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은 다음 두 권의 책을 읽으신 분들을 대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이상 두 권의 책은 코리아를 향하신 여호와 하느님의 예언적 목적을
내증(특별계시)과 외증(일반계시)으로 설명한 한국교회 성도들의 필독서입니다.
이 책들을 읽지 않으셨다면 “멜기세덱 프로젝트”를 충분히 이해하실 수 없습니다.
아직 이 두 권의 책을 정독하시지 않은 분은 먼저 아래의 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아리랑의 비밀과 한국인의 정체성"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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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프로젝트
욕단 계열의 역사 속 실존인물인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할
한 이방 제사장 민족의 모형
유석근
(알이랑코리아 대표, 알이랑교회 담임목사)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격퇴한 후에 멜기세덱을 만나 그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멜기세덱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제사장이다. 그는 살렘의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고대 명칭으로서(시 76:2) ‘평화’ 혹은 ‘평강’이란 뜻이다.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쳐부순 것도 역사적 사건이고 멜기세덱을 만난 사건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 역사적인 사건 속에 나온 멜기세덱은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의심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멜기세덱에 대한 히브리서의 기사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7:3). 실제 인물 중에 부모와 족보가 없는 사람, 시작도 끝도 없는 인물이 있는가?
어떤 계보도 없이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 멜기세덱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과 달리 독특한 멜기세덱형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히 5:10, 시 110:4). ‘세덱’은 ‘의’를 뜻하고 멜기세덱은 ‘의의 왕’을 뜻한다.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다.
또한 멜기세덱은 성경에 부모와 족보가 언급되지 않았다. ‘의의 왕’ ‘평화의 왕’ ‘부모와 족보와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한 제사장’ ‘아브람을 축복한 대제사장’ 이런 면에서 멜기세덱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예표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히브리서가 멜기세덱에게 부모와 족보와 시작과 끝이 없다고 한 것은 실제로 그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기록상 없다는 것이다. 곧 “그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성경에 기록된 족보도 없는 이”라는 뜻이다. 권위 있는 주해서인 『베이커성경주석』은 히브리서 7장 3절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멜기세덱에 관한 실제적인 사실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창세기의 기사가 그를 표현하고 있는 한계 내에서는 사실이다. 그는 어떤 계보도 없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기자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커성경주석 히브리서 p.472, 기독교문사)
거의 모든 성경의 주석가들이 이와 같이 이해한다. 실로 창세기의 기사가 제시하는 범위 내에서는 멜기세덱의 생명의 시작과 끝은 신비에 싸여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하느님의 아들의 적절한 유형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의 기록상 그런 것이 없는 점을 들어서 멜기세덱이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취하여 그가 삼위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으로 계신 분이 성육하시기 전에 나타나신 분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들의 기원에 초점을 맞춘 책인 창세기에 멜기세덱이 등장하였고, 그것도 그의 족보를 추적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뿐이다.
멜기세덱이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구원 역사에 등장하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그를 ‘하느님의 아들처럼’이라고 제시한 것은 적절했다. 멜기세덱은 그의 특이한 모습들로 인해 영원한 제사장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멜기세덱은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왕과 제사장이란 이중 직무를 지니고 있었다.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도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그런즉 멜기세덱은 그의 시대로부터 2000년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묘한 표상이며 예표이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렇게 멜기세덱은 장차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 기자들에 의해 예수님의 ‘모형’과 ‘예표’로서 기록될 위대한 사람이었다(시 110:4; 히 7:1~25). 이러한 이유로 성경의 일차적 저자 성령께서는 미리 그의 시작과 끝, 출생과 족보를 가리워 모세로 하여금 기록하지 않게 하셨던 것이다.
멜기세덱은 당대에 개인적으로 경건한 인물로서도 독특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미신과 온갖 부패로 가득 찬 나라에서 하느님만을 순전하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가까이 있었고, 다른 편으로는 가나안 사람들 가까이 있어 그는 온통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이처럼 칼빈도 멜기세덱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경건한 사람으로 해석했다.
그렇다. 시날 왕 아므라벨(창14:1)과 소돔 왕 베라(창 14:2)가 아브라함 당시의 역사적 인물이었던 것처럼 멜기세덱도 그들과 동시대의 살렘 왕이었던 역사 속의 실재인물이다(창 14:18). 주석가 벵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분명히 당시 한 왕이었고, 제사장이었고, 정말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이란 뜻이다. 멜기세덱은 일찍이 등장하였던 압제하는 왕들(cf. 창 10:8~12)과는 달리 의(義)의 왕이었다. 멜기세덱의 두 번째 명칭은 ‘평강의 왕’이다. 이는 멜기세덱이 통치하였던 도시 또는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 도시는 궁극적으로 ‘평강의 도시 또는 기초’라는 의미를 지닌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가 통치한 장소는 평강으로 복을 받았다.
멜기세덱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믿음이 있고 경건한 왕이었으며,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 평강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구원 역사에 있어 앞으로 오실 메시아와 구원자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아주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이처럼 멜기세덱은 역사적으로 실존한 사람이었다. 아브람 당시에 예루살렘의 왕이었다. 멜기세덱은 우리 조상 단군처럼 왕이면서 제사장이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쳐부수고 돌아온 아브람을 만났고 아브람을 축복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아브람이 가공의 인물을 만나 가공의 인물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다. 아브람은 실제의 인물을 만나 실제의 인물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실제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느니라”(히 7:1,2,14).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직무를 인정했으며,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헌상을 받아들였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 곧 메시아닉 쥬들은 구세주 예수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예수는 이방인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유념하고 이방인들 앞에서 겸손하라.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특히 이방인 가운데 존재하는 제2의 성민 한국인을 존중하라. 한국인은 에벨의 혈통 욕단의 후손으로서 하느님이 나중에 쓰시려고 동방에 은닉해 두신 또하나의 성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할 때(수 24:2), 동방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하며 유일신 하느님을 섬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라. 한국인의 선조들은 유대인의 조상과 믿음이 달랐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아래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멜기세덱 역시 우리 조상들과 동족인 욕단 계열의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한국인을 더더욱 존중해야 마땅하다.
아브라함 이전과 동시대에 유일신 하느님을 섬긴 이방인, 알이랑 민족
여기서 독자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멜기세덱이 어떻게 선민 아브라함 당시 하느님(하나님)의 제사장이었는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계열 외에 다른 인물들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받으셨는가? 그렇다!
고대에 유일신 하느님을 섬긴 사람은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뿐이었다는 선입견이야말로 속히 깨져야 할 아주 그릇된 고정관념이다. 아브라함은 우상장사꾼인 데라의 아들로서 그도 애초에는 우상숭배자였으며 다신론자였다. 그런데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제단을 쌓으며 유일신을 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보다 먼저 유일신 하느님을 알고 섬기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방인들 중에 분명히 있었다. 그 증거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도 있고(내증), 제2의 성민인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적 경험에도 있다(외증).
욥은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 시대의 사람이다. 욥은 환난을 통과한 뒤에도 140년을 더 살았다(욥42:16). 따라서 그의 산 연수가 200년 안팎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장수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 시대에 속한다.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고(창11:32), 아브라함은 175세(창25:7), 이삭은 180세(창 35:28,29)까지 살았다.
욥은 족장 시대에 살았으며 약 200세경에 죽었다. 하지만 욥은 이방인이었으며 아브라함 계열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욥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하느님은 이 욥을 가리켜 ‘내 종’이라고 말씀하시며 흡족해하셨다(욥 1:1,8). 욥의 세 친구들(욥 2:11)이나 엘리후(욥 32:2,4,66; 34:1; 35:1;36:1) 등도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었는데 그들 역시 아브라함 계열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유대민족과 관련이 없는 이방인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욥기는 교훈을 위한 책인 만큼 욥이라고 하는 실제 인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욥을 역사적 실제 인물로 알고 말하였다.
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은 허구적으로 꾸며낸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제 인물로서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욥은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 시대에 우스 땅에 살았던 실제 인물인 것이다. 욥이 살던 우스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아라비아 광야에 있던 지방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스’는 셈의 다섯째 아들 아람이 낳은 장자의 이름이다(창 10:22,23). 그런즉 욥은 셈의 손자 우스가 터 잡고 살던 동방의 어느 땅에 우스의 후손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보건데 욥 또한 셈족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욥은 누구일까? 이 ‘욥’은 대홍수 후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방의 ‘새벌’(스발)로 천동하여 배달나라를 세운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막내 아들 ‘요밥’과 동일인물로 인정된다(창 10:21~30).
왜냐하면 홍수 생존자들이 서부 시날 평지에 집결하여 바벨탑을 쌓고 하느님을 반역할 때, 바벨탑 건설에 가담하지 않고자 알이랑 정신 곧 ‘하느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동방의 새 땅으로 천동(遷動한 단 하나의 제천민족이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가계였기 때문이다. 욕단 족속은 그 시대의 ‘남은 자(remnant)’였다(“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pp.97~136에 자세히 수록).
서부 '시날'과 동방 '스발'로의 분리 현장 '메사' <--클릭
욕단의 자손을 제외한 전 인류는 바벨탑 건설에 가담했던 배역자들의 후손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하느님을 경외하던 ‘욥’은 욕단의 아들 ‘요밥’이라고 얼마든지 단정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신숭배가 만연하던 그 당시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던 족속은 오직 '알이랑' 민족인 욕단의 후손뿐이었기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조차도 우상숭배자였고,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다신숭배자였다). 이 ‘요밥’이 동방으로 왔다가 서쪽으로 역이동해서 ‘우스’ 땅에 정착해 알이랑 정신, 곧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객관적 논증이며 타당한 것이다.
그러니까 욥의 신실한 유일신 신앙은 그의 아버지 ‘욕단’으로부터 계승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강해설교의 대가인 미국 갈보리 채플의 척 스미스 목사도 그가 쓴 창세기 강해서인 「천지창조」에서 욕단의 막내아들 요밥과 동방의 우스 땅에 살던 욥은 동일인물이라고 설명한다.
클릭 -> 성경의 하느님과 일치하는 민족경전의 유일신 하느님 사상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일한 한민족 고유의 삼위일체 하느님 사상
우리 겨레는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자손답게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느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제천의식에서 숭배했던 ‘천’(天)이라는 존재, 곧 ‘하느님’은 성경의 하느님(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셨다. 우리 조상들이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하늘’(天)이라 한 것은 자연물인 푸른 하늘을 절대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하늘’(天)을 빌려서 절대자를 표시한 것이다. 우리 겨레는 창조주 유일신을 하늘(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대인도 하느님(하나님)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하였다(눅 15:18). 창세기 19장 24절은 여호와를 가리켜 ‘하늘’(天)이라고 칭하고 있다.
우리 겨레에게 ‘하느님’은 잡귀신 중의 하나가 아니다. 아주 두드러진 지위를 가진다. ‘하느님’은 성경에 계시된 창조주 유일신과 동일한 신이다. 우리 조상들은 여호와를 ‘하느님’으로 부르며 예배했다. 분명히 ‘하느님’은 한민족에게는 천지의 주인인 동시에 또한 민족 조상의 하느님이시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한길사, 1933년, 105쪽).
알이랑 민족 한국인은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우상 장사를 하며 살고 있을 때, 이미 동방에서 멜기세덱처럼 제천의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삼위일체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 백성이었다. 단군이 다스린 그들의 본거지는 평양(平壤)이었는데 “평화의 땅”이란 뜻이다(平:화평할 평, 壤:땅 양). 제사장 멜기세덱이 다스린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지명의 뜻도 사실상 일치한다.
▲씨름하는 사람 청동상- 두 남자가 머리에 단지를 이고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 BC 2400년경의 수메르 유물. 상대의 샅바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라. 우리 겨레 고유의 씨름과 똑같은 형태이다. 바그다드의 동쪽 하파자(khafajah)의 닌투 신전에서 출토되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 소장. 수메르인은 우리처럼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형태의 씨름을 했으며, 고구려, 가야, 신라 등에서 쓰인 회도를 사용했다. 또한 파미르 고원이 원산지인 파를 즐겨 먹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한국인과 수메르인이 같은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홍수 후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방으로 이동했던 우리 한국인의 형제 족속들로서, 바이칼호(天海)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다시 역이동해 중앙아시아(실크로드)를 거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들어가 문명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History begins at Sumer”의 저자인 S. N. Krammer 박사는 수메르인은 동방에서 왔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도 셈족으로서 서쪽으로 역이동해 ‘살렘’에서 하느님을 섬기던 욕단의 후손 중 한 분이었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했듯이 고대에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던 제천민족은 바벨탑 건설에 가담하지 않고 동방으로 천동했던 욕단 족속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멜기세덱은 동방의 의인인 욥의 후손일 개연성이 크다.
욥기 42:13~14에 보면 욥은 말년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는데, 이상하게도 세 딸들의 이름은 전부 기록되어 있으나, 일곱 아들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록돼 있지를 않다. 왜일까? 여러분은 이 문제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욥의 일곱 아들들 가운데 멜기세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적 인물 멜기세덱은 장차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 기자들에 의해 아비도 어미도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예수님의 ‘모형’과 ‘예표’로서 기록될 놀라운 사람이었다(시 110:4; 히 7:1~25). 따라서 성경의 일차적 저자이신 성령께서는 욥기의 기자로 하여금 ‘모형’(멜기세덱)과 ‘원형’(예수), ‘예표’(멜기세덱)와 ‘실체’(예수)가 일치하도록 멜기세덱의 아비와 족보를 감추고자 의도적으로 욥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게 하셨다고 해석된다.
바로 이것이 욥의 세 딸들의 이름은 모두 명시되어 있으나 일곱이나 되는 아들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은 타당한 이유이다. 그 밖에 설득력 있는 다른 까닭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정의의 임금’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멜기세덱은 우리 겨레의 조상인 욕단 계열 천손민족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분으로서 아브라함 당시에 실존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방인’ 멜기세덱이 ‘유대인’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한 일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원대한 하느님의 목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이방인 하느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복종의 예를 표한 아브라함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자극해 그들을 구원할 이방인 나라의 모형
놀랍게도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선민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다(창 14:18).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축복한 것이 아니라, 신비스런 왕 멜기세덱이 유대인의 조상 아브람을 축복했다. 이방인(멜기세덱)이 유대인(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것이다. 이러한 성경 기사는 오늘날 어떤 유대인의 마음에 몇 가지 어려움을 일으켰고 그들의 시기심을 자극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보다 탁월한 존재이다! 어떻게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이 이방인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십분의 일만 아니라 노략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여 그에게 드리며 이방인에게 복종의 표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신약시대에 살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조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분이었으며, 심지어 그는 유대인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지위가 높고 영예로운 것처럼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히 7:4).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땅에서 그의 선물을 받을 만한 하느님의 대사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정말 그랬을까? 성경에서 이방인이 구약성경의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으로 제시될 수 있었을까? 물론 가능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방인(멜기세덱)이 유대인(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그런즉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이 기사를 읽을 때 시기심에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서 축복을 받았을 때 그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멜기세덱보다 열등한 위치를 점하였다. 아브라함은 분명 멜기세덱보다도 더 부자였을 것이며,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을 이을 구체적인 상속자였다.
하지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예배를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데 있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탁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분명히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보다도 탁월하다!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경건한 이방인 멜기세덱 사이의 관계는 예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멜기세덱이 갖고 나온 떡과 포도주는 메시아 예수를 예표한다. 떡은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멜기세덱(이방인)은 피 묻은 ‘복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유대인)에게 나와 그를 축복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벌써 마지막 때에 욕단의 후손인 한국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복음을 가져갈 것이라는 사실이 예표로서 계시되어 있는 것이다(사46:10~13, 41:25~27, 52:7, 55:1~9, 계7:1~8).
이방인인 한국 백성이 장차 선민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그들을 축복하는 제사장 민족이 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진리를 아브라함을 축복한 하느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하여 이미 창세기 14장에서 모형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을 대표하고, 의의 왕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계열의 백성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여 능히 그들에게 피 묻은 복음을 전할 특별한 한 이방 민족을 예시한다(롬 11:11~14). 그 거룩한 백성은 동방의 알이랑 민족 한국인이다(사46:10~13, 41:25~27, 52:7, 55:1~9, 계7:1~8).
한국인은 멜기세덱의 영적 후손이다. 충분히 그렇게 규정할 수 있다. 왜? 단군의 자손 우리 겨레는 멜기세덱과 동시대에 동방에서 제천의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던 욕단 계열의 성민(聖民)이기 때문이다. 또한 멜기세덱 역시 우리 민족처럼 ‘알이랑족’ 즉 에벨의 자손 욕단 계열의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멜기세덱이 다스리던 땅인 ‘살렘’과 우리 조상 단군이 다스리던 땅인 ‘평양’(현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다)은 지명의 뜻도 일치한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평양(平壤)은 “평화의 땅”이란 뜻이다(平:화평할 평, 壤:땅 양). 기묘하게도 지명의 뜻이 똑같다. 결국 단군(욕단)은 동방에 있는 살렘 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멜기세덱과 코리아는 분리할 수 없는 영적 커넥션이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할 한국 백성은 예루살렘까지 떡과 포도주 곧 구원의 복음을 능히 가져가서, 기록된 계시인 성경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극적으로 성취할 것이다. 아래의 성경 말씀들이 그것을 분명히 예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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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1:25~27>, <사 52:7>, <사 46:10~13>, <사 55:1~9>, <계 7:1~8>
(이상 성경예언들은 “알이랑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pp.12~139에 자세히 해설되었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동방 코리아의 『멜기세덱 프로젝트』이다. 예루살렘에 세운 "멜기세덱 축복의 집"은 이스라엘 복음화를 위한 현지 거점이 될 것이다. 구속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세기의 멜기세덱으로 부름 받은 제2의 성민(聖民) 알이랑 민족이여, 나중에 쓰시려고 동방에 감추어 두신 왕 같은 멜기세덱의 흰 옷 입은 제사장들이여, 이제 스스로를 자각하고 일어서라! 예루살렘 땅 끝까지 구원의 복음을 가져가라! 그리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수축하라!
* 5년 전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함께 갔던 목사님들 앞에서
이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곳에 같이 계셨던 이광섭 목사님(예수세계교회)이
“멜기세덱 프로젝트”라는 사역 이름을 즉각 작명해 주셨습니다.
예언적 통찰력으로 사역의 핵심 가치와 본질을 담재한
귀한 명칭을 작명해주신 이광섭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관련기사: < 셈 ․ 수메르 ․ 코리아 >
< "유대민족의 대추수를 위해 한국 사람을 쓰리라!"- 신디 제이콥스 예언 동영상 >
< 하나님 VS. 하느님 >
< 백투예루살렘과 ‘시님의 군대’ >
< 돌제단 고인돌 왕국 >
< 사진으로 보는 마리산 참성단 >
< 민족과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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