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학

[스크랩] 21세기 교회성장 전략

수호천사1 2013. 4. 4. 13:31

21세기 교회성장 전략

 

 

우리는 이제 21세기로 한 발자욱 가까히 접근해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볼 때,「제3물결」시대에 처해 있으며, 벌써 정치적으로도 초이데올로기적이며, 경제적으로도 초산업화의「제3물결」이 출렁거리고, 정경종(政經宗)의 통합된「큰 바벨론」(계 17, 18장)이 태동하고 있는,「제4물결」이 머지않은 곳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급박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세계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국가적인 장벽들을 뛰어 넘어서 세계를「한 지구촌」으로 생각하고, 분주하게 넘나들면서 초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숨가쁘게 오가는 상고들의 무역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근접한 종말적인 상황에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에,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로 보았던「큰 바벨론」이 태동하고 있다면, 종말이 가까운 징조가 아닐까?
요사이 전에 없는 천재지변이 전세계계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과연 종말이 가까이 문앞에 닥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하면서, 필자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천재지변은 끝이 아니라 재난의 시작이기 때문에(마 24:6), 자신도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로 더욱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며, 둘째로 만국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끝이 오리라고 했으니(마 24:14), 세계복음전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성서적으로 볼 때, 마지막으로 등장하는「제4물결」의 세력은 정경종이 통합된 하나의 거대한 지상의 세력의 집합체인「큰 바벨론」으로서, 용에게 큰 권세를 받아서 행세하다가 주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계 17,18장).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부터, 용의 권세를 받은 두 짐승이 각각 바다와 땅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용의 권세를 받은 세상권세(政權)와 종교권세(敎權)을 가리킨다. 첫째 짐승은 머리가 일곱이고, 열 뿔이 있는데, 그 뿔에는 열 멸류관이 있으며,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세상 왕권의 대표로 성도들을 칼로(政權)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둘째 짐승의 횡포는 첫째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첫째 짐승의 정권까지 동원하여 짐승우상을 만들고, 그에게 절하지 않는 자들은 다 죽이고, 경제권까지 위임받아 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666 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짓 선지자의 세력으로서 이 둘은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세력을 의미한다. 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다니엘서 7장과 8장에 예언된 세력으로, 이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이미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던, 당시 바벨론, 메데·바 사, 헬라 등의 강대국들을 거쳐, 넷째 나라로 등장한 로마제국를 지칭한 것이나, 이것은 사도요한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예언하게 된 것이다(계 13장, 17장).
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등장해서 세계를 지배하며, 성도들을 괴롭히고 박해하게 될,「제4물결」을 타고 나타나는 정치, 경제, 종교의 통합된 세력이다(계 13:1-18). 그러므로 현재 정경종의「제3물결」이 넘치고 있으므로, 앞으로 정경종의 통합된「제4물결」이 몰아칠 때에는 넷째 짐승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 때가 지나면, 반드시 다니엘이 예언한대로「제5물결」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성도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단 7:17-18; 17:22; 17:27; 2:34-35)
이 시대가 오기전, 21세기「제3물결」시대와「제4물결」시대를 대비한 교회성장 전략은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의 교회들이 영적으로 무장하여 종말을 준비해야 할 것이며,「제4물결」의 한파가 닥쳐오기 전에 일어날 세계복음화를 위한「마지막 선교의 물결」(The Last Mission Wave)에 합류하여 만국 복음전파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제1부 역사의 조명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천지만물과 인간이 운동하는 율동(律動)을 보시며 즐거워하신다. 사실 알고 보면, 생물은 물론, 무생물에서까지도 천지만물의 우주만상이 운동을 통하여 율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숨을 쉬고 생각하며 말을 한다. 더 나가서 활동하며 운동한다. 다른 동물이나 식물도 숨을 쉬며 움직인다. 무생물인 천체와 지구도 어떠한 신비의 법칙에 의하여 숨을 쉬며 활동하고 있다. 또 천체들간에 중력(重力)과 인력(引力)을 통하여 그들의 포지션(position)을 유지하면서 각기의 궤도(軌道)를 따라 운동하고 있다.
사실, 유성(流星)들과 같이 어떤 물체는 정지상태에 있는 것같으나 초고속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運動)과 정지(停止)는 활동(活動)과 비활동(非活動)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영원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 둘은 에너지 운동의 양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이나 초감도의 기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극치의 초고속 상태로 가면 정지상태와 같이 되고, 그 초고속 상태의 긴장이 풀리면 풀릴수록 운동감각을 더욱 심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엔진이 초고속으로 돌면 돌수록 더욱더 안정상태에 이르고, 엔진의 긴장이 풀려서 저속으로 돌면 돌수록 엔진의 운동이 불안정하게 되어 심하게 흔들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지와 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의 상극현상(相克現狀)인 동시에 상생현상(相生現狀)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어트(T. S. Eliot)은  그의 희곡 "성당안의 살해"(Murder in the Cathedral)에서 진행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회전축을 "정적의 지점"(still point)으로서, 신(神)과 통하는 영원(永遠: eternity)으로 묘사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궤도를 이탈한 인류의 역사는 불안하기 만 하다. 인간의 실수로 순간 순간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여, 역사의 수레바퀴(the vehicles of history)는 종말을 향하여 덜커덩거리며 굴러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정하고 계시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계획에 따라 굴러가고 있다. 인간의 작난(?)으로 역사가 왜곡되는 것 같지만, 그 순간 순간 하나님의 심판(審判)과 구제(救濟)에 의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목적대로 그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수레바퀴 중의 하나는 지상의 왕국(earthly kingdom)의 자취를 엮어나가는 일반사(一般史)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왕국(heavenly kingdom)을 엮어나가는 기독교사(基督敎史)이다.
이 두 수레바퀴 개념은 어거스틴(St. Augustine)이 말한대로 함께 굴러가다가, 종말에 가서는 세상나라(the earthly world)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귀결된다는 역사의식(歷史意識)이다. 그의 저서인「하나님의 도성」(The Kingdom of God)은 우리에게 역설적인(paradoxical) 역사의식을 제시한 것으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전개해나가고 있으며, 그는 유세비우스(Eusebius) 보다도 더욱 영적으로 심오하게 "하나님의 도성"에 접근해 있는듯 하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의 기원을 성서의 아담의 타락 후, 아벨과 가인의 후예에 두고 있으며, 이 두 족속의 관계는 세상 끝날까지 상극관계를 유지하게 되나, 종말에 가서는 결국「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를 선포하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자들이, 세상나라(the earthly kindom)는 일시적으로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지배하게 되는데, 궁극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승리로 세상나라가 심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1. 기독교의 역사의식

인류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단 역사가들 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우선 종교계와 비종교계가 그 유형을 달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역사관에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같이 확실한 역사관을 가진 종교는 없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앞에서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내세(來世)에 대한 유일신론적(唯一神論的)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확고부동한 하나님 나라를 내다보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따라 한치도 오차없이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도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를 따라 정확히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엮어나가실 때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경륜(經綸)에 따라 정확하게 섭리(攝理)하시고 계신다. 세상에 일어나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historical facts)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은 하나도 없다. 머리털까지도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정교하신 손길에 의해서 천상천하의 모든 사건들이 핸들(handle)되고 있다.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없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마 10:29). 천상천하(天上天下)의 대소사건(大小事件)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 전지창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섭리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이 기독교(基督敎)의 역사의식(歷史意識)이다.

2. 비기독교의 역사의식

그러나 이와 반대로 비기독교의 역사의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간섭을 제외시킨다. 모든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자연발생적이거나 우연한 사건으로 본다. 자연현상의 진화가 자연적인데 반하여 인간사회의 역사적 진보는 인위적이라고 한다. 레이몬드 아론은 역사속의 모든 정치구조는 인위적이고 가변적(可變的)이라고 말하였다. 유물론자인 마르크스(Karl Marx)는 역사를 물질운동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신의 간섭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나 실존주의 신학자들까지도 두 개의 차원의 역사, 즉 카렌다적(calendar)인 일반역사(Historie)와 초역사(Geschichte), 또는 참역사(Ulgeschichte)를 말한다. 그들은 카렌다적인 역사적 사건(historical facts)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실존적인 신앙의 사건(existential events of Geschichte)에 역사의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또, 하이덱거(Heidegger)나 콜링우드(R. C. Collingwood)는 "그 자체의 역사성"(the historicity of the self)에 의하여 역사를 해석한다. 로빈손(Robinson, J. M.)에 의하면, "역사란 외적 발생사건 배후에 있는 참여자(participants)들에 대한 의지의 행동과 관여와 그 의미"라고 정의하고, 특히 신약성경 연구에 있어서 역사와 인간존재에 대한 제일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신분(self-hood)에 관한 역사적 진술로서 케뤼그마(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역사가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가 자연의 진보로 대치되었고, 성서가 말하는 영원과 천년왕국이, 단지 세속적인 역사를 배경으로한 인간의 활동으로 이룩되는 하나의 지상낙원(an earthly Utopia)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히11:3)와 역사의 최후 완성을 제외하고는, 경험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구원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전적으로 운영된다는 역사관이 없이는 본질적인 의존관념이란 근거가 없으며, 만일 역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전적으로 콘트롤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념과 인간역사의 관념은 전적으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성경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성경말씀 안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랑케(Leopold Von Ranke)와 같은 역사가는 오히려 역사를 연속선상(continuous line)에서 생각하지 않고 역사적인 사건마다 신(神)과 직결시켜서 다루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르네쌍스(Renaissance) 시대를 보면서, 그들의 시대의 연대를 쓰거나 그들의 신뢰를 평가절하한 추리작품(detective work)의 제형(諸型)들에 의하여 기록한 그 당시의 여러 저술가(authors)들을 섭렵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하에 진행되는 구원사(救援史)를 역사의 연속선상(連續線上)에서 다루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영원한「하나님의 나라」로 연결시킨다(계 21:1-8).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하나님의 도성」제19권에서 악인의 역사도 선인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되다가 최후심판이 마칠 때까지 지속되다가 최후심판시에 선인의 승리의 선포와 한께 영원히 사라진다고 내다보았다.

3. 역사의 변화 물결

역사는 흐른다. 창조이후 역사는 시간과 함께 흘러왔고 또 흘러갈 것이다. 세상 끝날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역사는 흐른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창조의 원리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특별섭리에 의하여 이 자연의 창조의 법칙을 무시하고 기상천외한 일을 행하실 때도 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때를 말하기를 "기적의 때"(time of miracles) 혹은 "기적의 순간" (momentum of miracles)이라고 한다. 기적은 통상적인 질서를 파괴한다. 시간을 무시한다. 역사적인 코스도 뛰어 넘는다. 시간을 조작하여 역사의 코스를 변경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밖에서 역사를 콘트롤하시면서, 때로는 역사속에 돌입해서 역사의 코스를 자기 뜻과 계획에 따라 수정하시기도 하신다. 역사가 왜곡될 때에 역사를 바로 잡으신다. 사실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역사의 흐름, 대세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 다만 대세의 흐름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잘 탈수 있느냐?가 인간의 과제이다. 그러나 믿음의 영웅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따라 시간을 조작해서 역사를 창조하는 기적을 나타낸 사건들을 볼 수 있다. 기적의 사람들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특별섭리로 시간을 무시하고 역사의 진행을 중단시킨 사건들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전무후무한 사건들이었다. 이 역사를 창조한 믿음의 영웅들의 사건은 오늘날에는 달라진 하나님의 역사의 배경속에서 신앙으로 이해해야 할 문제들이다.

4. 신령한 결혼식 예표

여호수아서 10장 12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기브온 중천에 해를, 아얄론 골짜기에 달을 하루 종일 멈추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모리 사람들을 완전히 섬멸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모리 족속을 격파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 승리를 위하여 정상적인 역사의 시간을 무시하고 시간을 만듦으로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역사를 창조하는 자는 위대한 영웅이 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전무후무한 역사를 창조함으로 믿음의 영웅이 된것이다. 여기에는 구원론적인 하나님의 신령한 뜻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삼으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가 담겨진 약속으로서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비유적인 의미로, 태양은 신랑을, 달은 신부를 의미한다(합 3:12). 태양은 낮을 주관하고(창 1:16), 달은 밤을 주관함으로(창 1:16) 이 두 광명은 서로 상반된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만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인간은 의인과 죄인이라는 상반된 신분으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의 택하신 중매자인 여호수아에 의하여(바울사도가 자신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중매자라고 비유해서 설명한 것 같이) 한 자리에서 만나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순간, 바로 이 순간이 신부와 신랑, 즉 그리스도와 우리가 서로 만나서 영원한 해로를 약속하는 성스러운 결혼식의 장면이라 하겠다.
이 결혼식은 인간의 결혼식과는 다르다. 인간의 결혼식은 역사속에서 어느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에 맞추어서 결행하지만, 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인 인간의 결혼식은 역사적 시간을 구속(救贖)해서 창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행사되는 신비스러운 결혼식의 순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순결한 신부가 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구속적인 결혼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순간은 우리 인간이 구속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機會)이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기회"(opportunity)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이로스"(      )로서 "시간"(time)으로도 번역 된다. 이 말은 본래 희랍의 "작은 남신"(minor god)의 이름으로, 이 남신의 모습은 양 발에 날개가 달려서 아차 하는 순간에 신속히 달아나며, 앞 머리에만 한 줌의 머리채가 있고 그 외의 머리 전체가 대머리임으로 달려올 때에, 앞에서 앞 머리채를 잡지 않으면, 지난 뒤에, 뒤에서 잡으려면 뒷머리는 반들반들 대머리라 잡을 수가 없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회란 하나의 챤스(chance)로서 적기에 포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때는 신부인 인간이 신랑인 예수와 결혼할 기회로서 은혜받을만 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그래서 바울은 세월(때, 시대, 혹은 시간)을 아끼라고 했는데(엡 5:16; 골 4:5), 에베소와 골로새 교인들에게 권면할 때에 말한 "세월을 아끼라"(                         )는 말은 "시간을 구속하라"(redeeming the time)라는 뜻으로, 사실상양적인 시간의 개념보다는 구속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NIV).

5. 기적의 치유사건

그리고 열왕기하 20:1절 이하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불치의 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때에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통회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회생을 약속하시게 되었다. 그 약속의 징조로 일영표(日影表)를 10도 물러가게 하신 일이 있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를 10도, 즉 20분을 후진시킨 것이다. 이 사건 역시 역사적인 순서를 무시하고 인간을 치유하심으로 육적인 구원을 보여주신 구원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조작하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속에 들어오셔서 시간의 리듬도 타시지만 때로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하시면서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해나가신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서 치유함을 받으려면, 통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특별히 조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암(癌)과 같은 불치의 병은 정상적인 시간에 따라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운명의 여신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시간을 조작해서 그 여신의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은 죽게 된다.
성경에서, 나인성에 독자를 잃은 한 과부가 죽은 청년 독자의 상여(喪輿)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는 광경을 볼 수 있다(눅 7:11-17).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없어서 사람들과 나인성 과부는 죽음의 행렬을 따라 공동묘지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죽음의 순간, 죽음의 시간을 바꿔놓을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맞은 편에서 예수님을 선두로 "생명의 행렬"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행렬이 마주치는 순간, 예수께서 그의 손으로 그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하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명령하실 때에, 그 즉시 죽음의 행렬은 멈추고 청년은 일어나게 되었다. 시간을 따라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던 행렬이 멈추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불치의 병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죽은자가 살아나는 사건은 하나의 기적으로 정상적인 시간을 뛰어 넘어서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의학이란 시간의 순리에 따라, 환자를 점차적으로 치료하여 회복시키지만, 기적(奇蹟)이란 시간의 순리를 무시하며 시간을 조작해서 인간을 치유, 회복시킨다. 예를 들면,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하자. 의학적으로 보면, 진단과 수술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치료하는 과정을 거쳐서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회복할 수 있게 되지만, 기적이란 그 모든 과정과 시간을 무시하고 단번에 펴버리고 만다. 이것이 시간을 뛰어넘어 시간을 창조함으로 역사하는 기적적인 치유의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흐름을 무시하시지 않으시지만 반대로 피조물과 같이 역사에 매이지도 아니하신다. 역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속에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 역사의 흐름을 타시면서도, 때로는 그 역사의 장벽을 뛰어 넘기도 하셨다. 역사를 초월하기도 하시면서 그 오모한 솜씨로 또한 역사의 흐름에 맞추어 섭리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만사가 때와 기한이 있어서 그 때를 따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 나가신다고 한다(전 3:1).「제1물결」(the first wave),「제2물결」(the second wave),「제3물결」(the third wave),「제4물결」(the fourth wave),「제5물결」(the fifth wave) 등의 역사의 흐름을 몇가지 차원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문예부흥이나 계몽사상을 중심으로한 인류문화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역사의 작가와 프로듀서는(演出家) 역시 인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류문화적인 역사의 물결을 인간이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역사관은 인류역사의 프로듀서는 하나님이시요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배역에 따른 선역과 악역의 배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인류 문명의 물결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인류의 문명의 모든 운동들은 역사의 흐름을 타고 파도와 같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곤 한다. 운동이란 하나의 고정된 교리(dogma)나 불변의 법칙(law)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타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시대의 물결(wave)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은 여러 차원에서 몇 개의 물마루들(crests)-3, 4개의 물마루들-을 이루면서 물결쳐 왔다. 이 물결들은 파도의 고저(高底)를 이루며 리드미칼(rhythmical)하게 흘러왔다. 이 물결의 물마루가 역사의 문명운동의 절정(絶頂)이 되는 것이다. 역사의 물결운동은 여러 차원에서 일어났으며, 몇번에 걸쳐 일어났다. 그런데 돋보이는 것은, 이 운동들 모두가 각기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하여 3, 4차에 걸쳐 일어났다는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제1물결」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제2물결」은 근대에 각 분야에서 일어났고, 현재에는 쇠퇴해가고 있으며, 현대는「제3물결」이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제3물결」은 멀지 않은 곳에서 넘실거리며 몰려오고 있는「제4물결」을 예상하는데 일고(一考)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 정치의 물결 (Political Waves)

청치의 물결은 문화가 발달해오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형성되었다가 사라져 갔다.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인류의 역사를 5만년으로 잡고(성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일반 역사가들이 추정하고 있는대로), 대략 62년의 생애로 나누어 지금까지 약 800회의 생일을 맞고 있다고 전제하고, 최근 70회에 문자를, 4회에 시간 측정을, 마지막 2회에 와서야 현대의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이용하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인류정치의 물결은 이데올로기(ideology: 理念)의 물결로서, 군주주의(君主主義)와 봉건주의의(封建主義)의「제1물결」이후, 근대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資本主義的 民主主義)와 사회주의적 공산주의(社會主義 共産主義)의 등장으로서「 제2물결」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앞으로 청치적 이데올로기 물결은「제2물결」들(民主主義/共産主義)의 상호충돌(相互衝突)-일방와해(一方瓦解)-상호보완(相互保完)-종합(綜合)의 과정을 거쳐 탄생되는「제3이데올로기」인「제3물결」이 굽이칠 것이며, 그 이후에는 인위적(人位的)으로 건설되는 유토피아(Utopia)가 아닌 그리스도의 왕국을 준비하는「제4물결」, 즉「적그리스도의 세상」이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이 물결후에는「제5물결」이 흘러 넘칠 것이다.

(1) 제1물결 (군주주의/봉건주의 이데올로기)

18세기 이전까지 세계를 지배해왔던(정확히 말하자면, 세계 모든 국가가 그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군주(君主)및 봉주(封主)들의 이데올로기는 한 마디로 절대 전제정치 이데올로기었다. 이 전제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다수의 민중들의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했고 일부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군주주의 이념을 모토로 하고 있었다. 인류가 세상에 출현한 이후에, 가족 단위-씨족 단위-부족 단위-도시국가 단위-민족국가 단위 등의 과정들을 거쳐 오면서 초기에는 대중이 더부러 사는 공동체사회가 이루어지기 이전이므로, 수평적 평등관계가 수립되지 못하고, 소수에게 특권을 인정하는 수직적 차별관계가 강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상하의 차별을 인정하는 전제정치이념(專制政治理念: autocractic ideology)의 시대적 조류(時代的 潮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 조류를 가리켜서 인류정치사(人類政治史)의「제1물결」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2) 제2물결 (민주주의/공산주의 이데올로기)

18세기 계몽주의의 어시스트를 받아 19세기에 와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는, 20세기 현대 산업사회에서 그 한계성에 직면하여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고,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의 마르크스와 렌닌의 교조적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도 그 객관성과 정착능력을 상실한채 붕괴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물론, 자본주의가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함과 동시에 자유경쟁 체제를 도입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서 복지자본주의로, 다시 현대의 통제자본주의에서 무한경쟁적 자본주의로의 변천과정을 밟고 있는데, 아마 앞으로는 국민의 주권이 강조되는 민주사회적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흐를 전망이라고 보여진다. 자본주의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는바,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상품의 양산과 화폐의 역할, 생산의 이윤추구와 이에 따른 주기적인 경제위기, 그리고 상품의 유통을 위한 시장경제와 특히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갈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제2물결」인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왕정정치와 봉건정치이후 오늘날까지 잘 적응되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반동(reaction)으로 뒤따라 즉시 나타난 사회주의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전후에 정치적으로 한때 고전을 하게 되었으나, 지금에는 오히려 제2차「제2물결」로 나타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붕괴시키고 유아독존적인 권좌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제2물결」이었던 공산주의(共産主義)와의 충돌과 자체의 부족한 점으로 인하여 이 제1차「제2물결」인 자본주의적 민주주의(民主主義) 이데올로기는 새로운「제3의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새로 거듭나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포이엘바하의 공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1917년 10월 쏘련의 볼세비키 혁명시, 공산당 선언으로 공식 출범하게 된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반동으로 잇따라 출현한「제2이데올로기」물결이다. 공산주의의 이론에 따른다면, 지상의 유토피아(Utopia)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위하여는, 헤겔의 역사철학의 방법인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첫 단계가 인민해방투쟁이며, 그 둘째 단계가 사회주의 건설의 단계이고, 마지막 단계가 그들이 지상낙원이라고 하는 공산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인민해방의 단계는 투쟁이 특징이며,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노력(勞動)에 의한 분배이며, 마지막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수요(需要) 또는 요구(要求)에 의하여 분배(分配)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론은 그럴듯 하지만,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무한 경제발전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그러므로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욕구불만이 초래되어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환상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사회주의의 특징으로는 중앙집권화(centralization)가 두드러지다. 그러기 위해서 전산업을 국유화하고, 부르죠아 계급을 타파하고 노동계급을 두둔하며, 경제적 평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한 것이다. 예상대로 1990년대에 들어와서 그 종주국인 러시아가 사분오열됨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communistic ideology)도「제2물결」로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현대는 이데올로기를 초월(超越)하고 있다.

(3) 제3물결 (조화형/통합주의 이데올로기)

경제적「제3물결」이라고 하는 현대 초산업 사회에서,「제2물결」이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본질과 원리는 이미 그 한계성에 직면하여 새로운 이념으로서의 수정이 불가피한 상태에 이르렀고, 더구나「제2물결」의 또 다른 면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그 객관성과 현실적응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자 붕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의 추세에 맞추어 제3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출현하고 있는데, 이것을 바로 정치적인「제3물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웅 교수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그 자본주의의 반동(reaction)으로 출현한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두 개의 다른 이데올로기로 보고, 현대 산업화 물결을 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 두 이데올로기가 수렴화(收斂化) 과정을 통해 통합되어「제3이데올로기」의 새로운 물결이 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체제의 장점들을 상호 도입하면서 종합(synthesis)이 가능하리라는 것이 수렴이론(收斂理論)의 핵심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현대화, 산업화 작업에 발맞춰 현대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필요(needs)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자본주의의 주도하에 사회주의을 수렴, 종합하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 피터 드럭커(Peter F. Drucker)는 "산업사회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초월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산업사회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현대는 이미 산업사회에서 초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이미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헌신짝 같이 벗어 던지고 빵을 구하기 위해여 안간힘들을 쓰고 있다.

(4) 제4물결 (적그리스도/사단 이데올로기)

성경은「제4왕국」에 대하여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제4왕국」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예언자 다니엘을 만나보기로 하자. 다니엘은 인간이 다스리는「제4이데올로기」인 적그리스도 왕국이 나타고, 그 후에야 그리스도의 왕국인 성도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예언했는데, 지난 역사속에서 성취되었고, 앞으로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왕국의 이데올로기가 전세계적으로 다시 한 번 지상에 물결칠 것인데, 이것이「제4물결」이 될것이며, 그 후에「그리스도의 왕국」, 즉「재림왕국」이 도래할 것을 예언했고, 사도 요한은 이를 증거하였다(계 11:15).
우선 역사적 예언성취에 있어서의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성서적으로 살펴보고 일반사 속에서의 그 예언의 성취를 증명해 보기로 한다. 다니엘서 2:31절 이하에 보면, 느브갓네살이 침상에서 꿈으로 이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머리가 정금(正金)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銅)이요, 그 종아리는 철(鐵)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鐵)이요 얼마는 진흙(塵土)인 큰 신상(神像)을 보았는데 이 신상은 세상권세요 그 지체(枝體)들은 역사적으로 차례 차례 나타날 세상나라들이다(단 2:31-35). 그 후에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뜨인 돌이 나타나서 신상을 쳐서 부숴뜨리고(단 2:34-35), 지상의「제4왕국」후에는 성도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단7:17-22). 이 신상으로 비유된 네 나라중의 첫째는 정금같은 바벨론이요, 둘째는 은과 같은 파사요, 셋째는 놋과 같은 헬라요, 넷째는 철과 흙으로 비유된 로마제국을 의미하며,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다.
좀더 사상적, 전투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다니엘은 하늘에서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 때, 바다에서 큰 짐승 넷이 나왔는데 첫째가 사자와 같고, 둘째가 곰과 같고, 셋째는 표범과 같으며, 넷째는 열뿔이 달리고 큰 말을 하는 이상한 짐승이라고 묘사하고 있느데, 이것들 역시 첫째는 사자와 같은 바벨론이고, 둘째는 곰과 같은 메데 파사요, 셋째는 표범과 같은 헬라이며, 넷째는 큰 말을 하는 이상한 짐승, 로마로 비유되었다. 여기서 큰 말을 한다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묘사한 것이다. 성경에 사도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사단의 적그리스도 철학(antichrist philosophy of Satan)이 네 짐승들의 공동사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넷째 짐승으로 묘사된 로마제국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정치의「제4물결」은 통합된 이데올로기로 흐를 것인데, 아마도 구주공동체(EC)를 모델로 해서 아메리카와 아시아 등의 새로운 불럭 공동체(block community)가 형성된 후, 하나의 세계공동체(WC)로 통합되면서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출현하지 않을까 전망해본다.

(5) 제5물결 (재림왕국/성도나라)

「제5물결」은 종말의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에 따른 성도들의 물결로「제5세계」인「성도의 나라」(재림왕국) 의 도래이다. 이「성도의 나라」 가 올것을 다니엘 선지자가 예언했다.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18). 네 왕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는데, 그 중에 넷째 왕이 다스리는 지상에서의 마지막「제4왕국」인데, 그 다음에 성도의 나라인「제5왕국」이 도래하리라는 예언이다. 이 예언은 역사상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 바벨론의「제1왕국」, 메데·바사의「제2왕국」, 헬라의「제3왕국」, 로마제국의「제4왕국」(단 7:23-26),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도의 나라인「제5왕국」(성도의 나라: 지상교회)을 세우신 것이다(단 7:17-22, 27; 마 16:18; 마25:34; 계 2:26; 20:4). 이 예언은 창차에 나타날 넷째의 짐승의 나라 다음에 도래할 종말론적 성도의 나라의 모형이다. 이 나라는 성경이 증거한 대로 주님께서 다스릴 나라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나라를 심판하시고 구속받은 그의 성도들과 함께 다스릴「성도의 나라」로서 용의 권세가 천년동안 무저갱에 갇히워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미혹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과 성도들이 공의와 구원의 영광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 할 것이다(사 62:1-5). 재림왕국(Second Adventistic Kingdom: Millenium)에 대한 기대는 지상의 모든 성도들과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는(롬 8:18-25) 진정한 유토피아가 될「성도의 나라」이다. 이 나라의 시기와 형태가 어떻든 간에, 반드시 다섯번째 나라로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이 성경의 확고부동한 예언이다. 이 나라가 오기 전에「제4세계」인 적그리스도의 세상나라와의 충돌이 불가피함으로 성도들에게 대환란이 있겠으나 믿음으로 인내하는 자들은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될것이다(마 10:22; 24:13; 계 13:10). 환란이 극심함으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걱정할 것은 없다고 본다(마 24:22).  

2. 경제의 물결 (Economical Waves)

전술한 바와 같이 앨빈 토풀러는 인류 역사상, 특히 경제분야에서 발전과정을 통하여 흘러온 변화의 물결은 더욱 선명하게 타나났다고 분석했다. 인류가 문명의 개발을 하지 못하던 시대는 대체로 동굴에서 보냈으며, 수렵 및 유목생활을 거쳐 농경문화를 건설하면서 몇번에 걸쳐 인류역사의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차례로 일어난「제1물결」,「제2물결」,「제3물결」의 변화속에서 이제는「제4물결」을 대비해야 할 시점에 와있는 것이다. 앨빈 토풀러는 인류문명의 단계를「제1물결」인 농업단계,「제2물결」인 산업화단계,「제3물결」인 초산업단계등 삼단계로 구분해서 다루었고,「제4물결」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3부 대작중 첫번째작인「미래의 쇼크」(Future Shock)에서 세 물결(three waves)의 변화를 다루었고, 두번째의 작품인「제3물결」(The Third Wave)에서는 변화의 방향을 다루었고, 세번째 작품인「권력이동」(Power Shift)에서는 미래의 권력의 통제를 주제로 다루므로써 사실상「제4물결」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앨빈 토풀러의「제3물결」에 민감하게 대처해서, 미래에는 하나의 공동창조를 구사하게 된다는「제4물결」을 제시한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헐맨 메이너드(Herman Bryant Maynard)와 수쟌 머텐스(Suzan E. Merhtense)이다.「제1물결」인 농업혁명은 인류 문명사회에 수천년에 걸쳐서 나타났지만,「제2물결」인 산업화문명이 대두되는 데는 불과 300여년이 걸렸고,「제3물결」은 고작 수십년 안에 우리 앞에 닥아 온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정경종(政經宗)이 통합된 사회인「제4물결」(The Fourth Wave)이 초산업사회(超産業社會)인「제3물결」(The Third Wave)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고 진단(疹斷)했다.

(1) 제1물결 (농업혁명/농경문명)

앨빈 토플러는「제1물결」인 농업문명이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되어 기원 1650-1750경까지 아무런 도전들을 받지 않은채 이 지구를 지배해 왔다고 생각한다. 사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본능에 의해서 채취와 수렵등 원시적인 방법으로 생활을 이어왔고 좀더 지혜를 사용하여 유목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문명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시기는 농경생활로 농업문명을 개척하면서 부터였다. 그러므로 농업을 경제발전의 제1단계라고 한다. 이 농업화시기는 수천년을 이어오면서 변화의 물결이 매우 느린 상태였다. 1917년대 산업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이어져왔다. 농업은 인류문명의 기초로서 초기에는 인류의 대부분이 이에 의존하여 살아왔다. 그러나 18세기 산업혁명이후, 현재에 와서는 필요한 식량생산을 목적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세계의 주요 12개국의 농업인구는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15% 미만이며, 세계의 식량공급의 주역인 미국 농업도 6%의 비율로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급속히 감소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 문명 중「제1물결」로 특징지어진 농업화 물결이 거의 소실되었다는 증거라 하겠다. 이「제1물결」은 본질적으로 종식(終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거론(擧論)의 여지(餘地)가 없다고 생각된다.

(2) 제2물결 (공업화/산업화)

「제1물결」인 농업혁명은 수천년이 지나서야 출현했지만,「제2물결」인 산업문명은 불과 300여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시대적 변화의 물결의 템포가 굉장히 빨라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첫번째 역작인「미래의 쇼크」에서 시대가 얼마나 빨라지고 있는가에 관하여 "가속적 추진력"과 "생활의 속도"의 제하(subtitles)에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공업문명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친 약 1세기동안, 영국에서 부터 새로운 동력과 기계의 발명으로 산업분야에 일대 혁명을 몰고와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발전해 왔다. 이「제2물결」인 산업화 물결은 물질주의와 인간의 우월주의의 패권주의에 뿌리를 두고, 생존경쟁, 우월경쟁, 물질획득의 피나는 투쟁을 계속해 왔다. 그러므로「제2물결」시대를 가리켜 분리및 대치상태에서의 경쟁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제2물결」에서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존재로 여기고, 경쟁할 필요를 느껴, 기계화, 조직화, 계급조직, 매출량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산업사회에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보다 물질, 즉 돈으로 모든 가치를 측정하고(심지어 인간의 생명까지) 경쟁에서 승리한 외형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형식위주의 세계관으로 전락하고 있다. 도덕적 차원의 배려를 무시한채 앞을 다투어 경쟁에 휘말리다보니 오염의 비가역적(非可逆的)인 효과로 인한 환경의 저질화, 천연자원의 고갈, 생태계의 파괴, 부익부 빈익빈에 의한 소득의 극심한 차이등과 같은 것이 반영하는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병폐, 범죄의 창궐, 실업문제, 가난, 물질오용, 고도의 스트레스, 전반적으로 느끼는 공허감 등에 만신창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물질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로 만신창이 된 상처로 얼룩져가는 상태이다.

(3) 제3물결 (탈공업화/탈산업화/초산업화)

「제3물결」은 질식화되어가고 있는 공업화/산업화 사회에서 탈출하려는 탈산업화 운동(脫産業化運動)이다.「제2물결」이 나타난 것은 300여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제3물결」의 출현은 불과 수십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세계와 시대의 변화가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니엘이 마지막에는 지식이 더하고 교통이 빨라지리라고 한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단 12:4).「제3물결」은 초반에 전통적인 산업문명과 모순되는 동시에 고도의 기술적, 반산업적 성격을 띄고 있다.「제3물결」은 특히 미국에서와 같이 전혀 새로운 세계관과 철학, 생활방식을 수반한다. 산업사회의 모순과 결과적 피해의식의 각성으로 안정을 위한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려고 한다. 양극성의 대립상태를 뛰어넘어, 토플러가 말한대로, 계급, 인종, 성, 당파 등의 구분을 없애고, 대립관계에서 화해와 융화의 관계로 전환시킨다. 이「제3물결」은 경쟁과 대립관계에 있는「제2물결」과는 달리 상호생존을 위하여 상호협력하는 체제로 전환하며, 외부적 권위와 물질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개별적 권위를 회복하려고 한다. 편중(偏重)이 아니라, 지속적인 균형(持續的 均衡)을 추구(推究)하며, 의도적 행동(意圖的 行動)으로 합리적인 방법(合理的 方法)을 추구해 나간다. 이「제3물결」은 지난 날에 치열하게 투쟁을 벌리며 힘의 대결을 위하여 군수산업을 장려했던 당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상호 협력을 추구해나가는 물결이다. 

(4) 제4물결 (통합경제 사회/통일사회)

메이너드가 말하는「제4물결」은「제3물결」과 대립되는 또 다른 물결이라기 보다는 현재「제3물결」의 흐름을 방해하는 저항과 투쟁과 완고한 결정 등을,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다.「제4물결」은「제3물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줌으로써 좀더 고상한 인류문화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므로「제4물결」은 공동창조의 방법을 모색하여 하나의 통합된 공동체를 창조하려 하는 흐름이다. 오늘날에「지구촌」이니,「세계는 하나」니,「세계화」니,「세계통일」이니,「구주공동체」이니 하는 개념들이「제4물결」을 예고해 주는 용어들이라고 하겠다.「제4물결」은 외형적 권위나 권력현상(權力現狀)이 아니고 완전히 권력이 사람의 속에 내재하는 내면적 권위현상(權威現狀)이며, 개인의 신뢰를 통하여 전체적 삶에 대한 책임의 통합이 중심과 초첨이며, 의도성(意圖性)의 승화된 양심에 의해서 의사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좀더 집약해서 말한면,「제4물결」에서 사람들은 생명을 통합하고 전체를 위한 책임을 지는데 초점을 맞춘다.
한 마디로 평하자면, 이「제4물결」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지상의 인위적「유토피아」(Utopia)의 건설을 의도한 인본주의적 물결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방법은 달리하는 것이지만, 천년후 재림설(post-minllenialism)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내용과 흡사한 면이 있다. 물론 기독교의 천년후 재림설중의 하나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복음화로 세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천년기후 재림론자들 중에는 역사의 자연적 진화과정(進化過程)을 통하여 이상세계(理想世界: Utopia)가 온다고 믿는데, 이 주장이 바로다가올「제4물결」과 흡사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제4물결」은 극도의 인본주의 세계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제5세계」인「성도의 나라」가 오기전에 나타날 마지막 세상나라, 성도들을 박해함으로 환란을 일으키는 세력,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적그리스도의 세  계 」라고 생각된다.   

3. 종교의 물결 (The Wave of Mission)

"종교" 하면, 우리는 전세계에 편재해 있는 수천의 잡다한 종교들을 연상하게 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상대적인 의미의 종교는 아니지만)를 비롯하여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그 외에 수많은 종파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을 제외하고, 기독교의 복음화 운동을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복음전도운동 물결을 규명하고자 한다.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운동이 일어난 이후, 복음선교의 물결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간 성령운동은 20세기 초에 와서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오늘날에는 전세계를 뒤덥고 있다. 그 이전에는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을 따라 국부적으로 몰아친 성령의 물결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훌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이며, 세계선교와 교회성장학의 대가인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미국의 성령운동을 3단계로 분석하여 세 물결을 주장하였다. 즉「제1물결」(the first wave),「제2물결」(the second wave), 그리고「제3물결」(the third wave)이다. 종교적인「제3물결」,「제4물결」,「제5물결」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1) 제1물결: 오순절 운동 (Pentecostal Movement)

「제1물결」인 오순절운동(Pentecostal movement)은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인 1900년대 초에,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은 1900년에, 한국은 1903년에 태동하여 1904년을 거쳐 1907년에 폭발하여 시대적인 리듬을 타고 1960년대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오순절운동을 통하여 불신자들이 크리스찬들이 되는 놀라운 영적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치고, 세계 도처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세워졌다. 수 많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의 사자들이 되었고, 수 많은 주의 종들이 선교사들로 소명을 받아 세계 도처에 선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갔다.
미국에서는 1900년 12월 31일 철야기도회, 20세기 첫날에 촬스 파르함(Charles Parham)이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에게 안수 할 때에, 방언이 터지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남으로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서 1906년 흑인 목사인 세이머(William Seymour)에 의하여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 아주사가(Azusa Street)의 오순절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두번째 오순절운동은 오순절 지도자들이 그들의 운동에 의하여 주류교회(기성교회)들이 그들의 영향을 받는 것을 보았을 때인 제2차대전 이후가 된다.
한국에서는 1903년 원산 부흥회를 기점으로하여 1904년 평양사경회와 1906년 평양연합사경회와 새벽기도회로 이어져, 1907년 평양대부흥회에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폭발했다. 이 운동은 9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꾸준히 세계선교와 교회성장의 저변을 흐르며, 하나님의 교회확장운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특히 이 오순절운동은 교회성장운동의 기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2) 제2물결: 은사운동 (Charismatic Movement)

미국에서는 한국에서와 같이 1960년대에「제2의 물결」인 은사운동이 일어났다. 1960년에 캘리포니아주의 밴나이스 성공회 사제인 데니스 벤넷트(Dennis Bennett)가 오순절 역사의 경험으로 자신이 경험한 은사를 교인들에게 증거함으로 시작되었고, 그 이후에 신오순절운동(Neo-Pentecostal movement)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성령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후에, 1967년 "듀키슨 주말" 행사에 듀키슨 대학교(Duquesne University)에서 "카톨릭의 은사운동들(Catholic Charismatics)이 일어났다. 이러한 충격을 미국에서 70년대 고전적 오순절파나 신오순절파, 그리고 캐톨릭 카리스마파들이 아니었던 사람들 간운데서 체험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성령세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강력한 성령의 은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 은사운동(Caharimatic movement)이 미국에서 몇몇 목사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실정으로 전체교회의 추세는 아니다. 카리스마 운동으로 영향을 끼친 이름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오랄 로버트, 캐더린 쿨만, 오스본 등을 비롯하여 데이비드 듀풀레시스, 데니스 벤넽, 자미 버킹검, 패트 로버트슨, 케네디 하긴 시니어, 폴 크로우치, 죤 윔버, 잭 헤이포드, 데렉 프린스, 캐더린 마샬, 마릴린 힉킨, 데이비드 윌커슨, 로버트 컨닝햄, 앤젤리카 수녀, 라인하르트 본케, 론 캐놀리, 베니힌, 찰스 콜슨, 죤 아노트등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특히 요사이 미주의 카리스마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중들에 빈야드의 죤 윔버(1994년도에 은퇴)와 베니 힌 미니스트리(Benny Hinn)의 베니 힌(현재 미국에서 치유사역에 맹활약), 카나다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등의 죤 아노트(소위 "holy laughter"와 "falling down"으로 물의가 있어서 죤윔버의 충고로 불화, 죤 윔버의 미국 빈야드와 결별을 선언)가 있다. 한국의 카리스마의 대표적인 사람은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의 조용기 목사이며, 1960년대에는 변계단, 현신애 권사등 평신도를 중심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에는 사가나 기도원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 제3물결: 복음주의 성령운동

1900년 초,「제1물결」인 오순절 성령의 운동이, 1960년대의「제2물결」인 카리스마 성령운동을 거쳐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기성교회에서도 영성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제3물결」인 복음주의 성령운동이 보편화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성령운동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령운동을 저해하다시피 하던 기성교회들이 이제는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성령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00년대의 오순절 성령운동은 기도회와 사경회로 시작 부흥성회의 형식으로 불붙어 나갔으며, 1960년대 은사운동은 부흥회를 좀더 카리스마적인 스타일로 바꾸어 부흥성회/은사집회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고, 1980년대에 보편화된 복음주의 성령운동은 기존 부흥성회/카리스마 운동을 기성교회 체제에 도입하기 위하여 찬양과 경배와 기도, 그리고 제자훈련과 같은 바이블 스타디의 소그룹 운동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본래 이 세가지 운동은 같은 성령으로 일어나는 운동이므로 따로 떨어진 운동은 아니나 시대의 물결을 타고 특징적으로 좀더 강력하게 대두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때를 따라, 시대의 물결을 따라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하나님의 나라」확장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크리스챤이 가져야할 시대적인 사명이라 하겠다.
성경에도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했다(전 3:1). 그러므로 은혜로운 신앙으로 시대의 흐름을 잘 타는 것도 하나님의 주신 지혜라 하겠다. 현대에는 "복음주의 성령운동"(福音主義 聖靈運動)이 계속되고 있는「제3물결」의 시대이다. 모든 교회에서 "복음주의 성령운동"이 필요한 시대이다. 목사를 비롯한 주의 사역자들은 더욱더 이 운동을 주도할 수 있어야 현대 교회를 리드(lead)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복음적인 말씀을 통하여 사도들과 같이 성령의 강한 바람을 일으켜 죽어가는 세상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강력한 성령의 은사(영적, 육적 치유와 캐어능력)를 통하여 영육간에 지쳐서 병들어 죽어가는 현대인을 치료하며 캐어할 수 있는 능력있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때인줄 안다.

(4) 제4물결: 종말론적 준비운동

전세계적으로 복음운동의 가을비인 "늦은비"(신 11:14; 렘 5:24; 욜22:3)로서 종말에 주시는 성령운동을 통하여 세계교회는 결실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가 종말론적 양대운동(하나님의 나라의 그리스도 운동과 세상나라인 적그리스도 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이가 된다. 먼저, 복음운동의 마무리 작업으로 진행될 것이다. 첫째로, 종말론적 기독교의 대각성운동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종말을 준비하게 되며, 유대인들의 회귀운동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완악했던 유대인들의 구원이 있을 것이다(롬 11:25). 둘째로, 이를 위하여 이방인의 전도를 위한 마지막 선교운동이 물결칠 것이다(마 24:14; 롬 11:25). 한편 적그리스도의 운동으로 환란의 바람이 세차게 일어서 알곡을 가려낼 것이다(사 28:23-29; 단 7:2-8; 마 24:4-25; 계 13:1-18). 하나님께서 용을 통하여 지상의 넷째 짐승인 열뿔과 일곱머리를 가진, 바다에서 나오는 한 짐승(계 13:1-10)에게 큰 권세를 허락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나라 왕이 이 권세를 얻어, 일시 성도들을 이기고(계 13:7) 박해하는 큰 환란의 바람을 몰고 올 것이다(계 13:4-10). 이 짐승이 자기의 권세를 휘두르기 때문에 성도들은 대환란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상의 마지막「제4물결」인「세상나라 물결」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새끼양 같고 용처럼 말하는 다른 짐승(적그리스도)이 땅에서 올라오는데, 이 짐승이 이적을 행하면서 처음 짐승을 우상화하여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하게 하고(종교권세: 계 13:12)),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며(정치권세: 계13:15),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인 666표)를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매매도 못하게 하는데(경제권세: 계 13:16-17), 이 권세가 처음 짐승과 야합하고 그 세력을 비호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서, 용으로부터 받은 처음 짐승의 권세의 모든 권세들(정치, 경제, 종교)을 받아서 행하고(계 13:11-12), 세상에 대환란을 몰고 올 것인데, 세상에 나타날 이 대환란 이전에 만국에 복음이 전파되는 마지막 선교의 물결(the last mission wave)이 일어나 이방인들에게, 다른 표현으로「제4세계」에 넘쳐흐를 것이다(마 24:14). 피터 와그너는 이방인에게라기 보다는「제4세계」에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하고 있다.「제4물결」을 요약하면,「제4세계」의 복음 전파운동인 만국복음 전파운동으로 마지막 세계선교의 물결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적그리스도 운동」이 일어나 환란의 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세상 물결(적그리스도 운동)과 복음의 물결(그리스도 운동)의 긴장상태에서 성도들의 각성과 종말에 대비하는 준비(마 24:42-51; 25:1-13), 그리고「제4세계」를 위한 마지막 선교의 물결과, 적그리스도에 의해 일어나는 환란의 바람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제3부 기독교회의 확장운동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의 교회설립과 선교운동을 통하여, 기독교회가 전세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주님의 명하신 이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 기독교회의 확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업이시다.

1. 기독교의   확장 이론(래토렛)

기독교회사 교수인 켄넽 래토렛(Kenneth Scott Latourette)은 그의 저서인「기독교 확장사」에서 기독교의 확장운동을 4단계로 분석했다. 기독교는 시대에 따라 부흥의 바람이 불어서 흥왕했다가, 또 어느 시대에 가서는 잠잠하고, 심하면 쇠퇴하는 증감운동(expansion and reduction movements)의 주기적인 싸이클(periodical cycle)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래토랱 교수는 그 두 개의 역작 중에 7권으로 된「기독교 확장사」에서 기독교가 크게 4단계로 진행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래토랱 교수의 저서「기독교 확장사」(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의 서문에서 교회성장학자인 윈터(Ralph D. Winter) 교수는 그의「기독교 확장사」를 자매작인 5권으로 된「기독교의 혁명사」(Christianity in a Revolutionary Age)와 비교하여 그 관련성(關連性)을 연결 시켜서 도표(圖表)로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1) 초기: 5세기중의 확장 (1-500)  

래토렛 교수에 의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초대교회가 탄생하여 처음 제1세기에는 로마의 박해로 수난을 당했지만, 그 수난으로 기독교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 오히려 기독교도의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결과를 가져왔고, 4세기(AD 315)에는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로마가 기독교국(Christendom)으로 선포됨으로 박해에 대한 리액숀(reaction)이 완전한 기독교의 승리로 결론을 맺게된 기현상을 초래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2-3세기에는 훌륭한 교부들의 출현으로 신앙의 기틀을 다져갔고, 우후죽순 처럼 일어난 수많은 이단들과 투쟁하면서 니케야 회의와 같은 대종교회의를 통하여 교리를 정립시키며 교회의 내실을 튼튼히 하면서 성장해 갔다. 래토랱 교수는 교회확장운동의 제1기인 이 시기에는 1세기에서 6세기(1-500)까지 약 500여년간 계속되었다고 본다. 물론, 학자들마다 시대적인 구분이 약간씩 차이가 있다.

(2) 제2기: 기독교의 유우롭 확장 (500-1500)

래토렛 교수는 이 시기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천년기"(Thousand Years of Uncertainty)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시기를 교회사에서는 중세(中世史)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로마 캐톨릭(Roman Catholic)이 서부 유우롭과 중앙 유우롭을 비롯하여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동쪽의 아라비아, 인도, 중국 등 아시아에까지 동서사방으로 뻗어 나간 기독교의 확장운동이었다. 중세의 수차에 걸친 십자군 운동들이 비록 실패는 했지만, 이 십자군 운동들(1096-1270)의 영향으로 동서교역이 활발해져서 동방 선교의 길을 트이게 했으며, 캐톨릭 교회의 수도원 운동으로, 안으로는 신앙의 열과 밖으로는 아시아에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어 기독교의 선교가 더 넓게 확장되어 갔다. 물론 로마 캐톨릭의 이러한 기독교 확장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가 타락해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2기 말(15세기)에 와서는 캐톨릭 기독교회가 극도로 타락되어 종교개혁(宗敎改革)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3) 제3기: 3세기간의 기독교의 확장 (1500-1815)

래토렛 교수는 이 기간을 유우롭에서부터 아메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에로의 교회확장 시기라고 보았다. 이 시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Reformation)과 이에 맞선 캐톨릭의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운동으로 기독교회는 더욱 활기를 찾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물결과 캐톨릭의 반종교개혁의 물결이 부디치면서 각자의 열성에 힘입어 교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새 시대(New Age)의 물결, 즉 과학적 발견, 산업혁명, 지리적 발견, 유롭국가들의 식민지 정책등 새로운 시대의 물결을 타고 기독교는 전세계적으로 확장되어 나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스페인. 포르트갈과 프랑스 등의 아메리카 진출로, 카톨릭 기독교가 카나다와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서인도제도를 정복해나갔고, 프로테스탄드교는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북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아세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이제부터는 제3세계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시작한 시기로 들어 왔다.

(4) 제4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 (1815-1914)

이 위대한 선교의 세기(The Great Century)의 기독교 확장운동에 대하여 래토렛은 3지역으로 나누어서 다루고 있다. 그 시기가 1815년부터 1914년까지 기간이다. 첫째로 유럽과 미국의 위대한 선교와 둘째는 아메리카들과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선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아프리카와 아시아 선교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유우롭과 미국이 선교의 주역을 담당하고 아시아, 아프리카등 전세계에 선교사역을 수행함으로써 위대한 세계선교의 장을 열었고, 이를 위하여 1793년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설립한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를 시작으로 많은 선교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 선교대회들(Mission conferences)이 열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세계선교전략(the strategies for world mission)들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2. 기독교의 선교운동 (Missions)

기독교 선교(Christian mission)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2대 지상명령에 기초하고 있다. 그 하나가 부활 후 40일간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명하신 마태복음 28:19-20의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사도행전 1:8의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다. 이 지상명령을 따라서 제자들은 선교의 사명을 열심히 수행하였고 오늘날도 주의 종들이 수행하고 있다.

(1) 초대교회의 선교 (1-590)

예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지상명령 중에,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한 마디로 세계선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즉 기독교의 확장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사명을 받은 주의 종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고, 드디어 오순절날에 이르러 제자들은 성령충만함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땅을 지나, 바울 사도를 중심으로 안디옥을 거쳐 소아시, 로마선교의 돌풍을 몰고 세계를 향하여 퍼져 나갔다. 예루살렘에서 발원한 기독교의 확장운동은 한 때 로마에서 큰 박해를 받아 성도들이 고전을 했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아갔다. 로마제국이 서코오트(W. Coths)족에 의해 멸망하면서부터  콘스탄틴누스 대제(the Great Constantinus)에 의하여 기독교국으로 전성기를 맞고 세계선교의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대교회는 세계교회의 원동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로 기독교의 세계를 향한 확장운동의 진원지(擴張運動의 震原地)라 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그 당시 문화적 상황에 따라서 교역이 활발했던 에게해 연안,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이 저파되어 나갔다. 이 초대교회의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는 확장운동은 예루살렘교회가 안수해서 세운 바울사도를 중심으로 뻗어나가 후에 유럽으로 확산되는 발판이 된 것이다.

(2) 중세교회의 선교 (590-1517)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 I세(Gregory I)가 교황으로 즉위한 때부터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Reformation) 때까지 약 1000년간(590 AD-1517AD)을 중세(中世)라고 일컫는다. 이 시기는 일반사에서도 암흑시대(Saculum Obscurum)라고 부르는데, 종교개혁 이후, 문예부흥이 일어나기 전(10C-11C) 문화가 멸절되고 봉건제도 하에서 정치와 사회가 혼란하며, 특히 회회교의 해적들이 난무하여 세상이 어두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는 신성로마 제국이후 약 1세기에 걸친 암흑시대(The Dark Age) 이전에는 영국과 독일 등의 전도운동이 있었으나 회회교도들의 극성과 동서 로마교회의 분리 등 기독교회 마져 힘을 잃어가고 캐톨릭의 교권적 군림으로 인하여 신앙의 암흑기를 맞게 된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십자군 운동으로 동서의 교역이 이루어져서 동방선교의 길이 트이게 되었으며, 캐톨릭에서는 수도원 운동으로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고, 더 나가서 동방선교에까지 힘쓰게 되었다. 마침내 종교개혁을 불러들여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탄생함으로 활발한 개혁과 선교의 박차를 가는 반면에 로마 캐톨릭 교회에서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운동으로 집안 단도리와 선교활동에 박차를 가함으로 역시 기독교회는 확장되어 나갔다. 암흑기에도 하나님은 선교하고 계신 것이다.

(3) 근대교회의 선교 (1517-1815)

로마에서 꽃을 피웠던 기독교회는 유우롭에 침투, 확장되어 나갔지만, 중세에 들어와서 로마 캐톨릭 교회의 타락으로 종교개혁을 불러들여 교회가 개혁되어 나갔다. 종교개혁 이후 유우롭에서의 교회개혁과 세계를 향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스페인, 포루트갈, 프랑스 등 서유우롭 국가들의 카나다, 라틴 아메리카의 선교 및 영국 청교도(Puritan)들의 북아메리카 선교는 세계선교의 대역사라 하겠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의 대확장운동이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 계몽사상을 통하여 르네쌍스(Renaisance) 문화가 꽃핀 것은 좋지만, 기독교회가 인본주의로 휘말리게 된것은 불행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자,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 운동(모라비안: 죤 훗스, 진젠돌프), 복음주의 부흥운동(요한 웨슬레, 죠지 폭스, 스펜너, 윌리암스, 죠지 휫필드), 신비주의 운동(퀘이커파, 스웨덴버그)와 캐톨릭(잔센이즘, 콰이어티즘, 옥스포드운동)에서까지 경건운동과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이 열정에 힘입어 근세교회는 세계적으로 선교에까지 불이 붙게 되었다.

(4) 현대교회의 선교 (1815-현재)

현대교회는 세계선교의 전성기를 맞아 기독교회가 세계 어느 곳이든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세계선교 정책과 선교 및 교회성장 운동의 영향으로 전세계가 선교와 교회성장 운동의 불길에 휩쌓이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계속적인 선교공략과 현재는 한국, 핍립빈,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과 같은 제3세계의 나라들도 세계선교의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1800년대의 미국이 아세아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정책으로 대부분의 나라에 복음이 들어갔고 현재에는 쏘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에까지 복음의 물결이 흘러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복음을 먼저 받은 유우롭과 미국의 선교활동으로 이제는 제3세계까지 복음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제3세계에 복음을 전해준 서구교회들이 쇠퇴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그 선교사명이 제3세계로 옮겨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현재 총신대학교 총장이며 역사신학자이기도한 김의환 박사는 선교운동이 서구교회에서 제3세계로 옮겨지기 시작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분석했다. 첫째는 서구신학의 타락에서 오는 복음의 변질화이고, 둘째는 세계 제2차대전 이후에 제3세계에서 일고 있는 반서구적(反西區的) 민족주의 운동으로 서양 선교사들을 배척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대단히 훌륭한 분석이라고 하겠다.
이에 부연하여 필자는 좀더 근본적으로 선교운동의 발차취를 더듬어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우선 기독교의 복음운동의 싸이클의 차원에서 볼 때,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거쳐 서구로, 서구에서 미주로, 미주에서 제3세계로 유입되는 패턴(patern)으로 운동한다는 하나님의 예정된 싸이클 코스(course)에 의한 것이다. 다음은 하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에 대한 서구 교회의 응답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차적인 목표, 즉 제3세계 중에서 선교 주역국에 대한 선교에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복음운동이 예정된 싸이클에 따라 전이된다고 해서 계속적인 선교활동의 중단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서구교회가 내적으로 지속적인 교회성장에 실패했고, 대외적으로 선교정책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3세계로 선교의 주역을 넘겨줘어야 할 시점에 오지 않았나 판단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한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성장의 축복과 세계선교의 주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각성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선 1990년대에 들어와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하여 각성하고 교회 개혁운동을 일으켜야 할 시점에 있는 것이다. 만약에 한국교회가 개혁에 성공한다면, 세계선교의 주역을 담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누리게 될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서구교회와 같이 쇠퇴하고 죽어가게 될것이다.

3. 기독교회의 성쇠 (盛衰)

지상의 모든 것과,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기독교회도 지상에 있는한, 흥망성쇠라는 역사적 법칙을 따르게 된다. 세상나라와는 달리 기독교는 초대교회가 그 당시 왕성했듯이 영원히 흥왕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한 때는 왕성했다가 쇠퇴하고, 어느 교회는 성장하고 어느 교회는 쇠퇴하는 운명(?)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직도 교회가 지상에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가 질적으로 온전하기만 하다면 계속해서 흥황하게 되지만, 인간의 부족과 실수로 인하여 부패하게 될 때, 교회의 운명도 불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권과 야합해서 타락했던 구쏘련의 동방교회라 하겠다. 근대 기독교회의 흥망성쇠의 물결은 서구교회의「제1물결」, 미주교회의「제2물결」, 그리고 제3세계 교회의「제3물결」의 순으로 물결쳐 오고 있다. 또 멀지 않은 곳에서 제4세계의「제4물결」이 몰려오고 있는 것을 전망할 수 있다. 물론, 제4세계의 개념은 성경에서 용(龍)에게 권세를 받은 짐승의 세계인 불신세계로, 선교적인 차원에서 볼때는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한 세계이지만, 종말론적 차원에서 볼때이는 적그리스도의 세계이다. 

(1) 제1물결:「유럽 교회」성쇠 

중세의 암흑기에 로마 캐톨릭 교회의 지배로 한 때 타락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던 기독교회가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다시 활기를 찾아 유우롭 교회는 대단히 성장하여 유럽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독교회가 지배하게 되었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비롯하여 문화, 과학 등 전반에 걸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 때는 영국은 물론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독교회가 국교가 되다시피 했고, 전체 국민의 80-90% 이상이 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명목상의 교인들(nominal Christians)로 남아 있을 뿐, 유럽 교회들은 죽어갔다.
우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독일의 경우, 서독인중에 92%가 교인이라고 하지만(제5판: OM판「세계변화작전」(Operation World에는 75.8%), 주일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은 고작해서 11%에 불과하다고 하는 통계이다. 그리고 매년 500,000명 이상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이는 91%의 교인이 명목상의 교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계산이다.
칼빈의 강한 영향을 받은 죤 낙스(John Knox)가 종교개혁을 주도해서 기독교가 국교까지 된바 있었던 영국은 66.5%가 교인이지만 고작 3%만이 교회에 나가는데 그것도 소속되지 않은 교인들이며, 나머지들은 명목상의 교인들이라고 한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스위스는 전국민의 81%가 기독교인이지만(1993연감에는 92%), 단지 17%만이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active church goers)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스페인, 북 아일랜드는 40%, 벨기에는 20%, 룩셈브룩크는 30%, 프랑스는 11-15%만이 교회에 출석한다.
스웨덴은 98%의 교인 가운데 단지 3%, 덴마크는 99.6%의 교인중에 불과 5%, 화란은 68%의 교인중에 8%만이 실제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근래의 통계이다. 이러한 과학적인 통계는 과거 황제의 자리에서 영화를 누리던 기독교회가 지금에 와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예로, 당대 세계적인 설교가이며 뛰어난 목회자였던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가 시무했던 영국의 메트로폴리탄 교회(Metropolitan Tabernacle)가 당시에는 14,692명 교인에, 주일 일회 6,000여명 이상 출석했었는데, 오늘날에는 고작 87명이 썰렁한 예배당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서구교회가 완전히 쇠퇴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면인 것이다. 
한때 성장의 호황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던 유럽 교회가 그 바톤(baton)을 미국으로 넘겨준지 오래이며, 이제는 사장화된 교회의 코핀(coffin)만을  붙잡고 있는 실정이라 하겠다. 이렇게 해서 유럽 교회의 성장과 선교의「제1물결」은 미국으로 흘러간지 오래이다.

(2) 제2물결:「미국 교회」성쇠

이미 캐톨릭의 선교로 복음을 수용한 아메리카주는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의 열정적인 신앙생활과 선교적 개척정신에 의하여 미국에 정착함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청교도 정신의 기독교 정신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에서 수천년 동안에도 이룩할 수 없는 기적적인 기독교 문명을 단지 2-3세기 안에 이루어 놓을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 수세기 동안 영육간의 축복을 독차지하다시피한 미국교회가 세계선교의 주역을 맡아 왔으나 최근에 들어와 쇠퇴하고 죽어가는 교회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부 성장하는 교회들도 있기는 하다.
미국 캘리포니아 그렌데일에 위치한 바르나 리서취 그룹(Barna Research Group)의 설립자인 죠지 바르나(George Barna)는 최근 미국의 교회의 9개의 대교단 중에, 두 개의 교단만 현상유지나 약간의 성장을 보았으나, 나머지 7개 교단은 모두 마이너스(minus) 성장으로 떨어져, 미국교회가 쇠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최근 미국교회의 85%가 쇠퇴하거나(declining) 죽어간다(dying)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미국의 교회가 오늘날에 와서는 교인의 대부분이 명목상인 교인들이 되고, 일부에서만 지속적인 교회성장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미국의 전체 교인이 86.5%라고 하지만, 대부분이 명목상의 교인이며 일부 교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감소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몰몬교(Mormon church)와, 로마 캐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이스람교(Islam)와, 불교(Buddhism), 그리고 여러 종류의 뉴에이지 교회들(various New Age churches)이 급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제3물결:「제3세계」선교

미국에서 세차게 넘쳐 흘렀던「교회성장의 물줄기」(a mighty river of American church growth)가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로 흘러 들어 온지도 어언 100여년이 넘어서 한국에서는 이미 1984년에 선교 100주년 기념성회를 성황리에 치른적이 있었다. 이 거대한 선교와 교회성장의 강물줄기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보다도 유별나게 한국에서 줄기차게 흘러 넘쳐서 한국교회가 세계의 교회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하는 축복을 누려왔다. 물론 동남아에 많은 나라들도 선교와 교회성장의 축복을 누려 왔다.
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이 이제는 세계 각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정도로 교회들이 성장했다. 1985년을 기준으로 인도의 5,055명, 필립핀의 1,134명, 버마의 2,058명, 인도네시아의 648명, 말레시아의 41명, 싱가포르의 372명, 홍콩의 137명, 일본의 150명, 한국의 511명 등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할 수 있는 선교파워(mission power)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자국민들이나 혼합민족을 위하여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한국 선교사들은 순전히 타민족을 위하여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는 점에서「제3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가능성(potential)이 크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축복은 교회성장의 축복에 이어 경제성장(經濟成長)의 축복을 함께 누려온, 그래서 현금(現今)에는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하려는 순간에 와있다.

(4) 제4물결:「제4세계」선교

「제4세계」(Fourth world)라는 용어(用語)는 선교학자인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가 고안해낸 선교용어이다. 그는 "「제4세계」는, 그것을 빈민중의 빈민들에 적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있지만, 국제적인 정치동맹이나 비동맹의 어떤 다른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의도는 영적인 것들에 그 초점은 맞추려는 것이다.「제4세계」는,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못한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러시아에 혹은 아프리카에,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그리고 모든 타종족과 방언과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정의하였다.「제4세계」사람들은 전세계에 산재하여 살고있는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말로서, 아시아의 98%가 이에 속한다고 한다(Bishop Chan Ray). 와그너 박사는 아직도 23억, 혹은 비기독교인의 73%가 복음을 받지 못하고 있는「제4세계」사람들이라고 분석했다.
이제「제4세계」의 선교물결이 종말을 준비하는「마지막 선교물결」(the wave of the last mission)로서, 종말론적인「제4물결」이 될것이다(마 24:14). 에딘버러(Edinburgh) 대회는 주후 2,000년대까지를 서구선교의 마지막 시대로 예언하면서, 2,000년을 향한 "프론티어 미숀" (frontier mission)을 강조하였다. 종말의 세속적「제4물결」은 정치, 경제, 종교의「제4물결」과 함께 종말에 몰아닥칠 지구상의 최종적인 제4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정체(正體)이며, 정사(政事)와 권세(權勢)이자 어둠의 권세들의(종교적) 물결의 총체이다(단 7:7-8; 8:3-14; 엡 6:12; 계 13:1-10). 이들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나갈 세계선교의 주역은 과연 누가 될것인가? 이 문제에 접할 때마다 필자는 교회성장의 파워(church growth power)와 선교의 잠재력(missionary potential)과 선교의 파워(mission power)가 충분한 한국교회가 개혁(?)을 통하여 이 사명에 도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제4부 한국교회의 성장과 침체

「제3세계」중에 특히 한국에서 1980년대까지 세차게 몰아친 기독교회 성장의「제3물결」은 정말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구동성으로 한국교회가 침체기를 지나 1994년부터 마이너스 성장으로 감소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연 1907년 교회부흥 운동이 시작된 이래,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꾸준히 성장해 오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급성장하여 오늘과 같은 기적을 이룬 것이다. 1960년대부터 줄기차게 넘쳐 흘러오던 이「한국교회 성장의 거대한 물줄기」(A mighty river of Korean church growth)가 1980년대까지 줄기차게 지속되되어 오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약해지기 시작하여 현재는 멈추다시피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1. 한국 교회의 성장

한국교회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세계 교회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한국교회는 1885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를 받은지 100주년이 되는 1984년에 이미 인구의 1/4이나 되는 1천만명의 교세로 성장했다.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간 교회 숫자가 5,011개 교회에서 53,869개 교회로서 61%나 증가했고, 전체 교인수가 623,072명에서 10,312,813명으로 1,555% 급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는 교인수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에 편승하여 교회 재정의 급증으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은 셈이다. 사실, 과거에는 나라가 가난하여 끼니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고 전쟁과 질병, 그리고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수난속에 고통을 당하는 한국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시고 무한하신 물질축복(物質祝福)을 영적 축복과 함께 내려주신 것이다.

  한국 교회 성장요인

과연 그 엄청난 성장의 파워(growth power)가 어디서부터 온것인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급성장시킨 원동력이 무엇이며, 성장요인들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필자는「한국교회 성장의 이론과 실제」라는  저서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밝힌바가 있다. 본서에서는 한국교회의 성장요인들을 요약해서 핵심적인 것들만 다루려고 한다. 한국교회 성장은 어느 교회에서나 마찬가지로 두가지 차원에서 조명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본다. 즉 신적인 차원(神的次元, divine dimension)과 인적인 차원(人的次元 human dimension)으로 교회성장의 요인을 이 두 차원에서 찾는 것을 말한다.

(1) 원천적 요인: 하나님의 섭리

이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차원에서 교회성장의 요인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의 말과 같이 교회성장은 첫째로, 하나님의 본성적 발의로서, 그의 뜻(Will of God)이고 그의 열망(His desire)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속을 계획하시고 그 때를 정확히 맞추신다. 성경에 "때가 차매"(when the time had fully come, 갈 4:4)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문구로서, 교회성장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무시한채 아무 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계획된 정확한 때, 즉 카이로스(      )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셋째로, 세계의 역사적인 구속사 과정속에서 교회성장을 이루어 나가신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적인 섭리(歷史的 攝理)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예정된 축복이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사(一般史)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속(救贖)하시고 보호(保護)하신다.

(2) 부차적 요인: 한국사적 의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정과 계획적인 경륜(經倫)에 따라 섭리(攝理)하시기 때문에, 모든 역사들이 이에 의하여 엮어져 나간다. 특히 교회성장 운동(敎會成長運動)은 하나님의 열정(熱情)에 의하여 진행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다. 한국교회 성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역사적 요청에 대한 열심있는 응답으로 이루어진 교회사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된 은혜와 축복에 대한 한국교회의 수용(receptivity)이 한국교회 성장의 부차적인 요인(副次的 要因)으로 작용한 것이다.

1) 객관적 요인: 선교 이전의 요소

한국의 피선교적 상황(皮宣敎的 狀況)은 교회성장에 있어서 몇 가지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종교 문화적 바탕이 기독교 신앙을 이식시키기에 양질의 토양(good quality soil)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양질의 토양(良質의 土壤)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추세(變化推勢)에 맞추어 한국교회가 무한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church growth potential)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헬라의 아덴(Athen in Greece)에서 지적했듯이 본래부터 생래적으로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성(religiosity)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 고려시대, 이조시대를 거쳐오면서 오랫동안 한국 민족의 의식속에 착색되어온 재래종교들, 즉 유교, 불교, 도교 등 재래종교에서 익숙해진 종교성의 바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에 대한 수용(receptivity)과 이식(transplantation)이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본래 한국 민족은 샤만니즘(Shamanism)을 바탕으로 종교심(宗敎心)이 많은 민족이다.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한국교회도 역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지정학적(地政學的) 특수성으로 외우내환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시련의 반동(reaction)으로 종교적 구원을 동경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 접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아 의지하려는 종교적 성향(宗敎的 性向)이 높아, 당시 열렬히 전파되고 있던 기독교에 귀의(歸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역시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중의 하나였다.

  한국은 8.15 해방 이후, 6.25 사변을 거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특히 미국의 적극적인 접촉으로 그들 서구문명의 윤택한 경제생활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선진국인 미국을 비롯한 구라파의 서구문화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구문화의 유입과 함께 들어오는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용이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침략과 극한 박해와 6.25 동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환란속에서도 수난에 역동(逆動)하며, 불안과 전쟁속에서 안정과 평화를 추구해 나가는 놀라운 힘을 과시하며 굽힐줄 모르고 성장했고,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聖靈의 役事)를 통하여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2) 주관적 요인: 선교사적 고찰

주로 미국선교사들에 의하여 선교가 시작된 이후, 한국교회는 1902년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있던 중, 1903년 초, 알. 에이. 하디(R. A. Hardie)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한 대각성운동으로 회개역사, 중생의 체험등 성령의 역사가 원산사경회로부터 시작하여 불길같이 일어나,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에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평양에서 부흥의 불꽃을 피워 북한의 의주, 선천등을 비롯하여 남한에 광주, 서울, 목포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교회는 극히 보수적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선교 초창기부터 보수적인 신앙, 즉 성서적 바탕으로 자라왔기 때문에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선교사들에 의해 외국에서 도입된 자전(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 자립(self-support)의 자주정신의 선교적인 방법인 네비우스 방법(Nevius methods)이 한국교회의 성장에 한 몫을 하였다.

  1900년대 초기, 길선주 목사, 이기풍 목사에서 김익두 목사로 이어졌던 부흥회 운동이 1930년대 이용도 목사, 1950년대에 와서 이성봉 목사, 박재봉 목사 등이 주도한 부흥회로 한국교회는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 우후죽순 같이 일어나 춘추전국 시대를 이룬 부흥사들에 의하여 각처에서 열리는 부흥회를 통하여 한국교회는 각 교회들이 은혜의 불길속에 휩쌓이게 되었고, 수많은 새 신자들을 얻어 기하급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한국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미 산상기도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항상 기도에 힘썼으며, 그 후에 철원수도원, 용문산기도원, 삼각산기도원 등을 시발로 1960년대에 들어와서 기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현재에 와서는 전국에 수백개(약 600 여개)의 기도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와 같이 기도원 운동은(祈禱院 運動) 영적으로 고갈(枯渴)되었던 한국교회의 성장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한국교회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세계적인 대규모의 맘모스 대중집회들(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1974년의 엑스플로'74, 1980년의 한민족 대성회, 1984년의 선교 100주년 기념성회등)을 통하여 한국의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한 민심을 유도하여 기독교의 확장(교회성장)을 시도하였고, 이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놀라운 힘을 과시했으며, 각 교회들도 이러한 붐을 타고 교회성장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한국교회의 복음화운동은 군과 경찰등 국가의 직속기관에 까지 확대되어 나아갔다. 특히 기독교회가 처음으로 시도한 군복음화운동은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황금어장을 노린 것으로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하였다. 군에서 세례를 받고 나온 수많은 젊은이들의 활약도 대단했다. 경찰선교 역시 직접, 간접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에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장로교회를 위시하여 각 교단에서 교세확장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장로교 합동측에서 일만교회 운동을 시도하였고, 이에 뒤따라서 각 교단에서 오천교회 운동, 일천교회 운동 등의 슬로우건(slogan)을 내걸고 교세확장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군소 교단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일어나 한국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교단분열과 같은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교파의 성장경쟁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에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다.

  교회의 기하급수적 성장의 필요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기존 신학교들로서는 충분한 양의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각처에서 군소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수많은 신학교들의 탄생은 그들의 교회개척으로 인하여 특히 양적으로 한국교회가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교회밖에서 일어나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 파라쳐지 운동(para-church movements: CCC, UBF, IVCF, YFC, SBF, Navigators, YMCA, YWCA, JOY등)의 영향으로 선교적 차원에서의 탈교회화(脫敎會化) 전도운동과 교회와의 유기적 관계수립으로 교회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파라쳐치들(para-churches)은 당시 침체되어 안일함에 빠져있던 한국교회에게 선교와 전도의 동기(motive)를 부여해 주었고, 실제로 교회속에 뛰어들어 선교와 전도활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교회들이 쇠퇴해가는 큰 원인중의 하나가 성서를 떠난 메시지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메시지가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내용에 국한되는한, 그 교회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목사의 설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소그룹 운동인데, 그 중에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한국 교회에 도입되어 교회성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외국에서는 1900년대 초부터 제자훈련과 같은 소그룹 운동으로 교회가 성장하고 정착했는데, 한국은 뒤늦게 1970년대 중반 이후에야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부차적 요소들에 불과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있으며, 다음으로 이 하나님의 열망과 열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견적이며, 정확하고 치밀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계획을 잘 파악하여 강력하게 추진해 나갈 때에 교회는 성장하게 마련이다. 한국교회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소원을 성령께서 열렬하게 역사해주셨고, 교회가 잘 순응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기적적인 교회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요인을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라는 원천적인 요인과, 둘째로, 부차적 요인으로 이에 부응한 한국교회의 내적 외적인 상황적, 제도적 요인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외적, 상황적 요인으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사회변화, 경제개발, 그리고 문화적 요인으로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교육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내적인 요인으로는 교회의 제도적인 장치로서의 교회성장 운동으로 주기적인 부흥회, 성경공부의 활성화, 제자훈련 등 소그룹활동 프로그램 개발, 오래전에 정착된 구역회 활동, 교회성장을 위한 새신자 프로그램 개발, 침투전도방법으로 축호전도와 총동원주일 행사, 전도운동과 해외 선교정책, 미국교회의 교회성장론의 도입 등에 열렬했기 때문이다.

2. 한국 교회의 침체 현상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현하 수십개의 교파와 수백개의 교단과 신학교가 존재하고, 신도수 일천만명을 넘어섰다. 더우기 뒤 늦은 선교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대교회가 대부분 한국에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크리스챤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형화된 슈퍼/메가/메타쳐치(super/mega/meta church)들이 많다는 데에서 한국교회의 성장규모(growth size)와 성장의 파워(growing power)와 잠재력(growth potential)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로 팍스-아메리카나(pax-Americana)가 된 미국에도 교인 20,000명 넘어가는 교회들이 거의 없는 것에 비하면, 수만 내지 수십만명이 되는 수많은 멤버쉽(교인)을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멤버쉽 파워(membership power)는 과히 대단한 것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한국교회는 1907년을 기점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들어와서 4.19, 5.16혁명등 급변하는 정세와 사회적 변화, 인구의 폭증, 그리고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기하급수로 성장했다. 1980년대에 들어 와서는 정신이 번쩍난 한국교회들이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교회성장 운동에 박차를 가함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급성장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줄기차게 흘러 넘치던 한국교회의 거대한 강물줄기는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에 들어 와서는 급격히 약화되어 교회성장율이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사실, 통계적으로도 이런 현상이 증명되었다. 1960년대에 연평균 41% 성장율을 보이던 한국교회가 1990년에 3%, 1992년에 0.3%, 1994년 이후에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는 통계이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될것인가? 이 문제는 비단 교회성장학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모든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관심사로서 한국교회의 재도약(再跳躍)을 위하여 범교회적(凡敎會的)으로, 범교단적(凡敎團的)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 침체요인

한국교회가 침체되는 요인은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요인만큼이나 복잡한 요인들로 뒤얽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더욱 신경질적인 요인들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교회 성장론을 다루는 학자들에 의하여 그 요인들을 잡다하게 거론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교회성장의 요인을 역으로 살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왜 교회가 침체되는가 하는 문제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회성장의 요인을 규명하는 때와 같이, 우선 근본적인 원인을 기초로하여 살펴서 정리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첫째가 신적차원으로 하나님의 은총(축복)이요, 둘째로 하나님의 교회성장을 위한 역사적 요청에 대한 교회의 응답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교회가 항상,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교회가 이에 어떻게 부응하느냐에 지속적인 교회성장의 관건이 달려 있다고 본다. 성서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인간에게 수동적인 믿음을 요구하지만, 후에는 능동적인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출애급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한국교회도 이제는 첫 은혜와 같이 기다리고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접근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속화 물결에 떠내려갈 수 밖에 없어서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지난날을 더듬어 보면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내려주시는 성장의 축복을 받고만 살아왔다. 받은 자로서의 책임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교회성장의 목적이 무엇인지?, 교회의 생활철학이 없는 상태로 지내왔다. 단지 현대화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그져 콧노래만 부르며 뱃노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왔다. 교회마다 이제는 교권을 위한 투쟁도 포기한채, 그져 배부르니 안주(安住)하자는 태도인 것 같다고 한다. 교회성장학자들은 이런 교회의 상태를 메타포(metaphor)를 사용하여 "비만증 환자"의 상태라고 꼬집는다.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은 것에 비하여 에너지 발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만에 걸렸다는 뜻이다. 운동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이에 대하여 선교학적 차원에서 한국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은 것에 비하여 선교활동에 미미했음을 지적했다. 비만하다 보니 활동하기가 힘이 들고, 움직이기 조차 싫어진다.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교회성장 활동이 둔하게 되니 당연히 침체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세상적으로 풍요하게 되니 교회의 모든일, 신앙적인 일까지도 세속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세속화(secularization)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세속화되어 교회가 침체되는 이유는 미국과 같이 현대화, 산업화의 외적인 상황적인 영향도 크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대 산업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가 이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 하는 교회의 내적 제도적인 요인이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물론 교회성장 학자들에 따라서 외적인 상황적인 요인이 56%로, 내적인 제도적인 요인(44%) 보다 크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러한 논리로 본다면, 한국교회가 침체상태에서 헤어날 가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외적인 상황을 역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도차이는 있지만, 닥쳐오는 시대상황을 맞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단지 닥쳐오는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는 일이 교회성장의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실패하고 있어서, 오늘날 교회성장에 침체현상(沈滯現狀)을 가져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 외적  상황적 요인 (객관적 요인)

한국의 교회성장 학자들은 한국교회가 침체하게 되는데는 외적인 요인이 심각하다고 보고 있다. 사실 외적인 상황적 요인(external contextual factors)은 교회의 성장이나 침체의 결정적인 요인들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신앙의 힘이 아니고는 환경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유목민 생활을 하면서도 롯은 아브라함의 철저한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아 신앙이 돈독했지만, 아브라함을 떠난 다음, 소돔과 고모라성에 들어간 후에, 그 성의 세속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신앙이 세속화되어감을 볼 수 있다.

  전체 상황적 요인 (General Contextual Factors)

현대의 교회가 침체되는 전체적 상황적인 요인(general contextual factors)은 멀게는 세계적인 상황(international context)과 가까이는 국가적인 상황(national context)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상황은 간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요소임으로 국가적인 상황보다 직접 피부에 와서 닿지 않는다. 국가적 상황적 요인은 교회성장과 침체현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정치구조나 사회구조, 그리고 경제구조에 따른 상황변화는 교회의 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극단적인 예로, 한때 흥왕했던, 북한교회는 공산주의의 정치구조의 치명적인 영향으로 몰락하게 된 것과 같다. 쏘련의 동방정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동이 과거에는 성장요인으로 작용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침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 민주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중중심의 개체 인간중심적 인본주의 사상의 발상으로, 자주성, 주체성이 강화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신앙심이 약화되고 오히려 모든 문제를, 심지어 신앙적인, 영적인 문제까지도 자의와 자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게 되어 신앙행위가 약화된 것이다. 자신이나 가정의 문제가 있으면, 전문 상담소를 찾게 되고, 환자가 생기면 기도할 여유도 없이 병원으로 직행한다. 이리하여 신앙으로 해결할 일이 없어지고,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할 일이 없어지게 되어 침체현상이 오게 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보니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하다 보니 신앙에는 관심이 없어지게 된다. 돈벌고 돈쓰는데만 정신이 없어진다. 모든 문제를 물질로 해결하고 물질에 편승하여 세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남녀노소의 사회활동이 급증하다 보니 각종 활동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교회에 갈 시간, 신앙활동의 여유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반신앙적인 서구 문화적인 영향으로 교회문화에 관심이 없어진다. 심지어 오늘날에 와서는 팝 예술(pop art), 옵 예술(op art), 동작 예술(art cin tique), 그리고 록 음악(rock) 등 현대 세속문화가 교회 내부에까지 깊숙히 침투하여 교회문화가 혼탁해진다. 그리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고 침체상태에 빠지게 된다. 

  지역 상  황적 요인 (Regional Contextual Factors)

교회의 성장과 침체의 원인중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중의 하나가 지역 상황적인 요인(regional contextual factors)이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에 따라 교회는 다양한 변화에 부딪히게 되고, 그 변화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침체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역의 인구의 변동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 예를 들어 신도시 개발지역이면 인구가 몰려들어 인구의 폭증으로 인하여 전도의 황금어장을 이루게 되어 교회성장의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반대로, 농어촌과 같이 이농현상(移農現狀)이 두드러진 지역은 자연히 교회가 감소할 수 밖에 없다. 또 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여건도 무시할 수 없는 교회성장의 요소와 침체의 요소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특정 지역, 예를 들어 개발제한구역이나, 특정 산업지역, 특종 종교등 특정사회지역등도 교회의 성장요소도 되고 침체요소도 될 수 있다.

  전체 제  도적 요인 (General Institutional Factors)

전체 제도적인 요인(general institutional factors)은 교회들와 교단(church and denominational), 파라쳐치 그룹(parachurch group), 기타 종교단체의 제도적 요인과 활동에 의하여 교회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교단의 교파운동, 그리고 초교파운동(연합운동)등이 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교단의 대내외 정책이 교단교회의 성장과 침체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교단의 도그마(dogma) 노선정책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실제 교회운영 청책에 강압적으로 반영하게 될 때, 지교회는 성장과 침체의 경계선상에서 고민하게 된다. 반대로 지나친 상황주의적 실용주의(contextual pragmatism)로 복음의 순수성을 잃게 될 때, 역시 교회는 주체성을 잃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단의 제도적 정책과 활동은 대단히 중요하다.

  지역 제 도적 요인 (Regional Institutional Factors)

지역적 제도적 요인(regional institutional factors)은 그 지역의 노회나 지방회를 포함하여 개교회의 제도와 활동이 교회성장의 요인과 침체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개체 교회의 제도적인 문제는 교회가 성장하는데 있어서나 침체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과거의 구태의연한 관례나 관행만을 고집하다 보면 새로운 교회성장의 기회를 잃게 되기 쉽다. 성령은 하나이나 그 시대를 따라 새롭게 역사하시는데 관례에 의하여 새로운 성령의 사역을 제한한다면 교회가 침체상태에 빠질 것이다. 교회성장의 방법은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새로운 패턴으로 개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예로 현대교회, 특히 대도시 교회들는 교회시설과 주차장(parking lot) 등 교회 공간을 넓히고 새로운 교회문화(church culture)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야 한다. 목회방법(pastoral style)도 현대화하고, 현대화속에서 성령의 강한 열정이 넘치도록 말씀과 기도로 불을 붙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의 침체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가 현대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대화, 산업화의 영향이요, 둘째로, 이들의 영향으로 인한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내적으로 개혁을 통한 질적 성장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내적 구 조/기능적 요인 (주관적 요인)

교회의 침체원인 중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교회 자체내의 구조적 기능적 요인(structural functional factors)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내적 구조적 요인은 내적 기능적 요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구조가 교회성장을 위한 기능을 백분 발휘할 수 있도록 짜여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 교회활동이 타성에 젖어 정지되거나 형식에 빠져버리기게 된다. 교회구조는 시대를 따라 변화를 주어야 한다. 전근대적(前近代的)인 구조는 현대교회의 성장의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게 한다. 다시 말하면, 과감한 교회의 개혁이 따라야 한다. 본래, 개혁이라는 말과 비슷한 용어들이 있다. 즉, "개선"(improvement), "개혁"(reformation), "혁신"(renovation), 그리고 혁명(revolution) 등이 있다. 이 말들중에서 "개혁"이라는 말을 16세기에 종교개혁자들이 채용하였다. 역사성을 인정하면서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잡는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말하기를 "교회는 개혁되었다.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quia reforma)라고 하였다. 교회구조가 그 교회를 새롭게(refresh) 하고, 활성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짜여지지 않으면 교회활동 자체가 타성(inertia)에 젖어 형식화되기 쉬운 것이다. 교회생활과 교회활동이 형식화되면 교회가 유명론적 신드롬(nominalistic syndrom)을 앓게 되고, 따라서 교인들은 명목상의 교인(nominal Christians)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형식화는 위험한 것이다.  

  교회의 유명론적 현상 (Nominality of the Church)

사실, 유명론적인 교회의 교인들은 역시 명목상(형식상)의 교인(nominal Christian)이 되는데, 명목상의 크리스챤은 교회와 형식상의 관계를 맺을뿐 복음에 의한 깊은 감동을 받지 못한다. 본래 명목성(nominality)이란 다름이 아닌, 교회의 출석을 통한 연합된 정체성(associated identity)과 신앙을 통한 실제적 헌신(actual commitment) 사이의 간격(gap)을 의미한다. 명목상 교인(名目上敎人)은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성서적 명령을 무시하거나 합리화시킨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생활에 있어서 무엇을 결정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는다. 모리스(Linus Morris)는 다섯가지 명목상의 교인들의 특징들이 있다고 말한다. 즉

(1) 교회에는 성실하게 출석하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격적) 관계(a personal relationship)를 이해하지 못한다.
(2) 교회에는 규칙적으로 출석하나, 그것은 단지 문화적인 이유(세상적인 이유) 때문이다.
(3) 교회에는 단지 중요한 교회 축제행사(크리스마스, 부활절등)와 예식(결혼식, 세례식, 장례식)에만 참석한다.
(4) 교회에 거의 출석하지 않으나, 안전과 가족과의 정서적 관계, 혹은 전통 등을 위한 교회관계만을 유지한다.
(5) 특정교회는 출석하지 않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명목상의 교인들은 기독교의 형식적 겉치례와 관련되어 있는 세속주의자들(secularists)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은혜가 충만했을 때에는, 교회가 활기차고(vital church) 움직이는 교회(vibrant church)였는데, 경제적으로 풍요해지고 모든 것이 안정된 후에는 유명론적 교회(nominal church)로 전락되는 느낌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유명론적(有名論的)인 교회는 성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침체하고 쇠퇴하게 된다.

  교회의 질적 성장 실패(Failure of Qualitative Growth)

한국교회는 질적 성장보다 양적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숫자놀이(numbers games)를 해왔다. 그러므로 양적 성장의 효과는 보았으나 질적 성장 부실의 문제로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겼고, 더욱 심각한 것은 양적 성장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에, 이를 극복하고 교회를 지속적인 성장에로 유도할 수 있는 것은,  사  실    질적 성장의 잠재력(potential power)인데, 이 질적 성장에 실패했기 때문에, 교회가 침체상태를 면치 못했다는 평가이다. 결국 한국교회 성장평가는「양적성장>질적성장」의 부등식을 나타내고야만 결과가 되었다. 차라리 질적 성장이 양적 성장보다 앞선「양적성장<질적성장」의 부등식의 결과를 가져왔다면, 침체되지 않고 계속적인 성장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본래는, 교회의 이상적인 성장이란「양적성장=질적성장」의 등식으로 성립되어,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이 균형있게 이루어지는 패턴(pattern)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인들의 양육(nuture)에 실패했기 때문에 교인의 신앙이 허약해지고 교회가 침체되고 있다. 교인들이 영적으로 발육부진이라는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성장하지 못하므로 어린아이로 남아 세월만 보내다가 결국은 난장이로 큰 일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양적으로만 성장하여 균형잃은 비만증 환자가 된 상태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겉 늙는 조로병(早老病) 환자이리라. 조로병(progeria)은 노쇠현상, 동맥경화 현상, 탈모 현상, 주름살, 근육 이완 등 노년에 나타나는 증세들을 호소한다. 실제로 10세 밖에 안되는 아이가 90세 이상의 여러가지 특징을 나타낸다. 이것은 평생동안의 생물학적 변화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겪었다는 뜻이 된다. 남보다 굉장히 빨리 늙었다는 의미도 된다. 이것은 정상적인 과정을 겪어서 성장해야 할 교회가 비정상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이요, 결국 질적인 양육 프로그램 진행에 실패했다는 뜻도 된다.
교회가 비성장교회(non-growing church)로 남는다는 것은 양육에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교회성장학에서는 이것도 교회의 질병중에 하나라고 한다. 생명은 식욕이 있고 운동의 욕구가 있다. 생산의 욕구(生産 慾求)도 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유기체인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면 병들고, 병들면 일(운동)을 하지 못한다. 자녀도 생산하지 못한다. 결국 시들어가서 번성한 후손들의 영화도 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한국교회는 성숙한 것 같으나 이상적(異常的)으로 성장한 비만상태(肥滿狀態)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질적으로 건전하게 성장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침체현상은 교회의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불신자 전도의 실패 (Failure of Outreach)

한국교회가 침체되는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불신자 전도에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교회가 성장하는 데는 몇가지 방법들이 있다. 첫째, 생물학적 성장(biological growth) 방법이다. 이는 교회 자체내에서 교인들의 자녀들에 의한 성장을 의미한다. 둘째로, 전적성장(轉籍 成長, transfer growth)으로 다른 교회에서 이적한 교인들에 의한 성장이며, 셋째로, 회심성장(悔心成長, conversion growth)으로 불신자의 전도에 의한 성장이다. 한국교회는 불신자를 전도해서 성장하는 것보다 이적성장(移籍成長)에 주로 의존해왔기 때문에, 전체적인 교회성장이 둔화(鈍化)될 뿐만 아니라 침체되는 현상을 가져온 것이라 하겠다.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대한 과다경쟁(過多競爭)으로 교회성장의 진정한 의미를 잃은채,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 교인들을 낚아채가는(sheep snatching) 식의 소위 양도적(sheep stealing)의 방법을 사용함으로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성장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대외봉사 선 교 실패 (Failure of Service & Mission)

한국교회는 대사회봉사 및 선교운동에 실패했기 때문에, 비활동성 비만증환자(inactive fatness)가 되었을 뿐, 대외적인 전도전략의 실패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밀려오는 세속화 물결에 침체되었다. 교회가 자체의 경비에 70%-80%, 혹간의 주장으로 90%까지 교회 자체내의 경비로만 사용한다면, 전도를 위한 대 사회봉사와 선교활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한국 개교회가 모두 대외 전도전략에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또 설령 전도에 실패한 교회가 있다고 해서 그 교회를 타켙(target)으로 논하자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다만, 거대한 성장물줄기를 타고 줄기차게 성장해오던 한국교회가 침체상태에 빠졌다는 공통된 평가앞에, 숙연히 머리숙여 반성해보자는 뜻이다. 전체적으로 볼때에 대사회봉사를 통한 전도전략과 선교전략에 아쉬움을 남겼다는 말이다. 요즈음에 와서 뒤 늦게 몇몇 교회들이 대사회봉사와 선교에 과감하게 뛰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중국에 대대적인 선교사업을 벌이고, 쏘련에 대단한 선교열심을 쏟는다. 제3세계를 향한 선교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손을 대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좀더 응집된 선교활동과 전도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국내에서도 대사회봉사 사업에 진력하는 교회들도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아직도 한국교회가 자체교회에 쏟는 관심과 경제력이 지나치다는 평가이다. 교회성장을 위한다기 보다는 첫째로, 주님의 지상명령이요, 둘째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는 주님의 분부대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남에게 주는 것은 잃어버리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는 것이다(갈6:6-7). 심었으니 반드시 거두게 된다. 많이 심었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었으면 적게 거둔다. 심은대로 거두리라(갈 6:8-9). 한국교회가 봉사한 만큼, 전도한 만큼, 선교한 만큼 거두게 될것이다. 이것이 검둠의 원리이요 추수의 원리이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는 앞으로 두 가지 중에 하나의 운명을 맞게 될것이다. 첫째로, 한국교회가 목회자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교인들이 각성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교회 전반에 걸쳐서 개혁하지 아니하면, 서구교회, 특히 미국교회의 전철을 밟게 되어 쇠퇴하거나(declining)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가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전반에 걸쳐서 미국(서구)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은 정치에 있어서 민주주의화, 사회에 있어서 실용주의화, 경제에 있어서 산업화, 문화에 있어서 행동화,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 첨단 현대화등 미국의 뒤를 숨가쁘게 쫓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면에서 볼 때, 선진문명의 추종(물론 반기독교적인 것도 있지만)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기독교적인 문화는 배격해야 하며, 더구나 교회가 초산업화의 거대한 문명앞에 백기를 들고 무릎을 꿇다시피한 미국교회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쇠퇴하고 죽어가는 미국교회들 속에서도 줄기차게 성장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미국교회들는 물질문명으로 인한 세속화(secularization)의 영향으로 명목상의 교회(nominal church)로 남아 있는, 잠자는 교회들이나 다름없다. 한국교회도 이러한 미국교회들의 전철(前轍)을 밟아가고 있는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개혁하지 아니하면 미국교회와 똑같은 운명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만약에 한국교회가 이러한 중대한 시점에서 서구교회(미국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고 과감하게 개혁한다면, 현재 추세로 보아 한국교회가「제3세계」로 이양되고 있는 세계선교의 주역을 담당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제4물결」을 타고「제4세계」의 선교와,「제5세계」를 향한「제5물결」을 타고, 마지막의 세계선교로, 다가오는「제5세계」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한국교회의 비젼이며 소망이리라. 우리 한교국교회가 이와 같은 엄청난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3. 한국 교회 성장의   전망

한국교회의 전망은 한국교회의 과거를 더듬어 그 성장요인을 분석하고,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찾아 정확히 진단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 부분은 필자의 저서인「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제4장 "한국교회 성장론"에서 비교적 상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개정(revise) 보완하는 내용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한국교회의 앞날을 염려하면서도 한국교회의 성장규모(growth scale)와 성장능력과, 그 성장의 잠재력에 희망을 걸고 기대하고 있다.

(1) 한국교회 현주소의 진단

한국교회는 그 성격이 어떻든 간에 급속도로, 그리고 크게 성장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볼 때에 양적인 성장은 물론, 질적으로도 많이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기대만큼 질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특히, 수적으로는 세계의 어느 곳을 여행한다 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한국교회를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물론 수자계산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인수의 계산이 상당히 과장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교회성장을 위하여 교회 내외에서 교인들의 숫자를 과장하면서까지 경쟁에만 급급하게 된다면, 양적성장에 치우친 하나의 수자놀음(numbers game)에 빠져들기 쉽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외국 선교사나 목사들을 만나면 거침없이 한국교회의 성장파워(growing power)를 자랑하곤 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이 한국에 있다고...수천명에서 부터 수만명, 수십만명에 이르기까지 큰 교회들이 즐비하다고., 물론 이러한 수자들은 세계교회 성장사상 기하학적 수자라고 할 수 있어서 마음에 걸리는 면도 있지만, 이것이 혼자만의 계산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교회성장 저서들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현재까지는 성장의 열매를 누리고 있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것이 궁금하다. 한번은 필자가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의 권위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Dr. C. Peter Wagner)와 약속을 하고 미국 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신학교 세계선교학과(Fuller's School of World Mission)안의 그의 사무실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필자를 보자마자, 말문을 열기가 무섭게 "한국교회의 성장은 멈췄다"(Korean church growth has stopped)고 잘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멈췄다는 얘기입니까 침체됐다는 얘기입니까?"(You mean stopped or stagnated?)라고 반문하자, 그는 서슴치 않고 "멈췄다"(stopped)고 답변을 했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그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필자의 감정(feeling)이나 그 말의 뉘앙스(nuance)로 볼 때에, 기분 좋은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필자로서는 한국교회 성장의 미래에 대한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제학상의 성장개념에 준해 볼 때, "침체됐다"(stagnated)는 말은 현재는 성장이 멈춘 상태로서 미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멈췄다"(stopped)라는 말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불투명성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저자에게 있어서는 "멈췄다"는 말이 그리 좋은 어감은 아니었다. 
과연 앞으로 한국교회의 성장 가능성(growth possibility)은 불투명한 것인가?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건강상태를 정밀히진단해봐야 할 것이다. 과연 한국교회는 건강한가?(Is Korean Church really in health?). 한국교회의 건강상태는 이대로 좋은가?(Is the health condition of Korean Church satisfied as it is?). 아니면, 한국교회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인가?(Or is Korean Church out of health?).
  한국교회는 현재‘외형적 '비만증’에 걸려 있는 상태라고 진단한다. 질적 성장에 비하여 양적 성장이 지나치게 발육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많은 것을 받아 먹기는 했지만 운동을 하지 않아서, 즉 에너지 발산을 하지 않아서 비만(肥滿)에 걸렸다는 판단이다. 비만은 만병의 원인이 된다. 비만한 사람은 활동도 못하고 그대로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다. 지난번 한국 텔레비젼에 무려 480kg이나 되는 사람을 창문틀을 자르고 지게차를 이용하여 트럭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필자는 미국에서 몸무게가 1,600 파운드(720 kg)로 보통 성인 12사람을 합친 것과같은 비만증 환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꼼짝하지 못하고 쇼파에 기대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나면서부터 비만증 환자였는가? 그렇지가 않다. 처음부터 건강관리(health control), 즉 체중관리(weight control)를 잘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역시 체중관리에 소홀히 해서 비만증에 걸리게 되었다는 평가이다. 이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 박사의 말을 들어보면, 사회봉사와 선교활동에 에너지 방출을 위한 과감한 투자에 인색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한국교회는 비만증으로 인해 병들어가고 있다는 판단이다.비만증 그 자체가 심각한 상태는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병들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비만증 환자는 오만가지 병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 비만증을 치료하지 않는다면 병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한국교회도 비만상태에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반드시 심각한 환자가 될것이다.

  한국교회는 세속화병에 걸려들고 있는 상태이다. 세속화병(secularization disease)이란 어떤 것인가?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니까 영적인 신앙생활, 경건생활에서 멀어지고 세속생활에 물들어가는 상태를 말한다. 야고보 선생은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라고 경고했다. 세속화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교회생활, 신앙생활보다 세상생활로 기울어지게 된다. 영적으로 둔해서 게으르거나, 아니면 세상생활에 바쁘다 보니 교회에 가는 시간,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이 줄게 된다. 따라서 예배생활, 기도생활, 성경공부, 전도· 봉사생활에 등한시하게 되어 영적 기갈상태에 빠지게 된다. 한국교회는 외형적(量的) 성장에만 치우쳐 영적으로 병들어 가며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과거 줄기차게 성장할 때에 비하여 영적으로 모든 것이 둔화된 상태이다. 출석수도 줄어든다. 기도도 약화되었다. 은혜의 잔치, 천국잔치라고 할 수 있는 부흥성회(revival meetings)도 사라져 간다. 전도열도 식어져 가고 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찾을 것 없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병이 들면 기도할 것 없이 병원으로 직행한다. 결국 교회는 할 일이 없어지고, 쇠약해지고, 무력해진다. 이처럼 세속화병이란 교회를 병들게 하는 무서운 병이다. 물론, 모든 개교회(local church)가 다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에, 거대한 한국교회의 성장 물줄기가 약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로 병들어가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첫째로, 앞에서도 언급했었던 것과 같이, 현대문명의 산업화의 현상(industrialization) 때문이다. 선진국의 뒤를 따라, 5.16 혁명을 기점으로 한국은 경제혁명이 시작되어, 선진국의 산업화를 향하여 경제개발의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경제가 급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교회도 이에 발맞춰 급성장하는 커다란 교회성장의 강물줄기(church growth, a mighty river)를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성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산업화가 교회성장의 동반자 노릇만 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교회성장을 둔화시키는 아편을 제공해 주어 교회가 세속화에 마취되어 서서히 잠들어 가게 하고 있다는 심각한 사실도 알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에, 롯이 삼촌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다닐 때에는 유목민 생활에 좀 고달프기는 했지만, 자신과 가족들이 신앙에 있어서 상승상태에 있었고, 이에 따라 물질의 축복도 풍성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욕에 끌려 그 당시에는 더욱 문명이 찬란히 빛났고 문화생활의 극치로 하나님의 동산 같았던 소돔성에 들어간 후, 점차 세속화되어 감을 볼 수 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 사실을 볼 수 있다(창 13장, 14장, 18장, 19장 참조).
이와 같이 인간은 산업화된 문화생활의 은근한 유혹 때문에 세속화병의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세속화병의 증세는 무엇인가? 먼저 기분좋게 신경을 흥분시키고, 그 후에 신경을 마비시켜서 영적 감각을 둔화시키므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어서 마침내 사망의 잠에 빠지게 된다(시 13:3, Barna, George의 The Flog in the Kettle을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세속화병의 증상은 마치 처음에는 기분 좋게 흥분시키다가 나중에는 중독되어, 거기서 빠져 나오기 힘든 마약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스페인의 마약촌에 관하여 상세히 보도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빠져나올 수 없어서, 어떤 사람은 마약이 너무나 좋아서 나오지 못하고 불원간의 사망신고를 해놓은 상태로 하루 하루 아침에 일어나면서 부터 마약주사를 맞는 생활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교회도 세속화에 빠지게 되면 회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결국 교회는 점점 침체되어 가고, 성장이 둔화될 뿐만 아니라 병들어 죽어가게 될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도 이와 같이 심각한 세속화병에 전염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성장 가능성(growth potential)과 성장 파워(growth power)가 있는 상태이다. 힘이 있는 상태라고 해서 완전 건강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기능이 약화되어 있더라도 이미 축적된 힘을 어느 정도, 어느 기간까지는 발휘할 수 있다. 심지어 병든 상태라도 일시적인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한국교회는 현재 영육간의 대단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영적인 파워(spiritual power)이다. 필자가 미국교회 중에서 현재 가장 눈부시게 성장하는 교회들을 리서취하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가 있다. 그 교회들의 특징은 예배의 은혜로운 분위기와 소그룹 운동이라는 것이다. 찬양과 말씀을 통한 은혜로운 분위기, 소그룹 운동을 통하여 평신도들을 훈련하기 때문에 교회가 그토록 크게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이 기도가 약하다는 것은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 성장의 원동력이다. 둘째, 경재적인 파워(financial power)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 경제적으로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은 받으니 나라도 부강해진 것이다. 현재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2020년에는 세계 제7대 경제대국안에 들것이라는 전망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도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경제적인 파워가 대단함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이것은 성장파워의 이차적인 원동력이다. 이 경제적인 파워를 통하여, 첫째, 한국교회 자체의 활성화에 힘쓰고, 둘째,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이는 우리민족을 구원함인 동시에 불신자 전도로 교회의 양적 성장에 이바지하게 한다. 그런후에 궁극적으로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기 위하여 세계선교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 미래의 전망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장래는 어떠한 추세로 갈 것이며,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이것은 현하 한국교회를 향한 긴요하고 중대한 질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이제부터는 한국교회가 미래를 향한 "교회성장의 안목"(church growth eyes)을 가지고 대비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모든 면에 있어서 개혁되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란 부단히 개혁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 특히 교회성장을 위하여 개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중세 교회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어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세속화되어(secularized) 쇠퇴해가고 죽어가는 서구교회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현하 한국교회는 서구교회(Western Church)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서구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Oriental) 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등 모든 면에서 오래 전부터 선진화(developed) 되었다. 긍정적인 면에서 볼 때, 서구(西歐)는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그리고 풍부하게 누려왔다. 그들은 일찍부터 민주화로 정치구조나, 사회구조, 그리고 국민생활이 선진화되었고, 경제가 개발되어 풍요로울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 훌륭한 기독교 문화생활을 누려 왔다. 이러한 일련의 선진화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곧 기독교의 영향이라 하겠다. 좀더 신앙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라 하겠다. 물론, 한국 교회가 육신적(肉身的)인 축복에 치우쳐 있다고 해서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의 오해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서구교회들은 어떤 상태인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들이 퇴보되었거나, 많은 교회들이 죽어서 없어져 갔다. 다시 말하면,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은 상태이다. 
오늘날 서구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회가 미국교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초창기 청교도 신앙(puritan faith)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왕성하여 세계 도처에 선교사들을 파송, 세계복음화의 절대적인 기수가 되었던 미국의 교회들은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가? 교회성장율이 0.3%라고는 하지만, 이 수  치는 인구 증가율 0.71%와 소수민족 (minority) 교회의 급성장 등을 감안할 때, 역시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가시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의 심각한 감소로 파산(bankruptcy)선고를 내고 교회문을 닫아 버리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현재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중에 85%가 쇠퇴하거나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사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미국만큼 기독교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나라는 없다. 그런데, 미국 교계에서 유명한 바르나 리서취 그룹(Barna Research Group)의 창설자인 죠지 바르나(George Barna)는 그의 리서취 그룹의 통계를 통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국교회가 1980년과 1990년 사이에 9개의 대교단들 중에서 남침례회 교단과 하나님의 성회등 2개의 교단을 제외하고 7개 교단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완전히 사양길(declined)로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미국 대부분의 주류(main line) 교단들의 교인들이 사양길에 들어섰다는 경고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지난 10여년(1971-1981)동안에, 미국에 소재한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가 10%, 연합 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가 10%, 연합 그리스도교회(the United Church of Christ)가 11%,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가 15%, 그리스도 제자교회(the Disciples of Christ)가 17%, 그리고 연합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가 21%가 감소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과거에는 그토록 강력했던 기독교회가 오늘날에 와서는 그 영향력을 잃고, 병들어 죽어 가고 있으니(dying)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한명수 목사는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간 교회 숫자가 5,011개 교회에서 53,869개 교회로 61%나 증가했고, 전체 교인수 623,072명에서 10,312,813명으로 1,555% 급성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60년대의 교인수가 연평균 41%에서 70년대에 12.5%, 80년대에 4.4%, 90년대에는 3%로 급속도로 저하되었다고 분석하고, 한국적 종교개혁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1994년에는 0.3%로 감소했던 것이, 1996년 현재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고 주장한다. 하여튼, 오늘날 교회의 성장이 정체상태(stagnant state)에 있고, 게다가 해마다 감소되는 현상(decrease appearance)을 보이는 것도 심각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 되는 교회와 교인들 신앙의 세속화의 문제이다. 그런데 신학적이며(theological), 이론적 세속화(theoretical secularization)의 영향은 신학자들이나 일부 크리스챤에게만 영향을 미치지만, 실제적 세속화(practical secularization)는 신학적이며, 이론적인 세속화와는 달리 교회 전반에 걸쳐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세속화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세속화는 교인들 뿐만 아니라 교회기관 까지도 심각한 상황이다. 교회활동까지도 세속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한국교회 전체가 다 세속화되어 간다는 뜻은 아니나, 적어도 과거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성장의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한국교회가 서구교회(미국교회)의 전철을 밟는다면, 신앙의 세속화를 초래할 것이다. 서구교회인 미국교회 역시, 산업화 물결의 영향으로 몰아 닥친 세속화의 한파로 교회들이 냉각되어, 18, 19세기에 몇 번에 걸쳐서 교회의 대각성 운동들(the Great Awakening Movements)이 일어났었고, 일부에서는 펜타고스탈/카리스마 운동들(Pentecostal/Charismatic movements)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어 죽어가는 현상을 초래했던 것이다. 산업화 생활속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 산업사회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간에 쫓긴다. 그래서 교회에 갈 시간을 놓치게 되고, 신앙생활의 여유를 얻지 못하여 영혼이 메말라진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 예배시간이 조정되고, 예배형태와 방식이 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산업화의 발걸음에 맞추기 위한 작업이라 하겠다. 피곤하니 새벽기도에 나가지 못하고, 수요예배는 물론, 주일 저녁예배까지 없어지는 형편이다. 명맥이라도 유지해 보자는 계산으로 저녁예배를 오후예배로 대체한다. 물론 예배시간의 절대화를 이야기하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세속화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날 아무 시간에나 한번 교회에 나가서 형식상으로 예배나 드리면 주일을 성수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교회 가는 것도 힘들어 집이나 직장에서 텔레비젼 앞에서 예배드린다. 더 나가서 부흥성회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며, 설령 부흥성회를 열어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현상, 즉 주일 낮예배의 반정도 참석할 뿐이다.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크리스챤의 생활은 어떠한가? 역시 세속화에 길들여지고 있다. 크리스챤의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향기(the aroma of Christ: 고후 2:15)가 거의 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세속화 방식으로 처리해 버린다. 의(義)의 옷을 입고(욥 29:14, 시 132:9) 정의(正義)를 하수같이 흘려야 할 크리스챤(암 5:24)이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끄는 생활을 거침없이 하고 있으니(사 5:18), 자신은 물론,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육신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다 보니, 경건생활(devotional life)에서 멀어지고, 그러다 보니 영적으로 메마르다 못해 병들어 죽어 가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가 질적 성장의 변화를 통하여 신앙의 회복으로 세속화에서 빠져나오지 아니하면, 미국교회와 같이 쇠퇴하는 교회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 개혁되지 아니하는 한, 틀림없이 서구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추세는 비록 종교적, 신앙적 추세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선 정치적으로 볼 때,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은 민주화에 있어서 선진국의 뒤를 밟게 마련이다. 요사이 지방 자치제나, 경제구조, 즉 산업화(공업화, 상업화, 금융화 등),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 모든 첨단과학의 선진국의 발자취를 먼저 찾아 밟아 가고 있으며, 이제 와서는 경제의「제삼물결」(the third wave)로 등장한 정보화 산업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선진국의 전철을 밟고 있는 증거들이다. 이렇게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모든 분야에 선진국의 뒤를 밟아 나가다 보니 역시 모든 부분에 현대화된 사회속에서 교회 역시 선진국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교회와 같이 거대한 서구의 현대문명 앞에서 맥없이 쇠퇴해서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한국교회 역시 앞으로 어떠한 변화가 없는 한, 미국교회와 같이 죽어가는 교회의 운명을 맞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 때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대단히 중대한 시기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각성하고 회개하며 개혁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지속적 성장은 물론「제4물결」을 따라「제4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쇠퇴하는 교회! 죽어가는 교회! 생각만 해도 걱정이 된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한국교회는 어떠한 대안이 있는가? 우선, 쇠퇴해 가고 죽어 가는 미국교회들 속에서도, 비온 뒤에 쑥쑥 자라나는 대나무와 같이 급성장하는 교회들, 황폐한 사막에서 굽힐줄을 모르고 버티어 살아 남는 선인장과 같이 꾸준히 성장을 계속하는 교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한국교회들이 주시해야 할 귀감교회들이다. 죠지 바르나(George Barna)는 미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고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며, 아직도 수천의 교회가 교회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수자에 있어서 1990년대에도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구나 한국교회들은 성장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놀라운 잠재력(potential)을 가지고 있다. 기도의 능력이 강하다. 경재력도 있다. 하나님께서 무한하게 부어주실 것이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개혁(改革)되기만 한다면, 다시 계속해서 줄기차게 성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제3세계」로 넘어온 선교사명의 바톤은 한국이 쥐게 될 것이다. 이것이「제5세계」를 바라보는 21세기에 한국교회의 분명한 비젼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한국 교회의 성장 전  략 
1990대에 들어와서 침체되기 시작하여 현재 퇴보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과연 어떠한 전략을 세워야 하는가? 이것은 21세기를 맞는 한국교회의 가장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결론은 명확히 나와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물줄기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며, 개혁이 성공한다면, 지속적인 성장의 축복과 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나, 만약에 개혁되지 아니하면 서구교회와 같이 쇠퇴하는 교회가 되고 세계선교의 촛대는「제3세계」의 어떤 나라에게로 옮겨질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이제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지속성장의 대안

침체되고 쇠퇴해가는 한국교회를 살리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과거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들을 다시 한번 스크린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성장요인들을 부활시키는 방법도 있지 않겠느냐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안은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구태의연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어느 것이든 강력한 방법을 구사하지 않으면 교회성장을 회복시키거나, 최소한 세속화되어 죽어가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한국교회의 성장요인들 중에서 객관적 요인들은 이미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태의연한 것들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 주관적 요인들은 어떠한가? 앞의 주관적 방법들중에서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3자방법(自傳, 自治, 自立)도 역시, 한국교회에서 이미 성취된, 시대에 걸맞지 않는 방법으로, 효과적이고 성숙한 방법이 아니다. 부흥회나 기도원 운동을 통한 교회성장 방법도 역시 상당히 성숙한, 그리고 대부분이 개인적, 개교회적인 신앙생활 방식으로 성숙해 있고, 더구나 심각한 것은 세속화의 영향으로 인하여, 우선 부흥집회에 "모이게" 하는 것부터 힘들게 되었다.

(1) 목회자/교회의 의식개혁

한국교회가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성장의 저해요소들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비젼을 가지고 믿음으로 재도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앞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과제는 교회「멘탈리티」(mentality)의 수정작업이다. 한국교회는 지난 1980년대 초까지는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헌신과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었다. 목회자와 교인들 모두가 교회에 대한 열심히 대단했었다. 그러기에 교회는 부흥되었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급성장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에 상반된 기현상(奇現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한편에서는 교회의 비성장 콤풀랙스(non-growing complex)에 시달리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성장분위기와 현상유지(maintenance of the status quo)에 만족하는 안주주의(安住主義)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개척교회를 비롯한 소형교회들은 비성장 콤플렉스에 허덕이며 스트레스가 말이 아닌 반면에, 대형교회는 염려없는 가운데-현재는 침체상태라고는 하지만-약간은 성장분위기에 싸여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형교회도 침체되고 있다는 사실과, 약간 성장한다고 하는 것 조차도 불신자 전도를 통한 회심성장(conversion growth)이 아니라 다른 교회, 특히 소형교회에서 이적해오는 전적성장(transfer growth)인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침체원인 중의 가장 중요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대형교회와 중형교회에서 주로 볼수 있는「안주주의」현상이다. 중형교회와 대형교회의 교인들은 물론, 교회 목회자들까지도「현상유지」(status quo-maintenance)에 만족하는-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간에-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 보니 과거와 같이 무리하면서까지 목회할 필요가 없다는데 원인이 있는 것 같고, 아니면, 현재의 목회사역에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소명의 뜻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 유지에 이상이 왔다고 진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교회의 의식개혁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가 지속적인 성장의 축복과「제3세계」선교국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한국교회의 자체 교회의 성장은 물론, 지교회 성장(growing more)의 차원을 넘어서, 다른 교회들를 포함한 모든 교회들이 상호성장할 수 있도록-물론 현실상으로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중형교회와 대형교회에서 협력해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우리교회만」이라는 이기주의적 멘탈리티에서「모든 교회가」라는 멘탈리티로 과감하게 전환하고 한국의 모든 교회가 협력할 때, 한국교회는 21세기 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예수 방법의 현대화

그러므로, 단순히, 어떠한 대외적으로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맘모스 대중집회를 개최하여 기독교의 외형적인 위세를 과시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한 전도운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외의 교회성장 요소들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는한 교회성장을 위한 재도약은 어려울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도 교회성장을 위한 재도약의 방법은 성서와 신학적인 기초하에 예수님과 사도들의 방법을 무리 없이 현대화시켜서 시도해야 할 것이다. 사도시대의 순수한 신앙과 철두철미한 복음주의 사상(福音主義 思想), 오직 예수만 전하는 전도와 선교의 순수성, 물질을 비롯하여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앙생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으로 봉사하는 희생적인 정신으로써「예수혁명」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3) 목회구조의 변환

침체(沈滯)되거나 사양(斜陽)길로 가고 있는 한국교회를 활성화시켜서, 계속적인 교회성장에로 유도,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할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교회들의 목회방법으로 채용해오고 있는「평신도 비활동 구조」(passive sheep structure)를 과감하게 개혁함으로, 오로지「목회자 활동구조」(pastor-active structure)의 좀 잘못된 목회방식(ministry pattern)을 뛰어넘어, 평신도의 자원(the inexhaustible resources of the laity)을 충분히 활용하는「평신도사역」(lay-ministry)의 목회방법으로 과감하게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평신도는 봉사를 받기만 하고, 피동적으로 따를 뿐, 오직 목회자만이 능동적으로 뛰어야만 된다는, 그러므로 교회성장의 책임을 오로지 목회자가 혼자 져야 한다는 식의, 비성서적이며, 현대의 잘못된 교회활동 구조인「목회자 활동구조 평신도 비활동구조」(active pastor-passive sheep)의 멘탈리티가 평신도들은 물론, 목회자들까지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잘못된「평신도 의식구조」(sheepfold mentality)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교인들만 어루만져 주고,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 하므로, 교인을 상전으로만 모셔야 하는 애로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신앙은 물론, 교회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린(Hollis L. Green)은 대부분의 개교회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관념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했다.
특히, 오늘날 각 분야별로 전문화되어 있는 현대교회에서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교회에서「목회자 활동 평신도 비활동 구조」(active pastor-passive sheep structure)로부터「목회자/평신도 공동사역 구조」(pastor/laity-coworker structure)에로 과감하게 전환시켜야 한다. 이 평신도의 훈련과 사역은 교회의 내적/구조기능적 원인(內的 構造機能的 原因)으로 인하여 교회가 침체된 것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시도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평신도 사역은 첫째로, 명목상(名目上) 교인, 형식화(形式化)된 교인들을 일깨워서 질적인 성장(質的成長: qualitative growth)을 위해 시행하는 양육 프로그램(follow-up program)으로, 교인들을 영적 성숙(靈的成熟: spiritual maturity)으로 유도하고, 둘째로, 그 들을 통하여 대외전도를 활성화시켜서 불신자 전도의 성공으로 양적 성장(量的成長: quantitative growth)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셋째로, 대 사회봉사(對社會奉仕)와 선교사역(宣敎使役)에 투입함으로서 비젼있고 능력있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 평신도사역은 특히 현대교회가 시행해야 할 필수적인 목회사역이다.

(3) 목회 방법론의 개혁

교회성장을 위하여는 두 가지 내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 가지 근본적인 교회성장의 요소가 효과적으로 작용해야 된다. 첫째는, 목회자들의 자기개발을 위한 각성이며, 둘째는, 평신도들의 훈련과 활용이며, 셋째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의 개발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활용될 때에, 교회성장은 가능한 것이다. 사실, 목회자들부터 철두철미한 사명의식(使命意識)과 자기개발(self-development)의 노력을 해야 한다. 시대는 흘러간다.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점점 세대차이(generation gap)가 생기게 된다. 정치, 경제, 사회등 모든 분야의 문화가 발전하고 달라진다. 사람들이 발전하고 신세대들로 바뀐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사고방식에서부터 언어와 행동방식 등 생활양식이 엄청난 차이로 변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변하는 시대의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라고해서, 조로병 환자(progeria)의 예를 들어 90년이 11년이상으로 단축되었다고 설명했다.
농경문화(農經文化)가 공업문화(工業文化)로 넘어가는데는 수천년이 걸렸지만, 공업문화에서 초산업화(超産業化)로 넘어가는데는 불과 수십년밖에 걸리지 않아 변화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졌는데, 이것은 아마「주의 나라」(제5세계)가 순식간에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시대변화에 따라 자기개발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통한「평신도 사역」(lay ministry)만이 현대교회 성장을 보장할 수 있는 지름길(short-cut)이 될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성장학자 피터 와그너는 "성장하는 교회의 제1의 중요한 싸인(the first vital sign)은 교회성장을 위하여‘자신의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목사'이고두 번째로 중요한 싸인(sign)으로는 잘 훈련되어‘잘 동원된 평신’(well-mobilized laity)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것을 요약하면, 목회자는 강단(preaching)을 강화시키고, 능력있는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하며, 그리고 효과적인 프로그램들(effective programs)을 개발하고, 그 다음 평신도훈련(laity training)을 잘하여, 소그룹운동(small group movement)을 통한 평신도의 무한한 자원을 개발하여 교회성장에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교회를 건전하에 성장시키는 확실한 방법이다.

제5부 21세기 목회전략과 방법론

참으로 세월이 많이 변했다. 반딧불에 의지하여 책을 읽는다 하고, 등잔불 밑에서 눈을 비벼가며 책을 읽는 등화가친(燈火可親)의 정서는 이제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원시인의「동굴문명」(cave culture)이 변하여 이제「굴뚝문명」(smokstake culture)과, 현대인의「저택문명」(manson culture)으로, 스마트 하우스(smart house)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편안히 살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주여행이 현실화되고,「제3물결」인 초산업화 시대가 지나가는 것도 초읽기로 남아 있고, 이제는 지구촌이 한 가족이 된다는 통합된 세계의 개념인「제4세계」의「제4물결」이 우리의 코앞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시대에 와서 살고 있다.
「제5세대 컴퓨터」(the fifth generation computer)를 이용하여 빛(beam)과 음성(sound)을 이용하고, 그리고 몸에서 나오는 전자파(radio wave)와 체온(體溫)을 통하여, 모든 것이 자동으로 조절되는 꿈과 같은 "환상의 집"(fantastic house)에서 살게 된다. 옛날 도깨비 방망이나, "열려라 참깨"하면 자동으로 동굴문이 열리는 환상적인 이야기가 이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건물앞에 서면 누가 서든지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빔 타입(beam type)의 요즈음의 현대식 건물이 아니라, 주인만의 음성을 알아듣고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스마트 하우스」(smart house) 시대에 살고 있다. 이「스마트 하우스」안에 들어가면, 전등이 자용으로 켜지고, 들어가는 사람의 체온에 따라 실내의 온도가 적절하게 자동적으로 조절되고, 사전에 요리기계(cooking machine)에 음식재료들을 준비해 넣고, 요리 종류에 따라 요리 방법을 컴퓨터에 입력했다가, 식사시간에 먹고싶은 메뉴의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요리가 되어 식탁 앞에 놓이게 되고, 그리고 가든너(gardener)나 파출부(house keeper)가 필요없는「환상의 저택」(fantastic mansion)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1. 목회의 정보화

현대과학의 덕분에 콤퓨터가 나오고 전화, 팩스, TV등 첨단기구들의 등장으로 우리가 손끝으로 하던 산더미 같이 쌓인 업무들을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테이타 뱅크」(data bank)를 이용하여 모든 정보를 순식간에 얻을 수 있다. 인터넽(internet)과 같은 전세계적인 정보망의「프로그램 뱅크」를 통하여 집에 앉아서 원하는 것을 즐길 수 있으며,「스마트 하우스」(smart house)에서 전화우편(phone mail)과, 전화 혹은 컴퓨터 쇼핑(phone or computer shopping)을 하며, 앞으로는 손끝으로 할 일이 적어지고 그냥 말로(sound), 혹은 빔(beam)을 이용하여 업무나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시대가 눈 앞에 닥아왔다. 죠지 바르나(George Barna)는 21세기에는「스마트 하우스」가 자동적으로 집안의 모든 기능을 대신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전만 해도 컴퓨터가 전문가만이 다루었던 것이, 지금은 컴퓨터를 못 다루면「컴맹」(Com-盲)이라고 놀림거리가 된다. 제3세대, 정보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머지않아「제4물결」이 밀려오겠지만 현대는「제3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제3물결」의 시대인「초산업화 시대」이다. 우리는「제3물결」이 흘러넘치는「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목회정보(ministry information)는 물론, 멀게는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예언자적인 눈」(prophetic eyes)을 가져야 하며, 가깝게는 자기 교회성장을 위한「교회성장 안목」(church growth eyes)이 있어야 한다. 자기교회의 성장에 대한 비젼(vision)을 보지 못하면, 교회에 대한 앞날이 감감하게 되여 장님목회(blind ministry: no-vision ministry)로 고전하게 된다. 목회자가 자기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교회의 성장에 대한 비젼을 볼수 있는「교회성장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회성장 비젼은 자기에게서 발전되고, 동정되고, 열망과 확신으로 흥분되어 미치다시피하여, 메시지를 통하여 교인들에게 의욕과 소망과 확신을 주어, 교회 전체가 성장분위기로 휩쌓이게 해야 한다.
차세대의 교회는 차세대의 목회대상에 걸맞는 목회철학을 가지고 목회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이용했던「도포와 짚신문화」는 그 당시에 어울리는 것이었고, 지금에는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를 이용하여 효과적인 목회방법을 구사해야 한다. 물론, 문화의 변화추세에 발맞추다가 가장 중요한, 순수한 복음의 메시지를 변질시키거나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현시대를 성서적인 예언적 안목으로 정확하게 파악하여 목회전략을 세워야 한다.
피터 와그너는 현대, 특히 1980년대 이후의 기독교회의 복음운동에 관하여, 선교 및 목회적 차원에서 볼때,「제3물결」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볼 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복음운동(Evangelism movement)이 여러차례 변화를 거쳐오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Reformation)을 기점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Protestant church)는 오직 성경말씀 중심의 복음주의(Biblical evangelicalism)를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19세기 이후에, 전세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새로운 능력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성령의 역사(new spiritual event)로, 세계를 복음화시키기 위한 "제2의 오순절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순절이라고 해서 원초적인 의미의 사도시대의 오순절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2.「제3물결」목회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교수에 따르면, 미국에서 1900년 초에, 성령을 통하여 일어났던 복음운동으로서「제1물결」인「오순절운동」(Petecostal movement)이 일어났었고, 그후 1960년대에서 부터「제2물결」(second wave)인「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또 1980년대 이후에 와서는「제3물결」인「복음주의 성령운동」(new Spiritual movement in the evangelicalsm)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고 분석했다. 물론, 그의 교회성장론이 일부에 의하여 타협주의니, 실용주의니 하는 비판도 받고 있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을 복음주의 안으로 도입하려는 시도에는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자들에 의하여 비판의 소지가 있는 착상이라고도 생각되지만, 그는 많은 복음주의 내지, 복음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상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 성경이 특별은사의 종막을 말하지 않았으며, (2)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특별은사의 부족으로 약화되어 빈혈증에 걸리고 있고, (3) 현대 교회들의 경험으로 보아서,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제3의 운동을 좋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교리적인, 신학적인 이슈는 접어두고, 순수하게 복음전파운동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자는 의미에서,「제3물결 운동」은 교회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을 위한 현대목회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나 목회방법을 가지고는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 시대를 따라 합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셨다(히 1:1,2). 우리 한국에서도 1907년을 기점으로 오순절의 성령운동을 통하여 교회 부흥운동이 일어나 계속되었고, 1960년대에 와서 은사운동이 성행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성 복음주의 교회들도 대부분이 이 영성운동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과거에는 성령운동이나 은사운동은 이단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던 기성교회(旣成敎會)들이 오늘날에는 이 운동들을 수용(受容)하게 되어, 어느 교회에서나 영성운동(spiritual movement)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영성운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에 치우쳐서 교인의 신앙이나 교회가 불건전하게 되는가 하면, 반대로 하고싶어도 되지 않아서 그대로 힘없는 교회로 남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다행한 것은, 영성운동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이해하려들지도 않는 전근대적인 아집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거의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도 많이 변한것 같다. 좋게 말하면 개혁된 면이라고 볼수 있다. 현대교회를 담당한 목회자들은「제1물결」만 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성서적, 복음적인 신앙체계가 없이 "성령의 능력만 믿습니다" 해가지고는 현대목회를 하는데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믿습니다"는 목회자들 보다도 더 잘하는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교회를 담당한 목회자들은 「제2물결」만 타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말씀의 체계와 말씀의 능력이 없이는, 역시 현대교회를 리드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적은사로 병고치는 능력(healing power) 같은 것은 목회자들 보다도 더 강한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두 물결을 포용한 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성령의 강한 역사를 통하여 내적으로 외적으로, 영육간에 병든 현대교회를 치유하고, 양육시킬 뿐만 아니라, 내일의 비젼은 물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교회 목회자들은 "현대"라는 큰 대양에서「제3파도」(the third wave)를 매우 능숙하게 탈 줄 아는 "훌륭한 성령의 서핑선수"(an excellent surfer by the Holy Spirit)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현대교회 목회자들은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목회를 위한 복음의 진수를 효과있게 제공할 수 있는 "말씀의 종"과 영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필요한 "영적 은사"(spiritual gifts)를 구사할 수 있는 "영력있는 종"이 되지 않으면 더구나 차세대 교회(次世代敎會, next generation ministry)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21세기는 말씀과 영력(靈力)을 겸한 목회자가 사역할 수 있는 시대이다.

3. 목회 의지와 비젼

그러면 이와 같은 세대에 한국교회적 상황에서, 사양길로 쇠퇴하여 죽어가는 교회를 어떻게 치유하며, 살려서, 성장하는 교회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사실, 다른 교단, 다른 교회보다는 자기의 개교회의 문제가 시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우선 어떻게 자기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이라 하겠다. 이러한 질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회성장 연구에 공헌한 사람중에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교회성장의 이론적인 면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C. Peter Wagner)로서, 그의 선교현장(mission field)과 목회현장(ministry field)의 충분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교회성장의 원리와 전략을 학문적으로 수립하였다. 그는 "우리교회가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주저하지 않고「당신의 교회도 성장할 수 있다」(Your Church Can Grow)라는 책을 써서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시카고의 시무하던 교회에서 단지 300달라를 받아 가지고 캘리포니아 가든 그로브(Garden Grove)로 와서 지금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를 이룩해 놓은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는 실제 개척교회에서 대교회로 성장시킨 경험과 그의 적극적이며 긍정적 사고방식의 목회철학(possibility thingking-philosophical concept of ministry)을 바탕으로 해서, 낙심하고 쳐저있는 목회자들을 위하여「성공은 결코 끝이 없으며, 실패도 결코 끝이 아니다」(Success is Never Ending, Falure Is Never Final)라는 책자을 통해서 목회자들을 격려함으로써 용기를 주고,「당신의 교회도 환상적인 미래가 있다」(Your Church Has A Fantastic Future)라는 책을 써서 목회자들에게 교회성장에 대한 안목(眼目)을 가지고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을 내다보면서「당신의 교회도 실제적 가능성이 있다」(Your Church Has A Real Posobilities!)라는 책을 통하여 목회자들이 교회성장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로버트 슐러는 손에 가진 것도 하나 없이 오로지 "아이디어"(ideas) 하나만 가지고 교회 개척을 시도했다. 그는 시카고에서 가든 그로브로 이사하는 도중에, 좋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성령님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회성장의 아이디어"(church growth ideas)이다. 이것은 자기 교회성장의 가능성을 꿰뚤러 볼 수 있는 통찰력(church growth insight)으로, 자기 교회의 성장을 내다볼 수 있는 "교회성장의 안목"(敎會成長 眼目: church growth eyes), "교회성장의 비젼"(敎會成長의 비젼: church growth vision)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가 교회성장에 대한 확실한 비젼이 있어야 목회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생긴다. 그러면 "교회성장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물론 기도하면서 성령을 통하여 얻을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이론적으로 교회성장에 관한 연구들과 워크샵을 통한 실습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제생활과 부단한 자기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항상 기도하며, 성경과 서적을 읽고, 관찰력과 사고력을 길러야 한다. 

(1) 다  이  나  믹   목회전략

군사과학(軍事科學: military science)에서 전략(戰略: strategy)과 전술(戰術: tactics)이 필요하듯이 교회목회에서도 전략과 전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목회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귀들과의 전투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목회전투의 대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서, 결국 마귀들과 싸움이기 때문에, 군복을 입고 총칼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말씀의 검," 즉 "성령의 검"을 가지라는 것이다(엡 6:10-20). 군사전략 과학(military strategy science)에 있어서와 같이, 교회목회을 위한 전략에 있어서도 다양한 전술들이 있다. 전략(strategy)의 개념이 전체적인 과정(overall process)인 반면에, 전술(tactics)의 개념은 전략에 기여하는 여러가지 활동(various activities)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전략과 전술은 상황(context)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전략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상황에 따라 선택되어져야 한다.
이와 같은 전략의 변경 가능성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떠한 목표가 설정되었을 때에,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결코 없다. 전략을 세우기 전에 그 목표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한 여러가지 대안들을 마련하여, 그 중에서 최상의 것으로 보이는 것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견해가 허용되었을 때에,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물론 도덕적인 책임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죠셉 플리쳐(Joseph Fletcher)가 그의 저서「상황윤리」(Situation Ethics)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다비스(John Jefferson Davis)는 "상충된 도덕적 책임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실패한 경우가 상황윤리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죠셉 플리쳐는 "기독교 윤리는 진리가 아니며, 더 이상 법제화된 행동의 체계적인 규범(規範)이 될 수 없고, 기독교 윤리의 정수(精髓)는 바로 상황윤리로서, 그 원리, 즉 기독교적 결정규범은 사랑: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비기독교적인 실용주의 윤리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줄수 있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때에 따라, 실용주의가 성경에 계시된 교리적, 윤리적 원리들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에 유용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이것을 "성화된 실용주의" 혹은 "성별된 실용주의" (consecrated pragmatism)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이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성경에는 성화된(성별된) 실용주의를 사용하고 있는 전략계획을 위한 몇몇 선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구약을 보면, 놀랄만한 선례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모세의 경우이다. 모세가 그의 과중한 업무 때문에 지쳐있을 때에, 그의 장인인 이드로(Jethro)가 실용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방법이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임명해서, 모세가 꼭 처리해야 할 중대한 일 외의 업무들을 그들에게 맡기므로 모세가 지치지 않고, 더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매우 실용적인 방법이다. 모세는 이 방법을 좋게 여겨서 자기의 전략을 변경하고 이드로의 충고한 방법을 사용하였다(출 18:13-27). 이것은 실용주의적인 전략계획을 융통성 있게 사용한 일예이다.
신약성경에 보면, 역시 실용적인 방법이 발견되는데, 바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바울은 전도전략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역시 실용적인 전도전략을 사용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 같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 같이 처신하였는데, 이는 그들중에 몇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다(고전 9:19-23). 이것은 전도를 위한 실용주의적 전략의 일례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역시 대단히 실용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 후서 1:23-24과 2:1-11에 목회를 위한 실용주의적 전략의 예가 나타나 있다. 이 성구들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 가고자 하는 스케쥴을 변경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고린도 후서 1:23에 그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이 구절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그가 고린도에 갈 노정을 변경함에 따라서 그 실행시기도 역시 늦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본서를 집필하는 때까지, 그는 고린도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가 고린도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이 오히려 그 교회에는 유익이 되었으니, 곧 그의 가기전에 그들이 회개함으로 그의 갈 때에는 아무런 꾸지람도 하지 않게 됨이다. 그들이 회개하기 전에 그가 그곳에 갔더라면, 그가 그들을 아낄래랴 아낄 수 없어서 엄한 태도로 대하였을번 하였다."
그러나 목회전략에 있어서 무분별하게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나 능력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상황에 따라 처신하기 쉽기 때문이다. 인간의 뜻과 잔꾀로 하나님의 교회의 일을 처리해서는 안된다. 목회전략을 세우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이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는 항상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영적인 교통이 지속되어야 한다. 

1. 목회자 자신의 정체성 (Pastor's Identity)

목회자는 주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이 분명해야 한다. 목회자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이 불분명하면 소신있고 확신있는 목회를 할 수가 없다.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데는 몇가지 이슈(issues)가 있어야 한다. 첫째는,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로, 자신이 언제 하나님에게 헌신된(committed) 사람인지?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과연 언제 구원의 확신을 얻었는지? 확실히 주님을 영접한 증거가 있는지? 하나님의 자녀로 언제 중생의 확신을 얻었는지? 등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을 통하여, 스스로 확인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얻고 자신을 가져야 한다. 만약에 자신의 정체성이 불확실한 가운데 목회를 하게 된다면, 목회사역의 의지(意志)와 파워(power)가 없어진다. 필자는 동료 목회자중 이러한 자기 정체성이 불확실한 가운데 목회를 하다가 아주 세상으로 나가버린 사람을 보았다. 그는 한 때 대단한 열심으로 목회사역을 했었던 사람이었다. 둘째로, 과연 나는 무엇하는 사람이냐?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확실한 소명(召命)에 대한 이슈가 있었는지? 소명(calling)을 받을 때에, 마음의 확신이나 그 외의 어떤 구체적인 소명이슈(calling issue)가 있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에 대하여 응답한 적이 있었는지? 또 그 소명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서원(誓願)이나 마음에 주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작정을 한적이 있었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서원의 뜻으로 예물(헌금, 헌물)을 드린 적이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숙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목회를 할 때, 소명의식(召命意識) 혹은 사명의식(使命意識)이 철두철미 하지 못하게 되므로, 목회를 사명감으로 하지 못하고, 자기의 처지에 따라 하기 쉽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만, 목회에 대한 사명의식 보다도 직업의식(職業意識)이나 명예의식(名譽意識)으로 빗나가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목사 가운데 처음에는 목회를 대단히 성공적으로 잘 했었는데, 그후에 전혀 목회를 그만둔 목회자가 있다. 그는 처음에는 서울에서 개척해서 그 당시 상당히 큰 교회로 성장을 했는데, 그 후 교회에 어려움이 오게 되었다. 더구나 자신이 개척해서 키운 교인들에 의해서 어려움을 당하자 대단히 실망하게 되었다. 결국, 그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는데, 그 때에 수백명의 교인들이 따라나와 교회설립을 강권하여 다시 교회를 시작하였다. 교인이 수백명이나 되고 적극적으로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이기 때문에 개척이라기 보다는 다시 재도약할 수 있는 꽤 큰 교회로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목회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는 소명의식(召命意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는 자기의 청체성이 분명하고 확신이 있어야 한다.

2. 목회자 신학의 정체성 (Theological Identity)

목회자가 신학이 없으면 부흥회를 인도하거나 카리스마 사역은 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지속적인 목회사역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 이유는, 목회란 단기전(short term ministry)이 아니라 장기전(long term ministry)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목회는 근시안적인 사역(short range ministry)이 아니라 원시적 사역(long range ministry)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시성(temporarity)의 반짝쇼식의 사역은 목회에 적합하지 못하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년 혹은 수십년 동안 같은 지역에서 같은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을 해야하기 때문에 목회자료와 능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 만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격에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정리해서 말하자면, 첫째로, 목회자는 지적 감화력(知的 感化力)이 있어야 한다. 이는 목회 대상들을 이해(理解)로 유도하기 위한 지식의 힘이요, 생명(生命)으로 인도하기 위한 지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목회자는 영적 감화력(靈的 感化力)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 사역(고후 3:8)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가서 영혼을 터치(touch)하여 변화시키는 직분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목회자는 인격적 감화력(人格的 感化力)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격이 없는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인격을 가진 도덕적인 존재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품을 보면, 지성(知性)과 감성(感性)과 영성(靈性)이 있어서 이 성품들이 표출하기도 하고 무엇을 요구하기도 한다. 지성이 표출될 때에는 지식의 힘, 즉 지력(知力: inteletual poewr)이 나오고, 감성이 표출될 때에는 감동의 힘, 즉 감동력(感動力: emotional power)이 나오며, 그리고 영성이 표출될 때에는 영의 힘, 즉 영력(靈力: spiritual power)이 나온다. 반대로 이 세 가지의 인간의 성품은 이에 못지 않게, 이들에 따른 강렬한 욕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는 충만하게 넘쳐흐르는 표출력, 즉 지적 감화력과 도덕적 감화력과 영적 감화력을 통하여 교인들의 지적인 욕망과 정서적인 욕망과 영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않으면 안된다.
목회자는 첫째로, 교인들의 지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진리탐구(眞理探究)에 정진(精進)해야 한다. 교인들이 목회자나 목회자의 목회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면 목회에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목회자에 대하여, 교인에 대하여, 그리고 목회사역에 대하여 교인들을 이해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지적 감화력을 통하여 교인들을 설복시켜야 한다. 어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통한 살진 꼴을 공급하기 위하여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신학과 목회학 등 전문지식에 관하여 연구해야 한다. 
둘째로, 교인들의 정서유도(情緖誘導)를 통한 감화력을 얻기 위하여 찬양을 비롯한 음악예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배를 비롯한 크리스챤의 생활이 메말라지면 신앙생활에까지 영항을 미치게 된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기계화된 현대문명의 생활에서 정서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서양(西洋)의 째 즈   록음악(Jazz Rock-N-Roll)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인 리듬이 교회안에 들어오면서 교회음악, 특히 예배음악에 혼탁을 초래하고 있는 것 같다. 복음성가(Gospel Song)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정서적으로 메말랐던 신앙심을 불러 일으켜서 잠들었던 영혼을 일깨워 새로운 감동의 세계로 인도함으로 교회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러나 복음성가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감성에 호소하는데까지는 성공한 것 같으나,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을 터치해서(touch) 철저한 회개를 동반한 하나님의 영(靈)과 우리의 영(靈)이 부딛치는 가운데서 나오는 영혼의 절규, 영혼의 노래, 즉 영가(靈歌)로서의 역할은 미약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이러한 면에서, 복음성가보다는 전통적인 찬송가가 작시자(作詩者)와, 작곡가(作曲家)들이 성령의 영감이 넘쳐흐르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수세기가 지난 오늘 날에도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영혼의 노래, 영혼의 종소리가 되어 오지 않았나 한는 생각이 든다.
세째로, 영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祈禱)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이는 교인들의 영적인 욕구를 채워주어야 할 의무가 목회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영적인 만족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그리고 강력한 기도를 통하여 충분한 영력을 얻어야 한다. 특히「제3물결」의 시대에 사역하는 목회자들은 수많은 교인들을 영적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보다 강한 영력이 필요한 것이다. 말세에 영력이 없으면 목회사역은 물론, 자신의 신앙마져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목회자는 강력하게 넘쳐 흐르는 성령의 충만한 영력으로, 전도하며 교인들을 돌보는“영의 직분”(고후 3:8)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들이 이리에게 물려 가거나 세속화의 물결에 떠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사역의 최우선적인 사역(number-one task)인「설교」(說敎)에 있어서, 이와 같은 문제들을 고려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목회자는 우선, 설교(preaching)를 통하여 이러한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건전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는, 바울 사도의 메시지(message)와 같이, 목회의 대상이 되는 모든 교인들의“지성(知性: intellectuality)에 호소하여 지적만족(intellectual satisfaction)을 줄 수 있는 지적설교(知的說敎), 교인들의 감성에 호소하여 정서적인 위안(emotional comfort)을 주는 정서적 설교(情緖的 說敎), 교인들의 영성에 호소하여 영적 만족(spiritual satisfaction)을 줄 수 있는 영적 설교(靈的 說敎)를 고르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효과적인 설교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설교 내용에 필요한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가장 힘들어 하고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지식의 한계성"(知識의 限界性)이다. 설교준비는 여인이 해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인이 몸으로 받은 씨(種)를 체내에서 발아시켜서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하나의 인격을,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같이 목회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의 씨"를 체내에서 구체화시켜서 그 말씀의 "구체화된 예수"를 탄생시켜 청중들에게, 그 예수를 만나도록 해서 죄악세상에서 상처입은 저들이 치료를 받고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설교를 설교학에서는 화육설교(化肉說敎, Incarnational preaching)라고 한다. 이 화육설교를 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여인이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처럼 모진 고통에 몸부림한다.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교인들은 목사가 일주일 동안 설교만 몇번하는 것 외에 하는 것이 있느냐고 질타를 가할 때에, 주의 종들은 "오 주여! 맙소사" 하고 한숨을 내쉬게 된다.
목회자가 주일설교를 화요일 안으로 일찌감치 마치게 되면, 그 후에는 몸과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아서, 남은 요일들에는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된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경험해보아야 안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울 때가 바로 지식에 한계를 느낄 때이다. 성경지식을 비롯하여 신학지식, 일반 모든 지식이 풍부하면 설교준비가 쉽고 즐거워진다. 물론 능력있는 기도를 통하여 영감이 넘치고 영력이 충만해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영력과 지력이 겸비한 인격만점의 목회자라면 참으로 존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선 설교에 필요한 것은 신학적인 지식이다.
그런데, 요사이 충분한 신학적인 연구의 기회들을 갖지 못한 목회자들이 첫째로, 목회사역, 특히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지식에 한계를 느껴 힘들어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신학적인 지식이 많은 목회자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설교의 준비를 잘하고 그렇지 못한 목회자라고 해서 설교의 준비를 못한다는 논리는 아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많다고 해서 설교를 더 잘한다는 의미는 더욱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똑 같은 경우라고 할 때, 설교준비에 있어서, 지식의 한계를 느끼는 사람보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좀 더 수월하다는 뜻이요, 둘째로, 설교의 내용에 있어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좀 더 충실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설교의 작성과 설교의 전달은 동일하지 않다. 어떤 목회자는 내용이 충실하게 설교를 작성해놓고도 설교의 효과를, 준비한 만큼 얻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목회자는 설교의 내용이 좀 부실해도 설교효과를 크게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둘째로, 신학지식에 빈곤할 때에 생기는 문제로, 본의 아니게 양들을 오도(誤導)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통적인 신학체계가 목회자들에게 안전한 목회사역을 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가 있다. 물론, 신학자체가 성서의 권위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최선의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목회자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이단은 물론 본의 아니게 비성경적인 사역에 빠지는 이유가 모두 정통적인 신학적 체계가 없는 것이 원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꾸준히 책을 읽고 연구하여, 목회를 위한 지식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스펄젼 목사는 전혀 고등교육을 받은바도 없지만, 목회를 위한 연구, 특히 설교에 대한 열성적인 연구로 인하여 세계적인 설교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학문을 더욱더 열심히 연구하였고, 학문에 한계성을 느낄때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 협조를 얻었고, 주체사상 확립을 위하여는 주위의 훌륭한 목회자들의 자문을 받는 열심을 내기도 하였다.
목회자는 남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신학적인 서적들에 관한 독서를 통하여 목회자로서 복음적으로 자신의 신학의 주체성(theological identity)을 확립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외적으로 목회사역에 필요한 지적 바탕을 삼아야 한다.

3. 목회자 교단의 정체성 (Denominational Identity)

목회자는 자기의 소속교단이 분명해야 한다. 물론, 초교파 운동을 부인하는 뜻은 아니다. 단지 목회자가 자기의 교단적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함으로 받는 불이익과, 분명함으로 받는 유익을 고려해서 하는 말이다. 목회자가 소속교단이 불분명할 때에는 몇가지 불이익을 당할 수가 있다. 첫째로, 교단의 울타리가 없으므로 정치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목회자가 목회하는 과정에서, 교회정치상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교단의 비호를 받을 수 없어서 홀로 고전하게 된다. 정치는 교계에서도 냉혹한 것이 현실이다. 교단적 배경이 있으면 총회에서, 노회에서 자신의 정의를 주장하여 보호받을 수 있다. 둘째로, 교단 배경이 없으면 신학적으로 오해를 받기 쉽다. 심한 경우에는 이단시비(異端是非)에 말리기도 한다. 교단 배경이 없으면 교단 배경에 따른 목회자의 신학적 칼라(색갈)가 정확히 나타나지 않아서 불투명하기 때문에, 오해를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교단이 분명하면 그 소속교단의 신학사상에 의하여 목회자의 신학이 투명성(trsansparency)을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기독교 사회에서 공인을 받게 된다. 셋째로, 목회자가 교단 배경이 없으면 교회성장에 지장을 초래한다. 교단적인 신뢰성이 없으면 전도에 지장이 많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교인들은 다른 교파의 이름을 붙이거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교파의 이름을 붙이면 교인들이 고개를 갸웃등하다가 다른 교회로 가버린다. 심지어 교역자들까지도 경계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단의 정체성이 분명하면 교회성장의 장애물 하나를 치운셈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목회자가 교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교회의 연합사역을 할 수 없고, 이로 인하여 스스로의 성장의 기회도 잃게 된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더부러 살고, 더부러 성장하고, 더부러 일을 한다. 교회 공동체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단이 분명치 못하거나 공인할 수 없는 이상한 교단에 관련되어 있을 경우에 목회자는 다른 교회나 목회자들과의 연합사업을 할 수 없으며, 혹시 한다 하더라고 항상 스스로 자격지심을 갖게 되거나, 또 실제로 푸대접(?)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분명한 교단의 정체성을 주의 사역에 이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실제로 교단의 문제로 목회사역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목회자들도 많다. 물론, 신학적인(神學的), 그리고 신앙적(信仰的)인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슈(political issue)로 문제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4. 목회자 교  회  의 정체성 (Ecclesiastical Identity)

목회자는 자기 교회의 정체성을 면밀히 탐사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자료들이 교회성장 전략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테이타(data)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단배경은 무엇인가? 교회의 신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교회의 지역적 여건은 어떠한가? 교회의 스타일은 무엇인가? 교회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교회의 문화적 배경은 어떤가? 교회의 유형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통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교회성장 전략을 세우는데 효과적이며, 효과적인 교회성장 전략은 앞으로 교회성장 가능성을 높혀준다. 이러한 질문들은 목회자들이 거의 무관심하고 넘어가기 쉬운 문제들인데, 사실 근본적이며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다. 교회의 교단적 배경이나 신학적 배경은 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고, 이 부분에서는 주로 교회의 규모와 유형의 성격에 관해 논하기로 한다. 이는 교회성장 전략에 중요한 부분이다.

(1) 교회의 규모 (Church Size)

목회자는 자기 교회의 규모를 규정하여 교회성장 전략을 위한 적절한 카테고리에 넣고, 그 교회의 규모에 따른 전략을 세워나가야 한다. 교회의 규모는 교회성장 전략을 세우는데 기본적인 것이며,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정확히 분류해서 규정해야 한다. 교회의 규모는 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분류의 목적에 따라 다르다. 칼 죠지(Carl F. George)는 교회성장 전략을 위하여 성장의 장벽을 교인의 수자에 초점을 맞추어, 200명, 400명, 800명 등 교회성장에 있어서 기본적 장벽수자(barrier number)로 구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교회의 규모는-국가적, 문화적인 차이는 있겠지만-대략 8등급(8 categories)으로 분류한다. 필자는 8등급의 교회 규모를 한국교회의 실정에 맞도록 약간씩 조정하여,   가정교회(10-30),   단세포그룹교회(30-80),   소형교회(80-150),   중형교회(150-400),   대형교회(400-800),   수퍼교회(800-2,000),   메가교회(2,000-10,000),   메타교회(10,000 이상)의 등급으로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1) 가정 교회 (The House Church: 10-30)

「가정교회」는 대략 10-30여명까지의 규모로된 교회로, 대개 일주일 동안 교회의 가족분위기로 정규 예배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이다. 가정교회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이나 활동(activities)을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질적인 성장에 문제가 있으며, 불신자들을 위한 비젼과 전략이 없기 때문에, 대외 전도전략(outreach strategy)의 부재로 인하여 교회성장의 장벽을 넘기 힘든 교회이다. 이 교회는「50명 장벽」(50 membership barrier)에 직면하여 넘어야 할 교회이다.

2) 그룹 교회 (The Single-cell Group Church: 30-80)

「단세포그룹 교회」는 30-80명의 규모로, 교인들이 거의 서로가 낯을 알고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규모의 교회를 말한다. 매주일 같은 의자에 끼리끼리 앉아서 재미있게 한담을 나누며 즐거워 하지만, 외부에서 처음 교회를 찾은 새 신자들에게는 생소하고 거부반응까지 일으키게 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 규모의 교회는 80명을 넘어 100명까지는 성장이 수월하나 100명이 넘어서기가 힘든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교회에는「100명 장벽」의 신드롬(syndrome)을 앓기 쉽다. 이런 규모의 교회(50명이하)가 영국에는 61%, 미국에는 50% 이상이며, 한국에는 70-80%가 된다고 한다. 심지어는 90% 이상이 소형교회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소형교회는 100-150명 미만이 되는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다.

3) 소형 교회 (The Small Church: 80-150)

「소형교회」는 80-150명의 규모로서, 담임목사 한 사람과 전도사, 교육전도사, 지휘자, 반주자, 그리고 대부분이 교회의 평신도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교회를 말한다. 물론 오늘날 한국교회는 경제적인 성장에 힘입어「소형교회」들도 부목사를 비롯하여 더 많은 유급 사역자들을 채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소형교회」는「대형교회」의 축소판은 아니다.「소형교회」의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소형교회」는 개교인들의 위안과 안정과 친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소형교회」내에서는 이방인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것이「소형교회」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교회성장을 위한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소형교회」의 친교그룹 활동이 신앙적인 차원을 넘어서 세속적 차원으로 발전될 수 있는 약점도 가지고 있다. 서로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는「200명 장벽」(200 membership barrier)에 직면하게 될 교회이다.
4) 중형 교회 (The Mid-Size Church: 150-400)

「중형교회」는 150-300명선의 교회를 말한다. 담임목사와 부목사, 강도사, 전도사, 교육전도사, 그리고 유급 사역자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로「400명 장벽」에 직면해 있는 교회이다. 각 부서별로 전문적인 사역자들을 채용하는 교회로「대형교회」조직의 가장 기초적인 상태에 있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벌써 교인들 상호간에는 물론, 담임목사와의 친밀한 교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교역자 한 사람이 돌 볼 수 있는 교인들의 한계가 150명이라는 사실에 비하면, 이 중형교회는 두 사람 이상의 교역자가 돌보아야 할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목사를 채용하고 있다.

5) 대형 교회 (The Large Church: 400-800)

「대형교회」는 400-800명의 교회를 말하는데, 사실상 한국교회에서는 대개 1,000여명이 넘어가야 대형교회라고 부르는 실정이다. 요사이 와서는 수천명 이상이 되어야「대형교회」라는 말을 듣는다. 과거와는 달리 한국에는 이와 같은 교회가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도 전체 교회의 1%미만에 불과하다. 이 규모에서 부터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직원들로 구성된다. 몇명의 부목사와 전도사들, 각 부서별로 전문가들에 의하여 분업화된 분담목회(shared ministry)의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교회에는 훌륭한 예배분위기와 좋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800명 장벽」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이다. 칼 죠지(Carl F. George)는 교회가「800명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리더쉽(leadership)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기서부터 목사의 리더쉽이 특히 필요해진다.
6) 수퍼 교회 (The Super Church: 800-2,000)
「수퍼교회」는 교인수 800-2,000명의 교회로,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여러명의 부목사들과 전도사들, 그리고 많은 유급 직원들이 뛰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는 대략 전체 교회의 0.4%가량 된다고 한다. 이러한 교회는 초대형교회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다.「수퍼쳐치」는 특히 자체에서 전문화된 인력을 개발하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전문 사역자들을 훈련하여 교회운영의 분야별로 위임하게 된다. 특히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기획실 같은 기관을 설치하여 교회자체의 프로그램 관리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이 교회는「1,000명과 2,000명 장벽」을 돌파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수퍼교회는 분할된 사역과 일반 직원들을 가지고 있다. 일반 직원들은 연령별 혹은 생활영역별 사역(캠퍼스, 특별 세미나등)의 인도, 그리고 평신도 자원봉사자 활동의 지도, 감독 등을 수행한다. 이와 같은 수퍼교회를 관리하기 위해서 좀더 협력적인 사역관리가 요구된다.

7) 메가 교회 (The Mega Church: 2,000-10,000)

「메가쳐치」는 2,000-10,000명 규모의 교회로 대단히 큰 교회로서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그리 흔치 않은 교회이다.「메가교회」는 전문가들에 의해서 지원을 받고있는 전체 사역팀들에 의하여 협동 운영되는 모체교회(matrix-church)이다. 이 사역팀들은 연령별이나 필요에 의하여 구성된 사역에 대한 목회적, 조직적 감독을 한다. 그리고 전문 사역자들은 음악이나, 기독교 교육이나 새 신자 전도를 위한 전도훈련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을 개발, 지도해준다. 메가교회에서는 수많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직원같이 일하며, 그들이 운영하는 교회 그룹들은 각각 하나의「위성교회」(衛星敎會: saterlite church)와 같다. 이러한 메가쳐치(mega church)에서 충분한 시설(facility)과, 리더쉽(leadership)과, 협력의 기회(corporate opportunity) 등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하여 중대한 이슈가 된다.

8) 메타 교회 (The Meta Church: 10,000-UP)

「메타교회」(Meta-Church)는 10,0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서, 미국에서는 손가락에 꼽힐 정도이고, 한국에서도 사실상 그리 많지 않은 교회이다. 물론, 한국에는 비공식 통계로는 세계에서 메타교가 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그 규모도 10,000명선에서 부터 20,000명, 30,000명, 50,000명, 600,000명선이라는 기하학적인 숫자로 다양하게 집계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메타쳐지」의 모델은 그 성장규모에 있어서 제한을 두지않고 있다. 메타쳐치의 조직구조는 최대 수자의 신자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수 많은 사역자들을 가지고 있다. 훈련받은 지도자들은 온 교회의 모든 교인들을 감독하고 돌보기 위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발견하고 사용한다. 메타쳐치의 개념과 이름을 만들어낸 칼 죠지에 의하면, 메타쳐치에는 6종류의 미팅들이 있다고 한다. 즉   새 신자를 위한 시범행사(the high presentation events),   축제행사 혹은 예배(the celebration ot worship events,   리더쉽 계발과 감독회의들(the leadership cultivation and supervision meetings,   리허설(the rehearsals),   봉사의 모임(the serving meetings,   세포그룹조직(the cell group systems) 등이다.

(2) 교회의 유형과 성격 (Types and Charateristics)

목회자가 자기 교회의 유형에 따른 교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교회성장의 전략을 세우는데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기 교회가 어떠한 유형의 교회로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그 특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략을 세우고 추진할 때에, 예기치 않은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기교회가 완전히 고전적(古典的)인 스타일인데 갑작스러운 변화를 주면, 상당한 저항이 일어나서 교회가 흔들리게 되는 경우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전근대적인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역시 교회는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유형과 그 성격은 매우 다양하다. 종족(種族)에 따라서 문화(文化)에 따라서, 그리고 전통(傳統)에 따라서 교회의 유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앤더슨(Leith Anderson)이 분석한 유형을 소개하려고 한다.

1) 보수성 교회 (Resistant Church)

「보수성 교회」(保守性敎會)는 보수주의(conservation)의 가장 순수한 정의인 "보수적"(保守的)으로서, 모든 것에 있어서 그들의 방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교회는 과격 근본주의로부터 과격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이나 그들의 신학적인 범위를 따라 적용할 수 있다. 구 아미쉬(Old Amish)와, 그리고 구 로마 캐톨릭(Old Roman Catholic)은 저항성을 가지고 있는데, 구 아미쉬는 그들의 생활방법이 변화를 주는 현대 생활방식 보다 우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그들은 현대의 의상, 관습, 전기, 교육 등에 저항해 왔으며, 놀랍게도 그들은 성공적이었다. 사실, 그들의 저항주의(Resistantism)를 비지니스(business)에까지 돌리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캐톨릭주의(Catholicism)는 독신 사제, 신조, 절대 성직자 통치를 고수하고 변화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저항성이 모두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의 가치관과 행동강령중에 많은 부분이 구시대의 방식보다 더 좋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다.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용기와 끈기와 안전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할 때에도 홀로 서기위해 비상한 공인의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보수교회」는 거의 복음주의교회이다. 이런 교회의 성장을 위한 일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의 에너지와 자원이 저항에 의해서 소모되고, 전도를 위해서 이용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변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생각과 교제와 돈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교회는 쓸떼 없는데 에너지를 낭비하며, 교회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수성의 교회는 시대와 사람들에 따라 진리가 변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으나 교회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하여 문화적인 방법론은 부단히 개발하는 개혁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2) 향수성 교회 (Yesterday's Church)

「향수성 교회」(Yesterday's Church)는 변화에 저항하기 보다는, 어제의 향수(鄕愁: nostalgia)에 젖어 있는 교회를 말한다. 지난날의 교회생활에 향수를 느끼는 교회이다. 어제로 돌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지난날 "황금시대"(Golden Age)에 관한 추억에 잠겨 있고, 현재 변화의 막간이 결론지어진 후에, 다시 돌아가기를 기도하는 교회이다. 건물은 옛날 황금시절의 스타일에 맞게 재건하고, 음악, 예식, 설교제목, 성경번역, 문학, 사회활동, 그리고 관리에 이르기까지 가능한한 예날에 근접하도록 한다. 이런 교회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이 시대착오라고 알려질 때에 교단을 더욱 증진시키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들 중에서 20세기 신약교회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전혀 악기까지도 사용하지 않는「그리스도 교회」(the Church of Christ)가 있다. 어떤 캐톨릭 교회들에서는 아직도 라틴어(Litin) 사용과 트렌트 미사(Tridentine Mass)를 드리고 있다.
「향수성 교회」의 잇점은, 적극적인 면에서 변화가 느리기 때문에, 위험이 별로 없는 반면에, 중대한 약점으로는 교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의견차이의 불협화음이다. 사실 지난 날의  황금기가 내일에 오지도, 있을 수도 없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기독교는 지나가버린 "향수"(nostalgia)위에 건설할 수 없는 것이다. 이「향수성 교  회」는 사실상 전근대적인 말기병(terminal disease)에 죽어갈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항상 지난 날의 향수(nostalgia)에 젖어만 있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예루살렘을 생각하고 버드나무에 수금(竪琴)을 걸고 울었으나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시 137:1-6).

3) 복고성 교회 (Try Harder Church)

「복고성 교회」(Try Harder Church)는 성실하게 현재에 관계하기를 원한다. 세상을 얻기를 바라고, 저항하기를 원치 않는다. 오늘 보다도 어제를 더 선호하는 것같이 보이는 특별한 행동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더욱 효과적인 길로 가게하기 위한 욕망에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복고성 교 회」(復古性敎會)는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하기보다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헌신하기를 바란다. 간혹 이러한 방법의 논리는 이전에 성공했던 것들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만일, 심방이나, 주일학교 콘테스트, 전임자회의들이 성공했다면, 이 교회는 더욱 심방에 주력하고, 좀더 성대한 콘테스트를 치르고, 더욱 선구자적인 선생들을 얻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복고성 교회」의 방법이 반생산적(反生産的)이라는 사실이다. 그 방법은 아파트 지역과 어떤 공동체에서 금지될 수도 있는 방법이다.
미국이나 한국에 있어서 주일학교 제도가 당시 유행했던 시대에는 교회의 출석율을 증가시키거나 새 신자들을 전도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으나, 오늘날 주일학교 프로그램은 그 당시만큼 중요시 하지 않고 있다. 요즈음 중요시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시대와 지역과 문화에 맞는 프로그램들이다. 즉 주일예배를 비롯하여 관심있는 프로그램들, 제자훈련을 비롯한 교회에 필요한 소그룹 프로그램들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는 시대에 걸맞는, 성서적인 방법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진행시켜야 한다. 전근대적인 방법(前近代的方法)은 개발되어야 한다.

4) 양도성 교회 (The Surrender Church)

「양도성 교회」(The Surrender Church)는 앞에서 언급한 어떤 교회들보다도 현실적이고, 통찰력이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자신과 현대사회와의 관련성(relevance)을 이해하고 있는 교회이다. 현실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로, 교회가 변할 수 없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변화하지 않거나, 변화에 의하여 간단히 처분한다. 미국에 있는 소수민족 교회들은 이「현실성 교회」들을 주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는 현실에 적응하여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합병하기도 하고 이양하기도 한다. 현실적 변화에 따라 처리하는 교회를 말한다. 미국에서는 이민교회에서의 세대변화, 즉 소수민족내의 제1세대(first generation)와 제2세대(second generation)간의 변화나, 인종분포의 변화, 문화적 변화 등에 의하여 생긴다.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여건에 의하여 교회를 양도하거나, 합병하거나, 이양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양도」(讓渡: surrender)는 사회학적인 비본질성일 때이 적합하거나 필요하지만, 기독교의 본질이 포기(抛棄)되거나 수정(修正)될 때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양도적인 방법보다는 최선의 목회방법을 통하여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좋다.

5) 기업형 교회 (The Enterpreneurial Church)

「기업형 교회」(The Enterpreneurial Church)는 현대 산업사회의 출현에 따른 추세로, 기업운영방법을 도입해서 교회성장에 기여하는 교회들이다. 이 교회들은 일찍이 시대에 부응해서 능력있는 카리스마 리더들에 의하여 설립된 파라쳐지(para-church) 기관들이 있다. 그 후에 교단에서도 이런 형태의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미국에서 대표적인 교회가 수정교회(The Crystal Cathedral)와, 독립교회인 윌로우크릭 공동체교회(The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가 있다. 수정교회는 미국 개혁교회 교단(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에 소속되어 있는 교회로, 개척목사인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는 기업성을 이용, 불신자들에게 과감하게 파고드는 전략으로 처음에는, 노천극장(drive-in theather)을 이용했고, 텔레비젼도 이용했다. 윌로우교회 빌 하이벨즈(Bill Hybels) 목사는 불신자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접근하여, 유도하는 적극적인 방법(seeker-driven strategy)으로 불신자를 공략하였다. 슐러와 하이벨즈는「기업형 교회」모델을 다른 교역자들에게 가르치는 컨퍼런스들(conferences)을 실시 하고 있다. 이 교회는 처음에 동기를 부여받은 한 두 사람의 리더가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해서 설립하게 된다. 이와 같이「기업형 교회」의 리더는 시장감각(market-sensitive)이 있고, 텔레마겥팅(telemarketing)과, 광고(advertising), 또 하이텍 콤뮤니케이숀(high-tech communication)과 같은 최신의 방법을 사용하여 현대적 유행과 필요을 충족시키려고 시도한다. 많은 교단에서도 이같은「기업형 교회」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지만, 이 교회들은 보통 교단에 가입하지 않는다.「기업형 교회」교회들에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전통성이 부족함으로, 교리나 의식 등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다. 둘째로 전통성의 부족과 신학훈련의 부재, 교단적 책임등으로 인하여 교리적인 이단성과 부도덕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셋째로, 교인중에 아무나 교회를 리드할 수 있게 되어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어질 위험성이 있다.

6) 갱신성 교회 (Renewing Church)

「갱신 교회」(Renewing Church)는 확실하고 안정되며, 그리고 환경 여건에 대한 지속적인 연  구로 그 안정에 편승하기를 기뻐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전통과 변화 모두에게 가치를 부여하며, 신학과 사회학을 알려고 노력하며, 사람들에 대하여 정통적이며 실제적인 것에 충실하려고 한다. 교회안에는 지속적인 갱신이 있다. 거기에는 만족이나 완료가 없다. 규칙적인 평가와 수정이 가능하도록 체계화되어 있고,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게 되어있다. 필요하다면, 미래의 변화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변화의 목적을 위한 변화도 환영한다.「갱신성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귀와 마켙을 향한 귀를 가지고 있다. 이 교회는 가장 좋은 대안들을 약속하는 반면에 가장 어려운 것도 유지하고 있다. 옛 것과 새 것 사이에 항상 긴장이 있으나, 이러한 교회는 그 긴장을 필요한 것으로 받아드린다. 구식으로 돌아가거나 양도하거나 혹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용이하다. 그 대신 갱신성 교회(Renewal church)는 그 전략(strategy)을 목적을 알고 성취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아마도「개혁 교회」(Reformed church)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언급한 여러 종류의 교회들중에 가장 이상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5. 목회자의 목회 스타일 (Pastoral Styles)

목회자가 자기목회 스타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목회자가 자기의 목회 스타일을 모르고 목회를 하게 된다면, 목회의 방향과 방법에 혼선을 가져와서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기의 적성에 맞는 목회 스타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하여 목회전략을 세워 나가야 한다. 목회 스타일은 세분해서 생각한다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나누어 볼때에,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는「목자형 목회」(Sheepherder style)이고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목장경영자형 목회」(Rancher style)이다.
예수님께서는 경우에 따라 이 두 가지 목회사역을 수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도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채용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때로는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이름을 불러가시면서 돌보시며(요 10:3), 제자들에게도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양을 일일이 돌보라고  분부하시기도 하셨다(요 21;16). 우선 목회자는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양 한 마리를 천하보다도 귀하게 생각하는 애인사상(愛人思想, man-loving mentality)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목회자라면 양 한 마리를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주님의 사랑을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성의껏 돌보는 일이 목자(Shepherder)의 사명이라면, 목회자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껏 돌보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목자 스타일로만 사역하신 것은 아니다. 열두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사역을 분담케 하심으로 경영자 스타일의 목회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목자장(Chief Sheperderd)으로 표현하고 있는데(벧전 5:4), 이는 예수님께서 작은 목자(小牧者)들을 거느리고 계신다는 의미로, 예수님 당시에는 열두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셨고,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수 많은 주의 종들을 거느리시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지도자(Spititual Leader)로서 항상 종들을 거느리시고 지도하고 계신다.
한편, 지상교회(地上敎會)의 조직에 따라 교회가 대형화되면, 한 사람의 목회자가 혼자 교회를 돌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 부목사들이 필요하게 되고, 그러므로 담임목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교인들을 부목사들에게 맡겨서 부목사들로 하여금「목자 스타일」(sheepherder style)로 교인들을 정성스럽게 돌보게 하고, 목회자는 부목사들의 관리와 목회의 경영에 주력하게 되는데, 이 "경영식의 목회 스타일"을 목장 경영자 스타일(Rancher style)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감독(overseer: 행 20:28; 딤전 3:2; 딛 1:7), 지도자(leader: 히 13:7; 사 55:4), "지도력의 은사들"(the gifts of leadership: 롬 12:8), "행정의 은사들"(gifts of administration: 고전 12:28)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building up)는 의미로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하는 일"(엡 4:12-13; 29; 롬 15:2; 고전 3:1-15; 14:12; 고후 10:8; 13:10; 골 2:7; 살전 5:11), 등의 용어와 내용들은 목회자의 임무로, 양들을「경영식」(經營式)으로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1) 목자형 목  회   스타일 (Sheepherder Style)

미국은 물론 한국교회의 목회 스타일 역시 90-95%가「목자형 목회 스타일」로 목회의 모든 분야를 목사가 짊어지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정성스럽게 돌보는 실정이다.「목자-목회」의 멘탈리티(sheepherder-ministry mentality)는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까지 팽배해 있어서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혼자만 "충성된 종"인양 그 무거운 짐을 혼자 지고 과로하다가 쓰러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부목사가 심방가서 기도해주고 축복해주는 것은 담임목사가 축복해주는 것에 반가치(半價値: half value) 밖에 안되는 것으로 오해해서 기필고 담임목사만 모시려고 하는데, 이것은 전혀 비성서적이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울 때에 그 값어치에 따라 등급을 매겨서 세우신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평신도들은 물론 목사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목사에 따라 각각 주신 은사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달란트 받은 종이라고 해서 다섯 달란드 받은 종보다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도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똑 같은 칭찬을 하시고 큰 것으로 축복하셨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 25:21; 23) 하고 두 종에게 똑 같은 말씀으로 칭찬하셨다. 사실 알고 보면, 하늘서의 상급(賞給)을 결정하는 데는 양적인 평가(quantitative valu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 평가(qualitative value)에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오해를 수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모든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멘탈리티로, 더부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될 줄 안다. "목사위에 목사 없고 목사밑에 목사 없다." 물론 이는 세상 사람들의 인류평등 구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목사의 "개인"(person)은 인류평등 주의(human equalitarianism) 사상에 입각해서 거론할 수 있지만 "목사직"(pastorship)은 전적으로 신탁(神託: oracle, God-given commission)의 차원에서 거론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 소상히 돌보는 것은 기본적이며 중요한 사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할 수 있는 사역방법은 아니다. 교인이 많아질 때에는 상대적으로 팀사역(team ministry)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부목사, 특히 심방목사들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하고, 교인들은 부목사가 담임목사와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자기들을 돌보는 목회자라는 사실을 한시라고 잊어서는 안된다. 이 문제는 특히 한국교회에서 개혁이 시급한 부분이라 하겠다. 물론, 규모가 작은 교회일수록 목자형(sheepherder style)의 목회를 하게 되는데 칼 죠지는 그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돌봄 우선 (Primary Caregiving)

「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는 혼자서 주로 전교회를 위하여 준비하고 뛰게 된다. 교인들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에는 언제나 출동할 준비를 하고 비상대기해야 한다. 갑작스럽게 돌보아야 할 일이 생겼을 때에,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한 사역자들이 누구인지 자문할 때, 아마도 엘리야와 같이(왕상 19:14), 나 혼자만 남았고, 오직 나뿐이라고 느낄 것이다. 홀로 정신없이 뛰다가 엘리야와 같이 번아웃(burn-out)되기 쉽다. 교인들을 돌보는 일, 특히 심방(home-visitation)에 주력하는 스타일이「목자형 목회자」스타일이다. 그것도 다른 사역자들이 아닌 자기가 손수 심방하며 돌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2) 중요성의 과대평가 (Overestimated Significance)

「목자형 목회자」(Sheeperder)들은 우선순위 문제에 있어서 다분히 내향적(內向的)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위기에 관여하고, 병원으로부터의 전화에, 그리고 다른 사역행위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목회자들이 효과적인 목회를 위해 필수적인 보조역할들을 볼 수 없게 방해한다. 진정한 돌봄은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후속으로 계속해서 돌보는 것이다. 목회자가 당장 교인을 돌보는 일만 중요시하면, 더 중요한 후속사역에 지장을 초래하기 쉽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근시안적으로만 살펴보아서는 안된다.

3) 과도한 기대 (Expectation Driveness)

「목자형 목회자」(Sheeperder)들은 어디에든지 모든 사람들의 기대들에 응하려고 한다. 그들은 어느 회의(會議)든지 빠지지 않고 참석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나의 교인들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내가 잘 해주고 있는가?" 등은 그들이 부단히 추진하는 동기부여이다. 결과적으로, 목사들이 그 진행을 조율하기보다 교인들이 목사들의 진행 일정을 잡아주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교인들에게 과도하게 기대를 주는 스타일이다.

4) 목회자 이용성 (Availability)

「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들은 그들이 어떻게 하면 교회에 좀더 충실할까 하는 생각으로 차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은 그들을 필요로 하면 언제나, 무엇이나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교회에 알린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문제를 철저하게 잘 조절하고 있는 동역자를 알고 있다. 그는 세상없어도 밤 열시반만 되면 전화줄도 빼놓고 취침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당시 필자의 입장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러면 교인들에게 응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분수도 없이 물불을 모르고 뛰다가 단명하면 주의일을 많이 못하니까 나는 앞으로 주의 일을 많이 하려고 그런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다. 매우 지혜로운 처신이라 생각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인들을 돕고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이지 교인들에게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경우에 따라 목사가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용되어 시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도 고지식하게 자신의 건강은 전혀 개의치 않고 교인들이 하나님의 양이니 어떠한 희생이라도 해야 한다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수종들다가 큰 어려움에 빠진 적이 있는데, 목회자는 좀 지혜로워야 할 것이다.

5) 목회의 연기화 (Performance)

「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들은 거의 그들이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꼭 필요한자들이 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이 실제로 그런 생각들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행동이 그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병원 환자들에게, 돌아올터이니 기다리며 지켜보라고 확신을 주려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나의 목회를 지켜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정규적으로 교인들이 그들의 설교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그리고 또 다른 방식을 좋아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목회연기(?)가 반응이 좋은지 나쁜지에 관심을 갖는다. 자기가 인기있는 목회연기(牧會演技)의 배우(talent)가 되려는 의도라 하겠다. 이 문제는 어떤 면에서, 목회자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영광을 받아야 할 예수님을 젖혀놓고 자기가 받으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자기의 목회활동, 특히 설교에 있어서 신경을 쓰며 교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6) 임무의 즐거움 (Role Comfort)

「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들은 그들의 시간과 체력에 부치도록 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비젼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피곤하지만 행복하다.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다니 감사할 뿐이다"라고 외친다. 부인이 "나에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요? 교회안에서 조차 똑 같은 봉사의 즐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교인들은 어떻케 하느냐?"고 말할 때에도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부단히 활동하는 중에 그 일이 효과가 있든지 없든지간에 일의 즐거움을 경험한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하는 그러한 생활에 즐거워한다.

7) 채용능력 부족 (Poor Delegating Ability)

「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들은 파견할 때에, 결과가 아니라 방법을 중요시한다. 목회자가 관리자의 역할(manager's role)에 실패하게 되면, 목회상 수행에 문제가 생긴다. 목회자가 사역자들을 잘 선정하고 훈련하여 파견할 때에, 목회활동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된다. 만일「목자형 목회자」가 관리상으로 은사가 있는 사람을 채용한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들에게 대한 충고자로서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직분을 주게 된다: "만일 당신이 나라면, 내가 하는 것을 어떻게 충고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이 듣는 충고는 보통「목자형 목회자」의 무해함으로 유지된다. 그들은 사람들을 채용해서 파견하고 일을 시키고 관리하는 일에 부족하다.

8) 계획의 미진 (Poor Planning)

「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들이 계획을 세운다면, 실행에 따라 절차를 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종 하나의 활동 싸이클(cycle)에 사로잡힌다. "내가 다시 여기 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할려고 하는가?" 그들은 그들의 전체적인 목표를 좀 더 충분히 혹은 좀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과정들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부실한 계획이 별로 도움이 못된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가 계획하는 데 실패하면, 목적에 실패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계획에 따라서 성공. 실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목자형 목회자」는 목회를 계획하는 일에 매우 약한 것이 흠이다. 근시안적이고 소심한 편이라,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주먹구구식으로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교회에 대한 원대한 비젼이 없기 때문에 교회성장을 위한 "큰 그림"(big picture)을 그리지를 못하는 흠이다. 

9) 개인주의 (Individualism)

「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는 교회가 개인 멤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작업능력의 전망등을 통하여 목회사역을 비젼화하기 보다는, 목회란 특수 인물들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타협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목회를 폭넓은 경영자 스타일로 보지 않고, 개인적인 관계성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비젼화(visionization)에 약하다. 그룹(group)이나 팀(team)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일하는 편을 더 좋아한다.

10) 변화 조류에 무지 (Ignorance of trends)

「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는 현재경험 속에 산다. 만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더욱 예배경향, 헌금패턴, 혹은 교회목표의 달성 등에 대한 숙고(reflection)에서라기 보다, 단지 지난 몇 시간안에 그들이 일치를 보지 못한 것이 있는지로부터 유도해낸다. 그들은 필요한 행동과 예상을 쉽게 관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앉아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면서 지켜보나, 양들과 코를 맞대고 사역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중요성을 모른다. 대부분의「목자형 목회자」의 가장 큰 맹점(blind spot)은 성장역사와 출석동향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것이다.「목자형 목회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하시는 사업이다. 그리고 축복을 선택해도 좋고 안해고 상관없다"고 쉽게 말하는 것을 안다. 예수께서도 이 같은 일들을 말하지 아니하셨느가? 즉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그러나「목자형 목회자」들은 측정이 가능한 조직의 실체들보다 볼 수 없는 영적 실체들를 더욱 이용한다. 외향성인 것보다도 내향성이 강하다.

(2) 목장 경영자형 목회 스타일 (Rancher Style)

「경영자형 목회자」(Rancher)는「목자형 목회자」(Sheepherder)와는 반대로 개인의 필요(needs)나 전문적인 요구(needs)보다 조직의 요구에 더욱 주의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므로「경영자형 목회자」들은 항상 더욱 크고, 더욱 넓은 미래의 목회세계를 주시한다. 시대에 따라 문화적인 장점들을 백분 이용하여 목회를 비젼을 가지고 전개해나간다. 그들은 이러한 면에서 목장을 경여하는 경영자의 특성을 나타낸다. 목장경영은 소목자들을 많이 두고 하는 것이다. 이 목장경영자의 특색은 그들의 사역규모가 광범위하고 크다는 것이다.

1) 빅 픽쳐의 강조 (Emphasis on the Big Picture)

「경영자형 목회자」(Rancher)는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거나, 그들의 프로그램들에 무관심한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경영자들은 사람들의 필요(needs)에 관하여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반면에 아흔 아홉의 관심에 대하여 포기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장경영이 전체 양떼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목장경영자들은 양무리들이 목회적 돌봄을 비성직자의 시스템을 통하여 상호 나누는 것을 확인한다. 상호 양육을 위한 전형적인 모임은 소그룹 방법이다. 소그룹이나 팀조직을 통해서 광대한 목장을 운영해나간다. 그들은 큰 그림(big picture)을 그림으로써 보다 더 광대한 목장으로 꿈을 키운다.

2) 감독능력 이용 (Take-Charge Competence)

「경영자형 목회자」(Rancher)들은 밴드 지휘자(director)가 음악의 템포(tempo)를 주는 것과 같이 기대들(expectations)을 많이 준다. 이 특징은 특히 변화(change)나 대결(confrontation)의 영역에서 돋보인다. 그는 강렬한 훈련시간을 통하여 위원회(board)로 하여금 그 위원회의 사람들의 영성과 리더쉽 기술(leadership skill)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어떻게 감독해야 하는지를 안다. 그래서 그들이 위원회에서의 그들의 시간을 마칠 때, 그 점으로부터 좀더 쓸모있는 사역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밤새워서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목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선(improvement)이란, 목사가 통제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는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가 수하 사역자(手下使役者)들을 어떻게 감독하고 통제하며 다루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목회자는 감독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목회에 효과적이다.

3) 상호사역의 기대 (One-another Ministry Expectation)

「경영자형 목회자」(Rancher)들은 교회의 멤버들이 그들 가운데서 서로 돌보아 주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바로 이것이 그들이 하는 방법이라고 이해하는 식으로 이 표준을 제시할 것이다. 교회들은 부분적으로 의도된 사회들이면서 대부분 불문률과 기대(企待)의 구조에 의해서 지배되는 민중 문화(folk culture)다. 그러므로「경영형 목회자」들은 평신도들 사이에 서로 돌보는 사역을 정착시키도록 지도한다. 이 목회 스타일은 목회자가 소목회자(小牧會者)들로 하여금 상호 협력하며 교인들을 서로 사랑하고 돌 볼 수 있게 지도할 수 있도록 감독한다. 목회자 밑에 많은 소목자들을 두고 목회자는 그 소목자들을 관리 감독하며, 그 소목자들은 각각 그의 양(교인)들을 돌봄과 동시에 교인들 역시 서로 돌보게 하는 시스템이다.

   4) 그룹중심 사역 (Group Focus)

「경영자형 목회자」(Rancher)들은 교회를 객체들, 그룹들, 그리고 사역팀들의 견지에서 인식한다. 모임들은 지도자를 요청하게 되고, 팀들은 감독들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개념을 파악할 때에,「경영자형 목회자」들은 그들의 사역들을 개개인들과의 관계성에서가 아니라, 숙달된 대상들과 감독받는 직원들로서 기대한다. 그들은 대형 건설공사의「현장 소장」과 같이 행동하면서, "이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두 팀과, 저 일을 위해서 세 그룹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경영자형 목회자」는 사람들을 보낼 때에-그들은 계속적인 유지와 양육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씩 하나씩 보내지 않고-그들이 스스로 양육(nuture)과 유지와 사기충천(morale)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팀별로 파송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교회를 그룹생활의 차원에서 본다. 그들이 행정상으로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단순히 그들의 조언자들(advisors)로서 보다 프로그램 편성자(program organizer)들로 채용한다.

5) 감독의 융통성 (Flexible Supervision)

「경영자형 목회자」(Rancher)들은 일을 위임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감독한다. 효과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위임 스타일로 하여금 즐겨 할당받은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채워줌으로 충분한 융통성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먼저 필요한 것은 기업의 인격적 대우(entrepreneurial personalities) 이다. 그 외에 그 사역으로부터 얻어지는 정신적 물질적 보상의 문제이다. 영육간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함께 풀어나가도록 해야 한다. 원칙만 따져서 감독을 수행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감독은 또한 포지션(position)의 변동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의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6) 성과의 목적 (Outcome Objectives)

「경영자형 목회자」들은 어떤 것이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언제 완성될 것 같이 보이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그들이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하는 일에는, 윤리적으로, 법적으로 그 방법에 있어서 자유롭다.「경영자형 목회자」에게 있어서 "나의 아이디어"인 것은 그 방법의 수용성에 대하여 선제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경영자형 목회자」들이 그들의 직책에 대한 적절한 은사들을 가진 사람들을 평가한다.「목자형 목회자」가 조역과 접대의 은사들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얻는 위안을 평가하는 반면에,「경영자형 목회자」는 평신도의 은사가 하나님께서 행하기를 원하시는 여러가지들을 하는데 폭넓게 충분할 것이라는 사실을 평가한다. 다시 말하면,「목자형 목회자」들은 자기가 목회하는 양들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사역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위로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경영형 목회자」들은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평신도 사역자들이 그들 각자의 은사들을 사용하게하여 얻어지는 성과에 관심을 둔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분히 사업적이며, 기업적인 성격이 있다고 본다.

7) 원대한 청  사  진  에 (Large-Picture Focus)

「경영자형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의하여 그들의 봉사에 대한 요구를 스크린(screen)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해야 되는 것이며, 또 누구에 의해서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사역의 기회가 중요하다면, 그리고 결국 자료들이 고갈되었을 때,「경영형 목회자」가 관여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뛰어들기 전에, 주저하며,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아마 그것은 거의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한다. 사역중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스타일이 어떻튼 간에, 교회를 미래로 인도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놓칠까 두려워하여 달아나는 기회와 씨름을 하게 된다. 그러나「경영형 목회자」의 생애에, 그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하여, 전체적인 목장경영이 원만하게 운영되도록 에너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8) 역할의 창조 (Role Creation)

「경영형 목회자」들은 또한 역할들을 창조하며, 그 일들을 할당해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을 파견함으로써 그 역할들을 완수하도록 한다. 그들은 일의 숙련성이 보조가 필요한 일에 얼마나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처음하므로 그 일의 진행이 불안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몇 번 일의 경험이 있는 사람보다 다른 일에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견습생이 일이 서툴러서 불안하게 되면, 그 일은 몇 번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그는 견습하거나 그 보다 더 초보적인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숙련을 쌓도록 지도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경영형 목회자」들은 직접 일선에서 일하며 뛰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조 사역자들을 지도, 감독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사역자들이 아직 부족해서 당황할 때에, 그들의 역할을 창조하고, 배정하며, 지도 감독하는 일에 관심을 쏟는다.

9) 독립성의 앙  양   (Non-Dependency)

「경영형 목회자」의 추진력있는 동기부여는 목사없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가이다. 경영자식 해결방법은 사람들의 재능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수고하십니다. 당신은 아주 훌륭히 일을 하고 계십니다!"라고.....어떤 사람이「경영형 목회자」의 명백한 자제력 상실에 도전할 때에도, 그는 전혀 방어하거나 위협을 느끼지도 않는다.「경영형 목회자」는 유모(乳母)의 스케쥴에 따라 살기를 거부한다. 그는 스스로 기도하며 교회가 스스로 올라가야 할 다음 언덕을 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경영형 목회자」들은 누구에게 의존하기 보다 자신이 가진 은사를 개발하고 다른 사람들이나 일들로부터 배워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한다. 그는 영적으로 스스로 먹고 성장하기를 원한다.

10) 관리기술 활용 (Managerical Skills)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교회관리 기술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관리실행능력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강단목회자(pulpit minister)들은 말이 분명하다. 그들은 음성을 훌륭하게 내는데 전문가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완벽하게 나타나는데 뛰어나다. 그것이 사실일까?「경영형 목회자」들은 계획과 기도를 위하여 고독한 시간을 갖는다. 그들은 모든 것이 구두(口頭)로 알려지는 상황에서 하는 사역까지도 형식(form)과 활동기록(written activity) 등을 계획하고 준비한다. 그들은 필요들(needs)들을 감지하고, 문제들을 정리하며 풀어나가는 기술들을 개발한다.「경영자형 목회자」들은 목회 전반적인 관리를 위한 기도와 계획을 끊임없이 수행해 나간다.

(3) 교회성장과 목장경영식 목회

교회가 우선 양적으로 성장하려면「경영식 목회」방법으로 전환하는 것이 좋다.「목자형의 목회」방법은 질적 성장에 유효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양적으로 성장하는데는 제한이 있다. 왜냐하면,「목자형의 목회」방법은 교인들을 일대일로 돌보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비젼과 원대한 계획(big picture or large picture)이 없기 때문이다.「경영식 목회」를 하는 어느 목사의 이야기인즉, "책가방 끼고 교인 한 사람씩 찾아 다니면서 어느 천년에 교회를 성장시키겠느냐?"는 반론이다. 대형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무엇보다도 머리속에서부터 대형교회에 관한 "큰 그림" (big picture)를 그릴줄 알아야 한다는 이론이다.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테이블에 앉아서 이「큰 그림」을 머리속으로 그리고 이것을「4차원세계」에서 붙잡아야 한다고 말하며,「4차원 세계」에서 걸렸다 하면, 곧 바로 실천으로 옮긴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교회의 비젼을 실현시키는데 이런 목회방법을「테이블 목회」(table ministry)라고 부른다. 아무튼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려면, 원대한 비젼을 가지고 불신자들과 교회에 들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unchurched people)에게 열심히 전도하는 전략(reach out strategy)를 세워서 실행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로,「목자형 목회」방법을「경영식 목회」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목자형의 목회」방법을 거부하는 뜻은 아니다. 목회 스타일상 양적 성장의 우선전략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목회방법과 시스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목회의 주역이되는 목회자 자신의 문제이다. 과연, 실제적으로「목자형의 목회자」가「경영자형의 목회자」로 변신할 수 있을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과연 목회자가 첫째, 자기의 스타일이 어떠하며, 둘째, 하나님께서 어떠한 목회를 원하고 부르셨는가 하는 것을 체크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검증이 없이는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하여 함부로 언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는 고정된 절대성의 도그마(dogma)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변경 가능성이 있는 요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무엘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워달라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원치않는 일이라고 말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내 왕을 세우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신정정치(神政政治)에 실증을 느꼈는지 인정정치(人政政治)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허락은 하셨지만, 그 후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가?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디서, 어떤 상태로 부르셨든지, 그리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를 참고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하겠다. 그렇다고「목자형 목회자」가「경영형 목회자」로 변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변신의 결심과 각오가 섰다면,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부단한 노력으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섬기고 있는 교회라면 어떤 사이즈라도 경영목회에 관련된 제반문제들을 연구하고 준비해야 한다. 물론, 목회자가 대단한 각오로 시도하려고 할 때에도 교회가 거부해서 성장의 기회를 잃는 경우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소형교회」의 목회자들은 교회가 더 훌륭한 조직과 체계적인 감독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성장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목회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성장하도록, 아니면 성장하지 못하도록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도자인 목회자의 리더쉽이 없다면, 교회의 모든 것이 홀드(hold)될 것이다. 그런데 앞이서 말한대로 목회자나 교회들이 모두「목자형의 역할」에서 안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비단「소형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대형교회에서까지도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애완용 강아지」(lap-dog) 교회의 수준으로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에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서와 관념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파라다임(paradigm)을 작성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효과적인 목회를 원한다면, 앞에서 논한 두 가지 목회방법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충분히 채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감하게 의도하는 목적을 위하여 효과적인 파라다임에 의하여 교회성장의 의지를 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먼저「경영식의 목회훈련」을 철저히 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목장경영자 멘탈리티」(Rancher's mentality)이다. 그러므로 목장경영에 대한 이해와 조예(造詣)가 필요하다.「목장경영식 목회」를 한다고 하면서도「목자형 목회」의 멘탈리티에 빠져있다면 이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목장경영의 멘탈리티란 개인적인 돌봄의 정신이 아니라 리더쉽 정신(leadership spirit)을 말한다. 그러므로 목회자 멘탈리티의 변화가 확실해야 변신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직원들의 리더쉽 훈련(leadership training)이다. 목장경영은 리더쉽이 원동력이 된다. 목자가 양을 치는데 있어서 수많은 양을 혼자서 다룰 수가 없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많은 목동(牧童: shepherd-boy)들과 양견(羊犬: sheep-dog)들을 이용한다. 이와 같이 대형화된 교회에서는「경영식 목회」로 부목사들과 수많은 사역자들을 채용해야 하는데 이들을 다루어야 할 리더쉽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목회자부터 훌륭한 리더쉽 훈련을 받아야 한다. 리더쉽 훈련을 받은 목회자는 가장 가까운데서 지도해야 할 부목사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이하의 모든 사역자들을 자기의 목회방침에 잘 협조할 수 있도록 사역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는 처음부터 조급하게 서둘러서는 안된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평신도 사역자들의 훈련이다. 이는 직원의 리더쉽 훈련과는 별도로 체계적이며 꾸준히 추진해나가야 한다. 물론 교회의 조직과 그 구성 요소에 따라서 모달리티(modality) 방법과 소달리티(sodality) 방법으로 나누어서 적용해야 한다. 처음 개척하는 교회나, 개척교회가 아니라도 목회자가 개척해서 완전히 목회자 페이스(pace)로 되어, 모든 교인들이 목회자의 비젼과 목회방침을 잘 따라주는 교회에서는 모달리티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기성교회에서는 소달리티 방법으로 소그룹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고 리더쉽 훈련이나 평신도 사역자 훈련을 시도하다가는 어려움을 겪는 수도 있다. 여기에서 소그룹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한국교회는 이제「제3물결」의 시대에 살고 있는 고로 과거의 전도운동이나 부흥회가 아니라 소그룹운동을 통하여 교회를 질적으로 성장시키고, 이 질적 성장의 파워로 지속적인 양적 성장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 시대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각 교회의 상황에 맞게 개발하여 실행하지 아니하면, 한국교회 성장의 재도약이 힘들 것이다. 이 부분은 저자의「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2) 다이나믹 목회 방법론

목회자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목회방법을 도입하려고 한다. 목회의 원리(pastoral principle)는 성경에 기초해서 고정되어 있지만 목회방법(pastoral methodology)은 하나의 교회성장 전략에 속한 것이므로, 시대와 지역과 문화적 상황(cultural context)에 따라 다양하게 개발해서 적용할 수 있다. 본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방법, 시대적 상황적인 방법, 특수방법, 카리스마 방법, 기타방법으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교회성장의 전략과 방법은 일률적일 수가 없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목회자나 다른 교회에서 사용해서 성공했다고 해서 그대로 복사해서 시도한다고 똑 같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 전통적 목회 방법

전통적인 목회 방법이란 시대나 문화에 따라서 새로 개발된 목회방법이 아니라 전에서부터 계속해서 유전되어 내려온 목회방식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변화가 별로 없는 목회방법이다.

(1) 강단 설교 (Pulpit and Oratory)

강단설교(講壇說敎)는 목사가 교회 예배당에서 규칙적으로 기성교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강단은 목회자의 전매특허(?)를 받은 신성한 제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곳은 거룩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이곳에서 만나주시는 곳이다.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증거되고, 이에 따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강단이 거룩하고 순복음만이 증거된다면, 생명이 넘쳐 흐르고 권능이 있는 곳이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강단의 권위"를 통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다스린다. 강단에서 비젼이 나오고 목회의 추진력이 되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온다. 즉 강단으로 부터 생명이 흘러나오고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성장의 가능성과 성장의 능력이 나온다.

(2) 설교와 부흥성회 (Preaching and Revivals)

목회자가 설교를 강화하는 방법이다. 설교준비에 주력하여 열심있고 불꽃튀는 설교로 성령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게 함으로써 교회가 불같이 일어나도록 하는 설교중심의 부흥방법이다. 이는 물론 본교회 담임목사의 영력있는 설교가 요구되며, 때로는 외부의 부흥강사를 초청하여 특별부흥성회를 개최할 수도 있다.

(3) 주일학교 (Sunday School)

주일학교 운동은 사실상 한국에서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과거에 교회부흥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주일날 대예배외에, 예배전이나 후에 주일학교를 통하여 교인들의 마음에 좀더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더하게 함으로 교회성장의 불길에 연료를 공급해주는 결과가 된다. 주일학교는 어린이로부터 장년에 이르기 까지 주일날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청장년들의 주일학교는 일부 공중성경공부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유년주일학교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주일학교는 원래 장년을 비롯하여 주일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 모든 기관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4) 구역회 (Home Cell Group Meeting)

구역회(區域會)는 본래 한국교회에서 속회(屬會)라고 해서 감리교의 영향이 큰 것으로 한국교회의 신앙생활 정서(信仰生活情緖)에 적합한 소그룹 운동(home cell group movement)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오래전에서부터 정착되어온 교회활동으로 교회부흥에 기여한바 크다. 교회를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가정을 순회하며 성경공부, 기도, 교제를 등을 통한 미팅으로 구역전도에 효과적인 방법이다.

(5) 축호심방 (Home Visitation)

도시화와 아파트 문화가 성행되고 있는 현재에는 거의 사라지고 있는 형편으로 축호전도는 교인들이 집집마다 방문하며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 아직도 시도하는 교회들이 있으나 과거와 같이 수월하지 않고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때로는 개인의 사생활 침해의 오해로 거부반응을 일켜서 전도인들이 곤욕을 치룰 때도 있다. 

(6) 분과위원회 영입 (Capture by Committee)

이 분과위원회를 통한 방법은 새로 등록한 교인들을 되도록 빨리 교회의 각 분과위원회에 영입시킴으로, 저들의 충성을 통하여 교회 사역이 불일듯 하게 함으로써 교회성장에 기여하자는 의도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래된 교인보다 새로 등록한 교인들이 더욱 열심히 봉사하는 경향도 있고, 되도록 교회봉사의 기회를 많이, 그리고 빨리 부여함으로 교회의 활력을 불어 넣자는 의도이다.

(7) 특정인 전략목표 (Intentional Positioning)

이는 특정한 단체나 그룹들을 공략할 목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전도전략으로, 어떤 그룹이 정해지면 여러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전도운동을 펴나가는 방법이다. 특정화된 인구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전도하는 방법으로 그룹단위 별로 집단전도를 한다. 

(8) 음악센터 (Music Center)

음악은 성서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편 전체가 음악적인 운율로 읊은 신령한 시와 노래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은혜속에서 성령의 영감에 충만해서 노래한 인간 영혼의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영광과 회개와 소원과 애절한 절규가 어우러진 하나의 코라스(chorus) 음악이다. 음악은 인간의 정서에 강하게 작용함으로써 감동을 주며 은혜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교회에서는 이 음악활동들(찬양, 공연, 앙상불)을 통하여 교회성장을 기하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내에 전문기관으로서 음악센터(Music Center)를 설치하고 음악과 예술에 재능이 있는 교인들을 채용하여 은혜분위기를 조성, 교회성장을 시도하는 것이다.     

2. 시대적/상황적 목회 방법

목회의 방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어야 한다. 옛날 예수님 시대의 "샌들문화"(sandal culture)를 오늘날 "자동차 문화" 시대에 억지로 맞추려고 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한국만해도 일일 생활권에 들어왔고 전세계가 "지구촌"이라고 하는 것은 눈부시게 발전한 "교통문화"(traffic dulture)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전국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샌들을 신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야 한다. 이것은 시대적, 문화적 상황이 많이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전근대적인 목회방법을 고수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문화적인 이기(利器)를 백분 활용하여 목회에 성서적이며, 건전하게 적용함으로써 교회성장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문화관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인 지혜를 통하여 개발한 인간의 생활수단과 방식으로 이해하며 이 문화를 우리가 누릴 권한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1) 복수 직원제 (Multiple Staff)

복수직원제는 주로 전도활동을 하는 직원(주로 전도사)들은 심방(visitation)이나 대외 불신자 전도(outreach)에 집중적인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전도에 은사가 있는 다수의 전도사들, 전도인들로 구성된 직원들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특히 이 전도방법에 주력하여 일반 교회에 비하여 전도사, 전도인을 상당히 많이 채용하는 교회들이 있다. 안으로는 교회 교인들을 돌보아 문단속(to close back-door)을 잘하고 밖으로는 불신자 전도(reach out to the unchurched)를 통하여 새 신자들을 많이 영입하는 교회의 성장방법이다.

(2) 주중 주간학교 (Day Schools)

이는 주중 낮시간에 크리스챤 스쿨을 개설하여 교회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불신자나 아직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들의 가교(bridge)의 역할을 하기 위한 기관이다. 주중 크리스챤 학교에서 전도대상자들을 맞나 전도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교회성장을 위한 방법이다. 교회에는 오지 않지만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크리스챤학교를 통하여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학교 프로그램은 그 지역과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준비하면 된다.

(3) 전문강사 초청 (High Visibility Guests)

전문강사는 교계의 유명한 인사를 위시하여, 각계 각층의 유명인들을 초청해서 설교나 강의를 듣게 함으로 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에게 신앙결단의 기회를 주는 방법이다. 요사이 연예인들을 비롯하여 학계와 정치인, 실업인들 등 다양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열어서 교인들도 은혜받고, 불신자들도 초청하여 믿음의 동기를 주기 위하여 사용하는 교회성장의 한 방법이다. 물론, 강사의 선정문제는 교인들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됨으로 신중하게 선정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강사를 초빙하는 집회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서 잘 선정해서 초빙하도록 해야 한다.

(4) 버-스 미니스트리 (Bus Ministry)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주택산업이 확장됨에 따라, 주민들의 생활권이 광범위하게 됨으로 원거리에서 오는 교인들을 지속적으로 수용, 유지하며, 이에 따라 그 지역에 새로운 교인들을 영입하기 위한 교회 부흥수단으로 버스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미니스트리는 한국에서는 운전기사를 통한 주일예배 참석을 위한 교통수단으로만 이용되었을 뿐, 버스 미니스트리(Bus Ministry)의 영역을 좀더 확대 개발해서 활용하지는 못한 것 같다. 버스 미니스트리는 주일 예배참석과 수양회, 관광등은 물론, 교회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하여, 규칙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교회성장에 일조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5) 멀티미디어 (Multi-Media Seeker Service)

멀티미디어의 이용방법은 혼합미디어 전도에 호소하는 프로그램(Appealing to Mixed-Media Seeker Services Program)으로 불신자 혹은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영입을 위하여 설교(preaching), 예술활동(artistic ensembles), 그리고 멀티미디어 엔터테인먼트(multimedia entertainment)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에서 예배실황, 선교활동 보고, 영화, 드라마등 기독교 전도와 교육에 도움에 되는 프로그램들을 활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의 이기는 주의해서 이용하지 않으면 도리어 교인들의 질적신앙 성장에 지대한 악 영향을 미치기 쉬운 것이다.

(6) 교인 재영입, 양육 (Feeder and Receptor Patterns)

이 교인의 재영입방법은 다른 교회로 갔던 본교인들을 다시 영입해서 양육프로그램을 통하여 다시는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하여 정착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 때에, 멀리 이사를 한다든가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를 제하고는 어딘가, 무엇인가 불만이 있어서 떠나는 것이다. 비록 인간관계에 있어서 좋은 관계로 떠났다 하더라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한 그들이 떠날 때에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needs)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결론을 속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비록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어떤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7) 소그룹 흡수 (Subcongregations of Adults)

하나의 큰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 종류의 소그룹들을 모으는 방법이다. 주변의 소그룹들(성경공부 그룹, 미숀그룹, 사회활동 그룹)과 소형교회들(가정교회, 세포교회, 가정제단등)을 흡수하여 하나의 큰 교회로 구성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교회는 각각 다른 종류와 스타일을 가진 그룹들의 모임임으로 성격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항상 내분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는 목회자의 특출한 리더쉽을 필요로 하고 있는 교회이다.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목회자가 교회를 지혜롭게 끌어 나갈 때에 성공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강력한 제자훈련이 필요한 교회이다.

3. 카리스마 방법(Charismatic Movements)

교회 목회방법중에는 카리스마 방법(charismatic Method)이 있는데, 이 방법은 주로 인간의 정서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은사를 개발,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 카리스마 방법은 주로 오순절 교단이나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교회에서 시도하고 있다. 주로 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찬양과 치유와 같은 기적사역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미니스트리는 전통적인 교회들과는 달리 도그마(dogma)는 거의 무시하고 성령의 사역중 특히 기적(奇蹟)과 치유(治癒) 사역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중요시한다. 지나치다 보면 신비주의로 흐르기도 한다.

(1) 기적 미니스트리 (Miracle Ministry)

목회방법의 초점을 기적(奇跡: Miracle)에 맞춘다. 그러므로 부흥성회는 물론, 주일예배까지도 기적실행(?)의 방법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교인들 역시 그 기적들을 보기 위하여 몰려든다. 이 기적 미니스트리는 다음에 별도로 다루는 치유사역(healing Ministry)를 비롯하여 구원의 역사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미니스트리로서 건전하기만 하면 파워 미니스트리(Power Ministry)이가 될 수도 있다. 기적 미니스트리는 아무 목회자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이 이 분야에 은사가 있는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것으로, 항상 말씀을 떠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2) 치유 목회 (Healing Ministry)

치유목회(Healing Ministry)는 특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을 고치는 사역을 주로하는 미니스트리로서 말씀보다 표적에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과 같이 건전하게 할 수만 있다면 매우 효과적인 미니스트리가 될 수 있으나, 결국은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미국에서는 오랄 로버트(Oral Roberts)를 비롯하여 캐더린 쿨만(Cathryn Kuhlman), 근래에 죤 윔버(John Wimber), 베니 힌(Benny Hinn)등이 유명하다.

(3) 찬양 목회 (Praise Ministry)

찬양목회(Praise Ministry)는 예배시간에 주로 찬양을 많이 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린다. 요사이 미국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이 예배시간에, 찬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교인들의 메마른 심령을 일깨운다. 어떤 교회는 예배를 찬양중심으로 리드미칼 하게 진행하는 교회도 있다. 대단히 좋은 시도이나 예배의 근본 목적을 항상 고려해서 인위적인 미니스트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정서나 감정에 대한 욕구충족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그 정서를 통하여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차원에서 시도해야 한다.

(4) 기도 목회 (Prayer Ministry)

기도목회(Prayer Ministry)는 교회의 예배를 비롯하여 특히 기도회 시간을 많이 가지고 교인들을 기도를 통하여 은혜받도록 하고, 기도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능력있게 인도하려는 미니스트리이다. 교회의 시설을 이용하기도 하고, 기도원이나 산상에 올라가서 기도에 전력을 다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그 능력을 통하여 교회와 교인들의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간다.

4. 특수목회 방법

특수목회는 교회에서 눈을 밖으로 돌려서 목회어장(牧會魚場)을 탐지하여 특별한 상황적 전략방법으로 어획을 노리는 전도전략의 일환이라 하겠다. 불신자들을 구원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방법으로 불신세계의 다양한 일터를 어장으로 타켙(target)삼고 특수현장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전도전략이다. 특수 목회는 범위도 대단히 넓고, 그 방법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는 미니스트리인데, 교회에서 손을 많이 못대고 있는 형편이다.

(1) 기관 미니스트리 (Institution Ministry)

기관 미니스트리(Institutional Ministry)는 주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인데, 정부의 각 행정기관, 경찰서, 군부대, 교도소 등을 상대로 한다. 한국에서는 군부대와 경찰서 선교는 많은 효과를 거두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시행되고 있다.

(2) 회사 미니스트리 (Company Ministry)

회사 미니스트리(Company Ministry)는 교회에서 어느 회사를 지정해서 집중적으로 전도하는 미니스트리로서, 물론 여러 회사를 상대로 할 수도 있다. 이 미니스트리는 교회의 어느 부서, 예를 들면 전도부가 맡아서 하는 것이 좋으며, 연령별로 접촉함이 좋다. 회사에 다니는 교인을 이용하여 전도의 접촉점을 찾는다.

(3) 공장 미니스트리 (Factory Ministry)

공장 미니스트리(Factory Ministry)는 어느 공장을 상대로 전도하는 교회성장 전략으로 대개 연령층이 젊은이들이므로 남여 청년회에서 주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특별히 그 공장의 직원이 있으면 좋고, 아니면 그 공장에 다니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공장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공장 미니스트리도 잘 개발하면 황금어장인데, 현금(現今)에는 아쉬울 뿐이다.

(4) 학원 미니스트리 (Campus Ministry)

학원 미니스트리(Campus Ministry)는 학교, 주로 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미니스트리로, 교회 학생들 중에서, 그 학교에 관련이 있는 사람을 이용하거나, 특히 C.C.C.(Campus Crusade for Christ)와 같은 파라쳐치 기관의 협조를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학원 전도는 군부대 전도와 같이 잘 이용하기만 하면, 대단히 좋은 황금어장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시도해 볼만한 곳이다.

(5) 교회/기관 미니스트리 (Next-Door-to Right Institution)

교회/기관 미니스트리(Next-Door-to Right-Institution Ministry)는 이웃에 연접해있는 교단 소속의 대학교나, 병원, 혹은 다른 기관들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으로 가까우니까 접근이 용이하다. 교회에서 자원봉사대를 조직하여 인접해 있는 기관이나 병원에 가서 무료로 봉사하며 전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5. 전략목회 방법

전략목회 방법(Strategic Ministry Method)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전략적으로 특수한 방법을 개발하여 시도하는 방법이다. 이 전략목회 방법은 기존의 방법으로 어렵거나 효과가 없을 경우에 전략적으로 상황에 맞추어서 특수하게 시도하는 방법이다. 이 목회방법은 특히 지역 상황에 맞추어 세우게 되는데, 대단히 급진적인 것으로 신중을 기하여 시도해야 한다.

(1) 분할예배 방식 (Separated Worship Service)

분할예배 방식(Separated Worship Services)은 교회가 비좁아서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경우에, 시차를 따라 예배를 하거나, 텔레비젼세트를 이용하여 부속건물에 나누어서 예배를 시도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이미 장소가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불가피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시차를 자유롭게 조정하여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전략적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교인들의 주일성수에 문제를 야기시키는 위험성도 따른다.

(2) 혼합예배 방식(Mixed Woership Service)

혼합예배(Mixed Worship Service)는 설교목회(Pulpit Minstry), 찬양목회(Praise Ministry), 치유목회(Healing Ministry) 등 여러가지 미니스트리를 한 시간의 예배시간에 혼합적으로 시도하는 방식으로 이 미니스트리는 그리 흔하지 않다. 이 혼합예배 방식을 이용하려면 적어도 일회 예배시간을 3시간 이상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시행하기가 어려우나,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남부에 있는 프레드 K. C. 프라이스 목사(Rev. Fred K. C. Price)가 시무하는 크렌샤워 교회(Crenshawer Christian Center)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뒷 부분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한국의 순복음중앙교회에서도 치유사역(healing ministry)을 곁드리고 있기는 하다.

(3) 이원화 미니스트리 (Separated Service Strategy)

이원화 미니스트리(Separated Service Strategy)는 신자와 불신자 목회를 이원화해서 효과적으로 시도하는 전략목회(戰略牧會)중의 하나이다. 신자와 불신자는 그들의 요구(needs)가 다르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화합하지 못하고 갈둥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이를 이원화해서 자연스러운 가운데서 예배하고 교회활동을 하겠다는 의도로 미국 시카고 근교에 있는 빌 하이벨즈 목사(Rev. Bill Hybels)가 시무하는 윌로우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서 시도하고 있는데 이 전략목회로 크게 성장하였다.

(4) 동화예배 미니스트리 (Assimilative Service Strategy)

동화방식 미니스트리(Assimilative Service Strategy)는 신자와 불신자를 한 예배당에 수용하고 은혜로운 예배분위기를 조성하여 불신자들이 예배에 동화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는 릭 워렌 목사(Rev. Rick Warren)가 시무하는 새들백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에서 시행한다. 물론 새 신자들을 동화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새 신자들은 예배와 교육을 위한 시간을 별도로 갖는 교회도 있다. 미국의 크렌샤워 교회(Crenshawer Christian Center)가 새 신자들은 다른 예배실에서 예배와 교육을 하고 있다.

(3) 교회성장 장벽의 돌파방법
                             (How to Break Church Growth Barries)

현재 미국에는 375,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 통계학자들은 500,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이렇게 많은 교회들중에 대부분이 소형교회로서, 전교인수의 50%가 14%의 큰 교회 교인들이며,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한다면 대부분이 평균 75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이며, 주일 아침예배에 평균 250명 모이는 교회들은, 사실상 미국에서 제법 "큰 교회중에 하나"라고 자부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큰 교회라고 할 때에 적어도 800명이상 천여명이 넘어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약 54,000여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80-90%가 소형교회라고 한다. 더구나 대부분이 30-50명선이고 100-150명 넘어가는 소형교회는 그런대로 안정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성장학적으로 말하다면, 피터 와그너(Peter C. Wagner)가 말한대로-그는 교회성장을 말할 때에, 교회성장은 그 결과를 수자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수자개념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수자 이상의 것(more than number)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을 합쳐서 4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가, 개인의 성장(growing up)이다. 이는 질적인 성장에 속하는 것으로서, 양육성장(follow-up)인바, 교인들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을 따라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인데, 이는 다른 모든 성장 이전의 전제적인 성장(前提的인 成長)을 말한다. 둘째로, 회중의 성장(growing together)이다. 이 성장 역시 질적인 성장에 속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인들 상호간의 교제(        `)를 통하여 회중의 공동체가 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성장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서와 사랑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한다. 셋째로, 증식성장(growing out)이다. 교인들이 제자훈련과 같은 평신도 훈련을 통하여 질적으로 성장한 교인들이 교회적인 회중성장으로 성장능력을 응집시켜서 전도하는(reach out)는 전도성장(evangelism)을 말한다. 이 성장은 잘 훈련된 교인들의 전도를 통하여 교인들을 증가시키는 증식성장(multiplication)으로 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넷째로, 교회의 외적 세력확장을 위하여 지교회를 설립하는 방법으로 교회개척의 방법(growing more)을 말한다. 이는 교회들의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중의 하나로서 모교회(mother church)가 자교회(daughter church)를 설립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대형교회들이 자교회 설립보다는 본교회의 무한성장(unlimited growth)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비의 명목으로 개척교회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일의 정도로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의 대형교회에서도 선교사들의 보조나 아니면 타국 선교지에 교회를 설립하고, 국내의 교회보조나 개척교회 설립을 돕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교회의 설립은 다른 곳에 지교회로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모교회의 교인들을 분가시켜서 자교회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교회성장에 있어서 외형적인 대형화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고, 질적으로 잘 보존되고 성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들은 본교회의 무한대 성장(unlimited growth)을 선호하며 모든 전략과 전술을 총동원하여 본교회 외적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시대적으로 보아 현대 교회가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대형화 추세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대형화만이 좋은가? 이와 반대로 소형화만이 좋은가? 이러한 교차질문(cross-question)이 현대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들을 혼동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무엇 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회의 이상적인 성장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다. 첫째로,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이 균형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소형교회와 대형교회는 그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개의 교회형태의 장점들을 살려서 이상적인 교회성장에로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소형교회는 양적 성장을 위하여 대형교회가 경험한 교회성장 전략들을 교회상황에 맞게 적용함으로써 양적으로 성장하는 축복을 누리고, 대형교회는 소형교회의 장점중의 하나인 소그룹 운동을 전교회에 확대시켜서 질적 성장으로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상적인 교회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대형교회가 질적 성장을 달성하는 방법의 하나로 그 대형교회를 분가시켜서 자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자질있는 목회자들을 양성시켜서 교회의 일부를 분가하여 새로운 자교회를 설립하는 방법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이러한 시비를 접어두고 균형을 갖춘 이상적인 교회성장을 전제하면서 교회마다의 규모에 따라 우선 양적으로 성장하려면 어떠한 전략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8단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에는 350,000 교회중에서 4/5이상인 85%가 침체되고, 쇠퇴하거나 죽어간다고 한다.
사실, 한국교회의 생명은 성장 잠재력(growth potentiality)과 성장파워(growth power)에 있다. 왜냐하면 수자상으로 한국교회는 서구의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의 80-90% 이상의 크리스챤에 비하여 한국교회는 26%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서구교회의 실제적인 교인이 4-17%정도요 대부분이 명목상 교인들(nominal Christian)인데 반하여 한국교회는 급성장한 성장파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급성장한 결과 교회가 대형화되었고, 특히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강력한 성장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기도의 파워가 가장 강한 나라가 역시 한국이 안닌가 한다. 현재 침되고 교세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기도원을 찾아서 산을 찾아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중에 여섯 교회나 한국에 있는 것을 보아도 한국교회의 성장파워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한국교회가 침체상태에 있고 심지어는 쇠퇴하고 있다는 통계는 한국교회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면 침체되고 쇠퇴하는 교회를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개 교회의 상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는데, 그 첫째가, 성장하는 교회(growing church), 둘째, 침체된 교회(satgnated or plateaued church), 셋째, 쇠퇴하는 교회(declining church)이다. 그런데 침체되거나 쇠퇴하는 교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목회자와 교회가 성장비젼과 성장전략이 없다는 것이다. 침체하거나 쇠퇴하는 교회를 일으키려면 교회구조와 기능의 변화를 주어야 하는데, 비젼과 전략이 없으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체되고 쇠퇴하는 교회가 재기하려면 비장한 목사의 비젼과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교회가 활발하게 가동할 수 있는 교회구조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성장의 안목을 가지고 교회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비젼과 전략(vision and strategy),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구조와 기능(organization and function)의 개혁만이 침체하고 쇠퇴하는 교회를 부활시킬 수 있는 비결이라 하겠다.
그러나 교회의 사이즈에 따라 성장전략이 달라져야 한다. 본서에서 8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지만 크게 나누어서 소형교회, 중형교회, 대형교회, 초대형교회로 구분해 놓고, 다시 이것을 소형교회와 대형교회로 크게 나누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소형교회와 대형교회의 전략이 수립될 것이다. 8개의 유형을 크게 둘로 나눌때에 가정교회(10-30)부터 소형교회(80-150)까지를 소형교회의 범주로, 중형교회(150-400)부터 메가교회(10,000-UP)까지를 대형교회의 범주로 생각하고 대략 소형교회와 대형교회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도 교회성장 전략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소형교회와 대형교회의 장단점을 상호 보완하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1. 소형교회의 특징과 성장전략

사실, 소형교회(small church)의 교인들은 대형교회(large church)의 교인들 보다 더욱 개인적이고 적극적인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소형교회는 대부분 그 교인들 사이에 친밀성(intimacy)이 있는 한편, 대형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소형교회의 멤버들은 전체적인 교제로서 규칙적으로 만남으로, 그들의 일체성(their unity)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밀착되어 살면서, 각자의 집에서 함께 만나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형교회 특성중의 하나는 수직적, 수평적(vertical and horizontal relationship)관계에 있어서 매우 친밀한 것이 장점이다. 첫째로, 소형교회의 특징들(characteristics) 중의 하나는 멤버들이 각기 예수님과 함께 누리고 있는 수직적 관계(vertical relationship)의 수립이 용이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소형교회 멤버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리라"(마 18:20 NIV). 또 다른 번역 성경에는 영어로 이와 같이 번역하였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그 가운데 나도 함께 하리라"(마18:20 KJV). 어떠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수직적 관계이다. 물론, 대형교회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소형교회가 예수님에게 접근하기 좀더 쉬운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로, 소형교회 멤버들은 서로 친밀해지기가 용이하다. 그들은 그들의 사이에 수평적 관계에 의하여 확장되어 나가기가 쉽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얼굴을 대면하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친밀한 사랑의 관계이다. 로이스 바렛(Lois Barrett)은 이 특성에 대하여 "가정교회는 보통 집안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서로의 친절한 말 뿐만 아니라 서로의 친절한 사랑으로 모인 집안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형교회에 있어서의 두번째 특성(characteristic)은 교회에 대한 소속감(a sense of belonging)이다. 소형교회 멤버들은 대개 대형교회 멤버들 보다 자기 교회에 대한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 소형교회의 소속감에 대한 대형교회의 소속감을 가정의 소속감에 대한 나라에 대한 소속감으로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다. 이 소속감은 밀착된 친밀감에서 온다. 소형교회의 모임을 통하여, 사실, 교회의 멤버들이 친밀하게 될 수 있다. 니콜라스(Ron Nicholas)는 소형교회의 소속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소그룹에 소속하게 된다. 우리 각자는 소그룹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우리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얻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안전(安全, security)은 적어도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것을 아는데 있다. 우리는 서로 알고 알릴 필요가 있으며,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소형교회의 또 다른 특징(characteristic)은 그 교회 멤버들이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안정감(a sense of security)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어떤 사람들은 소형교회에서 또 어떤 사람들은 대형교회에서 안정감을 갖는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를, "어떤 사람은 항상 소형교회에서 더욱 안정감을 느낀다. 그들은 전체 사회적 단위의 밀착된 일부분으로 느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아 수 많은 낯선 사람들을 볼 때, 불안을 느끼게 된다....그러나 대형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갈 때, 보다 익명으로 알려지지 않는 기회를 갖는 것을 좋게 여긴다. 그들은 그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이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연히 대형교회를 찾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떠한 의미에서, 안정감이란 사랑의 힘(love power)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혼자 있을 때에는 불안을 느끼지만, 부모와 같이 있으면 안정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랑의 관계(love relationship) 때문이다. 사랑은 어머니와 아이에게 담력과 무서운 힘을 제공한다.
이와 같이 소형교회는 대개가 교인들 사이에 밀접한 사랑의 관계(close relationship of love)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 멤버들은 항상 보다 안정감(a sense of security)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소형교회의 특징을 감안해서 교회성장 전략을 세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본서에서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여덟가지 유형의 교회들에 대하여 상세한 언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략 기본적인 특징과 교회성장 전략들을 언급하려고 한다.

(1) 교인 50명선을 돌파하는 방법

교인 50명선의 장벽은「가정교회」(House Church)가 넘어야할 교회성장의 장벽(growth barrier)이다. 이「가정교회」는 10-30명(혹자는 10-25명)의 교인으로, 주로 가족과 친척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한국교회의 상황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교회의 분위기는 다분히 가족적이다. 그래서 화기애애할 수 있는 반면에 쉽게 시험에 말릴 위험성도 있는 것이「가정교회」이다. 다른 사이즈의 소형교회들도 마찬가지로 소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長点)과 단점(短点)이 무엇이며 그로 인하여 유발되는 문제와 교회성장의 장애요소를 면밀히 분석하고, 진단해서 그에 맞게 처방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성격과 장애물

이 교회의 성격은 첫째로, 가족적인 성격으로 그들의 구성체제의 사고방식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의 규모의 카테고리가 그들의 멘탈리티(mentality)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가정교회」 성장의 가장 큰 장애물은 교인들의 가정교회 멘탈리티(house church mentality)의 문제이다. 이것이 가장 큰「가정교회」의 장애물이다.
둘째로, 리더쉽의 확대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가족적이라 리더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교회가 소규모이기 때문에 어떠한 교회적인 전략상의 리더쉽을 요구하지 않는다. 특별한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를 중심으로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리더쉽보다 사람이 몇몇 안되니까 너도 나도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각자가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특히 가정교회와 같은 소형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리더쉽이 필요하다. 셋째로, 그러므로「가정교회」는 교회성장에 대한 원대한 비젼과 전략이 약한 것이 문제이다. 교회가 소규모이니까 목사로부터 교인들까지 모두가 소심해져서 큰 비젼과 성장전략에 주저하여 항상 "작은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때로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교회가 좋은 것이라고 자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가정교회들」은 아주 서서히 성장하거나, 전혀 성장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넷째로, 그들만의 가족사회의 멘탈리티와 강력한 리더쉽의 부재로 비젼과 전략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  로  인하여 특히 불신자(새신자) 전도(outreach to the unchurched)에 효과적인 대안(alternatives)이 없다.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라는 것이, 그저 체계적으로 계획된 전략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전도를 하기 때문에, 전도의 집중화와 효율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기대할 수 없다. 어떠한 의미에서 주일 예배조차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시간보다도 교인들의 교제의 시간의 인상을 풍기기 쉽다.
  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 전략

이「가정교회」성장의 가장 큰 장애물중의 하나는 교인들의 가정교회 멘탈리티(house church mentality)의 문제이다. 이것이 가장 큰「가정교회」의 장벽이다.「가정교회」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장벽이 바로 이 "가정교회 멘탈리티"이다. "가정교회 멘탈리티"는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목사와 교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의 문제이다. 가정적인 분위기로 아기자기하게 엔죠이하다 보면 멀리 큰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비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대한 비젼(vision)과 비젼화(visionization), 그 비젼에 대한 확신(confidence)과 그 비젼의 정체화(identification), 그리고 교인들의 동원화(mobilization) 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1) 그러므로「가정교회」가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장벽은 "교회성장의 의지"를 가지고 "교회를 성장시키자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결정을 하고 난후에야 교회가 주위의 불신자들을 전도할 수 있는 전도전략의 개발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짐으로 교회성장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2) 다음으로,「가정교회」의 가족적인 분위기로 인한 핵심멤버들(core members)의 "토박이 멘탈리티"(aborigines memtality)의 장벽이다. 이것은 소형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장애물이다. 이 핵심멤버들로 인해서 새로 영입되는 좋은 멤버들(homesteaders)이 정착하지를 못하고 외인처럼 교회를 맴돌다가 떠나버린다. 이것이 또 하나의「가정교회」의 성장의 벽이다. 이 장벽을 뛰어 넘지 못하면 항상「가정교회」로 남게 된다. 이 장벽을 넘기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제자훈련과 같은 철저한 신앙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신앙훈련은 오랜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우선 은혜와 사랑으로 목회자가 교인관리 기술을 통하여 교회를 잘 관리해나가야 한다. 제자훈련을 준비하면서 개인적인 돌봄에 주력해야 한다.

(3)「가정교회」가 성장의 장벽을 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 목회자의 활약에 기대해야 한다.「가정교회」를 비롯한 소형교회들의 활동은 거의 목회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중형교회, 대형교회가 되기 전 까지는 목회자는 몸소 뛰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첫째로, 새 신자 접촉에 적어도 50%이상을 할애해야 한다.「가정교회」의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많으므로 그 장점들을 잘 선용하여 새 신자들의 영입에 최선을 다해야한다. 새 신자들은 목회자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 둘째로, 교회성장의 원대한 목표를 위하여 핵심멤버를 철저히 훈련시켜야 한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들의 인격적인 신앙훈련을 통하여 새로 영입되는 유력한 일군들과 융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새 신자를 전도하는 방법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주신 특별사명감을 유발시켜서 전도의 도전(challenge)을 주어야 한다. 셋째로, 교인증식 전략을 위하여 구역그룹(소그룹)으로 분할시킨다. 이 그룹을 리드하기 위한 비젼있는 리더들(visionary leaders)을 세워서 계속적으로 특별훈련을 시킨다. 이 리더는 현재의 그룹속에서 선택하여 철저하게 훈련시킨다. 이 리더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임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교회성장의 촉매(catalyst)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항상 언급하는 말이지만 현대 교회, 특히 한국교회에 있어서 소그룹운동은 교회성장 전략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넷째로, 그룹 리더들을 교회성장에 성공한 모델교회에 보내서 견학시켜서 본교회성장에 대한 가능성의 확신에 찬 열망을 안고 돌아와서 자신을 가지고 교회성장운동에 뛰어들게 한다. 실제로, 미국의 아틀란타의 벅헤드 공동체교회(Buckhead Community Church)에서 임상결과 5년후에 주일예배가 350명, 주일 저녁예배 100명, 셀그룹(cell group)에 130명이 참석하는 교회로 매년 평균 50명의 벽들을 깨고 중형교회로 진입한 케이스가 있다.

(2) 교인 100명선을 돌파하는 방법

교회의 교인 100명선의 장벽은「단일셀그룹교회」(The Single Cell Church)가 넘어야 할 교회성장의 장벽이다. 이「단일세포교회」는 30-80명(혹자는 25-85명)으로 구성된 교회로「가정교회」의 수준은 벗어났지만, 아직도 정상적인「소형교회의」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상태이다. 이 그룹은 사회학적으로 말하면,「제1그룹」으로 중요하고 장기적인, 평범한 지난 이야기들을 기탄없이 나누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룹이다. 이「단일셀그룹교회」는 이제 갓 태여난 어린아이 같아서 내부적으로 아직 연약할 뿐만 아니라 외부에 대한 면역도 방어도 약한 편이다. 물론 이 규모의 교회들 가운데는 오래되고, 멤버가 정착되어 있어서 현상유지에는 문제가 없으나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교회의 성격과 장애물

이 교회는 아직도 소규모이기 때문에「가정교회」와 같이 교인들 서로가 얼굴을 잘 알고 있는 형편이다. 교인들은 교회의 예배시의 자기의 앉는 자리들까지 정해져 있다. 심지어 외부에서 새로 나온 교인들에게도 양보해주지 않는 자기만의 자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교회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이 교회를 붙들고 나가는 매우 강력한 브록(block: group)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있다. 물론, 목회자를 중심으로 이루고 있는 브록이지만, 교회운영에 대한 그 영향력은 두 가지 타입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목사의 강력한 리더쉽아래 뭉쳐진 브록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는 표면상의 심볼(symbol)일 뿐, 그 영향력은 전적으로 그 그룹을 이루고 있는 제직브록(staff block)에 의해서 주도되는 타입이다. 어느 것이든지 간에 이런 경우에 교회의 성장에는 모두가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교회는 100명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100명을 넘어갈려다가는 주저물러 앉고, 넘어갈려가다 주저물러 앉곤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강력한 브록이 곧 이 교회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는 "단일 세포"(single cell) 그룹이다. 이 교회는 변화를 거부하는 성질 때문에 100명선을 넘기가 힘들다. 미국에는 75명을넘지 못하는 이런 교회가 50%가 되고, 유우롭은 50명 미만의 교회가 61%나 된다. 어떤 면에서 사람들은 친밀관계 때문에 교회를 선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인이 70여명 이상을 넘어가면서 친밀감이 떨어지면서 성장이 멈추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목회자의 기술적인 리더쉽을 요하게 된다. 목회자의 기술적인 리더쉽이 부족할 경우에 교회는 100명은 물론 80명선도 넘기가 어렵다. 이 교회는 한 명 정도의 풀타임(full time) 직원이 필요하다.

  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 전략

(1) 교인 100명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걸려있는「단일세포그룹교회」(Single Cell Group Church)의 가장 큰 장애물은 교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핵심멤버 그룹"(core member group)이다. 물론 이 그룹은 교회의 존폐가 달려있는 결정적인 그룹이기도 하다.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 그룹은「가정교회」에서부터 이어온 공로가 있는 중요한 멤버들이기도 하다. 이 멤버들이 교회의 재정은 물론 목회정책까지 관여하는 것이 보통이며, 교회의 운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인정도 받는 멤버들의 그룹이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이 그룹이 교회의 계속성장, 특히 100선을 돌파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들은 너무나 단단하게 뭉쳐있기 때문에 그들의 전통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들과의 혈맹관계(blood tie)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문호를 닫았버린다. 이 그룹은 포용적이라기 보다는 폐쇄적이며 배타적이다. 이 그룹은 주위의 다른 문화나 다른 사회를 차단하고 과거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도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유전을 영구화하고, 그들의 영역을 방어한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는 탄력은 있으나 그들의 제1목표가 그들이 살아남고 현상유지(status quo)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장하기가 힘들다. 이들은 대형교회는 비인격적(非人格的)인 교회라고 오인하고 있다.
필자 친구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자기의 교회가 도저히 100명선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하는데, 100명선을 돌파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살펴봤더니 다름이 아닌, 교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핵심멤버"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 핵심멤버들로 인하여 교회는 경제적으로 걱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목회상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단지 새로운 교인들이 붙지를 못하고 왔다가 떠나가버리니까 교회가 100명선을 넘어가지 못하고 그 이상을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라는 진단이다. 그러므로 100명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이 핵심멤버의 그룹을 깨야 하는데, 이 것이 큰 과제라는 것이다. 잘못 깼다가는 교회 자체가 무너지기 쉽고, 그렇다고 마냥 이대로만 있을 작정도 아니고 매우 고민스럽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이 그룹을 깨야 한다. 그러나 잘못하면 교회자체가 전체적으로 흔들리어 성장은 커녕 존폐위기에까지 갈지도 모르니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목회자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런 그룹은 깨져야 새로운 일군들이 합류(join)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가 100명 이상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다. 그러면 이런 그룹을 어떻게 깨야 하는가? 물론 여기에 속해 있는 멤버들을 공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교회성장의 장애가 되는 이들의 배타적인 결속을 끊어주고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도록 유도해서 교회가 100명이상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라는 뜻이다. 이 핵심멤버의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지금까지 단일셀그룹교회에 필요했었던-그들의 전근대적이고 편협한 멘탈리티를 교정해서 한 차원 올려「소형교회」멤버로서의 멘탈리티로 승화시켜주라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이들과 새로 들어오는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이질성을 극복하여 동질성으로 변화되도록 목회자가 유도해주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기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화끈하지 못해서 교회성장의 모티브를 주는데 매우 약하기 때문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성장이 대단히 느려서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목표를 설정하고(100명 돌파) 시도하는 교회성장 전략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둘째는, 적극적인 방법인데 이는 오직 훈련과 목회자의 테크닉에 달려있다. 한편으로 꾸준한 훈련을 통하여 이들의 멘탈리티를 교정해주고, 자신들의 은사와 사명을 재발견해서, 실제 목회현장에서 사용함으로 하나님 앞에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해주어야 한다. 교회안에서 자신들의 위치에 위협을 느끼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새 신자들의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사명감을 고취시켜주고, 한 단계 승화된 차원에서 새로 영입된 일군들과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수립할 수 있도록 교화시켜야 한다.

(2) 둘째로, 교인 100명선을 돌파하려면 목회을 위하여 교인들을 활성화할 수 있는 비젼있는 리더와 평신도 리더들이 필요하다. 그 때에 교인들이 스스로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자의 비젼(vision)과 꿈(dream)을 함께하고 참여하게 된다. 이 리더들을 잘 훈련시켜서 각 파트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소기의 교회성장 목표인 100명선을 돌파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의 예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갈보리공동체교회(Calvary Community Church)는 담임목사인 랠리 드위트(Rev. Larry DeWitt) 목사는 교회성장의 의지를 가지고 새 신자들에 대한 전도의 비젼으로 25-85명의 침체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부터 평신도 훈련으로 돌입해야 할 시기이다.

(3) 셋째로,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어 줄 필요가 있다. 어둡고 경직되어 냉냉한 분위기에서 환하고 아늑하고 새 신자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 변화를 주어야 한다. 훈련한 교인들로 하여금 새 신자들을 한 사람씩 맡아서 따뜻하게 영접하고 예배가 끝나고 친교시간이 다할 때까지 친절하게 보살펴 주어야 한다. 새 신자들은 처음 참석할 때의 분위기와 첫 인상을 대단히 중요시하기 때문에 한 번 찾아 들어온 사람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놓치지 않도록 교인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필자가 보았던 어떤 교회는 새 신자들을 열심히 전도해서 인도해오는데도 열매가 없는데, 이는 교회의 분위기에 문제가 있다는 분석이다.

(3) 교인 200명선을 돌파하는 방법

교인 200명선의 장벽을 돌파해야 할 교회는「소형교회」로 교인수가 80-150명(혹자는 85-100명)선의 전형적인「소형교회」이다. 이「소형교회」는 대형교회의 축소판이 아니다. 이「소형교회」는 한 사람의 목사와 각 부서의 리더인 평신도 리더들이 대부분 자원봉사하고 있는 교회이다. 100명선을 넘어선 교회는 다음 단계인 200명선을 돌파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 때부터 목회자는 "목자형 목회"의 스타일에서 "목장경영형 목회"의 스타일로 리더쉽 스타일을 서서히 바꾸어 나가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목회자 한 사람이 "목자형 목회방식"으로 교인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돌볼 수 있는 한계가 150명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격과 장애물

이「소형교회」의 특성중에 가장 초점을 맞추는 것은 각 개인들의 안정과 평안이다. 여기에는 낯선 사람들이 없고, 사교관계는 서로 잘 알고 안심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교인들이 교회성장의 장애물로 현상유지에 걸려있을 때에 교인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이 친밀감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친밀감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것이다.「소형교회」의 멤버들은 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한계성을 탄식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 쉽다. 그들의 비젼은 "요새 멘탈리티"(fortress mentality)와 같은, 살아 남으려는 생각에 제한되어 있다. 대부분의 소형교회들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소형교회」의 멘탈리티인 소형교회에 대한 소형교회의 수준에서의 자가평가를 통하여 교회성장의 포텐셜(potential)을 보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형교회의 목회자나 교인들이 교회성장에 대한 큰 비젼을 갖지를 못하고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열정탐군들과 같이 부정주의(negativism)에 빠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장애요소로 인하여 교회성장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성장의 장벽은 충분히 돌파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비성장의 원인들을 극복하여 교회가 성장패턴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다.

  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 전략

교인 200명선을 돌파하는 전략과 방법론은, 현재 여러 교회성장학자들에 의해서 개발되어 있다. 본서에서는 Linus J. Morris와 Carl F. George, 그리고 Bill M. Sullivan의 전략을 종합하여 필자의 의견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교회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 방법론을 제시 하려고 한다. 본래, 이들은 모두 서구의 교회성장학자들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상황과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들이 있는데 필자는 이런 것들을 재조정하고 의견을 덧붙이게 된것이다. 

첫째로, 모리스(Linus J. Morris)의 전략이다.

(1) 교회성장의 능력에 대한 정체화(identify), 확인(affirm), 확립(build) 등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성장하는 교회에서는 멤버들이 그들의 신앙과, 교인들과 목사에게 열성적이다. 소형교회의 85-150명의 정체성(停滯性)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성장능력에 대한 확신과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하며, 그래야 200명선을 돌파할 수 있다.

(2)「소형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인 멘탈리티"(possibility mentality)로 바꾸어 줌으로 교회의 능력을 인식하게 되고 불신세계을 향하여 전도를 할 수 있게 된다. 신앙의 전망으로 "주위에 있는 다른 교회들이 지나쳐버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필요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되는지?" 등과 같은 질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3) 훌륭한 리더쉽은 교회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능력있는 목회자는 교회 멤버들로 하여금 협조적인 정체성과 비젼으로 모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또한 그들의 목표를 향하여 멤버들로 하여금 전심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준다. 그러므로 교회의 비젼은 전위에서 유지되며, 특히 새 신자들을 모으는데 효력이 있게 한다.

(4) 계속적인 성장을 위하여 리더들은 점차적으로 새로운 셀들(cells)과 미팅사역(meeting ministry)과 관련되어 있는 사역들을 위하여 평신도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목회자는 셀단위(cell units)를 통한 교회 전체와 목표설정, 새 신자 영입, 훈련, 파송, 조정, 양육, 그리고 평신도 리더쉽 유발등 교회의 중심사역을 주도하는 목장경영형(Rancher type) 목회사역으로 바꿔 나가도록 한다.

(5) 교회가 성장할 때 적어도 일년 앞-2년에서 3년 앞당겨 스케쥴이 잡히게 된다. 프로그램들은 교회의 전도를 강화시켜준다. 협력체제의 훈련 프로그램들은 전도나 셀그룹(cell groups), 셀단위(cell units) 리더쉽을(leadership) 위하여 멤버들을 무장(equipping)시킨다.

(6)「소형교회」수준을 넘어서 성장하려면, 보다 질적으로 훌륭한 설교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생활의 여러면이 개선되어야 한다. 설교의 질적 개선은 보통 목회자의 부분에 더 좋은 계획을 요구한다. 설교준비가 빈약한 원인은 준비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7) 교회의 전체적인 좋은 인상과 친절은 새 신자들을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또한 모임을 위한 음악 스타일은 좀더 고상하게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성장하고 새로운 자료들을 가미시킴으로써, 축제예배의 질을 개선하기란 용이하다. 질 높은 프로그램에 필요한 "결정적 모임"을 성공시킴이 교회성장의 계기가 된다.

(8) 임대시설에서 매주 85-150명의 교인들이 모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직은 대부분의 미팅들을 가정에서 가질 수 있다. 가정 사무실은 전도와 프로그램을 위한 자유로운 장소가 되는데 충분하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성장을 위한 이용을 위하여 중앙 사무실과 충분하 시설확보에 대한 장기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로, 죠지(Carl F. George)의 전략이다.

(1) 교인 200명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동류그룹(peer group)을 발견해서 그들과의 동지애를 발전시켜야 한다. 보통 100명을 마크하는 교회에는 동류보다 60%이상, 140명 교인시에는 75%, 200명 교인시에는 85%, 350명 교인시에는 93%, 500명 교인시에는 95%이상으로 커진다는 것이다.

(2) 위기를 위하여 사전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죠지는 75명에서부터 200명선의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략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교회상장에 대한 전염성의 욕망을 발산시켜야 한다. 둘째로, 경험적으로 말해서, 당신의 교회가 왜 성장하며, 계속적으로 불일듯 하게 하는데 필요한 활동적인 요소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분석해야 한다. 셋째로, 목자형 목회방식에서 목장경영형 목회방식으로 전환시키고 그 일들을 철저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다음 단계에는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 넷째로, 200명 이하의 교회를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 요소들을 취급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를 뒷걸음질치게 하는 "소형교회 멘탈리티"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여섯째, 평신도 리더쉽 개발을 위한 상황에 따라 평신도 소그룹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3) 부동산과 시설들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의 시설들을 확장하는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첫째로, 교인들이 넘쳐서 장소가 협소하게 될 때에, 시설을 확충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교인들로 하여금 인식하고 말하게 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가 프로그램을 위하여 거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 다른 곳으로 확장해서 옮겨야 하는지? 셋째로, 교회가 부지를 찾고 있는데, 교인수의 사이즈에 적합한 면적이 있는지? 넷째로, 교회부지를 찾는데 어떤 추천할만한 곳이 있는지? 다섯째, 건축가나 시청과 작업관계로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여섯째, 주위에서 교회가 새로운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너무 비좁다고 보는 것을 목회자는 알고 있지만 위원회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일곱째로, 부지와 건물값이 오르는데 비하여 전세내는 것은 어떤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

 셋째로, 셜리반(Bill M. Sullivan)의 전략이다.

셜리반은 교인 200명선을 돌파하기 위한 10단계 전략을 상세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도록 간략하게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첫째 단계로, 동기를 시험해보는 단계이다. 교회성장의 동기가 잃어버린 영혼을 구세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는 열망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파시즘이나 비행동도 순수한 동기가 될 수 없으며, 호전적이고 정력적인 행동도 역시 개인적인 야심에 불과한 것이다. 목회사역을 하기 위한 규칙적이고 지속적이며 실질적인 기도생활이 목사로 하여금 교파적이거나 개인적 확장을 위한 욕망을 넘어서, 영혼들을 위한 사랑을 마음속에 심어주게 될것이다. 목사가 그 동기를 시험하고 목사의 생활이 잃은 양에게로 몰아갈 때까지 어떠한 집중적인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동기부여는 행동과 실제를 지켜보고 결과들을 평가함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2) 둘째 단계로,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단계이다. 교인 200명 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연결되는 결정적인 기도가 있어야 한다. 기도는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뿐만 아니라 합심기도를 해야 하며, 지속적이고 집중적이며 인내로 해야 한다. 기도는 사역을 동반해야 한다.

(3) 셋째 단계로, 믿음을 발전시켜야 한다. 믿음은 교회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믿음의 은사는 대부분의 교회성장 목사들에 의해서 실행되고 있다. 어느 목사의 믿음이라도 성경을 읽고, 영감에 넘치는 책들을 읽으므로, 훌륭한 교회의 이야기를 읽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실례를 보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믿음의 발전을 위하여 부탁드리고, 위기를 즐거움으로 맞을 수 있는 훈련들을 통하여 발전되어야 한다.

(4) 넷째 단계로, 교회성장 돌파를 위한 목표를 세운다. 관리와 시설이용에 있어서 장벽을 넘어 목표를 잘 세운다. 3년 기한으로 목표를 세우고 고비를 잘 넘어간다. 장벽은 빨리 돌파한다. 기존시설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5) 다섯째 단계로, 계획을 충분히 생각한다. 즉, 재정, 시설, 직원, 변화의 고통, 개인 성장, 기대의 변경, 평신도 리더들의 부족수, 소그룹 활동을 위하여 필요한 것, 개인적인 요구 등을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6) 여섯째로, 몇몇의 결정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교회가 진행하는 활동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교회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되는 활동들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교회성장에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No.1 리스트(3-5개)를 선정하고, No.2 로부터 교회에서 가장 잘 진행할 수 있는 활동들(3-5개)을 선정하라. 근래에 가장 생산적인 아이디어들을 종합하라. 결정된 중요한 활동들의 실행을 상세히 정리하고, 활동과 참여시킬 교인들을 결정하기 위하여 매달과 1/4분기로 평가를 한다. 평가의 고정은 보통 무시하기 쉬운데 사실은 차기 목회전략능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7) 일곱째로, 격앙된 분위를 조성한다. 예배에 영향을 미칠 때까지 기도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을 조장하고 실제적인 목표를 세우며, 영적인 목적과 기능의 전달과, 교인들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돕는다. 승리와 성공을 공적으로 축하하고 중요한 예배와 프로그램을 계획하며, 감동적인 예배를 개발하고 흥미와 다양성을 위하여 특별 강사들과 싱거들(singers)을 확보한다.

(8) 여덟째로, 장벽돌파를 목적으로 계획된 성장추진에 돌입한다. 급성장 아이디어로 일일 참석운동, 교회학교 갱신, 전격심방, 버스사역 등을 추진시킨다.

(9) 아홉째로, 전도활동을 우선으로 한다. 목회자는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서, 전도와 교육, 질과 양, 사람과 시설, 재정과 직원, 성장과 사기(morale) 등의 균형을 맞추어 나간다. 교회성장 목회자는 성장과 양과 전도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사기와 질과 교육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교인들을 얻는데 진력을 다해야 한다.

(10) 열째로, 평화를 유도한다. 목회자가 200명선의 장벽을 돌파하기 위하여 교회의 변화를 유도하는데 앞장선다면, 희생을 개의치 않고, 변화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인식하고, 교인들이 그 고통을 극복하도록 해주며, 새 신자들 전도와 교인들의 필요를 감지하여 돌봐주며,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조직과 행정을 확충한다. 이렇게 함으로 200명선을 돌파할 수 있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훈련하고 철저히 지도, 감독하면서 끌어준다면 충분히 교회성장을 위한 임무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4) 교인 400명선을 돌파하는 방법

교인 400명`선의 장벽은「중형교회」(Mid-Size Church)가 넘어야 할 성장의 장벽이다.「중형교회」는 교인이 150-400명(혹자는 150-250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명선의 장벽"에 만만치 않은 장벽이다. 미국에는 대략 99% 이상의 교회들이 200명 이하의 교인들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 있어서의 중형교회는 소형교회와 마찬가지로 담임목사와 평신도들의 자원봉사자들과 파트타임의 직원을 두고 있으나, 근래 한국교회는 부목사를 2-3명과 여러명의 심방전도사, 교육전도사, 사무장, 사무원, 기사, 사찰등 많은 직원들을 두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교회의 형편으로 보면, 보다 더 많은 직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필요한 실정이지만, 한국교회의 실정으로 보면, 기존 유급직원만 활용하고 훈련된 평신도 지도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400명선의 돌파는 용이하리라 믿는다. 소형교회가 200명선을 돌파한 후에 가장 고비가 되는 선이 400명선이다.

  교회의 성격과 장애물

이 교회의 성격은 모든 시스템을 체계화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와 같은 교회운영 체제를 이루지 못하면서, 한편으로 소형교회의 체제를 벗어나려고 하는 중간상태에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의 장벽이 첫번째로 맞고 있는 교회성장 장벽은 우선 200명선과 300명선의 장벽이다. 150-200명의 교회는 200명선의 장벽을, 200-400명의 교회는 400명선의 장벽을 넘는 것이 우선의 과제이다. 교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중형교회」는 교인확보나 재정적으로 거의 안정권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400명선의 돌파는 목사의 비젼과 전략적인 프로그램, 그리고 교인들의 결단이 있으면, 용이하리라고 본다. 이와 같은「중형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원인은 거의 목회자의 비젼과 리더쉽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가 비젼이 없고 교회성장 의지와, 전략적인 프로그램개발이 없으면 이「중형교회」는 현상유지나 침체상태를 면치 못한다. 물론, 교인이나 체제가 안정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도산할 위험성은 거의 없다. 교회가 계속해서 비젼이 없고, 교인들의 훈련과 프로그램의 개발에 힘쓰지 않고 안일무사주의로 나아가면 침체하다 못해 쇠퇴할 수도 있다. 도약이냐? 침체냐? 쇠퇴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때이다. 이와 같은「중형교회」가 교회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데 가로막고 있는 큰 장벽은 첫째로, 좀더 도약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폭넓게 확장해나가기 위한 비젼과 노력이 없는 목회자의 안주주의(安住主義)의 태도와 교인들의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 교회운영에 회집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구태어 희생하면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새로운 고생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의 주요 멤버들이 새로운 일군들을 맞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의 문제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장애요소들을 제거하거나 개선하지 않는한「중형교회」의 도약은 힘들게 된다.

  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 전략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이「 중형교회」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교회성장에 대한 태도이다. 교인들에 앞서 목회자가 교회의 "비성장 멘탈리티"(non-growing mentality)에 빠져 있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이다.「중형교회」쯤 되면, 어느정도 안정권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급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특히 현대교회와 같이 경제적으로 충분한 상태이고, 교인들도 성숙했으며 각기 자기의 생활이 바쁘다보니, 교회에서 예전과 같이 피차에 매달려서 교권쟁탈전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시험들 일도 별로 없어졌으니 좋게 말하면 안정속에 고요라 할까? 염려로 말하면 교회가 활기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목회자가 교회를 좀더 성장시켜 볼려고 노력을 하나 만만치 않으니까, 시도하다가는 그냥 안주(安住)하는 쪽으로 기울지고 만다. 그러므로 400명선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현상유지(status quo)에 안주할려고 하는 것이 교회성장의 가장큰 장애요소가 된다.
이「중형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해결해야 할 것 중에서 첫째로, 목회자가 새로운 도전을 받아서 이 "안주 멘탈리디"(comfortable life mentality)를 벗어나는 일이다. 다음으로 목사의 교회성장 의지에 따라 교인들이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과 의지로써 "교회성장 열망의 파장"(church growth desire wave)을 전교회로 파급시켜야 한다. 둘째로, 교회의 전반적인 조직의 기능을 다이나믹하게 변화시켜야 한다. 물론, 이 경우에, 한편에서 따라오지 못함으로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교회가 성장하는데 따르는 성장고통(growing pain)이며,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가 자연스럽게 치유시켜주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목회자와 멤버들의 관리능력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는 교회관리에 관한 연구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 넷째로 목회사역의 대폭적인 부분을 목회자에게서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이양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평신도 지도자들의 감독, 지도, 훈련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체제로 변환해야 한다. 다섯째로, 교인들의 증식(增殖)을 위하여 체계적인 셀그룹들(cell groups)을 조직해서 운영해야 한다. 여섯째로, 새로 영입된 일군들을 교회성장을 위한 적재적소(niche)에 배정한다. 일곱째로, 교회를 배가로 성장시키기 위한 빅 이벤트(big events)의 기회들(X-MAS, 추수감사절, 부활절,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등)을 유효하게 이용한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강력한 비젼과 협력체제를 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덟째로, 목회자는 더 큰 비젼을 창출하며 그 비젼을 이루기 위하여 광범한 교회 멤버들의 협력체제를 구성해야 한다. 아홉째로, 질적이며 효과적인 프로그램들(quality programs)을 개발해야 한다. 열째로, 교인을 수용하기에 충분하고 교회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충분한 시설들을 확보해야 한다.
칼 죠지(Carl F. George)는 교인 400명의 장벽을 돌파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다루고 있다. 첫째로, 운영위원회와 어떻게 최선을 다하여 일할 것인가? 둘째로,「소형교회」멘탈리티의 해결문제, 셋째로, 새로운 위원의 역할에 대한 저항문제, 넷째로, 합리적인 교회운영, 다섯째, 직원반응의 관리문제, 여섯째, 직원채용문제, 일곱째, 현대의 흐름의 경향문제, 여덟째, 대리의 기술개선문제 등을 취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성장하여 커지면 커질수록 목회의 전략과 방법이 다양화하고 전문화하게 된다.

2. 대형교회의 특징과 성장전략

현대교회에 있어서「소형교회」도 몇개의 카테고리(categories)로 구분할 수 있는 것과 같이,「대형교회」도「대형교회」(400-800),「수퍼교회」(800-2,000:1,000-3,000),「메가교회」(2,000-10,000:3,000-10,000) 그리고「메타교회」(10,000-UP)로 구분한다.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인도하는 목회자들에 의해 처방된 어떤 특별한 프로젝트(special project)가 없이도 부흥되기도 한다. 이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이유는 첫째로, 대형화된 교회의 회중(the large sized congregation of the church), 그 자체가 교회가 자연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특별한 성장요소(source of growth)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성장의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교인(평신도)들을 활성화(mobilization)하는 것이다. 만일, 소형교회가 교인들을 활성화하지 못한다면 교인들을 통한 성장은 조만간 멈추게 되며, 그렇게 되면, 곧 쇠퇴해 가는 교회(declining church)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라면 교인 활성화의 특별한 계획이 없이도 교인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활성화할 수 있으며 특별한 계획이 없다 해도 자연스러운 교인들의 접촉을 통하여 다소간 교회성장을 계속할 수도 있다.
또한, 대형교회의 교인들은 여러가지 교회의 일이나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많다. 교인들의 참여는 그들의 개인적인 신앙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교회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피터 와그너는 대형교회의 장점에 대하여 "대형교회에서는 친밀한 우호관계를 갖을 기회를 얻게 되고, 보다 쉽게 친하게 되며, 적극적인 사회봉사에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종류의 기독교 봉사의 기회가 열려 있고, 세계전도로 선교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최상의 성가대 등 계속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형교회는 다양한 목회활동(multiple ministries)을 할 수 있다. 대형교회는 잘 훈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직원들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성장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준비할 수 있다. 대형교회는 한 분야나 다른 분야에서 전문가인 사람들을 더 많이 고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한 보수를 지급할 수 있다. 대형교회는 교회성장을 위해 잘 훈련된 지도자들(well-trained leaders)을 고용하는 등 교회성장에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전술한 바와같이 소형교회가 가지고 있지 못한 교회성장 운동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교회성장을 위한 장기전략은 물론 단기 집중적인 투자전략까지 충분히 세울수 있다. 결론적으로, 대형교회는 흥분되어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을 위하여 편안한 분위기를 준비하는 것 외에 소형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5) 교인 800명선을 돌파하는 방법

교인 800명선의 장벽은「 대형교회」(The Large Church)가 넘어야 할 첫 번째 교회성장의 장벽이다.「대형교회」의 첫 번째 수준이 되는 교회는 교인 400-800명선(혹자는 250-750)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이다. 미국의 경우에 전교회중에 단지 1%만이 이 교회 수준으로 성장한다. 이 교회들은 목사를 비롯한 여러 직원들이 하나 이상의 직무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부목사가 2-4명과 강도사, 남·여전도사, 교육전도사, 기타 교회의 풀타임 직원들이 제법 많은 교회이다. 특히 각 부서별로 기관운영과 다수의 자치기관들(남녀전도회, 선교위원회 등)이 규모있게 운영되기 시작한다.

  교회의 성격과 장애물

이「대형교회」의 성격은 중형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적인 분위기가 사라진 교회다. 제직회나 여러개의 남·여전도회, 청장년회를 중심으로 주로 친교활동이 이루어진다. 교인들간의 친밀관계가 희석된 교회다. 이「대형교회」는 주로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영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교회들은 프로그램이 다양화되어 있고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참여하여 교회를 돕는다. 교인들이 프로그램들에 관심이 크고 문화적인 활동 프로그램도 실행한다. 그러나 이런 교회가 교인들의 훈련을 위하여 양육프로그램과 전도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데 소극적인 것이 문제이다. 아주 대형화되어서 수퍼쳐치나, 메가쳐치, 또는 메타쳐치와 같이 초대형 교회가 구성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프로그램 개발에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교회의 가장 큰 문제들(problems) 중의 하나는 새로운 교인들의 동화(assimilation)의 문제이다. 교회에 이끌려 왔다가도 그들에게 적절한 소그룹 프로그램에 참여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은 쉽게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대형교회」의 새 신자들 중에 절반 이상이 비활동 교인이 되어버린다. 완전한 대형교회로 발돋움을 하려는 교회이다.

  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 전략

이「대형교회」가 800명선의 교회성장 장벽을 돌파하려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전략들을 포함하여 분석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점점 교회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복잡한 조직의 구성이 불가피하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평신도 지도자들의 훈련과 목회사역에 참여시키는 일이다. 효과적인 사역의 역할들은 개인적인 능력과 관심, 열정,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들에 기초한다. 400-800선을 돌파하려면, 행정기관의 직원들도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각 파트별로 풀타임 목회자들이 전문적으로 사역하는 팀사역(team ministry)이 시작되는 규모의 교회임으로 이 팀사역 체제를 잘 정착시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사역자들의 사역의 준비에서부터 사역의 정돈에 이르기까지의 전반적인 사역에 관한 오리엔테이숀이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담임 목회자에게 있어서 교회 관리기술이나 교회 경영기술은 필연적이다. 이 관리기술이나 경영기술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다른 협력 사역자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물론, 다른 협력 사역자들에게까지도 교회의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지정된 사람이나 봉사,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 활용되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요약하면, 축제분위기의 예배와 증식훈련이 잘된 소그룹의 활동이다. 교회의 사역들은 이 시기부터 작은 목표에 맞춘 그룹에서 큰 목표에 맞춘 그룹으로 전환해 나아가야 한다. 특별히 불신자전도를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야 하며, 매래의 교회성장의 전략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사랑과 순종과 봉사에 의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한다. 다음은 교인 800명선의 장벽을 돌파하기 위한 칼 죠지의 전략이다.
첫째로, 목회자는 교회의 성장의 벽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목회사역상의 피로의 문제(terminal fatigue)을 해결해야 한다. 둘째로, 목회 사역체제의 부단한 개혁과 발전이다. 특히 목회자의 시간관리와 조직상의 구조를 재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로, 교인들을 보살필 캐어 시스템(care system)을 구성해야 한다. 모세가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등으로 조직화 한 것과 같이 목양 사역체제를 조직화해야 한다. 넷째로, 새 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적절한 마켙전략(niche marketing)을 사용해야 한다. 다섯째로, 교인들을 연령이나 생활 스타일에 따라 분류해서 사역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곱째로, 수퍼쳐치와 메가쳐치의 한계도 이해해야 하며, 여덟째로, 미래를 향한 리더쉽의 개발이 필요하다.

(6) 교인 2,000명선을 돌파하는 방법

교인 2,000명선은「수퍼교회」(The Super Church)가 다음으로 넘어야할 교회성장의 장벽이다.「수퍼교회」는 교인 800-2,000명선(혹자는 750-2,000명)의 초대형 교회로 소형교회에서 볼 수 있는 교인들간의 친밀감을 찾아볼 수 없는 교회이다. 미국교회의 경우, 주일낮 교회 참석교인이 이 수준을 넘는 교회가 고작 0.4%라고 한다. 벌써 교인이 1,000명이상 넘는 교회는 교인들과 지역사회의 필요에 따른 프로그램들이 잘 개발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소그룹 신앙생활과 전도훈련 프로그램이 약간의 형식적인 실행들을 하고 있을 뿐 체계적인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것이 한국교회의 침체원인으로 중대한 문제중의 하나이다. 미국의「수퍼교회」들은 목회사역이 분업화되어 있으며 전문화된 직원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이 전문가들은 연령과 생활단계에 따른 사역을 감당하며, 산하 기관들의 평신도 자원봉사자들을 감독하기도 한다. 그 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협동관리 체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경우에 시급한 것이 신학교나 목회자 연장교육기관(Continuing Education Institution)에서의 전문적이 교회관리(인간관리, 조직관리, 재정관리, 프로그램관리, 시설관리, 시간관리, 갈등관리, 등등)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서 목회자 자신이 목회현장에서 상황에 따라 개발적용해 나아갈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 정착되어야 한다. 필자도 여러 신학교를 다니며 배웠지만 목회자가 실제로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과 크리닉(clinic)의 경험이 대단히 약하기 때문에, 자신스스로가 개발하던가 연장교육을 이용해야 하는 형편이다.

  교회의 성격과 장애물

이「수퍼교회」의 특징은 담임 목회자가 교인들의 목회적 관리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목회자 한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교인들의 수가 약 150명의 한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목회자가 직접적으로 교인들을 일일이 돌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교회 교인들은 담임 목회자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담임목사가 심방하고, 집례하고, 기도와 축복을 해주어야 더 큰 축복을 받는 줄로 오해하는 것이 문제이다. 벌써 교인 800명 이상의「대형교회」에서도 담임 목회자가 교인을 직접 돌보기가 어렵게 된 상황이다. 교회조직과 기관들이 매우 복잡한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술상으로 운영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교인들의 복잡성과 기관의 다양성에 의한 관리미숙이 이「수퍼교회」의 문제점으로 곧 잘 대두된다. 또 프로그램 개발문제도, 전문화되지 않은 교회에서는 힘들기 때문에 현대 교인들에 맞는 신앙생활 훈련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큰 문제가 된다. 이러한 장벽들을 속히 극복하지 않으면, 단순한 교회로 남게 되거나 심지어 침체와 퇴보의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 물론, 교회의 기초가 잡혀있기 때문에 도산위기는 거의 없다.

  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 전략

앞에서 잠시 살펴본대로 이「수퍼교회」가 성장하는데 가장 큰 장벽은 역시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오리엔트되어 있는 "샤만니즘적인 담임목사 멘탈리티"(Shamanistic senior pastor mentality)이다. 이 문제는「대형교회」(400-800) 이상의 초대형 교회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수천명이 넘어가면 담임목사가 교인들을 직접 심방하고, 주례하고, 기도해주고 하는 개인신앙 지도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교인들이 비로서 알게 되어 초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양해사항으로서 믿고 있어서 "샤만적 목사 멘탈리티"에서 해방될 수 있으나, 1,000명 이하 되는 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는 본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물론 열심히 특심하여 사명감에 손수 뛰는 목회자도 있지만,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교인들의 비위에 맞추다 보니 자신을 혹사하여, 신경이 감당하지 못하여 신경에 이상이 오거나, 자신의 체력이 감당치를 못하여 지쳐서 번아웃(burn-out)되어 "엘이야 신드롬"(Eliah syndrome)에 시달리다가 심한 경우에는 20-40년 할 목회를 10년도 못하고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게 된다. 이와 동시에 효과적인 목회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들은 첫째로, 이 "샤만적 목사 멘탈리티" 를 속히 교정해서 담임목사나 다른 어느 부서의 목사라도 직무상으로는 구별되어 있으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그 기능상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사역들이 효과적으로 분담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새 신자들을 전도하고 관리할 전분적인 목회자를 기용하고 훈련시켜서 그로 하여금 그 수하에 평신도 지도자를 거느리고 새 신자의 전도와 관리를 전담하도록 한다. 세분화되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리더들에 의해서 소그룹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수퍼교회」이상의 초대형교회는 "피플파워"(people power)와 "축제파워"(celebrating power)의 큰 장점들을 이용함으로써, 특별행사들을 통하여 교인들의 신앙심과 사명감을 고취시키고, 불신자 전도의 계기로 삼는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상황에 따라 구역활동을 강화하고, 더욱 구역들의 지역별 연합행사와 사역의 기회를 되도록 많이 준비한다. 그리고 특수목회 대상지역을 선정하여 다각적인 교회성장의 전략으로 삼는다. 사역자들의 역할에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 사역자들도 그들의 사역방식을 손수 전부하는 방법에서 평신도를 훈련하고, 그들의 상역을 계획하고 연결하는 "반목장경영 방식"(semi-rancher style)으로 전환해야「메가쳐치」(the mega church)로 넘어가는 준비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게 된다. 교인들도 자기를 위한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사역을 준비하는 사역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시설들과 모든 첨단 장비들(Computer, Copier, Fax 등)을 최대한도로 이용하여야 한다. 이제부터는 대기업의 경영식의 목회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와있기 때문에, 대기업과 같이 방대하고 치밀한 인사조직과 경영관리 기술을 통하여 이끌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7) 교인 10,000명선을 돌파하는 방법

교인 10,000명선의 장벽은「메가교회」(The Mega Church)가 넘어야할 교회성장의 벽이다. 이「메가교회」는   교인 2,000-10,000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초대형 교회로, 이는 대기업체와 같은 인상을 준다. 교인들 사이에 친밀감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누구인지 조차 알아볼 수 없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열심있는 교인들은 자기 신앙생활의 편의를 따라 소형교회나 중형교회로 가든가, 아니면, 각각 소그룹 활동에 참여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된다. 이 교회에서 평범한 교인은 봉사할 기회마져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물론, 프로그램이 잘 짜여져 있는 교회에서는 경우가 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주일에 교회 참석하여 예배 한번 보거나 좀 더 열심있는 교인들은 구역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이다. 이런 교회는 주로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이나 특별한 직원들에 의해서 운영된다. 전문가들이 조직에 관하여 연령별이나 필요에 따른 사역을 감독하게 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음악, 기독교 교육, 전도훈련, 불신자 전도 등을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 지도한다. 많은 평신도들이 직원들과 같이 일하고, 각 장년그룹들은 산하교회를 운영하기도 한다. 충분한 시설, 리더쉽, 협동의 기회들은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에 결정적인 이슈가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초대형교회는 인간의 유기적, 정서적 관계보다도 수천, 수만의 사원들이 움직이는 기업과 같이 기계적인 운영관리가 되기 쉽다.

  교회의 성격과 장애물

이 교회의 성격은 역시 대규모 교회이기 때문에 교인들 사이에 친밀감이 없다. 교인들 중의 소수만이 교회활동에 적극 참여할 뿐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일 교인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신앙의 질적 성장에 매우 취약점을 보이는 것이 단점이다. 심지어 교인들은 물론, 제직들 사이에도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저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교회생활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수 많은 교인들이 교회성장의 상당한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이 막대한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엄청난 인적 자원의 연결고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초대형교회 교인들은 교회의 사역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교회성장을 위한 인적 자원을 활용하는데 크나큰 장애가 되는 교인들의 멘탈리티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메가쳐치」도 이러한 멘탈리티를 제거하고 이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개발하여 교회성장운동을 위하여 투입할 때에, 교회는 다음 단계인 10,000명선을 돌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회는 생명력이 있는 유기적인 생명체(organic body of life)이므로 그 속에 무한한 에너지 발생장치(living generator)가 있어서 잘만 돌려준다면 계속해서 에너지가 발생하여 무한대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성장의 장벽을 돌파하는 전략

사실, 교회가「메가쳐치」의 규모로 갈때까지 셀(cell)들을 증식시키고, 셀 리더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구조가 순조롭게 운영된다. 첫째로, 상당한 수의 전문 교역자들(부목사, 교육담당, 음악담당, 비즈니스 행정, 전도, 불신전도, 가정생활 담당 등)이 증강된다. 목회 보조직원들(행정보조, 보안담당, 수위 등)들이 교회직원들과 보조를 맞추어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시설들을 확장하고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다중예배를 보거나 다른 지역으로 확장 이전하는 것도 계획해야 한다. 시설증설의 대안으로 자교회를 설립하여 대그룹을 분가해서 내보내는 방법도 있다. 여기에는 자격있는 목회자나 리더를 배치해야 한다.
그런대 이와 같이 초대형교회인「메가쳐치」의 가장 취약점은 교회의 영적인 본질을 상실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적인 소그룹 활동을 활성화시켜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교회는 유기적이며 영적인 생명의 기관이라 만일에 그 속에 영적인 생명력이 없으면, 하나의 거대한 메카니즘(mechanism)으로 전락하고 만다. 현대교회가 하나의 거대한 종교기관, 그것도 경제기관같이 되는 것은 교회의 기업화 현상으로 그 속에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영적인 생명력을 잃으면 교회의 성장이 중단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력이 있는 교회로 유지하려면 영력있는 리더들을 많이 사역에 참여시켜야 한다. 

(8) 교인 10,000명 이상으로 성장하려면

교인 10,000명이상의 교회를「메타쳐치」(The Meta Church)라고 하는데 전세계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한국에는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를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세계적으로 보면 이 한국교회의「메타쳐치」규모가 거의 10위권안에 들어있을 정도가 된다. 이「메타쳐치」의 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은 풀러신학교의 교수로 있는 폴 히어버트(Paul Hiebert)이다. 본래 히어버트는 형이상학(metaphisics)에 대응하여 변형신학(metatheology)과 변형문화(metaculture)의 개념들을 선교학에서 사용하였다. 여기서 접두어인 "메타"(meta-)는 "변화"(change)의 뜻으로 교회의 사이즈를 초월해서 목회자와 교인들의 멘탈리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무한대의 성장을 의미하면서도 그것의 깊은 의미가 "변화"에 있다는 점에서 메가쳐치와 그 개념이 현저히 다른 것이다. 칼 죠지는 교인이 10,000명 이상을 넘을 경우, 이러한 교회를「메타쳐치」로 정의 했는데, 이「메타쳐치」는 무한대 성장의 모델이면서, 한편으로는 동시에 높은 질적 성장과 개인에 대한 돌봄의 사역을 유지하는 교회를 말한다. 이「메타쳐치」의 조직상의 구조는 최대한의 숫자의 교인들을 양육하도록 위탁된 다수의 사역교인들로 되어있다. 이 훈련된 리더들은 교회에서 평신도 사역을 담당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은사들을 발견하고 사용하게 된다.
이「메타쳐치」에서는, 칼 죠지에 의하면, 방문객과 새 신자들을 위하여 디자인된 훌륭한 이벤트(the high presentation event)와 교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리고 새 신자들과의 친교와 연결될 수 있는 축제예배를 갖는다. 그리고 안내와 문제해결, 계획 등을 위한 리더쉽 개발과 감독 미팅을 갖고 사역팀이 준비하는 리허설과 사역을 위하여, 사역자들의 조직을 위한 사역미팅, 그리고 소그룹 시스템을 통한 서로서로가 돌보는 상호사역(mutual ministry)으로서 셀(the cell)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미팅들을 갖는다.「메타쳐치」의 특징중에 다양한 길을 통한 친교와 봉사를 위한 아이디어나 기술 에 대한 계속적인 훈련 그리고 규칙적 봉사의 기회를 자주 갖을 수 있다. 지속적인 평신도사역과 기도를 통한 영적인 차원의 생기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와 같이 10,000명 이상의「메타쳐치」로 성장하려면, 질적인 훈련과 사역, 그리고 양적인 성장을 위한 고도의 전도훈련 등을 효과적으로 수행해나가야 한다. 중앙집권 체제(centralized system)와 분산사역 체제(decentralized system), 혹은 분담목회(shared ministry)의 병합사역 체제로 만들어야 한다. 소형교회 목회는 목사 단독의 사역으로도 가능하지만 중형교회에서부터 메가쳐치에 이르면 단독사역이 불가능하게 되니까, 분담사역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목자형 목회방식에서 목장경영형 목회방식으로 변환해야 한다. 그러나「메타쳐치」에서는 양적인 무한대 성장은 물론, 개인적인 고도의 질적인 신앙교육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목자형 목회방식과 목장경영형 목회방식을 겸해야 한다. 물론, 담임 목회자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을 고도의 신앙과 사역훈련을 시킴으로써 그들의 손에서 직접 개인적이며 질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목회자의 경영의 영향을 받게 됨으로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가 자기와 똑같은 소목자(小牧者)들을 대량으로 훈련시켜서 팀사역과 동시에 공동사역의 패턴으로 완전히 전통적인 목회방식을 탈피한 스타일이라 하겠다.  

(4) 목회자의 자기개혁

목회자는 자기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각성하고, 부단히 자기개발(self-development)에 힘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항상 묵상(meditation)하시고, 기도하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막 1:35, 눅 5:16, 6:12, 11:1). 특히 현대와 같이 목장(pasture: ministry field)이 광대하고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려면 목회자 자신이 이러한 상황에 충분히 대처해나갈 수 있는 인격적 감화력과, 지적 감화력(知的感化力), 그리고 영적 감화력(靈的感化力)을 얻기 위하여 자기개발에 부단히 힘써야 할 것이다.

1. 목회자의 시대감각

목회자는 시대감각이 있어야 한다.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지만, 그 진리의 표현방식(表現方式)과 실천양식(實踐樣式)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다(히 1:1,2).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원리에 있어서 진리의 유일성(unity of truth in methodology)과 방법론에 있어서 진리의 다양성(diversity of truth in methodology)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설명하자면, 진리의 문화적인 표현(cultural expression of truth)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표현방식도 지엽적인 것은 문화적 배경(cultural differences)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성경말씀의 근본적인 근간교리(doctrinal basis)는 문화적인 차원을 넘어서 불변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시대적, 범세계적 기독교회를 우리나라 기독교의 표현방식의 틀에 잡아 넣고, 고루한 아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사고방식(narrow-mind)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현시대의 세계적인 기독교의 복음운동의 "제3파도"(third wave)를 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걸맞지 않는 전근대적인 목회방식 때문에,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시대를 빨리 파악하여 성서적인 기초하에 시대에 걸맞는 목회, 즉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이는 목회(마 24:45)로 충실해야 한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비성서적이 아닌한, 시대에 걸맞는 목회방법을 남보다 빨리 도입하여 개발해서 실천한 목회자들이 교회를 성장시킨 사례를 많이 볼수 있다. 현대 목회는 현대라는 목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니되기 때문에 목회자는 현대의 목장경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2. 목회자의 권위문제

목회자는 인간적(유교적)인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목회자는 교회 교인들을 리드할 수 있는 영적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의 원천인 영적 권위(spritual authority)가 있어야 한다. 이 영적 권위는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고, 그 권위를 잘 관리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목회자의 권위(pastoral authority)를 목회자 자신이 잘 관리하지 못하여 상실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권위(God's authority)와 무관하게 자기가 멋대로 세우려고 하는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로 인하여 교회성장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경우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본의 아니게 교회성장을 막는 저해요소(church growth barriers)가 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 권위주의로 인하여, 평신도들을 자기의 목회의 세계관 속에 가두어 놓고, 목회에 관한 모든 것을 강요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써비스 받아야 할 메시지(words of God)를 통하여 죄로, 또는 세상에서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양들이 위로받고, 치료받기 보다는 더욱 깊은 상처를 받도록 강요되는 권위주의적 설교는 물론, 헌금을 비롯한 모든 교회생활에 있어서 자원봉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는 식의 권위주의적 목회방식은, 더구나 현대 목회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이 권위주의의 부작용(side-effect)으로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들의 멘탈리티(ministerial memtality)가 왜곡되어 대립과 분쟁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다. 미국과 같은 서구 교회들(Western churches)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사고방식(mentality)이 별로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로 인한 분쟁을 거의 볼 수 없다.
물론, 한국교회의 권위주의는 유교에서 유입된 것으로서, 수직적인 종속관계(vertical subordinate relationship)를 강조하는 데서 기인된 것이다. 이 수직적 종속관계는 올바른 권위를 통하여 수립되는 것이지, 무조건적 강요식의 권위주위로 수립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에서, 특히 현대 교회에서 영권(靈權)을 빙자하여 파쇼(facio, facism)식으로 목회를 하게 되면 무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머리(brain)로만 하는 목회는 피곤하며, 덕이 없이 하는 목회는 존경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따르지 않아 고전하게 된다. 목회는 머리로 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사랑의 덕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현대교회(contemporary church)의 목회자들(ministers)은 공(公)히 영적 감화력(spiritual touch)을 통하여 강단의 권위(authority of pulpit)를 세우고, 그리고 지적 감화력(intellectual understanding)을 통하여 현대 교인들을 교육하여, 이해로 유도하며, 인격적 감화력(moral influence of personality)을 통하여 크리스챤 생활에 본이 되고 존경받는 주의 종이 되어야 목회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수월해질 것이다. 이와 같은 감화력을 통하여 초대 교회와 같이 서로서로 아낌없이 바치며(행 2:35, 4:32-35), 사랑하고 함께 사역(co-working)하고 주님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는(마 25:23) 목회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3. 목회자의 독선행위

목회자는 유아독존적 독선으로 독주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목회자나 평신도가, 목회는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만이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멘탈리티(metality)가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들 머리속에 오리엔트되어(oriented)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목회사역을 전유물로 착각하여 "목회에 관한한 모든 것은 전문가인 내가 알지 누가 알겠느냐? 그런고로 내가 하는대로 무조건 순종하라"는 식의 독선으로 독주하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독선에 의하여, 독주하게 되면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누릴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게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로, 교회의 모든 짐을 목회자 혼자 져야하기 때문에, 아주 지쳐서 번아웃(burn-out)되어서 장수목회(long-run ministry)가 불가능하게 되고, 둘째로, 더 많은 일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셋째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목회자 혼자서 져야 된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는 것이다. 모세(Moses)도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문제를 혼자 담당하다가, 지쳐서 번아웃 될뻔 했을 때, 그의 장인 이드로(Jethro)의 충고(advice)에 따라서 십부장(rulers of tens), 오십부장(rulers of fifties), 백부장(rulers of hundreds), 그리고 천부장들(rulers of thousands)을 통한 분담목회(sharing ministry)의 방식을 도입하여 백성들을 무리없이 다스릴 수 있었다(출 18:18).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목사가 같은 교회에서 장기목회(long-term ministry)를 하기가 어렵게 되거나, 건강을 해쳐서 일찍 은퇴(retire)하고, 장수 목회(long-run ministry)를 할 수 없게 되는 사례들이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모든 일의 책임, 더 나가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책임도 목회자 혼자서 져야 하는 외로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교인들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책임을 거의 전적으로 목회자에게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평신도들과 함께 뛰지 않고 목회자 혼자 독주했으니,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도 목회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논리이다. 목회자 보고 책임지라는 뜻이다. 물론, 교회성장의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리더쉽(leasdership)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목회자만의 원-맨쇼(one-man show)의 극장(studio)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목회자는 평신도와 함께 함께 사역하고(co-working),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님께서 직접 마련해주신 반석위의 교회(마 16:18)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목회사역은 목회자나 평신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에 따라, 월권하지 않고 각각 자기의 맡은바 직분에 충실할 때에 성장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분명히 그어진 구별선을 무질서하게 넘나드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이 문제는 평신도를 철저히 훈련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역시 목회자의 평신도 훈련에 달려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목회사역을 위하여 각자의 위치에서 충성할 때에 교회는 은혜롭게 성장해나간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의 훌륭한 리더쉽(leadership)과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공동협력(co-operation)을 요한다는 뜻이다.

4. 목회자의 자기 개발

교회는 목회자의 역량에 따라 성장하게 된다. 목회자가 성장하는 것만큼 성장하고 목회자가 발전하는 것만큼 발전한다. 물론, 여기에는 목회자의 관심도와 자기역량의 투자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목회자의 역량에 정비례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기 자신을 부단히 개발해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목회자들의 무릎은 항상 군살이 배기고 목회자의 손에는 항상 성경은 물론 책이 들려져 있어야 한다. 엎드리면 기도하고, 앉으면 책을 읽고, 일어나면 증거하는 복음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기도에 빠지고 책에 미쳐야 한다. 목회자는 누구보다도 연구하며, 기도하는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1) 목회자의 영력개발

목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영력(spiritual power)이다. 목회자가 영력이 없으면, 목회는 물론 자기를 위한 신앙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싸움이다. 육신의 싸움은 체력(體力)이 강한 자가 이기고, 전쟁에서는 무력(武力)이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것과 같이 영적 싸움은 영력(靈力)이 강한 자가 승리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영력이다. 이 영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시는 은사(恩賜)들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목회사역에 백분 활용해야 한다.

1) 목회자의 사고(思考) 개발

목회자는 묵상(暝想: meditation or contemplation)을 통하여 사고력(思考力)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목회자는 교훈위에 교훈, 믿음위에 믿음, 성실위에 성실로 더욱 믿음의 생각이 승화하여 더욱 고상한 영감의 사람으로 발전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더욱 성숙화(成熟化)되도록 "발전적 사고"(發展的 思考)를 해야 한다. 이것을 말해 "누적적 원리"(累積的 原理, the principle of the development of continuity)라고 한다(Erilcson). 이것을 가리켜 성결교회에서는 "성화입적"(enter-sanctification)이라고 한다. 즉 사고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물론 행동의 변화까지 포함하는 것이지만). 과거의 고정관념이나 인습(invention)은 자기발전에 저해요소가 된다.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아니오"(No)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예"(Yes)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예스의 종교"(Yes Relig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한 말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나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8-19).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교회내의 부정적인 사고방식등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에 앞서 목회자는 자기속에 있는 부정적인 사고와 인습들을 사정없이 제거해야 한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목회자는 묵도(默禱: prayer in one's heart)들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아이디어"들(ideas)을 얻어야 한다. 목회자는 목회에 관한 비젼(vision)을 받어야 한다. 또 목회자는 교인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목회에 관한 "비젼"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목회에 관한 비젼화(visionization)와 이상화(idealization)가 되어야 한다. 항상 무릎을 꿇고 하나님으로부터 목회에 관한 비젼과 아이디어를 받아서 그 비젼을 이루어 나가고, 그 아이디어를 활용해서 교회성장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목회자는 두 가지 직능(職能)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설교(preaching)와 행정(administration) 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 두 직능을 행하기 위하여 이들에 관한 비젼과 아이디어를 받아야 한다. 설교를 위하여 목회자는 끊임없이 영감을 통하여 비젼을 받아야 메시지가 분명하게 되고, 메시지가 분명하면 확신이 생기고, 확신이 있으니까, 담대하게 전할 수 있으며, 담대하게 증거되는 말씀에 능력이 나타나서 교인들의 영혼과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목회자는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도록 기도하고 묵상해야 한다. 목회자가 소리내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용한 가운데 묵상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쫓기다 지쳐서 광야의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보내주신 떡과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려 40여일이나 광야를 달리는 체력을 과시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 호렙산 굴속에 들어가 피신하고 있을 때에, 고요한 가운데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용기를 얻고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자기의 후계자가 되게 하라는 하나님의 대명령을 완수하게 되었다(왕상 19:1-18).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의 종이 아무리 체력이 강하고 지식이 있다 하더라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영력(spiritual power)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엘리야가 영력과 용기를 얻게 된 것은 바위를 가르는 바람과 폭풍의 역사가 아니라,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묵도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확신과 영력있게 교인들에게 전해야 한다. 목회자는 자나 깨나 항상 귀를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으로 갑자기(suddenly)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영의 직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은 행정, 혹은 교회관리를 위한 훌륭한 아이디어를 얻어서 교회를 지혜롭고 은혜스럽게 관리할 수 있는 리더쉽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설교를 잘 하여도 교회와 교인관리능력이 없으면, 장기목회를 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설교를 잘하면 부흥회에서 일주일 천사노릇을 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수년에서부터 수십년 혹은 평생 목회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관리의 능력이 없으면 어렵게 된다. 인간관리, 조직관리, 프로그램관리, 시간관리, 재정관리, 시설관리 등의 교회관리 문제는 필자가 다른 세미나를 통하여 다룰 계획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그의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종이 되기만 하면,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관리의 아이디어와 관리능력을 주신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목회자들은 기도하고 묵상하는 생활로 항상 하나님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국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주시는 아이디어를 통하여 목회사역을 해나간다고 한다.

2) 목회자의 은사(恩賜) 개발

은사개발(恩賜開發)이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 부적당한 말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은사(gift)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인간이 어데서 금을 캐듯 금광을 개발하거나, 경제를 개발하듯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은사를 개발한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1960, 70년대만 하더라고 전혀 생소한 상황에서, 영적은사에 관한 책을 쓰면서 피터 와그너는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서에 직설적인 언급이 없다고 해서 비성서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핵심적인 교리까지도 직접적인 용어로 표현하지 않고 있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불변의 교리(dogma)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그 용어가 한군데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 주신 선물인 은사를 한 달란트 받은 미련한 종과 같이(마 25:24-30) 묻어두지 말고, 개발해서 장사를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하면 되리라 생각한다. 또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여 고액을 주고라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사람의 지혜와 의지를(마 13:44) 현대 목회자들도 가지고, 목회를 위한 자기 은사의 발견과 목회방법론의 개발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기의 은사를 발견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할 때에, 더욱 교회가 활성화되고 성장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자기의 은사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가 그의 저서에서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피터 와그너의 방법을 소개한다.
피터 와그너는 은사를 발견하는데 있어서 우선 네 가지 근본적인 선제조건인, (1)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 (2) 영적은사를 믿어야 한다, (3) 즐겨 일해야 한다, (4) 기도해야 한다고 사전요구를 하고, 은사를 발견하기 위한 다섯가지 단계를 제시했다: (1) 가능성들을 탐사하라, (2) 되도록 많이 실험하라, (3) 자신의 감정을 시험하라, (4) 자신의 결과(효과)를 평가하라, (5) 교회공동체로부터 확인하라. 
은사의 개발(開發)은 크게 두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은사의 발견(發見)이고, 다른 하나는 은사의 발전(發展)이다. 첫째로, 은사의 발견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들을 그 정도에 따라 발견하여 정리하는 일이다. 물론,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지만, 사실 사람마다 한 가지 은사만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몇 가지 혹은 여러가지 은사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 은사의 정도,혹은 순위적으로 볼 때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목회자중에는 대부분이 말씀의 은사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다른 몇가지 은사들을 겸하여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은사들을 발견하고 그 순위(order)를 정리해서 그 우선순위(priority)를 따라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그 우선순위를 따라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주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게 된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실패해왔다고 반성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자신의 은사를 우선순위에 따라, 아니면 가장 강력한 은사만을 집중적으로 개발해서 사용했더라면, 더 효과적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자기 은사의 순위를 발견하지 못한채 일을 하다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은사들을 발견하는 일과 그 은사들의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일이 목회자가 먼저 해야할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둘째로, 발견해서 정리한 자기의 은사들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은사를 발전시키는 일도 역시 그 우선수위에 따라 해야 효과적이다. 자기에게 가장 강한 은사를 먼저, 그리고 강력하게 발전시킬 때에 목회사역에 가장 큰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물론, 다른 은사들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다. 심지어 목회자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약한 부분이라도 기도하며 계속적으로 발전시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구원의 은혜(saving grace)는 단번에 완성되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시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역을 위한 은사(the gifts for works)들은 계속해서 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3) 목회자의 능력(能力) 개발

항상 지적하는 바와 같이 목회자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려면, 무엇보다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생각은 간절하다 하더라도 능력이 없으면 일을 이루어 나가기가 힘들다. 우선 목회자가 능력이 없으면 설교하는 것부터가 고역이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게 되는데 목회자가 한나님의 능력을 받지 못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느니라(고전 4:20). 더구나 오늘날에는 믿음의 능력있는 평신도들이 많으므로, 목회자가 능력이 없으면 교인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되도록 성경말씀에 도취되고, 열심히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 본래 개발(development)이라는 말이 주로 정치적인 용어와 경제적인 용어로 사용되다 보니 정치, 경제학의 상표(trade mark)가 되어버린 것 같고, 인본주의 냄새가 다분하다 보니, 신앙에 관한 용어로 채용하기가 어색한 점도 없지 않으나, 이론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서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에 익히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목회자가 교회성장을 위하여 능력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목회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기도생활(praying life)을 계속해야 하며, 그래야 지속적으로 영력을 유지할 수 있다. 능력있는 기도는 영력을 받는 지름길이 된다. 능력을 받는 기도로는 묵상기도(默想祈禱)보다는 발성기도(發聲祈禱)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사도들은 오순절 이후에 헤롯과 결탁하여 크리스챤을 박해하려고 모인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합심해서 "소리높여"(高發聲) 부르짖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높혀 가로되 대 주제여.....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 4:22-31).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지속하려면, 경건의 생활이 필요하다. 경건생활(敬虔生活)은 하나님에게 받은 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하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데는 강력한 기도가 필요하지만, 그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경건의 생활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은 소멸되기도 하기 때문에(살전 5:19), 능력을 담은 그릇(?)인 인간 자신이 경건치 못하면 약화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계속적인 기도와 경건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경건생활에 이상이 생기면 능력은 커녕 자신의 신앙생활 유지에도 어렵다. 그래서 다윗은 회계하면서 성령을 걷우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시 51:11).

(2) 목회자의 지력개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충실하게 전하기 위하여 지적인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에 있다고 해서 말씀의 지식을 무시하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연구해야 한다.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직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한 말이 아니다. 여기의 말이란 인간의 "자랑하는 말"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랑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데 아무런 능력도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인간의 자랑하는 말과는 무관하다는 뜻이다. 진리(말씀)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천국운동에 효과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는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진상"으로서(Charles Hodge),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과 관련있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4:19에 보면, 뜻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라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능력"은 "말씀"에서 나와서 그  "능력"이 "말씀"을 능력있게 만든다.
목회는 부흥회나 다른 전도방법과는 달리 동일 지역에서 동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기 때문에, 지적(知的)인 목회자료가 부족하면 설교나 기타 사역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성경지식이나 신학지식은 물론, 일반 과학, 의학, 법률, 예술, 철학, 윤리, 역사, 사회상식 등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는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하여 자신의 지력을 개발해야 한다. 지식이 달리면, 우선 설교자료의 빈곤으로 설교준비에 어려움을 느낀다. 세계적인 설교자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는 정상적으로 학교를 나오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연구를 계속한 결과 훌륭한 설교자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한 편의 설교작성을 위해서 온 가족이 동원되어 수십권내지 수백권의 책들을 참고하는 일에 돕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필자가 스펼전 설교집을 번역하면서 느낀 것은, 그가 순수한 복음을, 당시 영국의 문화적 상황(cultural context)을 고려하여, 많은 부분에서 영시(英詩)에 실어서 영국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 사실이다. 그래서 한 편의 설교속에 여려편의 영시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가 지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연구하는 길밖에 없다. 지식습득은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연구하는 길 밖에는 왕도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놀라울 정도로 지적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는 소망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성령의 지혜를 받으면 지식연구에 대단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성령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요 14:16), 특별히 지식의 은사도 주신다(고전 12:8). 물론, 지혜는 복음에 대한 영적 이혜의 은사라면, 지식은 복음에 대한 역사적, 경험적 이해를 명석하게 해주는 은사이다(고전 12:8; 요 14:26).

1) 목회자의 성서연구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성경지식에 능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식(主食)으로 하고 있는 양(敎人)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말씀을 공급해주기 위해서이다. 성경은 설교의 쏘스(source)이며 원재료(raw materials)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연구는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이다.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연구 방법은 수없이 많이 개발되어 왔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는 패턴(pattern)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귀납적 방법(inductive method)이요, 다른 하나는 연역적 방법(deductive method)이다. 귀납법적 방법은 일반적 의미(general meaning)를 끌어내기 위하여 성경구절의 특수한 특성들(particular facts)로부터 추론하는 방법으로서(주로 저자의 의도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에 의하여 널리 애용되어 왔고, 연역적 방법은 어떠한 전제(premise)나 보편적인 진술로 시작하여, 그들을 본문에 주어진 증거(evidence)에 따라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이러한 연구방법을 떠나서 순수한 성서연구의 태도인 칼빈의 입장을 따라 성성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칼빈의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은 한마디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성서 자체의 이용방법"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키(key)가 다름이아닌 성경자체라는 뜻이다. 성경해석의 문을 다른 키로 열려고 할 때에 문제가 생긴다. 성경의 문을 열 수 있는 키는 오직 성경으로서, 그 사이즈(規模)나 형(型)까지도 성경자체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 이상의 것들을 넘어가지 아니했다.「성경이 가는데까지 가고, 성경이 멎는데서 멎는다」, 그 리 고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데서 침묵한다」. 그의 이와 같은 성경해석의 태도는 오늘날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마음대로 해석하는 교역자들에게 금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심지어 지나칠 정도로 성경에 충실하다보니 은유나 비유들까지도 성경에 없는 것은 만들어내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았다. 또 자신이 이해하기 위한 영적인 실력이 모자랄 때는 두말 않고 무릅꿇고 두 손을 들었다. 성경 66권 전체를 수십권의 시리즈로 주석을 완벽하게 저술한 칼빈은 그의 박식한 지식에 힘입어 유창하게 흘러오다가 요한계시록 4장에 와서는 영적지식의 한계를 느끼고, 하나님의 신비로우심에 그만 펜을 놓은 후, 무릎꿇고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었다. 목회자는 성경은 오직성경으로(sola scriptura) 해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성경연구에 있어서 또 하나 참고할 것은 신학적인 문제이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때에는, 성경해석학의 방법을 사용하되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조직신학은 성경을 아이템화해서(itemize) 체계적으로 설명한 학문이고, 성서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progressive revelation)의 발전과정을 따라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학문이다. 성경해석학은 조직신학과 성서신학과 같은 성경원리에 맞추어 제작된 성경해석을 위한 연장(tool)이다. 그리고 훌륭한 성경주석들은 이미 해석된 성경해석이 올바로 되었는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비성서적인 것은 아닌지 등을 체크(check)해보기 위한 참고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서주석이 완전한 표준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성서연구의 분야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수 많은 학자들의 주석중에 엄선된 복음적인 주석들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목회자들은 성경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 목회자가 성경지식이 짧을 때에는 설교의 영감과 설교의 능력에 문제가 생긴다. 만일, 목회자가 성경말씀에 충만하게 도취되어 있다면, 그 자체로서 메시지의 능력을 갖게 될것다. 목회의 능력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심취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강하게 역사하여, 자신의 신앙 뿐만 아니라 목회에도 능력있게 한다.

2) 목회자의 신학연구

목회자는 규칙적으로 신학적인 이슈들을 발전, 승화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지식은 그 분량에 있어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많은 신학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없고 다만 신학연구 방법을 체득하는 것으로만도 큰 성과라 하겠다. 물론, 신학석사 과정(Th.M)이나 박사과정(D.Min., Ph.D., Th.D.)에 계속 진학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면 그 이상 없겠으나, 목회자들이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꾸준한 독학을 통하여 설교와 목회사역의 기초가 되는 신학을 좀더 심도있고 더욱 광범위하게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장목회를 하면서 "목회자 연장교육 프로그램"이나 수준있는 "신학 세미나"를 통하여 자기의 신학지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목회자가 신학지식이 결핍하면, 목회상에 몇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기기 쉽다. 첫째로, 설교를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없다. 체계적인 신학의 바탕이 없이 설교를 준비하게 되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모래위에 건축을 하는 것과 같이 설교 자체가 가건물같이 되어, 은혜롭게 설교를 했다 하더라도 일회성 설교(throw-away sermon)의 효과에 그치기 쉽다. 그러나 튼튼한 신학적 체계위에 마련한 설교는 세월을 두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학적 바탕으로 작성한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가 오늘날까지 내려오면서 계속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목회자가 신학적인 체계가 없으면, 교인들의 신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거나 훈련시킬실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신앙의 지적, 인격적인 수준의 저하를 면치 못하게 된다. 신앙이 체계화되지 못하면, 자신의 신앙생활이나 타인을 위한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셋째로, 목회자가 신학적인 지적 체계가 없으면, 교인들이 교리적인 충분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설(異說)이나, 심지어 이단(異端)에 빠지기 쉽다. 심지어는 목회자 자신까지도 이단이나 이설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요사이 한국교회의 건강상태를 진단해 볼 때, 몇가지 중대한 신드롬을 앓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전체는 아니지만 대체로 신앙 상태를 볼 때, "유명론 신드롬"(nominalism syndrome), "세속화 신드롬"(secularization syndrome), 그리고 "신비주의 신드롬"(mysticism syndrome)등이다. "유명론 신드롬"은 교회생활과 각자의 신앙생활이 타성에 젖다보니 영적으로 메말라지고 명목상의 교회생활, 신앙생활로 남는 증세를 의미한다. "세속화 신드롬"이란 경제성장을 가져온 산업사회에서의 경건한 신앙생활이 어려워지게 되고 오히려 신앙생활의 방식을 세속화시키게 되어 나타나는 증세를 말한다. 그리고 "신비주의 신드롬"은, 세속화의 리액숀(reaction)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결국은 신앙의 세속화로 영성(靈性)의 물성화(物性化)를 의미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신학지식의 결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요사이 영서파(靈書派) 방서파(方書派)들이 바로 그런 부류중에 하나이다.

3) 목회자의 일반 학문

목회자들은 성서연구와 신학연구와 별도로, 일반학문에도 조예가 있어야 한다. 철학을 비롯하여 역사, 과학, 의학, 심리학, 전기, 경건서적, 시사등 일반서적을 통독하여 목회사역의 밑거름을 삼는 것이 좋다. 물론, 일반지식이 설교에나 목회사역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나, 이 모든 지식들이 성서를 연구하거나, 교인들을 위한 사역을 할 때에 훌륭한 자료들이 된다. 예를 들어 철학과 역사는 현대신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어 교인들에게 정통신학을 파수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다. 과학서적은 현대인의 생활을 이해하고 현대 문화생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의학과 심리학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생리학적 병리학적인 이해를 도와서 신앙생활의 육체적, 정신적 관리에 도움을 준다. 전기서와 경건서적은 목회자 자신이나 교인들의 인생관이나 인생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케 해줌으로서 신앙생활의 지표를 삼는데 도움이 된다. 시사(時事)는 시대를 분별하여 때를 따라 교인들에게 영의 양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외의 모든 분야의 일반지식들을 습득하여 자신과 목회사역에 큰 도움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반 서적의 독서를 위하여, 첫째로, 훌륭한 분위기의 독서환경을 위하여 전용 서재를 마련하고, 둘째로,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평상시 늘 책을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독서의 방법은 체계적인 지식습득을 위해서 정독을, 광범한 지식의 습득을 위해서 다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4) 목회자의 언어 개발

목회자들은 설교를 주무(主務)로 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언어를 개발해서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가장 효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특별히 노력해야 한다. 언어의 개발을 위하여 몇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언어의 종류이다. 언어들의 종류중에는,「영의 언어」(spiritual language),「문화언어」(cultural language),「생활언어」(life language),「몸의 언어」(body language)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첫째,「영의 언어」(靈的 言語)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신앙의 언어」를 말한다. 이 언어는 신앙적인 용어를 구사하고, 신앙적인 언어의 스타일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은어나(隱語) 속어(俗語), 세속에서 정욕적으로 사용하는 세속적인 언어가 아니라 경건하고 은혜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성직자인 목사가 신앙적인 경건한 언어를 구사하지 않고 세속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면,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한다.
둘째,「문화의 언어」(文化言語)란 원시적인 시대의 언어가 아니라 계발된 인간의 현대적 언어를 말한다. 문화의 수준이 낮은 시대에 구사하던 언어는 문화가 발달한 현대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 많다. 그러므로 문화인으로서의 고상한 언어를 구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욕설을 섞어가며 설교를 해도 은혜를 받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전혀 어필되지(appeal)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생활언어」(生活言語)란 목회자가 생활로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목회자의 생활이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경우에, 그 목회자의 생활의 언어는 급속도로 폭넓게 퍼져나가기 때문에 목회사역에 막대한 영향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의 생활로 진실을 말하고 성실과 열성을 말해주어야 한다. 목회자는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아 그 생활로 설교를 해야 한다. 그의 생활로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 예수님은 "화육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그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구체화된 말씀(incarnate Word)으로 곧 예수님이시다(요1:1-14). 그러므로 예수님은 "화육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 생활로 직접 말씀하셨다. 목회자는 주님의 생활을 온몸에 익혀서 그리스도의 생활로 말해야 한다. 이것이「생활언어」이다. 넷째,「몸의 언어」란「생활언어」로서,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행동언어」(行動言語)를 말한다.「몸의 언어」란 단순한 동작 언어가 아니다. 단순한 동작예술(art cin tique)이 아니다. 단순한 의사전달의 언어가 아니다. 자기의 의사 뿐만 아니라 사상과 의지와 인격과 생명까지 전달하는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몸의 언어」를 말한다. 한편, 목회자의 생활행위를 말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의 적극적인 행위-설교, 전도, 봉사, 교제-등의 대인관계 제스츄어를 말한다. 목사는 이와 같은 모든 제스츄어에서 자기의 사상과 의지를 표현하게 되므로, 이「몸의 언어」가 분명해야 한다.

(3) 목회자의 지도력(관리능력) 개발

목회자에게 또 중요한 것은 지도력(leadership power)이다. 지도력이 설교에 못지 않게 목회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지도력이 없으면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 어렵게 된다. 목회자는 설교자(preacher)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leader)이다. 지도자들는 어떤 특유한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다. 지도자의 영역(domain)은 미래이며, 지도자의 리더쉽은 다른 사람들을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목회자의 지도력(leadership)은 사람을 다룰 뿐만 아니라, 교회 조직을 운영(operation)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관리(church management)와 함께 교회행정(church administration)을 결부시켜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은 각기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나, 교회에서 혼동해서 취급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교회행정은 하나의 교회의 조직체를 기계적으로 운영하는 메카니즘(mechanism)의 의미가 강한 반면에, 교회관리는 하나의 기관(organization)의 유기적인 운용으로 오르가니즘(organism)의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 한국에서는 신학교는 물론 교회에서까지 교회의 관리론(a theory of management)보다는 교회의 행정론(a theory of administration)에 초점을 맞추어 온 것 같다. 사실 교회의 관리는 목회자들이 가장 중요시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인간관리(people management: conflict management)를 잘 못하게 되면 교회가 시험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또 프로그램관리(program management)를 잘하지 못하면 교회 성장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교회 목회자의 지도력은 교회관리와 행정 전반에 걸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교회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목회자의 교회관리와 목회자의 행정관리로 나누어서 다루기로 한다. 목사의 지도력은 지력과 영력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도덕적 감화력(道德的 感化力)이다. 목사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거룩해야 교인들에게 본이 되어 순종하게 된다. 목사가 윤리에 문제가 있으면 교인들에게 지탄을 받으며,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 목사는 행정력이전에 도덕적 감화력을 통하여 교회를 관리해야 한다.

1) 목회자의 교회관리

목회자는 교회를 메카니즘의 원리에서 행정적으로 관리하기에 앞서서, 유기적(有機的), 윤리적(倫理的)으로 먼저 교회를 관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관리에 있어서 범법한 교인을 다룰 때에 처음부터 행정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도 처음부터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원치않으시고 먼저 인간관리의 차원에서 다루는 과정을 밟아 나가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8:15에 보면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교회의 치리를 집행하는 행정명령임과 동시에 인간관리의 차원을 고려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엡 5:16)고 말함으로써 시간관리를 잘 하라고 권면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4:28-31에서 망대를 세우는 사람이 비용을 예산하지 않고 시작하거나, 전쟁을 하는 임금이 군대를 헤아리지 않고 전쟁에 임하게 되면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느냐고 하시면서, 주의 종들이 교회를 섬기려면 효과적인 목회전략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진행시켜 나가야 한다는 암시를 해주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회를 섬기는 과정에서 이와 같이 여러 분야의 관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목회사역에 임해야 한다. 목회도 군사적으로 말하자면 치밀하고 효과적인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목회자의 시간 관리

목회자는 누구 보다도 시간관리를 잘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시간관리가 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가 시간을 잘 관리하느냐 못하느냐에 성공 실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목회자의 성공은 90%가 시간관리에 달려 있다고 했다. 서구인들에게 시간조절은 원래 성서적 명령(biblical mandate)의 일부로서, 시간은 자연외에 여러 가지와같이 지배되고 복종하고 다스려지는 것이다(창 1:28).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돈이나 사람들이나 석유와 같은 훌륭한 자원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시간을 돈으로 따진다. 현재 미국에서는 한 시간 노임이 $4.25인데 $5.25으로 오른다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그래서 미국과 같은 서구에서는 정규 직장에서까지 시간당으로 노임을 계산하여 매일 혹은 매주마다 지불한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시간은 금이다"(Time is gold)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 일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손을 놓는다. 예배시간도 정확히 지킨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돈으로 환산하는 지극히 합리주의적이요 산업주의적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특히 전문직업인들을 고  용할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 한국식으로 한 번 왔다가는 것, 몇시간이든 일회 임금만 지불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는 바가지를 쓰기 쉽다. 전문가들의 시간당 임금은 고액(高額)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필자의 아내가 어깨가 아프다고 해서 신경과 의사에게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한국 의사인데 아마 서구화된 모양이다. 10-20분간 문진(問珍)만 몇번 하고 무릎을 몇번 두드리고난 후에, 아무런 테스트도, 약도 한 알 주지않고 진료는 끝났다. 수납에 가서 물으니까 200불이라 한다. 한화로 160,000원이다. 영어로 하는 말을 듣고 나의 귀를 의심해서 한국의사에게 찾아가서 다시 진료비를 물었더니 역시 200불이란다. 기가 차서 진료비 200불을 지불한 후, 혀를 차고 돌아선 일이 있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20분간에 160,000원, 한 시간에 800,000원 하루에 6,640,000원을 지불한 셈이 된다. 서구사람들은 시간을 돈으로 계산한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를 "시간 혹은 미래에 오리엔트된 문화"(time or future oriented culture)라고 한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비서구사람들은 상황이 다르다. 비서구 사람들(Non-Western)은 시간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양으로 계산한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를 "경험 혹은 사건에 오리엔트된 문화"(epxperience or event oriented culture)라고 한다. 그러므로 비서구사람들(라틴 아메리카, 동양인)들은 시간에 별로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시간관념이 약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멕시코 사람들은 예배를 3시간이상 보는 교회도 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면서 "예배사건"(worship service event)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시간관념이 별로 없다. 예를 들어, 필자가 참석했던 라틴 아메리카와 흑인계들(Rev. Frederick Price)의 교회인 크렌샤워 교회(Crenshawer Christian Center)에서는 무려 3시간이상에 걸쳐서 예배를 드린다. 이들은 양적 시간보다 질적 시간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서적이다.
"시간"에는 헬라어로 두 가지 용어가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는 "      "(chronos)이고 다른 하나는 "      "(kairos)이다. 이 둘중에서 "      "(chronos)는 일, 월, 년, 사시, 시대등 계산할 수 있는 시간(measurable time)으로, 카렌다적인 양적 시간(qualitative time)을 말한다. 그래서 연대적으로 기록한 역대기를 "Chronicles"라고 한다. 반면에 헬라어로 "      "(kairos)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측정할 수 없는 시간(unmeasurable time)으로, 질적 시간(qualitative time)을 말한다. 이 시간은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케뤼그마(       )적인 의미가 강하여, 빠른 한 "순간의 경  점"(fleeting point: momentum)으로서 "기회" (opportunity)를 의미한다.. "      "(chronos)의 시간들은 임의적이며, 외적인 표식들(signs), 즉 "시간의 측정"(the measure of time)에 불과할 뿐, 시간 그 자체(time itself)는 아니다. 그러나 "      "(kairos)는 성서적인 의미에서, 질적인 시간으로 "영혼의 생활"이다(Time is the Life of the soul). 그래서 바울이 "세월을 아끼라"(골 4:5)라고 한 말은 "시간을 구속하라"(redeeming the time)는 생명에 대한 구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이라고 했다. 이 말은 영원한 진리의 차원에서 볼 때, 크리스챤의 승리의 생활(victorious Christian living)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목회자에게 있어서 직분상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하나님 앞에 선 직분자로서 시간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루터(Martin Luther)는 "일의 가치"(the valure of time)를 강조하는 반면에, 칼빈(John Calvin)은 "시간의 직분"(the stewards of time)을 강조했다. 사회학자인 로버트 멜톤(Robert K. Merton)은 그래서 칼빈이 개혁을 주도한 제네바에서 시계산업이 발달하게 되어 오늘날 스위스가 시계의 종주국이 되었다고까지 평가했다. 아무튼 시간은 세계와 세계의 역사를 끌고 간다. 역시 시간은 우리의 인생생활, 사업등 성공실패를 좌우하여 결정짖는다. 우리의 목회도 시간 선용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무엇 보다도 시간관리(time management)에서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성직자들이 종종 그들의 세속적인 대상들과 꼭 같은 "시간의 마력"(time macho)의 시험에 말려서 번아웃(burn-out)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윌리암 맥코넬(William T. McConnell)은 "우선순위들, 목표들, 계획하는 것들-시간관리의 도구들-은「하나님의 나라」의 목표에 합당하기만 하면, 교회의 장래를 위한 대단한 능력이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시간을「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선용하기만 하면, 굉장한 능력을 나타내서 목회에 유익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시간을 잘 못 사용하거나 무절제하게 사용함으로 빚어지는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타이밍(timing)을 잘 못 잡아서 일찍 생을 마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타이밍을 잘 맞추어서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얻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에, 어떤 사람은 바로 그 시간에 쇼핑하러 들어갔다가 희생을 당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장소에 있다가 친구를 만나러 잠시 나온 사이에 붕괴됨으로 극적으로 화를 모면했던 일들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로 하나의 운명으로 돌려버릴는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에 심각한 종교적인, 신앙적인 질문을 던져주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목회자들은 시간관리(시간관리)에 성공할 때에, 목회에도 성공할 수 있고, 시간관리에 실패할 경우에 목회사역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는 중대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어떤 목회자는 시간관리를 잘해서 목회사역도, 자신의 건강도 유지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목회자는 시간관리를 잘 못함으로-목회에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건강까지 해쳐서 요절하여 하나님 앞에 먼저 가거나 말년에 건강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 받은 동일한 하루 24시간을 지혜롭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총체적인 목회인생의 성공이 있어야 한다. 이 시간관리의 문제는 필자의「다이나믹 교회성장 세미나」의 또 다른 시리즈인「목회자의 교회관리론」서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이 목회자의 시간관리는 필자의 저서인「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의 제5장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기도 하였다.「교회관리론」(Church Management)은 목회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목회자의 인간 관리

목회자는 한 마디로 인간을 다루는 성직이다. 인간을 다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관계가 깨지고, 자연과도 조화를 이루기 힘든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 인간과의 적대관계로 상호 투쟁에 지치고, 자연의 영향아래서 신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볼 때, 인간관리의 성공은 인간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인간관계는 하나님관계의 회복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회복관계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 간의 불화관계는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불가능하며, 하나님과의 회복관계가 수립되지 않는한 인간관계의 회복 역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하여 대속물이 필요했고, 그 대속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중보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므로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이러한 구속적 화해의 원리에 의해서 올바른 인간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인의 종류(부류)를 살펴보면, 구조상 교회의 조직으로 교역자와 평신도로 생각할 수 있다. 교역자중에는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이 있고, 평신도중에는 장로, 권사, 집사, 일반교인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여기서 목회자가 관리해야할 대상은 부교역자를 비롯한 평신도 전체이다. 이 중에서 부교역자들은 목회자의 관리에서 관리성격상 다르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고, 다만 평신도의 관리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 평신도를 관리하려면 우선 이 사람들의 관리를 위한 사전 성격분류 작업이 필요하다.
관리성격상 교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 정상적인 사람(normal people)이 있고, 또 둘째로, 비정상적인 사람(abnormal people)이 있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에는 "문제가 없는 사람"(no-problem people)과 "평화를 조성하는 사람"(peace-maker)이 있으며, 비정상적인 사람들 중에는 "문제의 사람"(problem-people)이 있는가 하면 "문제를 만드는 사람"(trouble-maker)들이 있다. 이 중에서 목회자가 다루어야 할 대상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인데, 이 비정상적인 사람들 가운데 "문제의 사람"(problem-people)을 가리켜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difficult-people)이라고 하며, "문제를 만드는 사람" (problem-maker)을 "구제불능의 사람"(impossible-people)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장로를 비롯한 제직들에게서 나오며, 그러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잘 다루어야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관리를 잘 해야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교인들을 관리하는 원리는 역시 성경에서 찾아야 하며 그 방법 역시 성경에서 얻어야 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다루는 원리와 방법은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원리"(the principle of the reconciliation through the Mediator, Jesus Christ)이며, 그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방법(the resolution by the Love and Justice of God)이다. 
첫째로, "화해의 원리"는 곧 "은혜의 원리"를 말하며, 전술한 바와 같이 불화상태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중보가 되셔서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속량하고 인간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화해하는 방법이다. 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로 얻는 은혜의 능력은 불화상태에 있는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교회에서 인간관계의 문제가 발생했다면(문제가 발생하기전의 예방이 중요하지만) 이 "은혜의 원리"를 적용하여 해결하도록 강력한 기도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문제가 생기면 전혀 문제의 교인과 부딪히지 않고(no confrontation: 이 문제는 다음에 다룰 갈등의 관리문제에서 다루겠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평상시와 꼭한 태도로 대해주면 자동적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인상을 바꾸거나 서먹서먹하게 대하게 되면 점점 풀기 힘든 상태로 빠져들기 쉽다(물론 정면으로 부딛쳐서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둘째로, 사랑과 공의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그 성격을 잘 분석하여 사랑을 계속해서 베풀고 이해해주는 방법과 아에 공의로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이 문제 역시 "갈등 관리"(conflict-management)에서 다루게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은 목회자가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어야 한다. 이들은 "문제를 만드는 사람"(problem-maker)과는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간 성격상의 문제가 있든지, 신앙교육의 배경이나, 현재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문제아의 신드롬"(problem-child syndrome)을 앓고 있는 사람이니까, 목회자는 오히려 부모의 심정으로 더욱 따뜻하고 넒은 품으로 안아 주어야 한다.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이 본교회에서는 적응을 못했지만,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는 아주 잘 적응할뿐만 아니라 신앙이 급성장하고 제직으로서 주요 임무를 잘 감당하는 것을 부지기수로 볼 수가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의 인간관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이다. 다음으로 문제아 중에서 "구제불능의 사람"(impossible people)에 대한 관리이다. 이 "구제불능의 사람"은 백(百)의 하나 천(千)의 하나로서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안에서 자기의 그룹을 형성하여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봉기하는 악성 질병인 "암적 존재"(a curse in the church)이다. 이 암적 존재인 "구제불능의 사람은" 대국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대로 속히 처리해야 하는데, 처리과정이 부실하거나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교회가 큰 어려움을 만날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교회분열의 상황을 초래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면밀한 진단, 분석과 오차없는 처방을 통하여 속히 처리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들도 역시 교회의 "갈등해소" (conflict resolution)의 분야에서 다루게 되는데, 이 문제는 필자의「다이나믹 교회성장 세미나」의 또 다른 시리즈에서 다루기로 되어 있다. 목회신학적으로 갈등관리에 관한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인간관리의 분야에서 따로 독립시켜서 하나의 학문으로 다루고 있다.

  목회자의 갈등 관리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어렵고 힘든 교회관리가 "인간관리"요, "인간관리"중에서도 행정관리보다 더 힘든 것이 "갈등관리"(conflict management)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 갈등관리는 인간의 외적 조직관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영적인 정신관리, 영혼관리이며, 영적인 전쟁과 같은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한 때 천하를 호령했던 세기의 영웅 나포레옹(Napoleon)이 고도(孤島)인 센트헤레나 섬에 유배가서 인생의 최후를 맞으며, 수십만의 적군은 막을 수 있었으나 마음속에 파고드는 보이지 않는 적군은 물리칠 수가 없었노라고 고백하고, 이 영적인 전쟁에서 쾌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칭송하면서 세상을 떠난 사실을 보더라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다. 교회관리(church management)중에서 이 갈등관리도 역시 따로 취급하는 학문코-스(academic course)로 자세한 것은 필자의「다이나믹 교회성장 세미나」의 또 다른 시리즈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개략적으로 간단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로,「갈등의 신학」(a theology of conflict)의 문제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에, 갈등은 타락된 세계에서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마 10:34; 21:12-16, 23; 행 25:36-41; 출 32:7-20; 엡 4:26-27, 6:10-13; 왕상 22:1-28). 그리고 이 갈등관리는 성서적이라는 것이다(창 32:9-23, 33:1-16; 출 18:13-26; 잠 15:1; 사 26:10; 마 5:9; 롬 12:17-21; 고전 6:1-8; 엡 6:1-9; 벧전 5:3-7). 그러나 모든 갈등이 전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창 4:1-5; 행 6:9-15; 약 4:1-2). 사람들은 갈등으로 인해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민 12:1-15; 마 5:9-12; 요 16:2). 만일, 갈등관리에 실패한다면 그것이 죄가 될 수도 있다(삼상24:1-22; 시 105:15). 성경에 나타난 갈등관리의 방법이 몇가지가 있다. (1) 협력(collaboration: 마 18:15-20; 눅 17:1-4; 행 15:1-32, 11:1-18; 엡 4:15), (2) 단계적 확대(escallation: 마 23, 15:10-14), (3) 철수(withdral: ckd 13:1-13; 삼하 3:17-39; 왕상 2:5-6; 마 10:12-25; 눅 4:28-30; 요 8:1-11), (4) 강력행사(coercive, use of power: 마 21:12-16; 살후 3:10-12), (5) 유지(maintenance: 롬 7; 갈 5:24; 엡 6:13; 빌 3:14;계 2:10). 갈등은 진행되며(행 6:1-7), 언어 등을 통한 의사소통으로 가중될 수도 있다(창 11:1-9). 때때로 갈등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다윗과 밧세바; 마 20:1-16).

둘째로, 갈등을 다루는 방법의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인간으로부터 일어나는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how to deal with conflicts?)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먼저,「다루기 까다로운 사람」(difficult people)과의 갈등은 어떻게 다루는가? (1) 그런 사람의 유형을 파악하고, (2) 그런 사람을 이해해야 하며, 또 인격적인 대화를 통한 개인적, 인격적인 파워(personal power)를 행사하는 것이 이러한 사람을 다루는 전략적인 열쇠(the key to strategy)가 된다(마 28:18-19; 고후 12:9-10). 그런데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타입(type)은 보상(reward), 강요(coerce), 직위(position), 카리스마(charisma), 대표자(representative), 전문가(expert), 등과 같은 것이다. 목사는 전문가로서 이 개인적인 힘(personal power)을 사용하기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다음으로,「구제불능의 사람」과의 갈등은 어떻게 다루는가? 우선, (1) 성경에서 이러한 사람의 유형을 찾아보는 것이다(잠 26:4-6, 13:16, 18:7; 마 7:6;행 20:29-30; 롬 16:17-18; 고전 5:3, 5, 6; 고후 11:13-15; 엡 6:12; 딤후 2:16-17; 딛 3:10-11). 그리고,「구제불능의 사람」은 동거하는 것(to live with), 도와주는 것(help), 만족하게 해주는 것(satisfy), 조정하는 것(control), 설득하는 것(reason with), 이해시키는 것(understand), 평온을 유지하는 것(keep quiet), 피하는 것(avoid)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들은 파괴적이며, 적대적이고, 이기적이며, 악의적이고, 배교적이며, 세상적이고, 부정적이며, 무용하고,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그들의 정체(identification)는 무엇인가? 먼저 그들은 분열적이고(disruptive), 비합리적이며(irrational), 문제를 만들고(going out of way to create trouble), 탐욕스럽고(insatiable), 작은 문제들에도 관심을 두며(concerned for minor issues), 위험을 피하고(avoiding risk), 이기적(selfish)이다. 그들의 인격적 특징은 부정적 자기관념(negative self concept), 강한 이기적 사랑(strong self love), 완고(rigid), 권위주의적(authoritarian)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에, 그들은 편집병적이며(paranoid), 반사회적(anti-social)이다. 또한 그들은 어떤 위기의 신호(some red flags)를 보이며, 일찌감치 경고의 싸인(early warning signs)을 보이기도 한다.

셋째로, 갈등의 견해와 평가(viewing and assessing conflict)에 관한 문제이다. 먼저, 갈등에는 세 가지 견해, 즉 조직견해(the system view), 행동자 견해(the actor view), 그리고 역기능 견해(dysfunctional view) 등이 있다. 다음으로, 평가에는 위험(danger), 파괴(destructive), 파괴적 갈등의 표지들(marks of destructive conflict), 생산적 갈등의 표지들(mark of productive conflicts), 평가의 난이(難易, difficulty of assessment), 올바른 평가의 중요성(importance of correct assessment) 등이 있다. 그리고, 직접적인 갈등과 정서적이고 실질적인 갈등들에 관한 것들을 다루게 된다.

넷째로, 갈등관리의 스타일(styles of conflict management)의 문제이다. 갈등관리에는 두 가지 요소들에 관한 다섯 가지의 스타일이 있다. (1) 두 요소들인 관계성(relationship)과 임무(task)의 요소와, (2) 회피(avoiding)와, 적응성(accomodation)과, 경쟁(competition)과, 타협(compromise)과, 그리고 협력(collaboration)등이 있다.
다섯째로, 갈등을 해소할 갈등관리 전략(strategies or tactics)의 문제이다. 갈등해소를 위한 전략으로는, 회피(avoidance), 단계적 확대(escalation), 유지(maintenance), 그리고 감소(reduction) 등의 전략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학문적인 것들로 실제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게이스 스타디(case study)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결론적으로, 모든 갈등(conflict)의 해결은 교회안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죄와 실수와 오해등으로 생기는 것임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의 화해의 원리를 적용하여 그리스도의 화해의 은총을 통하여 해결할 것이며, 둘째로, 교인들의 성공적인 제자화 훈련(discipleship training)을 통하여 목회자(牧會者)와 교인(敎人), 교인(敎人)과 교인(敎人) 사이에 두터운 신뢰성(信賴性)을 조성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다.

  목회자의 프로그램 관리

목회자의「프로그램 관리」는 특히 현대교회 목회성공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느 한 가지 미니스트리를 통해서 성장하는 경우도 있는 반면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미니스트리를 통해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한국교회는 초창기의 교회성장의 패턴을 살펴보면, 어떠한 특별한 미니스트리를 개발해서 성장한 것이 아니다. 이는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에도 역시 처음부터 어떠한 패턴의 선교나 전도전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성령의 바람을 통하여 강권적으로 역사하심으로써 교회성장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서구교회들, 특히 미국교회를 살펴바도, 처음부터 어떠한 교회성장 전략이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성장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하여 성장했고, 그 이후에 인간의 선교전략이다. 교회성장 전략들을 세워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에 교회성장 학문이 형성되었다.
현대에는 미국교회나 한국교회 역시 시대에 맞는 효과적인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실행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한국교회보다 선진교회인 미국교회를 조사해보면, 교회성장의 공통된 요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복합-미니스트리(complex-ministry)중에서 특히 교회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활기있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능력있고, 은혜로운 설교나, 찬양과 기도등도 교회성장의 강력한 요소가 되지만 현대교회에서는 무엇 보다도 시대와 그 지역교회의 상황에 맞도록 개발한 효과적인 소그룹 프로그램이 교회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와는 달리 현대에는 기업들의 팀활동(team business)과 같이 교회에서도 소그룹을 통한 팀-미니스트리(small group team-ministry)가 교회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성장도 더욱 소그룹 프로그램의 개발과 효과적인 적용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개발을 위해서 목회자는 열심히 뛰면서 배우고 연구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 개발에 대해서는 다음의 목회전략과 방법론에서 거론하게 되므로 여기서는 약하기로 한다.

2) 목회자의 행정 관리

교회행정(church adminstration)은 교회관리와 대동소이한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유기적인 관리성(有機的 關理性)의 부분들은 생략하고 기계적인 관리성(機械的 關理性)이 있는 행정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기관(agency)으로서, 유기적인 생명공동체(Living Community)이기 때문에, 조직운영에 대한 행정(administration)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이와 대동소이한 분야의 교회관리(church management)는 교회의 유기적인 운영기술에 강조점이 있는가 하면, 교회행정(church adminstration)은 교회 조직기관의 기계적인 관리에 강조점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행정은 교회공동체와 그 부속 가관들의 조직과 정비, 예산편성과 집행등을 주로 하고 있다. 조동진 목사는 교회행정학이란 교회정치학의 일부일 수 있는 것으로, 교회의 목적과 의사를 실현시키고 맡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organization), 직원(personel), 운영(managing)의 기술과 능율의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현대는 모든 기관들의 조직이 다양화되고 복잡해서 전문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행정도 현대사회와 교회의 규모와 성격상 행정의 과학화가 필요하다. 교회행정은 기술적으로 계획하고 조직하고 지휘하고 조정하며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교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생리"(Body life)에 따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가 교회행정관리를 잘 못하게 되면 교회의 규모가 대형화해감에 따라 점점 교회를 관리해나가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회행정 분야에 관하여 부단히 연구하고 효과적으로 적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목회자는 기계적인 행정격식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행정규칙에 너무 매이다 보면, 관리의 융통성을 잃게 되기 쉽다. 교회행정에 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만 생각하기로 한다.

  교회의 조직 관리

교회행정중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모든 기관의 조직과 그 기관들의 관리문제이다. 조직이란 일반적으로 정의할 때, 어떠한 동인(動因)에 의하여 공동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여서, 어떠한 법규(rules)에 따라 결성된 하나의 협동체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조직을 막론하고 인간이 모여서 이룬 조직이므로 인간적인 원리와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인간 자체의 조직원리(the principles of the Body life)와 성격에 의해서 정의되고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 자체는 완벽하고 정밀한 유기적인 조직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 조직속에는 그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지적 요소인 원리(principle)와 역학의 정적 요소인 에너지(energy)가 있다. 마치 인간 조직체에 지능(brain)과 힘(energy)이 있어서 이 두 요소가 건전하게 상호상응함으로 인체가 움직이게 되는 원리와 같다. 그래서 어떤 조직체든 간에 거기에는 지능직(知能職)의 브레인(brain)들이 사무실(office)에 앉아 있고, 기능직(技能職)인 각 부서의 멤버들(action parts)들이 현장(現場)에서 열심히 뛰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관리(組織關理)에 있어서는 이 두 분야에 관해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교회의 조직은 다른 조직들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 첫째로, 다른 조직들은 이 세상의 물질(物質)이나 명예(名譽)나 권세(權勢) 획득에 그 목적을 두고 있지만, 교회는 인간의 영혼을 획득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둘째로, 다른 조직들은 세상적 인간관계로 외적 구속력(外的 拘束력)이 강한 법이나 규칙에 의해 조직되지만, 교회는 자의에 의한 조직으로 조직후에도 완전히 자유롭다. 세상적, 외적 구속력이 아니라 내적 영적 구속력(內的 靈的 拘束力)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조직체이기 때문에 조직관리가 불가피한 것이다. 조동진 목사는 그의 「교회행정학」에서 "조직은「관리를 위한 조직」이며「협동양식」이며,「인간조직」이며,  또「업무조직」으로「제도화한 구체적 형태」로 파악되고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첫째로, 조직이란 관리, 즉 교회관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과, 둘째로, 그 조직의 행동양식은 협동양식이며, 셋째로, 조직이란 역시 인간의 조직이며, 넷째로, 업무를 수행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제도화되고 구체적인 형태라는 뜻을 의미한다. 이 조직에 대한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인간조직」의 문제이다. 교회에서 인간조직은 다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조직(人間組織)은 교회라고 하는 기관(organization)을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이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의 조직은 두 가지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는 직위(position)의 차원이요, 다른 하나는 기능(function)의 차원이다. 이 두 차원은 사실 상호상응하여 조직관리에 있어서 최대한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수단(vehicles)이 서로 따로 논다면(움직인다면), 그 조직체는 목표를 향하여 제대로 운행될 수 없게 된다. 이 두 바퀴(vehicles)가 상호 협력하여 정상적으로 운행될 때에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직분에 관하여 생각할 때에, 직분이란 교회를 위하여 세우는 일자리이다(출 18:24-26; 행 1:20-26, 6:1-6; 고전 12:12-31; 엡 4:11-12).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정해준 위치들(positions)이다. 이는 마치 스포츠의 축구나 야구의 포지션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특히 야구에서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포지션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들을 철저히 지킨다. 그래서 혼란이 없고 남의 일에까지 월권하는 일도 없다. 질서가 정연하니까 평온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교회의 직분상 관리에 혼선이 일어나면 전체적으로 교회가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이상적인 조직관리로 혼란이나 부정이 없는 이상적인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근래에 한국교회, 특히 교단들의 조직에서 발생되는 어처구니 없는 루머(?)을 듣고 있는데 사실이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노회장, 총회장, 감독 등의 포지션 문제로 교계가 떠들석하다는 것이다. 세상 정치세계도 아닌데 왜 이리도 포지션 쟁탈전이 치열하던가? 이는 우리 한국교회가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이는 신앙양심의 문제를 떠나서 조직방법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모든 교회 지도자들의 양심에 의한 개혁이 있었으면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조직상의 문제를 개혁하면 가능하다고 믿는다. 미국교단에 관여해서 듣고 보고한 경험으로는, 미국교단은 노회장 총회장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식 조직체제가 아니라, 각 분과별(committee)로 일을 처리해나가는 분과별 운영체제이기 때문에 노회장, 총회장의 교권행사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일예를 들어, 실제로 노회의 의사진행시에 노회장은 일년간 노회 회의시에 의사진행을 할 뿐이다. 일년동안 실권을 쥐고 있는 실권노회장(president)이 아니라, 노회 회의시에만 의사를 진행하는 의장(chairman)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노회장은 실제로 실권이 없고 각 분과위원회로 모든 권한이 고르게 분산되어 있는고로, 노회장, 총회장 선거운동에 열을 올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둘째로, 기능상의 문제이다. 아무리 직분상 조직을 잘 했다 하더라도, 만일 그 기능들을 백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조직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실, 목회자들이 교회의 직분들을 주어놓고, 실제상으로는 그 직분을(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도로 빼앗는 결과들을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직분을 세워주는 것으로 자기의 할 일이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여지없이 본의 아니게 교인들에게서 자기 가 부여해준 직분을 빼앗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직분자들이 명목상으로 직분만 받았지 그 직분에 상응하는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직분을 받고도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훈련이 되지 아니했기 때문이요, 목회자가 지도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맡은 직분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니까 명목상의 직분자로 남을 뿐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목회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 교인들은 직분을 맡고도 전문적인 직업의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훈련도 받지 못했고 소명감이 투철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어떤 경우에 목회자가 그들의 몫까지 다 해버리니, 책임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셈이다. 아니면, 목회자가 직분만 주어 놓고 아무런 지도나 감독도 하지 않기 때문에 직분을 맡은 교인들의 그 직분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조직관리를 위해서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교인들을 잘 훈련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맡은바 직분을 충분히 해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교회의 시설 관리

특히 현대와 같은 문명사회에서 교회의 시설관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시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성전(예배당)이다. 예수님 이후, 성전건물 자체는 성전계시 발전의 차원에서 볼 때에 큰 의미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산의 돌제단에서 만나시다가(창 8:20; 13:18; 28:18-19; 왕상 18:32) 광야의 성막에서(출 40:35; 수 22:19),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만나셨고(삼상 3:3-14; 사 6:1-13) 예수님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요 2:21) 만나셨고, 오늘 날에는 우리의 몸안에서 성령으로 만나주신다(고전 3:16; 고후 6:16). 지금의 예배는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이므로(요 4:21), 교회의 건물 자체는 예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다만 하나님앞에 경건하게 예배드리기에 최적의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건물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은 지나치게 사치해서 꾸밀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에 훌륭한 분위기를 감안해서 디자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은 예배당 건물에 신경을 지나치게 쓰고, 오히려 구령사역의 투자에는 인색한 감이 없지 않다. 미국교회들은 예배실에 지나치게 치장하지 않고 검소하게 하는 반면에 선교와 교인들이 훈련받을 부속건물들을 많이 건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교회의 성장요소중에 4P라는 말이 있다. 즉 설교(preaching), 기도(prayer), 선전(propagation), 주차장(parking-lot) 등의 첫 글자를 따서 4P라고 한다. 물론, 주차장을 포함한 대지와 시설 전체를 통틀어 교회부동산 시설(property)이라 하기도 한다. 교회시설은 교회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회의 각 부서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배려와 관리가 필요하다. 한국은 성전(예배당)에만 신경을 쓰는 감이 있지만, 외국 교회들은 대부분이 부속건물들을 충분하게 갖추고 있다. 신앙생활 훈련과 심지어 불신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시설들을 준비한다. 수많은 사무실, 대소 회의실, 세미나실, 그룹활동실 등 수많은 크라스룸(class-room)들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도 교인들의 신앙훈련, 전도훈련 등을 위하여 충분한 부대시설(附帶施設)들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설들(facilities)은 사용목적에 따라 개조하고 보완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관리부(關理部)에 전임하여, 계속해서 연구하고 개발하여 현대목회 활동에 필요한 시설이 될 수 있도록 관리사역(關理使役)을 현대화해야 할 것이다. 현대교회에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시설문제로서, 충분한 시설확보는 교회성장운동의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한다.

  교회의 재정 관리

교회의 재정관리는 헌금의 수입에서부터 시작된다. 교회의 헌금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성물(聖物)이므로 그 관리에 있어서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재무행정(financial administration)은 교회내에서 다른 관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헌금으로(기부금, 교회시설 임대료, 이자, 기타 예외적인 수입도 있지만) 수입된 교회재정은 예산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지출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쉽고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잘못 관리 하다가 어려움을 당해서 교회에 큰 시험거리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는 재정관리에 직접 손을 댈 필요는 없고 간접적으로 조직의 체계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재정이 교회성장 계획의 집행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예산은 목회자의 비젼에 따라 예산위원회에서 치밀하게 계획되어 교회성장을 위한 비젼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성장 비젼 자체가 사장되고 만다.
평상시 교회재정관리는 재정부의 체계적인 운영을 통하여 집행될 때에 문제가 없어진다. 그렇지 않고 재정관리가 부실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필자는 모교회에 처음 부임해서 재정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교회에 어려움을 당한 경험이 있다. 상시 관리나 감사가 없었으니까 회계가 교회의 재정을 마음대로 유용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많은 액수의 금전적인 손해를 끼쳐서 제직회에서 관리소홀에 대한 책임추궁을 받고, 정신을 차린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상업학교에서 배운 상업부기의 지식을 이용하여 재정부의 재개편과 금전출납의 방법을 교회의 실정에 맞게 개선하여 적용하였다. 우선 재무행정 조직부터 개편하고, 각 부장협의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회사업비 지출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개혁을 시도했다. 재정부장과 기장회계, 출납회계를 두고 별도로 감사위원회를 두었다. 그리고 복식부기를 도입하여 재정부의 서류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지출 절차도 각부 부장 기장회계 출납회계 재정부장 당회장 등의 5단계의 순서를 거치되, 중요한 것외에는 재정부장 손에서 모두 결재되도록 하였다. 똑 같은 지출결의서를 부장, 출납회계, 기장회계, 재정부장 등이 증빙서류로 보관하도록 했기 때문에 한치도 지출오차나 의견충돌이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충분한 교회재정의 수입원(受入源)을 통한 풍부한 재원확보(fund-raising)인데 이것은 목회자가 교회를 은혜로 이끌어야 하고, 한편 교인들의 철저한 신앙교육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일 샐러(Lyle E. Schaller)는 목회자가 교회 교인들의 재정적 기초를 확대하는 44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목회자는 재정관리와 이에 따른 문제에 관한 연구와 신앙이 돈독한 직원채용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5. 목회자의 목회 방법론 개발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현대교회의 고민이 바로 "평신도 없는 설교"(church without laypeople), "교회 없는 신학"(theology without church), 그리고 "신학이 없는 교회"(church without theology)라는 위기(crisis)에 직면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여기에서 한 마디로 설교와 더불어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뜻을 알만하다. 목회방식에서 구습을 답습하거나 변화가 없을 때에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이는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교회와 목회방식이 개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우(Reuel L. Howe)는 삶의 변화는 삶이 부딛치는 형식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과, 진리가 제시되고 삶의 의미들이 만나질 수만 있다면, 교회의 목회형식도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공업기술(technology)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사회와 개개인의 생활이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교회도 예외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고로 프로테스탄트 교회 개혁자들(Protestant church reformers)은 교회개혁(Reformation)에 있어서 "현재완료 진행형"(progressive present perfect)과 "미래완료 진행형" (progressive fututre perfect)을 강조한다. "교회는 개혁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개혁되어져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quia reforma).
목회방법의 개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1) 강단의 개혁(preaching), (2) 평신도 사역(lay-ministry), (3) 프로그램의 개발(development of programs)로 나누어 살펴 보고져 한다. 이 세 가지 면에서 개혁되어야만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이라"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마 24:25, 고후 6:2), 강단이 개혁되어야 하며, 주님의 목회방법과 사도들의 전통 등 성서적 목회방법인 평신도 사역을 보편화하며, 현대교회에 있어서는 시대에 걸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해야 한다.
시대는 대단히 빨리 변하고 있어서 인간의 두뇌가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이다. 세상이 종말이 가까워지니까 마귀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기 위하여 그들의 사자들을 공중에 펴서 빠른 작전을 감행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리시는 천사들이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틈바귀 속에서 사람은 정신없이 덩달아 뛰다보니 지치고, 이들의 움직임을 미쳐 따라잡지 못하는 인간의 누뇌는 이상을 일으겨 신경증 환자나 정신병 환자가 속출하고 있는 숨가쁜 시대에 살고 있다(Alvin Toffler의 저서「미래의 쇼크」참조).

(4) 목회자의 목회전략

목회자가 목회전략을 세우기 위하여는 자기에게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목회자가 교회개혁을 할 때에 자기 개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목회전략을 세울 때에도 자기에게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교회가 성장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목회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가 영력이 없기 때문이요 리더쉽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성장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세 가지가 있다. 첫째가 목회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목사(do-nothing pastor)가 있는 교회는 성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목사가 무사안일주의로, 설교나 적당히 하고, 교회가 돌아가는대로, 굴러가는대로 따라가며, 아무런 비젼과 전략이 없는 목사의 교회는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평신도를 훈련시키지 않고 교회사역에 참여시키지 않기(uninvolved laity) 때문에 교회가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목회를 목회자의 전유물로 착각해서 평신도사역을 하지 않는 교회는 성장할 수가 없다. 목회는 소형교회일 때에는 몰라도 대형교회로 성장할수록 혼자서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성장을 위한 활동을 혼자서 전개해 나갈 수 없다. 셋째로,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는(no-program)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이 없으면 교회가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장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교회가 성장하려면 첫째로, 비젼과 리더쉽의 목회자(visionary/leadership-pastor)가「교회성장 안목」(church growth eyes)을 가지고,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과(strategies), 전술(tactics)을 끊임없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성장을 위한 무한한 자원이 되는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사역에 투입시킬 때에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다. 평신도의 동원(mobilization of the laity)은 교회성장의 절대적인 원동력이 된다. 셋째로,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은 교회가 활동을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에(active programming)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교회성장 운동을 다양한 사람들을 싣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열차로 비유해서 설명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열차의 머리(head) 부분인 기관(engine)을 목회자(pastor)로, 몸통 부분인 객차(passenger-car)를 평신도로, 열차가 달리는 선로궤도(rail-road)를 프로그램(program)으로 비유해서 설명하면 선명하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열차의 구조를 보면 기관(機關)이 객차(客車)들을 달고 있듯이, 엔진으로 비유된 목회자(pastor)는 객차로 비유된 평신도(laity)들을 달고 있다. 그리고 목회 사역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 열차를 통틀어서 하나의 교회로 볼 때, 목회자가 앞으로 이 교회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할런지가 이 교회의 목회자의 중심과제이다.

첫째로, 목회자는 비젼과 자기 교회가 가야할 목표를 정해야 한다. 부산으로 갈 것인지, 광주로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방법과, 어느정도의 스피드로 갈 것이지의 개략적인 계획(big picture)을 세워야 한다. 이 목표는 전교회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관심사요 동일한 목표이다.

둘째로, 목회자는 각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요구를 반드시 참작해야 한다. 목회자는 어떤 면에서는 유모와 같아서 어린아이의 상태를 잘 파악해야 하며, 어린아이가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챙겨주어야 하는 것과 같이 목회자는 교인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객차안의 여러 사람들이 부산이라는 목적지는 같아도 각각 볼일은 다른 것과 같이, 교인들이 교회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필요한 볼일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현대 교회성장의 기본이론에 있어서 목회자가 교인들이나 전도대상의 불신자들의 상태를 분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릭 워렌 목사나 빌 하이벨즈 목사는 다음 세가지에 콤뮤니티 교회로서의 전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교인들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들(needs)이 무엇인지? 그들이 배고파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말하면, 교인들에게 우선 영의 양식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하여 신앙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지식과 신앙의 능력을 공급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부산으로 가는 사람들중에 양식이나 생활필수품이 필요해서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교인들은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식료품 상회(grocery)로 데려가서 양식을 사주어야 한다. 돈없이 값없이(사 55:1). 이러한 교인에게 영의 양식, 즉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젖달라고 울다 못해 투정하고 말썽부리는 아이와 같이 불평하다 못해 도가 지나면, 교회를 떠나거나 시험꾼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젖이나 우유를 공급해주지 않고 운다고 책망하고 때려서야 되겠는가?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유모(house nurse)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마음을 하해(河海)와 같이 넓히고 교인들의 투정을 여유있게 받아서 소화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문제는 목회자들이 항상 살펴서 돌보아야할(care) 목회사역의 기본이다.

(2) 교인이 어데가 아픈지? 무슨 상처(hurts)을 입고 있는지?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는 영악한 명의(medical doctor)와 따뜻한 간호원(hospital nurse)이 되어야 한다. 교인들이 마음에 상처입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목회자가 알아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며, 목회자가 싸매주고 치료해주지 앟으면 누가 치료해주겠는가? 이러한 사람들은 부산이라는 목적지로 가고 있지만 현재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부산에 있는 어떤 훌륭한 병원(hospital)으로 안내해서 치료를 받도록 해주어야 한다. 심신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 교인들을 책망하고 채찍질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통스러워 울며 참다못해 목회자를 물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것이 두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양(羊)이 불쌍해서 같이 마음 아파하며 주님의 심정(with the heart of Christ)으로 위로해주고 싸매주고 치료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건강이 회복되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목회자에게 감사하며, 목회사역을 적극적으로 돕는 목회자의 남다른 충신이 되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목회자는 교인들이 무엇에 관심들(interests)이 있는지? 무슨 일에 관심이 있는지? 무슨 활동을 하고 싶은지?를 잘 판단해서 이에 대응하는 지도를 해주야 한다. 우선 가장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여, 즉 이들의 눈요기(eye-shopping)에 주시하고, 점차로 이들을 관광의 세계로부터 진지한 진리의 세계, 크리스챤의 비지니스(Christian business)의 세계로 인도해서 크리스챤의 세계와 하나님의 성역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교인들에게(불신자도 포함해서) 있어서 아이쇼핑(eye-shopping)의 단계는 대부분 자신들의 세상적인 욕망에 의한 것이 때문에 신앙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주는 과정에서의 지도에 대단한 기술을 발휘해야 하며, 까딱 잘 못하다가는 비신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성장, 특히 불신자 전도(reach out to the unchurched)를 위한 현대 전도전략의 가장 중요한 부분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전략에 크게 성공한 교회중에, 미국의 빌 하이벨즈(Bill Hybels) 목사가 이끄는 시카고 근교의 윌로우크릭 공동체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와 로스엔젤레스 남부의 엘토로 지역 근교에 있는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uty Church)가 있다. 이 두 교회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목회자가 교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도 대상자들의 필요한 것들(needs)이 무엇이며, 그들이 아파하는 것들(hurts)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에 관심들(interests)이 있는지? 등을 반드시 고려해서 전도전략을 세워야 한다.

셋째로, 중요한 것이 선로(rail road), 즉 궤도인 프로그램이다. 아무리 기관차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궤도인 선로가 없으면 그 열차는 목적지를 향하여 달릴 수가 없다. 아무리 목사가 비젼이 있고 분명한 목표과 의욕과 힘이 있고, 평신도들이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교회가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program)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장목적지(target)를 향하여, 목사의 비젼과 리더쉽으로 평신도들이 함께 궤도인 프로그램을 따라 진행하여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특히 현대교회에서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한다.
목회자의 목회전략은 앞에서 언급하대로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해냐하면, 교회성장의 일차적인 책임이 목회자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어떠한 요인이 있는가?를 냉철하게 분석해서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개발할 것은 개발해서 자신의 목회자질부터 개선해나가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개발되지 않고는 교회가 그 상태에서 성장할 수 있는 도약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책임을 목회자가 스스로 지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 개혁과 교회개혁을 통하여 교회성장의 대과업을 성취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물론, 목회자의 개혁은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사고(思考)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안일한 생각에서 긴장된 생각으로, 소극적인 생각에서 적극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고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가 계속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신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들여야 할 추수의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몸이 비대해서 안일하게 의자에 걸터 앉아 있는 엘리 제사장의 꼴을 참아 못 보신다는 사실을 목회자들은 명심하고 정신차려야 할 것이다. 비만증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으면 잠시는 편할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머지 않아 엘리 제사장과 같은 종말을 맞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목회는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전투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비만증의 증세가 있는 상태이므로 자기보다는 남에게 많이 주며, 상당한 운동요법을 통하여 건강한 교회(healthy church)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목회자들이 자기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비젼을 가지고 이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가장 중요한 강단개혁부터 시도해야 할 것이다.

1. 목회자의 강단의 개혁

강단의 개혁(renewal of the pulpit)은 교회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소중 중의 하나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 같이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들이 목회자의 리더쉽(leadership), 평신도의 사역(lay ministry), 프로그램의 개발(programming) 등인데, 이중에서 목회자의 리더쉽이 교회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목회자의 리더쉽 중에서 교회성장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바로 목회자의 강단이다. 왜냐하면 이 목회자의 강단은 목회자의 특권과 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제7대 아합왕 시대에, 어용 바알의 선지자들의 득세에 밀려서 피신다니던 하나님의 사자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격멸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가 바로 가멜산상에 허락하신 여호와의 제단이었다. 그는 그 제단에서 강력한 여호와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고 그 영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신뢰)을 주었으며 바알의 선지자들을 격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목회자가 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장소가 곧 강단이다. 목회자의 강단의 영향력에 따라 교회의 방향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목회자의 강단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 현재 한국교회의 강단은 어떠한가? 물론 상당한 차원으로 강단이 강화되었다고 자부하는 편도 있지만, 지속적인 교회성장을 위하여 강단의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강단의 개혁에 앞서서 강단을 포함하고 있는 예배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강단의 개혁은 예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배는 강단(설교)과 성례전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 앞의 성스러운 예식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관하여 정확한 이해가 없이 강단의 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무리한 시도라 하겠다. 그러므로 강단개혁은 예배의 개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1) 예배의 개혁 (Renewal of Worship Service)

예배(worship)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인간구원을 찬양하며, 경배하고,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행위를 말한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가장 강조한 부분중의 하나가 예배의 개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종교개혁 당시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이 캐톨릭교회의 형식과 교권적 예배의식인 성례전에 갇히워 질식되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속의 생명력이 약동하는 예배로의 개혁을 촉구했던 것이다. 개혁자들의 개혁의 동기는 전적으로 성서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배의 개혁을 위해서는 성서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서적 예배관

성서적으로 예배에 관하여 살펴보려면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탐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제한된 지면 관계로 간략하게 언급해 내려가기로 한다. 예배의 기원은 창조직후, 아담과 하와의 인간그룹(human group)이 신의 그룹(Divine group)이신 하나님(Trinity: Three Persons within One) 과의 관계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배받으시려고 의도하셨던 것이다. 이 때의 경배는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것으로 오늘날 구속을 찬양하는 예배와 약간의 내용적인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며, 교통한다는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하여튼 인간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담과 해와가 예배에 실패한 후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진정으로 예배할 자를 찾으셨다(요 4:24). 그래서 타락이후에는 참예배를 드리는 자와 거짓예배를 드리는 후손들로 이어져 내려왔다.
아담 이후의 첫 예배에 실패한자는 가인이었고, 참 예배에 성공한 자는 아벨이었다. 이 두 예배의 차이를 보면, 여러 가지 중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제물의 문제이다. 가인은 농산물이었고, 아벨의 제물은 어린 양이었다. 가인의 제사은 타락 이전에나 가능했던 농산물이었으나, 아벨의 제사는 타락 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속의 의미가 담긴 어린 양의 희생의 피 제사(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였으며, 그것은 자신의 희생의 피로 연결된 것이다(창 4:3-10).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믿음으로 인간에게 전이되었음을 암시한 것이다. 이 때부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속죄의 내용을 담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제사"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는 세 시기로 대분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유월절 이전의 애굽에 있을 때의 제사로(고센시절), 분명히 요셉이 총리시절 고센땅에 거주할 때에, 하나님께 조상으로 물려 받은 가족예배의 형태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월절 이후, 광야의 성막에서 민족적인 공중예배 형태로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양과 새로운 곡식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주신 구속과 새 기업을 인하여 제사를 드렸다. 그러므로 공중예배는 유월절 이후,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의 예배가 기원이며 오늘날 구속받은 백성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솔로몬 성전건축 이후에, 성전 예배가 시작되었고, 바벨론 포로귀환 후에, 다시 성전건축으로 성전 예배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님에 의하여 성전 제사는 완전히 신령한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聖殿)이시며(요 2:21; 계 2122), 제물이시며(요일 2:1-2; 히 7:20),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히 9:11; 10:19-21). 예수님 시대에 예배의 개념이 완전히 신령화(spiritualization)됨과 동시에 구체화(incarnation)된 것이다. 결국 예배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배의 본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이시고, 제물이시고, 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예배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요 4:24).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에 어떠한 의미를 갖고 계시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그의 사건" 전체를 받으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배의 존재론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이다. 교회인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를 통해서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뜻이다. 물론 본체론적인 의미로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을 전제하는 조건에서, 이 공동체는 여러 지체를 가지고 상호교통을 하며, 더불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로 받쳐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는 "몸의 제사"(sacrifice of the Body)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지니,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다(롬 12:1).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의 몸에 실어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이 되게 하는 구속적인 행위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결국 예배의 목적은 구속적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이 구속적 경배의 크라이막스가 요한계시록에 잘 나타나 있다(계 4:10; 14:4; 15:2-4; 19:1-10)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참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의미를 갖는 모든 사건들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딛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중에 첫째는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이다. 물론 이 화육사건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까지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제1단계의 실행이다. 이 그리스도의 역사적 화육사건이 기초가 되고 출발점이 되어,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접근하셔서 만나주심으로써 화해의 길이 열리게 된것이다. 적대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첫째로, 제1단계로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인간에게 찾아 오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대화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로고스(     )로 계신 하나님께서(요 1:1) 예수 그리스도로 화육되어 오시게 함으로 인간과의 대화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을 재현시키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은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가? 다음에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설교를 통하여 말씀이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으로 생생하게 육박해오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적인 예배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 자기의 피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지상에서 계속해서 드리던 예배를 단번의 제사를 통하여 완전히 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예배는 본체인 하늘의 예배와 그림자인 지상의 예배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지상 교회의 예배가 하늘에 상달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제2단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화육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로 화육의 사명을 마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말한다. 이는 대화의 단계를 넘어서 화해의 실제적 해결방법의 단계를 의미한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대화만으로 인간의 죽을 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죄값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죄값을 치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속성이다. 죄값을 치뤄야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속전을 치뤄야만 한다. 그러나 이 속전을 치룰 수 있는 조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을 드려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속전의 세겔(성전에서 사용하는 은전)로 바꾸어서(화육하셔서)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신 것이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사건이다. 이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예배중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배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없다면 그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이방인의 제사일 뿐이다. 예배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싸맴을 받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역사가 없는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한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이 생생하게 육박해오는 예배, 바로 그것이 참 예배이다. 이 십자가의 사건을 예배중의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와 성례는 대단히 중요한 핵심적인 예배의 요소들이다. 특히 성찬예식은 말씀이 화육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행사를 의미한다. 예배에 있어서의 성례는 설교와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절대적인 요소이다.

셋째로, 제3단계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배중에 거하시는(靈的으로 혹은 聖靈으로) 주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려 죽으신 상태로(죽으신 代贖의 功勞로) 성례중에 거하신다. 물론, 성찬의 의미에 있어서, 캐톨릭의 화체설(化體說)이나 루터의 공재설(共在說)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효력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에,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갈빈의 입장을 전제하는 말이다. 이러한 예배의 효력을 속죄제(贖罪祭)의 무드(mood)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축제예배(祝祭禮拜)로 승화되어 찬양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렁찬 천사와 성도들의 코러스(Chorus)로 하늘에 사무치도록 울려 퍼져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된다. 그러므로 예배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이 교인들에게 육박해 와서 그리스도를 만나 대화의 세계로 이끌고,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참예하며, 찬양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축제의 예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 예배를 효력있게 인도하고 역사하시는 이가 곧 성령이시기 때문에 오늘날 예배를 신령한 예배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령한 예배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설교, 찬송, 기도, 봉헌, 성례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예배의 역사적 의미

예배는 두 가지 의미에서 계속해서 개혁되어져야 한다. 첫째로, 예배도 계시의 발전적 변화로 시대에 따라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히 1:1; 6:1-2; 8:13). 전술한 바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의 발전과정에 의하여 그 양식이 변화되어 왔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후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 시작하여 족장시대에는 양이나 비둘기를 잡아서 가족예배를 드렸고 이스라엘 민족의 유월절 이후, 민족적으로 성막에서 제사제도에 의하여 예배를 드렸으며, 솔로몬왕 이후에, 성전예배를 드렸고, 예수님이후에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던 것이 하나로 지정된 성전이 아니라 회당예배가 가능해지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적인 예배로 바뀌었다. 이렇게 예배의 계시적 사건이 발전됨에 따라 예배의 형식이 개혁되어 왔다(히 9:10). 다른 하나는, 예배가 변질되기 때문에 개혁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예배는 예배의 본질과 그 형식에까지 변질되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예배의 동기문제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과연 예배는 어떤 동기에서 하는가? 예배당에 왜 예배를 드리러 가는가? 이 질문은 크리스챤에게 예배의 중요한 모티브(motive)를 묻는 본질적이며 우선적인 질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드리라고 해서 드리는가? 물론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동기를 물어야 하지 않는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예배를 드리게 되는 분명한 동기가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와 구속적인 영광을 받으시고, 그 기쁨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과 함께 나누시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인간이 첫번째 창조적 영광을 돌리며 만물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축복의 기쁨을 맛보지도 못한채, 하나님에게서 쫓겨나고 말았다. 하나님께 드릴 예배(경배)의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재로 인하여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구속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동기는 존재론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도리일 뿐만 아니라, 구속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속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 기쁨에 참예하려는데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는 그 동기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 중에는 단순히 신앙생활의 관습에 따라 예배하거나, 지나친 감상주의적인 동기로 자신의 감정적인 욕구의 만족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세속적인 어떤 욕망에 그 동기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동기가 아니다. 예배의 동기는 간단하다.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도리이다. 둘째로, 구속받은 백성으로서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라는 윤리적인 의무감과 속죄받은 인간의 순수한 은혜의 감격이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예배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순수한 예배의 동기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동기에서 드리는 예배라면 당연히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예배내용의 불균형의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예배란 말씀과 성례, 그리고 고백과 찬양이 균형있게 어우러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에 예배는 균형을 잃어서 개혁을 요하게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예배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여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 되는 화해의 제사와 하나님의 영광과 구속받은 인간의 기쁨을 노래하는 구속받은 자들의 대합창이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우렁차게 울려퍼져 상달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로마 캐톨릭교회에서는 의식에 매인 예배를, 동방정교에서는 신비적인 예배를 드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양상으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예배의 순수성이 사라져가기 때문에 예배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계 어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예배의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어떤 교회는 말씀에만 치우쳐 주지주의로, 어떤 교회는 기도와 찬양에 지나치게 치중하다보니 감정적 주정주의로, 어떤 교회는 예배형식에 매이다보니 의식주의로 예배의 균형을 잃고 있다. 특히 요사이는 미국교회에서 유행해온 찬양에 중점을 둔 축제예배(celebration worship service)와 치유를 중심으로 드리는 치유예배(healing worship service)를, 그리고 예배의 전체분위기를 사로잡게 하는 찬양목회(praise ministry)와 치유목회(healing ministry)가 도입되어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다. 물론, 결론에서 정리하겠지만 이러한 예배의 행태가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균형있는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셋째로, 예배의 주객이 분명치 못한 경우에 개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배의 축제에 누가 주인공이며 누가 손님인지 분명치 못하게 진행되는 예배는 지양되어야 한다. 누가 찬양을 받아야 할 주인공인지? 누가 높임을 받아야 할 히어로(hero)인지? 누가 찬치의 주인인지? 이 문제는 얼핏 흘려버리기 쉬운 문제이면서도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배당에 들어와 진정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주님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은 전혀 찾아 볼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진행하는 예배순서에 끌려 가다보니 단상에서 예배를 진행하는 목사가 주인공 같기도 하고, 예배에 특별히 참예한 어느 유명인사가 주인공 같기도한 마음의 상태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무서운 죄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목회자에게 중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이니이까?" 하고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그의 첩경을 평탄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니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라고 대답했던 세례 요한의 본을 받아 목회자들은 "나는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이시니라" 라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교회가 인간중심의 예배가 되고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께서 2차적인 존재로 밀려나는 경향이 보이는 것은 예배의 개혁을 요하는 부분이다.

  예배신학의 정립

예배는 신학이 뒷받침을 해줄 때에, 건전하게 되고 효과있게 되는 것이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잘 못 인본주의, 신비주의, 개인주의로 빗나가기가 쉽다. 교회 예배는 인본주의적인 실용주의(humanistic pragmatism)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예배가(특히 주일예배 외의 예배들, 특히 부흥성회, 특별기도회) 인간중심의 실용주의적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형편이다. 예배를 자기의 입장에 맞추어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것은 올바른 예배신학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를 위해서는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정립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 신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에, 예배는 삼위일체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노래가 예배의 중심 리듬이 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리지 못했었다. 이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예배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타락된 인간과 세계를 구속하시고 회복시키심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성부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따라 성자 하나님께서 그 구속을 성취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구속을 적용시키심으로 타락된 인간이 구속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게 된것이다.

첫째로, 예배는 "하나님 중심" 예배가 되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존귀하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지존하심을 드러내셨고, 인간을 비롯한 천지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을 비롯하여 천지만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가 된다. 다음으로 타락한 인간과 만물을 구속하신 구속주 하나님이심임으로 예배해야 한다. 인간이 범죄로 타락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행위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생자까지 보내주심으로 인간의 구속을 계획하신 하나님이심에 예배해야 한다. 예배의 신학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전체적인 신학의 기초가 바로 이 주권적인 하나님 중심사상의 기초위에 세워지는 신학이다. "하나님 중심 신학,"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기초요 출발점이 됨과 동시에 예배신학의 기초가 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니라"(요 4:23). 이 말씀은 성경이 성부 하나님께서는 참예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요 예수님께서 참 예배에 대하여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해주신 참 예배에 대한 정의(定意)다.

둘째로, 예배는 제2위가 되시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창세 전에서부터 계셔서, 삼위일체의 제2위(scond person)로서 신의그룹 회의(Divine group council)에 참여하시고 창조사역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더구나 구속주로서 인간과 만물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친히 몸을 드려 그 구속을 성취하신 어린양이시기에 반드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의 생애자체가 예배의 생애요,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케 하신 화해의 행위가 그의 사명이요 직무로 완수하신 분이시므로 화해의 축제인 예배의 주인공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목제물을 기념하기 위해서 행하는 성례가 말씀(화육케 하신)과 함께 예배의 두 기둥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는 구약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친히 피의 제물이 되셔서 지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주인공이심으로 예배받으실 주인공이 되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에 이어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메시야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현재 지상에서는 오신 메시야를, 그리고 종말론적으로는 오실 메시야를 예배하는 것이 그리스도 중심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구속의 기쁨을 노래하게 되기 때문에 성도들의 예배는 "축제의 예배"로 절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예배는 성령님의 감동적인 인도와 진행으로 이루어져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성령의 영감으로 되었으며(딤후 3:16), 그리스도의 탄생은 물론, 그의 사역과 부활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성령께서 주도하셨기 때문에 성령께서도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창조사역에도 참여하셨기 때문에 창조의 노래, 창조의 찬송도 받으셔야 한다. 성령께서는 창조사역시 수면에 운행하시면서(창1:1), 인간에게 호흡을 주시는등 창조사역에 직접적인 활력을 불어 넣으신 것과 같이, 구속사역시에도 직접적인 그의 능력을 통하여, 예수님도 탄생케 하시고 부활시키셨으며, 그 구속의 능력을 인간에게 직접 적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구속을 마무리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도 함께 영광에 참여하시게 되신다. 그러나 예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시다. 성령은 인간을 중생시키시여 각가지 은사와 능력을 주시어서 활동하게 하신다. 구체적으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속에 보혜사(Comforter)로 내주하시고(요 4:16-17 KJV; 롬 8:9-11), 스승(Teacher)으로서 우리를 가르치시고(요 14:26), 권고자(Advisor)로서 말씀하시며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신다(요 14:26). 또 성령은 상담자(Counselor)로서 우리fmf 인도하시고(요 16:13), 심판자(Judge)로서 우리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요 16:8-11). 기도의 중보자(Mediator)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중재역할을 하신다(롬 8:26). 전능자(the Almighty)로서 하나님의 유용한 은사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며(고전 12:11), 평화의 조성자(Peace-Maker)로서 평안의 줄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엡 4:3).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교회의 공동체안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가장 뜻깊은 경배의 시간에 예배를 주도하신다. 그러므로 예배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곧 성령으로 예배하라는 뜻이다. 성령의 영감과 인도하심이 없는 예배는 형식적이며 의식적인 예배에 불과하다.

( 2 )  예배의 인간적인 요소이다. 예배가 절대적으로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드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인간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란 그 대상이 있는 반면에 예배의 행위자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배의 행위자이기 때문에 예배의 이차적인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앞에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예배신학적인 질문이 되는 것이다. 예배의 행위자로서 인간은 독자적으로 그 예배행위를 수행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예배는 인간이 행위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도나 인간의 계획이 개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설하시고 하나님께서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인 동시에, 인간은 하나의 의무자이기 때문에 인간이 주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배를 주도하는 것같으면서도 실상은 주께서(대제사장으로서) 예배를 주도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물도 되시고 제사장도 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영향력으로 당당히 제사장 된것이다(엡 3:12; 히 4:16).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인이 제사장의 직분으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 제사들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벧전 2:9).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성직자들에게 잘못 부여하고 있는 제사장의 직분과 명칭은 삼가야 한다. 성직자는 단순히 예배를 인도하는 인도자일뿐 혼자만의 제사장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 인도자인 목회자는 정연히 하나님앞과 공회앞에 서서 겸허한 마음으로, 성령께서 예배를 주도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예배순서를 비롯하여 설교와 찬양과 기도와 봉 헌 등 예배의 전반적인 진행을 은혜롭게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모두가 "거룩한 제사장"(벧전 2:5)인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 the Body of Christ)이요, 그의 지체들(고전 12:27, members)로 각각 은사대로 세우셔서 교회를 섬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7 -28).
신약성경에 어느 곳을 보아도 목회자가 제도적으로 구약개념의 제사장이라고 언급한 곳은 없다. 심지어 사도들까지도 자신들을 가리켜 제사장이라고 한적이 없다. 구약에서 의미하던 한 공동체의 제도적인 제사장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마감되었고, 우리의 대제사장은 오직 그리스도이시고, 교회의 모든 일원이 제사장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만인제사장설"은 제도적인 의미의 제사장이 아니라 영적이며 개인적인 의미에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안에서의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당당히 나갈 수 있다는 구속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만약에 성직자들이 제도적인 제사장의 직분을 의미한다면 개혁자들이 왜 캐톨릭에서 개혁을 하고 나왔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성직자는 교회라는 조직(organization)의 직분수행의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서 예배를 인도하는(설교와 성례를 집행하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시며, 교회의 모든 일원이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고로, 그리스도께서 온 몸을 드려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린 것같이 모든 사람이 온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 성도의 의무이다. 모든 교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제물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제물되심은 우리의 제사에 절대적인 효력을 부여해주심으로써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영적예배"를 드리게 된다.
  현대예배의 개혁

강단의 개혁은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는 예배(worship service)의 개혁과 또 다른 하나는 목회자의 설교(preaching)의 개혁이다. 특히 현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 분위기와 설교이다. 필자가 미국의 성장하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리서취한(research) 결과로는 성장하는 교회치고 예배 분위기가 대단히 은혜스러웠다는 평가이다. 그리고 목사의 설교 역시 대단히 은혜롭고 현대인들에게 어필(appeal)할 뿐만 아니라 매우 복음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물론 예배란 인간편에서 평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예배의 진행과 결과에 따라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쁨이 되었으며, 예배자들이 이 하나님의 즐거움에 얼마나 유효하게 참여하였는가로 평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드릴 때에 그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가? 영적인 예배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이다(롬12:1). 다시 본문을 주석해보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배는 (1) 몸을 드리는 몸의 제사, (2) 거룩하게 드리는 성스러운 제사, (3) 산 제사, 즉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한다. 결론으로 영적 예배로 드리라는 말씀이다. (1) 몸을 드리는 제사는 그리스도의 "몸의 제사"를 연상하는 말이다. 구약시대에 연속적으로 드리던 속죄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몸"을 제물로 드렸다. 그 당시의 짐승의 몸을 산채로 드린 것이 아니라 죽여서 피를 흘려 제물로 드렸다.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몸을 드려 제물로 바쳐졌고, 이에 관련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롬 6:2; 7:4, 6; 갈 2:19-20). (2) 거룩하게 드리라는 말은, 인간의 죄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힘입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며, 주님께서도 이를 위하여 기도하셨다(요 17:17).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레 11:44; 19:2).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몸을 깨끗게 하라는 뜻이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체나 짐승의 죽은 사체를 보더라도 부정하다고 해서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접근하거나, 제사에 참예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거룩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3)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몸을 의미한다. 즉 현재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의 뜻은 "죄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롬 6:13에서 지적한 대로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죽은 제사가 아니라, 몸을 산 자 같이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혀 죄의 몸은 죽었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산 "의의 몸"이 되었으니, 이제 그리스도의 지체가되었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거룩한 생명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또 "산 제사"(living sacrifice)라는 말씀의 뜻은 계속적인 헌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연속해서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영적 예배로 드리라는 말씀은 우선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이 말씀과 같이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영(God is Spirit)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영적"(spiritual)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상(偶像)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제1계명에서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제2계명에서 아무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영적인 예배"라는 말의 구체적인 뜻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배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기 보다도, 인위적인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몸을 드리기 보다는 물질로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거룩하게 드리기 보다는 죄악으로 점철된 죄로 흠이 있는 상태로, 그리스도의 성결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채,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진정한 회개와 고백이 없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배행위가 하나의 형식적인 의식에 그치고 생활의 고백과 표현인 산 예배가 아니라 죽은 행실의 의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현대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인간적인 차원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지만 예배의 행위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예배를 받기를 원하신다고 해도 예배의 행위자가 없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기 위하여 그 예배의 행위자인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의 행위자에게 모든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배하는 것도 자유의지에 맡끼신 것인데, 그 자유의지의 잘못 사용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인간의 탈선으로 결국 하나님은 예배를 받지 못하시게 되었고, 인간은 멀리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예배할 자를 찾으신 것이다. 물론 인간은 본래부터 자기를 창조한 신(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성향(宗敎性, religiosity)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도 여러 신들을 만들어 놓고, 심지어는 "아지 못하는 신"(TO THE UNKNOWN GOD)까지 만들어 놓고 예배한 것을 볼 수 있다(행 17:23). 인간이 신을 찾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유는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요,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이 떠나서 모습을 감추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죄인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면 죽기 때문에-그리스도께서 중재에 나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은 다시 인간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가지 조차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더욱 안타까우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예배의 문제점이라 하겠다. 다른 의미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인간의 관심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배에 있어서의 인간의 입장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예배의 본질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용하여 영광을 받고, 즐기시자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이것이 이 문제를 푸는 키포인트(key point)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이 순전한 이기주의자가 아니시다. 그렇다고 인간과 공동 유익을 취하자고 하시는 분도 아니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종속적이면서 완전한 자유에의 행복이다. 먼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다. 아버지가 기쁘니 아들도 기쁘다. 아버지는 기쁨을 창조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일에 순종함으로 그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영광과 기쁨과 그 즐거움에 인간이 순종함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된다(마 25:21).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성도들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기쁨을 배제하지 않으신다.

  예배와 교회성장

예배는 교회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분명히 예배는 교회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결과가 교회성장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예배가 은혜롭고 축복이 넘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 나오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교회가 우선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은 말해주는 것이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 나온다는 것은 그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성장을 위하여-교회성장이 교회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지만-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하는 것은 교회성장학적인 질문이다. 교회성장학적으로 질문할 때에 언제나 그 시비가 뒤따르기도 하지만, 이 질문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권위를 묻는 교리적인 근본적 질문이 아니라, 상황적, 선교적인 질문이기 때문에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좀더 근본적으로 질문하자면,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결과로 교회성장을 가져왔느냐?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인론적으로 결과를 추론하려는 것이고, 결과를 위한 원인을 창작하자는 뜻이 아니다.
과연, 예배가 교회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관련해서 어떤 상태에 있는가? 예배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이 문제들이 이 부분에서 논하려는 문제들이다. 사실, 한국교회의 예배를 분석해보면, 아직까지도 유교적인 권위주의적 양반형의 예배로 어떤 면에 있어서는 경색되어 있는 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경건한 모양이 전혀 나쁜 것은 아니다. 유교의 수직관계의 권위적인 자세가 지금까지는 교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규모(規模)있는 자세와 경건한 모양을 만들어 주어,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직자의 권위를 세원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직자들을 존경함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받아 누린 축복도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의 과거 권위주의적 목회방식을 무조건 비난할 것도 못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좀 다른 차원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대 문화적인 차원에서 조명해보아야 할 시점에 와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현대교회는 구시대의 패턴(pattern)과 매너(manmer)를 고집할 때는 이미 지난 것 같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의 패턴을 좀 바꿀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 예배의 행위자들의 구성이 현대문화적인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성장학적인 안목으로 볼 때에 이제는 교회의 예배를 고루한 옛날 의식적인 틀(형식)에 매어서 신령하고 생동력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배의 대상이나 내용은 불변하지만 예배의 형식과 진행스타일에는 변화를 주는 것이 은혜롭고 하나님께나 인간에게 유익이 되리라 믿는다. 성경적으로 볼 때, 구약시대의 예배나 신약시대의 예배의 대상과 그 내용은 동일했으나, 예배의 형식이나 진행방법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내용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찬송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 같이 산에서 양을 잡고, 예루살렘에 꼭 올라가서 예배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고 어디서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신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5). 그러면 현대 교회가 교회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떤 면에서 개혁해야 하는가?

첫째로, 현대교회의 예배는 예배신학을 정립하여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에서부터 개혁해나가야 한다. 예배가 없는 신학도 문제이지만, 신학이 없는 예배 또한 문제이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자칫 샤마니즘적인 예배(Shamanistic worship)가 되거나, 아니면 형식적인 매너리즘(conventional mannerism)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신학을 정립해서 현실적으로 잘 적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living sacrifice)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그 영광과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언급한바 있다. 특히 그리스도론적이며 성령의 주도하에 드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약의 예배와 달리, 신약의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건에 그 초점이 모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사건들(탄생, 생애, 죽음, 부활, 승천, 재림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통하여 드려졌다. 그 예배의 기원(origin)과 예배의 원형(prototype)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승천하신 후의 원시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언급(요 4:21-24), 사도들의 예배(행 2:42-46; 5:42)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예배의 내용은 사도의 "가르침"(      )과,  "교제"(        )와, "떡을 떼는 일"(                ), 그리고 "기도"(        ) 등이다.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교제"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교제로 이 교제를 위해서 "애찬" (agape)이 준비되곤 하였다. 물론, 이 애찬의 문제로 고린도 교회에서는 씨끄럽기도 했었다(고전 11:17-22). 바울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함을 대강 믿었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  11:18-22)라고 책망했다. 이 애찬은 주의 만찬인 성만찬이 아니라 신자들이 교회에서 그들의 교제(交際)를 위하여 나누는 사랑의 애찬(the meals of lovely feast)을 의미한다(고전 11:17-21; 유 1:12). 그 다음으로 "떡을 떼는 일"은 주의 성찬을 가리킨다(고전 11:23-29). 이 성찬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감사와 간구와 송축으로 이루어진다. 고백에는 회개와 신앙의 고백으로, 자기의 죄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마16:16)을 내포하고 있다. 감사는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감사하는 내용이며, 간구는 신앙고백적 생활을 위한 청원이다. 결국 생활의 변화를 추구하는 내용이 된다. 사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근본적이고 매우 단순했었다.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예배당과 그 안의 초호화판 시설도, 화려한 조명도, 웅장한 강대상과 성만찬상, 그리고 각종 현대적인 악기들도 없는 소박한 가정집이 아니면 공공건물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날과 같은 강한 하나님의 영감이 넘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께 온 몸과 뜻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전폭적으로 드려지는 그야말로 신령한 예배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배는 어떠한가? 초대교회의 예배신학을 정립하여 우리 교회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교육 훈련함으로서 예배개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진지한 고백적 예배가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배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 "고백"(condession)의 부분이다. 고백은 예배의 영적인 진행의 내용으로 볼 때에, 송영다음으로 가장 먼저 있어야 할 순서이다. 기도에는 회개(참회)와 신앙고백과 간구와 감사로 이루어진다. 송영의 부분을 하나님의 존귀와 능력과 권세와 창조의 사역을 찬양하는 부분이라면, 기도의 순서는 죄악으로 단절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 자기의 몸을 던져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 교통의 길이 참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예배에 개입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질의 예물을 드리기 전에 자기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밖는 역사가 있어야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배는 어떠한가? 현대교회에서 회개라는 용어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말이 되어 버렸다.
한국교회도 예배나 심지어 부흥성회시에도 회개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성령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임하시며, 반대로 거짓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 즉 십자가의 사건을 부인하는 영이다(요일 4:1). 그러므로 성령을 통한 신령한 예배를 위해서는 회개를 통한 십자가의 내용이 담겨진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한참 부흥의 불길이 넘치든 과거와 같이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져 복달라는 예배로 일관되고 있는 인상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성호를 찬송하고, 회개와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에 동참하는 축제예배(祝祭禮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에 의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6:16)라는 고백을 통하여 그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에게 부딪여서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서 죽는 역사(갈 2:20)가 일어나야 한다. 사마리아 여자는 수가성 우물가에서 우연히 주님을 만나 참 예배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참 예배를 드리는 체험을 했던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는 주님을 만나서 처음에는 유대의 낯선 청년으로 알았지만, 주님과의 대화중에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점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고 있고, 자기가 고대하던 그리스도(요 4:25)를, 말씀(설교)을 통하여 깨닫게 됨과 동시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고, 이로 인하여 동네로 들어가서 열심히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신앙적인 문제중에서 "참 예배"가 어디서 드리는 것이냐?고 질문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참 예배"란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라고 설명해주셨다(요 4:24).
셋째로, 예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와 부활을 통한 승리를 선포하고 찬송하며 참예하는 축제예배(celebration worship service)로 이어져야 한다. 본래 예배는 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달리심이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죄를 속하는 제사로서, 그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을 위해 탄생하신 복된 소식, 기쁜 소식임으로 축제의 의미를 더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탄생 예배부터 축제의 예배이며, 예배의 전체적인 기능이 축제를 전제하거나 축제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예배는 반드시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노래하며, 성령의 같이 하심을 감사하는 축제적인 내용으로 일관된 예배이기 때문에 축제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떤 분위기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요즈음에는 미국교회의 영향으로 축제예배로 전환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을 볼 수 있는데, 이 문제는 교회성장학의 차원에서 볼 때에,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한국교회는 과거의 유교적인 형식과 캐톨릭의 의식적인 예배형식의 영향으로 형식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교파적으로 보면, 루터교회나 성공회와 같은 교회들은 캐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의식으로 치우쳐 있고, 감리교회나 회중교회는 예배의식이 없으며, 개혁교회나 장로교회는 일정한 순서는 가지고 있으나 형식에 별로 매이지는 않고, 침례교회는 일정한 순서가 없다. 한국교회를 보면, 대부분의 교파들이 거의 비슷한 의식과 예배순서들을 가지고 있다. 축제예배에 있어서 의식이나 형식들은 그렇게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기쁨으로 마음껏 영광을 돌린다.

넷째로, 예배형식에 너무 매여서는 신령한 예배를 드리기가 어렵다. 미국교회 같은 데서는 예배형식에 별로 매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배순서에 있어서 미국교회들은 거의 무시하고 주보에는 대부분이 신문에 내는 것과 같이 광고로 일관되어 있다. 예배순서는 거의 무시하기 때문에 예배진행 자체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다. 판에 박인 듯한 한국교회의 주보를 보다가 미국교회의 주보를 보면, 순서진행을 따라가는데 혼동을 초래하기 쉽다. 주보에는 다만 그 날의 스피커(speaker: 설교자)가 누구이며, 특송은 누가 하는가 정도뿐이고, 나머지 지면은 거의가 교회의 소그룹 프로그램을 광고로 싣는다. 물론, 예외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오렌지 카운티늬 가든 그로브(Garden Grove, Orange County)시에 있는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예배순서가 한국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예배진행 방법은 좀 다르다. 한국교회와 같이 사회로 인하여 리듬이 자주 끊어지거나, 굳어 있는 듯한 느낌이 거의 없다. 그리고 미국교회들는 목사가 거의 까운을 입지 않는다. 물론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나 제일장로교회의 제임스 케네디(James Kenedy) 목사는 까운을 즐겨 입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교회 목사들은 까운을 입지 않는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형식을 아름답게 차리고도 자연스럽고 은혜로운 예배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까운이 다윗에게 부자유스러웠던 사울의 갑옷과 같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제사장의 까운도, 예배순서도, 악기 없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로운 신령한 예배를 드렸다.
문화의 이기(利器)들을 이용하는 것은 좋으나 그런 것들로 인해서 신령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면 문제가 된다. 한국교회는 예배순서나 형식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예배의 분위기는 축제의 분위기로 바꾸어 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성장하는 교회마다 찬양을 통한 축제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축제예배는 특히 카리스마 교회들에서 유행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포도원교회가 찬양과 치유목회로 잘 알려져 있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들을 보면 대부분이 록음악(Rock-N-Roll)이나 째즈음악(Jazz music)을 하던 사람들이 리더가 되어 있다. 포도원교회의 창설자인 죤 윔버(John Wimber) 목사도 째즈음악 출신이다. 문제는 이러한 세속음악의 리듬을 교회에서 어떻게 이용하느냐인데, 사실상 교회에서는 세속적인 음악을 직접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예배나 교인들의 생활에서 전혀 불가한 이러한 리듬들을 선교나 전도대상들을 상대로 일시적으로 이용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빌 하이벨즈(Bill Hybels) 목사가 이끄는 시카고 윌로우크릭 공동체교회(Willow Creek Commiunity)이다. 이 교회는 교회예배와는 별도로 토요일 불신자들을 위한 모임에서 세속적인 음악이나 운동 등 전도를 위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전도전략(Seeker driven strategy)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와 같이 축제예배는 형식들을 초월한다. 목사와 교인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기쁨으로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한국교회들은 예배분위기가 딱딱하고 굳어져 있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마음을 좀체로 열지 않는다. 물론, 죄로 인해서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기의 체면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좀체로 마음을 열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께 예배하는데도 치명적인 지장을 초래한다.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신자 접근(out-reach)에 적극적이어야 하며, 그들이 동화할 수 있는 교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신자들은 물론 불신자들이 예배에 참예하였을 경우에 형식에 매인 딱딱하고 메마른 예배분위기는 불신자들은 물론 교인들까지도 견디기가 힘들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일대 교회성장을 이룬 교회중 미국의 캘리포니아 남부 엘토로(Eltoro) 지역에 위치한 릭 워렌(Rick Warren) 목사가 목회하는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가 있다. 이 교회의 전도 전략은 불신자들을 교회의 예배분위기로 감동을 주어서 유도하는 구도자 감동전략(seeker sensitive strategy)을 사용하고 있다. 교인들을 예배의 분위기에서 은혜로 인도하고 특히 불신자들의 전도를 위하여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추수감사절등 미국의 큰 절기들을 이용하여 불신자들을 끌어들이는 특별 프로그램(community program)을 진행시키는데 이 때에 모이는 사람들이 31,0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때에는 특히 예배형식에 매이지 않고 신자와 불신자와 함께 어우러져서 축제에 만끽한다. 결국 기성교회의 의식과 형식의 높은 담을 헐어버림으로서 불신자들까지 관심을 가지고 참예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크리스챤이 되도록 한다. 한국교회도 예배가 지나치게 형식적이 되어서 분위기가 굳어 있는 것을 축제의 분위기로 바꾸는 형식의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그 형식에서부터 개혁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유교적인 틀을 벗어난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이 말은 지나치게 예배형식에 매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형식에 너무 매이다 보면, 예배의 영성(靈性)이 약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을 잘 갖춤과 동시에 예배의 내용에 있어서 신령하고 진정한 예가 된다면 참으로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형식에 지나치게 매여서 전통만 고집하다 보면 예배 자체에 영성이 약해지고(형식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상반되기 때문에), 은혜롭지 못하여 불신자들은 물론 교인들에게까지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께 대한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성장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요 4:24)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반드시 신령으로 드려야 한다.

(2) 설교의 개혁 (Renewal of the Preaching)

시대와 사람과 삶의 현장의 변화에 따라 교회에서도 목회자들의 메시지 내용과 전달방법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본질의 변화없이 현대적인 표현과 현대적인 언어로 전달방법을 개발해나가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전근대적인 방법들은 어필되지 않는다. 본래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세계, 그것도 타락된 셰계로 진입하여 인간이 살고 있는 현장에서 구원을 유발케 하는 말씀의 사역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텍스트(text)가 역사(history)와 문화(culture)를 통하여 콘텍스트(context)인 인생 현장에 역사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설교란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말씀의 원문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설교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자체, 즉 기록된 성경본문과 꼭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문화언어적인 차원에서 설명(說明)해서 인간의변화를 유발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라는 기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설교의 본체는「화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선재하신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바로 살아서 걸어다니시고 말씀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질병도 고치시고, 죽은자도 살리시던 화육되신 말씀, 곧 설교 그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설교는 화육설교의 방식을 취해야 한다.

  설교 내용의 개혁

강단의 개혁은, 먼저 설교 내용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말씀을 이탈하거나 복음의 핵심을 잡지 못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헤메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이유는 설교학(homiletics)의 연구를 무시하거나, 성경지식, 더 나가서는 신학적 지식(theological understanding)의 빈곤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학적, 설교학적 지식이 풍부하거나, 성경적 기초(biblical basis)가 튼튼하면서 은혜롭게 설교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기 때문에, 필자가 말하고져 하는 것은 신학적 지식을 떠나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주신 은혜 가운데, 받은 복음을 변질시킴이 없이 쉽게 전하면 된다는 뜻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 이상으로 전하려 할때, 설교가 비성서적 내지 비복음적인 메시지가 되기 쉬운 것이다. 오히려 성경을 그대로 전하면 염려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 중에 설교 본문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하다 보면, 자기 소리만 늘어놓다 말게 된다. 더 나가서 이상한 소리까지 하게 되어 교인들의 신앙사상에 지극히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성경해석학(hermeneutics)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여, 아무 해석법이나 마구 적용하는 경향이 많다. 한 예를 든다면, 성경을 우화적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일변도로 적용하여 성경구절의 의도나(intention), 그 진의(true meaning)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희한한 동음이의의 신소리(pun)로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설교 준비를 위한 성경해석은 설교학적 패턴(homiletical pattern)으로 말하여 설명하면,  선택한 성경의 본문(sermon text: Scriptures) 성경 해석학(hermeneutics)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의 배경라인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조직신학적 뼈대와 성서신학적 체계에 꼭 맞는 성경 해석학의 도구들(tools)을 사용하여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exegesis or exposition)한 후에, 성령의 능력(spiritual power)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 효과있게 적용함으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 성경해석학은 조직신학과 성성신학과 같은 체계적인 성경원리에 맞추어 제작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연장(tool)이라고 할수 있다. 기계를 분해하거나 조립하기 위하여 종류나 규격이 꼭 맞는 연장을 선택해서 사용해야 되는 것과 같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도 해당 구절을 주석하는데 꼭 맞는 성경해석법의 연장(tool)을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한다. 물론, 성경해석에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주도(top priority of initiative)는 성령(the Holy Spirit)께서 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 본문을 택하거나, 해석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주석(commentaries)이나 다른 신학적인 서적들(theological books)을 먼저 떠들어서는 안된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기회를 빼앗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설교자(preacher)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엎드려 기도함으로 성령의 영감, 즉 설교의 영감을 받은 후에, 성령의 지혜를 통하여 설교 본문의 해석으로 들어가야 한다.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직접적인 연장은 성경해석학의 방법이므로, 성경해석법 중에 어느 방법, 즉 어떤 연장(tool)을 사용해야 할지를 결정하여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성경해석이 올바로 된 것인지,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이 확인작업을 하기 위하여,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의 원리가 필요하고, 권위있는 주석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체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오용하기 쉽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올바른 성서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delivery)해야 할 책임이 목회자들에게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하여 전달하는 설교의 내용이 철저하게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설교 형식의 개혁

강단의 개혁은, 다음으로 설교형태의 변화를 통하여 시도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에서 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제목설교(topical preaching)를 위주로 하였다. 한국교회는 초기에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설교형식인 제목설교가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대로 이식(移植)되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제목설교가 적절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조직에 있어서 통일성이 있고, 내용에 있어서 명료해서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교의 통일성과 간결성의 잇점 때문에 제목설교가 한국교회 선교의 백년사 속에서 주역을 담당해 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당시 한국 교회의 초기 단계의 상황으로 보아 제목설교가, 많은 잇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설교유형들 보다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도 많이 바뀌었거나 기성인들도 많이 발전됐다. 성숙했다는 표현이 좋을런지 모른다. 물론, 급진 신학자들이 말하는 신앙이 아닌 실존적으로 "성숙한 인간"(man of age)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받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신앙이 많이 성장했고, 그리스도인의 문화생활도 많이 발전해서 생활양식(life style)이 달라짐에 따라 이에 부응해서 현대인에게 적절한 영의 양식을, 때를 따라 공급해 줄 사명이 설교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한다면 현대인의 식성에 맞도록, 좀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영양가가 풍부한 식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말이다. 효과적인 설교방법을 통하여 복음의 진수성찬을 효과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뜻이다. 홀랜드(Dewitte T. Holand)는 설교는 목사의 직무와 함께 계속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양적으로 향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반대로 인위적인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변질돨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대부분 강해설교 형태(expository preaching style)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항상 그렇지만,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 있어서 강해설교가 적절하다고 본다. 제목설교가 간결성과 통일성의 장점도 있지만, 독창성이나 본문을 등한히 취급하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홍정길 목사는 제목설교가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전하기 쉬우므로 바람직한 설교가 아니라고 부정론을 폈다. 그는 제목설교의 위험성을 전제하고, 제목설교는 근본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한국교회에 바람직한 설교형태는 본문의 강해설교라고 주장했다. 이성헌 목사도 강해설교가 설교의 원형으로서 처음부터, 예수님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설교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콜러(Charles W. Koller)도 강해설교가 설교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강해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언제나 성경 본문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약간의 약점도 없지는 않다. 그 중에 하나가 현장과 연결시키는 적용(application)의 기술이나 배려이다. 성경 본문에만 집중하다 보면, 하나의 주석가로 끝나기 쉬운 약점에 빠지기 쉽다. 목회현장(ministry field), 삶의 현장(context)을 소홀히 하여, 오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당시의 말씀, 나의 말씀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끝나기 쉬운 약점이 있다. 강해설교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본서에서는 간단하게 네 가지 방법(four types)을 소개한다. 첫째, 내연형으로 본문의 "집중강해식"(intensive type) 설교방법이다. 이 강해설교의 방식은 성경 본문 전체를 한 구절 한 구절씩(one verse by one verse) 빠짐없이 세밀하게(in detail), 그리고 집중적으로(intensively) 강해해나가는 설교방법이다. 둘째가, 외연형으로 본문의 "확대강해식"(extensive type) 설교방법이다. 이 강해설교 방법은 본문은 물론 본문에 관련된 내용을 전성경(all Scriptures)에까지 확대하여(extensively) 본문의 전달내용을 보강하는 방법이다. 셋째는, 선택형으로 본문의 구절 "선택강해식"(selective style) 설교방법이다. 이 방법은 본문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high-light)을 선택해서 그 부분을 중심테마(central theme)로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넷째는, 숙고형으로 본문의 "반영강해식"(reflective style) 설교방법이다. 이 방법은 마치 보석상이 보석을 다면(多面)으로 깎아서 보석의 여러 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선택된 본문의 여러면의 의미를  반영시키는 방법으로 다면영상(多面映像, multi-screen)의 효과의 장점들을 최대한도로 이용하는 설교방법이다.

  설교 방식의 개혁

셋째, 강단의 개혁은 설교의 전달방법(delivery method)에 있어서 화육설교(incarnational preaching)의 방법을 구사하도록 해야 한다. 화육설교(incarnational preaching)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을 전제로한 설교로, 인간의 영혼과 육신생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전인격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기적의 메시지(miracle message)로서 인격화된 메시지(personified message)이다. 이 설교 말씀을 통하여 영혼이 거듭나고(born again), 삶의 가치관(a value of human life)이 바뀌고, 육신의 질병(physical disease)도 치유되고, 사회(human society)가 변화된다. 이 설교는 설교의 내용과 언어에 멎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육사건"(incarnational event)을 유발시키게 하는 설교방식이다. 본문과 설교내용, 그리고 전달언어 속에만 화육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교인들의 영혼과 생활현장에 "화육사건"으로 생생하게 육박해 와서(has been coming) 부딪히는(touchable) 설교를 말한다. 영혼을 터치해서(touch) 거듭나게 하고, 생활을 변화시키는(change of life) 그러한 말씀을 말한다.
요 1:14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매"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라고 했는데, 이 사건이 곧 화육사건이요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        )가 세상에 말씀되고(spoken) 선포된(preached) 그리스도의 말씀(               )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선재의 말씀(pre-existent Logos)을 말하며, 후자는 화육된 말씀(incarnate Logos or God-Man)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씀"(the Word)이라는 용어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헬라어 단어들 즉 "로고스"(     )와 "레마"(    )의 어원학적인 용법(etymological use)에 절대적인 해석의 키(key to an interpretation)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용어가 신·구약성경에서 교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히브리어에서 "말씀"(   )의 어원학적 의미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의 배후에는 두 가지 개념, 즉 지성적 요소(a noetic element)인 "사상"(the thought)과 역학적 요소(a dynamic element)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용어(用語)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학적 이해(theological understanding)와 성경 말씀의 설교학적 적용(homiletical application)에 접근하기 쉬운 면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선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용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론(theory of Trinity)을 정립하는데 용이하다. 다시 말하면, 이 용어를 통하여 말씀으로 선재하신 하나님(Godhead)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incarnate Christ)의 선재형(pre-existential image)으로서, 그 선재하신 하나님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설교학적인 면에서 볼 때, 선포된 말씀은 "믿음"(      )의 상태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말씀"(            )은 롬 10:8의 "믿음의 말씀"(                 )의 뜻과 같다.  흠정역 성경(KJV)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성경 로마서 10장 17절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으로 번역되었으나, 새 국제번역 성경(NIV)과 한글 개역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Word of Christ:                    )으로 번역되어, 오히려 후자의 번역이 신학적, 설교학적 배려(配慮)를 더 한 셈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레도우스(Greathouse, William M.)는 "그리스도의 말씀"(the word of Christ)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는 말보다 더 주의를 끈다고 말했다. 사실상,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것(that the word has been preached)은 역사하는 "믿음의 방편"(the means of working faith)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은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aith)으로 그 말씀이 믿음을 생기게(beget) 하고 자라게도(flourish)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God's revealed word)은 "그리스도"(Christ)로서 곧 "살아있는 말씀"(the living word)이요 "세상에 오신 말씀"(the word came into the world), "역사하는 말씀"(the working word)으로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메시지"(the Divine message), 곧 "선포된 말씀"(the word preached)으로 설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선포" (preaching)가 "역사하는 믿음의 방편"(the means of working faith)이라고 했으니, 그 선포, 즉 "설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화육사건" (incarnation event of Christ)의 방식을 취해야 하므로, 이는 근본적으로 화육설교(incarnational preaching)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화육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스데반이나 바울사도와 같이 준비한 설교말씀에 반드시 사로잡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마 1:20).

2. 평신도 운동의 전개

평신도 사역에 관한 내용들은 저자의 저서인「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의 내용중에 제1장, 제2장, 제3장, 즉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 "소그룹 운동론"(small group movement), 그리고 "제자 훈련론"(discipleship training)에서 필요에 따라 상세히 언급하였다. 특히 "소그룹 운동론"과 "제자훈련론"에서 평신도 사역에 관하여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일독을 권한다. 사실, 평신도는 목회학상으로 볼 때에, 목회자의 목회활동에 동참해야 하는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companion)요 파트너(partner)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불모의 상태였는데, 1970년도 후반기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교회에서 이미 정착되어 있는 평신도 운동을 도입하여 한국교회에 적용하여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였다.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

평신도(lay-people)는 목회자와 함께 교회성장의 양대 자이언트(giant)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교회성장 프로젝트(project)의 프로그램(program)의 궤도(rail)를 따라 함께 달리는 동반자로서, 즉 목회자는 기관차의 기관(engine), 평신도는 객차(passenger train)로 비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둘 다 빼놓을 수 없는 파트너(partn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목회자와 평신도가 공존하면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상호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분명하며, 분담사역(sharing ministry)이라 해도, 두 직분 사이에는 직무상의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가 선명하지 못할 경우에 교회는 혼란이 일어나고 시험에 말리기 쉽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목회자는 이 점을 교인들에게 잘 교육시키고 훈련시키지 않으면 목회사역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평신도 사역이 성서적이며 교회성장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제3물결과 제4물결을 타야할 현대교회로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목회사역 협력체제가 필요한 것이다.

(2) 목회 사역의 구조 변환

여러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평신도 사역은 목회자의 목회활동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목회방법이 되어 왔던, 교회의 평신도 사역을 무시하는「목회자 활동 평신도 비활동 구조」(active pastor-passive sheep structure)의 좀 잘못된 목회방식(ministry pattern)을 뛰어 넘어서, 목회방법의 과감한 개혁으로, 평신도들의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평신도 사역"(lay-ministry)을 백분 활용하는 목회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목회는 목회자만이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멘탈리티(mentality),「목회자 활동 평신도 비활동 구조」(active pastor passive sheep structure)로부터 탈피해서 정상적인「목회자/평신도 공동사역 구조」(pastor/laity coworker structure)로 바꿔야 한다. 목회사역은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에 따라, 자기 위치에서 월권하지 않고 자기의 맡은바 직분에 충실할 때, 부작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성장한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역은 교회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목회자로서 평신도 사역을 꺼려한다면 지속적인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해서 교회성장에 활용해야 한다. 전근대적인 목회구조는 특히 현대 교회에서는 걸맞지 않는 구조이며,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목회구조를 구축할 때가 온 것이다.

(3) 평신도 지도자 훈련

모세(Moses)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은혜가 충만하다 하더라도, 그 많은 사역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영육간에 피곤에 지쳐서 쓰러질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그의 장인 이드로(Jethro)의 충고대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선출하여 사역을 분담함으로(shared ministry) 일을 힘들이지 않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출 18:14-18). 예수께서도 복음사역을 위하여 맨 처음에 시작하신 것이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훈련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 한 사람이 열 시간동안 해서 피곤해 지칠 일을, 평신도 열 명을 훈련시켜서 하게 되면 힘들이지 않고도 한 시간 내에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평신도 지도자를 훈련시켜야 할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를 삼아 훈련시키라고 마지막으로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9:19-20). 지도자 훈련에 관하여는 필자의 저서인「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의 제2장과 제3장에 있는 "소그룹운동론"과 "제자훈련론"에서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신앙생활 훈련: 성경공부

평신도의 훈련에는 "신앙생활 훈련"과 "전도생활 훈련," 그리고"봉사생활 훈련"으로 분류해서 생각하기로 한다. 평신도를 기본적인 자기의 신앙생활을 훌륭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훈련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신앙훈련을 받고 자기의 생활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승리의 삶을 살도록 한다. 가정에서의 부부생활과 가족들의 신앙생활을 유도하는 신앙을 훈련한다. 사회의 직장에 나아가서 자신의 행복한 신앙생활을 보여줌으로 행동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수 있고, 기회를 따라서 불신자들에게 자기의 은혜롭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간증할 수도 있도록 훈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교회 공동체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훈련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공부를 통해서 신앙으로 무장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 훈련에서는 성경공부를 위주로 하면서 친교시간을 가짐으로써 성도의 교제를 한다. 평신도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도생활 훈련: 제자훈련

평신도의 지도자들의 전도생활 훈련은 앞에서 언급한 신앙생활 훈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전도생활의 훈련은 교인들과 불신자들에 대한 전도사역을 목적으로 하는 제자훈련이다. 이 훈련은 평신도의 신앙생활 훈련에 이어 평신도 사역에 사명을 갖도록 하고 그들에게 강도높게 집중적으로 시키는 제자훈련이다. 물론, 평신도 신앙생활 훈련에서 일차 제자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이 훈련에도 잘 적응할 수 있다. 이 훈련은 단순히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로서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강도높게 시키는 평신도 사역을 위한 지도자 훈련이다. 평신도 지도자는 일반 평신도의 수준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서 사명감에 충만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평신도 전도사역의 계획에 따라 교회안에서와 교회밖에서의 그들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교회봉사 훈련: 제직훈련

평신도 지도자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물론, 이 부분에서 "신앙생활 훈련"과 "전도생활 훈련," 그리고 "봉사생활 훈련"으로 분류해서 평신도 지도자가의 생활과 전도훈련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엄격하게 구별하자면, 평신도 지도자들은 일반 평신도의 국면과 소그룹 지도자의 국면과 교회 직원의 국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훈련을 다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평신도 지도자는 일반 평신들 보다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하고, 전도에도 남달리 열성적이어야 하면서, 교회의 제직으로서 교회의 사역에도 충실한 사역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교회봉사생활 훈련까지 철저히 받아야 한다.

(4) 평신도 지도자 사역

평신도를 훈련했으면 그들을 목회사역에 참여시켜야 한다.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사역 참여(participation)는 어떠한 의미에서 모든 평신도의 목회활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서 평신도의 사역이 세밀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첫째로,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사역의 영역이 직접적인 평신도의 세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목회자도 평신도와 밀착되어 있지만, 목회자는 목회사역의 중요한 부분들, 예를 들면 설교(preaching)와 교회행정(church administration), 교회의 주요활동(main activities)등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에 평신도를 가까이 접하는 일이 아무래도 평신도만 못하나, 평신도 지도자는 항상 평신도와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평신도와 접촉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둘째로,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목회자와 평신도간에는 생각(thinking)과 정서적인 간격(emotional gap)이 있지만, 평신도 지도자는 평신도 출신으로 역시 평신도의 위치에 있으므로 같은 입장에서의 평신도와의 접근은 목회자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목회사역에 과감하게 참여시킴으로써 교회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간혹 목회자들 중에는 평신도 목회사역의 직접적인 참여에 따른 부작용(side effects), 즉 목회자를 비판하고 교회에 대한 불만을 조성, 어떤 그룹(peripheral group)을 형성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해서 염려하여 평신도 지도자의 직접적인 목회사역을 꺼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자세이며 기우에 불과하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항상 평신도에 대한 부정적인 콤플렉스(complex)에 빠져, 교회성장을 위한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없게 되어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우선 적극적이고 과감한 자세로 이러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하며, 혹시라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철저한 평신도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훈련을 받지 못한 평신도(untrained people)들 중에서 문제들를 일으키는 문제아(problem maker)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느 교회나 문제아(trouble maker)가 되기 전에 성격이나 그의신앙의 성장배경에 따라 목회자가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difficult people)들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들을 품에 안아서 다룰 수 있는 아량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훈련을 통하여 얼마든지 변화되어 목회자의 목회사역을 도울 수 있는 평신도 내지 평신도 지도자(lay-leader)로 잘 길들여질 수(trained, edified, and oriented people)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천의 하나 만의 하나 전혀 변화가 되지 못하고 마는 구제불능의 사람(impossible people)이 있는데,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교회가 시험에 들거나 병들게 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안됐지만 속히 수술해야 한다. 물론 수술방법과 수술범위, 수술 후의 치료 등 사전에 세심한 배려를 통하여 후유증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런 수술방법은 극한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서, 함부로 사용하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교회 관리론(church management) 가운데 인간 관리(people management)나 갈등 관리(conflict management)의 분야에서 하게 된다. 부연해서 코멘트 하자면, 목회자가 목회를 위한 연구는 다양하게 전문적으로 해야 하는데, 예를 들자면, 교회 관리(church management)중에 인간관리(people management), 시간 관리(time management)와, 재정 관리(financial management)와, 프로그램 관리(program management)와, 건강 관리(health care), 그리고 행정 관리(church administration)등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면 목회사역에 도움이 될 것아다.

3. 프로그램의 개발

교회성장을 위하여 교회활동 프로그램에 대한 개발(development of programs)은 목회자의 개발(development of pastor)과 평신도의 개발(development of laity)에 이어, 세번째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와 평신도가 있는 교회라 하더라도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programs)이 없으면, 그 교회는 비활동교회(inactive church)가 되어서 잠을 자는 교회(sleeping church), 아니면 쇠퇴해가는 교회(declining church)나 마찬가지다. 할 일이 없어서 낮잠이나 자다 보면 무기력하게 되어, 나중에는 병들어 죽어가게 된다. 사람도 전혀 활동을 하지 않으면 단명하며, 적당한 운동(exercises)과, 특히 목적있는 일들(works or activities)을 의욕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건강(physical health)을 위해서는 물론, 정신건강(mental hygiene)에도 좋기 때문에 장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메리칸-인디언(American-Indian)의 경우, 그들은 미국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비(welfare, food-stamp etc.)를 받아 먹고 일을 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단명하다고 한다. 이러한 생물학적 원리(biological principle)는 교회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교회도 바울 사도가 비유한대로 하나의 유기체(organic body)이기 때문이다. 활동하지 않는 교회는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활동 프로그램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오래 전에 한국 교회에 정착된 구역예배 활동을 비롯하여 성경공부반(Bible study class), 제자훈련반(discipleship training class), 각분야별의 그룹의 교육훈련, 예를 들면 연령별로 분류해서 노년 그룹(senior group), 장년 그룹(adult group), 청년 그룹(youth group), 청소년 그룹(teenager group), 소년소녀 그룹(boys and girls group), 유년반(children class), 유아반(baby class), 그리고 학력별로 분류해서, 장년 성경공부반(adult Bible study class), 대학생반(college and university class), 고등학생반(high school class), 중학생반(middle/junior high school class), 초등학생반(elementary school class), 유치반(preschool class), 유아반(baby class), 탁아소(nursery school), 성격별로 분류해서 커풀 그룹(couple group), 남녀 씽글 그룹(single group)과, 직장 그룹(business group)과, 사춘기 그룹(adolescence group)과, 금연반(non-smoking class), 그리고 중독증 교정반(toxicosis treatment class) 등, 이 외에도 각 지교회의 적성에 맞게 효과적인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교회활동에 이용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엘도로 지역에 있는 쌔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에서는 무려 80여 가지나 되는 소그룹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적용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소그룹 종류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일반적인 것들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수없이 많은데, 이 소그룹 프로그램들은 자기 교회의 상황에 맞기 재개발해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부언한다. 다음은 교회의 소그룹 프로그램들인데, 전통적으로 시행해 내려오는 교회의 교육기관의 그룹들과 주로 소달리티 스타일(sodality style)로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소그룹들의 리스트로서 참고하기 바란다. 이 리스트외에도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교회에서 활용할 수 있고 단지 교회에 맞게 개선, 적용해야 한다.

1. 교회 교육기관 (Church educational institutions)

   (1) 탁아부 (Baby sitter/nursury class)
   (2) 유아부 (Baby care class)
   (3) 유치부 (Pre-school/kindergarten class)
   (4) 유년부 (Infant class)
   (5) 중등부 (Junior high school class)
   (6) 고등부 (High school class)
   (7) 대학부 (College/university class)

2. 교회 소그룹 (Church small groups)

   (1) 지역별 소그룹 (Regional small groups)

      1) 구역 그룹 (Home cell group)
      2) 지역 성경공부 (Area Bible study)

   (2) 성경공부 그룹 (Bible study groups)

      1) 장년 성경공부 (Adult Bible study)
      2) 남자 성경공부 (Men's Bible study)
      3) 여자 성경공부 (Women's Bible study)
      4) 청장년 성경공부 (Young-adult Bible study)
      5) 대학부 성경공부 (College Bbile study)
      6) 고등부성경공부 (High school Bible study)
      7) 중등부 성경공부 (Jr.high school Bible school)
      8) 초등부 성경공부 (Elementary Bible study)
      9) 워드바이블 스타디 (Word Bible study)
     10) 성장바이블 스타디 (Growing inX Bible study)
     11) 웤스르 더 바이블 (Walk through the Bible)
     12) 주중성경공부 (Midweek Bible study group)
     13) 정오 성경공부 (Noon Bible study group)
     14) 저녘 성경공부 (Evening Bible study group)
     15) 밤성경공부 (Night Bible study group)
    
  (3) 지도자반 (Church institution/small group leaders)

      1) 교회직원 교육훈련반 (Church staff training)
      2) 교회기관 지도자반 (Church leaders)
      3) 평신도 지도자반 (Lay-leaders)
      4) 소그룹 지도자반 (Small group leaders)
      5) 지도자훈련반 (Advanced leadership straining)
      6) 제자훈련반 (Discipleship training)
      7) 신앙성숙을 위한 반 (Moving toward maturity)
      8) 제자훈련지원반 (Discipleship support group)     

   (4) 친교 그룹 (Church fellowship groups)

      1) 남자친교 그룹 (Men'd fellowship group)
      2) 여자친교 그룹 (Women's fellowship group)
      3) 기혼청년 그룹 (Young fellowship marrieds)
      4) 미혼청년 그룹 (Young fellowship un-marrieds)    
      5) 친  교 소그룹 (Fellowship small group)
      6) 남자대화 그룹 (Straight talk group for men)
      7) 신  혼 소그룹 (Newly married small group)    

  (5) 연녕별 소그룹 (Groups in portion to age)

      1) 노인 그굽 (Senior group)
      2) 장년 그룹 (Adult group)
      3) 청장년 그룹 (Young adult group)
      4) 청년 그룹 (Young men group)
      5) 청소년 그룹 (Youth group)
      6) 사춘기 그룹 (Adolescence group)
      7) 소년 그룹 (Boys & girls scout)
    
  (6) 기혼자 소그룹 (Small groups for marrieds)

      1) 커플(부부)그룹 (Couple group)
      2) 씽글남자 그룹 (Single men's group)
      3) 씽글여자 그룹 (Single women's group)
      4) 별거남자 그룹 (Hope for separated men)
      5) 별거여자 그룹 (Hope for separated women)
      6) 이혼자의 그룹 (Divorce recovery group)

  (7) 가정문제 그룹 (Groups for family problems)

     1) 씽글부모 친교반 (Single parents fellowship)
     2) 미아부모반(Support-parents lost children)
     3) 여성생활개선그룹(Life perspectives for women)
     4) 미혼모 그룹 (Parents of unmarried group)
     5) 임산부 그룹 (Pregnance group)

  (8) 기도를 위한 그룹 (Prayer groups)

     1) 남자중보기도 그룹 (Men's intercessory prayer)
     2) 여자중보기도 (Women's intercessory prayer)
     3) 금식기도 그룹 (Fasting prayer group)
    
  (9) 경조/상조(Groups for congretulations/concolences)

     1) 상조지원 그룹 (Grief support grioup)
     2) 결혼지원 그룹 (Marriage support group)
     3) 회갑지원 그룹 (Birth-day support group)
    
 (10) 특수그룹 (Special groups)

     1) 금연 교정반 (Non-smoking support class)
     2) 중독증 교정반 (Toxicosis treatment class) 
     3) 암치료지원 그룹 (Cancer support group)
     4) 사전준비(BIBLE/basic introduction before earth)
     5) 마약중독자 (New spirit/drug/alcohol fellowship)
     6) 교도소 친교그룹 (Prison fellowship)
     7) 구직 알선그룹 (Jobseeker support group)
     8) 디프레숀 개선그룹 (Depression support group)
     9) 성교육반 (Renewal from sexual addiction class)

 (11) 전도 그룹 (Groups for evangelism)

     1) 신자전도반 (Discovery church membership
     1) 심방전도반 (Home visitation group)

 (12) 각종 미팅 (Various meetings)

     1) 정장년 미팅 (Young adults meeting)
     2) 청소년 미팅 (Youth meeting)

 (13) 문예.쳬육 그룹 (Cultural and sports  groups)
     1) 드라마 팀 (Drama team)
     2) 음악리더 팀 (Music leader needed)
     3) 기타레슨 반 (Guitar lesson available)
     4) 스포츠 그룹 (Sports group)

결론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어떤 종류이건 간에 소그룹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과거와 같은 구태의연(舊態依然)한 목회방법으로는 교회를 성장시키기가 어렵다고 본다. 이제는 소그룹 운동을 통하여 평신도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켜서, 교회를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시키지 않으면 세속화 물결에 교인을 떠내려 보내든가 다른 교회에 빼앗기든가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아무렇게나 시도하다가는 실패로 끝나고 좌절하여 포기하기 쉽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교회에 맞도록 효과적으로 시행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모 교회에서, 모 목회자가 성공했다고 해서 그대로 시도하다가 실패한 예도 부지기수인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이 나에게, 내 교회에 적용하기에 적합한지 먼저 검토하고 나서 선택해야 한다. 자기의 적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도하면 성공할 확률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이 자기에게 꼭 맞지 않을 경우에도 교회성장을 위하여 교회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경우에는 과감하게 시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첫째로, 그 프로그램을 자기의 것이 되도록(identified) 목회자 자신이 먼저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자신이 없을 때에는 그 프로그램의 전문가를 초청해야 하는데, 이것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목회자가 그 프로그램에 미칠 정도로 빠져들어야 한다. 둘째로, 처음에 한 두번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된다. 칠전팔기라는 말이 있듯이 성공할 때까지 계속 도전해야 한다. 물론, 그 원인들을 잘 분석하고, 왜 안되는가를 찾아서 반복적으로 처방해서 실시해야 한다.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 소그룹 운동의 프로그램을 위하여 이미 출간된 필자의 저서「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의 저서인「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의 제5장은 이러한 판단하에, 교회성장을 위하여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소그룹 활동 중에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택하여 실제 워크샵(workshop)을 통한 실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프로그램이다. 본 프로그램은 기존의 제자훈련의 약점들을 보완하여 개발한 것으로서 지역 교회에서 효과적으로 시도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다이나믹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성령의 강력한 권능을 전제로 하여, 말씀과 은사를 겸비한 제자들, 즉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켜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임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design)되었다. 현대의 복음사역의 성공을 위하여 "제3의 파도"(third wave)를 탈 수 있는 목회자들만이 시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이 책은 목회자 스스로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유일한 안내서이다.
그러므로 그 책을 통하여 목회자 스스로가 자체훈련을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해당 세미나(seminar)를 통해서 훈련받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된다. 그 책을 통하여 자체훈련을 하려면, 먼저 제4장 "한국교회 성장론"(Korean Church Growth)을 주의 깊게 읽어서 이 프로그램이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의 필연성에 동감한 후에, 제1장의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을 읽어서 교회성장 원리와 전략에 관한 지식을 얻고, 제2장 "소그룹 운동론"(Small Group Movement)을 통해 소그룹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제3장 "제자 훈련론"(Discipleship Training)을 읽어서 제자훈련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습득한 다음에, 교회성장을 위한 소그룹운동 중에 제자훈련을 차질 없어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 후에, 이 책의 제5장 "다이나믹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 워크샵(program workshop)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워크샵을 통하여 목회자 자신이 확신을 얻고 훈련을 한 후에,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다이나믹 제자훈련"의 준비작업은 상당기간을 통하여 대단히 치밀하게 해야 하며, 준비작업(preparation for the program)과 동시에 특별 작정기도 후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시행하도록 한다.

4. 현대교회 성장모델

세계의 모든 것들이 대형화되면서 기독교회도 대형화 추세로 성장해왔다. 이 교회의 대형화가 유난히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면적이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기업체로도 세계의 대기업들과 어깨를 겨룰만큼 성장했고, 특히 교회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이 한국에 있을 정도로 성장해 왔다. 세계의 50대교회들중에 20대교회가 한국에 있으며, 가장 큰 교회들이 1위에서부터 10위권안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미국에는 20,000명이 넘는 교회가 거의 없다. 물론, 한국교회의 총동원 주일과 같은 특별 전략행사로 모일때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에서는 31,000명까지 모이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의 정식멤버로서 주일낮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의 평균 수가 20,000명이 되는 교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한국에는 20,000명이 넘는 교회가 여러교회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라 규모도 최대국이고 선교의 종주국이며, 특별히 교회성장운동의 본거지인 미국교회에 비하여 그들의 선교를 받고, 그들의 교회성장운동의 영향을 받은 한국이 대형교회들이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기적의 사건이다. 물론, 현재는 세계의 각국, 특히 제3세계의 나라에서 교회성장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서구의 선진국들보다 교세가 강한 양상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통계상으로 서구의 선진 기독교 국가들의 교세가 80-90% 이상이 된다고는 하나, 그들은 본래 기독교 국가들로 출생하면서 자동적으로 교인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러나 교인이 라고 해도 거의 명목상의 교인들(nominal Christians)이며, 실제로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은 고작 4-17%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현실이다. 그래도 서구중에서는 아직도 미국교회가 성장을 해온 상태이다.

(1) 교회성장 모델의 다양성

교회성장의 패턴은 일률적이 아니다. 각기 나라와 문화적 전통과 상황에 따라, 그리고 같은 나라에서도 신앙의 스타일과 여건에 따라서, 또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전략에 따라서 다양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교회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특성에 따라 교회성장론을 고집해 왔으나, 현재에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거의 희석되고 각자의 특유한 목회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초월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교파와 교리도 거의 초월한 상태에서 성공하는 교회성장을 따라 논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알고보면, 이러한 추세는 비록 종교의 물결의 흐름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이데올로기의 벽이 무너지고, 세계화의 물결을 따라 흐르며, 경제적으로도 이제는 한 나라의 경제의 벽을 뛰어 넘어서 국제적인 무역열차에 편승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국제화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과 같은 맥략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퍼쳐치, 메가쳐치, 메타쳐치 등의 대형교회가 성장하는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대적 상황적 요인도 크지만, 주관적인 영향으로 볼 때에, 교회의 특수성과 특별한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1) 성장하는 교회의 특수성

미국교회나 한국교회를 막론하고, 교회의 신앙의 성격이나 사회적 수준에 따라 교회의 성격이나 사회적 수준에 차이를 보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목회자의 지적 수준이나 신앙의 성격과 목회의 벙법 등에 따라 교회성장의 패턴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는 몇몇 교회의 성장의 배경과 성격 등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의 성격은 그들이 요구하는 신앙성격에 따른 목회자의 부응에서 규정지어진다. 우선 신앙의 성격을 따라 분류해 보면, 지적인 신앙의 성격을 가진 교회들이 있다. 이는 교인들의 지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목회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은 인간의 지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첫째로, 교회가 인간의 지적 만족(intellectual satisfaction)을 충족시켜주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교회와, 둘째로, 교회가 인간의 정서적 만족(emotional comfort)을 충족시켜주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교회들, 그리고 셋째로, 인간의 영적 만족(spiritual satisfaction)을 충족시켜주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이러한 성격들은 주로 목회자의 지성과 정서와 영성의 강조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적인 요소가 강한 목회자가 강력한 지적 리더쉽을 발휘할 때에, 그 교회는 다분히 지적인 성격을 띄게 되고, 정서적인 요소가 강한 목회자가 리더쉽을 발휘할 때에, 그 교회는 정서적인 성격을 나타내게 되며, 영적인 요소가 강한 목회자가 리더쉽을 강하게 발휘할 때에, 그 교회는 디분히 영성을 나타내는 교회가 된다.

2) 성장하는 교회의 교회성장 전략

성장하는 교회들을 살펴보면, 교회성격에 따라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그 방향에 따른 구체적인 전략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교육목회(teaching ministry)에 은사가 있는 목회자가 교회를 이끌 때에 그 교회는 교육시스템(teaching system)에 의하여 교회가 성장해 나가고, 영적인 은사에 강한 사람은 주로 카리스마적인 방법에 의해서 교회가 성장해나간다. 주로 교육적인 목회에 은사가 있는 목회자가 인도하는 교회에서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하여 교회를 끌어 나가되 현대에는 주로 소그룹 운동을 이용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은 예외없이 이와 같은 소그룹 시스템이 잘 개발되어서 정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교회도 이 소그룹 시스템을 잘 개발해서 정착시킴으로써 지속적인 교회성장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은사에 강한 목회자가 이끄는 교회는 주로 찬양과 치유목회(praise and healing ministry)를 통하여 교회가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특히 미국에서는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이 한국에까지 잘 알려져 있고, 한국에서는 주로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시도해왔다. 그 외에 미국에서 특히 복합미니스트리(complex ministry) 방식을 구사하고 있는 로스엔젤레스 남부지역에 위치한 아프리카 계통(Afro-American)의 크렌샤워 크리스챤 센터(Crenshawer Chrisrian Center)가 크게 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성장은 목회자의 신앙 스타일과 목회전략에 따라서 다양한 모양과 다양한 성격을 나타내며 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동일하게 똑 같은 교회성장의 패턴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목회자가 교육목회(제자훈련을 포함한)로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그대로 모방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목회자가 은사를 통한 미니스트리로 성공했다고 해서 그대로 모방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목회자들이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첫째로, 자기 자신의 특별한 은사를 발견하는 일이며, 둘째로, 성공한 교회에서 교회성장 원리를 발견하는 일이고, 셋째로, 합당한 원리들을 취하여 전략상 자기의 은사를 이용해서 최대한도로 교회성장의 파워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 하겠다.

(2) 미국교회 성장 모델

미국교회는 교회성장학문의 발달로 인해 교회성장의 연구대상으로 많이 이용되어 왔다. 교회성장사(교회선교사)의 측면에서 볼때에, "교회성장"이라는 용어는 1955년에 교회성장 운동(The Church Growth Movement) 기관을 설립하였던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의 교회성장 이론(McGavranism)에서 유래되었다. 그때부터 교회성장의 원리가 전세계에 있는 교회들에게 적극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교회성장 학파는 훌러신학교를 본거지로 하고 있는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 랠프 윈터 (Ralph Winter), 아더 그라슬러(Arthur Glassler)와, 촬스 크래프트(Charles Kraft), 알렌 티페트(Allen Tippett), 폴 히어버트(Paul G. Hiebert), 에디 깁스(Eddie Gibbs),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 그리고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윈안(Win Arn), 죤 윔버(John Wimber)로 형성되어온 서부의 파사데나 교회성장학파(Pasadena gang)와 켄트 헌터(Kent R. Hunter), 엘머 타운즈(Elmer Towns)와, 촬스 채니(Charles Chaney), 그리고 론 류이스(Ron Lewis)등과 같은 아웃사이드 성장학파들(outside school)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교회성장운동은 그 운동의 배경부터 다른 동부와 서부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동부지역에서는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위치하고 있고,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Thomas Road Baptist Church)를 이끌고 있는 제리 폴웰(Jerry Falwell)과 미국의 교회성장학자로 유명한 린치버그 대학(Linchburg Baptist College)의 엘머 타운즈(Elmer L. Towns)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미국의 교회성장 운동으로, 대교회성장(large church growth)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역교회 목회학적 교회성장운동(the pastoral theological church growth movement by the local churches)이다. 그런데 특히 맥가브란의 맥을 이어서 현재 피터 와그너 (Peter C. Wagner)가 주도하고 있는 파사데나 학파(Pasadena gang)의 교회성장 운동은 선교학적인 초교회 성장운동으로 현대 교회성장학을 주도하고 있다. 현재 미국교회들 중에서 교회성장의 모델이 될만한 교회들은 Grace Community Church, Calvary Chaple, Calvary Church, Cornerstone Church, Harvest Christian Fellowship, Thomas Road Baptist Church, 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Southwest Christian Church, Crenshawer Christian Center, First Baptist Church, 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 Vineyard Christian Fellowship, The Church on the Way, THe First Evangelical Free Church, Crystal Cathedral, New Birth M.Baptist Church, Willow  C reek Community Church, Crossroad Cathedral 등등 대단히 많지만 본서에서는 지면관계상 급성장하고 있는 몇몇 교회를 선정하여 교회성장 모델교회로 다루려고 한다.
그 중에서 특수한 목회철학과 목회전략을 구사하여 급성장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남부 레이크 포레스트(Lake Forest)지역에 위치한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와 시카고 근교인 일리노이주 바링톤(Barrington, IL.)에 위치한 윌로우 그릭 공동체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를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본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크렌샤워 크리스챤 교회(Crenshawer Christian Center), 코스타 메사의 갈보리 채플(Calvary Chaple of Costa Mesa), 아나하임의 빈야드 크리스챤 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 노상교회(The Church on the Way) 등을 다루려고 했으나 지면과 한 달안에 본서의 집필을 마쳐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캘리포니아 엘토로의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와 시카고 근교 바링톤의 윌로우그릭 공동체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등 두 교회만 다루기로 하였다.

1)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
   (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엘토로에서 포레스트로 이사하여 새들백 밸리에 새 부지를 구입하고 새로 건축한「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 (The 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는 현재 미국교회들 중에서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교회중의 하나이다. 담임목사는 교회성장 세미나 주강사로 유명한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로, 그의 교회인「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의 교회성장 성공담을 담은 카세트 테이프(Cassette tapes)가 적어도 49개의 나라에 있는 목사들과 교회지도자들에 의해 수천개씩 주문되고 있고, 60여 교단 이상의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교회의 성장과 비성장(how to  grow  and  not to grow church)에 관하여 강의를 해오고 있다.

  릭 워렌 목사와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가 지적했듯이, 루터(Martin Luther)의 신학이나 칼빈(John Calvin)의 신학을 이해하려면, 그들과 그들의 신학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 것과 같이,「새들백교회」를 알려면,「새들백교회」의 역사적인 배경을 서베이(survey)하는 것이 접근방법의 체1차적인 작업이다. 사실, 방법론이란 그의 말과 같이, 그것의 배후에 어떤 스토리(story)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장기목회 전략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가 1970년 아직 고등학교 시절 19세의 약관에 50여 교회에서 부흥성회를 인도했던 경험이 있다. 드디어 1973년에 당시 저명한 목회자이고(50년 목회) 설교자이며 저술가인(53권 저술) 달라스「제일침례교회」(Dalas First Baptist Church) 크리스웰(W. A. Criswell) 목사가 침례교총회 집회를 인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350마일(560리)이 되는 샌프란시스코의「잭타르 호텔」(Jack Tar Hotel)로 달려가서 그에게 안수기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1974년 한 때, 학생선교사로 일본에서 사역하면서「서남침례교신학교」(The Southwest Theological Seminary)의 동료 커풀과 함께 일본 나가사끼에 살았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기독학생회(IVF)가 발간한 기독학생 잡지에서 교회성장의 원조인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의 교회성장에 관한 서적(The Bridges of God)을 비롯하여 교회성장에 관한 서적 72권을 연속적으로 독파하고, 설문서를 만들어 당시 "100대 교회"에 보내서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맥가브란의 저서를 읽는중에 남은 여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작심하였다. 1979년「서남 침례교신학대학」졸업반 때에, 앞서 언급한 미국의 "100대 교회"를 독자적으로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디로 보내시든지 순종하고 가서 남은 여생을 헌신하겠다고 기도한후, 1980년 1월달에 아내와 생후 넉달 밖에 안된 딸 아미(Amy)와 함께 짐을 싸가지고, 이삿짐차(U-Haul trailer)에 싣고 돈도 없고, 교회 건물도, 교인들도, 집도 없는 캘리포니아로 무조건 달려갔다. 오후 5시에 새들백 밸리에 도착한 그는 부동산 중개업자인 돈 데일(Don Dale)의 사무실에 가서 돈이 없는데 거처할 집이 없느냐고 하자, 그가 픽 웃으니까 워렌도 함께 웃고 말았다고 한다. 기가막힌 정경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종을 보내실 때에는 미리 영접할 사람을 준비해 놓으시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많이 보아왔다(세 정탐군, 엘리야, 엘리사, 사도들등). 하나님께서는 일전 한푼도 없는 자기의 종 워렌을 보내시면서 우선적으로 가장 필요한 부동산 중개업자를 준비해놓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결국 한 달동안 렌트(월세)를 내지 않고 세를 들기로 했는데, 그 중개업자인 돈 데일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으로 설립된「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의 최초의 멤버가 된 것이다.
그 후에, 워렌은 지역탐사에 신경을 썼다. 남가주에는 본래 미국대형교회의 기라성 같은 목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목회의 방향을 아예 불신자들에게로 돌리고, 기성 신자들이 오는 것을 공공연하게 거부하였다. 1980년 4월 6일 첫 부활주일을 E 데이(E Day)로 정하고 15,000장의 전단을 각 가정으로 발송한후, 150여명 회집을 예상했는데, 205명이 몰려와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짧은 교회 역사속에서 새들백교회는 급성장하는 반면에, 그에 대한 성장고통(growing pains)도 심했다. 첫 15년동안에 4개의 고등학교들, 수많은 초등학교들, 은행건물들, 리크레숀 센터들, 극장들, 공공건물들, 식당들, 큰 집들, 전문 사무실 건물들, 스타디움 등 79개의 다른 건물들로 옮겨다녀야 하는 고통을 겪은 후에, 결국 2,300석의 최신형 대형 천막교회를 건립했다가, 1996년에 현재의 신축건물로 입주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필자는 이 교회를 리서취하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는 한편 여러차례 방문하고, 목사와 인터뷰를 통하여 목회철학과 전략에 대해서 듣고 자료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새들백교회의 목회철학과 성장전략

새들백교회의 목회철학과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과 방법론은 다른 무엇보다도 교회개척 목사인 릭 워렌(Rick Warren)이 손수 집필한, 그의 목회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 저서,「목적추진 교회」(The Purpose Driven Church)를 상세히 소개 하는 것이 가장 선명한 설명에 될 수 있을 것이다. 본서에서는 우선 담임목사인 워렌의 책,「목적추진 교회」의 내용을 요약소개(要約紹介)하고 타자의 입장(필자와 다른 신학자들의 보는 각도)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a) 저서「목적추진 교회」의 내용

우선, 릭 워렌(Rick Warren)은 본서「목적추진 교회」의 제1부에서 개략적으로「새들백교회」의 역사와 성장하는 교회들이 만들어내는 여덟가지 신화들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덟가지 신화란, (1) 대형교회가 관심이 있는 것은 단지 교회 출석자들이라는 것과. (2) 모든 대형교회들은 소형교회들을 희생시켜서 성장한다는 것과, (3) 교회성장에 있어서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 사이에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4) 성장을 위해서 교회의 메시지와 선교를 타협해야 한다는 것과, (5) 충분한 헌신이 있으면 성장한다는 것과, (6)교회성장에 대한 유일한 비법이 있다는 것과, (7)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대하시는 모든 것은 충실이 하는 것과, (8) 대형교회로부터 배울 수 없다는 것 등이다.
제2부에서는「목적추진 교회」가 되는 길로 7가지 유형을 들고 있다. 첫째로, 교회가 무슨 힘에 의해서 추진되어 나아가는가? 그 힘의 종류에 따라서 교회의 성격이 달라지게 된다. (1) 전통에 의해서 추진되어 나아가는 교회(tradition-driven church), (2) 지도자에 의해서 추진되는 교회(personality-driven church), (3) 재정에 의해서 추진되는 교회(finance-driven church), (4) 프로그램에 의해서 추진되는 교회(program-driven church), (5) 빌딩(건물)중심으로 추진되는 교회(building-driven church), (6) 행사중심으로 추진되는 교회(event-driven church), 마지막, (7) 구도자 중심으로 추진되는 교회(seeker-driven church) 등이 있다. 그러나 워렌은 이들보다도 성서적으로 볼 때에, "목적추진 교회"가 더욱 중요한 파라다임(paradigm)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목적의 정의와 다섯가지 목적의 종류, 그리고 새들백교회의 목적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또 목적의 효과적인 전달과 목적을 하나로 어떻게 체계화해서 그 목적을 위한 시스템을 조직할 것인가?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새들백교회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로 구분하여 "지역사회 불신 사람들로부터 핵심 멤버로" 성장하는 (1) 신앙의 5중원적 타겥 구조(the concentric circles of Commitment)로 분류를 하고, 다음으로 (2) 야구장의 다이야몬드식의 생활 발전과정(a baseball diamond: the life Development Process)을 교회의 사역철학과 패턴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워렌이 새들백교회을 위한 목회사역의 발랜스(balance)를 유지하여 버티고 있는 두 개의 개념(simple two concepts to isure balance)이다. "5중원중의 밖으로 부더 그의 사역은 영적 성숙의 단계로 집중되고 있는데, 그 사역대상들은   교회 주위의 지역사회 사람들(the community: 31,000명),   교회참석하는 무리(the crowd: 10,000명),   교회멤버(the congregation: 5,000명),   교회 사역멤버(the committed: 3,500명), 그리고   핵심멤버(core: 1,500명)이나 된다. 4개의 베이스(base)를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 식의 교회생활 발전과정의 다이아그램은   첫째 단계가, 홈베이스에서 1루(壘)까지로 그리스도를 알아 교회멤버가 되게하는 단계로, 101반(class 101)에서 교육하며,   둘째 단계가, 1루(壘)에서 2루(壘)까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성숙한 멤버가 되게 하는 단계로, 201반(class 201)에서 훈련하며,   셋째 단계가, 2루(壘)에서 3루(壘)까지인데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 봉사를 교육하여 교회사역에 참여하게 하는 단계로, 301반(class 301)에서 훈련하고,   넷째 단계는, 3루(壘)에서 홈베이스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은혜를 나누는 단계로, 401반(class 401)에서 훈련한다.
재3부에서는 지역사회를 어떻게 공략하는가?에 관한 전략으로, 타겥 대상이 누구이며(pp. 153-172), 가장 접근하기 쉬운 대상을 파악하고(pp. 173-184), 이에 대한 효과적인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pp.185-205)에 관해서 관설하고 있다.
제4부에서는 목회사역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도하며, 그들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키며, 단계적인 신앙성숙을 위하여 어떻게 신앙을 지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 어떻게 군중들을 끌어들였는가를 배워서 목회사역에 적용하고(pp. 207-238), 복음증거의 전략으로서의 예배(pp. 239-277)와 그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초신자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예배의 구상(designing a seeker-sensitive service, pp. 239-249),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정서적인 면에서 효과적인 음악의 도입(pp. 279-292)과 이지적인 면에서 초신자들(the unchurched)을 위한 효과적이며 능력있는 설교(pp. 293-306)를 제안하고 있다.
제5부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성숙하게 세워나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앞서 약간 언급한 "다이아몬드식의 교인생활의 발전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 내용이다. 첫째로 교회에 참석자들을 교회의 멤버들로 만드는 문제들(pp. 309-329), 교회의 멤버가 된 사람들을 성숙한 교인들로 훈련, 발전시키는 문제들(pp. 331-364), 그리고 신앙이 성숙하게 훈련받은 사람들을 목회사역에 참여시키는 문제들(pp. 365-392)을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목회자들이 목적추진교회로 만들려면 목회자 자신이 먼저 목적추진에 오리엔트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부디 목적추진교회를 이루도록 권고하면서 본서「목적추진 교회」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b) 새들백교회의 모델 (The Purpose Driven Church)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는 한마디로 담임목사인 릭 워렌(Rick Warren)이 말한대로 "목적추진교회"(the purpose driven church)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발생되는 모든 사물이나 사건 배후에는 그것을 인도하는 힘(guiding force)과 장악, 조정하는 힘(controlling assumption), 방향을 정하는 확신들이 있는 것과 같이, 교회도 이러한 어떤 것들에 의해서 추진되어 나아가고 있다고 전제하고, (1) 전통에 의해서 추진되는 교회, (2) 지도자에 의해 추진되는 교회, (3) 재정에 의해 추진되는 교회, (4) 프로그램에 의해 추진되는 교회, (5) 건물에 의해서 추진되는 교회, (6) 행사에 의해서 추진되는 교회, (7) 구도자중심으로 추진되는교회 등으로 분류하고, 자기는 이것들 보다도 성서적인 파라다임인 "목적 추진교회"를 조직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새들백교회의 목회사역 철학

워렌(Rick Warren)은 "목적추진 교회"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첫째가, 교회가 다섯가지 신약의 목적을 통하여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다섯가지 목적 모두를,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 나아가시려고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새로운 "전망"(perspective)이며, 둘째로, 교회의 목적들의 성취를 위한 "과정"(process)이라고 한다. 그는 목적보다 앞세울 것은 하나도 없다고 전제하고, 교회가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임무중에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를 깨닫기 전에는 목회사역의 근거와 동기와 방향을 잡을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새 교회를 개척하려면, 분명한 목적을 먼저 정해야 하는데, 만일, 교회가 계속해서 정체상태이거나 쇠퇴하여 실망이 되는 경우에는 목적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목적의식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正體性)이 있어야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는 목회자들 중에는 여러 가지 불충분한 이유로 교회를 세우는 경우가 있는데(경쟁으로, 교단의 자존심으로, 어떤 지도자의 권고로, 아니면 어떤 다른 무가치한 동기로), 교회개척은 배후에 성서적인 추진력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건강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며, 건강한 교회들은 프로그램에나, 지도자나,  고안된 트릭(Gimmick)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새들백교회는 분명한 두 기둥의 목회사역 개념(the concepts of its ministry by the two pillars)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신앙헌신의 5중원형 모델"(the five Circles of Commitment)과 "다이아몬드형의 신앙생활 발전과정"(the Life Development Process of Diamend)이다. 전자는 신앙의 정도에 따라 교회 구성원의 분류를 나타낸 것인 반면에, 후자는 교인들의 신앙의 발전을 위하여 조직된 교인들의 신앙교육과 훈련 시스템이다. 특히, 이 사역개념들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곧 홈베이스(home-base)의 사역대상이 되고, "5중원적 헌신의" 바깥 부분의 원(circle)에 해당되는 지역사회(community)이기 때문에 그는 기성 신자들의 영입을 거의 공개적으로 거부한다. 이것이 그의 목회 사역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새들백교회의 목회사역 목적

워렌 목사는 "목적추진 교회"는 성서적으로 다섯가지 목적, 즉 예배, 봉사, 전도, 교제, 제자직등이 있는 것과 같이, 새들백교회에는 (1) 하나님의 영광을(magnify) 돌리는, 예배(worship), (2) 불신자들에게 선교(mission)하는 전도(evangelism), (3) 교인들 상호간의 협력체제(membership)인 교제(fellowship), (4) 교인들의 신앙이 성숙(maturity)하도록 훈련시키는 제자훈련(discipleship), 그리고 (5) 봉사(service)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사역(ministry)이 빅 픽쳐(big picture)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새들백교회의 균형사역 방법론

전술한 바와 같이 새들백교회는 잘 짜여진 목회 방법론들을 통하여 균형있는 목회사역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워렌의 말대로, 평신도운동, 제자훈련, 예배갱신, 교회성장운동, 소그룹운동 등의 전문화된 사역을 사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킬 수도 있지만 총체적인 목회사역 방법은 아니다. 환자가 수술해야 할 병이면, 외과 전문의를 찾아가서 수술을 하는 것이 정상적이지만, 사실, 전문화도 총체적인 달성(integrate completion)을 위하여는 외과수술 외에 다른 작업을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외과의사는 방사선과의 진단, 내과적 치료는 자기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방사선과나 내과의사들에게 맡기게 된다. 죄악으로 타락되어 망가진 인간환자를 완전하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균형있는 목회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들백교회는 "목적추진교회"로서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하여 두개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목회사역 개념인 "헌신의 5중 원형"(the Five Circle of Commitment)의 조직을 다이야몬드형의 "신앙생활의 발전과정"(Life the Development Process)의 기능을 통하여 균형있게 운용하여 나간다는 것이다.

  새들백교회의 사역 방법론 초점

목적추진 교회로서 새들백교회의 사역방법에 있어서 전체적인 초점은 "구도자 중심"(seeker-sensitive)으로 맞추어진다. 물론, 시카고 근교의 빌 하이벨즈(Bill Hybels) 목사가 리드하는 윌로우크릭 공동체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와 불신자 전도의 초점은 같으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 윌로우교회의 방법(seeker driven)과 다르다. 원칙적으로 워렌과 하이벨스는 모두 지역사회 불신자들의 필요(needs), 고통(hurts), 그리고 관심사(interests)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워렌은 다섯 가지의 근본적인 질문을 통하여 그의 목회방향을 정한다. (1) 당신은 그 지역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십니까? (2) 당신은 어느교회에 적극적으로 출석하고 있습니까? (3) 당신은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4) 만일, 당신이 출석할 교회를 찾는다면, 어떤 교회를 찾겠습니까? (5) 제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당신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도울려는 목사에게 무슨 충고를 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설문서를 만들어 조사하게 된 이유는, 과연 그 지역 불신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서 효과적인 전도전략을 세우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조사를 통하여 워렌은 지역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원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워렌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교회에 대하여 회의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회의적인 문제들, 그들이 필요하고 관심있는 문제들을 시원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방향으로 모든 목회사역 방법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첫째로, 예배에 있어서, 초신자(the unchurched)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 우선 방문자들이 불평이 없이 편안하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주차문제에서 부터 좌석을 비롯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를 다한다. 물론 예배당 분위기부터 밝게 조명, 음향, 좌석, 공간, 온도, 화초, 유모실, 화장실 등등 예배드리는데 전혀 지장이 없도록하고, 초신자들이 기대감과 축제분위기와 긍정적이고 협동심을 일으킬 수 있는 가족분위기, 주중에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긴장을 풀수 있는, 그리고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예배분위기를 만들어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광고와 안내를 분명하며 간단하게 해야 하고, 음악은 현대음악의 악기와 기교를 총동원하여 웅장하며 평화로운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코러스를 창출한다. 그래서 초신자들에게 감동적인 예배로 인도한다.
설교에 있어서, 목사는 청중에게 적합한 스타일로, 특히 불신자들에게 쉽게 접근되는 성경과 제목을 사용하며, 주로 제목설교로 청중들과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한 페이퍼(paper) 한 장을 주보에 끼워준다. 설교는 시리즈로 하며, 결단을 위한 설교를 하되,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정확히 설명하고, 결단의 시간을 주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초대와 초신자들을 위한 모델기도(model prayer)를 드리고 결단은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결단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을 가르쳐주며, 응답을 기대한다. 물론 설교에 가장 우선적인 비중을 둔다.

2) 윌로우 크 릭 공동체교회
   (The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빌 하이벨즈(Bill Hybels) 목사가 시무하는 미국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윌로우크릭 공동체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앞의 새들백교회와 같이 현재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교회이다. 이 두 교회의 공통점은 지역사회(community)의 주민들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들(needs)이 무엇인지?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들(hurts)은 무엇인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들(interests)은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지역교회 목회사역을 위한 목회철학(philosiphy of ministry)과 목회전략(strategy for ministry)을 세운다는 것이다. 하이벨즈는 1975년에 "구도자들"(seekers)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한 그룹의 친구들과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그들의 필요들을 이야기하고,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며, 그들에게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는 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15,000여 명이 모이는 윌로우교회를 보고, 항간에서는 현대 음악과 드라마팀들을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전도 이전의 레이져 스타일의 행사들(laser-age style of the preevangelistic events)로 인하여 선구자적인 평가를 하고 있지만, 사실, 그 행사문제로 어렴움이 많았고 비용과 시간문제로 씨름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본서인「교회의 재 발견」(Rediscovering Church)의 제1부는 그의 아내인 린(Mrs. Lynn)이 윌로우교회의 걸어온 발자취에 관하여 상세한 역사로 기록하였고, 제2부는 하이벨즈(Hybels)가 윌로우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이용했던 목회철학과 전략 등을 기록한 책인데, 윌로우교회를 알기 위하여 필자가 인용하기로 하였고, 다른 자료들과 필자가 1994년에 직접 방문해서 리서취한 내용들을 통하여 현대교회의 성장의 모델인 윌로우교회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이 책의 성격이 제1부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집필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교회의 지체가 될가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제2부는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 가치, 그리고 전략들이 언급되어 있다. 새들백교회와 같이 위로우교회도 뚜렸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다.

  윌로우교회의 목회철학 (Philosophy of Ministry)

윌로우교회도 역시 새들백교회와 같이 분명한 목회철학과 목회전략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윌로우교회 하이벨즈 목사의 목회 대상은 기존 신자들이 아니라, 불신자, 그것도 현대 문화속에 살고 있는 불신자들이라는 것이 워렌과의 공통점이다. 그는 워렌과 같이 교회성장이란 불신자의 전도에 있다고 믿고, 우선 불신자를 교회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세웠다. 불신자들을 끌어들여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인들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는, (1) 생활의 변화, (2) 교제, (3) 잃은자의 구원, (4) 구제, (5) 사랑, (6) 소망 등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의 목회철학의 중심은 어떻게 대형교회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참교회가 되는 것"(to be the church)이다. 고도의 기술적인 프로그램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나 권능에 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서로에게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벨즈의 목회철학의 초점은 어떤 기관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들"(focus on the people)이다.

  윌로우교회의 목회사역의 특징 (Charateristics)

하이벨즈(Hybells)는 이상을 가진 대학생이었을 때에, 빌레지키안 박사(Dr. Bilezikian)에게 감명을 받아, 성서적으로 기능을 다하는 공동체들이 재세(在世)할 수 있고 재번영(再繁榮)할 것이라는 것을 영혼 깊숙한 곳에 확신하게 되었다. 그후에 그는 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진가를 발견하고, 교단적인 공통요소와 구별되는 목회사역들의 특징을 정리하게 되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1) 주님의 가르치심은 개인들이나 교회안에서 변화를 위한 제1의 촉매라는 것을 믿는다. (2) 잃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중요하고, 그러므로 교회에도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3) 교회는 문화적으로 관계해야 하는 한편, 교리적으로는 순수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4)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신뢰를 나타내야 하며, 지속적인 성장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5) 교회는 그들의 영적 은사들의 직분을 감당하는 종들의 연합된 공동체로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6) 사랑의 관계는 교회생활의 모든 방면에 침투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7) 생활의 변화는 소그룹 안에서 제일 효과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믿는다. (8) 특출한 사역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것을 믿는다. (9) 교회는 리더쉽의 은사들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인도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10) 그리스도께 전적인 헌신과 주님의 대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는 이와 같은 목회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윌로우교회의 리더쉽 (Leadership)

하이벨즈는 "지구상에 있는 교회들이 그들의 비젼과 가치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놀랄 것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을 말씀하실 것인데, 그의 방법은 리더쉽의 영적인 은사들을 받은 남녀들을 풀어놓으시는 방법에 의존하신다. 리더들은 여덟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1) 비젼을 던져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2) 사람들을 융합시키는 능력이 있다. (3)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동기를 주는 능력이 있다. (4) 적극적인 변화를 위한 필요를 확보하여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5) 가장 중요한 가치관을 세운다. (6) 자료들을 효과적으로 할당할 수 있다. (7) 전달의 능력이 있다. (8) 리더쉽 문화을 창출하기를 좋아한다.  하이벨즈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리더쉽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리더쉽은 교회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윌로우교회의 선교와 전략 (Mission and Strategy)

윌로우교회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새들백교회와 마찬가지로 기성교인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하이벨즈는 교인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성장하게 하는 것만 원하지 않고, 화려한 예배와 훌륭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다른 교회 교인들을 유혹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윌로우교회는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열렬한 제자로 변화하도록 노력한다고 말한다. 윌로우교회는 축제전도(Celebration Evangelism)를 활용하는 매력적인 교회로 인식되어 있다. 전도를 위하여 축제분위기로 구도자들을 감동시기는 예배(seeker sensitive worship service)를 드린다. 하이벨즈는 구도자들을 불편케 하는 어떤 것들(설교외에 다른 것들)은 피한다. 그는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 관한 노래들을 부르는 것으로 참석하는데 거부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자들의 예배와 같은 예배형식은 극소화하고, 예배행사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신자들의 예배와 이원화되어 있다.
기독교 메시지와 함께 비디오 드라마, 심지어 기타와 부드러운 록음악을 사용하여 록 앤 롤(Rock  N  Roll) 밴드로 노래하며, 문화적인 방법으로 불신자들을 찾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와 교회, 교인들과의 문화적인 갭(cultural gap)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불신자들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한다.
사실, 이러한 선교(전도)전략은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거부반응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그의 저서인「교회의 재발견」의 끝 부분에서 여러가지 질문과 함께 이러한 문제에 답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전도대상이 다른 만큼 전도전략도 다를 수 밖애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며, 워렌이나 하이벨즈도 역시 복음적인 교리는 전혀 타협할 수 없으나, 현대 문화권에서의 전도전략(the strategy for Evangelism)은 다양하게 개발하여 적응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어떤 면에서 빌 하이벨즈는 "구도자-추진전략(seeker-driven strategy)에서 새들백의 릭 워렌의 구도자-감동전략(seeker-sensotove strategy)보다 더욱 급진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문화사황적인 이용을 더욱 과감하게 하기 때문이다.

(a) 구도자 전도중심 전략(Seeker-Driven Strategy)

윌로우교회는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문화적인 통로(cultural avenue)을 사용한다. 축제예배를 계획할 때에, 리더쉽 팀이 목표하고 있는 청중들이 대개 신자가 될 것인지 불신자가 될 것인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 예배의 참석자들의 부류에 따라서 예배준비를 달리한다. 대부분 전통적인 교회는 신자들을 위한 예배와 교육 프로그램이지만, 새들백이나 윌로우교회는 불신자예배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두 교회가 그 방법은 달리하지만, 새 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교회멤버가 되도록 하는데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새들백교회(Saddleback Church)의 새 신자의 전도을 위한 "구도자의 감동전략"(seeker-sensitive strategy), 윌로우크릭공동체 교회(Willow Creek Church)의 새 신자들의 전도를 위한 "구도자-추진전략"(seeker-driven strategy)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이벨즈는 생각하기를 불신자들은 처음에는 교회음악이나 설교가 이질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교회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를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에 이들을 위한 예배를 준비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발견될 때까지 잃은 그들을 찾으신다고 믿고, 여기에 교회의 존재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오늘날 세상에서 불신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신자들이 요구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축제예배를 준비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프로그램도 이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한 내용과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

(b) 예배의 이원화(Separated Worship Service System)

새들백교회는 불신자 전도에 초점을 맞추는 예배, 즉 "구도자 중심 예배"(seeker-sensitive wioship service)를 드리되, 신자와 불신자가 다같이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시간에 드리지만, 윌로우교회는 이와 달리 신자와 불신자의 예배가 이분화되어 있는 것이 차이가 있다. 새들백교회는 선교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모달리티(modality)형의 예배 시스템이라면, 윌로우교회는 소달리티(sodality)형의 예배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새들백교회의 워렌은 이 면에 있어서 윌로우교회의 하이벨즈와 생각이 다르다. 하이벨즈는 신자와 불신자의 감정이 전혀 통할 수 없는 문화적 간격(cultural gap)이 있다고 믿으나, 워렌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인간의 본래의 감정은 동일하다는데 착안을 두고 "구도자-추진 전략"(seeker-driven strategy)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하이벨즈는 불신자들은 교회의 전용적인 음악이나 메시지에 흥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뜻을 잘 알 수 없음으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윌로우교회에서는 주로 불신자들은 토요일에 예배와 그룹활동 시간을 따로 갖는다. 그리고 그들의 예배와 그룹활동들 자체도 "불신자들의 감정에 맞는 예배와 활동들"(seeker-sensitive worship services and activities)을 준비한다.
이러한 구도자를 위한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불신 친구들과 이웃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에게 전도하며,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전통적인 설교에 흥미를 잃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도록 한다. 그들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헌신할 때까지 신앙을 분석하고 생각해보는 단계들을 통하여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는 비위협적인 프로그램들을 사용한다. 심지어 윌로우교회에서는 어느 것을 노래하고, 표현하고, 말하거나 주든지 아무런 제제없이 영적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설교를 받아들이기 전에 기독교의 의미를 감상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다. 이러한 스타일은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교회들에게 비판을 받기까지 한다. 그들의 전략은 전통적인 교회들의 전략에서 상당히 현대화된 전략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성급하게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첫째로, 불신자의 예배와 신자의 예배가 분리되어 있어서, 불신자의 예배는 전도활동 중심으로, 신자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로 드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불신자의 예배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라기 보다는 전도행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 주님을 확실히 영접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둘째로, 윌로우교회의 이러한 전략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주를 영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방문해서 리서취한 결과로는 교회의 전략에 이어서 어느 교회들 보다도 현대화되어 있고, 특히 젊은층들을 맹렬히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새들백교회와 다른 점이 불신자들을 따로 회집해서 프로그램 자체에서부터 현대적인 방법으로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을 같은 예배당을 사용하고 있어서, 필자는 이러한 예배방법을 "이원화 예배"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예배의 내용과 스타일에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두 부류, 즉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스타일에 동시에 적합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배당의 구조 자체를 극장식으로 꾸며 놓았다. 좌석은 계단식이며 강단에는 미국 대부분의 교회에서와 같이 이동식 강대상(portable pulpit)과 특이한 것은 정면에 드라마 상영을 위한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는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예배당의 구조는 첫째로, 불신자들로 하여금 생소하지 않고, 비위협적이며 편안한 분위기(non-threating atmosphere)를 만들어 쉽게 적응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요, 둘째는, 예배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게 디자인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불신자들의 집회는 드라마를 상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배에 이원화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벨즈 목사는 교리와 신앙의 순수성을 상세하게 변증하고 있다.
c) 윌로우교회의 구도자 예배신조

윌로우교회의 예배와 전도활동, 그리고 예배신조를 보면, 새들백교회의 "구도자 감화전략"(seeker-sensitive strategy)보다 더욱 적극적인 전략으로 "구도자 공략전략"(seeker-driven strategy)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정통적인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모리스(Morris, Linus J.)는 이러한 신조를 가진 교회를 "영향력 큰 교회의 센시티브 철학"(the sensotove philosophy of high impact church)라고 하였다.

(1) 세계를 복음화하라는 성서적 명령으로 우리의 지역사회에서부터 전도를 시작하는 신앙이다.

(2)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누구도 결코 실증을 느낄 수 없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현대적이고 창조적인 것에 위탁한다.

(3) 구도자(seeker)들의 익명에 대하여 존중한다.

(4) 구도자들이 결단을 할 수 있는 시간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해한다; 그러므로 행사가 아니라 행사의 진행을 강조한다.

(5)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한다; 특히 하나님의 성격과 본성을 전달하는 것들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6) 사람들이 대의가 훌륭하고, 총체적이고, 정직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에, 그들의 시간과 은사와 보배들의 대의에 협력해주기를 열망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7) 기독교와 구도자의 일상생활의 현실적인 연결을 준비하는데 헌신하기로 한다.
d) 윌로우교회의 전략단계

하이벨즈가 여러해 동안 직감적으로 수행한 전략은 캘리포니아에서 어느날 내프킨(napkin)위에 썼을 때에 구상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윌로우교인들은 그것을 그들의 선교사명을 이루기 위한 그들의 청사진(blueprint)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7단계 전략"(seven-step strategy)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하나의 교회로서 그들의 "신조"(thumbprint)의 부분이라고 한다.

제1단계: 불신자들과의 진정한 교제관계를 수립한다.

제2단계: 구설 간증 시간을 갖는다.

제3단계: 불신자(seeker)를 특별히 그들을 위해서 준비된 예배에 인도하고, 활동중인 전도팀을 가까이 보도록 한다

제4단계: 신자들을 위한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석케 한다.

제5단계: 소그룹에 참석시킨다.

제6단계: 당신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며, 발전시킨다.

제7단계: 하나님이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직분을 다한다.

e) 변화를 위한 액숀 플랜 (Action Plan)

하이벨즈는 주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완수하는 것이 교회의 전략이라고 전제하고, 그의 교인들이 불신자들과 친교관계를 가지고 신앙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며, 그리고 그들을 주말예배에 초대하여 함께 "팀전도" (team evangelism)를 할 수 있도록 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여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자들이 된 후에, 그들이 예배를 알게 하고, 새공동체(New Community)에서 성찬에 참석하게 하고, 소그룹에서의 상호 깊은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생활의 변화를 경험하게 하며, 그들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여 사용하고, 그들의 재능과 자원들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주님게 영광을 돌리기를 원한다. 다음으로, 그들로 하여금 다른 불신자들과의 온전한 교제관계를 수립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이 모든 과정들을 다시 밟아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교회전략이 그 자체를 반복하는 것과 꼭 같이 일관성있는 진행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 윌로우교회는 하나님께서 교인들의 생활이 다섯가지 영적 상태(5Gs), 즉 (1)은혜Grace), (2) 성장(Growth), (3) 그룹(Group), (4) 은사(Gifts), (5) 훌륭한 직분(Good Stewardship)등을 나타내도록 교회를 사용하실 때만 성공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한가지 아쉬운 것은 다른 많은 성장모델 교회들을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 특히, 예배가 좀 특이한 스타일로 미국 서부에서 크게 성장한 교회가 있는데(Crenshawer Christian Center), 자세히 다루지 못하고 넘어가게 됨이다. 이 교회는 아프리카-아메리칸(Afro-American)들의 교회로서, 프라이스(Fred K. C. Price)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로, 주로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가인들로 구성되었다. 교회는 돔식(dome style)의 교회로 10,000석 이상이 되고, 부속 건물들의 규모도 대단하다. 교인은 16,000명이다. 특이한 것은 주일 낮예배 시간이 9:30부터 시작되어 12:00-12:30시까지 진행된다. 그래서 필자는 전화로 예배시간을 문의하는 중에 혼동을 가져온 때가 있었다. 예배시간이 아침 9:30에 시작하면서도 무려 3시간 이상이나 걸리는 이유는 참석해보면 곧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복합예배(complex-worship ministry)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예배전 30분에서부터 찬양이 시작된다. 9:30분이 되면, 제1차로 찬양예배(praise ministry)가 시작되어 성가대의 우렁찬 코러스와 함께, 회중들의 합창, 그리고 성가에 뛰어난 솔로(solo)로 이어지면서 예배분위기를 은혜롭게 창조해나간다. 이어서 제2차로 풀핏 미니스트리(preaching ministry), 즉 설교사역이 열렬하게 진행된다. 프라이스 목사의 설교의 기교와 능력에 의하여 40여분간 진행되는 강단을 예배단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강단에서 이탈하여 빙빙 돌면서 자유롭게 청중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졸거나 지루한 감이 없다. 그 후에 제3차로 프라이스 목사의 사모가 나아와서 치유사역(healing ministry)을 시작하여 교인들의 질병을 치료한다. 이렇게 종합적인 미니스트리로 이어지는 특수한 예배라 대략 3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3) 한국교회 성장 모델

필자는 한국교회의 성장모델을 교회성장학 이론과 한국교회의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교회성장의 배경을 감안하여 다루어 보려고 계획했으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본서에서는 생략하기로 하였다. 첫째는, 본서의 계획된 지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과거의 자료들이나 타인들이 쓴 저서들은 있으나, 필자가 최근의 자료들과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리서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셋째로, 한국교회의 성장모델에 관하여 저술한 저서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교회성장학문의 안목으로 특유한 각도에서 조명하여 모델케이스의 교회를 리서취하고 집필하려고 계획했으나, 한 두달이라는 제한된 기간과 미국에서의 집필이라는 거리상의 어려움도 있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생략하려고 한다. 독자들의 아량을 기대하며, 이미 많이 나아와 있는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만, 미국교회의 성장모델과 한국교회의 성장모델은 역사적 문화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며, 혹 미국교회, 심지어 한국교회의 성장모델을 연구했다 하더라도, 또 자기 교회의 상황과 목회자의 은사 및 교회성장 전략에 따라 그 적용은 다양하기 때문에 빌 하이벨즈가 말한 것과 같이 어느 성장모델이건 절대적일 수는 없기 때문에 일괄 적용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릭 워렌이 말한대로 여러가지 교회성장 요소들을 도입하여 종합적인 교회성장 전략을 세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5) 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

「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High Chain-impact Method by the Words and the Holy Spirit)은 필자가 미래 교회의 교회성장의 전략과 방법론을 생각하던중에,「도미노 이론」(Domino theory)과 뉴-톤의「운동의 법칙」에서 아이디어(ideas)를 얻어서 개발한 성서에 기초한 현대 교회성장의 방법론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급성장하여 그 거대한 성장 물줄기(the mighty river of Korean church growth)가 줄기차게 흘러오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늘어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은 1980년대에, 한국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마이너스 성장으로 역전되고 말았다. 필자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를 알기 위하여 선진 기독교의 나라들을 추적하여 그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더듬고 그들의 교회가 쇠퇴하게된 원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며, 그들 서구교회의 전철을 밟지않고,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하면서 본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이미 필자가 집필한「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에서 대략 언급하였다.
교회성장 운동도 어떤 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물결을 타게 되어 있다. 미국교회서와 같이 한국교회도「제1물결」과「제2물결」을 잘 타고 왔기 때문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져왔으나 현대의「제3물결」을 타는데는 역시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는 말씀에 강한 복음주의, 개혁주의 교회들이 사도들과 같이 대담하게 성령운동의 기치를 들 때가 온 것이다. 이제 말씀의 강한 영향력(말씀의 고충격)과 성령의 강력한 권능(성령의 고충격)으로써, 앞으로 닥쳐오고 있는 21세기「제4물결」시대에 만국복음화를 위한 "마지막 선교의 바람"(the last mission wind-wave)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마 24:14). 그리고 나서 도래하는「제5물결」인「그리스도 재림왕국」에서, 고대하며 기다려온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게 될 것이다(아멘). 이 시  기  를「성도의 나라」또는「그리스도의 재림왕국」시대라고 한다. 본서에서, 마지막 부분으로「제3물결」과「제4물결」시대에 필요한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으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 을 소개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고 한다.

1) 파라쳐치 운동의 컨퓨젼 (Confusion)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세우신 제도(institution)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가정(home)이고 또 하나는 교회(church)이다. 이 모두가 무기적인 조직(mechanism)이 아니라 유기적인 조직(organization)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고 완성시켜 나가신다. 그런데 교회가 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자고 있을 때에는, 교회 밖의 운동인 파라쳐치 운동들(para-church movements)을 통하여「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조력하도록 하신다. 그래서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파라쳐치 운동들이 일어났다. 쳐치(church)와 파라쳐치(para-church) 사이의 구분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여 피차간의 혼동과 오해들로 갈등을 가지고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정규 가관으로 세우신 것은 교회(church)이지 파라쳐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기능에  있어서 파라쳐치는 교회의 부족하거나 미비되는 부분의 기능을 보충해주는 것으로 그들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파라쳐치가 활발히 활동하다 보면 교회를 무시하기 쉽고, 그러다 보면 본연의 기능을 넘어서 교회를 간섭, 감독하려고 하거나 스스로 교회의 행세를 하려고 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파라쳐치는 어디까지나 파라쳐치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실한 부분을 보충하는 역할로 끝나야 한다. 이와 반대로 교회는 파라쳐치에 대한 재인식이 있어야 한다. 파라쳐치를 잘못 인식하여 심지어 이단시하기까지 하는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광범한 사역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파라쳐치 중에서 선교기관이나, 예를 들어 C.C.C.나 IVF와 같은 캠퍼스 전도기관들은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파라쳐치 운동들을 툭하면 이단으로 몰기 쉬운데 이는 교회의 자만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교회는 파라쳐치 운동들을 무조건 압박하거나 제거하는 성급한 작업으로, 건전하게 선교, 전도, 혹은 교회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해야 할 파라처치들이 길을 잃어서 방황하다가 결국 제멋대로의 왕국을 건설하여 정말 이단으로 탈선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밖에서 하나님(성령)의 운동이 일어나면, 그 운동을 잘 지도하고 유도하여 교회운동에 유익한 방향으로, 신앙으로나 신학적으로 정립시켜주어야 할 책임이 교회지도자들에게 있지 않은가? 원칙적으로 파라쳐치 운동은 교회의 상황(context)에 직접 적용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음을 인식하고, 교회의 상황에 맞게 개선해서 적용하게 되면, 파라쳐치 운동이 교회를 해롭게 하기보다 유익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근래에 한국에서는 자체에서 일고 있는 그룹들의 파라쳐치 운동들과 목회자 세미나들의 바람과 외국에서 몰고온 카리스마 바람들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파라쳐치에 대한 컨퓨젼(혼선, confusion)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교계에서는 신학적으로 정립해주어야 할 것이다. 파라쳐치 운동들이 그 존재의미와 사명을 분명이 인식하지 못하여 교회에 갈등들을 가져다 주는 경우가 많다.

2) 카리스마 운동의 긍정과 부정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의 주장에 의하면,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은 1960년대에 일어난 성령의「제2물결」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미국에서 1900년대 초에, 오순절 성령운동(Pentecostal)인「제1물결」이 일어났고, 그 이후 1960년대에 카리스마 운동인「제2물결」, 1980년대에 복음주의 성령운동인「제3물결」이 일어났다고 한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운동들은, 그 운동의 기복(起伏)은 있을지라도 초대교회 오순절 운동 이후, 끊임없이 반복되어 오고 있는 운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들어와서 범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견지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카리스마 운동은 주로 치유(healing)와 신비로운 사건들(happenings), 그리고 찬양으로 요약된다.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 가운데서는 이 오순절 카리스마 운동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초대교회 사도시대의 오순절날에 단회로 마감했다는 지론이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는 현대, 특히 1980년대 이후의 기독교회의 복음운동에 관하여, 선교적 및 목회적 차원에서 볼 때에,「제3물결」(the third-wave) 시대(generation)라고 규정하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이 복음운동(Evangelism movement)이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오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Reformation)을 기점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Protestant church)는 오직 성경말씀(Sola Scriptura) 중심의 복음주의(Biblical evangelicalism)를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19세기 이후에, 전세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능력의 바람"(new spiritual power storm)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새로운 성령의 역사(new spiritual event)로, 세계를 복음화시키기 위한「제2의 오순절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순절이라고 해서 원초적인 의미의 사도적 오순절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와그너(C. Peter Wagner)에 따르면, 1900년 초에 성령을 통한 복음운동으로「제1물결」(the first wave)인 "오순절 운동"(Petecostal movement)이 일어났고, 1960년대 부터「제2물결」(the second wave)인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 성황하게 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 와서는「제3물결」(third wave)인 "복음주의 성령운동"(new Spiritual movement in the evangelicalsm)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고 분석했다. 물론, 그의 교회성장론이 일부에 의하여 타협주의니, 실용주의니 하는 비판도 받고 있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을 복음주의 안으로 도입하려는 시도에는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자들에 의하여 비판의 소지가 있는 착상이라고 생각되나, 그는 많은 복음주의 내지, 복음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상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 성경이 특별은사의 종막을 말하지 않았으며, (2)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특별은사의 부족으로 약화되어 빈혈증에 걸리고 있고, (3) 현대 교회들의 경험으로 보아서,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제3의 운동을 좋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교리적인, 신학적인 이슈(issue)는 접어두고, 순수하게 복음전파 운동의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자는 의미에서,「제3물결 운동」(third wave movement)은 교회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을 위한 현대목회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나 목회방법을 가지고는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 시대를 따라 합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셨다(히 1:1,2). 우리 한국에서도 1907년을 기점으로 오순절의 성령운동을 통하여 교회부흥 운동이 일어나 계속되었고, 1960년대에 와서 은사운동이 성행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성 복음주의 교회들도 대부분이 이 영성운동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과거에는 성령운동이나 은사운동은 이단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던 기성교회들이 오늘날에는 이 운동들을 수용하게 되어, 어느 교회에서나 영성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영성운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에 치우쳐서 교인의 신앙이나 교회가 불건전하게 되는가 하면, 반대로 하고싶어도 되지 않아서 그대로 힘없는 교회로 남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다행한 것은, 영성운동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이해하려들지도 않는 전근대적인 아집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거의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도 많이 변한것 같다. 좋게 말하면 개혁된 면이라고 볼수 있다. 1960년대 이전에는 통성기도하고 손뼉만 쳐도 이단으로 몰아 부치고, 이로 인하여 성령의 은혜를 말하면, 이단으로 몰려 교회안에서 소외되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오히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교회에서 위축되다시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성령의 은사를 받아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많기 때문에, 현대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은「제1물결」(the first wave)만 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성서적, 복음적인 신앙체계가 없이 "성령의 능력만 믿습니다" 해가지고는 현대 목회를 하는데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믿습니다"는 목회자들 보다도 더 잘하는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교회를 담당한 목회자들은「제2물결」(the second wave)만 타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말씀의 체계와 말씀의 능력이 없이는, 역시 현대 교회를 리드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적 은사로 병고치는 능력(healing power) 같은 것은 목회자들 보다도 더 강한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두 물결을 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성령의 강한 역사를 통하여 내적으로 외적으로, 영육간에 병든 현대교회를 치유하고, 양육(follow-up-equipping)시킬 뿐만 아니라, 내일의 비젼은 물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교회 목회자들은 "현대"라는 큰 대양에서 "제3의 파도"(the third wave)를 매우 능숙하게 탈 줄 아는 "서핑선수"(excellent surfer)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목회를 위한 복음의 진수를 효과있게 제공할 수 있는 "말씀의 종"과 영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필요한 "영적 은사"(spiritual gifts)를 구사할 수 있는 "영력있는 종"이 되지 않으면 더구나 차세대 교회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세대에 한국 교회적 상황에서, 사양길로 기울어지고(decreasing or declining) 쇠퇴해가는(falling) 교회를 어떻게 치유하며 살려서, 성장하는 교회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미 결론으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다른 교단, 다른 교회보다는 자기의 개교회의 문제가 급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우선 어떻게 자기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How can our church grow?)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평가하다 보니 진단으로 인한 부정적인 면만이 부각된 인상으로 기분좋은 일만은 아니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의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유도하기 위하여 좀 냉철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객관적인 자가진단을 통하여 희망찬 한국교회의 내일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교회란 하나님의 손길에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정신차리고 하나님앞에 성실하기만 하면 내일의 더 큰 성장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줄기차게 흘러왔던 한국교회의 거대한 성장물줄기(Korean Church, the mighty river)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가늘어진 것이 통계상으로도 확실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전과 같은 성장의 물줄기로 다시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이에 적절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대다수의 쇠퇴해가고 있는 미국교회들 가운데서도 줄기차게 성장하는 교회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금만 정신차리고 그 대안을 찾아 처방하여 성장한다면 밝은 미래를 보게 될 것이다.
카리스마 운동은 교리(dogma)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이기 때문에 절대화할 수 없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어느 운동이든지 특수한 운동들은 그 운동에 대한 은사가 있거나 특별한 훈련을 통해야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누가 카리스마 운동으로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아주 단순한 논리로 시도했다가 실의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비단 카리스마 운동만이 아니다. 심지어 주로 예수께서 하시고 어느 시대에나 할 수 있는 제자훈련까지도 누가 이렇게 했더니 성공했다고 듣고 똑같이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운동이든지 그 운동을 전개하려면 우선 그 운동의 은사가 있든지, 아니면 그 운동에 빠져들어 오리엔트됨으로 그 운동에 미치다시피할 정도로 연구하고 훈련받고 확신에 찬후에 시도해야 성공할 것이다.
카리스마 운동으로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해서 마음놓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교인들의 치우친 신앙으로 인하여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의 처방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은 건전한 교회성장에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쉬운 것만도 아니다. 그래서 미국의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uty Church)를 메타쳐치로 성장시킨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균형있는 교회성장 전략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본래 운동들은 어떠한 영향(충격)을 주기 위하여 전문화(specialize)되어야 한다. 전문화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수술을 필요로 할 때에, 내가 해야 할 수술에 관한 전문적인 의사를 원한다. 그러나 어느 전문가라고 해서 나의 몸에 일어나는 모든 것  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느 단일 파라쳐치 운동도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건강하게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해줄 수는 없다. 각기 하나는 대의적인 것의 부분을 강조할 뿐이다. 다섯가지 모든 목적에 대한 균형화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전교회의 대의명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제하고 교회가 예배나, 제자훈련이나, 강해설교 중에 어느 한가지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교회의 건전한 성장을 위한 어느 하나의 키(key)는 없고, 많은 키가 있다고 주장했다.

3) 빈야드 신드롬과 컴플랙스 (Syndrome & Complex)

근래에 한국에는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에 관하여 설왕설래하고 있다. 빈야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입에서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빈야드"란 "포도원"이라는 영어이고, 빈야드 운동은 미국 캘리포니아 애나하임(Anaheim, California)에 있는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에서 발원된 현대 카리스마 운동을 말한다. 빈야드 교회들이 소속되어 있는「빈야드교회 협회」(The Association of the Vineyard Churches)의 회원교회가 미국에만 150여교회, 전세계적으로 500여교회가 연결되어 있다. 본부는 미국의 죤 윔버(John Wimber) 목사가 설립한 애나하임 빈야드교회에 있고 미국과 카나다, 영국을 비롯하여 전계적으로 세미나를 통하여 카리스마 운동을 전파하고 있다. 한국교회 교역자들중에도 7,000여명 이상이 이 세미나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카리스마 운동은 주로 치유사역(healing ministry)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찬양목회(praise ministry)가 곁들여진다. 지나친 경우에는 카나다 토론토 빈야드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와같이 예배중에 신비주의적인 행동이 주가 된다. 예배도중에 걷잡을 수 없는 희한한 웃음을 연출하는데 이것을 그들은 "거룩한 웃음"(holy laughter)라고 한다.  그리고 예배도중에 여러가지 기현상들이 벌어진다. 통곡하고(intense weeping) 넘어지고(falling to the floor), 경련을 일으키고(convulsions), 떨고(jerk), 껑충껑충 뛰고(pogoing and bouncing), 소리를 지르고(shouting), 부르짖고(roaring), 환상을 보고(visions), 예언의 말과 발표를 하고(prophetic words), 머리를 흔들고(shake heads), 중얼거리는(mumbling) 행동을 하기도 한다. 토론토 빈야드의 창설자인 죤 아노트(John Arnott) 목사는 그의 신앙 배경부터가 신비주의적이며 카리스마 목회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60년 후반과 '70년 전반에 그는 미국의 카리스마 운동의 거장들인 캐더린 쿨만(Kathryn Kuhlman)과 베니 힌(Benny Hinn)의 영향을 받았고, 1986년에 카나다 뱅쿠버에서 있었던 죤 윔버의 집회(John Wimber Conference)에 참석했다가 미국 빈야드의 창설자인 윔버의 영향을 받았다. 1993년 6월 텍사스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오순절 전도자인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Rodney Howard Browne) 집회에 참석하여 그 때부터 신비로운 체험에 충만하여 토론토 빈야드 교회를 세워서 카리스마 운동을 하고 있다. 카나다 토론토 빈야드의 죤 아노트는 한국에서의 세미나에서의 물의로 인하여 미국 빈야드와 결별하게 되었다.
미국 빈야드교회의 죤 윔버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야 하는데, 한정된 지면관계로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죤 윔버의 미니스트리를 알기 위해서 필자는 1988년부터 여러 차례 예배참석과 자료수집을 위해서 방문한 적이 있다. 1994년부터 죤윔버는 건강상 이유로 은퇴하고, 현재는 칼 터틀(Carl Tuttle)이 담임하고 있는 애나하임의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개척한 후, 그는 훌러신학교에 다니면서 피터 와그너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때부터 와그너와 함께「제3물결운동」의 일환으로 훌러신학교 MC 510의 강의시간에 카리스마 사역을 시작하였다가 학교 당국의 제지로 일단 중단한 일이 있었다. 물론 와그너는 콜로라도 훌러(Fuller Extension)로 주 사역지를 옮겼지만 금년 초까지도 강의시간에 치유사역을 하곤 하였다. 그런데 윔버의 카리스마 사역도 몇몇 복음주의 신학자들(D. A. Carson, James Montgomery Boice, John H. Armstrong)에 의해서 약 40여가지의 교리적인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토론토 빈야드와 같이 지나친 신비주의는 아니라고 본다. 본래 죤 윔버는 목회방법이-누구나 자기의 성격과 신앙과 신학적 배경의 영향을 받듯이-그의 음악적 배경인 록음악(Rock)과 째즈음악(Jazz)의 영향을 받아서 찬양 미니스트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문화적인 차이로 한국교회가 전면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물론 미국교회들이 대부분 그렇듯 소그룹 운동을 통한 교인들의 신앙훈련은 빈야드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나, 찬양과 치유사역에 중점을 두다보니 자연히 메시지의 내용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수차례 낮예배와 저녘예배를 참석한 결과 메시지가 약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미국의 카리스마 운동을 주로 하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메시지가 약한 것이 약점이라는 것은 필자가 여러 오순절교회들을 방문하고 얻은 결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빈야드의 물결이 한국으로 흘러들어와서 소용돌이치자, 한국교회에서는 시비의 평가로 엇갈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카리스마 운동의 덕을 보아서 좋아하는 목회자나 교인들은「비야드 신드롬」(Vineyard syndrome)을 앓고 있고, 반면에 카리스마 운동에 손해를 보아 예민한 반응을 일으키는 목회자나 교인들은「빈야드 콤플렉스」(vineyard complex)에 시달리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필자가 한 번은 어느 교역자에게, 미래목회를 위하여 목회자에게 성령의 강한 역사인「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High Chain-Impact by the Word and the Holy Spirit)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맨 앞에 있는 카-드에 충격을 가하면 그 뒤에 있는 카-드들이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도미노 현상과 같이 말씀과 성령에 의한 고충격을 받으면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말씀에 의하여 "쓰러진다"고 강조했더니, 그 "쓰러진다"는 말때문에 즉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면서 "그거 빈야드 아니야?"라고 신경을 곤두 세우는 것을 보았다. 토론토 빈야드는 쓰러지는 것(falling-down)이 유행이니까 그렇게 생각된 모양이다.
하기야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도 말씀과 성령의 강한 충격을 받아서 건전하게 쓰러지는 경우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강력한 고충격파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지 않았던가? 사실, 빈야드 운동을 바라보면서 지나치게 민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카리스마 운동들이 교회사상,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수없이 되풀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 자체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들이 잠자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파라쳐치 운동이나 이와 같은 카리스마 운동들을 일으켜서 깨우시려는 뜻이 계심을 깨달아, 목회자들은 잠자는 교회들을 깨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1. 연쇄 고충격 이론 (Theory of High-Impact)

필자가 개발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에 대해서「빈야드 컴  플  렉 스  」에 걸린 사람들 모양으로 민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고충격(High-Impact: 강한 영향, 혹은 고충격) 요법은 신비주의적인 것도, 카리스마도 아니요, 철저히 성경에 기초한 "말씀과 성령에 의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법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총신대학원과 미국의 개혁주의 계통의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고, 병행해서 현대신학의 부전공으로 개혁주의신학을 정립한 후에, 교회성장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칠 염려는 없을 것이라 자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통하여 신학교에서나 세미나에서 강의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왜 이러한 변명을 해야 하는가? 한국교회는 조금만 특이한 운동을 일으키면 오해를 잘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서를 집필하면서 어느 선배 목사님에게 약간의 선진화된 내용(advanced movements)을 이야기 했더니, 새로운 발견(new findings)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너무 앞서 나가면 한국교회에서 오해를 받는다고 코멘트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조직신학과 현대신학, 성서신학, 성서해석학등 학문들을 고루 섭렵하고 강의한 경험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지혜를 통하여 내다보이는 세계를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정립의 과정을 거쳐서 기탄없이 증거하려는 자세로 본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본서의 이 부분의「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은 교회성장학을 연구하며, 미래목회에 어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든중에 하나님께서 아이디어로 주신 것이다. 이「연쇄고충격 요법」은 첫째,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과 둘째, "뉴-톤의 운동법칙"에서 아이디어를 얻음과 동시에 성서적인 원리에 기초해서 개발한 차세대 목회를 위한 교회성장 방법론이다.

(1) 도미노 이론 (Domino Theory)

"도미노"(Dominoes)는 나무(wood)나, 뼈(bone)나, 상아(ivory) 등에 검은 점(black dots, pips)들을 새긴 패(牌)나 조각들(pieces)을 이용하여 놀이하는 게임(game)의 일종인데, 그 블록(block)들은 도미노들(dominoes), 뼈들(bones), 조각들(pieces), 그리고 때때로 사람들(men), 돌들(stones), 심지어 카-드들(cards)로 되어 있다. 이 도미노 게임은 처음에 중국에서 기원한 것인데, 18세기 말에 프랑스와 이태리를 거쳐, 프랑스의 죄수들에 의하여 영국으로 건너가서 유럽 도미노(European domino)가 되었고, 그 후에 미국을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퍼졌다. 이 도미노 게임은 한 세트가 18타일(tiles), 32타일, 심지어 미국에서는 148타일로 된 도미노 블록들을 가지고 게임을하여 50-100 포인트, 혹은 121 포인트를 얻게 되면 승리하게 된다. 그러데 도미노 블록은 종종 카-드로 된 것을 사용하는데, 수십개의 카-드를 구불구불하게 일렬로 세워놓고 맨 앞에 있는 카-드에 충격(영향, impact)을 가하면 그 다음에 늘어선 카-드들이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 이론은 게임(game)을 비롯하여 수학(mathmatics)과 정치(politics)등 모든 분야에서 채용되고 있는 이론이다. 특히 정치에서, 이 원리는 한 지역이나 한 나라가 적화되거나 민주화가 되면 그 주변의 지역이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공산화되거나 민주화가 된다는 이론으로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론이다. 이것은 과거에 동구의 공산화(communization)나 현재에 민주화(democratization)에서 일어나는 도미노 현상들(domino-phenomena)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이론이다. 필자는 이 강력한 도미노 이론(domino-theory)을 복음화(evangelization)와 지 역 교회의 제자훈련 사역(discipleship training ministry)에 적용하려고 한다. 인간의 단체나 개인들 사이에는 암시의 법칙(law of suggetion)이 작용하고 있어서, 한 개인이나 단체가 어떠한 암시를 강하게 받으면 그 주변에 있는 그 개인이나 단체에 연쇄적으로 그 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어떤 학생들 주변에 매우 강력한 불량아가 있으면 그 주변 학생들이 반응을 일으켜서 연쇄적으로 불량아로 변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반면에 주변에 모범적인 학생이 있으면, 좋은 학생들의 블록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훌륭한 인물들 배후에는 언제나 훌륭한 스승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강력한 영적, 인격적인 영향력은 그 인격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 제자들에게 연쇄적으로 그 파장을 일으켜서 오늘날 세계를 뒤덮고 있는 복음화의 주역들이 된 것이다. 목회자가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강력한 감화력이 없으면 교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거나 제자훈련을 할 때에 무력하게 되고, 이 현상이 계속되면 종국에 가서는 손을 들게 된다. 이는 목회자들에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목회자는 제자화를 위하여 교인들은 물론, 복음화를 위하여 불신자들에까지 강력한 영적, 인격적인 영향력(high impact: 고충격)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사도인 바울은 디모데를 통하여 목회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고, 특히 바울은 신약의 서신들을 영감으로 기록하여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키고, 어거스틴(Saint Augustine)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주의 종이 되게 한 것이다. 교회사를 더듬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통하여 세계를 변화시킨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이론(理論)에서 중요한 것은「연쇄반응」(chain-impact reaction)이다.
이 연쇄반응은 도미노 카-드를 가지고 일렬로 구불구불하게 늘어놓고 맨 앞에 있는 카-드에 충격을 가하면, 그 첫 카-드는 충격을 받아서 그 충격파를 뒤에 있는 다음 카-드에게 전달하게 된다. 다음 카-드는 똑 같은 작용으로 그 다음 카-드에게 충격을 주게 되어 연쇄적으로 쓰러지게 되는데, 그 결과는 운동의 법칙에 의하여 좌우된다. 이 원리는 일반적인 운동의 연쇄반응의 법칙이다. 이 운동의 법칙을 알기 위하여, 유명한 어떤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그 물체의 운동사이의 관계를 나타낸 유명한 뉴-톤의 운동의 법칙(Newton's laws of motion)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줄 안다. 이 뉴-톤의 운동의 법칙은 이 세상의 모든 역학원리(力學原理)에 적용되는 것으로 물리학의 핵심적인 원리중의 하나이다. 하나의 운동인 교회성장 운동도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뉴-톤의 운동의 법칙 (Newton's Laws of Motion)

뉴-톤의 "운동의 법칙"(Newton's laws of motion)은 어떠한 물체에 작용하는 힘(force)과 그 물체의 운동과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법칙을 말한다. 이 뉴-톤의 운동의 법칙에는 세 가지가 법칙이 있는데, 첫째가 관성의 법칙(the law of inertia)이고, 둘째가 가속도의 법칙(the law of acceleration)이며, 셋째가 작용/반작용의 법칙(the law of reaction)이다. 이 운동의 법칙은 현대과학에 획기적인 혁명을 몰고온 뉴-톤의 운동의 3법칙이라고 한다. 필자는 기도하며 연구하는 중에 이 법칙들에서 교회성장을 위한「말씀과 성령의 고충격 요법」의 방법론에 적용할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1) 제1법칙 (관성의 법칙: 정지/등속의 법칙)

뉴-톤의 운동의 제1법칙은「관성의 법칙」(慣性의 法則, the law of inertia)으로, 어떠한 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지 않으면 정지(停止)하거나 등속운동(等速運動)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물체가 정지하거나 똑바로 계속해서 움직고 있다면, 어떠한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한, 그대로 정지상태에 있거나 변함없는 속도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것을 운동의 등속법칙이라고 한다. 그런데, 갈릴레오(Galileo) 이전만 하더라도, 물체들은 다만 외부의 힘이 가할 때만 운동하고,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운동하지 않고 정체상태(停滯狀態)에 있다고 생각했다. 혹성(惑星)들을 움직이는 힘을 발견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실제로 그 혹성들이 그들의 궤도에서 동일한 속도로 운동하도록 그들을 유지해줄 힘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들은 중력에 대한 개념이 단지 운동의 방향을 변경시키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물체에 외부의 힘을 가하지 않을 경우에는 정체현상(停滯現狀)이나 침체현상(沈滯現狀)을 나타내게 된다.
이 운동의 제1법칙에 따라 교회성장 운동도 성장이 정지(停止, stop) 혹은 정체(停滯, rest)되거나, 별다른 성장의 변화가 없이 침체(沈滯, stagnation)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운동의 제1법칙의 "정지의 법칙"(停止의 法則)에 따라, 교회성장 운동(敎會成長 運動)이 정체되거나(stop) 침체(stagnation)된다는 이론이다.

2) 제2법칙 (가속의 법칙: 성장의 법칙)

뉴-톤의 운동의 제2법칙은「가속도의 법칙」(加速度의 法則, the law of acceleration)으로, 물체는 현재의 속도여하에도 불구하고 힘을 가하면, 힘의 같은 방향으로 가속도(加速度)가 발생한다는 법칙으로, 그의 크기는 힘에 정비례(正比例)하고, 질량에 반비례(反比例)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힘이 어떤 물체의 운동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의 양적인 기술(description)를 의미한다. 운동하고 있는 어떤 물체에 계속해서 힘을 가할 때에, 그 물체는 가속도가 붙게 되는데, 이러한 예는 일상 생활에 이용하고 있는 자동차의 가속창치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의 가속장치(accelerator)를 계속해서 밟으면, 50km, 60km, 70km, 80km, 90km, 100km, 110km로 계속해서 가속이 붙어서 빠른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운동의 제2법칙에 따라, 교회성장 운동도 계속해서 교회성장 운동력을 가할 때에, 그 교회의 성장운동은 가속도가 붙어서 계속하여 성장해나가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교회는 "전진의 법칙"(前進의 法則)에 따라 교회가 성장하고(growing) 흥왕(multiplying)한다. 이 가속도의 법칙이 적용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하나는 시대를 따라 계속적인 프로그램의 개발이 따라야 한다. 첫째가, 교회의 프로그램의 계속적인 개발이다. 왜냐하면 시대가 바뀜에 따라 문화적으로 전도와 목회상황에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 프로그램을 교회성장에 적용하기 위한 강력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그램 개발과 그 프로그램을 통한 계속적인 훈련만이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이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가속화시킬 때에, 교회는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가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교회는 열차가 총착역을 향하여 쉬지않고 달리는 것과 같이 주의 날이 임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달려야 한다.

3) 제3법칙 (반작용의 법칙: 퇴보의 법칙)

뉴-톤의 운동의 제3법칙은「작용/반작용의 법칙」(the law of action or reaction)으로, 물체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어서, 작용의 크기와 같은, 방향이 다른 반작용이 생긴다는 법칙이다. 어떤 물체에 힘을 가했을 때에, 이에 상응하는 반작용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반작용(反作用, reaction)은 언제나 작용(作用, action)과 동일한 크기의 운동을 하며 방향은 정 반대 방향을 취하게 된다. 예를 들면, 테이블위에 책의 아래로 향하는 힘(下向力, downard force)이 책위에 테이블의 위로 향하는 힘(上向力, upward force)과 같다는 이론이다. 또 날으는 비행기를 하늘위로 끌어 올리려는 힘과 땅아래로 끌어 내리려는 힘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힘의 균형이 깨질 때에 작용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 운동의 제3법칙에 따라 교회 성장운동이 전진하느냐? 아니면 퇴보하느냐?가 달려 있다. 작용의 법칙에 의하여 강력한 힘을 가하면 가속의 법칙에 의해서 성장하겠지만 이 법칙에서 적용되는 것은 반작용의 법칙(反作用의 法則)이기 때문에, 교회가 "퇴보의 법칙"(the law of retrogression)에 의하여 성장하지 못하고, 쇠퇴하거나(declining)  죽어가게(dying) 된다.

2. 연쇄 고충격의 원리 (Its Preinciples )

앞에서 논한「도미노 이론」과「뉴-톤의 운동의 법칙」은 매우 선명한 원리들을 가지고 있다. 이 원리들은 교회성장 운동에도 정확히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 원리들을 잘 이해하고 이 원리들을 바탕으로하여 교회성장 운동을 가속화시켜야 할줄 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운동들이 이 원리들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대교회를 짊어지고 나가는 목회자들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도 자연만상과 사람을 비롯하여 동물, 식물들의 성장원리들를 이용하여 복음의 역사를 설명하시는 모습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의 생명의 원리를 들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가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소상하게 설명하시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생명운동을 요한복음 1장의 서두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메시야로 나타나시는 원리와 과정을 "존재의 원리," "생명운동의 원리," "계시의 원리,"들를 구체화시킨 "화육의 원리"를 통하여 복음의 출현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요 1:1-14). 바울사도는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접목의 원리를 발견하여 이를 구속의 원리에 적용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롬 11:13-21). 필자는 신학교에서의 강의와 목회자 세미나에서 인도하며 연구하는 중에 이 "도미노 원리"와 "뉴-톤의 운동의 법칙"의 원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말씀과 성령에 의한 연쇄고충격 요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1) 무충격(No-Impact) 무작용(No-Action: Stagnation)

앞에서 언급한「도미노 이론」과「뉴-톤의 운동의 법칙」의 원리를 이용하여 교회성장의 원리와 전략을 세우는 것도 효과적이라 하겠다. 우선, 운동의 제1법칙인 "관성의 법칙"을 적용해보면,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충격(無衝擊, No-Impact)의 상황이다. 정지되어 있는 물체에 충격을 가하지 않으면(무충격의 상황), 그 물체는 관성에 의하여 작용하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무충격(no-impact)에 무작용(no-action)의 현상이다. 어떠한 운동이나 경제의 흐름에 있어서 경기(景氣)에 어떠한 변화가 없이 현상을 유지하는 경우를 침체상태(沈滯狀態)라고 한다. 진행하던 운동이 정지되었을 때에, 이것을 정체상태(停滯狀態)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성장 운동에 있어서도 교회에 어떠한 충격을 주지 않으면, 그 교회는 정체상태나 침체상태로 있게 된다. 교회가 무충격에 무작용의 현상이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적인 생명체이므로 계속해서 움직이며 운동하면서 성장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아무 운동도 하지 않고 있으면, 침체상태를 면치 못하고, 계속해서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쇠퇴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원인은 전적으로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아무것도 하지않을 때, 평신도들의 운동이 없을 때, 그리고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의 활동이 없을 때에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해서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강력한 충격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도전을 주어야 한다.

먼저 목회자가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충격파가 없을 때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는 침체하고 쇠약하게 된다. 교회는 물론, 목회자 자신도 지쳐서 쓰러지기도 한다. 아합과 바알선지자들과 싸우느라고 엘리야는 성령의 충격파가 약화되어 아합의 왕후인 이세벨에게 쫓겨 다니다가 지쳐서 광야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부르짖었다. 세상권세들, 그리고 사탄의 세력들과 싸우기에 영적인 에너지를 거의 다 소비한 것이다. 이 때에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통하여 주시는 물과 떡을 받아 먹고나서야 기운을 차렸고, 강한 힘을 얻어 40주야를 광야를 횡단할 수 있게 된것이다. 하나님의 고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교회의 교인들이 충격파가 없으면, 전도는 물론, 자신들의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교인들에게 말씀과 성령을 통한 강한 충격을 계속해서 가할 때에 교인들은 그 충격파에 충만해져서 열렬히 움직이게 된다.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게되고, 나가서 열심히 전도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교인들에게 어떠한 충격도 주지 않고 가만히 두면 교인들은 움지기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침체해지고,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부터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받아야 하며, 그 고충격파를 교인들에게 가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파에 감전되어 예레미야가 죄악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열렬하게 외친 것 같이, 바울이 즉시 일어나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를 전한 것 같이, 사마리아 여자가 자기 동리로 뛰어 들어가 "와보라!"고 전도한 것같이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2) 고충격(High-Impact) 가속도(Acceleration: Growth)

뉴-톤의 제2법칙인 "가속도의 법칙"의 원리를 이용하여 교회성장 운동을 가속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어떤 물체에 강한 힘으로 고충격(高衝擊)을 가하면, 그 물체는 앞으로 움직이게 되고,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고충격을 가하면, 주위에 관련된 다음 물체들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쳐서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행동, 즉 충격이 필요하다. 첫째가, 강한 충격인 고충격(high impact)을 가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로, 연속적인 충격을 가해서 연쇄반응(chain reaction)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저충격원리(低衝擊原理)에서 언급하겠지만 고충격(high impact)이 아니라 저충격(low impact)을 가하게 되면 반작용의 역파충격(逆波衝擊, reaction impact)으로 인하여 충격을 가한 당사자에게 큰 어려움이 생길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리액숀(反作用)이 생기지 않도록 고충격을 가하도록 하는 것이 제2법칙의 원리를 이용하는 방법이며, 다음으로, 연속적인 충격이 필요한데, 그 이유는 충격파(衝擊波, impact wave)와 충격력(衝擊力, impact power)의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
우리가 중생을 위한 성령은(regenerating Holy Spirit)의 수납은 단회적(單回的)인 것으로 족하지만, 성도들의 성화(聖化)를 위한 성령(sanctifying Spirit)과 능력적인 사역들을 위하여 부어주시는 성령(empowering Spirit)은 계속해서 충만히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나 성도들은 세상에서 경건한 삶을 위하여, 그리고 주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받은 충격력(衝擊力)은 연속적인 보충이 없으면 약해지기 때문에 전지(蓄電池, battery)와 같이 계속해서 충전(充電)시켜야 한다. 이 충전을 위해서 자동차에서와 같이 충전기(充電機)인 발전기(generator)의 계속적인 가동(稼動)이 필요한데, 즉 목회자나 교인들은 말씀과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계속적인 고충격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회자는 물론, 목회자의 강력한 고충격을 받은 교인들까지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 가슴에 성령의 불이 붙어서 전도함으로 교회의 성장운동에 가속도가 붙어서 계속하여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저충격(Low-Impact) 반작용(Reaction: Declination)

뉴-톤의 운동의 법칙중 제3법칙인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이용하여 교회성장의 장애물을 피하고, 가속적인 거대한 성장의 강물줄기(a mighty river of church growth)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자는데 그 의미가 있다. 뉴-톤의 운동의 제3법칙인 "반작용의 법칙"은 어떠한 물체에 충격을 가할 경우에, 그 가하는 충격이 약하면(低衝擊의 狀況), 그 물체의 강한 관성에 밀려 반작용의 현상(反作用의 現狀)이 일어나게 된다. 교회성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성장을 위한 충격운동이 없으면(無衝擊) 교회는 정체상태나 침체상대를 면치 못하나, 만약에 어설픈 교회성장 운동을 시도하게 될 때에는 도리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교인들을 교육하거나 훈련할 때에 확실하고 강한 말씀과 성령을 통한 훈련이 아니고, 어설픈 교육을 시키게 되면, 교회성장을 위하여 훈련한 운동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도리어 목회자나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교인들을 확실하고 강력한 리더쉽을 통하여 다루지 않고 어설프게 다루다가는 도리어 그들의 반작용(reaction)의 역파(逆波)로 인하여 목회자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말한다.
관성이 강한 물체를 어설픈 힘으로 충격을 가하다가 힘에 겨워 놓치게 되면, 도리어 그 물체의 반작용으로 인하여 물체를 밀던 사람이 다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목회사역에 있어서 교인들을 어설프게 다루다가 목회자가 도리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어설픈 지혜와 힘으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추진력을 발휘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능력의 충격파를 이용하여 교회성장의 방법을 밀고 나갈 때에, 교회는 성장세를 탈 수 있을 것이다.

2. 연쇄 고충격의 성서적 근거 (Biblical Basis)

본서(本書)에서 21세기「제3물결」과「제4물결」시대에, 교회성장의 전략적인 방법으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은 비록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과 "뉴-톤의 운동의 법칙"(Newton's Law of Motion)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 성서에 깊이 뿌리밖고 있는 "운동의 원리"(the principle of motion)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원리들을 수없이 채용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고, 제자들도 이러한 자연의 원리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제2의 바이블이다. 이는 물론 성경과 똑 같은 목적과 권위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타락된 인간과 우주만물의 구원을 목적으로 주신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이지만, 자연은 타락 이전 "창조의 원리"로서 우리에게 주신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 또는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로 구속과는 무관한 "제2의 바이블"이라는 뜻에서 하는 문학적인 표현에 목적이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타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에 관하여 상세하게 연구하기로 하자.

(1) 구약성서 (The Old Testament)

본래「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의 목적은 구속사역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구속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면서부터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수 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로 그를 에덴동산에서 좇아내신 후(창 3:22-23), 사전에 약속하신대로(창 3:15) 다시 찾아오셔서 인간을 만나주시게 된다. 물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그는 즉시 희생되었고, 에녹과 같은 인물들도 있으나 성경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있기때문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훈련을 받게 된 첫 사람은 노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방주를 지었고(창 13-22; 히 11:7),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으며(히 11:7),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열렬하게 복음을 전하였다(벧후 2:5; 3:19-20).
이 때에, 노아의 형편을 생각해보면, 세상이 죄악의 관영으로 복음을 전혀 듣지않고 있을 때에, 대홍수가 나서 세상이 멸망한다고 외치며 다닌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 아니다. 하늘이 멀쩡한 날에,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120여년 동안이나 외치고 다니니 주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우리가 글로, 그것도 대충의 내용으로 전해듣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피부에 와서 닿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그 당시 노아로서는 가장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가장 중대한 문제로 육박해오는 것이다. 이러한 노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이 노아를 어떻게 생각하였겠는가? 물론, 정신이상자,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예레미야가 민족의 살길을 외치며 전하고 다닐 때에, 그의 친구들이 조롱하고 비웃은 것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가던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을 전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담대했을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고충격훈련을 하셨기 때문이다. 항상 말씀하시고 지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을 강하게 하셨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상황에서 꺼리낌없이 복음을 전할 수 없다.
필자는 요사이 가끔 지하철안에서 교인들이 나와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전도전략과 방법에 대한 찬반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을 떠나서 순수한 마음으로 생각할 때에, 오히려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속에 계셔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계시는 성령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함께 어울려 전도하지 못한 자신의 믿음의 초라한 모습에 마음이 안스러울 뿐이었다. 과거에 열차간이나 시장터에서 약장수의 마이크를 빼앗아 들고 열열히 외치던 그 때가 한없이 그립게 느껴지기만 했다. "주여! 용서하소서. 나의 연약한 믿음, 아니 세속화되었다고나 할까, 교만해졌다고나 할까, 보잘 것 없는 주제에, 바울과 같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해야 할, 주님께 한없이 빚진자가, 주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다니......용서하소서. 믿음을 더하소서. 주여! 날보내소서.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나아가게 하옵소서." 마음속으로 기도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이 자기의 일, 자기의 시간도 개의치 않고 생기는 것도 없이, 저렇게 열심히 담대하게 전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 마디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였든 간에....
다음으로 생각할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일일이 설명할 필요 조차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조용한 생활만 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면서 일일이 묻기도하고 지시를 받아가면서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강도높은 신앙훈련을 받은 것이다. 그는 복의 근원, 만인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비젼의 사람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고(창 15:12-21; 13:14-17; 히 11:8-10), 하나님의 지시를 직접 받아가며 훈련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의 뜻대로 하다가 실수를 하기도 하였다(창 12:1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강도높은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받은 훈련을 통하여 자기집에 있는 318명을 정예용사들로 훈련시켜서 조카 롯을 구하기도 하였다(창 14:12-16). 그는 말씀과 성령에 충만하였다.
특히 이 부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모세로서, 그는 누구보다도 직접, 그리고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고충격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씀과 성령의 강한 충격훈련을 받은 것에 관하여는 다음의「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훈련의 실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의 고충격훈련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가 광야의 고충격훈련이요 둘째가 왕궁의 고충격훈련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인도하는 훈련과 왕궁에서 이스라일 백성을 인도해내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많은 시험과 훈련을 통과하게 하셨다. 만약에 모세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한 고충격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로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다음으로,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사사들과 사무엘, 다윗등 구약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는데, 특히 본서에서는 엘리야 선지자의 훈련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불리움을 받고 당시의 어용 이방선지자들인 바알 선지자들과의 갈멜산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응답으로 승리하여 "갈멜산 혁명"을 통하여 그들을 멸절시키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3년 반이나 가물었던 땅에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왕의 왕후인 이세벨이 잡으러 다니자 두려워서 광야로 피신다니기에 정신이 없었다. 결국 도망다니다가 지쳐서 한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 하나님께 죽기를 구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나님은 이런 지경에 빠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통하여 떡과 물을 먹여서 기력을 회복하게 해서 40주야를 광야횡단을 할 수 있게 하셨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항상 생각을 멈추곤한다. 어떻게 해서 떡과 물을 한 번 먹고 40주야를 달려갔을까? 물론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들로 많지만, 그 광야의 악조건과 장비도 없이 그런 괴력을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성경은 다름아닌 그 식물의 힘으로 40주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이르렀다고 했다(왕상 19:8). 여기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힘이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음식부터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직접 배달해주신 하나님의 특명요리이다.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해서 천사가 충분히 먹도록 권면했다. 아무튼 아무리 고단백, 고칼로리 음식이라 하더라도 한 번 먹은 음식으로 40일 이상 달릴 수 있는 힘이 나올 수가 있을까?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음식인 영의 음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징적으로 숯불에 구운 떡과 물도 의미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쿡킹(cooking)한 음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인 음식의 재료와 칼로리가 가미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력하게 돋구어 주신 기력을 통하여 광야길을 달리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이 충만한 예언자이다. 성령의 고충격력(高衝擊力)을 항상 유지하고 다님으로 갈멜산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었다. 그 성령의 권능으로 자기를 잡으러 온 두 그룹의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들을 하늘의 불로 죽이는 괴력을 나타내고(왕하 1:10-12),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도 했다(왕상 17:17-20). 물론 바알 선지자들과 그리고 대정부 투쟁에 지쳐서 기운이 진하여 로뎀나무 밑에 쓰러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고충격력을 충전시켜주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육신의 힘을 얻은 엘리야는 호렙산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섰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지진후에 그 지진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불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 후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여기서 엘리야는 자신의 중심을 호소하며 하나님께 자기의 처절한 모습을 아뢰고 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죽이려 하나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 밑에서부터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마음의 확신과 담대함과, 그리고 강력한 영력을 갖도록 "성령의 고충격 훈련"을 호렙산 동굴에서 천둥번개치는 듯한 상황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하시는 가운데서 강도높게 시키신 것이다(왕상 19:9-14).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라고 명하셨다.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하고(정치개혁),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후계자를 삼으라고(종교개혁) 하셨다(왕상 19:15-16).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구약시대니까 지나쳐버려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가 나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라의 지도자를 세우고 종교의 지도자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나라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지도자로 세워야 나라가 복을 받아 태평성대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 전파를 위한 기반을 삼을 수 있다. 어느 특정 후보자를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세울 수 있도록 우선 교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지도해야 한다. 교인들은 정당에든, 직장이든 자기의 생활현장에서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지도자를 세울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을 유도해야 한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은 더욱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정은 어떠한가?
얼마전에 교회의 총회장이나 감독, 노회장, 심지어는 지교회에서까지도 직원들을 세울 때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선거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비뽑기"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교회 선거개혁 캠페인을 자기의 자본을 투자하여 한국과 미국의 한인교회들을 순회하며 전개하는 박×× 목사님의 부탁으로 그의 지론인 "교회의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논단을 영어로 번역해준 적이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금권선거로 인하여 부패해간다고 전제하고, 성경적인 "제비봅기" 제도를 다시 도입하자고 외치고 있다. 물론,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이해해야 할 문제도 없지는 않지만, 미국과 같은 선진 교회에서와 같은 교회조직으로 개혁하지 않고 구태어 현재의 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선거부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노를 사느니 보다는 차라리 할 수 있다면 "제비뽑기" 방식으로 돌아가면 교회선거가 개혁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제비뽑기"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선거제도에 앞서서 선거부정이 나오지 않도록 교회의 제도적인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의 총회장, 노회장의 직권을 대폭 축소하는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미국에서 약 10여년간 미국 개혁교단인 CRC(Christian Reformed Church)의 총회나 노회에 참석해서 지켜보면서 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회의진행이 대단히 신사적이며, 승패를 떠나서 결정사항에 기분좋게 승복하는 정치문화에 부러움을 느끼면서, 우리 한국교회도(政局도 마찬가지지만) 저들과 같이 은혜롭게 회의를 진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선거전에 지나치게 열을 올려서 회장이 되고자 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의 문화적인 멘탈리티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에, 미국교회의 회장(총회장, 노회장)은 교회의 실권을 행사하는 회장(president)이 아니라, 단순히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chaiman)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노회장, 총회장이 노회나 총회의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앙집권 체제(centralistic system)에서의 회장위치가 아니고, 각 분과위(committee)들로 교권이 분산되어 있는데 반하여, 한국교회의 노회장이나 총회장은 1년동안은 상임회장(?)으로 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인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회장에 당선되려고 전략상 수단을 가리지 않다보니 부정선거가 자연히 자행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정치문화가 성숙되지 않는한, 현제도는 개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엘리야 이후에, 엘리사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수많은 지도자들(에스라, 느혜미야,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등)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舊譯: 聖神)에 의하여 연쇄적으로 고충격훈련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들을 감당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내려주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만이 현대교회를 성장시킨다.

(2) 신약성서 (The New Testament)

구약성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에서도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훈련은 현저하게 나타난다.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과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고충격훈련을 시키셨다. 우선 제자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단계적으로 구별하시고 훈련을 하셨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의 분석과 같이, 우선 가장 핵심적인 멤버(core member)를 12제자들(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바돌로오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룟 유다)로 정하고, 이들과 함께 70문도(눅 10:1)와 120문도(행 1:15)를 헌신된 멤버(committed member)로, 500문도들을 회중으로(congregation, 고전 15:6), 5,000여명을 따라다니며 모이는 무리들(마 14:13-21)로 군중들(crowd)로, 그리고 그 지역사회의 수만의 사람들(community, 눅 12:1)로 분류시키시고 훈련을 시키셨다. 특히 12제자중에서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등 수제자 세 명은 예수께서 항상 데리고 다니시면서 훈련을 시키셨다. 12제자들에게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전도하러 나갈 때에는 성령의 강한 능력을 부어주셔서 내보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나가서 전할 때에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병자가 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귀신들이 좇겨나곤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너무 신이 나서 예수께 돌아와 신나게 전도보고를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단계적으로 분류시켜서 훈련시키셨고, 또 비상한 방법, 개인적인 방법으로 말씀과 성령을 통한 고충격 훈련을 시키신 사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마리아 여자가 그 대표적인 예중의 하나이다(요 4:4-30). 이 사마리아 여자의 제자훈련은 가장 단기훈련의 기록을 세우기도 한 사건으로, 하루, 그것도 몇 시간의 단시간의 강도높은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 제자훈련을 통하여 수가성 동리가 복음화가 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동리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자의 전도를 듣고 예수께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기간이 짧을 수록 강도높은 훈련이 필요하다. 사마리아 여자는 처음에 자신의 수치스러운 사생활문제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한가한 시간에 한적한 곳인 수가성 우물가로 물을 길러 갔다가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우물가는 사연도 많은 전설과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중에 특별히 첫 사랑의 대화를 통하여 인연을 맺는 사건들이 성경에도 나타나 있다(창 24:45-46; 출 2:15). 사마리아 여자와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의인이신 그리스도와 죄인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으로, 역시 아가페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을 맺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자는 뜻밖의 만남과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의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종할 수 없는 낯선 유대의 한 청년으로 알고 대화를 시작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심도있고, 강도높은 말씀과 영력의 충격적인 공략으로 인하여 점점 예수님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 유대의 낯선 청년과 시작했던 대화가 이제는 가슴속 깊이 감추어 두고 있는 자기의 가장 비밀스러운 인생의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카운셀러(counselor)의 관계로 발전하였고, 더 나가서 자신의 비밀과 앞날을 내다보고 오시마한 약속의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선지자로, 결국 그 메시아가 되시는 그리스도로 만나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 그는 기쁨과 감정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강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게 된 사마리아 여자는 너무나 감격해서 즉시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자기의 행한 일을 말한, 그리고 자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 그리스도를 와보라! 고 정신없이 전도했던 것이다. 단 몇시간 동안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맞고,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받은 강한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여, 즉시 돌아서서 동리사람들에게 열렬하게 전도를 하게 된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마리아 여자의 단시간의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 훈련에 관해서는 "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의 실례"에서 상세히 다루려고 한다.
다음으로,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 요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건이 바로 사도 바울(개명 전에는 사울)의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교회사상 일대 변화를 몰고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인하여 사울이 바울이 되었고, 12사도외의 사도가 생겨났고,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이방으로 전파하는 획기적인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바울사도의 개종은 주님께서 강력한 충격요법을 사용하셨는데, 아마도 바울이 너무나 유대교의 열성분자로서 하늘 끝까지 교만으로 완고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충격요법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울아! 사울아! 말씀으로 부르셨고 성령의 강렬한 빛으로 휘어잡으셨다. 일시적으로 눈까지 보지 못하게 만드셨다. 이 엄청난 충격에 사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메섹 도상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충격은 육신 뿐만 아니라 그의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그의 전생애를 사로잡았다. 그는 잠시동안의 충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며칠동안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었고 고충격으로 실명되어 3일간 보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그의 제자 아나니아를 다메섹의 사울에게로 보내어 그에게 안수함으로 즉시 눈을 뜨게 하였고 성령을 충만케하셨다(행 9:1-18).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받은 사울은 즉시 유대교를 버리고,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유하며, 즉시로 각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마다 사울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보고 놀라며, 오히려 믿을 수 없다고 의심하며, 군중들을 회유해서 대제사장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니냐고 하니까, 사울은 더욱 힘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얼마나 고충격을 받았으면, 즉시 이렇게 딴 사람이 되었을까? 누구도 믿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도 오순절의 사건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시대에 이와 같은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받는 사건들이 많았다. 특히,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여 합심해서 기도할 때에 성령의 강한 충격을 체험한 후, 뛰쳐 나가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행 4:23-31).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강하게 받을수록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는 더욱 강하게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이후의 사도행전의 역사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4. 연쇄 고충격 방법의 적용 (Its Application)

이제까지 정립해온「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을 실제 목회사역에 적용함으로써 교회성장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은 누차에 걸쳐 언급하고 설명한대로 "말씀과 성령의 강한 영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더구나 21세기 여러가지로 다양화되고, 전문화된 산업사회에서 목회에 성공하려면, 이 훈련이 꼭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 방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선 이「말씀과 성령의 연쇄 고충격요법」의 훈련단계를 알 필요가 있다. 얼핏 보면, 성경에 나타난 이 방법의 단계들이 거의 없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데, 사실은 그 과정들을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과정들이 선명하게 존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구절 속에는 창조의 모든 과정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반드시 계획이 있고, 순서가 있으며, 그 일을 스케쥴에 맞추어 정확하게 진행시켜 나가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성령의 연쇄고충격 훈련의 단계」
    (Steps of High Chain-Impact Training)

본서의「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의 단계는 대략 여섯 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단계들은 성경에 일일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러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훈련시키시는 과정에는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밟으시기 때문이다. 훈련장소와 기간은 천차만별이다. 대부분 처음 얼마간은 짧은 시간의 고충격 훈련을 시킨 다음, 평소에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훈련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 부르실 때에는 대부분 전격적인 콜링(calling)이었다. 아브라함은 우상으로 충만한 갈대아 우루에서 전격적으로 불리움을 받아, 고향과 집을 버리고 무조건 갈대아 우루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땅으로 갔다(창 12:1-5). 그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계속해서 나그네 생활로 유목민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았다.
모세는 호렙산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전격적인 부르심을 따라(출 3:1) 직접 훈련을 받기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광야를 거쳐 모압땅 느보산 산상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의 생애를 마쳤다(신 32:49-50; 34:5-6).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 밀타작을 하다기 뜻밖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세 번씩이나 시험을 한 다음 따라 나서서(삿 6:32-40) 연속적으로 훈련한 300여명의 정예용사를 통하여 미디안군을 격파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삿 7:7). 사무엘은 쇠퇴해가는 엘리제단의 깜빡거리는 등불 밑에서 자다가 전격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명의 길을 나서서(삼상 3:1-14) 계속적으로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의 벡성 이스라엘을 영도했다. 초동 목동이었던 다윗도 목장에서 양을 치다가 전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왕으로 발탁되어 평생을 훈련과 사명에 살았다(삼상 16:11-13). 엘리사는 밭에서 소를 몰다가 불리움을 받았다(왕상 19:19-21).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에서 그물은 던지다가,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마 4:18-22), 3년동안 주님의 훈련을 받으며 남은 여생들을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전격적으로 주님에게 픽업되어(마 9:9), 주님을 따르면서 계속해서 훈련을 받으며 주의 사역에 참여했고, 주님의 생애와 사역을 세심히 살펴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사마리아 여자는 남의 눈을 피하여 수가성 우물가로 물길러 나갔다가 주님을 만났다(요 4:1-25). 삭개오는 주님께서 수많은 무리앞에서 설교하고 계실 때에,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 하여 보려고 뽕나무위에 올라갔다가 주님의 눈에 띄어 전격적으로 주님을 모시게 되었다(눅 19:1-10). 바울은 그 당시 대제사장의 특명을 받아 예수믿는 성도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상에서 전격적으로 주님께 픽업되어(pick up) 즉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행9:1-22).

  소명 (Calling)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그를 떠난 인간을 다시 찾아서 부르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소명(calling)에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알반 성도들에 대한 소명 이요, 다른 하나는 주의 종에 대한 소명이다. 물론,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다 주의 종이요, 거룩한 제사장이지만(벧전 2:9), 협의적인 의미에서는 그들중에 특별한 주의사역(성역)을 위해서 특별히 택하여 부르신 기름부은 종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가(성도) 되게 하실 경우에도 하나님은 순서를 따라 역사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다시 말하면, 구원(救援)에도 그 과정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 구원의 서정(序程)에 있어서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리에 혼동을 초래하게 된다. 조직신학적으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은 교파에 따라 약간씩 그 순서가 다르다. 개혁파의 교회(Reformed church)에서는 소명(calling or vocation)과, 중생(regeneration), 회심(conversion)과, 신앙(faith), 칭의(justification)와, 견인(perseverence)의 순으로 배열한다. 물론, 칭의와 견인 사이에 성화(sactification)를, 견인 후에 영화(glorification)을  부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원의 서정을 크게 나누어, 중생과 성화로 대별하기도 한다. 중생은 성령의 단회적인 사역을 통하여 완성되는 반면에 성화는 계속해서 반복적인 사역을 통해서 완성되어 간다. 물론 인간의 완전한 성화는 부활후 영화로운 몸을 입은 후에야 완성된다. 그래서,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성화를 위하여 반복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가 되게 하거나, 특별히 복음을 위하여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최초로 하시는 일이 곧 "소명"(召命)이다. 하나님께서 사명자의 고충격 훈련을 위하여 최초로 "소명"을 주신다. 다시 말하면, 먼저 부르신다는 뜻이다. 성경에 보면, 주의 사명을 위해서는 모두 "부르심"(소명)을 받는다.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루에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고(창 12:1), 모세도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야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출 3:1-4). 사무엘을 성전에서 잠을 자다가, 부르는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다(삼상 3:1-9). 기드온은 타작하다가(삿 6:11), 엘리사는 밭을 갈다가(왕상 19:19-21)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는 배에서 고기잡다가 부르심을 받았고(마 4:18-22),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르심을 받았다. 사마리아 여자는 우물가에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모두 모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첫 단계로 하나님께서는 "콜링"(calling)을 하신다. 본서에서 제시하는「말씀과 성령의 연쇄 고충격 요법」에서도 훈련을 위한 제1단계가 "소명"의 단계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처음으로 해야 할 작업이 그들을 잘 선택해서 부르는 일(소명)이다. 이 작업은 소그룹 운동에서도 제1단계로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인「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의 제2장 "소그룹 운동론"과 제3장 "제자 훈련론," 그리고 제5장 "다이나믹 제자훈련"을 참고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특히 제자훈련과 같은 소그룹 사역에 있어서 훈련대상들을 정하는 것부터가 대단히 중요하며, 이 첫 번째 단계의 성공 실패가 전체적인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면 (Confrontation/Encounter)

이 훈련의 두 번째 단계는 대면하시는(confront) 단계이다. 이 단계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여 만나주시기(meet) 때문에 인간의 편에서는 대분이 뜻밖의 사건으로 만나게 된다(encounter).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모두가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부르시고 만나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 오셔서 만나주시는데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을 하나님께서 찾아주시는 구체적인 사건이 곧 화육사건이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그의 현현이 주로 천사와 사람의 모습(疑人化)으로 나타나셨다(창 18:1, 22, 32; 19: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직접 나타나서 만나 주셨고(창 17:1), 모세를 찾아 오셔서 대면하셨다(신 34:10). 신약에 들어 와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화육되시어 직접 인간들을 찾아 오셔서 만나 주셨다. 제자들을 만나셨고(마 18:22), 군중들을 직접 만난서 강론도 하시고(4:25: 5:1), 세리와 창기등 죄인들을 직접 찾아서 만나 주셨다(마 9:10-12). 사마리아 여자와 우물가에서 만나서 아가페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시고(요 4:6_25) 삭개오의 집에 들어 가셔서 그의 집에 구원을 베푸시기도 하셨다(눅 19:1-10).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 자기의 종들을 부르신 다음에 꼭 만나주신다. 만나셔야 다음 단계인 대화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과 자기의 종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그들을 부르신 후에 반드시 만나 주신다. 목회자들도 비록 제자훈련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교인들까지도 일단 교회로 불러들였으면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라도 만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물론 대형교회는 부교역자들을 통하여 만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할 수만 있으면, 대중적으로 강단에서 만나는 것외에도 개인적으로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따뜻한 목회를 하는 방법중의 하나가 된다.
예수께서도 그 당시 모든 문화적 사정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수천명, 아니 수 만명의 무리들에게 설교시간에 만나셨지만 때로는 그 바쁘신 중에도 개인들을 따뜻하게 만나주신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현대교회는 교인들이 많은 메가쳐치나 메타쳐치에서는 아예 담임목사는 접촉할 수 없는 저 높이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형교회 목사라도 교인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목회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대화 (Dialogue/Conversation)

대면의 단계 다음으로는 대화(dialogue/conversation)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에, 그와 계속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가셨다. 물론 첫 대화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를 말씀하셨고, 다음으로 앞으로의 축복을 약속해주셨다. 그러므로 일단, 하나님의 사역에 입문하는 첫 면접시험은 마친 셈이 되고 앞으로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가시겠다는 암시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직접 대면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대변자 및 대행자가 되었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대화에 응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조용한 가운데서 전국의 비밀을 가르치시면서 대화하셨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주시고 사마리아 여자를 설복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가셨다. 처음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한 여인을 앞에 놓고 이해할 때까지 계속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가셨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부분중의 하나가 바로 이 대화의 단계이다. 제자훈련을 위하여 불러서(召集) 대면하는 교인들은 물론, 일반 교인들 앞에서, 아무리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시험하는 교인들을 앞에 놓고도 인내를 가지고 그들이 설득될 때까지 대화로 이끌어 나가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목회방식이라 하겠다. 대화로 풀리지 않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대화자가 되셨고, 보혜사 성령께서도 우리와 대화를 하시기 위해서 오신 상담자, 즉 카운셀러(Counselor)이시다. 특히 제자훈련을 계획했다면 이 부분에 대단한 비중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설복 (Persuation/Training)

설복(persuasion)의 단계는 대화를 통한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 이론적으로 설득시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순복시키는 것까지 포함한다. 후에 실례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모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회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누가? 왜 보냈느냐?고 이스라엘 백성이 물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도 했고, 자기는 자신이 없다고 회피하기도 했다(출 3:10-13).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며 자신의 의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기도 했다(삿 6장).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왜 모든일이 이스라엘에게 미쳤느냐고 처음부터 불평했다(삿 6:13). 하나님께서 가서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시니까, 무엇으로 구원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기와 자기의 집의 연약을 들어 반문하기도 했다(삿 6:14-15).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미디안 사람들을 한 사람 치듯 하리라고 하시며,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시면서 설득시키니까, 기드온은 확실히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면 말씀하신이가 하나님이시다면, 예물을 가지고 올 때까지 계시고 그 예물을 통하여 하나님이신 표징을 보여 달라고 제의했다. 예물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삿 6:16-24). 그리고도 믿지를 못해서 다시 하나님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질문을 무조건 전부 들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가 교인들이나 제자훈련생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는 것이다. 대화의 기법(skill)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고 심지어 시비(是非)의 대결(confrontation)에서도 상대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이해해야 그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 더구나 교인들과의 대화에서는 어떤 면에서 그들의 사정을 많이 들어줌으로써 해결이 용이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수납하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방법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것은 아니다.
기드온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셨는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기드온이 제시하는 방법대로 응해주신 것이다. 방법의 융통성(flexibility)이다. 기드온은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시는 것이 사실인지 알아 보려고 했다. 그 방법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기드온을 보내신다는 확신을 주시게 되었다(삿 6:36-40). 앞에서의 예물은 과연 기드온 자신이 만난 분이 하나님이신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고, 이번의 양털을 통한 시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였다.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완벽하게 설복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대화를 통하여 설복시키시는 단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셔서 끈질긴 대화를 통하여 사마리아 여인의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게 하셨고, 자기가 이 여인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심을 보여주심으로, 이 여인을 설복하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받아내신 것이다(요 4:25-30). 이와 같이 목회자는 대화를 통하여 교인들을 설복시킬 수 있는 능력(persuasive power)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명 (Mission)

이 훈련의 다섯번째 단계는, 설복시킨 다음 확실하고 불타는 사명감을 부여해주는 사명(mission)의 단계이다. 하나님께 설복된 사람들은 누구나 사명감에 불탔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말씀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하나님께 파송을 요청하였다(사 6:8-9). 모세도 처음에는 의심도 많아서 주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국 하나님께 설복당한 후는 사명감에 불탔던 사실을 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강한 고충격을 받아 땅에 엎드러진 순간,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를 듣고, "주여 뉘시오니이까"(행 9:4)하고 주님을 부르면서 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5)라고 자신이 누구이심을 알려주신 후(기드온에게서와 같이),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명을 암시하셨다(행 9:6). 그 이후에,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은 받고(고전 9:16-17),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의 사명을 받았음을 고백하였다(갈 2:8; 행 11:13; 행 22:2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시고 만나셔서 설득시킨 후에는 그들대로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여야 할 사명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부르신 다음에 항상 그들을 만나서 대화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천국의 진리와 세상의 윤리를 소상히 가르치심으로써 그들을 설복시키신 다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감을 고취시켜 주셨다. 심지어 천국을 위한 고자도 있다고 하시면서(마 19:12), 누구든지 주님을 따라오려면 처자와 권속과 전토등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투철한 사명감(使命感)을 일깨워 주시기도 하셨다(마 18:25; 눅 14:26).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감을 일깨워주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충격(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성령을 통한 대화로 그의 뜻을 이해하고, 설복되어 주를 위한 사명감에 불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교인들에게 자기에게도 없는 사명감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받아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고 광야를 지나, 모압 땅에서 자기의 사명을 마치고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써 사명감을 일깨워주고 인계해주었다(신 34:9). 엘리야는 자기가 수행한 사명을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과 함께 인계해주었다(왕하 2:8-11).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철저히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사역을 분담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고취시켜야 목회자의 목회가 수월하며 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파송 (Sending)

교회성장을 위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훈련」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가 "파송"(Sending)의 단계이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대면하여 대화로 설복시키시고 사명감을 일깨워 주신 후에, 파송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수많은 훈련(training)과 시험(test)을 거쳐 설득시키신 다음에 사명감을 일깨워 주신 후, 애급의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내라는 사명을 주셨다(출 3:10;4:12). 물론, 모세는 유난히도 하나님께 대하여 이론도, 질문도, 이유도 많았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내느냐고 강력한 항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설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애굽으로 파송하셨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시고 항상 대면하시는 가운데, 대화를 통하여 그들을 설복시키셨으며, 그들이 사명감으로 확신에 차있을 때에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내보내셨다.
목회자들은 이와 같이 교인들을 잘 선발하여 부른 다음에, 자주 대면하는 훈련을 통하여 그들을 설복시킨 후, 사명감을 갖도록 해서, 전도할 수 있도록 파송해야 한다. 이와 같은 여섯 단계를 통하여 교인들을 잘 훈련하여 평신도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평신도의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교회가 성장하게 되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교회에서 평신도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교회는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이 없는 교회이다. 역으로 비젼이 없기 때문에 평신도들에 대한 훈련과 사역계획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21세기 현대교회는 이와 같은 교회성장전략을 백분 활용해야 할 것이다.

(2)「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훈련」의 실례

성서에는「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훈련」의 실례가 얼마든지 있다. 앞에서 여러 사람들의 예를 들어서 설명했지만, 성경에는 이루 헤라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실례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필자가 본서에서 제시한 이 "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이 지극히 성서적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말씀과 성령의 강한 영향"이라고 하는 것도 좋겠으나, 21세기 현대교회의 영적 불감증 현상을 감안해서, 이를 치료하고 강력한 교회 개혁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고강도(高强度)의 "충격요법"이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본서의 부제(subtitle)로 붙이게 된 것이다. 이제 지면의 한정으로, 성경속에 나타난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 요법"(The High Chain-Impact Method Training)의 훈련단계를 몇몇 사람들의 실례를 들어서 설명하기로 한다.

1) 모세의 경우 (The Case of Moses)

모세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사명을 받을 때까지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고충격 훈련을 받았고(광야의 고충격 훈련),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공식적인 부르심을 받은 후에, 애굽의 바로왕이 거하는 궁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적을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고충격을 받았다(왕궁의 고충격 훈련). 구약성서에 보면 이러한 고충격 훈련이 대단히 많이 나타나 있지만, 본서에서는 특별히 강력한 고충격 요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시는 사건과 인물들 중에 몇 사람만 선정해서 다루고자 한다. 모세의 경우에는 그 생애를 3단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첫 단계는 강물에서  건지움을 받은 후의 바로의 왕궁의 생활이었고(40년), 둘째 단계는 애굽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이드로의 양을 치던 미디안 광야의 생활이었고(40년), 셋째 단계는 다시 애굽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광야로 인도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받으며 가나안을 향하며 진행하던 광야의 생활이었다(40년). 모세의 3단계의 생애중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제3단계이다.
물론, 제1단계와 제2단계도 성경을 상고해보면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에 의해서 믿음으로 연단을 받으며 성장했지만(히 11:23-24), 제3단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명(calling)을 받고 하나님의 설득에 의하여, 자의적인 믿음의 결단을 내려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믿음으로 유월절 피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믿음으로 저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히 11:24-29)라고 해서, 모세가 하나님의 연단을 거쳐서 자의적인 믿음의 결단을 했고, 자기백성을 위하여 헌신적인 사명을 다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모세가 이와 같은 믿음의 결단으로 사명을 수행하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얼핏 우리 눈에 안보이는 것 같지만,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세가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계속해서「말씀과 성령의 고충격 요법」을 사용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도 인간인고로 하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서 바로앞에 섰다가도 다시 연약해지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세를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십 수가지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하여 계속하여 고충격을 가하심으로, 결국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낼 수 있게 되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계속해서 하나님께 고하면서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을 받는 모습을 단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제1단계: 소명 (Calling)

모세는 전술한 바와같이 바로의 왕궁에서 40년, 이드로의 집에서 양을 치며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의 생활을 마치고 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명(calling)을 직접적으로 받았다(출 3:1-5). 출애굽기 3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신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처음으로 부르신 소명(召命)이었다. 출애굽기 3-4장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상당히 주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받을 훈련의 단계중 제1단계 임을 말해준다. 이제 초보의 단계임을 암시해준다.

제2단계: 대면 (Meeting/Emcounter)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제2단계로 하나님과 대면하게(face to face) 된다. 출애굽기 3장 4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보려고 떨기나무 불꽃이 타는 곳으로 돌이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를 불러 만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다(3:6). 모세는 이 후에 누구보다도 가까히 하나님을 대면하며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대면"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face to face)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 이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고,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face to face) 아시던자요, 그들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신자라고 하였다(신 34:9-12).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나서 대면하시는 과정을 거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제3단계: 대화 (Dialogue/Conversation)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직접 대화(dialogue)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특히 카운셀링의 핵심부분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발에서 신은 벗으라고 하셨는데, 이는 대화의 길을 트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하여, 구별된 거룩한 땅에(3:5) 서서, 하나님과 대화를 위해서는 신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대화의 주제를 먼저 일러주신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구원해주시겠다는 것과, 다음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엄청난 대화의 내용인데, 모세는 이 대화에 얼핏 응락하지를 못한다. 대화의 주제도 좋고 그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도 좋지만, 문제는 하필이면 그 사명을 위하여, 도망나온 모세를 애굽의 바로 앞에 보내시겠다는 것이다.
모세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들어 하나님께 항변을 한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하나님께서 시도한 대화가 첫번째 벽에 부딛친 것이다. 목회자들도 교인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중에 이와 같이 자신의 부족하다는 변으로 빙자해서 자기 고집을 부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의 대화의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국면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 관문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신뢰(信賴)문제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 우선의 문제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아무리 대화를 계속해도 상호간의 불신이 도사리고 있는한 그 대화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믿어주지 않는데는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서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 모세를 보내신 사실을 믿게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모세를 보낸 증거라고 하셨다.
전술한 대화의 첫 관문이란, 우선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다. 역시 모세는 가장 먼저 걱정되는 것이,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가서 너를 보낸 자가 누구냐고 물을 때에, 어떻게 대답하겠느냐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 주며, 그가 도태체 누구라고 대답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자신을 모세에게 정확히 말씀해주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I AM WHO I AM)니라"(출 3:14)라고 말씀하셨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는 대화(신앙교육)가 필요하다. 이것이 첫 관문이다.
그리고 둘째의 관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어 애굽에서 구원하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게 하시리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과정도 만만치 않고 여러가지 이적으로 애굽의 바로를 친 후에야 바로가 보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출 3:19-20), 모세는 아직도 제2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반문한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여 말을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고 할터인데, 어찌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끈질기게 질문하고 있는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하나의 이론적인 대화가 아니라, 이제는 몇가지 이적을 직접 행하게 하는 행동대화(action dialogue)로 이끌어 나가심으로 확실하게 표징과 증거를 주심으로써 모세와의 대화를 마감하시게 된다(출 4:2-10).

제4단계: 설복 (Persuasion/Training)

둘째 관문인 이스라엘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모세를 설득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제부터는 언어대화(language commuication)가 아닌 행동대화(action communication)를 시도하시게 된다. 이제 말로만 해서는 믿지 못하는 내용이라,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직접 이적들(miracles)을 행할 능력을 주시고 시험해서 설복시키시려고 하신다. 그 첫 번째의 이적이 모세의 손에 들려져 있는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로 변하는 신령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이적이다(출 4:2-4). 이 이적(異蹟)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의 하나님(아브라한, 이삭, 야곱)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셨다. 두번째 이적은,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내면 문둥병이 발했가, 다시 넣었다 꺼내면 여상해지는 이적으로, 하나님께서 처음 이적의 표징은 받지 아니해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고 하시면서 이 두 이적까지 믿지 아니하고 네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하수에서 물을 취하여 육지에 부으면 피가 되는 이적을 행하게 함으로써 모세에 대한 설득작업을 계속하셨다(출 4:4-9). 이 설복단계는 일명 훈련단계라고 할 수있다. 직접 체험하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직접 이적을 체험하게 하고, 이적들을 직접 행할 수 있는 훈련을 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모세는 아직도 자기의 입의 둔함을 들어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누가 입을 지었고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되게 하였느냐고 말씀하시며 모세의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할 때에, 모세는 여전히 설복되지 않고 보낼만 자를 보내시라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노를 발하시고, 하는 수 없이 그의 형 아론과 함께하도록 설득을 시켰다(출 4:10-15). 이토록 끈질기에 거부하든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고 모든 이적과 능력을 다 보여주시면서 결국은 모세를 설복시키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모세를 훈련시키시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인내를 하시고 계신가를 알 수 있다.
목회자는 교인들이나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에, 이와 같은 인내를 통하여 결국은 설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교인들을 설복시키지 못하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고 오히려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교인들을 설복시키려면, 훈련의 방법이 필요한데, 첫째로, 성서적이고 합당한 대화를 지혜롭게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대편의 말을 처음부터 끝가지 성의껏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교훈과 충고만 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대화방법은 전혀 효력이 없으며, 설복이 아니라 어지로 굴복(屈腹)시키려는 것으로 특히 현대교회에서는 피해야 할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말을 하나 하나 들어가시면서 모세와의 대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설득력(說得力)있는 대화로 풀어나가셨다. 바로 이것이 언어대화의 기술(language communication skill)이다.
다음으로는, 행동언어(action language)로 확실한 설득력을 구사해야 한다. 실례들(examples)을 들어서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은 모세와 같이 무엇이든 보아야만 믿으려하기 때문이다. 대화의 내용이 하나의 허구(虛構)나 환상(幻像)에 멎어지는 것이라면 설득력이 없다. 또 말로만 큰 소리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에게 실지로 이적도 보여주시고 직접 체험하게도 하시면서 설복작업(說腹作業)을 진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하고, 그 진실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진실(眞實)은 생명과 같다. 말로 진실을 말하고, 행동으로 그 진실을 보여줄 때에 교인들을 설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설복의 단계가 훈련생을 지도하는 작업의 중요한 고비이다.

제5단계: 사명 (Mission)

교회성장을 위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  법」을 훈련하는데 있어서 실제 훈련에는 마지막 단계로서, 파송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단계로서 실제적인 훈련은 사실상 마치게 되는 것이다. 이 제5단계는 지금까지의 훈련의 내용을 정신적으로 집중시키는 단계로 그 사명감(the sense of mission)을 고취시키는 단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강도높게 훈련시키고나서 그 훈련의 영향력을 모세의 마음의 한 지점(the only one point of Moses' heart)에로 초점을 집중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다. 여태까지 교육하고 훈련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들"이 한 초점에 모으지를 못하고 흩트러져 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그 말씀들"을 한점으로 모아서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작업이다. 그래서 그에게 확실한 "사명감"(使命感)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그 많은 말씀과 이적을 체험하고도(출 4:2-9),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붙쳐주시면서 아론을 그의 대변자로 세우시고 모세로 하여금 아론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하시여 마음의 확실한 사명감을 갖도록 하셨다(출 4:10-17).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끈질긴 설복으로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출 4:18). 이 부분을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강한 믿음의 의지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히 11:24-26)라고 고백함으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보여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출 3:7-10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내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특히 3:10에 보면,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모세에게 사명을 말씀해주셨다. 
목회자는 자신이 훈련한 교인들에게 이러한 투철한 사명감을 갖도록 그동안 훈련한 말씀을 집중시켜서 결단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내벼려두면 평범한 성경공부를 한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게 된다. 이는 마치 부흥강사나 전도자가 교인들을 한 시간 혹은 몇시간 동안 그들을 말씀으로 설복시킨 후에 신앙의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훈련의 마지막 결론으로 사명을 위한 결단의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방법의 원리인데, 각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현실적으로 잘 적용시키도록 지혜롭게 하여야 한다.

제6단계: 파송 (Sending)

교회성장을 위한 교인들의「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의 마지막 단계는 "파송"(Sending)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고충격훈련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사명을 주어서 파송하는 단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이나 종들을 부르신 후에 이와 같이 여러 단계를 통하여 훈련하시고 마지막으로 파송 명령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강도높은 훈련을 시키신 다음에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라고 사명을 주어 애굽 땅으로 파송하셨다. 출애굽기 3장 9절에 보면,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고 하셨고, 3장 14절에 보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도다"라고 하나님께서 파송명령을 내리신 것을 볼 수 있다. 또 4장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훈련하신 다음에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파송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calling) 대면하시고(meeting face to face), 설득력있는 대화를 통하여(conversation) 설복하시어 훈련하신 다음에(persuation/training), 투철한 사명감을 일깨워(the sense of commission) 파송하신(sending) 사실을 알 수 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잘 선정하여 그들을 이와 같이 단계적으로 훈련한 다음에, 교회와 생활현장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할 수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훈련을 시키지 않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훈련시키고도 사명감을 일으키지 못하고, 더구나 사역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게 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2)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The Case of Samaritan Woman)

신약성서에도 예수님께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을 사용하신 사실들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사도 바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부르심 조차도 없는 것 같은 상태에서, 수가성 우물로 물을 길러 같다가 우연히 예수님과 조우(遭遇, encounter)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 요법"중에 첫 단계인 주님의 부르심(소명, calling)의 단계가 생략된 것인데, 사실, 성경말씀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예수님쎄서 하시는 일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제1단계의 부르심이 있었든 것이다.

제1단계: 소명 (Calling/Vocation)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예정하신 스케쥴에 따라 운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한번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인도했는데,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만 듣고 갔을 뿐, 예수님을 만난다는 예감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알았으나,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보자, 하시는 말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시고, 이에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이어서 예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하시며 대답하신 것을 보면, 사전에 빌립을 통해서 나다나엘을 만나시려는 계획이 있었고, 결국 빌립을 통하여 부르신 것이라는 사실을 보아 "소명"의 단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빌립은 주님의 사전 부르심에 감동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필자의 체험으로 보아도, "직접 음성으로 부르시는 것보다 여러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특히 하나님께서 부르셨는지 자신도 모르다가 어떠한 은혜의 사건이나, 신학교를 가게 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게 될 때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것을 알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내심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생에 관한 내적소명(inner call)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음성과 같은 외적인 수단을 통하여 듣지 못했을 때를 지칭하는 뜻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에 사마리아를 지나시기로 예정코스를 잡으시고, 올라가시다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겠다는 생각을 반드시 하셨으리라고 믿는다. 결국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리에 있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오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물론 본문에는 피곤하셔서 쉬시는 중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요 4:6),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사연, 심지어 가장 깊은 비밀까지도 익히 아시고 계신 것을 보아(요 4:18), 사전에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의 하시는 일에 무계획적이 아니라 세밀한 것 까지 그의 계획속에서 이루신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에,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공식적인 초청(소명)은 없었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시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 여인을 부르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사마리아 여자 본인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먼저 찾아와 주셔서 자기를 불러,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에 말할 수 없이 감격했던 것이다.

제2단계: 대면: (Confrontation/Encounter)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제2단계는, 문자 그대로 "대면" 혹은 조우(encounter)의 경우이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때는 소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여자에게 있어서는, 물을 길러 수가성 우물로 나갔다가 우연히 주님을 만나게 된 조우(encounter)의 경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우도 주님의 스케쥴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제는 주님의 계획대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면이라는 둘째 단계를 밟게 된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는 중에 피곤하셔서 우물가에서 쉬시는 중에 사마리아 여자가 물길러 나오는 것을 보시고 서슴없이 만나시는(meeting) 것이다.
이 만남은 과연 무슨 만남인가?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의 여인의 만남(대면)은 하나의 혁명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예수님은 유대인이요, 사라리아 여인은 그 당시 상종할 수 없이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구약시대의 북조 이스라엘)의 여자였기 때문이다(요 4:9). 둘째로, 그 당시 여자는 면박을 얼굴에 써야할 정도로 남녀가 유별했던 시대인데, 그것도 낯선 유대청년을 다른 데도 아닌 우물가에서 단둘이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풍속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영적인 의미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그것도 여섯 남편이나 섬긴 경험이 있는 사마리아 여인, 죄인중의 죄인인 인간이 의인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혁명중의 혁명이 아닐 수 없는 사건이다. 더구나 옛날에도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와 주셔서 죄인을 만나주시는 대면의 단계이다.

제3단계: 대화 (Dialogue/Conversation)

사마리아 여자에게 있어서 제자훈련(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훈련)의 제3단계는 대화(Conversation)의 단계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를 대면하시는 즉시, 그 여자와의 대화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의 첫 대화는 "물을 좀 달라"시는 서두였다(요 4:7). 이렇게 시작하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속에는 선명한 구속론이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는 낯선 유대청년으로서의 어설픈 대화로 시작하게 되었으나, 그 대화의 분위기는 심각한 인생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날카로운 수술칼로서의 메스를 가하는 것과 같았고, 이처럼 심각하면서도 흩으러짐 없이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가시는 주님의 대화의 화술에 이 사마리아 여인은 정신을 잃고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사마리아 여자도 당당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질문공세를 펴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요 4:9) 이와 같이 당당하게 당신이 누구길래 서슴치 않고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말투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속을 한 발작씩 파고 들어가시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물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을 뿐만 아니라 조상 야곱과 그 아들들과 짐승들이 다 먹었는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예수님께 바짝 다가섰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생수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말씀해주시면서, 이 생수를 마시는 자마다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시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이런 물을 달라고 더욱 바짝 다가서는 것이다. 아직도 생수에 대한 육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예수님에 대하여 확실히 모르고 있는 상태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도 말씀의 뜻을 잘 모르고 있는 이 답답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도록 믿어지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가고 계신다.
이러한 물을 주는데는 조건이 있다고 하시면서 남편을 불러 오라는 것이다. 이 여인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리신 것이다. 아찔하는 느낌이 오면서도 자기의 사생활문제를 순간적으로 터치하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예감이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나의 사생활을 알고 있으실까? 자기의 마음을 압박해오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 여인은 반사적으로 남편이 없다고 부정하고 만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 4:17). 이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은 옳으나, 사실 네게는 다섯 남편이있었다고 이 여인의 과거를 거침없이 들쳐내시는 것이다. 이에 사마리아 여인은 어떠한 영적인 위압감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면서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하며 어느새 자기의 사생활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선지자, 즉 자기의 신앙적인 카운셀러(Counselor)로 받아드리게 된 것이다. 저가 누구시길래 어떻게 자기의 과거를 정확하게 알고 계실까? 이는 선지자가 아니고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신앙생활 중에, 예배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된다. 조상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요 4:19-20).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으로 드리는 예배는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때가 왔는데 바로 이 때이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예배의 정의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요 4:21-23). 이제 자기의 인간적인 사생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까지 정확하게 해결해주시는 분인 것을 보니 과연 범상한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지막의 문제를 가지고 질문하게 된다. 이 여인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그로라" 하고 바로 자기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에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 는 한 유대청년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 그분을 점차 자기의 사생활까지 의논할 카운셀러(Counselor)로, 다음으로 자기의 신앙문제를 상담할 선지자(Prophet)로, 그리고 결국은 자기의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메시야(Messiah), 곧 그리스도로 받아드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아가페의 대화"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화를 통하여 사마리아 여인을 설득시키게 되었다.

제4단계: 설복 (Persuasion/Training)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를 제4단계인 "설복"(persuasion)의 단계에서, 역시 대화로써 완전히 변화시키시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를 설복시키기 위하여 이 답답한 여인을 앞에 놓고 끈질기게 대화를 이어 나아가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보던 사마리아 여자를 설득시키시는 예수님의 대화의 기술(dialogue skill)은 목회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다. 유대의 한 낯선 청년으로 알고 대화에 응했던 사마리아 여자를 예수께서는 메시야로 알아보도록 그래서 완전히 설복되도록 대화로 이끌어 나가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그리스도와의  대화에서 예수 그리도를 선지자로 모시도록 설득되었고(요 4:19), 다시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모시도록 설복되고만 것이다(요 4:29).

제5단계: 사명 (Mission)

예수님을 선지자요, 그리스도로 받아드리도록 설복당한 사마리아 여자는 죄인 괴수로서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죄의 문제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 은혜에 너무나 감격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자기와 같이 세상 죄악의 그늘에서 숨어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자기가 만나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명감에 불타기 시작하였다. 이 억제할 수 없는 사명감에 마음이 뜨거워 견딜수 없으므로 자기가 사는 동리로 뛰쳐 들어가게 된다(요 4:25-26). 예수께서 "내가 그로라"(요 4:26) 하시는 말씀에 이 여인은 완전히 말할 수 없는 기쁨에 도취되었고, 이 은혜로우신 그리스도를 나가서 전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솟구친 것이다. 요한복음 4장 28절에 보면 주님의 은혜에 감격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에 도취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전도하러 동네로 들어간 것"을 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제6단계: 파송 (Sending)

예수그리스도를 뜻밖에 만나서 자기의 인생문제를 해결받고 얻은 영적인 기쁨에 넘치고 사명감에 불타서 자기의 생활수단인 물동이도 내던지고 수가성 동리로 뛰어 들어가서 온 동리를 다니며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라고 외친 것이다. 예수께서 그 마음속에 사명감이 불타서 뛰쳐 나가도록 강도높게 훈련하신 결과이다. 본문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요 43:28)라고 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훈련받고 동리로 파송(sending)된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자의 제자훈련은 가장 짧은 기록을 세운 것 같다. 정오에 우물가에서 시작된 단 한 사람의 사마리아 여자를  상대로 단 하루, 그것도 단 몇시간(1-2 시간?)만에 완벽한 제자훈련으로 성공한 케이스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육시쯤이면 우리의 시간으로 정오가 되는데, 이 때부터 단 몇 시간안에 완벽한 제자훈련을 시키셨다는 사실은 대단히 고무적인 장면이다.

(3)「다이나믹 제자훈련」방법의 적용
    (Application of the 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이제까지 21세기 제3, 제4물결시대의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으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the high-chain impact by the words and the Holy Spirit)을 다루어 왔다. 이 요법에는 크게 세 가지의 강조점이 주요소(主要素)를 이루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반드시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떠난 어떠한 역사나 운동도 수납할 수 없다는 의지이다.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liberalistic theologians)의 대부분이 이 성경말씀에 대한 절  대  적 권위를 저울질 하다가 기독교에 큰 오류를 범해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강조해서는 아니된다. 심지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나 그 속성등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는 진리를 기초로 할 때에 오류가 없게 될 것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말씀까지도 초월한 하나님을 논했다가 하나님을 그리스도안에서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인간에게 돌아올 수 없이 저 멀리로 가버리신 타자(他者)로 만들었고, 슈라엘마허(Shleiermacher)와 같은 주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롯한 모든 것을 종교적 경험에 국한시킴으로써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한 성령의 사역에만 치우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말씀이 말하는 하나님(God the Father), 그 말씀이 말하는 그리스도(God the Son) 그 말씀이 말하는 성령(God the Holy Spirit) 등의 삼위일체론으로 완벽한 신학적인 정립을 전제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주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을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목회사역도, 교회성장운동도 하나님의 말씀에(물론, 바르트가 말하는 말씀의 신학의 개념과는 다르다) 기초해서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사역에서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다.

1) 말씀을 통한 성령의 강한 영향(충격)

본서의「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도 가장 힘있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말씀에 근거해야(on the words) 하고, 말씀에 의해서(by the words), 말씀의 훈련(of the words)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하지 않는 훈련이나 운동은 전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단들이나 이설적인 운동들이 모두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이탈해서 어느 한 가지를 강조하고 주장하다가 오류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단이 아닐지라도 말씀보다 어느 다른 것들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에 오류에 빠지든가,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혹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나 이단으로 오해를 받아온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거나 말씀보다 다른 어떤 것을 강조하면 실수하기 쉽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줄 안다. 필자는 신학교에서나 목회자 세미나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중의 하나가 곧,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떠나서는 절대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무시한채 성령운동을 하다보면, 주정주의에 빠져서 신비주의로 빗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역사를 유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말씀만 하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신비주의로만 돌리게 되면, 역으로 주지주의로 빠져서 은혜없는 무미건조한 교리만 붙들고 있다가 생명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게 된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찬양하며 함께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만이 우리들의 영혼과 생활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활기차게 움직이고 승승장구하며 활력있게 성장하려면, 교회내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을 자유롭게 풀어 놓음으로써(to freely release the works of the Holy Spirit) 교회가 잠자거나 기력이 없어서 침체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교회(vibrant church)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움직이는 교회로 만들려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도록 성령의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성령의 역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역사하는 것이라면, 사실상 그 역사는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필자가 개발한 교회성장을 위한「말씀과 성령의 연쇄고충격 요법」의 훈련방법으로 개발한「다이나믹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은 그 진행부터가 말씀에 충실하면서 다이나믹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였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는 순서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세미나에서 따로 훈련을 하게 되는데, 교재는 필자의 저서인「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제5장에 실려 있고, 성경공부 교재는 별도로 되어 있다.
필자가 본서에서도 강조한 바와같이 21세기의「제3물결」과「제4물결」시대를 위한 목회전략은 전근대적인 방법으로는 힘이 들것이라고 언급한바 있다. 현대와 미래목회는 지식의 힘만 가지고도 힘이 들것이며,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며 정적인 요소만 가지고도 힘이 든 시대라는 것이다. 좀 더 교회성장학적으로 말하자면, 오순절운동이나 카리스마운동, 그리고 단순한 복음주의 운동만으로는 현재 몰려오는 제3, 제4물결 시대를 능숙하게 타고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21세기 미래교회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과 성령의 강한 영력을 소유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한 성령의 강한 영향력(impact)인 성령의 고충격파(high impact wave)를 구사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에 충만한 목회자, 성령의 충만한 목회자가 되어, 교인들을 다이나믹하게 훈련시켜서 21세기의 교회를 능력있게 리드하며, 침체된 한국교회에 강력한 활력을 불어 넣음으로써 지속적인 성장에로 유도되기를 바란다.

2) 연쇄 고충격 요법

말씀과 성령의 고충격은 물론, 이 고충격 요법도 단회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과 감동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받아 충만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생을 위한 구속적인 말씀은 이미 단회적으로 끝나서, 완성된 상태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시에, 그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를 성화시키고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중생을 위한 성령의 말씀사역은 단회적으로 완성되지만, 성도들의 성화나 사역을 위한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실시하시고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논할 때에,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중생시키시는 성령(Regenerating Spirit), 둘째로 성화시키시는 성령(Sanctifying Spirit), 셋째로, 은사를 주시는 성령(Gift-giving Spirit)이다. 이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마지막 두 가지 성령의 사역이다. 주의 종들이라 하면 거의 다 중생의 체험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의 두 가지의 성령의 사역은 그 정도가 다양하며,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화를 위한 성령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실제로 사역을 위한 능력의 성령에는 약함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역을 위한 은사에 강하여 능력의 성령으로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성화의 성령에는 약하여 행위에 실수를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들은 성화를 위한 성령의 충만함으로 자신의 신앙인격이 잘 다듬어져서 성화되어 나아가야 하지만, 아울러 은사의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목회사역에 능력있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약할 때에 목회자들은 지치며 실망하기 쉽다.
둘째로, 성령을 충만히 받으려면, 확신과 능력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은 감동하시며, 역사하시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절대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목회자는 이와 같은 성령의 능력을 계속해서 충만케 받아서 항상 영력을 유지해야 한다. 성령은 하나의 힘, 혹은 능력으로도 비유하기 때문에 경건생활을 계속하지 못할 경우에는 소멸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셋째로, 하나님 앞에 힘을 다하여 합심해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대로, 오순절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들이 놓인 후, 동료들과 함께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높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은 지축을 흔들면서 강하게 임했다(행 4:31).
성경은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 4:30),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을 충만히 받으라"(엡 5:18)고 말한다. 그러므로 항상 축전지(蓄電池)에 전기를 충전을 하듯, 말씀과 기도와 경건한 생활을 통하여, 항상 성령을 충만하게 채우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한 번은 필자의 자동차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까 축전지(battery)에 전기가 다 소모된 것이다. 약간은 있으니까, 알람까지는 울리더니 그것 마져 떨어지니까 알람도 작동을 멈추고 말았다.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안타까와 하고 불평하고, 어린아이들 같이 앙앙하는 것도 약간의 성령의 잔력(殘力)이 남아 있을 때이지, 그것 마져 소멸되면, 소리도 나지 않는 법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은 기력이 없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열렬한 기도를 통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교인들에게 강한 영향력(고충격)을 줄수 있을 것이다. 현대는 예전과 같지 않아서, 교인들이 성령의 체험도 많이 하고, 성경공부도 많이 해서 말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목회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면도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들의 지식과 영력을 훨씬 능가하는 영력이 있어야 한다. 이 말씀과 성령의 강한 고충격을 받아서 사용할 때에 모세와 같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 앞에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은 이시요...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 4:24-32). 하며 사도들이 빌기를 다하매 모인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행 4:31).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