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인간의 자유와 의존성의 관계

수호천사1 2012. 9. 17. 11:34

인간의 자유와 의존성과의 관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개체 개별적인 자유성을 가진 존재로 지었습니다. 절대 자유성을 가진 존재이면서 또 역시 절대 의존적인 존재로 자유하는 자로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동화적인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이 절대 자유자라고 하면서 의존자라고 말을 한다면 이것은 모순인 것 같으나 사실은 모순은 아닙니다. 알고 보면 절대 자유는 절대 의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마음을 세상에다 의존을 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의존을 하던지 하는 그 의존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고, 그 자유를 가지고 의존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자유자면서 절대 의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의존적인 자유가 없다면 자기가 잘 배웠던 잘못 배웠던, 죄를 지었던 안 지었던, 구원을 잘 이루었던 못 이루었던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짐승과 바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도덕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개체 개별적이면서 개체 개별적 자유성을 가지고 있고, 활동의 자유성을 가지고 있고 있지만 그러나 분초찰나 순간마다 자기라고 하는 자기의 존재는 그 무엇에 의존을 하는 자유를 갖고 있다 하는 것을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나는 지금 무엇에 의존돼 있느냐? 무엇을 의존을 하고 있느냐? 의존을 하고 있는 그 면에 따라 자기는 그것에 지배되고 동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 자기를 그렇게 지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인 내가 누구에게 의존되고 있느냐? 어떤 관계로 의존되고 있느냐? ‘하나님에게 피동 되느냐, 아니면 나의 요구적인 협조적 의존관계냐, 아니면 자기가 하나님을 이용을 하고 있느냐하는 것을 잘 알아서 하나님에게 동화적인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는 자가 되되 그 동화성이 더 진하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으로 더 진하게 감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그 통치 그 치리를 받으면 그 자기는 거기에서 옮아오는 게 있는 것입니다. 남는 게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자면 예수 믿는 자로서 먼저는 예수를 믿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영원하고 궁극적이고 결과적인 뜻을 알아 나의 모든 의사와 뜻은 버리고 하나님의 그 의사와 뜻을 나의 것으로 인격화 자체화 실상화 사상화 시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타로부터 훌륭한 믿음이라고 인정을 받고, 많은 종교적 이력과 업적을 남겼다고 해도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믿음과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왜 믿느냐하는 믿음의 그 의존성을 우리가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 의존성에는 첫째는 객관적 의존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주관성이 아니고, 또 내 소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객관의 것에 의존하면서 그 하나님의 객관에 내가 유기적으로 피동 되면서 의존을 하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객관의 의존성이 아닌 주관적 의존성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자기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게 있습니다. 물론 이 때 노골적으로 자기의 어떤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을 이용해 먹고자 하는 것이라면 자기 스스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잘 알겠지만 그게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소위 하나님의 영광, 믿음을 위해라는 토를 달고, 그것도 예수이름으로 그렇게 할 때는 그게 그만 믿음이고 신앙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을 이용한다는 면에서 이용적 의존입니다. 자기 일에 협조해달라고 하는 뜻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그런 경우는 협조적 의존, 사욕적 의존, 요구적 간구적인 의존입니다.

 

이건 다른 겁니다. 무조건 예수여, 예수여부른다고 해서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여하고 왜 부르느냐 그 말입니다. ‘주여하고 왜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뭘 해달라고 부르는 것이냐? 주님을 부를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자식들이 엄마하고 부를 때 엄마라고 부르는 그 자식의 마음속에서 나 시간이 있으니 뭘 도와드릴까요?’ 하는 마음으로 엄마라고 부르는 게 있고, ‘나 어디 놀러 가는데 돈 좀 주세요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게 있지요. 다 같이 엄마라고 부른 거지만 부르는 그 이유가 다른 겁니다. 그런 것처럼 다 같이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내용 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았던지 그 무엇에 동화되어 산 것에 따라 그것을 닮게 되는 것이 인간이며, 무엇을 닮았던지 개체 개별적으로 궁극적인 그 결과가 완전히 다르게 나오게 되는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그 자기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런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자기 마음의 위안처로 삼자는 것도 아니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받자는 것도 아니요, 세상적인 어떤 목적성취를 위함도 아닌 영광된 궁극적 그 결과를 이 땅에 사는 동안 잘 준비하기 위하여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래가 현재되어 통곡소리 나기 전에!

 

이 결과성은 미래적 영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냐? 아니지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모르고 살고 있는 겁니다. 또 자기가 그런 면에 의식을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니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찾아 내가 그 의사와 뜻대로의 성품자가 되기 위함이 아닌 그저 인간 제 보기에 좋으면 하나님도 좋고, 제 보기에 싫으면 하나님도 싫다는 식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적 그 결과성은 물질세상인 현재에서 되어지는 것이니 내가 어떤 통치에서 무엇에 감염이 되고, 무엇에 동화되고 있는지 알고 살아야할 인간 자기인 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예수 믿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성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성입니까?

 

자기가 아무리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해도 물질적이며 가견적이며 세상적인 것을 하나님께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간구가 아니며, 그런 것을 주실 줄 믿고 구한다고 해도 그건 믿음도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므로 물질적이며 가견적이며 세상적인 것을 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자기 개인의 사욕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 위함이라 해도 그런 것을 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국의 신령한 것이 아니기에 세상에 속한 믿음이요, 물질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이런 믿음은 물질성적인 믿음이니만큼 하나님의 신령성은 입어지지 않고 그 사람의 속에는 물질적 육적 세상적 정신 사상만이 더 깡깡하게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물질적이며 가견적이며 세상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면 주시는 대로, 안 주시면 안 주시는 대로 최대한 자타의 이룰구원에 잘 활용하며 주님을 인격적으로 잘 닮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질적이며 가견적이며 세상적인 것을 하나님께서 꼭 주셔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의 신앙상태는 물질위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자들의 신앙이 이 차원에 머물고 있는 채 이 차원의 신앙(세상적인 신앙)을 깨고 로켓이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듯이 천국, 신령성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궁극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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