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전휴거의 명백한 증거 6-4. 요한계시록 7:14의 해석과 13:6의 연관을 통하여 본 휴거의 증거
장막에 거하는 자들은 휴거된 자들입니다. (4/4)
조우리 목사
드디어 본론에 도달했습니다.
앞의 글 4-1, 2, 3편은 미리 우리가 확인해야할 것들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3:6의 하나님의 장막안에 거하는 자들은 휴거된 자들이고 이 기록이 여기 있는 것은 환란전휴거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Part II. 계 7:15의 장막안에 거하는 자들
1. 장막을 치신다 = 거한다 라는 의미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므로 잘 보시면 주님의 큰 은혜를 깨달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4은 휴거된 자들이며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이들은 하나님의 보좌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밤낮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 표현은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밤낮이라는 것은 늘 거기에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참고: 이사야 6장의 스랍들과 계시록 4장의 네 생물들의 동일함과 밤낮 찬양하는 말을 보고 비교하기 바랍니다.)
1. 먼저 장막은 무엇이고 장막에 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장막을 치십니다.
먼저 장막은 영어로는 “tabernacle 테버내클”입니다. 그것이 영어로는
1. 유대의 장막. 이동성전 2. 성궤 3. 벽감. 4. 막사, 거처, 가건물
이라는 의미가 있으나 헬라어 원어는 스케네(명사) - 장막(tent)이지만 스케네오(동사) - 거하다(dwell)의 의미입니다.
장막을 치신다 라는 동사표현은 원어대로 보자면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dwell)”라는 의미입니다.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헬라어성경 Textus Receptus나 KJV을 보자면
7.15 dia; tou'tov eijsin ejnwvpion tou' qrovnou tou' qeou', kai; latreuvousin aujtw'/ hJmevra" kai; nukto;" ejn tw'/ naw'/ aujtou': kai ; oJ kaqhvmeno" ejpi; tou' qrovnou 보좌에 앉으신 이가 skhnwvsei ejp! aujtouv". 그 위에 거하시리로다.
동사 '스케노오' (skhnow)는 거한다. (dwell)입니다. 전치사 에피는 on, in, among의 의미입니다. KJV은 원어와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7:15 Therefore are they before the throne of God, and serve him day and night in his temple: and he that sitteth on the throne shall dwell among them.
이 의미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거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너희는 나의 집이다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성령이 거하시던 땅의 일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휴거된 자들과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혼인의 의미이고 결과입니다.
혼인하다 라는 말은 하나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휴거된 자들과 하나되어 영원히 거하시기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은 인간 중에서 가장 큰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이들 가운데 거하시게 됩니다. 환란전에 휴거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휴거되는 자는 "하나님이 장막만 쳐주시고 여기 살어라“ 라고 한글개역판의 번역으로 보자면 이런 뉘앙스가 가능한데 원어나 KJV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신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고 영원히 함께 휴거된 자들과 살아가실 것입니다. (shall dwell among them.)
<참고 -- 따라서 성경번역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장막을 치신다 하니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라는 내용이 가려집니다. 이것도 불완전한 번역입니다. KJV은 그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전치사 ‘에피’는 in, on, 등의 의미입니다. among(..중에)이라는 전치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
이 휴거된 자들이 곧 새 예루살렘성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전으로서 그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성입니다.
휴거된 자들이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성 자체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영원히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사실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 7:9-16 휴거된 자들 계시록 14:1-5 휴거된 자들 계시록 13:6에 나오는 장막에 거하는 자들= 휴거된 자들 계시록 17:14 계시록 19:14 하늘군대 =휴거된 자들(일 수 있음) 계시록 20:4=보좌에 앉은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 휴거된 자들 계시록 21장 새 예루살렘성= 휴거된 자들
따라서 이렇게 보면 휴거된 자들에 대한 말씀이 상당히 많은 분량입니다. 휴거라는 단어나 들림 받는다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가 없는 것은 이미 휴거되었기 때문이며 이들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
1) 하늘에 있다. 2) 혹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 3) 그리고 인간중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자는 사실 휴거되는 자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영광이 이에 미치지 못합니다. 착각하지 맙시다.
휴거된 자들은 예수님과 혼인한 자들이며 주님과 혼인이란 영원히 하나되고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도는 다릅니다.
사랑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이셔서 사랑을 부인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더욱 친근하셨고 그 중에서도 요한에게 더욱 친근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영생, 성령, 구원에 대하여 뚜렷한 개념을 가지게 되고 그리고 요한계시록도 쓰게 된 것은 예수님과의 이런 관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친근한 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연구할 것 > 이 동사 ‘스케네오’를 잘 살펴보면 몇 가지 해석의 단서를 발견할 것입니다.
동사 '스케네오'의 의미 : ‘천막을 치다’, 또는 ‘야영하다’ 즉 (상징적으로)‘거주하다’, 또는(특히) ‘거하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이 보호와 교제의 상징인 성막에서 하듯) <계 12:12>
1) to fix one's tabernacle, have one's tabernacle, abide (or live) in a tabernacle (or tent), tabernacle 2) to dwell
명사는 스케네=tent 장막 이고
동사 스케노오= make a tent 장막을 만들다 이라기 보다는 live, dwell입니다. 장막을 만들고 그 안에 거한다면 그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즉 한 집에 거하는 자가 됩니다.
친구라면 각자 집이 있고 일 년에 몇 번 친구집에 가서 잘 뿐입니다. 그러나 혼인한 부부는 한 집에 삽니다.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거침이 없고 서로를 잘 압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러한 관계를 갖는 자가 휴거될 것입니다.
이 구절 7장 9절부터 설명되고 14절에 나오는 이들이 바로 주 예수님과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 거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중에 가장 가까이 하나님과 거하는 자들이 됩니다. 따라서 이들이 휴거된 자들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휴거된 자외에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들은 없습니다.
* 이들을 환란 중에서 라는 말 때문에 순교하여 올라가는 자로 해석하는 것은 이런 성경적인 문맥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 7장 14절 구절은 절대로 환란중에 순교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들의 특성이 7:14에 나오는데 그 묘사가 또한 13장 6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순교한 자는 다음 14:13절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휴거된 자들을 말하고 있고 순교는 나중에 말하는 순서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스케노오 거하다의 사용
이 스케노오가 ‘거하다’ 라는 의미를 결국 말하게 됩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시매’도 같은 단어 스케노오 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1:3에도 같은 단어가 있습니다. 내용도 같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명사 스케네)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동사 스케네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이들은 지금 휴거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21:4이 나옵니다.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내용은 다음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7:14 휴거된 자들 그리고 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들은 늘 주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살아갑니다.
어린 양의 아내 = 휴거된 자들 = 새 예루살렘성에 대한 말씀
그런데 이 21장은 어떤 내용일까요? 바로 새 예루살렘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새 예루살렘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휴거된 자,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자들입니다.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스케네)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스케네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2절과 3절은 연결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런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잘 봐야 합니다.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즉 21:9-11을 보면 이것은 휴거된 자 = 어린 양의 아내 = 새 예루살렘성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21:2,3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을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더 가까이 거하시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또한 다음 말씀은 온 세상에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불신자들은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저 이렇게 딱 되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은 교회에 속한 어떤 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든 교회에 이 말씀을 주시지만 순종하는 자만이 이런 친근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주님이 자신의 삶으 문을 두드리실 때에 자기의 삶의 문을 열고 초청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더 가까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삶의 주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더 가까이 하시려고 하십니다.
즉 나는 열심히 주님을 찾는데 주 예수님은 조금 덜 나를 찾으신다 라고 하는 것은 상처받은 마음의 생각이라고 봅니다. 일종의 우리의 착각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 이전에 주님은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더 가까이 있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정결하게 하면 주 예수님의 성령안에서 나타나심을 체험하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이렇게 살려고 하시는데 주 예수님은 휴거된 자들을 영접하여 하늘에서 영원히 이렇게 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도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언가에 익숙합니다. 곧 훈련된 마음입니다.
죄악에 익숙한 마음이 있고 이런 마음은 거룩하신 주 예수님께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을 비판하는 나름 의로운 마음도 있지만 그 마음이 주님과 하나될 수 있는가 재고해야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그 마음은 변화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주님께 일치하는지 봐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마음이 합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각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마음에 무엇을 품고 생각하고 행하려고 하는지에 따라 하나님께 합한 마음이냐 아니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한 마음이 되려면 회개해야 하고 정결해야 하고 말씀으로 생각해야 하고 말씀이 충만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안에 살아가는 훈련이 되어야 하는데 능력과 은사를 초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드리는 삶은 구원 이후에도 나의 삶을 통째로 드리는 그러한 헌신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2장의 산제사입니다. 이 자들은 오직 주님을 중심으로 정말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주님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먹습니다. 하루 종일 세 끼 식사를 같이 합니다. 가족보다 가깝고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것입니다. 그것이 친근한 사이이고 사랑하는 사이인 것입니다.
그런 자가 이기는 자가 됩니다. 다음이 그렇게 설명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이기는 자들을 보좌에 앉게 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휴거된 자들이고 바로 계시록 20:4입니다.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이 구절은 또 내가 보니 라는 구절로 그 다음에 오는 사람들과 구별됩니다.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휴거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바로 휴거된 자들이며 3:20절처럼 주님이 이 땅에서 깊이 교제하시는 그들이 바로 휴거될 것입니다. 이것이 휴거의 조건입니다. 정결과 거룩함으로 이 땅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자가 휴거됩니다.
주님안에 거하는 자들, 곧 휴거된 자들이이 나타나는 구절들
3:20-> 7:14->13:6->20:4-> 21:3,4 9-11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스스로 정리를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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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3:6의 장막에 거하는 자를 보면 이것이 환란전휴거의 증거입니다.
이 단어 스케노오는 다음과 같은 용례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곳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례를 보면서 정리해 봅시다. (자꾸 이런 것을 찾는 이유는 한글성경이 완벽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a. 지금 이 13:6절은 번역상 문제는 없습니다.
b. 그런데 13장은 이방인의 환란기의 설명의 시작입니다. 제발 이 때가 중간시점이라고 착각하지 맙시다. 짐승이 처음부터 나타나는 것이 바로 환란기입니다. 짐승이 나타나지 않는데 환란기라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막는 일을 그만하시고 올라가시면 이때 휴거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짐승이 나타납니다. 이때를 환란기라고 합니다.
c. 13장은 짐승은 환란기가 시작되어 나타나서 어떤 존재인가가 드러나고 있는데 이 짐승은 나타나자 마자 13:6에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장막 곧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자들을 모독합니다.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훼방한다는 것은 신성모독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간 자들을 이 땅에서 돌맹이를 던지거나 대포를 쏘거나 미사일을 쏘아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이긴 자들입니다.
우리는 꼭 같은 조건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을 이기는 것이라고 착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과 칼로 싸우자 하는 자들에게 핵폭탄으로 공격하면 이기는 것입니다. 창과 칼로 공격하는 자에게 핵폭탄이 있는데도 꼭 창과 칼로 싸워야할까요?
이제 곧 세계3차대전에는 미국은 UFO, 레이저무기, 핵폭탄, EMP, Haarp등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들의 자유입니다. 무기를 규정하면서 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 보니 EMP가 이스라엘이 가진 신무기라 하지만 사실 누구든지 핵폭탄을 가진 나라는 이 EMP무기를 가진 것입니다. 상공 몇 십 Km에서 폭파시키면 EMP가 되어서 그 지역의 일정반경안의 모든 전자제품을 파괴합니다. 그러면 수리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이스라엘은 핵폭탄이 100개가 있으므로 이란이 핵폭탄을 제조하기 이전에 이란을 공격한다면 전혀 불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란에 핵폭탄으로 공격할 것이라면 시리아나 다른 위협적인 나라들에게도 핵폭탄으로 공격하리라 생각됩니다.
다시 성경본문을 보겠습니다.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천사나 네 생물인가요? 아닙니다.
상황상 환란전에 휴거된 자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환란전휴거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즉 이들은 말하기를 “휴거? 좋아한다. 외계인이 잡아간거야” 라고 소리칠 것이고 뉴스에 낼 것입니다. 그렇게 낼 것입니다. 대규모의 사람이 사라진 것을 가지고 휴거라고 말할 리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휴거된 자들을 조롱할 것입니다.
이로 볼 때에 이 이방인의 환란기의 시작부분에 13:6에도 휴거된 자들이 하늘에 보인다는 것은 환란전 휴거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13:6 휴거된 자가 언급되고 그리고 다음 장 14:13,14에 순교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휴거가 일어난다는 것은 환란후휴거를 말하는 자들의 억지 주장에 불과합니다. 13장 이후로 휴거된 자들(ALREADY RAPTURED)에 대한 서술은 나오지만 그 휴거되는 사건은 보이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계시록 13:6에 나오는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 곧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자들은 휴거된 자들이며 이 일의 순서로 볼 때에 환란중간휴거도 아니며 명백한 환란전휴거입니다. 환란전에 휴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대로 믿는 것입니다. 환란후에 휴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거없는 생각입니다.
지금 나는 휴거에 합당하게 준비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어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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