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제사장) 직분
- 특유한 보물(peculiar treasure)(출19:5) -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지 셋째달이되는 그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르피담을 떠나 시내광야에 와서 그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거기서 이스라엘이 그 산 앞에 진을 이루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올라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게 말하고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어떻게 하였으며, 내가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들로 실어 내게로 데려왔는지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unto me) 특유한 보물(peculiar treasure)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내게(unto me) 성직자 왕국(kingdom of priests)이 되며 거룩한 민족(holy nation)이 되리라." (출 19:1~6)
"너희도, 생기 넘치는 돌들로서, 한 영적인 집으로 든든히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성직자들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성경기록에도 실렸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으뜸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런즉 그분께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로우시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거부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걸림돌과 실족케 하는 바위가 되었나니, 곧 불순종하여 말씀에 걸려 넘어진 자들에게니라. 또한 이들은 그렇게 되도록 정해졌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택함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유의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너희로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5~9)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장차 오실 분과, 그분의 왕좌 앞에 계신 일곱 영과,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를 우리의 죄들에서 씻으시고,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왕과 성직자로 삼으신 그분께 영광과 주권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1:4~6)
성직자(제사장)(PRIEST)
성직자(제사장)는 성전 안에 거하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드리는 자이다. 하나님은 그분을 섬기는 자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가운데서 안식을 얻으시고자 섬기는 자를 찾으신다(요 4:23). 성경에는 세 가지 성직자직분이 있다. (1) 멜기세덱(창 14:18~20) (2) 아론(출 28~29) (3) 신약 경륜 안에 믿는이들의 성직자직분(벧전 2:5,9)(계 1:5,6). 따라서 성경에 따르면 교회 안에는 특별한 성직자 그룹이 없다. 구약의 성직자직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성직자(대제사장)이시며, 모든 믿는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물을 드리는 성직자(제사장)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성직자 왕국으로 세우고자 하심
인용된 계시록 말씀에서부터 베드로서와 히브리서를 거슬러 올라가 출애굽기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성직자 왕국을 원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직자 왕국을 얻기 위해서 아담의 창조부터 인간의 타락 후 셋의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긴 시간(약 2200 년)을 거쳐서 이스라엘 백성을 얻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 목적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속하신 목적은 바로 성직자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가게 하여 그들로 나를 섬기게(serve) 하라"고 여러차례 말씀하셨다(출3:12 / 4:23 / 7:16 / 8:1,20 / 9:1,13 / 10:3,7,11,24,26 / 12:3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면 그들은 모두 성직자들이 되며 이스라엘은 성직자왕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일부(레위 지파)만이 성직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은 온 이스라엘 민족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이다. 바로 온 땅과 온 하늘 가운데서 성직자 직분을 얻는 것이며, 곧 성직자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성직자 직분과 성직자 왕국은 하나님의 특유의 보물이다. ("특유의(peculiar)")는 성경에서 총 7 번 쓰였다(출 19:5)(신 14:2, 26:18)(시 135:4)(전 2:8)(딛 2:14)(벧전 2:9) 그 의미는 "독점적인 소유물, 소중한 소유물"을 뜻한다. 믿는이가 하나님의 독점적인 소중한 소유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들의 피로써 사셨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소유물"(엡 1:14), "사신"(행 20:28)으로도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세굴라]는 '몫으로 따로 두다', '전유(專有)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공유하는 것이 아닌 개인적인 소유의 의미로, 예를 들면 국고의 재산이 아니라 왕이 개인적으로 가진 재산의 의미로 쓰였으며,"특별한"(신 7:6),"나의 보석들"(말 3:17), "내가 가진 좋은"(대상 29:3) 등으로 번역되었다. 우리는 이 단어 안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레위지파만 성직자가 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분의 "음성에 복종하고 언약을 지키면" 모두 성직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의 왕국으로 세우고자 하셨다(출 19:6).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불순종과 불법으로 일관하였다. 성직자직분의 첫 번째 자격은 성결(거룩)이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부가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성직자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오직 레위지파 만을 성직자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특별한 성직자로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셨다(출 28:1).
민수기 25장에는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성직자로 세우시는 사건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싯팀에 거할 때, 이방 여자들과 행음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다(민 25:1~15). 아론의 손자 엘리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자, 하나님께서는 평안의 언약 곧 영원한 성직자 직분이 되는 언약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셨다(민 25:10~13). 그러므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자손으로 하나님 앞에서 성직자의 직분을 맡게 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대신하게 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성직자 왕국으로 세우셨겠지만, 이제는 열 두 지파 중에 한 지파(레위)만이 성직자가 되었다. 레위 지파 외에는 어느 누구도 성직자가 될 자격과 권리를 갖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직접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 열 한 지파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람들로 변했고, 오직 레위사람들 만이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교회가 성직자 왕국이 되기를 원하심.
그렇다면 신약의 믿는이들은 어떻게 성직자가 되었는가? 히브리서 9, 10 장이 이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분명히 성경은 성막이 있는 동안, 성소에는 성직자들만이, 지성소에는 대성직자외에는, 그것도 일년에 단 한번 외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이같이 지정되었으니, 성직자들은 항상 첫 성막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하고, 오직 둘째 성막에는 대성직자가 홀로 해마다 한 번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잘못을 위해 드려지는 것이라. 성령님께서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째 성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라"(히 9:6~8). 왜 이같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제한을 받아야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수천년 동안 이러한 완전한지 않은 제도를 허용하셨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히브리서 9장과 10 장이 증거한다. 문제는 하나님과 사람을 가로막는 죄였다. 성직자의 첫 번째 자격 조건은 거룩한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다. 히브리서 9 장은 구약에 드려진 불완전한 희생의 원인이 섬기는 자의 죄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죄(히 9 장)
구약의 율법으로 제시된 모든 절차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것이다(6절).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희생을 드리는 법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죽음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지정된 법에 따라 구약의 성직자들(레위지파)은 성소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했다(6절) 지성소에는 대성직자만이 홀로 해마다 한 번씩 들어가는 것이 지정되었는데 반드시 자기와 백성의 잘못을 위해 희생을 드린 후 들어갈 수 있었다(7절). 구약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없었다. 구약시대에 수없이 많은 예물들과 희생물들이 드려졌지만 섬긴 자들을 완전케 할 수 없었다(10절). 왜냐하면 동물의 피로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영원히 깨끗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섬김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동물의 피는 양심을 영원히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있는 더 위대하고 완전한 성막에 의해 이 땅에 오셨다(11절). 그리고 그분 자신의 피로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속을 이루셨다(12절). 동물의 피는 육체를 정결케 하지만, 양심은 정결케 하지 못한다(13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조건은 깨끗케(purify) 된 양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 동물의 피는 육체를 정결케 하지만, 양심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1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유언의 중재자가 되셔서 첫 유언 아래 있던 양심을 깨끗케 하지 못하는 범법들을 대속하려고 죽으사 신약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약속된 영원한 상속을 받게 하셨다(15절).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것의 모형인, 손으로 만든 이 땅의 지성소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늘 자체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분의 피로 영원한 대속을 이루셨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다(26절). 이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자신의 피를 뿌리사 영원히 죄를 제거하셨다.
죄를 해결하신 아들의 몸(히 10 장)
율법은 그림자이므로 구약의 성직자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렸던 그 희생물들로는 하나님을 섬기러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케 할 수 없다(1절) 율법이 그림자가 아니고 바로 그 형상(그리스도)이라면 나아오는 자들을 완전케 하였을 것이며, 계속하여 희생물을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2절). 그러나 율법에 의하여 드렸던 희생물들은 죄의 문제를 영원히 처리하지 못하고 효과에 있어서 시간적인 제한을 갖고 있었다. 그 효력은 일년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여 드렸던 희생물들은 해마다 죄들을 다시 기억나게 만들었다(3절) 이것이 율법의 제한된 효능이며 동물의 피의 제한된 효능이다.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죄의식의 기억조차도 없어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동물의 희생물과 헌물(sacrifice and offering)이 아니라 한 몸(a body) 이였다(5절). 원래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희생을 원하지도 않으셨고 기뻐하지 않으셨다(8절).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엿볼 수 있다(요일 3:1, 4:10). 하나님의 뜻은 구약의 제한적 희생이 아니었다. 그분의 뜻은 아들로 말미암은 영원한 희생이였다(7절).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희생물 외에는 어떠한 희생물도 원치 않으시며 기뻐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전서 2:5 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acceptable to God by Jesus Christ) 영적인 희생물"의 참된 근원을 확인할 수 있다. 아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거나, 아들을 통하지 않은 희생물은 하나님은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된 섬김과 경배는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 삼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 한번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이들이 거룩하게 되었다(10절). 9 절의 하나님의 뜻은 바로 아드님의 몸을 드리시고자 한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짐승의 몸이였으나 둘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몸이였다. 첫 번째 희생물은 결코 죄를 제거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리 많이 드려도, 아무리 자주 드려도 헛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자신을 드리심으로 거룩케 된 자들을 영원히 완전케 하셨다(14절). 예레미아 대언자를 통해 맺으신 새 언약의 주제는 바로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17절). 이제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은 사면(remission)이 있는 곳에 드릴 것(offering)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8절)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 곳에는 영원한 사면이 있다. 이제 신약의 믿는이들은 예수님의 피에 의해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다.
우리가 지성소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두 가지 근원은 바로 주님이 희생물로 드려지면서 흘리신 피와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다(20절) 보라! 예수님께서 육체를 드리심으로 성별해 놓으신 길!!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함을 가질 수 있고, 대성직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지성소로 가까이 다가가라고 명령한다. 참된 마음과 믿음의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다가가라 명령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두 가지 상태가 우리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에 뿌림을 받은 것이고, 몸이 정결한 물로 씻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지성소에 들어가서 (가까이 모여서) 서로 사랑과 선행을 행해야 한다. 궁극적인 것은 사랑과 선행이다. 이것은 성직자의 섬김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으로 갈라진 베일을 통과하여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따라 지성소 안에 나와서 가까이 모여서 사랑과 선행을 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주님의 영원한 뜻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에 이르도록 격려하고, 선한 행실에 이르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서로 서로(one another) 살펴야 할 것이다 먼저 모여서 서로 서로 지체간에 살피며 사랑과 선한 행실에 도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모이는(assembling) 것이며, 그 열매인 사랑과 선한 행실이다. 이것이 바로 단체적인 성직자직분인 신약교회의 섬김인 것이다. 성경은 그날이 다가옴을 본다면,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본 자라면, 심판의 날아 다가올수록 지성소로 나아오는 횟수가 더 많아야 한다(so much the more)고 권면한다.
지성소 -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한 희생물로 드리신 후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셨다(히 10:19). 그리고 그 피를 지성소의 긍휼 자리에 뿌리셨다. 하늘의 참지성소의 긍휼자리를 덮고 있는 이 피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피이기에 그 피는 마르거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 이제 그분의 피를 믿는 이는 누구나 구약 시대의 대성직자들도 자신의 죄를 속죄하지 않고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지성소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담대히 들어 갈 수 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해케 된 믿는이들은 언제든지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히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긍휼 자리를 덮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는 대성직자만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를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밖에서 기다렸지만, 신약의 믿는이들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대성직자와 함께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신앙고백을 굳게 잡고 모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피가 지성소에 뿌려졌기 때문에 믿는이들은 언제든지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과 함께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믿는이들은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아무 거리낌없이 믿음의 충만한 확신 가운데서 진실한 마음으로 지성소로 다가 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성직자로서 언제든지 긍휼을 얻고자 할 때든지,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히 4:16).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로써 피를 흘리셔서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며,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성직자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직자로서 그분께로 다가가서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실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함께 모이기를 애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성소 - 믿는이가 하나님을 섬기는 곳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곳이다. 오늘 믿는이들은 예수님의 피로 성직자가 되었다(계 1:5,6). 신약의 성직자의 임무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항상 지성소 안에 거해야 한다. 성직자는 성막 밖의 세상에서(곧 자신의 육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그것은 결코 합당한 섬김이 될 수 없다. 성직자들이 거할 곳은 오직 지성소다. 지성소만이 성직자들이 하나님을 뵙고 그분을 섬기는 유일한 곳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믿음으로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우리의 몸들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하나의 산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려야한다. 이것이 신약의 믿는이들의 합당한 섬김이다(롬 12:1). 히브리서 13장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릴지니, 이것이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희생물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한다(히 13:15,16). 신약의 믿는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를 드림으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따라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지성소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직자들이 되었으며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직장이나 일터나 집이나 그 어느 곳이든지 그곳은 거룩한 지성소가 된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합당한 섬김이다.
지성소로 나아가라
히브리서는 성직자직분에 대하여 말씀을 주면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 곧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권면한다(4:16,6:19,7:19,7:25, 8:1, 9:7~8, 24, 10:19~22) 히브리서 안에서 가장 큰 명령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는 것이다. 성직자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사역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다시는 지성소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그분의 임재 안에 인도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길을 여는 데에는 큰 대가가 지불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흘림을 통해서만 이 길이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얻지 못하신 것을 교회에서 얻으시고자 아들을 희생하셨다. 다음의 구절들은 신약의 성직자들인 믿는이들이 하나님 앞에, 곧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권면하는 구절들이다.
A.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come boldly unto)
B.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 같아서, 확실하고 견고하여, 베일 내부로 들어가나니,(히 6:19)
C.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케 하지 못하였으되, 더 나은 소망이 들어와서 완전케 하였나니, 이 소망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draw nigh unto).(히 7:19)
D.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또한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오는(come unto)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나니, 이는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심이라(히 7:25)
E.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에 의해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가졌나니, -- 믿음의 충만한 확신 가운데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자(draw near). (히10:19~22)
경고 -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름
또한 히브리서는 지성소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뒤로 물러나는 자들을 향해서 엄한 권면을 한다.
"모세의 법을 멸시한 자도 두 세 증인 하에서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케 한 계약의 피를 거룩치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영을 욕되게 한 자가 당연히 얼마나 더 혹독한 형벌을 받겠는가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8~29)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자들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오직 믿어 혼의 구원에 이를 자들에게 속하느니라"(히 10:38~39)
지성소로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이고, 자기를 성결케 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형벌이 더욱 혹독한 것은 이것이 사람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대한 죄이기 때문이다. 이 죄는 하나님이 다시 세우신 성직자 직분에 대한 진리를 안 후 고의로 범하는 죄인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안으로 넘어질 것이다. 그 손은 우리에게 오셔서 만져주시는(touch) 사랑의 손이 아니라 멸망에 이르는 자들을 받으시는 무서운 심판의 손이다. 뒤로 물러가는 것은(draw back)이 지성소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역사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이요 언약의 거룩한 피를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이 아닌 형벌의 손길로 다루실 것이다. 뒤로 물러나는 것은 결국 멸망(perdition)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뒤로 물러나지 말라! 오늘 우리가 인내와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더 좋고 영구적인 실체(34절), 약속(36절), 큰 보답의 상(35절), 그리고 혼의 구원(39절)이 있을 것이다.
성직자 직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잃어버린 몫을 오늘 교회가 얻었다.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가 성직자 왕국이 되기를 원하신다. 계시록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성직자로 삼으셨다(계 1:6). 우리가 바로 왕가의 성직자이다. 오늘 하나님의 뜻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직자가 되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직자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5 절에 의하면 믿는이들은 각 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담긴 한 개의 생기 넘치는 돌이다. 그리고 5 절은 믿는이 각자를 성직자라고 말하지 않고 믿는이들이 단체적으로 한 영적인 건물이요, 한 성직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영적인 건물(a spiritual house), 곧 교회와 거룩한 성직자직분(an holy priesthood)을 동격으로 말한다. 교회는 하나의 단체적인 거룩한 성직자직분이다. 뒤따르는 수식 구절을 볼 때, 성직자직분은 영적 희생물을 드림으로 세워지는 교회의 터요, 기초이다. 교회의 건축은 반드시 성직자 직분의 섬김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직자직분이 없으면 교회는 세워질 수 없다.
교회의 기초는 성직자직분이요 교회의 섬김은 성직자의 섬김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먼저 성직자직분을 얻으셔야 했다. 교회의 직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직자들의 단체적인 섬김이다. 교회는 성직자들이 머리되신 대성직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희생물을 드림으로 섬기는 곳이다. 믿는이의 참 직업은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다. 거룩한 성직자 직분이 없다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 희생물이 없으며, 교회는 존재의 터와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희생물을 드리지만 그들이 거룩한 성직자직분의 터 위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교회의 건축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은 단순히 일꾼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를 성직자로서 그분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다. [주(註) : KJB 만이 TR을 따라서 베드로전서 2:5의 "영적인 집"과 "성직자"를 동격으로 번역하였다. ASV, NASV, NIV와 같은 현대 역본은 (eis 전치사를 첨가한) 부패한 사본을 좇아 "성직자"를 "영적인 집"을 수식하는 구로 번역하였다. 동격과 수식구의 미묘한 차이가 주는 계시의 빛이 얼마나 다른가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로써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의 몸들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하나의 산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 12:1).
분명히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성직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모든 성직자는 희생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존재한다. 모든 믿는이가 성직자라면 반드시 모든 믿는이의 손에는 예물과 희생물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삶은 오직 이 희생물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희생물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처리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어떠한 희생물도 열납하지 않으신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불사름 바 될 것이다. 자기의(自己義)와 육(肉)의 냄새가 나는 희생물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많은 믿는이들의 희생물은 성직자 직분의 입장 위에서 드려지지 않는다. 신약의 희생물은 더 이상 레위지파를 통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레위지파가 존재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케 하는 가증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믿는이들이 주님께 드리는 희생물은 아직도 구약경륜 아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섬기는가가 아니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직자직분의 터 위에 서 있어서 섬기느냐 이다. 하나님은 오직 성직자직분의 터 위에서만 희생물을 기쁘게 받으신다. 구약은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준다.
성직자 직분을 침범함 (웃시야왕의 실패)
"그가 강해지자 그의 마음이 멸망에까지 높아졌으니, 이는 그가 주 그의 하나님을 거스려서 범법을 행하고 분향단에 분향하려고 주님의 전으로 들어갔음이더라. 그때 성직자 아사랴가 그의 뒤에 들어갔으며 그와 함께 주님의 성직자 팔십 명이 동행하였으니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웃시야왕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그대 웃시야여, 주님께 분향하는 것은 왕께 속한 일이 아니고 분향하기 위하여 성별된 아론의 아들인 성직자들에게 속한 일이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법을 행하였사오니, 그 일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존귀를 얻지 못하리이다." 하니 웃시야가 화를 내고 분향하려고 그 손에 향로를 잡더라. 그가 성직자들에게 화를 내자, 주님의 전 안의 성직자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발하였으니, 곧 향단 옆이라. 수성직자 아사랴와 모든 성직자들이 왕을 쳐다보니, 보라,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그들이 왕을 거기서 밀어 내자 스스로 황급히 나갔으니, 이는 주님께서 그를 치셨음이더라. 그리하여 웃시야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였으며, 나병환자로서 별채에서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주님의 전에서 끊어졌음이니라.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의 집을 다스리고 그 땅의 백성을 심판하더라"(역대하 26:16~21)
웃시야 왕은 처음에는 그의 아버지 아마샤가 행한 모든 것을 따라 주의 목전에 옳은 것을 행하였으며 그가 스카랴의 날들에 하나님을 구하였다 그가 주님을 찾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그를 번성케 하셨다. 곧 주변 여러 나라를 쳐서 정복하고 강해졌다. 그가 강해져서 그의 이름이 멀리까지 퍼졌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지자 하나님을 거스려서 범법을 행하고 향단에 분향하려고 주님의 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경배를 받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율법에 따르면 오직 성직자만이 그분의 전에서 섬기는 것이 허용되었다.
웃시야는 성직자가 아니였다. 비록 그가 유대왕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성직자 직분을 경홀히 여기고 침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고, 성직자 직분을 경홀히 여긴 것에 대하여 주님의 전에서 끊기고, 평생을 나병환자로서 별채에서 살다가 죽는 심판을 내리셨다. 웃시야 왕의 동기는 육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성직자 직분을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웃시야 시대와 같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심각하다. 성경을 벗어난 성직자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승인을 얻지 못한다. 베드로전서 2:5 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성직자"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영적 희생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한다. 경배와 희생물을 드리는데 다시 레위지파가 등장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를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기까지 하면서 회복한 성직자 직분을 다시 레위지파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이요 십자가를 무효케 하는 것이며 십자가 너머의 옛 경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믿는이의 거룩한 성직자 직분을 계급으로 나누는 것은 웃시야의 죄와 같이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난 섬김에 대한 심판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각자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담아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신 이상한 불을 주 앞에 드렸더니 주님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이 주님 앞에서 죽은지라".(레위 10:1~2)
레위기 10 장에서 우리는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주님 앞에서 각자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이상한(strange) 불을 드린 것을 본다. 그 결과 그들을 주님 앞에서 죽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그들의 경배는 웃시야 왕처럼 육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며 자기중심적인 경배를 드렸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드린 경배는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으며, 죽음의 심판을 받게 하였다.
우리는 유사한 예를 카인에게서 볼 수 있다. 창세기 4 장에서 카인의 경우 그는 잘못된 헌물을 가지고 왔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는 경배와 섬김에 대하여 이미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1 장에서 아벨은 믿음으로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렸으나 카인은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지 않으시자, 카인은 매우 격노했다. 유다서 11 절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카인의 길을 간" 사람들이 있다. 주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헌물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카인과 같이 그들은 자신의 방법에 따라 자신들이 택한 헌물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벧전 2:5).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희생물은 그분이 지정하신 성직자 직분을 통하여 드려지는 희생물이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성직자 직분은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하면서 얻어진 것이기에 특별하고 소중한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그것은 장차 그분 앞에 세워질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엡 5:27). 우리가 이러한 직분을 경홀히 여길 경우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이러한 구약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직자 직분을 소홀히 함 -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함
히브리서 9, 10 장이 증거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성직자 직분을 세우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사 한 희생물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 드려짐으로 새롭고 산길을 열어 놓으셨다. 우리의 성직자직분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가? 예전에는 아무나 가질 수 없었던 성직자 직분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하나님을 섬기는 이 성직자직분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성직자로 부르신 것은 그분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이다. 사람이 성직자 직분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교회의 일원일 뿐,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이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보았는가?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옛 경륜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을 희생하기까지 우리가 가까이서 그분을 섬기며 우리에게서 경배를 받기를 원하신다.
참다운 신약 교회 - 교회의 지체 전체가 성직자로 섬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볼 때 모든 믿는이들이 다 성직자가 되지 못했다. 우리의 섬김은 아직도 모든 믿는이들의 섬김으로 이루어질 만큼 보편적이지 못하다. 아직도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대 성직자직분 체제 아래 머물러서 레위지파(소수의 사역자)의 섬김을 의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필요로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성직자이다. 성직자와 하나님의 백성이 한(one) 실체가 될 때 비로소 교회가 있게 된다.
성경이 계시하는 교회는 소수의 레위지파가 섬기는 곳이 아니라 모든 믿는이가 성직자로서 섬기는 곳이다. 신약의 성직자체계는 소수가 다른 이들을 대신하는 레위지파 성직자 직분 체계가 아니다. 모든 성직자의 직무 중에 어느 일부라도 제한을 받는다면 그곳에 니콜라이탄(니골라당)이 있게 되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신약교회의 섬김이 아니다. 교회 사역의 가치는 그 가운데 얼마나 성직자 직분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희생단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믿는이의 성직자 직무였다. 따라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직분이 아무리 뛰어나고, 그 은사가 아무리 많고, 아무리 유용해도, 그가 다른 지체를 대신하여 섬기는 한 합당한 성직자 직분이 아니며, 그는 교회를 건축하는 자가 아니라 니콜라이탄이다. 교회 안에서 주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니콜라이탄의 행위이다(계 2:6). 왜냐하면 자기의 은사로 다른 믿는이를 대신하여 섬기는 것은 성직자 왕국으로서 교회의 터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주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책망을 받을 것이다. 개인의 섬김은 교회를 세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하거나 심지어 무너뜨린다. 교회 사역의 길은 각 지체가 빠짐없이 성직자로서 함께 섬기도록 하는 것이다. 신약교회에서 섬김의 근본은 모든 성직자들이 서로서로 함께 빠짐없이 모두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소수의 섬김이 다른이의 섬김을 대신한다면 그곳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자직분이 없기 때문에 신약교회의 건축이 없다. 오늘 성경의 교회가 세워지는 유일한 기초는 바로 이러한 믿음 위에서 나아가는 것이다. 개인이 얼마나 뛰어나고 많은 업적을 남기더라도 그가 다른 사람을 대신한 것이라면, 그는 구약의 성직자직분 위에서 걷는 것이며, 신약의 계시에 따르면 니콜라이탄이다. 그에게는 은사와 일이 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신약 교회는 없다. 전체가 성직자로서 섬기지 못한다면 성경이 계시하는 신약교회의 길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의 책임이다. 성경은 증거한다. "너희도, 생기 넘치는 돌들로서, 한 영적인 집으로 든든히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성직자들이 되었도다"(벧전 2:5) / "또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성직자께서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이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가운데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자. (약속하신 그분은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이 없이 굳게 붙잡고,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함께 모이는 일을 저버리는 어떤 사람들의 습성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더 그리하자."(히 10: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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