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경계하신 잘못된 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두 가지 잘못된 기도를 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첫째는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기도요, 다른 하나는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1)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기도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5).”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먼저 외식하는 기도를 경계하신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외식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그들은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큰 거리 어귀에 나와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했다. 그들이 얼마나 사람에게 보이는데 신경을 썼는가 하는 점은 그들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면서 예루살렘의 장날인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하여 금식했다는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하고 책망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 모든 사람으로 구별된 삶을 살게 하려는 선한 뜻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외식이 지나쳐, 외모를 중시하고 사람에게 보이려는 헛된 교만과 욕망에 빠져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낳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경계한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그분과 교제하는 것인데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하는 생각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비중을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는 잘못된 기도가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경계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외모를 보시는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경계하면서 분명하게 기도의 요체를 가르치고 있다.
첫째로,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의 외모보다는 기도자의 중심을 하나님께 바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밀한 골방의 기도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 즉 마음의 기도이다. 우리의 마음만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되어 있으면 표현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5:6).”
둘째로,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우리의 외모나 표현이나 방법이나 기술 때문에 기도의 응답이 좌우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골방을 보신다. 우리가 떠듬거리거나 기도하는 법을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이 그를 향하여 중심으로 기도하면 그분은 받으신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는 엘리 제사장이 보기에는 술에 취한 자가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제사장은 한나를 향해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1:14).”고 책망한다. 그러나 한나는 중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사 사무엘을 낳아 타락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제사장을 삼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쏟아 하나님과 교제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방식이나 표현이나 외모에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진정 마음을 바쳐 기도하는 중심의 기도, 골방의 기도를 격려하고 개발해야 한다. 떠듬거리는 기도, 연약한 기도, 유창하지 못한 짧은 기도 때문에 고민할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 것이다.
2)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마6:7).”
예수님은 바로 이어 이방인의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를 경계하신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말에 말을 반복하여 하는 기도이다. 예수님 당시 이방인 도시 에베소에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여신상을 모신 신당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신당에 들어가 아데미 여신상 앞에서 “크다 아데미여!” 하는 기도를 반복해서 드리면 기도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때 기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크다 아데미여!”를 많이 반복하느냐에 따라서 기도의 응답이 달라진다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쉬지 않고 그 말을 반복했다.(행19:34) 이같은 이방인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공덕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가 기독교 기도생활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방인들처럼 기도를 길게 하여야 잘 응답받는다 생각하여 더 길게 기도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이방인들은 얼마나 열심히 길게 기도했느냐에 따라서 신의 응답이 좌우된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기도의 응답이 신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쟁취해서 얻어내어야 할 보상이나 대가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누가 더 많은 공덕을 쌓았느냐? 누가 더 말을 많이 하고 더 오래 기도했느냐에 따라 기도의 응답이 당연히 달라진다고 믿었다.
이같은 이방인의 사상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며,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기독교의 은혜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노력이 하나님의 응답을 좌우한다는 공덕종교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순히 한마디로 이러한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다.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 즉, 기도의 길이와 기도의 응답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기도를 길게 했기 때문에 응답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짧게 했기 때문에 응답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는 30-35초의 기도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30초만큼 짧다고 해도 우리 주님은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길게 기도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기도가 길든지 짧든지 간에 우리 중심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기도 제목이 넘쳐 오랜 시간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요, 짧은 시간이지만 심령을 집중하여 중심으로 기도 드리게 되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다.
신앙은 ‘전체 삶’이다. 평소 자신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삶이 일치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면, 아무리 그 형식이 정교하고 수려하며, 오랜 시간 공력을 쌓는다 할지라도, 어찌 그 기도를 진실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자식과 말 없어도 진실한 자식을 어찌 부모가 모르겠는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누구보다 정확히 분명히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아버지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다면,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의 진실된 삶으로 기도드려야 할 것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5:2).”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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