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서론
본서의 언어는 평범하고, 불필요하게 반복되어 평범한 산문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욱이 학개의 신학은 이스라엘을 위해 크게 공헌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비평 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젤린'(Sellin)은 학개서의 내용과 그 시대를 평가하여 '미숙한 물질주의' (crude materialism)라고 하였다. 또 '핸슨'(Hanson)은 사회학적 개념을 도입하여 본서를 연구하였는데, 그는 학개를 '환상적 집단'(visionary group)과 대조되는 '성직 정치적 당파'(hierocratie party)의한 지도자로 보았다. 이와 같은 비평 학자들의 시각에 의하면 학개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신학적 공헌을 하기는커녕 이스라엘을 더욱 침식시킨 책이 된다. 하지만 비평 학자들도 학개 선지자가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려는 열성을 가졌다는 사실은 인정하였다(Eichrodt).
한편 전통적인 학자들도 처음에는 학개서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학개의 언급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였다. 그 하나가 바로 학개의 예언은 전체 예언의 개요에 불과하고 요약되어 간결하게 보일지라도 말로 선포하였을 때는 그 사상이 충분히 표현되었고, 웅변적이었을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학개 선지자가 전해야 할 특별한 메시지를 잊지 않았고, 따라서 많은 중복된 표현 속에서도 그것을 잃니 않았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학개서는 단순한 메시지의 전달서가 아니라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게 한 책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전통적인 학자들은 수사학적인 면에서 기대한 만큼의 충족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짓고, 신앙을 회복케 하기에는 충분한 책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 만큼 학개서는 성전 건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책이라고 여겨진다.
학개서의 역사적 배경
Ⅰ. 명칭
히브리어 성경은 본서의 명칭을 학 1:1의 표제에 나타난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yG'j' 하까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의 순례절들과 연결되는 히브리어 <gh; 하그>에서 온 것으로 축제, 축일, 혹은 잔치를 의미한다. 70인역(LXX)은 이 책을 < JAggai'o" 항가이오스>라고 부르며, 불가타(v)에서는 <Aggaeus: 악가이우스>라고 음역하였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학개'로 음역하였고,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원음에 보다 접근하여 '하깨'하고 음역하였다. 본서의 정경상의 위치는 포로기 이후에 쓰여진 세 권의 책, 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첫 권으로 분류되었고, 히브리어 정경에서는 소선지서의 10번째 책으로 분류되었다.
Ⅱ. 저자 및 기록 연대
1. 저자
1) 전통적인 견해
'아처'(Archer)는 학개 선지자의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축제가 거행되는 시기에 출생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가 태어난 역사적인 배경이나 가문 및 가족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바 없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평 학자인 '벤첸'(Bentzen)은 학개를 천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롬'(Jerome)은 학개서 주석에서 학개 선지자가 제사장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Harrison). 전통적인 학자들은 '제롬'의 증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지만, 본서의 저자가 학개 선지자라는 사실에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학개 선지자가 개인적인 사역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이 주목하는 바는 먼저 합 2:3에 그가 포로기 이전의 솔로몬 성전을 보았다는 암시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언할 당시, 즉 다리오 2년 6월에 그의 나이는 80세 정도가 된다. 또한 에스라의 증언에 의하면 학개는 스가랴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고, 두 사람은 성전 재건을 위하여 일하였다고 하였다(참조, 스 5:1, 2; 6:14).
또 그들이 예루살렘에 귀향하여 성전 건축을 위해 일한 만큼, 성전이나 예배에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시 111, 145 편에서 제시되었다. 즉 몇몇 시편의 제목에서 학개와 스가랴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이는 그들이 재건된 성전에서의 예배에 관계했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특히 전통적인 학자들은 제롬의 증언과 성전 예배에 관련되었다(Harrison). 하지만 대다수의 전통적인 학자들은 학개 선지자가 성전 재건을 촉구하였지만, 그가 성직자 중 하나는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본서의 저자 문제에 대한 어떠한 이견도 받아들이지 않고 학개 자신의 예언임을 주장하였다.
2) 진보적인 견해
비평 학자들도 학개 선지자의 이름으로부터 축제나 제의와 관련된 배경을 인정한다. 그러나 '제롬'이 말하는 것처럼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란 점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이다. 왜냐하면 학 2:11-13에서 학개 선지자는 레위인 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즉 유다인의 결레법에 대해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비평 학자들은 그가 제사장의 후손이라면 유다인의 결레법을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본서의 저자 문제에 관한 제견해는 가설과 추측들인데, 그 이유는 예언자 학개에 대한 배경적 설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에서 연유한 문제이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단순하게 '예언자'혹은 '선지자'로 언급되었을 뿐이다(참조, 스 5:1, 2; 6:14 학 1:1).
하지만 예언자로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학개는 분명 두드러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Jacob). 더욱이 유다교 전승(Talmud)은 그가 포로기에 바벨론에서 예언자로 알려졌었다고 전한다. 특히 탈무드에서 학개가 스가랴와 말라기와 함께 '대회장'의 공동 설립자라고 전하며, 이들 마지막 예언자들이 죽음으로써 성령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갔다고 하였다. 한편 이상과 같은 선지자 학개에 대한 일련의 재구성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비평 학자들은 본서의 저자가 학개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최초의 비평적 견해는 문서 비평 학자들에게서 나왔다. 그들은 본서의 통일성과 완전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저자 문제에 있어서 심각한 회의를 가져왔다고 전제하고, 그 증거로 학 2;15-19의 갑작스런 어조 변화와 연대기적 특수성을 든다(K?ler). 비평 학계에서 이 문제는 당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벨하우젠'(Wellhausen)은 몇몇 구절을 제거하자고 제의하였고, '마지'(Marti)가 동의하였다.
그리고 '카일'(Keil) 등은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히브리 구문을 재해석하자고 제의하였다(von Hoonacker). 이들은 시도가 초기의 문서 비평 학계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면, 보다 후기에 괄목할 만한 시도가 '젤린'(Sellin)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학 1:15의 연대 기록이 학 1:15을 서문으로 하는 하나의 본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주장하고, 또 학 2:1이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일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두 본문 사이에 성전의 기초 돌을 놓는 것에 대한 기록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그 본문이 정정화 과정에서 삭제된 이유는 기초 돌에 대한 편집자의 기록과 상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젤린'의 견해를 채택한 '로트스타인'(Rothstein)은 '젤린'이 지적한 삭제 된 본문이 학 2:15-19에 보존되었다고 주장하고, 만약 학 2:15-19이 학 1:15과 결합된다면 잃어버린 신탁에 대한 완전한 모습을 재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현재의 단위인 학 2:10-19을 두 개의 전혀 다른 본문이 인위적인 편집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견해는 비평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Wolff, Hesse, von Rad, Elliger). '로트스타인'의 재구성 시도는 학개서 전체의 평가를 위해 매우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성전 재건에 사마리아인들의 참여 문제에 대한 학개의 거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제적 결정의 형식을 취하였는데, 학 2:15-19은 유다 공동체의 탄생을 나타낼뿐더러 사마리아인들의 참여를 거절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학 2:10-19에서 15-19절은 사마리아인들의 성전 재건에의 참여에 대한 거절을 위해 편집적인 기교로 삽입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로트스타인'의 학개서 주석은 상당하게 영향을 끼쳤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의 견해에 대해 진지한 의문이 던져졌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 학자들은 소위 편집 비평 학자들로서, 그들은 학개서의 구조를 4개의 예언적 신탁이라는 구조로 보았으며, 각 신탁들은 연대 공식(date formula)으로 시작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각 신탁들은 구두 연설의 형식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논쟁, 경고, 제사장의 결정 등이다. 그런데 이들 연설의 형식들은 구성에 있어서의 다양성과 더불어 학개를 3인칭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편집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특히 근본적인 문제가 되었던 학 2:10-19의 통일성은 이차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즉 편집자의 편집 활동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로트스타인'의 견해는 자명해진다.
그러나 편집 비평 학자들은 '로트스타인'처럼 성전의 기초 돌이 놓여진 날, 즉 학 1:15에 삽입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의 한 표지로 설정할 필요에 의해서 현재의 형태로 편집되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정경화 과정이란 사건의 순서에 따라 본문을 배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학적, 종교적인 의미와 관련하여, 사건을 해석하고, 전체의 메시지에 어울리는 순서를 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본서의 제반 문제에 대한 의혹이 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집 비평 학자들의 주장에 대다수의 비평 학자들이 동의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본서의 저자 문제에 대해 살펴보겠다. 진보적인 입장의 학자들은 편집자에 의한 후대 편집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입장의 학개 저자설을 완전히 부인하고 편집설에 동의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학자들이 본서의 예언적 신탁 모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학개에게서 유래하는 원래의 예언적 신탁을 인정한다.
2. 기록 연대
1) 전통적인 견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하기 시작한 것은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B.C. 538)으로 인해서 B.C. 536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귀환 후 스룹바벨을 위시하나 귀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재물을 드렸다(참조, 스 3:2-6 학 2:14). 그리고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였다(참조, 스 3:7-13). 그러나 성전 재건의 시도는 초기부터 벽에 부딪혔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재건에 동참하지 못함을 분히 여겨 바사 왕에게 고발장을 내는 등의 방해였다. 그런데 바사 제국도 사마리아인들의 고발에 대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뿐 적극적인 중재를 하지 않았다(Archer). 그러던 중, B.C. 521 년에 '다리오 Ⅰ세'가 집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국의 반란 사건 등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쓸 수 없었다. 본서의 예언은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따라서 본서의 기록 연대는 B.C. 520년 경이 된다. '다리오 Ⅰ세'는 B.C. 521-485 년에 걸쳐 바사 제국을 통치하였는데, 에스라의 보고에 의하면 성전 공사는 새롭게 시작한 후 4년 반 만에 완성되었다고 전한다(참조, 스 6:15). 따라서 '다리오Ⅰ세'의 통치 기간 중에 성전은 재건되었다. 그리고 그 주역은 역시 학개와 스가랴, 그리고 스룹바벨 등이다. 전통적인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 끝에 가장 일반적인 견해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리오 2년 제6월(현대 월력으로는 8, 9월이 됨)에서 제9월(11, 12월), 곧 B.C. 520년의 4개월 동안에 본서가 기록 되었다는 것이다(Archer, Young).
2) 진보적인 견해
본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진보적인 견해의 기본 입장은 편집되었다는 전제 하에 제시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 연대 추정이 일치되지도 않았고, 그 폭도 다양하다 먼저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학 1:1-3, 12-15; 2:1 2, 10, 20을 학개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선지자 자신을 3인칭으로 묘사한 점과 본 예언이 구두로 연설되었을 것이라는 실제 상황을 고려할 때 후대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Eissfeldt). 특히 '아이스펠트'는 학 1:14 과 2:2의 남은 자 사상과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r,a;h;A!['암-하아레츠>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즉 그는 남은 자 사상이나 <$r,a;h;A!['암-하아레츠>라는 표현이 후기 랍비 문헌에 나오는 용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본서의 기록 연대는 적어도 B.C. 3세기 이후가 된다. 다른 학자들은 '아이스펠트'와는 달리 B.C. 4세기 초반에 본서가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였다(Noth, Fohrer, Kaiser, Smend). 이들은 본서에 뚜렷하게 구분되는 종말론적 예언의 두 요소를 증거로 제시하였다(비교, 1:1-15 과 2:1-9; 2:10-19 과 2:20-23). 마지막으로 '로트스타인'이 제시한 학 2:15-19에 대한 재구성 논의가 있는데, 그의 시도는 성전 재건 사업에서 사마리아를 제거시킨 이유에 대한 해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대를 정하는 데 있어서도 일익을 담당했다. 즉 '로트스타인'은 유다와 사마리아 사이의 긴장 관계에 대한 명쾌한 해명을 통해서 유다와 사마리아에 대한 감정이 일단락된 시대적 배경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로트스타인'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본서의 기록 연대는 B.C. 3세기경이 된다. 하지만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바는 B.C. 4세기 초반 몇 개월 동안에 본서가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본서의 내용 대부분을 학개 선지자에게서 유래한 예언으로 보지만, 예언의 기록은 제자들이거나 선지자와 가까웠던 사람들 중의 어떤 편집자에 의해서 본서가 쓰여졌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Ⅲ. 기록 목적
본서의 기록 목적은 종교적인 면보다도 정치적인 면에 치중되었다. 즉 학개 선지자는 정치적인 활동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개입 사이에 미묘한 균형을 의도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학개 선지자는 다른 예언자들보다도 더 정치적인 계획, 즉 성전 회복에 헌신적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는 자신이 활동가라는 인식을 지녔음에도 불고하고 그는 정치적인 계획을 큰 신학적 맥락 안에서 조심스럽게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참조, 학 1:8). 그는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성전이 영화롭게 되고 수고한 백성들에게 상급이 있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학개서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학개 선지자가 성전 재건에 관한 하나님의 재가를 받긴 했지만,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약속이 물질적인 성전 건물 자체가 조건이 된다고 제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여하튼 본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약속 이해와 성전 재건이라는 정치적 역사적 사건 사이의 간격을 조화하기 위함이라 하겠다.
Ⅳ. 특징 및 구조
1. 특징
1) 문체적인 특징
본서는 시구를 포함하지 않은 유일한 예언서이다. 그리고 예언의 내용이나 사용 언어 면에서조차 특이할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내용 및 언어 구사라고 하겠다. 하지만 평이한 산문체가 갖는 명료성이나 비약성은 본서의 문체적 특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사상의 전개에 있어서 중심 되는 말과 사상을 단순하게 반복하여 약간 지루함을 느끼게 하지만 그러한 반복 속에서도 일관된 주제를 관철시키는 면은 본서만이 갖는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면은 본서가 연설된 내용이란 면에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세 번째 문체적인 특징은 수사학적인 질문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학개 선지자는 제사장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도록 하고 대답하는 것을 통하여 사상을 전개시켜 나갔다.
2) 통일성
본서의 통일성 문제는 다름 예언서들에 비해 비교적 논쟁이 적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학 1:7 하반절과 학 1:13을 후기의 첨가 어구로 보아 거부하였다(Driver). 또한 고대 역본과 비교해 볼 때 학 1:0 과 학 1:12에서 하급 개정 본에 더 신빙성을 둔다. 또 학 1:15에 나타난 연대기적 구절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Rothstein). 하지만 이들 문구들은 하나의 단락과 단락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본서의 통일성을 저해하지는 않는다(참조, 학 1:1; 2:1, 10, 20). 예를 들어 학 2:1의 시기에 관한 기록이 학 1:15의 바로 뒤를 이어 나오는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의 흐름을 지시할 뿐 중간에 본문이 삭제되었다(Rothstein)고 볼 수는 없다. 한편 70인역에는 학 2:5의 초반부가 생략되어 있고, 학 2:9에 열두 마디의 단어가 첨가되어 있으며, 암 5:10을 인용하여 학 2:14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예는 학 2:17과 암 4:9의 중복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모두 신 28:22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따라서 70인 역의 삭제와 첨가가 본서의 통일성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본문은 4개의 신탁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신탁의 점진적인 일의 진척도는 본서의 통일성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3) 신학적 특징
본서의 신학적 특징이란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와 넷째 신탁이 심판과 구원이라는 종말론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학개 선지자는 의미심장하게도 종말론적인 두 주제를 메시아적 소망으로 제시하였다(참조, 학 2;20-23). 즉 학개는 메시아적 소망을 새롭게 하는 스룹바벨에 대한 약속을 이스라엘의 죄 됨의 선포 및 수종의 축복과 연대기적으로 동일한 날에 배치하였다. 이로써 종말론적인 심판과 구원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순종과 연결되었음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그는 새로 재건되는 성전과 함께 새로 태어나는 유다 민족의 현세적 빈곤이 하나님의 도래에 의해 이루어질 내세의 영광(splendour)을 보장하는 것임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따라서 본서의 신학적 특징은 역동성을 지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생 유다 민족의 앞날은 보장된다는 신학적인 주제에 있다.
2. 구조
본서의 구조는 네 단락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단락은 신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각 신탁의 첫머리에는 그 신탁을 받은 날짜가 표기되었다. 또한 각 신탁을 살펴보면 앞의 두 신탁이 심판과 구원, 그리고 뒤의 두 신탁도 같은 주제로 되었다. 첫째 신탁(참조, 학 1:1-15)은 성전 재건을 등한히 하는 것은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의 원인이 된다는 내용으로 분류된다. 둘째 신탁(참조, 학 2:1-9)은 재건된 성전의 영광에 대한 내용으로 구원 내지는 축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셋째 신탁(참조, 학 2:10-19)은 성전 재건으로 인해 받을 복에 대한 약속이다. 넷째 신탁 (참조, 학 2:20-23)은 장차 올 이방 세력의 멸망을 예언한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종말론적 소망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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