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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브라함 이전과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던 이방인

수호천사1 2013. 4. 20. 17:08

 -이 글은 "플러스인생"(신앙계)에 있는 유석근 목사의 '숨은역사찾기' 12월호 원고입니다-

 

아브라함 이전과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던 이방인  

 

兪昔根

(알이랑코리아 대표, 한국기독교상고사학회 선임연구원, 알이랑교회 담임목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대 세계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던 사람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유대민족뿐이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제천의식에서 숭배했던 ‘천’(天)이라는 존재, 곧 ‘하느님’이 성경의 하나님(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셨다고 말을 하면 즉각 이단시한다. 그 사실을 입증해주는 객관적 증거들이 충분히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 조상들이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하늘’(天)이라 한 것은 자연물인 푸른 하늘을 절대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하늘’(天)을 빌려서 절대자를 표시한 것이다. 우리 겨레는 창조주 유일신을 하늘(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대인도 하나님(하느님)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하였다(눅 15:18). 창세기 19장 24절은 여호와를 가리켜 ‘하늘’(天)이라고 칭하고 있다. 

 

  우리 겨레에게 ‘하느님’은 잡귀신 중의 하나가 아니다. 아주 두드러진 지위를 가진다. ‘하느님’은 성경에 계시된 창조주 유일신과 동일한 신이다. 우리 조상들은 여호와를 ‘하느님’으로 부르며 예배했다. 분명히 ‘하느님’은 한민족에게는 천지의 주인인 동시에 또한 민족 조상의 하느님이시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한길사, 1933년, 105쪽).

 

클릭 < 성경의 하느님과 일치하는 민족경전의 유일신 하느님 사상 >

 

클릭 <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일한 한민족 고유의 삼위일체 하느님 사상 >

 

클릭 < 고대 한국인의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에 관해 기록한 ‘표훈’의 정체

  

  고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섬긴 사람은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뿐이었다는 생각이야말로 속히 깨져야 할 아주 그릇된 고정관념이다. 아브라함은 우상장사꾼인 데라의 아들로서 그도 애초에는 우상숭배자였으며 다신론자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제단을 쌓으며 유일신을 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보다 먼저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방인들 중에 분명히 있었다. 성경에 그것이 기록돼 있다.


 동방의 의인 욥

  

  욥은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 시대의 사람이다. 욥은 환난을 통과한 뒤에도 140년을 더 살았다(욥42:16). 따라서 그의 산 연수가 200년 안팎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장수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 시대에 속한다.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고(창11:32), 아브라함은 175세(창25:7), 이삭은 180세(창 35:28,29)까지 살았다.

 

  욥은 족장 시대에 살았으며 약 200세경에 죽었다. 하지만 욥은 이방인이었으며 아브라함 계열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 욥을 가리켜 ‘내 종’이라고 말씀하시며 흡족해하셨다(욥 1:1,8). 욥의 세 친구들(욥 2:11)이나 엘리후(욥 32:2,4,66; 34:1; 35:1;36:1) 등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는데 그들 역시 아브라함 계열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유대민족과 관련이 없는 이방인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욥기는 교훈을 위한 책인 만큼 욥이라고 하는 실제 인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욥을 역사적 실제 인물로 알고 말하였다.

 

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은 허구적으로 꾸며낸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제 인물로서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욥은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 시대에 우스 땅에 살았던 실제 인물인 것이다. 욥이 살던 우스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학자들은 아라비아 광야에 있던 지방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동방의 의인 욥은 누구일까? 이 ‘욥’은 대홍수 후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방의 ‘새벌’(스발)로 천동하여 배달나라를 세운 ‘욕단’(셈의 현손)의 막내아들 ‘요밥’과 동일인물로 인정된다(창 10:21~30).

 


  

  왜냐하면 홍수생존자들이 서부 시날 평지에 집결하여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반역할 때, 바벨탑 건설에 가담하지 않고자 알이랑 정신 곧 ‘하나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동방의 새 땅으로 천동(遷動)한 단 하나의 민족이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가계였기 때문이다. 욕단 족속은 그 시대의 ‘남은 자’(remnant)였다.


  욕단의 자손을 제외한 전인류는 바벨탑 건설에 가담했던 배역자들의 후손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욥’은 욕단의 아들 ‘요밥’이라고 얼마든지 단정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신숭배가 만연하던 그 당시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던 족속은 오직 '알이랑' 민족인 욕단의 후손뿐이었기 때문이다(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조차도 우상숭배자였고,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다신숭배자였다).


  이 ‘요밥’이 동방으로 왔다가 서쪽으로 역이동해서 ‘우스’ 땅에 정착해 알이랑 정신, 곧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타당한 것이다.

 


▲씨름하는 사람 청동상- 두 남자가 머리에 단지를 이고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 BC 2400년경의 수메르 유물. 상대의 샅바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라. 우리 겨레 고유의 씨름과 똑같은 형태이다. 바그다드의 동쪽 하파자(khafajah)의 닌투 신전에서 출토되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 소장. 수메르인은 우리처럼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형태의 씨름을 했으며, 고구려, 가야, 신라 등에서 쓰인 회도를 사용했다. 또한 파미르 고원이 원산지인 파를 즐겨 먹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한국인과 수메르인이 같은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홍수 후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방으로 이동했던 우리 한국인의 형제 족속들로서, 바이칼호(天海)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다시 역이동해 중앙아시아(실크로드)를 거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들어가 문명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History begins at Sumer”의 저자인 S. N. Krammer 박사는 수메르인은 동방에서 왔다고 역설했다.


  그러니까 욥의 신실한 유일신 신앙은 그의 아버지 ‘욕단’으로부터 계승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강해설교의 대가인 미국 갈보리 채플의 척 스미스 목사도 그가 쓴 창세기 강해서인 「천지창조」에서 욕단의 막내아들 요밥과 동방의 우스 땅에 살던 욥은 동일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

 

  이방인으로서 유일신 하나님을 잘 섬기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은 또 있다.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축복해준 멜기세덱이다(창 14:18~20). 멜기세덱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제사장이다. 그는 살렘의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고대 명칭으로서(시 76:2) ‘평화’ 혹은 ‘평강’이란 뜻이다. 중요한 사실은 멜기세덱 역시 욥(요밥)처럼 우리 겨레의 성경상의 직계조상인 욕단(창 10:21~30) 계열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직무를 인정했으며,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헌상을 받아들였다.

 

  먼저 멜기세덱이 역사적 인물이냐 아니냐부터 검토해보자. 멜기세덱에 대한 히브리서의 기사 때문에 멜기세덱을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7:3). 실제의 인물 중에 부모와 족보가 없는 사람, 시작도 끝도 없는 인물이 있는가?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과 달리 독특한 멜기세덱형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히 5:10, 시 110:4). ‘세덱’은 ‘의’를 뜻하고 멜기세덱은 ‘의의 왕’을 뜻한다.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다. 멜기세덱은 성경에 부모와 족보가 언급되지 않았다. ‘의의 왕’ ‘평화의 왕’ ‘부모와 족보와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한 제사장’ ‘아브람을 축복한 대제사장’... 이런 면에서 멜기세덱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예표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히브리서가 멜기세덱에게 부모와 족보와 시작과 끝이 없다고 한 것은 실제로 그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기록상 없다는 것이다(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렇게 해석한다). 베이커성경주석은 히브리서 7장 3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멜기세덱에 관한 실제적인 사실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창세기의 기사가 그를 표현하고 있는 한계 내에서는 사실이다. 그는 어떤 계보도 없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기자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커성경주석 히브리서』, 기독교문사, p.472)

 

  이 위대한 인물의 생명의 시작과 끝은 신비에 싸여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적절한 유형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의 기록상 그런 것이 없는 점을 들어서 멜기세덱이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취하여 그가 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으로 계신 분이 성육하시기 전에 나타나신 분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들의 기원에 초점을 맞춘 책인 창세기에 멜기세덱이 등장하였고, 그것도 그의 족보를 추적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뿐이다. 멜기세덱이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구원 역사에 등장하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처럼’이라고 제시한 것은 적절하였다. 멜기세덱은 그의 특이한 모습으로 인해 영원한 제사장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멜기세덱은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왕과 제사장이란 이중 직무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대제사장이시며(히 5:10, 시 110:4), 멜기세덱은 그의 시대로부터 2000년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묘한 표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역사적 인물이 아닐 것이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말라.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쳐부순 것도 역사적인 사건이고 멜기세덱을 만난 사건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 역사적인 사건 속에 나온 멜기세덱은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다. 주석가 벵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분명히 당시 한 왕이었고, 제사장이었고, 정말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멜기세덱은 당대에 개인적으로 경건한 인물로서도 독특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미신과 온갖 부패로 가득 찬 나라에서 하나님만을 순전하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가까이 있었고, 다른 편으로는 가나안 사람들 가까이 있어 그는 온통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이처럼 칼빈도 멜기세덱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경건한 사람으로 해석했다.

 

  멜기세덱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믿음이 있고 경건한 왕이었으며,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 평강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구원 역사에 있어 앞으로 오실 메시아와 구원자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아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 곧 메시아닉 쥬들은 구세주 예수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예수는 이방인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방인들 앞에서 겸손하라. 특히 이방인 가운데 존재하는 제2의 성민 한국인을 존중하라. 한국인은 욕단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이 나중에 제사장 나라로 쓰시려고 동방에 은닉해 두신 또하나의 성민이다. 알이랑 민족 한국인은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우상장사꾼으로 살고 있을 때, 이미 동방에서 멜기세덱처럼 제천의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삼위일체 유일신 하나님을 섬겼던 제사장 백성이다.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히 7:15~17).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한 이방인 제사장 멜기세덱

  

  그렇다면 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 멜기세덱은 누구의 후손일까? 앞서 우리는 동방의 의인 욥이 우리 겨레의 성경상의 조상인 ‘욕단’의 막내아들 ‘요밥’과 동일인물이라고 확인했다. 아마도 멜기세덱은 그 욥의 아들일 개연성이 크다. 욥기 42:13~14에 보면 욥은 말년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는데, 이상하게도 세 딸들의 이름은 전부 기록되어 있으나, 일곱 아들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록돼 있지를 않다. 왜일까? 여러분은 이 문제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욥의 일곱 아들들 가운데 멜기세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역사적 인물 멜기세덱은 장차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 기자들에 의해 예수님의 ‘모형’과 ‘예표’로서 기록될 위대한 사람이었다(시 110:4; 히 7:1~25). 이러한 이유로 성경의 일차적 저자 성령께서는(딤후 2:16; 벧후 1:21) 미리 그의 시작과 끝, 출생과 족보를 가리워 모세로 하여금 기록하지 않게 하셨던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성령께서는 욥기의 기자로 하여금 ‘모형’(멜기세덱)과 ‘원형’(예수), ‘예표’(멜기세덱)와 ‘실체’(예수)가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멜기세덱의 아비와 족보를 감추고자 의도적으로 욥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게 하셨다고 해석된다. 바로 이것이 욥의 세 딸들의 이름은 모두 명시되어 있으나 일곱이나 되는 아들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은 이유에 관한 타당한 해석이다.


  이로 보건대 아브라함 이전과 동시대의 이방인들 중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알이랑 민족 한국인의 친족들이었다고 간주된다. 우리 한국인은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후손인데 욥(요밥)도 멜기세덱도 욕단 계열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로 코리아는 동방의 등불이었다. 

 

 마지막 때의 멜기세덱, 이방인 제사장 나라


  놀랍게도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선민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다(창 14:18).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축복한 것이 아니라, 신비스런 왕 멜기세덱이 유대인의 조상 아브람을 축복했다. 이방인(멜기세덱)이 유대인(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것이다. 이러한 성경 기사는 오늘날 어떤 유대인의 마음에 몇 가지 어려움을 일으켰고 그들의 시기심을 자극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보다 탁월한 존재다. 어떻게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이 이방인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십분의 일만 아니라 노략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여 그에게 드리며 이방인에게 복종의 표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방인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복종의 예를 표한 아브라함


  신약시대에 살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조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분이었으며, 심지어 그는 유대인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지위가 높고 영예로운 것처럼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히 7:4). 그것은 사실이다. 이방인(멜기세덱)이 유대인(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그런즉 종교적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이 기사를 읽을 때 시기심에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서 축복을 받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멜기세덱보다 열등한 위치를 점하였다. 아브라함은 분명 멜기세덱보다도 더 부자였을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이을 구체적인 상속자였다. 하지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있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탁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분명히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보다도 탁월하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경건한 이방인 멜기세덱 사이의 관계는 예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멜기세덱이 갖고 나온 떡과 포도주는 메시아 예수를 예표한다. 떡은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음이다!


  즉 멜기세덱(이방인)은 피 묻은 ‘복음’을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유대인)을 축복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벌써 마지막 때에 욕단의 후손인 한국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복음을 가져갈 것이라는 사실이 예표로서 계시되어 있는 것이다(사46:10~13, 41:25~27, 52:7, 55:1~9, 계7:1~8).

클릭 < "유대민족의 대추수를 위해 한국 사람을 쓰리라!"- 신디 제이콥스의 예언 동영상 >

클릭 < 하나님의 동풍작전 >

 

  이방인인 한국 백성이 장차 선민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그들을 축복하는 제사장 민족이 된다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진리를 아브라함을 축복한 이방인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하여 이미 창세기 14장에서 모형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을 대표하고, 의의 왕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계열의 백성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여 그들에게 피 묻은 복음을 능히 전할 특별한 한 이방 민족을 예시한다(롬 11:11~14). 그 거룩한 백성은 욕단 계열의 성민인 알이랑 민족 한국인이다.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cafe.daum.net/ALILANG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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