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벧전2:18-25,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은 ...

수호천사1 2013. 4. 1. 12:25

벧전2:18-25,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은 

 

계속해서 18절을 보겠습니다.

1절에 '사환들아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여기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나요? 주인과 사환, 이 사환은 '오이케타이'인데 '오이케테스'의 복수 호격입니다. 이단어의 의미는 '집에 거주하다'의 동사 '오이케오'에서 유래된 명사로 '집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종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둘로스도 있는데 이 단어와는 구별이 되는 '가정에 속한 하인'(마24:45, 눅16:13,행10:17,롬14:4),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주인보다는 주로 하인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하인들에게 말씀하기를 주인들에게 두려워 함으로 순종하라 했습니다. '두려워 함으로'포보'의 원형'포보스'는 하나님의 대해서 두려워 하는것처럼, 17절의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왜그럴까요, 어근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을 두려워 하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뒤에 계시는 하나님이 권위를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윤리는 근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착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주인은 순종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까다로운 자들' '스콜리오이스'의 원형'스콜리오스'는 '길이 구부러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비유로 쓰면 '비뚤어진''패역한''공정치 못한''심술궂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다시 생각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 정직성,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약자를 무인격적으로 대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주인이라도 하인된 자들은 그 주인에게 순종하라 했습니다. 왜그럴까요, 이런 선한 성품으로 세상에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하인들에게만 전하는 걸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잘해 주고 친하게 지내고, 이런 사람들에게 내가 잘해 주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고 불이익을 주는 사람, 혹은 직장에 상사라면 그래도 그의 말에 즐거운 맘으로 순종하고 잘 대해 줄수 있을까요? 사회말고 교회안에서는 어떨까요? 내 맘에 안들면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뒤돌아서면 비판하고 험담하고 헐뜯고, 이러면 그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적하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런 자들에게도 순종하라, 잘해주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나와 다른 사람,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 이들에게도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친절하게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의 모델이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그는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번 있었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를 살려 주는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통해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천대받는 계층을 찾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천대하는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제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찔림이 온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바울이 권면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엡6:5-6).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6:1)

 

우리는 교회안에서는 선한 성도인데 사회에서는 좋은 시민이 아닌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교회안에서도 사회에서도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인 동시에 이땅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 가는 존재로서 이웃에게 선한 행실을 보여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그것이 곧 전도의 일이기도 합니다.

 

19절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부당하게''아디코스'는 부정 불변사로 '아'와 '공의'란 의미의 명사 '디케'의 합성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 '공의가 상실된' 즉 '불 공정하게''부당하게'라는 의미의 형용사입니다. 또한 '고난을 받아도'' 파스콘'은 '고통, 변화, 시련'따위를 '받다, 당하다, 경험하다'의 동사 '파스코'의 현재 분사형입니다. 이 단어는 부당하게 고난 당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진행형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한 두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참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속에서 불이나고 소리를 지르고 항의를 합니다. 특히 오늘 날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디아 쉬네이데신 데우'는 '하나님을 향한 의식을 통해서''하나님을 의식해서'하나님을 잊지 않으므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고통 받는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식, 부당하게 당하는 고통의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는 의식, 심판자 하나님이 나의 아픔을 신원해 주신다는 의식이 있다면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하고 순종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참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십니다.

 

고난중에 참으면 '아름답다''카리스'는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뭘까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 즉 하나님께 칭찬을 받게 된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칭찬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면' 이 단어 속에 하나님이 갚아 주실것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운 사람 미워하고 이쁜 사람 이뻐하면 하나님으로부터는 보상이나 칭찬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항상 나는 주의 노예이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주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견딜수 있고 참을 수 있습니다. 왜그럴까요? 주님께서 큰 죄를 범해서 당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절은 지속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잘못하고 매 맞고 그리고 나 매 맞고 참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받는 고난은 두가지로 볼수 있는데 하나는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이고 하나는 말씀으로 살려고 받는 고난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지키려고 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있지만 죄로 인한 것은 깨닫고 돌이키면 사는 길이지만 돌이키지 않으면 멸망의 길입니다. 주님은 '선'즉 말씀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 수난은 하나님의 갚아 주시는 상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1절에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말씀을 따라 행하는 고난의 감수는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감수해야 할 과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빛가운데로 이끄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는 사명을 주셨으므로 말씀을 따라 행하는 일에 있어 애매하게 당하는 고통은 견딤으로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본을 보이셨으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취' 흔적을 남겨 놓았다고 하십니다. 그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 고난의 길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던지, 성령 충만하지 않던지 둘중에 하나일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것, 믿음이 없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를 끊임없이 하면 성령 충만하면 돌에 맞아 죽으면서 분노하거나 저주하거나 생명을 보존하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스데반이 좋은 모델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11)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4-13),

 

22절에서 주님은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절에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범치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린 것, 말씀이 없는 상태. 불법, 등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또 한 궤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속임도 사기도 없고 궤휼도 없고 거짓말도 아니셨다 하십니다. 주님은 아무 죄없이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또한 모욕앞에서 입을 다무시고  고통을 받으시면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즉 협박하지 않으시고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시고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무엇을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10:30),

 

24절입니다. "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은 사53: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이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실제로 눈으로 목도한 사람입니다. 나의 죄, 우리의 죄를 위해 그모진 고통을 받으신 주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값없이 받았다고 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값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질병도 상처도 허물도 다 치유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무엇으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리고  입으로 시인할 때, 우리의 고통은 치유되어지고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죄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는 만지지도 말아야 하고 마음에 품지도 말아야 합니다. 죄가 눈앞에 보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눈 앞에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나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 생각은 그냥 생각으로 끝날 수 있지만 입으로 선포하는 것, 그것은 힘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25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길을 잃었더니''플라노메노이'는 '잘못 인도하다''속이다''기만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플라나오' 수동태 현재 분사로서 '기만을 당하고 있는' 그런 의미입니다. 성도가 되기 전에 속이고 잘못된 길로 인도 했던 자들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에게 이끌려 길을 잃어 버린 인간들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 것입니다.(벧전2:10),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인도자가 사탄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목자가 바뀐 것입니다.

 

시23편에는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감독되신''에피스코폰'은 '위에서 세밀하게 주시하는 자''감찰하는 사람'의 의미가 있어 목자는 감독의 기능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로 돌이켰으니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위험에서 건지시고 지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7:17),

 

우리는 고난 받는 것을 무서워 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죄짓는 것은 무서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작은 죄를 짓는 것보다, 큰 고난을 선택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옮기는 글) 우리는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오직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에 귀울여야 합니다. 가라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야 합니다. 나의 주권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이 사회의 법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질서를 지키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또한 말씀의 경계를 넘어서면 안됩니다. 생명을 걸고 지켜야 우리는 천당을 보장 받습니다.

마7: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말씀 위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하늘산소..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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