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 하나님의 역사 경영의 완성 목표
한국의 여러 교회가 선교에 대해 적극적이고도 헌신적으로 진력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중복하여 말하는 것 같지만, 아직도 선교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인 교회들이 절대다수(80% 이상)인 것을 확인하면서, 모든 현대 교회가 보다 더 선교에 대해 적극적인 이해와 좀 더 적극적인 참여를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다행히 현대 교회는 선교의 중요성을 많이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과거 교회사에 비해 비교적 좋다는 것이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선교의 중요성을 현대 교회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현대 교회의 사역 방향이나 목표가 아직도 지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에 주로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역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시는 것은 결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적극적으로 선교를 교회의 목표로 삼지 않는 교회는 장기적으로 나아가야 할 교회의 최종적인 방향과 목표를 잃고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불행한 교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목표란 무엇인가?
목표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리고 나아가는 목적지이다.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 과녁의 정중앙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다. 잘못 겨냥된 화살, 목표를 향하지 않는 모든 화살은 탈선하게 된다. 이것은 죄의 개념과 같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것, 하나님의 뜻을 범하는 것이 죄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또한 죄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사명이 곧 교회가 나아가야 할 목표이고, 그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교회는 곧 궤도에서 탈선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한 마디 질문 속에 담겨 있는 뜻은 대단히 크고 깊다.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 우리는 또 다시 중요한 다른 질문을 스스로 해 보아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의 교회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잘못 설정된 목표나 목표(방향) 상실은 세상의 각각의 개인이나 단체, 심지어는 교회 조차도 표류하고 좌초하는 길을 가게 한다. 목적 의식을 상실한 교회, 목표가 없는 교회, 또는 잘못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는 그 자체로 맛을 잃은 소금이며, 엉뚱한 곳에 놓여진 등불이다.
교회가 진정 올바른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에 대해 신중히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를 하나님의 목표를 향하여 이끌고 가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목표와 교회에 대한 목표는 세계 선교에 있다. 교회 지도자가 올바른 목표를 향해 교회를 이끌어 나가지 않는다면, 교회 전체가 방황하게 된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교회의 사명을 성도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하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 사명을 감당해 가야 한다.
현대 교회의 선교에 대한 소극적이고 잘못된 인식
현대 교회가 선교를 생각함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은 선교가 단지 교회의 많은 사역들 중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선교를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사역으로 떠받들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교회의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하여 달성해야 하는 최고의 목표와 최고의 사명이 아니라, 단지 교회에서 하는 여러 중요한 사역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교회의 은사 중의 하나로, 때로는 지교회 부흥이나 지교회의 체면을 세워주는 수단으로 취급되는데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은 선교에 대한 소극적인 이해 때문에 많은 지교회가 선교에 동참할 때, 전체 교회 재정에서 비교적 적은 부분을 선교비로 지출하고 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교사 후보를 개발하고 훈련하고 파송하는데 상당히 소극적이다.
개인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보면 개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며, 개인이 현재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교회가 선교에 얼마나 희생적으로 봉사하는가에 대한 정도를 조사해 보면 그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비젼,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충실히 나아가고 있는가를 가장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목표와 목적이 된다. 오늘날 교회가 마치 불신자들처럼 자기 교회를 목표로 삼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모든 피조물의 주권은 창조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피조물이 오직 창조주 안에서만 그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창조주에게 종속되어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 또한 하나님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용하고 있지는 않고 있는가? 정말로 교회가 창조주와 구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종속이 되어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있는가? 개인 성도나 교회나 그 목적과 목표는 철저히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목표에 종속된 것이어야 한다.
구속 사역을 완성해 가는 수단(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가는 수단)으로서의 선교
성경은 역사의 목표가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측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필연적으로 오직 전도와 선교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창조 - 타락 - 구속 - 선교 - 구속의 완성이라는 틀로 볼 수 있다. 구속과 구속의 완성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구속을 완성해 가는 과정으로서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 없는 구속의 완성은 있을 수 없다. 선교 없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중심에 천하만민에게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 주시려는 소원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쁨과 행복을 천하만민 모두와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선교 - 성경의 전체 내용, 성경을 기록한 목적
성경은 선교를 위해 기록이 되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선교는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지역 전도를 전제로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계획을 언급하는 말씀들로 가득차 있다. 사실상 성경의 전체 내용이 그리스도와 선교이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선교이다.
눅 24:44-48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창세 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계획
먼저 창 1-2장에서는 선교에 대한 필요성이 전혀 대두되지 않고 있다. 창 3-10장까지에서도 범죄하고 타락하여 멸망 상태에 놓여 있지만, 한 언어, 한 민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증거를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선교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선교가 하나님의 역사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와 역사를 계획하심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하셨던 일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맏아들로(히 1:1-2:18),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장자-골 1:14-18)로 세우시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구속 의지를 발견하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창조주로 세우시고, 만물의 장자, 많은 자녀들의 큰 아들로 세우시는데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의지가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방인인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이미 창세 전에 이루어진 사실이다(엡1장).
시 89:26-29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시 2:7-8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가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위의 본문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아들로, 즉 모든 다른 아들들을 가정한 맏아들로 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열방과 땅 끝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모든 종족들을 예수의 피로 구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 경영의 중심, 하나님의 역사 경영의 목표에는 항상 열방과 땅 끝으로 대변되는 모든 종족들에 대한 선교가 놓여 있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계획
창조 이후 뿐만 아니라 타락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이후에도 동일하게 복을 주셨던 말씀의 내용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계획이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9:1, 7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사실상 선교적 관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경영에서 창 11장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물론 바벨탑 건축 사건에 포함된 의미는 대단히 포괄적이다.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은 이들의 의견과 사상의 일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단합된 행동의 일치를 낳았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를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온 인류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지개 언약에 대한 불신앙이기도 하다.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쌓고, 자기들의 이름을 후대에 알리겠다고 하는데서 이들의 극에 달한 교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타락한 인간의 언어의 일치와 단합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경영에 절대적으로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바벨탑의 건축을 통해 보여 주듯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그들이 계획하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려 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구속의 완성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언어, 곧 사상의 일치를 통해서, 그리고 단합된 행동, 곧 바벨탑의 건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대항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흩어짐을 위해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인류는 흩어짐을 피해보려고 노력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인류를 세상의 온 지면에 흩으셨다. 땅에 편만함과 흩어짐은 심판하시기 위한 방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수단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일반적인 은총을 주시기 위한 방편이면서, 동시에 특별 은총인 구원을 주시기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언어의 혼잡과 인류의 흩어짐 때문에 선교의 필연성이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창 11장이 선교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창 12장에서의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비젼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창 11장은 직접적인 선교의 필요성을 언급해 주는 장이다. 하나님의 선교 의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장이다. 성경에서는 종종 흩어짐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흩어짐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벨탑의 경우 흩어짐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목표를 대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천하에 흩어져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적인 은총을 누리며, 특별 은총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두 단합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마련했으나, 바벨탑으로는 물의 심판을 막아낼 수는 있겠지만, 다가오는 최후의 심판을 막아낼 수는 없다. 대 꼭대기가 하늘에 닿더라도 이미 그 길은 막혀진 길이다. 이스라엘의 흩어짐(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외관상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대변되는 세속화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존재가 천하 만민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기 위한 수단이었으므로, 그들은 역사 가운데서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흩어짐을 통해 결과적으로 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하다. 또 한 번의 흩어짐은 스데반 집사 순교 후 엄청난 핍박으로 인한 예루살렘 교회의 흩어짐이다. 초대교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델이 되는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주님으로부터 열방 선교에 대한 분명한 사명을 여러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전진하지 않음으로써 징계를 받게 되었다. 초대교회 이후의 교회사도 교회가 선교에 대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마다 이러한 흩어뜨림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선교를 이끌어 오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 11장에서 인류를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들로 흩으시는 일과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통해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일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구속의 계획, 즉 역사 경영의 목표가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형성과 이 하나님 나라가 천하 만민에게까지 확장되어 갈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영하시는 목표가 선교에 있음을 말씀하셨다. 창 12:1-3은 비록 아주 짧은 구절이지만, 미래에 진행될 모든 세상 역사, 즉 이스라엘의 형성과 그리스도의 오심, 천하 만민에게 이르는 천국 복음의 전파에 이르기까지 전체 인류 역사의 방향과 최종적인 하나님의 목표를 말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적인 의미가 아주 큰 구절이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구원, 영생, 하나님 나라)가 모든 천하만민에게까지 도달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또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품으셨던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획이며, 목표이다.
선교 - 구약 전체에 나타난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선교가 하나님의 역사 경영의 목표라는 사실은 구약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천하만민의 찬양을 받으시며, 그 영광의 풍성함을 나타내신다.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세상의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신다.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사람들의 눈과 관심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먼 외딴 섬들도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이 모든 표현들이 하나님의 선교적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들은 선교를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하심을 통해서, 때로는 선지자를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셨던 선교의 필요성을 실천해 가셨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이방 모든 종족들을 향해서도 예언을 하게 하셨으며, 그들 모두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셨다.
이스라엘은 세상 모든 족속을 위한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적극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선교의 필요성은 아브라함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삭과 야곱에게서도 나타난다(창 27:29; 49:10).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선교를 매우 소극적으로 대했다. 주로 이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심지어는 요나를 통해서 대표되는 것처럼 선교를 매우 부정적 것으로 대했다.
선교 - 예수께서 오신 목적
하나님은 선교에 대해 대단히 열심이시다. 하나님은 선교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교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다.
선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목적이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이다. 눅 4:42-44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선교 - 교회에 주신 최대의 사명
선교는 교회에 주신 최대의 사명이다(마 28:18-20; 막 16:15). 그래서 선교를 모든 성도와 교회에 주신 지상명령이라고 부른다. 현대 교회는 온 천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유리하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타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교회는 일꾼이 부족한 선교지에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도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지친 소자를 예수님의 제자의 이름으로, 선교사의 이름으로 영접하여 냉수 한 그릇의 배려라도 베풀어야 한다.
선교는 최후까지 십자가를 지는 것
부요한 교회이든 가난한 교회이든 선교의 짐을, 선교의 십자가를 함께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히 죄에 대한 저주와 형벌과 부끄러움과 핍박과 능욕과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는 소극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죄인과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과 대속적인 희생과 헌신을 의미하는 적극적인 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매일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주께 합당치 않다. 합당치 않다는 말은 ‘가치가 없다’ ‘쓸모가 없다’ ‘의미가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신앙을 지키는 면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제자의 길을 걷는 면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이 모든 성도와 교회에 주신 명령이듯이 선교 또한 교회나 목회자에게만 주신 사명이 아니다. 모든 개인 성도들에게도 주신 명령이다. 그리고 무겁지 않은 십자가, 고통스럽지 않는 십자가도 없다.
오늘날 부요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없는가? 오늘날 부요한 교회에는 개척 교회의 어려움과 아픔이 지나갔기 때문에 이미 십자가를 벗고 영광에 들어갔는가?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매일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가 짊어지고 주를 따라야 할 ‘나의 십자가’,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가 짊어지고 따라야 할 십자가는 단지 개인에게 닥치는 질병이나 어려움,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오는 핍박만을 의미하는가?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우리도 아직 한 번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저들의 십자가를 이제 우리가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십자가를 자기의 것으로 삼고 짊어지고 가셨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알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소극적으로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지 않았는가? 십자가는 끝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 우리가 선교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도 일시적인 행사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자기 교회가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선교지 영혼들을 위해 끝까지 자기 교회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며, 선교의 자세이다.
선교 -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
성령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사역은 친히 예수의 증인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성령이 선교를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다. 행 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하실 때는 역사의 완성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괄적인 개념인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성령을 받은 교회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확장되어야 하는데, 그 분명한 목표는 땅 끝까지이다. 땅 끝까지, 즉 온 천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전에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완성되지 않는 과제로 남는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하신 일에서 행하신 일(행 2:1-13)을 통해 행 1:8의 실현에 대한 표본을 보여 주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민족의 방언을 말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서 천하각국에서부터 온 유대인들이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되었다. 그곳에는 수 많은 종족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선교하시는 성령이시다.
선교 -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필연적인 이유
선교의 필연적인 이유가 되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이미 창세 전에 계획된 것이며,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통해 계시되기 시작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예언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필연성을 선교 외에서 결코 찾을 수 없다. 선교가 필요 없다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를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 제자들처럼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회복하실 때를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 된다. 오늘날 교회가 정말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신 주님 앞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와 교회가 가장 추구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처럼 교회의 제 기능마저 못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
교회는 자기의 사명이 역사의 절대적인 과제인, 그리고 역사의 완성인 선교에서 찾아야 한다. 전심을 다해 끊임 없이 선교사를 발굴하고 훈련하고 파송하고 돌보는 교회가 “주여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니 추수할 일꾼들을 더 보내어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사도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만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담대히 응답할 수 있다.
종결되지 않는 신약 교회 역사
하나님이 선교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도 선교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성령이 또한 선교하시는 분이시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며, 이 성령행전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의 전파, 즉 선교에 관한 행전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 예수에 대한 증거가 이루어질 것과 이것을 위한 영적 전쟁, 그리고 주님의 오심과 최후의 승리에 대한 계시와 노래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승리의 노래는 하나님의 역사 경영의 완성을 축하하는 것이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선교를 통해 구원받은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어린양의 구원하심을 영원히 찬양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역사의 방향과 최종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구약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종결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역사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신약 교회의 유일한 역사서는 사도행전이고, 이 역사는 현재까지 진행되었고,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다. 초대교회, 중세교회, 근대교회, 현대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발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기록부터 시작된 선교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이 막중한 사명을 초대교회 이후부터 계속적으로 망각해 왔었다. 하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한 결과가 중세 교회의 타락을 초래했으며, 전투적이지 못하고 정적인 교회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사실상 4세기 이후부터 17세기까지 중세 교회와 근대 교회에 이르는 동안 교회는 선교적 사명을 거의 감당하지 못했다.
결론 - 하나님의 목표 완성을 향한 전진
하나님의 목표, 즉 역사 경영의 목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목표, 성령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목표, 교회의 설립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목표는 포괄절인 의미에서의 선교에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표를 올바로 깨닫지 못할 때, 교회는 그 자체로 모범적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다. 초대교회는 대단히 모범적이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역동적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주께서는 땅 끝을 향하여 선교하도록 징계하셨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부를 축적할 수는 있겠지만, 중세교회와 같이 폐허로 남을 것이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전진하는 교회가 아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중세교회처럼 세속화의 길을 걸게 될 것이며, 이슬람에 의해 잠식되어 버린 중세 교회와 같이 이방 종교의 영향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말씀은 3절 말씀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해당된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성경에서 말하는 끝은 단순히 부정적인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문에서의 끝은 완성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세상의 끝은 하나님께서 전체 인류의 역사에 대해 계획하셨던 역사의 최종적인 방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 경영을 통해 성취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표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역사 경영은 대단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지만, 이런 하나님의 역사 목표를 고려하지 않을 때, 역사는 대단히 회의적이며, 부정적이다. 사실상 세상은 발전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퇴보적이다. 사랑이 식어지며, 믿음이 상실되며, 불법이 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 흐름의 과정 가운데 절대적으로는 구원 받는 숫자를 능가하는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구약 시대가 그러했고, 신약 시대도 여전히 절대 다수가 멸망의 길을 가고 있다. 지금까지 지옥은 교회의 선교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교회의 목표 상실 때문에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채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간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세상의 역사는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목표인 선교를 올바로 인식하고 동참하느냐에 따라서 보다 긍정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 전체 역사와 전체 교회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위대한 선교 발견의 세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시아에서 살았던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형상들이 단 한번도 복음을 들어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지옥불을 향해 나아갔다. 이것은 과거 교회의 책임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멸망한 자들에 대한 피 값은 현대를 사는 모든 개인 성도와 모든 현대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대단히 분명하며, 대단히 적극적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온 천하의 모든 만민들에게 증거하실 것이고, 그들로부터 감사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올바른 목표를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목표와 부합되는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한다. 교회가 자기의 야망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으며, 자신 가지의 목표를 하나님의 목표인 양 착각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목표를 위해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각 개인이 창조주 안에서만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듯이, 각 피조물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듯이, 교회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회가 자기의 성장을 목표로 삼거나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창조주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자기 자신 안에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존재 가치와 존재 의미, 그리고 목적과 목표를 발견할 수 있다.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목표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전체 교회가 방황할 수 밖에 없다. 선교를 소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교회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위험한 현상이다. 참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분의 구속을 자기 것으로만 삼고 다른 민족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대하는 요나와 이스라엘의 이기적인 신앙적 태도도 위험한 일이다. 예수님의 절대적인 명령, 곧 교회의 사명을 깨닫지 못한 채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위험하다. 오늘날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지도자와 교회가 정말 많이 있다. 목표를 상실한 지도자는 교회 전체를 방황하게 할 것이다.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도 모른 채 목적 없이 방황하다 멸망의 길로 가는 불신자들이 불쌍한 것 이상으로 교회가 목적을 상실하고 나아가야 할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것은 더욱 더 불행한 일이다. 목표를 모르는 지도자에 이끌려 이리저리 방황하는 성도들도 불쌍한 사람들이다. 또한 목표를 상실한 교회가 세상을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목표를 상실한 교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을 다하지 않는 교회는 기능을 상실한 나침반과 같다. 제 기능을 다하는 교회는 끊임 없이 올바른 목표를 향해 있는 교회이다. 목표를 상실한 교회는 꺾여진 화살과 같다.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는 끊임 없이 올바른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교회이다.
교회가 선교를 여러 교회 사역의 일부가 아닌 교회 사역의 절대적인 목표로 삼는다면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해 쏟아 부으시는 열정만큼 선교를 위해 전력질주 할 수 있다. 선교는 결코 교회의 지엽적인 사역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사역이다. 이것은 교회에게 남겨 주신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성도와 교회에 주신 가장 위대한 비젼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목표는 각 족속과 백성과 백성과 나라에 대한 선교이다. 그리고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가 선교사를 보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선교사를 보낼 것이다. 한국 교회가 교회 성장의 자축을 벌이며 십자가를 외면할 때에도 많은 젊은 선교사들이 혼자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계속해서 선교지로 나갈 것이다. 교회가 선교를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과 사역의 최고의 목표로 삼고 동참하면 좋겠지만, 설사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교회가 선교를 보다 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면 역사의 완성은 보다 빨리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핵심 내용이며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는 역사의 목표이다.
동일하게 전체 성경의 내용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전체 성경의 목표는 선교를 통해 이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교회는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쓰임 받는 교회이다. 모든 성도와 교회가 미전도 종족을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쓰임을 받는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께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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