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마태복음에 나타난 선교사상 (이윤석)

수호천사1 2012. 8. 2. 10:45

마태복음에 나타난 선교사상
- 마 10장의 가나안 여인 사건을 중심으로

 

- 이윤석

들어가는 글

 

가나안 여인 이야기는 그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한 가지는 마태복음에 내재된 신학적 갈등과 관련된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방인 선교에 관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말씀을 담고 있다. 예수는 열 두 제자를 택하여 파송하면서 이방인들에게는 가지 말라고 하였다(마 10:5-6).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같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한다(마 28:18-20). 본문은 이러한 신학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암시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10장 6절의 말씀이 여기에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가나안 여인의 간구에 대해 예수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며 거절하다가 여인의 반복된 요구에 결국은 승복하여 그 딸을 고쳐주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10장 6절 말씀을 삽입한 마태의 의도는 10장과 28장의 상반되는 선교 명령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또한 가나안 여인 이야기는 많은 여성신학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이 여인은 목소리를 내면서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 속의 사건은 예수가 아닌 여인이 주도권을 쥔 가운데 진행된다. 예수는 유대인 선민 의식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으나, 그 여인의 저돌적인 도전 앞에 결국은 승복하여 비로소 예수다운 행동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에서 여인은 예수로 하여금 예수다운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위의 연구 결과를 전제하며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 한다. 먼저 역사비평학자들이 마태의 선교신학을 관심 대상으로 삼은 데 반해 이 글은 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마태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보려 한다. 마태복음의 강한 유대적 특성은 이 책의 저자가 유대교인으로서 예수를 믿게 된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초대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기독교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정체성의 위기 상황에 있었다. 우리는 信約의 많은 저자들에게서 그 갈등을 읽어낼 수 있다.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이 그 실례이다:"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제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롬 9:1후-2, 표준새번역).


마태도 그와 동일한 갈등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은 가나안 여인 이야기를 통하여 마태가 그 문화적 정체성의 갈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찾아보고자 한다.


필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초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적 상황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태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듯이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했듯이 우리는 한국인과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 세계로 그 지평이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경험하고 있던 한 유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색의 결과이다. 마태의 그 모색은 정체성의 갈등을 겪으며 새로운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상을 모색하고 있는 우리에게 한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은 이것이다:저자는 예수 신앙이 세계 종교화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는 그 새로운 종교에서 유대인의 자리를 어떻게 설정하려 하는가?


이 글의 다른 한 가지 목적은 본문에 담긴 사회학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역사비평학자들은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과연 두로와 시돈 땅에 들어갔는가 아니면 그 변경에 머물렀는가를 가지고 논쟁한다. 그들의 질문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선교의 범위 문제에 국한되어 있다. 여성신학자들은 여기에 예수의 사역에서 여성의 역할이 어떠했는가 하는 질문을 추가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가나안 여인 이야기는 예수와 한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예수와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임이 드러나게 된다. 역사비평학의 질문이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의 일차원적인 것이라면 여성신학자들은 여기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새로운 수평적인 축을 더하여 이 문제를 2차원으로 확대시킨다. 이 글은 그에 더하여 본문은 수직적인 축, 다시 말해서 지배자와 민중, 또는 가진 자와 밀려난 자라는, 사회 계층 문제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역사비평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이 발견해 낸 두 축은 본문에 비교적 명백히 드러나 있다. 한 축은 유대 지역과 이방 지역, 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대립 쌍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 쌍에 의해 나타난다. 이 글은 그 동안 가려져 왔던 또 하나의 대립 쌍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15장 24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들"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드러난다. 질문은 이것이다:"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하는가, 아니면 그 안의 한 특정 계층을 가리키는가? 한 특정 계층이라 했을 때 그들은 사회학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역사비평학자들에게 이 본문은 선교신학의 텍스트이다. 여성신학자들에게 본문은 여성 해방의 텍스트이다. 이 글에서는 본문을 하나의 사회·문화적 텍스트로 읽고자 한다. 본문을 통해 마태는 한 새로운 문화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마태가 속해 있던 유대교 사회 문화의 한 개혁 프로그램 또는 기존 사회 문화에 대한 대안적 프로그램이다.

 

1. 상황 설정:예수와 예루살렘의 대립

 

가나안 여인 이야기는 예수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피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바로 앞에 나오는 15장 1-20절의 사건과 직접 관련된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에게 와서 말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어깁니까? 그들은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마 15:1-2)


이 본문을 마가복음 7장 1-2절 및 5절과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에는 예수와 예루살렘의 대립이 강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와는 달리 마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제자들의 안식일 법 위반 사실을 미리 알고 예수께 온 것처럼 서술하고 있고, 마가복음에는 율법학자들만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것으로 나오는 반면 마태복음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단지 한 지방의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말하자면 유대교 당국의 권위를 대변하는 사람들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정면에서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공격한다. 마태는 그 결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분개하게 되었다는 보도를 여기에 추가한다 (12). 그리고 나서 예수는 그들을 피해 두로와 시돈으로 "물러간다"(ajnacwrevw 아나코레오).


이러한 상황 설정은 마태복음에 독특하게 나타나는 동사 '아나코레오'(ajnacwrevw 물러가다)의 용법과 일치한다. '아나코레오'는 신약성서에 14회 나오는데 그중 10회가 마태복음에 집중되어 있는 마태의 특수 어휘이다(2:12, 13, 14, 22; 4:12; 9:24; 12:15; 14:13; 15:21; 27:5). 그 중 9장 24절과 27장 5절을 제외하면 모두 예수가 어떤 위기를 피해 가는 상황을 묘사한다. 많은 경우 '아나코레오'는 상황설정어로서 한 이야기의 첫 절에 나오며, 그 앞 이야기에서는 반드시 예수와 유대교 지도자들의 충돌이 서술되거나(12:15; 15:21) 정치 권력에 의한 박해가 예기되고 있다(14:13). '아나코레오'가 등장할 때 예수는 종교적 또는 정치적 중심으로서의 도시 예루살렘(2:12, 13, 14, 22; 4:12), 또는 예루살렘에 종교적, 정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분봉왕 헤롯(14:13), 그 통치자의 집(9:24), 바리새인들(12:15), 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15:21)­을 피해서 떠나간다. 마태의 '아나코레오' 사용에서 예루살렘은 위협의 도시이다.

 

4장 12절에서 마태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여기서 예수의 움직임은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전진해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잡힌 곳이 바로 갈릴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움직임이 "물러감"으로 묘사된 것은 그가 예루살렘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코레오'가 예수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은 15장 21절이 마지막이다. 여기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두로와 시돈까지 간다. 그리고 예수는 기수를 돌려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기 시작하는데 (16:21), 이후로 예수의 움직임은 '아나코레오'로 묘사되지 않는다(마태의 '아나코레오' 사용에 대해서는 졸고 "마태와 그 공동체의 ajnacwrevw­ajpevrcomai 구상", 장로회신학대학교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1995)을 참조하라. 이 논문에서 필자는 '아나코레오'와 예루살렘을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과 관련해서만 이해했으며, 이 어휘가 가진 사회학적 의미는 밝혀내지 못했다).


'아나코레오'의 사회학적 성격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피해 나아가는, 그 움직임의 목적지를 보면 잘 드러난다. 그 목적지는 언제나 종교적 사회적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 중 절반은 이방인 또는 이방 지역이다:동방박사의 나라 (2:12, 13), 갈릴리 (2:22; 4:12: 참조 4:15), 이집트 (2:14), 두로와 시돈 (15:21), 이방인들 (12:15). 나머지 절반은 사회적으로 밀려난 사람들 또는 그들의 지역이다:무리들 (12:15; 14:13; 15:24), 집 밖 (9:24), 외딴 곳 (14:13). 그 중 두 곳에서는 무리들과 이방인들이 동일시되거나 '아나코레오'의 목적지로 함께 묘사된다 (12:15-21; 15:21-18).

 

2. 지도자를 잃은 무리들과 소외된 이방인들을 향하여

 

여기에서 마태복음의 '무리들'이 가지는 사회학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겠다. 가나안 여인의 간청에 대한 예수의 첫 응답은 24절에 나온다:"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이것은 10장 6절의 반복이다. 예수께서 이들 열 둘을 내보내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떼에게로 가거라" (마 10:5-6).


표면적으로 읽을 때, 여기서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떼"는 "이방 사람의 길"과 "사마리아 사람의 도시"에 대립된다. 그러나 이 말씀의 콘텍스트를 고려할 때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은 단순히 유대인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예수가 열두 제자를 불러 파송하시는 내용을 담은 10장 1절에서 11장 1절에 속해 있으며, 이 부분은 9장 마지막에 나오는 요약부와 직접 연결된다. 이 요약부에서 예수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신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9:36-38). 여기에서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으로 묘사된다. 이 표현은 무리들을 지도자들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목적은 이 지도자를 잃은 군중들을 위한 것이다. 10장 6절은 그 보내심의 목적을 예수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설명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떼," 즉 바른 지도자가 없어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군중들을 위한 것이다.


가나안 여인 이야기에서도 유대교 권력자들과 군중들 사이의 동일한 구분을 읽어낼 수 있다. 예수가 장로들의 유전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대상은 모든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관련된 유대교 권력자들이다. 반면에 군중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 (15:10). 예수는 그 권력자들로부터 물러난다. 예수는 그들로부터 물러나 어디로 가시는가? 이것은 마태의 '아나코레오' 사용과 관련하여 잘 이해될 수 있다. 15장 21-28절은 12장 15-21절, 그리고 14장 13-21절과 비슷한 패턴을 공유하고 있다. 12장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피해 물러나며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른다. 예수는 그들을 고쳐주신다. 14장에서도 예수는 물러나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고치고 먹이신다. 두 본문에는 차이점도 나타나는데, 12장에서는 예수가 무리들을 고치는 것이 이방인들과 관련되며 14장에서는 예수가 무리들을 먹이시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15장에는 하나로 조합되어 나타난다. 예수가 이방 여인의 딸을 "고치심"이 "먹이심"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마태는 또 하나의 치유 이야기(15:29-31)와 또 하나의 급식 이야기(15:32-39)를 뒤에 더하여 이 패턴을 완성한다. 이처럼 12, 14, 15장은 하나의 통일된 문학적 구상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5장 1-21절을 전체로 보자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 주위에 둘러 있다: 유대교 권력자들, 지도자 없는 군중들, 그리고 이방 여인. 예수는 유대교 권력자들에게서 물러나 지도자 없는 군중들과 소외된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간다.

 

3. 집 밖으로

 

마태 15장 21의 언급이 예수가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간 것을 말하는지, 단지 그 방향으로 갔을 뿐 그 지역에 들어가지는 않은 것인지에 관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것은 21절과 22절 내용 사이에 충돌이 있기 때문이다. 21절에는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고 하는데 22절에서는 한 가나안 여인이 "그 지방으로부터 나와" 예수를 만났다고 말한다. 이 논쟁은 마태의 선교신학에 대한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은 10장과 28장에 나타나는 선교관의 대립은 예수의 지상 생애와 부활 이후라는 구속사적 구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예수의 지상 생애 중에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이르렀으나 그의 부활 이후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이 마태의 선교 신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충실하자면 21절보다는 22절에 중점을 두고 본문을 이해하게 된다. 이 경우 21절의 전치사 '에이스'(eij")를 "…를 향하여," 또는 "… 가까이"로 해석하여 예수가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시지는 않은 것으로 본다. 반면 같은 구속사적 이해에 처하여 예수가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시기는 했으나 거기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이 경우 22절의 "그 지방으로부터"(from that region)는 두로와 시돈 지방을 벗어나 예수께로 나오는 여인의 행동을 묘사하는 부사가 아니라 단지 여인의 출신지를 설명하는 형용사로 번역된다:"그 지방 출신의"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께 나왔다. 여기서 "가나안"은 이방인 일반을 가리키는 수식어이므로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역을 나타내는 수식어와 충돌하지 않는다. 또한 '아나코레오'가 예수의 물러남의 목적지를 가리키는 말과 함께 쓰일 때는 예외 없이 '에이스'와 함께 사용되고, 이 경우 모두 예수는 실제로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사실도 전자의 입장을 부정하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22절에서 그 여인이 "나왔다"(ejxevrcomai 엑세르코마이)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태는 그 여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콘텍스트 속에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마태가 모든 등장 인물들을 집 밖에 위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의 자료를 사용하면서 마태는 등장 인물들이 집안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하는 모든 언급들을 삭제했다. 마태는 예수가 집에 들어가셨다는 마가의 언급(막 7:24; 마 15:21)을 삭제한다. 개들이 "상 아래" 있다는 내용도 삭제한다(막 7:28; 마 15:27). 여기에서 "집"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기존 체제"를 의미하는 사회학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동일한 반체제적 암시가 2장과 11장에 나타나는 도시에 대한 거부에서도 나타난다. 2장 3절에서는 예루살렘이 의인화되어 예수를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헤롯의 입장을 대변하며, 11장 20-24절에서는 여러 도시들이 역시 예수를 거부한 사람들로 의인화된다. 이것은 또한 '아나코레오'의 용법과도 일치한다. 예수는 '왕의 집'(11:8; 참조. "그 통치자의 집," 9:24), '예루살렘으로부터 물러나서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곳', '외딴 곳'(14:13)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나오는 글. 마태는 문화적 正體性이 분명한 개혁자 - 문화 선교(通全的 선교)에의 적용 가능성

 

우리는 지금까지 마태복음에 나타난‘가나안 여인’ 例話를 통해 선교사상을 알아 보고자 했다. 歷史批評學을 포함한 전통적 읽기에서 성경은 오직 종교적 텍스트였다. 그러나 社會學的 관심으로 신약선경을 읽을 때 거기에는 종교적 메시지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메시지도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회적, 문화적 메시지는 단순히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매개 수단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라는 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와 문화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담겨 있다. 유대교가 단지 현대적인 좁은 의미의 하나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회 제도와 문화를 총괄하는 것이라 할 때 그를 대체하는 새로운 프로그램 역시 교회라는 좁은 테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음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마태는 예수를 예루살렘 체제와 유대교 권력자들을 떠나 체제 밖으로 밀려난 군중들과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나안 여인 이야기를 통해 보여지는 마태는 기존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며, 밀려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지향한다. 그것은 유대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태의 비판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유대교 지도자들이지 무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에 대해서는 존중을 표하는 반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서는 적의를 표한다(5:17; 23:2-3). 가나안 여인 이야기에서도 마태는 유대인의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다윗의 자손, 주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유대인들의 소망에 함께 들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표시함으로 예수의 善心을 얻는다(15:22). 여인의 말에 나오는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유비(27절)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포함하는 마태의 救援史的 도식이다. 27절에 마태가 삽입한 "주인"은 유대인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이들"로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26절). 주인은 유대인 아이들과 이방인 개들 모두에 대한 권위를 가진 분이다. 또한 마태는 "상 아래" 라는 마가복음 7장 28절의 언급을 삭제함으로써 아이들과 개들을 같은 수준에 위치시킨다. 마가에서 이방인들이 개로 심각하게 격하되어 있는 것을 마태는 원래의 이야기를 살리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유대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키면서도 유대인들의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7장 27절에서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말은 이제는 유대인의 때는 지났고 이방인의 차례가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는 "먼저"를 생략함으로써 그 단절을 제거하고 있다. 마태의 이러한 노력들은 그가 유대인으로서 갖는 문화적 정체성과, 예수에 대한 信仰이 세계종교화하는 현실 사이에서 고심했던 흔적들이라 할 수 있다.

 

마태는 로마서의 바울이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구원의 약속을 단단히 붙들고자 했음이 분명하다(롬 9:1-2; 11:29). 마태를 한 개혁자로 묘사한다면 그는 분명한 ‘유대인’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에 더하여 他文化의 사람(異邦人)을 포괄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주인으로 삼는 새로운 개혁적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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