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선교적 관점에서 본 회심과 개종 (이용원)

수호천사1 2012. 9. 16. 11:30

선교적 관점에서 본 회심과 개종

이용원


I. 들어가는 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그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고 하시면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15)고 하신 것이다. 이런 사명을 이어받은 오늘의 교회도 기회를 얻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common witness) 하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conversion) 그의 양 무리에 속하도록(proselytize)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복음증거(witnessing)와 회심(conversion)은 긍정적인 태도로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대신 개종(proslytism)에 대해서는 회심과는 전혀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봄으로써 선교 사역에서 아예 그런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널리 퍼져있는 형편이다.1)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먼저 성경을 중심으로 바른 이해를 시도하고 거기에서 도출되는 신학적 입장을 간략히 정리해 보려고 한다. 단 이 문제는 이론 신학적인 입장보다는 선교학적 입장에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선교적 입장을 중심으로 접근할 것이다.

II.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서의 복음증거와 복음전도

기독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목격한 증언(eyewitness)으로 시작된다. 사실 증언은 예수의 사역에서 이미 나타났고 실천되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께서는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 18:37)라고 하심으로써 자신의 사명이 진리에 대한 증거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사도 요한은 기록으로 남기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21:24)고 하면서 그 진리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한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고(행 4:9-14) 이를 금하는 그 권력자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함으로써 그런 증언 생활이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임을 밝혔다. 따라서 선교사역에 있어서는 이런 증언의 삶을 그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복음 진리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증언이 없이 행하는 선교란 허울뿐인 것이다. 이 증언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와 피조 세계의 주와 구주(the Lord and Savior)가 되신다고 선포하고 또 알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을 불러모으고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그들에게 이 증언의 사명을 맡기셨으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맡기신 선교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증언의 삶은 복음을 입으로 증거하고 널리 전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이 행하는 증거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증거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봉사라는 사명을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the principalities and powers) 앞에서(엡 6:12; 롬 8:38-39) 그 증언을 해야 할 때도 있으므로 언제나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은 갖추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로 기독교의 선교역사는 고난과 순교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계 6:9) 박해를 받고 순교에까지 이르는 역사의 연속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사도들은 거의 순교의 잔을 마셔야만 했었고 그런 피의 역사는 현대에까지 이어져 왔다. 결국 교회 역사의 교훈은 “순교자의 피가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The blood of the martyrs is the seed of the Christians)”라는 말로 표현되었다.2) 기독교의 증언과 복음증거 생활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의 증거(common Christian witness)로 이어진다. 힘들고 위험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교회는 수많은 분열을 경험해 왔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는 분쟁이 이어져 왔지만, 또 신학적 논쟁도 계속 이어지겠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고 그 길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데는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선교적 과제인 것이다. 공동의 증거를 위해서는 특별히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 주장만 계속 관철하려고 해서는 공동의 증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적인 교회들 사이에서의 문제이지 이단이나 잘못된 교회들을 포용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절대 진리로서의 복음의 핵심은 그대로 지키면서 문화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에서는 양보하고 협력함으로써 공동의 증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3) 이런 공동 증거의 삶은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교회가 말과 행함으로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이다. 한 개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을 완전히 증언할 수는 없기 때문에 비록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복음진리의 선포 사역에 동참하고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의 증거는 단순한 협력이나 연합하려는 노력보다는 훨씬 폭넓은 개념이다.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과 통일성 안에서의 다양성(diversity in unity)을 추구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서로가 다른 그리스도인이나 다른 교회가 가진 은사나 진리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기(partnership in evangelism)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공동의 증거에는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예배와 예전에 대한 서로 다른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하는 이해, 교회의 권위에 대한 신앙과 윤리적인 문제들(예를 들면 낙태, 동성애,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권리 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의 차이점들이 쉽게 극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자칫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상호 비방을 야기함으로써 선교에 지장을 주기까지 하는 것이다.4) 따라서 이런 상황과 경험들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선포하는 바른 방법을 찾는 연구와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III. 회심(conversion)에 대한 바른 이해

회심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종교나 신념이나 견해로 향해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사람들을 예정에 따라 택하시고 택한 사람들을 부르시며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사람을 영화롭게 하신다는(롬 8:30) 구원론의 교리를 믿고 있다. 문제는 그 부르심에 바른 응답이 있을 때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교는 사람들에게 그런 부르심에 바른 응답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 증거를 통해서 그런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부르시는 하나님께로 향하여 돌아서게 하는 것이 바로 회심인 것이다.

A. 성서적 이해

성경에서 회심을 논할 때는 흔히 사도 바울의 회심을 예로 든다. 그러나 그보다는 먼저 구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보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구약에서 회심을 나타내는 개념은 shub로 어떤 개인이나 그들이 살고있는 사회의 ‘계속적인 방향전환(continuing reorientation)’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말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로 돌아오라고 촉구할 때, 즉 하나님의 뜻과 길로 그리고 세상을 향하신 그의 목적을 이루는 데로 돌아서라고 할 때 사용되었다. 변화형들이 1,000번 이상 사용되지만 명사형은 쓰이지 않고 동사형으로 쓰이고 있다.5) 그런데 구약에서 돌아오라는 회개에의 촉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향해서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acts)를 체험하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하고 계시는지를 직접 경험한 민족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옛날에 세운 언약 관계, 곧 다른 이방의 신들에게 한눈 팔지 말고 오직 그가 주신 규례와 율법에 따라 그 만을 섬기고(예배하고) 형제와 이웃된 사람들에게는 정의를 행하며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길로 돌아오라는 촉구였다. 원래 돌아서는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과 집단적인 차원을 아울러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도 된다. 결국은 사람들을 섬기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이 무엇보다도 먼저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으로 구약에서의 회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준다.6)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특성은 돌아서라고 촉구하시는 하나님이 먼저 부르시려는 그들을 향해 돌아서 계신다는 사실이다. 신약에서 회심을 나타내는 개념은 두 가지이다. 먼저 epistrephein은 잘못된 길로부터 돌아선다(to turn around from a wrong way)는 뜻의 말이고 metanoein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생각한다(to think anew radically)는 말이다. 원래 이 말은 한 신앙 공동체로부터 다른 신앙 공동체로 옮기는 것과 관련되지 않고 가치관과 충성심, 그리고 생활양식에 있어서의 깊은 변화와 관계되는 말이었다.7) 그래서 WCC가 주도하고있는 새로운 선교(new mission)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회심을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것이라는 전통적 의미를 버리고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고상한 신념에로(예를 들면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신념에서 민주주의에로 돌아서는 것 등) 또는 인간을 비하시키는 데서 인간을 고상하게 보는 데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 의미를 희석 확대시키고 있다.8) 하여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돌아서서 그리스도를 믿는 바울이 된 사건(행 9장)이나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일은 전자의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우리말로 회개라고 옮긴 개념으로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신약에서의 회심 이야기는 먼저 구약의 예언자들의 연장선상에 있던 세례 요한이 회개하고(metanoia)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마 3:8) 촉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또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신 말씀에서 회심의 중요성을 확인해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것이고 이제 그 나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심은 이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고 그 시민권은 사람이 개인적인 경건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왕께로 돌아오고 그 돌아온 결과로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로 돌아서는(그래서 섬기게 되는) 삶을 통해 얻게 된다.9) 여기에서 사용된 ‘회개하라’는 단어와 ‘믿으라’는 단어는 현재형이므로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착된 어떤 것을 나타내기보다는 계속되는 어떤 것, 곧 한번 돌아서고나서 그것으로 끝나버린 어떤 상태이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향한 배려로 나타날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때에도 베드로는 회개를 촉구하였고(행 2:38),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즉시 일종의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다시 말해서 회심은 새로운 언약의 백성들의 일원이 되는 것이요 그 나라가 임한 표가 된다. 원래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생각해보고 잘못된 길임을 깨달았으면 돌아서서 전혀 새로운 세계의 일원이 되어 그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회심인 것이다.

B. 신학적 이해

신학적 이해는 성서적 이해에서 출발하며 또 그 범위를 벗어나서도 안된다.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경은 회심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그것은 하나님(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시작을 경험하는 것이요 중생(요 3장)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여간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의 기본적인 의미는 그리스도(하나님)를 향한 회심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10)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받아들이고 그의 제자로서의 길을 따르겠다는 개인적인 결단이 바로 회심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죄와 자기 중심성(self-centeredness)과 악의 세력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회심 사건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시는 초자연적인 변화인 것이다.11)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a gift of God’s grace)인 것이다. 둘째로 회심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것을 넘어서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쉽게 말해서 충성의 대상이 바뀌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를 지배하던 것(우상들과 다른 신들, 또는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던 모든 것)에게 바치던 충성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만 바치는 것이다. 그만이 우리의 구주와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세계관이 변하고 우리의 행동과 태도가 변하며 우리가 맺고 사는 관계들이 변하게 된다. 물론 가족이나 이웃, 민족과의 관계 같은 전에 맺고 살던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하여간 그 관계들은 이제 변하게 되어있다. 충성의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12) 그리고 돌아설 때는 버려야 하는 것이 있다. 회심의 경우 그것은 옛 생활이요 죄에 얽매인 삶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요(엡 4:22-24), 옛 사람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버림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롬 6:6; 갈 2:20). 그것은 영적 죽음의 상태를 벗어나 부활을 체험하는 경험인 것이다. 하여간 이전에 굴레가 되어 삶을 지배하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되는 일련의 과정이 회심인 것이다. 복음증거 또는 복음전도의 결과로 옛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그와 그의 복음진리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이것이 바로 영원한 구원으로 향한 길에 들어서는 것이 된다. 셋째로 회심은 항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순종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에게 순종하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 늘 함께 간다는 말이다. 칭의(justification) 뒤에는 필연적으로 성화(sanctification)가 따르는 것과 같이 회심 뒤에는 반드시 주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는 삶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떠나는 것(창 12:1)은 회심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3)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 죽었다는 것(약 2:26)과 같은 논리에서이다.

C. 선교적 이해

첫째로 회심은 선교의 결과 또는 열매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회심은 또한 선교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선교는 학문적인 이론이기보다는 현실이요 실천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것이다. 우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회심에 이르도록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사람 자신을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계획은 한 단계 더 넘어간다고 해야 한다. 세상에서 하시려는 일 곧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바르게 살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고 부름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회심자, converts)은 그 일을 위해서 함께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하고 그들도 구원의 길로 들어오도록(증거의 생활) 해야 하는 것이다.14) 아브라함은 모든 족속으로 복을 받게 하시려고 부르셨고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로 삼아 그들도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와의 관계 회복으로서의 회심은 물론 이웃과의 관계 회복으로서의 회심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15) 그러나 주의할 일은 회심은 전자가 중심이고 후자는 회심한 사람들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사명으로 이해해야지 그 이상으로 발전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로 회심을 단순히 개인적인 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개인적 체험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구약의 언약관계에서 또는 신약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은 일(행 16:33) 등에서 우리는 가족 단위의 또는 집단적인 회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16) 선교학에서 말하는 집단 개종운동(people movement)을 통해 일어나는 회심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집단이 한꺼번에 회심한다(group conversion)는 것을 주장하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그 회심 행위에 동참한다거나(multi-individual conversion)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친숙한 관계에 있고 앞선 사람이 신뢰의 대상일 때 그가 하려는 것을 보고 따라가는 형태의 회심(mutually interdependent conversion)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17) 그러나 역시 회심은 개인적인 차원의 회심이 중심이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부터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그런 내적 변화가 밖으로까지 영향을 미치어 삶 전체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셋째로 회심은 갑작스런 사건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가?

 

이 점은 선교적 관점에서 오랜 논쟁을 거쳐온 문제이다. 물론 회심은 극적인 체험으로 어떤 한 시점에 이루어질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중생이나 칭의가 단번에(once-for-all) 이루어진다는, 즉 어느 한 시점에 전혀 다른 신분에로 옮겨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논리와 맥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선교적 또는 실제적 차원에서 볼 때 회심은 그보다는 좀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나 동시에 회개와 믿음으로(in penitence and faith)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우리 자신의 행위도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위기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과정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좀더 느린 과정과 힘든 노력을 요구할 때도 있다. 어쨌든 회심이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고 우리의 삶 전체를 철저히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로 가져와서 마음과 성품의 변화를 받아 전적으로 새롭게 되고(롬 12:1-2)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느 정도라도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려는 것이다.18) 흔히 이런 논의를 할 때 사도 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기도 한다.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그것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던 사울을 그리스도의 위대한 종이요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 바울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스데반의 순교 사건 이후로 그가 겪었을 수 있는 심리적 양심적 갈등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체험을 극대화시켰으리라는 설명도 나온다.19) 그런 극적인 회심 사건마저도 일련의 과정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넷째로 회심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그리고 심리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듯이 사람은 사회와 문화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회심도 이런 면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놓인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말과 행위를 통해서 영향을 입는 결과가 회심의 한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문화(예를 들어 선교사가 전해주는)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 자체를 회심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회 문화적인 요인은 회심을 일으키는 동기는 될 수 있어도 회심은 그리스도(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고 그를 주님으로 모시는(충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회심은 그 결과로 그의 세계관과 삶의 양식, 그리고 행동까지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20)

 

다섯째로 회심은 한가지 형태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회심자의 원래의 상태에 따라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 부류는 이미 신자의 대열에 들어와 있기는 하나 이름뿐인 사람들(nominal Christians)로서 복음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이 전혀 문화적인 거리나 차이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름뿐인 신자들이 진정한 회심을 하는 경우이다.

 

둘째 부류는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 그 지역에 세워져있는 교회와 동일 문화 안에 속한 사람으로서 복음의 내용 이외의 여타 문화적 갈등을 느끼지 않고 회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처럼 유대교 전통에 속한 사람의 회심과 같은 경우이다. 후일의 어거스틴(Augustine)이나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의 회심도 같은 부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현대의 낙심해 있던 신자가 다시 깨닫고 회심하는 경우도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셋째 부류는 기존 교회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경우로 기존 교회와 회심자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상당히 크다. 회심자는 회심과 더불어 상당한 문화적 갈등을 겪기 쉽다. 예를 들자면 그 지역에 교회는 있으나 거기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이 전혀 다른 세속 문화에 젖어 살던 사람이 회심하여 그 교회의 신자가 된 경우라고 하겠다.

 

넷째 부류는 그 지역에 토착 교회가 없는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이 회심하는 경우이다. 좀 구차한 예를 들자면 교회나 복음에 대하여 전혀 사전 지식이나 견문이 없는 두메산골 사람이 대도시로 나왔다가 거기서 회심을 체험하고 대도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회심 후에 일종의 문화적 충격(cultural shock)까지 겪을 수 있다.21)

IV. 개종(proselyte, proselytism)에 대한 바른 이해

우리말로 개종(改宗)이라고 할 때 다른 종교로 종교를 바꾼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보면 회심과 개종은 분명히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 교회에서 발전한 proselyte이라는 말은 회심이라는 개념과 상당 부분 유사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원래 이 개념은 히브리어 ger(외국인 거주자, stranger)를 희랍어로 옮긴 proselytos 에서 왔다.

A. 성서적 이해

개종 또는 개종자라는 개념은 출애굽기에서부터 나온다. 모세를 통하여 처음으로 유월절 규례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회중에 합류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proselyte)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출 12:48). 물론 여기서는 그 개념을 할례 여부에 관계없이 이방인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후일 70인역 성경(LXX)에서도 할례를 받고 완전히 유대인 회중의 일원이 된 사람들만을 지칭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22) 그러나 유대교는 예수님 시대까지도 유대민족중심의 편협한 종교였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식으로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만을 개종자로 인정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유대인이 아니면서 참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으로 멜기세덱과 욥이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개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하여간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로 ‘개종자란 다른 민족들로부터 나와서 스스로 주 하나님께 연합된 자(one who joined himself to the Lord from other nations)’를 의미하게 되었다.23) 1세기 경의 어떤 기록에 따르면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들어와서 개종자로 받아들여지려면 할례, 세례와 성전에서 바치는 제물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고 한다.할례는 율법에 기록된 요구였고 세례는 남녀를 불문하고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오는 식(immersion)의 의식으로 치러졌으며 제물은 유대인들의 결례 제물을 기준으로 드려졌다고 한다.24) 흩어진 유대인(Diaspora)들은 회당제도를 발전시켰는데 그들의 종교와 회당 예배는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매력적이었고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그들의 유일신 신앙, 높은 윤리적 표준, 회당에서 드려지는 합리적인 예배, 기록으로 남아있는 경전으로서의 성서, 유대인 공동체의 신앙 중심의 결속 등이 그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이방인들이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25)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는 지리적인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쉽게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으나 적어도 유대인들의 사상과 관습을 용인하는 범위에서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또는 ‘경건한 사람’으로 불리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이 둘을 합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행 10:2)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여간 신약에서는 이 개념이 4번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예수께서 직접 사용하신 경우이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는 말씀 중에 “너희는 교인(proselyte)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에서 쓰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개종하고 들어온 개종자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행위에 대한 책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은 3번은 모두 사도행전에서 쓰이고 있다. 2장에서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proselytes)”(2:10)에서 쓰였고, 6장에서는 첫 집사들을 선출할 때 ‘유대교에 입교한(proselyte) 안디옥 사람 니골라’에서 쓰였으며, 13장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에 가서 행한 바울의 설교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devout proselytes)이 많이’ 그들을 따랐다는 데서 사용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당시에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고 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까지 올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도 그들이 단순히 유대인들과 함께 회당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는지 아니면 할례까지 받고 완전히 유대인이 된 사람들인지는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약에서는 유대교로 들어 오는 것을 개종한다 또는 개종시키다(proselytize)라고 표현했고 그렇게 하려는 조직적 노력을 철저한 개종운동(proselytism)이라고 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방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회심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유대교와의 관계, 곧 일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회심의 조건으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요구한 것이었다. 그들은 할례를 구약의 유대교에서처럼 이방인으로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참된 개종을 했는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행 15; 1).

B. 신학적 이해

앞에서 살펴본대로 개종문제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에서 그 역사를 더듬을 수 있고 또 복음 전파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 선교 역사는 복음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회심운동이 일어나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개종운동으로 발전하여 복음이 땅끝까지 퍼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성경에서 보았을 때 회심과 개종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서 때로는 동의어처럼 바꾸어 써도 문제가 없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선교 사역은 바로 개종운동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에큐메니칼 선교운동이 펼쳐지면서 특히 WCC가 선교에 관한 중요한 연구보고서들을 많이 내놓으면서 개종이라는 개념을 회심이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만 담긴 개념으로 거의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개념을 “기독교적 복음증거를 수행할 때 부당한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26) 그렇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 개념이 주요한 교회들 간에 일어난 부정적인 일들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개신교 선교사들이 로마교회나 정교회(Orthodox church)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 가서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개신교 기독교(Protestant Christianity)로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27) 때로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 상대 교회의 교리나 신앙 그리고 실제 생활 등을 비판하거나 비난하고 자기 교회만 참된 교회, 바른 신앙이고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치며, 그 외에도 부당한 방법과 수단들을 동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28) 둘째로 개종자를 얻어내기 위하여 선교 현지에서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유혹하거나 뇌물성의 금품을 제공하거나 부당한 압력이나 위협을 가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힘을 이용하여 선교 실적을 과시하려 한 역사(특히 식민지를 확장하면서)적 사례들이 그 개념에 부정적인 의미를 심어 주었다.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교회의 성공적 선교라는 실적 위주의 자기과시적 행위가 앞섰던 것이다. 결국 건전한 복음증거를 통해 참된 회심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선교의 잘못된 동기와 목적, 잘못된 정신과 수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버리는 부정적인 선교를 통한 형식적인 개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29) 셋째로 위와 같은 과정에서 인간의 기본권의 하나인 종교의 자유가 침해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종교나 신념을 자기의 양심에 따라 택하거나 바꿀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앞에서 말한 그런 부당한 요소들이 작용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종교적 자유의 침해가 되는 것이다.

C. 선교적 이해

선교와 개종운동은 결코 따로 떼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선교는 개종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먼저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개종 또는 개종운동을 통해서 그것이 선교적 관점에서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 거기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유대인들에게 먼저’(롬 1:16)라는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먼저 유대인들을 상대하고 그들이 복음을 거부할 때에는 지체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향한다는 원리였고 그는 이 원리를 고수하였다(행 13:46-47). 그러나 복음 선포는 한 민족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를 위하여 먼저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이방인들로부터 개종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이 사람들은 매우 열심이었다. 그들은 할례를 받고 완전한 유대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당과 흩어진 유대인들(Diasporas)을 포함한 이들 개종자들이 이방 세계를 개종시키는 교두보 역할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멀리까지 가지는 못해도 주위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복음의 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30) 실지로 바울의 선교사역에 동역자로 등장한 사람들 중에는 그런 출신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화적으로 동일한 계층의 사람들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다시 제자로 삼아 파송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이들은 헬라와 로마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므로 당시 세계를 그렇게 단 시일에 복음화한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한편에서는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개종이 허락되고 인정된다고 하는 주장을 펴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조건없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다툼과 논쟁이 심화되었고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베드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역설함으로(7-11)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고, 결국 회의를 주재하던 야고보의 의견으로 결론을 보았으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다”(19-20)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제시된 생활 규범도 기독교에 입문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 아니라 이미 개종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하여간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일단 들어온 신앙인이라면 최소한 이런 규범은 지키게 하자는 것이었으니 이런 원리는 선교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따를 불변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대교회가 당시의 희랍-로마 사회에 기독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사회 문화적 요인을 들기도 한다. 당시에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상대 세력을 동방에서 전래된 종교의식(oriental cults)과 희랍 철학으로 보고 거기에 교회가 바르게 대처한 것이 성공적인 요인이었다는 사회학적 연구 결과이다. 희랍 로마 사회의 다신교적이면서 신인 동형론적 신들의 세계는 일반 서민들의 종교 의식을 지배하지 못했고 오히려 동방에서 전래된 신비 종교의 의식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교회의 세례와 성찬 의식은 피 흘리는 희생을 바치지 않고도 그런 신비를 체험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랍 철학이 지성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복음이 가르치는 내용은 충분히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31) 이와 같이 유대교보다도 기독교 복음이 훨씬 많은 개종자를 단시일 내에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흡인력을 크게 하였던 사회 문화적 요인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교회는 이 원리를 선교 현장에서 바로 활용하는 것, 곧 말씀과 더불어 성례전을 바로 실행함으로써 민간 신앙의 늪에 빠져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더 많은 회심자와 개종자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의 확산으로 이상한(왜곡된) 신비를 추구하고 탐닉하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면서 우리 시대의 교회는 바른 신학과 더불어 바른 신비를 교회 안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선교적 과제인 것이다.

V. 맺는 말: 선교 현장에서의 회심과 개종

선교 현장에서 회심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어떤 것이고 개종을 위한 노력(proselytism)은 피해야 하는 것인가? WCC 측의 에큐메니칼 보고서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렇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일부 복음주의 선교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려는 사람들도 있다.32) 문제가 되는 것은 선교의 성과를 성급하게 이루려는 잘못된 동기와 잘못된 수단들이지 그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이나 본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고에서 고찰해본 대로 그것은 오늘도 당연히 추구해야 할 일이고 동시에 회심과 개종은 유사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선교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북음을 가지고 접근해서 그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룬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때 선교의 목적은 회심과 개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회심이 없이는 참된 개종도 없고 참된 개종 없이는 성공적인 선교란 없다. 말을 바꾸어서 개종으로 열매맺지 못하는 회심은 진정한 회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심과 개종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이고 선교 현장에서는 따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지적된 대로 인간적인 실적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되는 잘못된 수단들과 방법들은 단호히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바꾸도록 하는 것을 개종의 예로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개종도 아니고 선교도 아니기 때문이다.33) 21세기의 교회는 초대교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선교적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위임받고 있다. 초대교회의 그 소수의 무리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나고 그 지역이 넓어졌다면 오늘의 교회도 같은 사명을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음의 전령이 되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회심과 개종이 같으냐 다르냐를 두고 논쟁할 이유도 틈도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그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믿고있기 때문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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