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스크랩] 학개의 특별한 주제들

수호천사1 2012. 11. 22. 19:45

학개의 특별한 주제들



Ⅰ. 스룹바벨 성전


바사왕 '고레스Ⅱ세'는 B.C.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메소보다미아, 시리아, 팔레스틴을 바사 제국에 병합하였다. 그는 이전의 앗수르나 바벨론의 포로민에 대한 압제와는 달리 관용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는 정복하거나 병합한 나라의 종교적인 감정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공포감을 주지 않았다. 이른바 그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바벨론 사람들로부터도 해방자로 환영받았고, 또한 그는 그들에게 최대한의 아량을 베풀었다고 한다(Bright). 고레스 왕의 그 유명한 포로 귀환령도 그 자신의 관용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B.C. 538).

이러한 포로 귀환령으로 인해 유배되었던 민족들은 모두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바사 제국에 반란을 기도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종교 의식을 행할 수 있었다. 유다도 포로 귀환령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한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 바사 제국의 한 자치권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이들은 유다를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과 더불어 옛 성전(솔로몬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약 B.C. 516, 5년 경에 준공하였다.

이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이라 불리는데, 그것은 성전 재건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다 공동체의 지도자로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리고 이 성전은 유다 작가들을 통해서 제 2성전이라고 불렸으며, 그 존속 기간은 약 500년에 이른다. 따라서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자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높이 평가되었던 성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이 유배 이후 유다 공동체를 탄생시키면서 이루어 놓은 업적이란 면에서 솔로몬 성전이나 제3의 성전인 헤롯 성전에 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 하겠다.


1. 성경에서


스룹바벨 성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를 학개서(B.C. 520)와 스가랴서(B.C. 520-518)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전하는 자료란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충분한 정보라고 할 수 없다. 학개 선지자는 백성들이 벽에 널빤지로 내장한 집에 살면서도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데는 늑장을 부린다고 비난하였다(참조, 학 1:1-4). 또한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겪는 경제적 곤란이나 가뭄 등은 성전이 황폐된 채 버려졌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참조, 학 1:8-11).

이러한 선지자의 도전적인 선포로 인해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성전 재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학개 선지자는 새로이 건축되는 스룹바벨 성전이 이전의 솔로몬 성전보다 더욱 찬란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며, 메시아적인 대망 사상과 결부되어 구원의 방주가 될 것을 선포하였다(참조, 학 1:15-23). 이처럼 초기의 성전 재건 사역은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확신 속에서 백성들이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한편 학개 선지자의 뒤를 이어 성전 건축을 독려한 예언자는 스가랴 선지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성전에 대해서는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성전이 재건될 것(참조, 슥 1:16)과 그 성전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여 거하실 것(참조, 슥 2:10, 11)을 언급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스가랴는 학개와 다르다. 즉 그의 교훈은 이상의 세계 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그의 목표는 신정 정치로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는 나라의 건설이었다. 따라서 성전 재건에 대한 그의 예언도 자연히 메시아와 왕으로서의 특권이 결합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성전에 대한 예언에서 성전이 세워질 산의 신성함과(참조, 슥 8;3), 곧 뒤따를 축복들이 언급되었다(참조, 슥 8:9-13). 그리고 그는 먼데 사람들(참조, 슥 6:5)이 와서 성전 재건을 돕는다고 말함으로써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와 성전 재건을 도울 것에 대해 말하였다. 더욱이 그는 예루살렘의 스룹바벨 성전이 영광에 차서 이방인들의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스가랴는 스룹바벨 성전을 통하여 세상의 제의를 하나로 통일시키고, 여호와의 신정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던 것으로 보인다(Calvin).


다음으로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역대기에 나타난다(참조, 대상 23-26장; 대하 36:22, 23). 역대기를 기록한 가자들은 아마도 학개와 스가랴보다 2세기쯤 뒤의 인물인 듯 하다. 이들의 기록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성전에서 직무를 맡은 자들의 조직에 대한 분류인데, 당시의 성전 조직이 매우 세밀하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역대기 기자들의 자료는 에스라서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차적인 자료로 밀려난 실정이다. 왜냐하면 역대하의 마지막 부분은 에스라서 처음 부분을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미리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비교, 대하 36:22, 23 스 1:1-3).

한편 느헤미야서와 더불어 역대기 기자의 작품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에스라서는 다소의 연대기적 불일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성전 재건에 필요조건으로 요청되는 고레스의 사면령에 대한 것이라든가, 포로 귀환으로 돌아온 소수의 백성들이 이미 성전 재건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를 만난 셈이 된다. 더욱이 그들은 바벨론에서 남아 있던 성기(聖器)들을 다시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고레스로부터 받았다.(참조, 스 1:11). 이로써 에스라서에 의해 성전 재건의 진행에 대해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성전 기금을 위해서 개별적으로 자유롭게 예물을 드리고, 몇몇 관리들은 몸소 성소에서 봉사하기를 원했다(참조, 스 2:36-54, 68-70).

초기에 이와 같은 열심히 인해 첫 귀환 후 몇 개월 만에 번제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을 처음으로 복원하였다(참조, 스 3:1-6). 그리고 성전의 토대가 건축되었다(참조, 스 3:10). 그러나 성전 재건에 사마리아인들이 참여하겠다고 나섬으로 성전 건축에는 장애가 발생하였다(참조, 스 4:1-5). 당시의 정치 지도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묵살하였다. 그 결과 사마리아인들은 바사 제국에 고발을 하였으며, 바사 제국도 내분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분쟁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결국 성전 재건은 중단된 채로 학개와 스가랴의 시대에까지 이르렀다. 학개와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자극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도록 하였다(참조, 스 5:1, 2).

한편 시리아의 총독 '닷드내'는 유다 공동체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분쟁을 예리하게 주시하였지만, 성전 재건을 중단시키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고레스의 성전 건축 허가는 아직까지 유효하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닷드내'는 이 분쟁에 말려들어 성전 재건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참조, 스 6:1-8).


성전 재건 공사는 다리오 왕 2년에 재개하여 다리오 왕 6년 아달월 삼일에 완공되었다(참조, 스 6:15). 학자들은 이 시기를 대략 B.C. 515년 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성전 재건 후 봉헌 제사가 거행되었는데, 이는 솔로몬 성전의 봉헌 제사와 비교해 볼 때 매우 간소한 것이었다(참조, 왕상 8:5 ; 대하 7:5 ; 스 6:17). 뿐만 아니라 성전 자체도 솔로몬 성전에 비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솔로몬 성전을 기억하였던 몇몇 노인들이 새로운 스룹바벨 성전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참조, 스 3:12, 13 학 2:3).


2. 외경에서


1) 에스드라상에서


에스드라상은 정경의 역대하 마지막과 에스라, 느헤미야서와 병행 구절을 이루는데, 중한 차이는 성전의 완공이 다리오 왕 6년 아달월 23일 이라고 함으로써 에스라서와 20일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비교, 스 6:15 ; 에스드라상 7:5). 또 하나의 차이점은 에스드라상 9:38, 41에 에스라가 '성전 앞 동문의 광장'에 모인 백성들 앞에서 율법 책을 낭독한 것으로 언급되었는데, 느 8:1, 3에 의하면 에스라가 '수문 앞의 관장'에서 율법 책을 낭독하였다고 언급한 차이이다. 이 외의 차이점은 없으며, 정경과 다른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요세푸스'(Josephus)는 에스다라상을 따라 자신의 작품을 서술하였다.


2) 집회서에서


집회서의 저자 '벤시락'은 유명한 인물들을 찬양하는 글 속에서 (참조, 집회서 49:11, 12) 성전을 건축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업적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B.C. 2세기 초부터 대제사장을 지낸 '오니아스'(히브리 성경에서는 요하난을 가리킴)의 아들 '시몬 Ⅱ세'의 활동에 대해서 상술하였다. '벤시락'에 따르면 시몬은 예루살렘 성전의 총책임자로 성전을 수리하고, 성전을 요새화하였으며, 성전 주변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 예루살렘 성읍을 요새화하였다. 특히 '벤시락'은 시몬이 서전에서 예배하는 모습을 환상적으로 묘사하였다. 예를 들면 번제를 드리기 위하여 제단에 올라가서 다른 제사장들의 제물의 몫을 받아 드리는 모습이라든지, 또는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 재물을 드렸는지에 대해 상술하였다. 몰론 집회서에서는 성전 건물 자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전 과 관련된 제사의 한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집회서의 기치를 찾을 수 있다.


3) 마카베오서에서


마카베오서는 다른 외경들보다 성전에 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특히 마카베오서는 안티오커스에 의해서 약탈당한 성전 기물들의 목록이 나오는데, 그것을 통해서 성전의 내부 장식의 화려함과 그 규모에 대해서 추론 가능하다. 예를 들면 엄청난 양의 금과 은에 대한 언급은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을 연상케 한다(참조, 왕상 7:48-50 마카베오상 1:21-23). 특히 마카베오서의 저자는 성전의 정화와 재봉헌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표명한다. 예를 들어 마카비 시대의 유다는 헬라 제국의 셀류커스 왕조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한 후 훼손된 제단을 새롭게 지어야만 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율법에 따라'(참조, 출 20;25) 다듬지 않은 돌로 새 제단을 전과 같이 쌓았다고(참조, 마카베오상 4:47)하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 그리고 스룹바벨 성전과 비교해 볼 때, 마카비 시대의 자그마한 개축이 갖는 의미를 스룹바벨 성전의 전 역사를 통하여 특이할 만한 흥미를 끈다. 그것은 포로 귀환 이후의 전승사적 위치와 관련된 것으로 제2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향이 유다의 전승사적 맥락의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출애굽의 해방 전승에 서서 역사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출애굽의 율법에 따라 성전의 제단을 자연석으로 단장하였다. 이처럼 제2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의 역사는 거의 500년이나 되며, 수 세기를 거치는 동안 위협을 받기도 하고(참조, 마카베오상 9:54-46), 더욱 튼튼히 하여 요새화하기도 하였다(참조, 마카베오상 13:8, 9, 52; 14:15). 마카베오서의 저자는 비록 그가 서 있는 시점에서 성전의 역사를 더듬은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스룹바벨 성전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신성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참조, 마카베오하 2:19, 22; 3:12; 5:15-21; 14:31; 15:18).


3.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서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 나타난 제2의 성전의 모습은 성경이나 외경의 언급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의 기록에서는 마카베오상 4:47에 대한 기록이 마카비 시대의 개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룹바벨 성전의 제단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애굽의 레온토폴리스에 오니아스 신전이 건축되었다고 언급하였다. 비록 그의 기록이 거의 유일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스룹바벨 성전이 학자들에게 있어서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마카베오상?하서의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기록은 과장되었다는 평가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결국 외경에서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들이 나타나는 것은 포로기 이후에 형성된 유다 공동체의 민족적 자긍심에 의한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성전을 중심으로 벌어진 음모와 성전의 수모에 대한 언급들이 자세하게 묘사되었는데, 먼저 그는 '아리스토불루스 Ⅱ세'와 '힐카누스Ⅱ세' 사이에 빚어진 내란과 선전 포위에 대해 말하였다. '힐카누스Ⅱ세'가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의 지원을 받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피하여 '아리스토불루스'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아레타'왕은 유월절 기간 도안에 성전을 포위하였고,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런데 로마의 '스카르수' 장군이 '아리스토불루스'를 지원하게 되자 '아레타'는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한편 로마 내부에서도 이와 같은 정책을 반대하였던 '폼페이우스'는 B.C. 63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힐카누스'에게 권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성전의 신선함을 존중하여 약탈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크랏수스'는 '폼페이우스'가 남겨 둔 보물을 약탈하였다. 이 분쟁의 결말은 헤롯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는 관례에 따라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방위 벽을 쌓았다. 이 방위 벽은 유다 전쟁에서 제2의 방위선이 될 만큼 강력한 요새였다. '요세푸스'는 제2의 성전의 마지막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하였는데, 그것은 헤롯 재위 15년 되던 해(B.C. 20년 경)에 보다 큰 새 성전을 짓기 위해 제2의 성전을 허물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4. 랍비 문서에서


랍비 문서에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헤롯 성전의 기초가 된 주춧돌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돌은 '세티야'라고 불렸는데 마루, 또는 지면 위로 약 7㎞가량 솟아 있었다. 학자들은 이 주춧돌이 신성한 돌이라는 전설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였다(Stinespring). 왜냐하면 유다 전승에 의하면 그 주춧돌은 지성소 안에 있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성전이 건축되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랍비 문서에서도 더 이상 이 주춧돌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주춧돌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Talmud).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정보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지막 랍비 문서에서도 밝혔듯이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같은 기초 위에 건축되었고, 레바논 지역의 건축 자재들이 주류를 이루는 양식이었던 점으로 보아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설계와 규모 면에서 유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제 2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덜 화려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분명한 차이점은 새 성전의 바깥쪽에는 놋바다와 바퀴 달린 물두멍이 없었고, 안쪽에는 언약궤와 그룹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스룹바벨 성전은 수시로 증축이나 개축을 하면서 수 세기를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로서 견디었다. 예를 들어 시몬과 하스몬 왕조의 성전 증축, 엄밀하게 말해서 성전의 요새화는 성정이 갖는 이스라엘의 정신적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새로운 유다 공동체의 탄생에 대한 성전의 역할은 가장 특이할 만한 것이었다.


Ⅱ 학개와 스가랴


학개와 스가랴는 거의 같은 시대에 예언한 예루살렘 성전 복구의 예언자들이다. 물론 그들의 예언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 하지만, 성전 복구에 있어서 두 예언자의 역할은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학개의 예언이 현실주의적인 요소가 짙고, 스가랴의 예언이 이상주의적인 요소가 풍부하지만, 양자의 예언은 이스라엘, 특히 포로 귀환 이후 유다 공동체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두 예언자는 각기 특징과 교훈에서 차이가 나지만, 여기서는 두 예언자들이 유다 공동체의 재건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1. 성전 재건과 메시아의 도래


1) 성전 재건의 의의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긴밀하게 결합되었는데, 이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성전의 재건은 여호와와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한 필수 전제에 해당하였다. 물론 학개와 스가랴 이전의 예언자들의 예언에서도 성전 재건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서로 결합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민족의 안전에 대한 보장을 군사적인 동맹으로 해결할 것인가, 여호와에 대한 신뢰로 해결할 것인가 사이의 결단이었다. 예언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앙 고백의 형태를 지닌 물음을 제기하였다. 즉 성문에서 행해지는 재판의 경우와 같이 이스라엘 안전에 대한 보장은 여호와께 속하였는가, 아닌가의 문제에서 결정되었다.

이처럼 학개와 스가랴 이전의 예언자들은 성전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보다는 오히려 생활 속에서, 신앙 고백적인 면에서 여호와의 신실한 백성이 되는 문제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학개와 스가랴 이전의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성전 건축의 문제가 고백의 형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포로 귀환과 동시에 발생한 양자택일의 문제에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즉 학개와 스가랴는 실의의 안정 중에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성전과 제사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될 것인가의 문제에서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 신앙의 회복을 부르짖게 되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지내는 가운데 누렸던 경제적인 섭생(攝生)에 안주하려는 포로민들에게는 이 문제가 하나의 갈등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비록 포로의 몸이긴 하지만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고, 경제적인 풍요도 맛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은 신생 이스라엘에서 당해야 할 경제적 빈곤과 성전 재건으로 소비해야 할 자신들의 희생을 두려워하였다. 실제적으로 성전 재건의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여 연기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학개와 스가랴는 먹고사는 문제에 얽매어 여호와를 찾지 않는 이스라엘의 게으름을 질타하고, 과감하게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 신앙의 재건이라는 문제에 뛰어들었다. 그들에게 친히 현존(現存)하시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성전 재건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이는 이미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선포하였다(참조, 학 1:2-11; 2:14-19). 학개가 이처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이 제사 적인 중심을 가지고, 이 중심에 의해서만 존립하리라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전 건축이 연기되었을 때에도, 그 성전의 위엄과 영광을 말 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학개와 스가랴의 재건 사업에 발맞추어 건축된 성전은 정신적인 종교적 결단에서 기인된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의 구원 행동을 위해 전적으로 특정한 역사적 자리를 확보하였다는 점에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2) 기름 부음 받은 자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이루어질 특정한 역사적 자리가 성전이었다면 학개와 스가랴에게서 두 번째로 관심이 집중된 것은 여호와의 언약들을 실천에 옮길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개에게서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막연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명백하고 분명한 표현으로 다윗 자손인 스룹바벨을 지목하였다(참조, 학 2:23). 스가랴의 예언에도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스룹바벨로 나타난다.(참조, 슥 4:6-10). 그는 가까운 종말론적 구원 사건이 성전의 완성과 함께 성전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였으며, 그 때에 메시아직을 감당할 인물이 스룹바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스가랴는 성전 건축에 있어서 인간적?정치적 세력을 모두 거부하였다.

그리고 성전을 세우고 성전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였다(참조, 슥 4:6). 이처럼 스가랴 선지자도 학개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에 대한 징조를 바로 이해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들 두 예언자의 특징적인 점은 바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도래가 성전 재건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곧 이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구원 사건은 제의적인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고, 성전을 통하여 구원 사건을 향한 대전환의 영역이 확보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의 노력은 여호와의 구원 사업을 돕는 하나님의 종일 수밖에 없으며, 고레스의 칙령이나 포로의 귀환도 단순한 것이 아닌 구원 사업의 일환이었다.


3) 가시적 세계의 상황


거의 동시대의 예언자인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성전 재건과 주변 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스가랴의 환상은 성전 건축과 메시아의 도래를 접목시키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첫 환상(참조, 슥 1:7-17)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표상을 포함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상을 돌아본 하늘의 사자들을 통하여 지상의 평화로움과 민족들 간에 안전히 거함만이 낙관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주변 정세도 포로 귀환의 마무리 단계로 비교적 평온하였다.

두 번째 환상(참조, 슥 1:18-21)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언급이 나타난다. 그것은 여호와께 반항하는 세계 제국들을 파괴하기 위한 세력들이 준비되었다는 기록이다. 즉 스가랴 선지자는 네 개의 뿔을 보았는데, 이것들은 마지막 날을 위해 세움 받은 세력들이었다.

셋째 환상(참조, 슥 2:1-13)에서 스가랴는 예루살렘의 번영을 약속받았다. 곧 이스라엘의 번영은 성도(聖都)로서의 발전이었다. 이 점에서 예루살렘은 마지막 때를 위한 구원 사건의 중심이 되었다.

네 번째 환상을 통하여 여호수아는 하늘에 자유로이 오르내릴 권한이 주어지며,

다섯째 환상을 통하여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기름으로 헌신된' 사람이 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한 지상의 준비는 끝났다.

그리하여 여섯째, 일곱째 환상을 통하여 악의 징계와 완전한 멸망이 제시되었고, 여덟 번째 환상에서는 처음 환상에서처럼 평화가 정착된다. 이처럼 스가랴는 하룻밤 사이에 마지막 때에 될 일을 다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마지막 대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성전 건축이라는 마지막 때의 발현을 위한 장(場)이 준비되는 중일뿐이었다.


2. 새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


1) 구원 예언의 대상


학개와 스가랴의 구원 예언의 대상은 성전과 예루살렘이 성도화 되는 종말론적 복구였다. 그러므로 스가랴의 경우, 종말론적인 이스라엘, 곧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마지막 때의 역사적 현장이 될 이스라엘이 아직도 국가적인 도시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그는 예언에서 도시 국가적인 정치 영역이 종말론적 구원 사건의 출발지로서 여호와에게 역시 좁지 않다는 사실을 변증해야만 했다. 그 결과 포고된 자들이 돌아와서 새롭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시온 전승이 새롭게 활기를 띠게 되고 종말론적인 메시야 대만 사상이 고조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사실 시온 전승은 제의적 지방 전승으로서 여호와 신앙에 흡수되었다. 그러므로 시온 전승은 다른 전승과 병행하는 선택 전승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였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선택 전승과 시온 전승, 그리고 다윗 전승이 서로 균등하게 융합되어 예루살렘 성전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전승과 시온 전승은 오랫동안 분리된 채 병행되었으나 선택 전승을 통하여 새로운 융화를 보게 된 것이다. 더욱이 포로기 이후에 급변한 상황 전개에 따라 여호와의 신앙 내에 흐르던 전승군들이 하나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은 바로 하나로 융화된 전승을 기반으로 선포되었으며, 그 표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두게 된 것이었다. 결국 성전과 예루살렘이 성도화 되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 두 예언자의 주요 관심이자 구원 예언의 대상이라 하겠다.


2) 이방에 대한 심판 선포


가장 오래된 예루살렘 전통들에 속하는 심판 선포는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에 기원을 둔다(참조, 시 46, 48, 76장).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방에 대한 심판 선포는 전면적인 주제로 부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언자들에 의해서 개별적이고 부차적인 문제로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이사야 선지자는 이방에 대한 심판 예언을 가장 많이 포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주곡의 주제로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이사야 선지자의 심판 선포에 대한 변조된 수용이 보다 극적인 현실화를 낳았다는 점을 간과 할 수 없다(참조, 사 1712-14). 다른 예언자에게서도 이러한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스가랴에게 와서 이방에 대한 심판 선포의 주제가 전면으로 부상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전하리만큼 종말론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즉 12, 14 장에서 스가랴는 시온 앞에서의 민족들의 싸움과 그들에 대한 심판,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의 보존을 주제로 선포하였다. 더욱이 스가랴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잔인한 행위를 일삼는 것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참조, 슥14:12).

하지만 스가랴서 내에는 다른 종말론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방 심판 예언의 현실화된 표상은 종말론적 대망 사상과 결부된 마지막 날의 심판에 연결되었다 하겠다. 결국 스가랴는 열방에 대한 심판을 극복한 생존자들이 성도(聖都) 시온을 순례하고 여호와를 숭배하리라는 표상으로 귀결시켰다. 여기에서 시온 전승의 새로운 융합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심판 예언이 예루살렘 전통을 통하여 시온 전승에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상들의 융합이 이차적인 삽입이라는 주장이 나올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 귀환 이후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전승들의 융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성전을 통한 종말론적인 변화를 대망하였던 새로운 유다 공동체의 집약된 바램이었다.


3) 종말론적 성도 예루살렘


종말론적인 성도 예루살렘에 관한 표상은 민족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점에서 심판 예언과 구별된다. 그리고 종말론적 사건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공간적인 변화는 종말의 때를 알리는 것이 되었다(참조, 사 2:2-4). 즉 여호와의 집인 시온 산이 우뚝 속고, 부근의 모든 산들을 압제할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뚜렷이 보고 몰려들게 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권세에 식상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이른 자들이다. 그들은 시온으로 몰려들게 된다. 왜냐하면 시온으로부터 가르침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온은 순례의 행렬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러한 표상이 학개 선지자에게서도 간략하게 언급되었다(참조, 학 2:6, 7). 그리고 순례의 축제 절정에 이르러 여호와의 뜻은 뭇 민족에게 선포되고 '날들의 마지막'에 종말론적인 화해를 성취하게 된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심판 예언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서 모든 다툼과 불화를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 질서를 시온으로부터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신들의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민족들을 통하여 이사야는 여호와만의 위대함과 구원을 선포하였다(참조, 사 45:14).

그리고 이러한 귀의(歸依)를 통하여 마지막 날에 대한 표상들을 예루살렘 중심으로 표출하였다. 곧 학개와 스가랴에 이르러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종말론적 무대를 마련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 전승이 시온 전승에 흡수되면서 에스겔을 통한 제의적 관심의 표출로 제시되었다가 학개와 스가랴에게 와서 마지막 때를 맞이하기 위한 공간적 자리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종말론적 순례로서의 제의적인 경배가 이루어지고, 그 순례로부터 마지막의 완성을 위한 화해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학개와 스가랴의 공헌은 먼저, 여호와의 날에 세상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될 역사적 공간적 자기를 확보하였다는 점이고, 또 다른 공헌은 예루살렘 중심의 구원을 보편사 속에서 적용시키는 문제를 변증하였다는 점이라 하겠다


성전의 완성 - 학개 -


우리가 마지막 세 선지자들(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의 역사를 복습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전 536년에 에스라는 약 50,000명의 유대인들을 데리고 거룩한 땅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제단을 다시 세우고 제사를 다시 시작하였다. 주전 535년에는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혀 사역은 중단되었다. 이 백성이 그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은 주전 520년의 일이었고 515년에 드디어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 임무를 완성하는 데는 경건한 네 사람의 활동이 있었다. 즉,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 그리고 선지자인 학개와 스가랴였다(스 5:1/스 6:14).


학개가 이룬 사역의 전체적인 목적은 게으른 백성들을 일깨우며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거룩한 땅에 처음 도착하여 일을 시작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헌신적이고 열성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련과 반대의 몇 달이 지나자 일은 지연되고 마침내는 멈추게 되었다.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보다도 다시 시작하게 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작은 책에는 학개로부터의 네 편의 설교가 있는데, 이들 각각에 날짜가 적혀 있다. 이 메시지들을 통하여 학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그의 사역을 완성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한 가지 특별한 죄를 지적한다.


1. 자신을 여호와보다 앞에 두는 일(1:1-15)


학개가 이 메시지를 전한 때는 주전 520년 9월 1일이었다. 성전에 기초가 놓인채 완성되지 못한 상태로 16년이 지났다. 이 메시지는 이 민족의 두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에게 보내졌다. 학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메시지의 핵심에 이른다. “백성들은 핑계를 대고 하나님의 집을 소홀히 하고 있다! 지금은 일을 해야 할 때이며 하나님의 집을 완성해야 할 때이다!“


그는 그들의 이기심을 지적한다. 백성들은 자신의 집들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집을 세울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들을 여호와보다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유대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사치스러운 “판벽한 집“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욕구를 우선적으로 두는 이러한 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핑계를 대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일을 할 때는 이러한 핑계들을 잊어버린다. 심방을 하거나 교회에 출석하기에는 몹시 사나운 날씨가 사냥 여행을 하거나 흥청대며 돈쓰는 데에는 그리 나쁘지 않다! 2회 연속 시합이 있는 야구 경기는 끝날 때까지 불평없이 앉아 있으면서도 예배가 5분이라도 시간을 넘으면 안절부절하기 시작한다.


학개는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보다 먼저 생각하면 정말로 실패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1장 6절에서 그는 우리의 번 것들은 사라질 것이며, 하나님이 무시당할 때 우리의 소유는 지속되지 못한다고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비를 붙들어 두시므로(10절) 농작물은 소출이 없었다(11절). 결국,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 땅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다(신 28장).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축복을 잃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주장해야 할 큰 약속이다. 빌립보서 4장 19절도 그렇다.


메시지는 참된 깨우침으로 받아들여졌으며(12-15절),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내가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사업이 영적인 모험이었으며 단순히 육신적인 일이 아닌 것에 유의하자. 하나님의 백성은 일어났으며 여호와를 그들의 삶의 첫자리에 두었다!(빌 1:21/빌 2:21)."


2. 앞을 내다보는 대신 뒤를 돌아봄(2:1-9)


장막절의 마지막 날인 10월 21일에 학개가 두번째 설교를 할 때는 일곱 주간 쯤 일을 했을 때였다(레 23:34). 이 날은 기쁨과 찬양의 큰 날이 되어야 마땅한데 반대로 실망과 불평의 하루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앞을 내다보는 대신 뒤를 바라보았던 데에 있었다. 그들이 16년 전에 기초를 놓았을 때 나이 많은 이들은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을 생각하고는 울었다(스 3:13). 이제 백성들 중의 어떤 이들은 새로운 성전이 광채도, 영광도 없는 것들로 인하여 실망하였다. 물론 백성의 재앙은 그들의 죄에 마땅한 것이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다 볼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는 믿음으로 앞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강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나님은 용기를 잃은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흔들어 놓을 것이며 어느 날 하나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히 12:26-29). 하나님은 나중 집(천년왕국기간의 성전)의 영광이 전의 집(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거기 평화가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3. 죄를 고백하지 못함(2:10-19)


백성들은 성전 일을 시작한 바로 그 날에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12월 14일이 되어서도 일들은 여전히 어려웠다. 학개는 하나님이 왜 아직 이들을 축복하지 않으시는지를 설명하였다. 이들은 아직도 정결케 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거룩함과 건강함을 누군가에게 줄 수는 없으나, 부정함과 병을 줄 수 있다“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리고 백성이 부정하기 때문에 그들의 일도 부정하였다(2:14). 이 메시지와 연관하여 스가랴 3장을 읽자. 스가랴는 같은 해 8월에 이 멧세지를 전파하였다(슥 1:1). 학개 2장 10-19절의 일이 있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들이 죄를 회개하려고 할 때에만 하나님은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깨끗케 하실 수있으시다.


일단 이 민족이 정결함을 받자 하나님은 이들을 축복하시기로 약속하셨다(2:19).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깨끗한 손과 순전한 마음으로 해야만 한다. 고백하지 않은 죄는 주님의 사역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큰장애물 중의 하나이다."


4. 불신앙(2:20-23)


세번째 메시지와 같은 날 설교된 이 마지막 메시지는 총독 개인에게 주는 것이었다.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일을 지도해 나갈 때에 그에게 특별한 격려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였다. 사단은 언제나 영적인 지도자들을 공격한다.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함께 일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아마도 스룹바벨은 주위에 있는 큰 제국들을 보고 유대인의 작은 그루터기의 미래에 대해 염려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환경은 우리를 실의에 빠지게하는 한 가지 요인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총독의 믿음을 격려하셨다. 불신앙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훔쳐 간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리니 이 왕국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던질 것이며 그들을 멸망시키리라. 너 스룹바벨아, 너는 나에게 있어 확실한 인장과 같으며 매우 귀중한 보석과 같다. 내가 너를 택하였으니, 포기하지 말라!“ 이 멧세지가 총독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었으며 그의 믿음을 북돋아 주었겠는가.


스룹바벨은 예수님의 조상 중의 한 명으로서, 그의 이름은 족보에 실려 있다(마 1:12/ 눅 3:27). 사실상,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형이며 예표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도장, 그의 귀중한 인(印)으로 나타난다. 도장은 권위와 명예를 말한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에게 성전을 완성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고 그의 성전인 교회를 세우도록 권위를 주셨다(요 17:1-3).


그리스도가 돌아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부르신 일은 무엇인가? 그 일을 시작해 놓고 끝을 못맺고 있는가? 당신은 실의에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죄들을 삼가하라. 즉, 자신을 하나님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 앞을 보는 대신 뒤를 보는 것, 고백하지 않은 죄, 불신앙과 같은 것들이다. 그 대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약속들을 명심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1:13)... 두려워 말라(2:5)... 내가 너를 축복하고(2:19)...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2:23). 빌립보서 1장 6절의 약속을 주장하라. 그리고, 일어나 주님의 일을 하라!"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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