실시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함으로 장기간 해외근무하는 자들을 교회와 계속적인 관계를 유지시키거나, 예배에 직접 참여하는 효과를 창출할 수도 있다.

(3) 점자 서비스
시각장애자들에게는 음성서비스나 점자서비스가 더욱 요구된다. 특히 스크린으로 나오는 각종 자료들을 시각으로 식별할 수가 없으므로 그 내용을 점자로 설명하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음성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설교가 진행 중인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을 고려한다면 점자를 이용한 상황설명 방안이 연구될 가치가 있다.


3) NO 미디어 예배 제안
세상은 온통 미디어를 사용하여 정보를 교환한다. 이러한 미디어 폭발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NO미디어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신앙이나 문학, 철학, 음악, 미술 등의 분야에서는 더욱 자연의 미와 순수성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1) NO 미디어 용품

(1) 악기
피아노음을 아무리 전자음으로 재생을 해보아도 피아노 자체의 음과 꼭 같을 수는 없다. 정말 음악을 좋아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모방되어진 음색 보다는 그 자체의 음색을 원하기 마련이다. 오르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르겐의 음을 전자음으로 대치시킬 수는 없으며, 더 좋은 소리를 듣기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다소 예산이 많이 소요되더라도 다양한 악기와 연주자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좋은 음악은 정서를 순화시킬 수 있다. 교회에서 다양한 악기로 연주되는 가락에 맞추어 찬양한다는 것은 멀티미디어의 전자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활력소가 될 수 있다.

(2) 단순한 장치들의 사용
소형 무선 핀마이크를 활용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예배당의 전면에 눈에 띄는 현대식 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배제되기를 원한다. 자연의 미를 손상시키며 결국 순수하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은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OHP를 활용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과거에 사용하던 찬송가 궤도를 활용하는 것이 더 좋다. 에어콘을 설치하였더라도 과거에 사용하던 선풍기를 상징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이 유치한 방법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정감을 느끼게 한다면 권장할 만하다.

(2) MAN TO MAN 방식

(1) 신체접촉
예배의 시작 전과 후에 서로 보며 인사하기를 권장하고 싶다. 사이버처치에서 인사하고 안수하는 것과 실존하는 사람과 인사하며 악수할 때 느끼는 감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인사는 사이버시대에 살아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할 수 있다.
찬양을 할 때에도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율동을 겸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율동이 옆의 사람과 손을 무주쳐야 한다든지 팔장을 끼어야 한다는 등 접촉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더욱 좋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교회의 예배가 멀티미디어 시대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을 수 있다.

(2) 예배 외의 시간 활용
성가대 찬양연습 모임, 통성기도 모임, 체육활동, 건전한 취미 생활, 공동식사 등 다양한 만남의 시간을 교회의 공간에서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에 오는 것을 좋아하고 기대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삭막한 사회에서 벗어나 교회에 가면 살아있는 느낌이 들 수 있게 말이다.
음악감상실, 휴게실, 상담실, 홈비디오 상연실 등의 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을 통하여 사람과 만나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의 본래적 기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사모할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고 본다.


5. 미래사회의 미래 예배 전망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시스템은 텔레컴퓨터 혹은 텔레퓨터가 될 것이라고 한다. 비디오 정보처리 능력을 갖추고 광섬유를 통해 전세계의 텔레퓨터와 연결되어 있는 퍼스널 컴퓨터가 그것이다. 이런 텔레퓨터는 TV 방송의 일방통행식이 아니라 전화통화와 같은 쌍방향 신호체계를 활용하기 때문에 비디오 통신 면에서 TV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언어 통신에서 전화가 전신을 압도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텔레퓨터는 대중문화를 향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개인주의를 부채질할 것이다. 텔레퓨터는 피도성 대신에 창의성을 촉진시킬 것이다. 이것은 TV의 주종구조 대신에 대화형 구조를 만들어 수신자가 비디오 이미지와 다른 정보를 처리하고 송신하는 역할도 함께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텔레퓨터는 전세계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살찌울 것이다. TV는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인 매체이다. 미래학자들은 머지않아 TV방송산업을 컴퓨터가 날려버릴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자신문 등이 TV방송을 대신할 것으로 본다. <멀티미디어 시대>, 조지 길더, 권화섭 역, 한국경제신문사, 1995, pp.51-70.

1)예배에 있어서 성도의 코이노니아 강화
따라서 예배에 있어서도 텔레퓨터 등의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재택예배가 시대적 요청으로 보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회를 “입의 집”(Mundhous)이라고 할 정도로 예배에서의 설교의 위치를 중시했다. <종교개혁신학사상>, 이형기,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5, p.65. 19세기는 예전의 재부흥운동(litergical renew movement)이 생김으로써 설교중심의 예배가 지성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반성하고 성만찬을 강조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20세기의 개신교는 예전보다 설교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말씀설교를 유난히 강조했던 루터조차도 교회를 성도들의 교제 혹은 성도들의 공동체(communio santorum)로 본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신앙공동체는 영적이므로 교회의 외적인 특징이 교회를 교회되게 할 수 없으며, 성도들의 공동체성과 실질적인 교제가 중요하다. 텔레퓨터 등을 이용한 재택예배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대화를 나누는 텔레퓨터 원래의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기보다는 그저 개인주의와 편의주의를 위해 봉사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 현재 한국의 개신교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성찬식을 두어 가지의 큰 절기 외엔 별로 실시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히 교회의 표지로 보고 있는 성찬식은 성찬 자체가 성도의 공동체 내지는 교제라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공동체, 교제이며 이웃과의 공동체, 교제이다. 이런 성찬식, 예배 후에 나누는 밥상 공동체나 함께 부르는 노래, 서로 느끼는 상대방의 따스한 기(氣)와 같은 교회의 본질적이고 소중한 교제와 나눔을 재택예배에서 공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미래형 인간을 전망하는 가운데 신세대의 특징을 개인적, 흥미위주, 자연스러움의 선호, 모호한 성별구분, 강한 자기애로 꼽았다. 이러한 신세대(일본에서는 이들을 오래 전부터 신인류라 불렀다)의 특징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미래형 인간이 재택예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취향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문화는 일정 수준 반문화적 측면을 항상 담지해 왔다. 인간성의 피폐와 마멸을 방지하고 공동체적 인류애의 대안으로서 예배의 중요성이 더욱 요청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설교 중심의 개신교 예배는 재택예배를 굳이 막아야 할 당위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히 ‘듣고 보는’ 예배 형식을 탈피하여 온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예배 형식을 갖춰나가는 노력이 지금부터 필요하다. 예배 시는 물론 예배 후에도 성도의 교제와 코이노니아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2)예배 형식 개발
창의적이고 대화적인 예배형식의 개발도 반드시 숙고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기존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사제-목사 주도형 예배에서 진일보하여 뭔가 새로운 민주주의적 예배가 가능할 지도 모른다. 개신교는 만인제사장설의 신학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는 유리하다고 하겠다. 세례교인을 위주로 한 전 회중이 참여하고 대화하는 예배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강구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예배의 본질적인 차원은 어디까지나 견지하되 예배와 코이노니아의 방법적인 문제에 있어서 창의성과 신선한 대안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교회 내의 대화적 예배 형식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대화적 예배 형식 마련에도 유념해야 한다. 이미 리마 예식서를 많은 교단에서 활용하고 있으며, 한국 내에서도 개신교와 가톨릭 공용의 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듯이, 미래 교회는 인터넷, 텔레퓨터 등 멀티미디어 정보통신의 이기를 통해 이제껏 할 수 없었던 많은 교단 간의 유익한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서로에 대한 무지와 오해, 편견에서 벗어나, 이제는 각 교단의 장점을 대화로서 연구하고 흡수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개신교도 지금껏 쌓아온 교회와 예배의 전통 위에 더욱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의 자녀들이 평화와 기쁨을 누릴 예배 양식의 발전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3)영성 강화
미래 사회는 전술한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가 선도하는 고도 자본주의로 인한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편의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영성이 매우 황폐화할 전망이다. 이미 지금도 영성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 사회는 영성을 그 질적, 양적 수준에서 잘 인도해가는 미래교회의 역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미래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선도해가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미래교회는 예배형식에 있어 종래의 단순히 ‘보는’ 예배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드리는’ 예배, 사회로 파송되어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생활을 이끌어내는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 현대사회는 후기 자본주의체제와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으며, 교회도 변화하는 사회의 요구에 걸맞게 변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몸된 교회 공동체가 세상 사람들의 구미와 요구사항에만 매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현대사회야말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바로 담당하기 위하여 그릇된 세상문화와 현실에 맞서 분투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멀티미디어 첨단 정보체계를 이용한 예배의 개혁은 세상문화에 따라 가는데 급급한 개혁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문화의 대안을 제시하고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다하기 위한 방향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이어야 한다.
지금 미국의 교회는 “마케팅 교회”의 붐이 일고 있다. <기업을 닮아가는 교회>, 더글라스 웹스터, 오현미, 기독교문사, 1995, pp.31-39. 그러나 교회는 “예수를 파는” 데에 급급해서는 안된다. 나는 “예수를 파는” 데에만 급급하던 당시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개혁하고 “오직 은혜”와 “오직 성서”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을 떠올렸다. 루터는 교회개혁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요소들(diaphora)과 무관심거리의 요소들(adiaphora)을 구별하였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복음이라든가 이신칭의 같은 것이요, 후자에 해당하는 것은 예배의식, 수도원 입원을 위한 서원, 성상(성상), 예복, 금식 등이었다. 후자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전혀 자유로와야 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당시 비텐베르크의 열광주의적 개혁자의 리더였던 카알슈타트는 주로 후자에 대한 개혁을 도모하였던 반면에 루터는 이 “adiaphora”의 주장 때문에 로마 카톨릭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보수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개혁교회측은 저 “무관심거리” (adiaphora)에 속하는 것에 관하여서도 철저히 성서에 근거하여 개혁함으로써 교회생활 전반에 걸쳐서 성서적인 입장을 취하였다.<종교개혁 신학사상>, 이형기,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5, p.175. 시대에 맞는 예배의식의 개혁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예배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이 필요하다. 또한 예배의식의 개혁에 있어서도 그것이 성서에 기준한 것이 되도록 신학적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90년대 교회의 이슈는, 좀더 혁신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좀더 기도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을 닮아가는 교회>, 더글라스 웹스터, 오현미 역, 기독교문사, 1995, p.153. 이제 교회는 멀티미디어 정보화 시대의 문명의 이기들을 방법론적으로 적용하여 선용하되, 신앙적으로는 다시 한번 “근본으로 돌아가”(ad fontes), 기독교 원래의 신앙과 공동체성을 재확립하고, 성령이 임하시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Ⅲ. 결론

1.예배의 형식 변화의 필요성
한국의 기독교는 선교 1세기를 지나는 동안 지속적인 성장을 하엿다.그러나 최근에 교회의 성정이 멈추어 가고 있다.더 이상의 성장은 기대할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갱신을 통하여 새롭게 성장할수 있는 것일까?
지금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예배의 현장이 있다. 그 중에는 특히 ‘찬양 예배 모임’이 있따. 여기서 드려지는 찬양은 찬송가 수록 찬송가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의 정서에 맞는 복음성가를 더욱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찬양 예배에 사람들은 참여하여 예배하기를 사모하는 것이다.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찬양만이 예배에서 사용되어야 할 성서적인 근거는 없다. 리듬이 바뀌고, 박자가 바뀌었다고 예배시간에 찬양하여서 안될 이유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자제를 사용하여서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배의 형식 역시도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의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
예배를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과 만난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이 따라 문화가 변하고 사람들의 정서와 삶의 양식이 변한다. 결국 예배는 변하는 시대의 사람과 변함없는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변하는 시대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예배가 불변의 하나님과 변하는 시대의 사람을 매개하여 주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하여 요구되는 예배의 조건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예배의 본질이다.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되어 온 예배가 모두 예배일 수 있는 것은 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불변성에 관련하여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예배이지만 예배의 형식은 너무나 다른 형식으로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다 예배이다. 같은 예배가 다르게 행해지는 것은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변화가기 때문이다. 각 각의 시대는 그 시대의 문화에 적합한 형식의 예배를 소유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변하지 않는 하나님과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에도 불구하고 예배는 지속될 수 있었다.
이제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장이 열리고 있다. 이러한 때에 예배의 형식의 개선이 요구됨은 당연하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면 새시대의 사람들을 새시대의 예배에 참여케 하자는 것이다.

2. 목사 의식전환의 필요성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를 경험하기 시작한 지금 개교회와 목사의 의식 전환이 요구된다. 멀티미디어에 관심을 갖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하는 현장에 직접 참여하여야 한다. 멀티미디어는 단순한 가정용품이 아니라 삶의 전반에 관여되는 매체이다. 따라서 멀티미디어와의 접촉을 거부하는 것은 그 시대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결국 그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에 관심하고 그 편히함을 생활에 이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서는 안된다. 개교회와 목사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하여야 한다. 멀티미디어의 예배활용은 시대의 변화 속도 만킁이나 빠르게 요구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멀티미디어에의 투자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각종 장비와 프로그램을 구입하기 위하여 필요한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아직은 교회와 예배에 직접 효용이 되지 않느다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3. 노회 총회 등 전체적인 차원의 노력 요구
멀티미디어가 상업적인 이용가치가 높아지면 대규모의 투자가 늘어갈 것이다. 기업뿐아니라 학교, 정부, 종교단체 등에서 멀티미디어를 활용하게 될 것이다. 대규모의 투자를 기반으로 전파되는 타종교의 활약에 많은 사람들이 끌릴 수도 있고, 기독교는 적지않을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개교회가 대규모의 멀티미디어 시장에서 경쟁하기는 어렵다. 기독교의 예배에 활용할 프로그램의 계발이 개교회에서 진행되어지는 수준이라면,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의 전반적인 수준에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개교회를 연합한 노회나 총회 또는 기독교 전체적인 차원에서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특히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비기독교적인 사상이나 사이비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무방비 상태로 멀티미디어 상의 비기독교적인 요소에 현혹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마련이 있어야 한다. 멀티미디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주 쉽게 기독교의 정체성을 바로 이해시켜서 누구나 비기독교적인 요소를 구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보급시켜야 한다. 마치 컴퓨터의 바이러스를 체크하고 제거하는 백신을 개발하듯이.
멀티미디어 정보화시대에는 문화적인 소외현상이 심화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농어촌 교회나 빈민 교회는 멀티미디어를 소유하지 못하여 도시교회에 비해 예배에 있어서의 상대적 초라함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러나 농어촌 교회나 빈민 교회라도 멀티미디어를 소유하고 예배에 활용할 수 있다면 도시에서 드리는 예배와 같은 수준으로 감격적인 예배에 참여케 할 수 있다. 노회나 총회는 교회에의 멀티미디어의 보급에 계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4. 멀티미디어와 예배의 양방향성
멀티미디어는 가치중립적이다. 이것이 선하다 악하다라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결국 멀티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가치중립적인 멀티미디어는 차세대 문화형성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금세기의 문화형성에는 텔레비젼이 그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차츰 텔레비젼을 포함하고 그 차원을 뛰어넘는 멀티미디어의 보급이 확대되고 상용화되면 인류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멀티미디어의 예배 선용은 특별히 기대할만하다. 멀티미디어와 예배는 양방향성이라는 차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공통점이 멀티미디어의 예배활용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의 양방향의 주고 받음이며, 예배자와 예배자 사이의 양방향적인 주고 받음이다. 그러나 기존의 의사소통 방식은 다분히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예배는 일방적인 기도와 말씀의 선포 등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멀티미디어는 기존의 의사소통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 일단 주고 다음으로 받는 방식을 탈피하고, 동시에 주고 받는 양방향성의 의사소통 방식이 가능하여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예배에 선용된다면 보다 본질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이러한 예배의 양방향성 확대는 예배의 참여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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