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구원받기 전에 요구되는 의와 구원받은 후에 요구되는 의

수호천사1 2012. 9. 3. 17:21

구원받기 전에 요구되는 의와 구원받은 후에 요구되는 의

1) 구원받기 전에 요구되는 의


구원받기 전의 우리 인간의 상태는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과 같이 모든 인간의 죄 아래 갇혀 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 율법은 죄에 무감각한 인간들에게 죄가 죄인 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자력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옥 형벌이 불가피한 상태이다. 누가 죄에 빠진 이 인류를 구원할 것인가?


이런 상태에서 죄인들을 대신할 한 다른 의가 필요하다. 그 의는 완전한 의요, 하나님의 요구와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해 주는 의인이라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죄가 없었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흘리신 피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7-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러므로 구원받기 전 상태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그 어떤 선행이나 노력, 행위도 필요없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려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실로 어리석다. 절대로 그 방법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고, 그 예수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된다.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되면 천국시민으로서 삶이 시작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의 완성은 아니다. 구원의 완성을 구원받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마귀는 그 받은 구원을 천국 들어가기 전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으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한번 얻은 구원을 빼앗기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지옥간증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불신자만 아니라 믿던 자들까지도 지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해서 절대 안심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을 기억하고, 구원받았기에 더 힘써 나아가야 한다.


2) 구원받은 후 요구되는 의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후로는 율법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이것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천국시민이 되었다는 증표인데, 그렇다면 천국시민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 천국시민의 법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의로 의롭게 된 자들은 그 의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 해서 율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곧 죄이기 때문에 다시 죄인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 죄를 회개치 않는다면 받았던 구원도 결국에는 잃어 버리게 된다.


구원받은 자가 율법대로 사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대로 사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사는 것이다. 마지 못해, 의무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과 감격 때문에 계명대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사는 것이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율법대로,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지키는 율법은 제사법이나 의식법, 혹은 당시 유대민족에 적용되었던 그런 법이 아니라 영원법이다.


3) 완전한 의를 이루라!


성경은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고, 그로 인해 의롭게 될 수도 없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라’ ‘거룩하라’고 요구하신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 16)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38)


오늘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놓치고 있다.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고, 우리의 행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했기에 우리는 완전한 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 놓고 있다. 완전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신데 우리가 어떻게 의로와질 수 있느냐,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박아 놓고 있다. 이런 생각이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도 하늘의 아버지처럼 온전해 지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처럼 완전하거나 거룩하게 될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하고, 죽어서 천국가면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할 것인가?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느니라.”(벧후 2:4-6)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젠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주님처럼 거룩함에 이르러야 하고, 완전함에 나아가야 한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신의 성품에 참예’(벧후 1:4)하는 자가 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 ‘흠도 티도 없이 보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믿음’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더 완전한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시작한 성도의 삶을 어떻게 완전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전 5:5-9)


구원은 중생을 체험하는 ‘일회적 사건’인 동시에, 기나긴 여정을 달리며 이루어가야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결코 떨어져서는 안된다. 구원을 잃어 버려서도 안된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서도 안되고, 개가 토했던 것처럼 옛 죄로 돌아가서도 안된다. 오직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러면서 온전히 예수님처럼 변화되어야 하고, 성자가 되어 나가야 한다. 완전한 의에 이르도록 자신을 쳐 복종하고, 회개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때, 천국시민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천국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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