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에 대한 세 가지 견해
1) 복음주의적 견해
보통 선교라 함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해외 또는 타문화권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모든 방법과 활동을 말한다. 이에는 전도자를 해외에 파송하여,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키며, 복음적인 사업을 수행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선교를 이렇게 단순히 '복음 전파'의 측면에서, 특별히 한 개인의 영혼 구원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고전적, 전통적 견해라 할 수 있다. 이를 또한 복음주의적 견해라고 하는데, 이에 의하면 선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교회 개척이며,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복음이 실제로 전달되지 않는 전도나 선교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선교에 대해 복음주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 교회가 직접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구조적 변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도의 결과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인간 성숙이 사회구조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주의자들은 선교 활동 중, 농업 기술 교육, 의료 봉사 및 일반 교육 등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이런 활동들이 차츰 차츰 한 국가의 하부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한다.
2) 에큐메니칼적 견해
이에 반해 선교를 '샬롬'과 '인간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에큐메니칼 선교관이라 한다. 즉, 선교란 단순히 한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 또는 그룹들 사이에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나아가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곳에서 모든 인간들이 참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런 에큐메니칼적 선교관은, 복음주의적 선교관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반해, 복음이 전해져 있는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종래의 선교관이 교회 개척이나 교회 확장에 목표를 둔, 교회 중심의 선교관이라고 비판하고, 교회는 '이 세상에 평화(shalom)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들려 진 수단'에 불과하다고 한다. 선교(evangelism)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메시야(즉 그리스도)이시며, 선교의 목적은 곧 "샬롬"의 수립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샬롬은 개인의 구원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즉 평화, 온전함, 공동체, 조화, 정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뜻에서 선교는 세 가지 측면을 가진다. 케리그마, 코이노니아, 그리고 디아코니아가 그것이다. 케리그마는 그 샬롬의 선포요, 코이노니아는 그 샬롬에 동참한 사람들이 상호 교제와 친교 가운데 사는 것이며, 디아코니아는 겸손한 봉사로써 그 샬롬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 세 측면이 선교에서 통합될 때 그 선교는 올바른 선교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친교'나 '봉사'도 선교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기초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곧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곧 교회가 선교의 출발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출발점이며, 선교의 주도권 또한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선교의 주역이시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 또는 '우리들의 선교'라는 말은 사용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전통적인 선교관에서처럼, 제도로서의 교회가 그 제도를 지나치게 절대화한 나머지 하나님에게만 속한 복음과 그 선교를 교회 자체를 위한 수단으로 삼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도 위반되고 교회 본연의 사명에도 위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따르면,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 것으로서, 교회는 선교의 도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기능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의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이다. 교회가 이런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쓸모없는 도구가 될 뿐이다.
샬롬과 더불어 선교의 목표로 받아들여진 개념은 "인간화"이다. 즉 사회 구조를 인간화하는 것을 선교의 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화와 교회 개척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일과 사회 구조의 근본 변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선교의 방향은 인종 문제 사회변혁, 학생 항거 운동 등에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이해가 이와 같이 달라짐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이해에도 변화가 온다. 전통적으로 구원이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롭고 영원한 신분이라고 이해하여 온 데 반하여, 새로운 선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구원'을 강조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인류는 가난과 압제와 질병과 비인간적인 노동과 인종차별과 기아 등으로부터 구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머지않아 가게 될 하늘에 있는 빵이 아니라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빵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에는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친교와 봉사가 포함되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이 땅 위에서의 다방면에 걸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교관에 대하여 비판의 소리도 높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우선 순위 1 번에 놓을 것인가? 하는 것이 맨 먼저 제기되는 문제이다. 그렇게 볼 때 에큐메니칼 선교 이해는 '선한 사업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 곧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그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깊은 열정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잃어 버린 자들에 대한 열정은 없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도록 일깨우기보다는 교회 갱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전혀 복음에 접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고, 아직도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보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3) 통전적 견해
선교란 무엇인가? 에 대해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지만 이 두 입장을 잘 조화시킨 것으로서 맥거브란(Donald A. Mcgavran) 의 정의를 들 수 있다.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충성을 바치지 않고 있는 자들에게 문화적 장벽을 너머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들을 일깨워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여 그의 교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복음 전도와 정의실현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선교의 폭은 매우 넓어진다. 단순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교육, 문화 활동, 사회 활동 등 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땅 위에서 이루실 뜻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모두 선교 활동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며 그의 교회의 일원이 되어 일하게 하는 데 있게 된다. 이러한 선교를 통전적 선교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사람의 구원을 말할 때도 영혼의 구원이라는 말보다는 전인적(全人的) 구원을 말하게 되며, 영혼과 육체 전체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사회에 관심을 가질 때에도 사회 전반에 걸친 관심을 가질 것이다. 단지 궁극의 목적은 복음을 통한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 질 것이다. 이런 선교가 행해질 때 사회나 인간사 전반에 걸친 개선과 발전은 당연한 귀결로 도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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