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기독교의 전래와 교회문화
1. 기독교 수용의 배경
기독교를 수용하기 이전 동슬라브족은 자연신, 애니미즘, 조상신들을 모시는 다신교 민족이었다. 특히 천둥과 번개의 신 뻬룬(雷神)은 특별한 숭상을 받았다. 주로 머리가 은발이고 황금색 수염을 붙인 나무로 된 뻬룬 신을 섬기기 위해 {원초연대기}에는 소년이나 소녀를 산 제물로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교 신앙에는 정교한 조직이나 제도적 발전이 없었다. 조직화된 사제계급이나 제대로 모습을 갖춘 사원도 없던 루시인들로서는 큰 갈등없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끼예프 루시의 기독교 수용은 광범위한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있다. 10세기에 이르면 유럽 도처에서 이교는 사양길에 접어 들고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헝가리 왕들이 이미 지난 세기에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상업국가로서 중계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끼예프 루시의 공후 블라지미르(980~1015)는 주위의 기독교 국가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야만족이란 오명을 씻어버리기 위해서는 이교도에서 탈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국제세력 판도에서 다른 세력과의 규합이 필요할 때 종교적 불일치가 가져오는 불리함도 대두되었다. 블라지미르는 자신의 정치적 또는 상업상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주변국의 본을 따르는 것이 유리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적 위신을 획득해야 한다는 대외적 차원외에 루시 민족의 대내적 단결을 위해서도 국교는 필요하였다. 바랴그족의 무사집단과 농경민족인 슬라브족간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보호와 조공이란 상호보완의 정치적 관계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보다 긴밀한 정신적 유대관계를 통한 국가적 통합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또한 공후 가문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도 통일된 종교가 필요하였다. 이는 바랴그족의 형제상속 전통을 이어받은 지배층간의 불화를 없애주고 형제애를 고취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블라지미르 공후가 기독교를 택한 데에는 그의 할머니 올가(945~964)의 영향도 있었다. 드레블랸 족에게 공물을 거두다 죽임을 당한 남편 이고리 공의 원수를 처절하게 갚은 올가 여공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면서 개인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다. 물론 그녀의 개종이 이교도 루시인에게 영향을 미쳤다거나 손자를 교화시킨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블라지미르가 기독교의 그늘 속에서 성장하였음은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문화적 교차로에 놓여 있던 끼예프는 동방의 이슬람교나 유태교가 아니라 서방의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기독교 문화의 동쪽 날개가 되었던 것이다.
성스러운 루시의 기원은 988년 흑해 북쪽의 끄림 반도에 있는 마을에서 블라지미르 대공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온 정교 성직자로부터 세례받은 것에 유래한다. 대공에 이어 이교도이던 루시인들도 드네쁘르강에서 세례받고 러시아는 성스러운 국가로서 출발하였다.
러시아가 세례를 받게 된 계기는 먼저 블라지미르 대공이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중에서 기독교를 선택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교도였던 끼예프 공후에게 주변국의 불가리아인, 프랑크인, 유태인, 비잔틴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전수하기 위해 루시로 들어와 권유했을 때, 대공이 그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는 기록은 그가 그들의 다신교를 단념할 용의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블라지미르는 종교를 선택하는 데 신중하였기에 주변국 사신들의 말만 듣지는 않았다. 그는 각 나라에서 신을 어떻게 모시고 기도하는가를 알아 보기 위해 각 지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각지를 방문한 사절단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콘스탄티노플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거행된 예배였다. 비잔틴인들이 루시의 사절단을 위해 특별 미사를 올리기도 전에 사절단은 돔식의 웅장한 지붕과 기둥이 하나도 없는 마리아 성당의 장대한 모습에 놀랄 뿐이었다. 하늘 나라를 구체화시켰던 이 성당의 모습을 비롯하여 여기서 행해지는 훌륭한 성가와 기도의식 및 성상 등은 전성기 비잔틴의 건축과 미술, 음악과 문학의 결정판이었다. 예배의식에 사용되는 금이나 은으로 된 장식물, 벽면 가득히 메운 모자이크와 이꼰(聖像)들, 엄청난 수량의 촛대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 속에서 진행되는 의식은 가히 보는 이들을 압도시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향이 피워지고 성가가 불리워지며 엄숙한 예배가 진행되는 가운데 초대된 사절단의 감흥은 블라지미르 대공에게 천국에 다녀온 것으로 전달되었다.
블라지미르의 세례는 그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음식과 술을 좋아하던 호전적인 대공은 절제와 자기 통제를 통해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였다. 그는 강력하고 관대한 기질로 고아와 가난한 자, 병자들을 도우면서 배고픈 자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궁정의 문을 열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노인과 병자를 위한 수용소를 세웠고, 생명의 고귀함을 깨닫고 죄인에 대한 사형제를 폐지시켰다. 또 포교와 성직자 양성을 위해 대공은 젊은이들을 모아 공부시켰다. 연대기에는 어머니들이 아이를 울면서 보냈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니 아마 대공은 젊은이들을 끄림 반도의 주교구에 학습하러 보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나를 아내(公妃)로 맞이한 블라지미르 대공은 그 예우로 끄림 반도를 돌려주고 비잔틴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러면 당시 비잔틴 황제가 전례도 없던 일을 감수하고 누이를 설득시키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끄림 반도는 어떤 곳이었을까? 흑해 북부에 자리잡은 이 반도는 AD 4세기 후 로마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기자 북방의 교역지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7세기에 발흥한 이슬람이 중동과 페르시아를 장악하자 콘스탄티노플은 '실크 로드'의 남쪽 길 이용이 불편해졌고, 자연이 카스피해로부터 중앙아시아를 빠져 흑해로 나가는 길을 사용하게 되었다. 끄림 반도는 북에서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대상로의 연결지(中繼地)였던 것이다.
더욱이 비잔틴 제국의 경우 흑해 연안 북부 민족들의 동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이동해온 사람들은 반드시 흑해 북부를 지나야 비잔틴 제국의 약 반을 차지하는 발칸 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끄림 반도는 교역의 중계지점일 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의 동향을 조속히 파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끄림 반도의 북부에서 비잔틴과 동맹 관계를 맺고 세력을 떨치고 있던 하자르 제국이 쇠퇴하고 그 뒤를 이은 끼예프 공국과 적대적으로 지낼 경우, 비잔틴은 정치․경제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틴 제국과 러시아는 블라지미르 대공과 루시인들의 세례에 의해 시작된 계약 덕분에 암묵적인 부자(父子)관계로 바뀌었다. 이는 서로의 관계를 단순한 역학관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블라지미르는 세례받을 때 비잔틴 황제와 같은 세례명인 바실리우스로 명명되었다. 정신적인 의미에서 본 두 사람의 부자관계가 대를 이어 지속된 것은 아니지만 양국간의 교류 의식에 밑거름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였다. 통치자간의 부자 관계는 교회 관계에도 그대로 옮겨졌다. 콘스탄티노플의 교회 관구와 루시의 세례에 의해 생긴 교회 관구의 관계도 후자가 전자에 단순히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모녀간의 관계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천년 이상의 역사 전통을 가진 비잔틴과 이제 막 탄생한 루시가 전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정치․외교 면에서 주종 관계를 크게 강조한 사례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부자 관계는 지속되었다. 비잔틴 제국이 외교적 종속 관계나 정치기구를 강요하지 않은 이유는 우선 양자간의 정신성이나 문화교류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또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점도 정치나 외교 면에서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압력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비잔틴 제국이 정신적인 부자 관계를 인정하여 정치적으로 주종 관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잔틴 제국이 당사자끼리의 의사를 존중하고 합의하에 행정이나 외교정책을 실행한다고 하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시너지(合意) 개념에 기초한 정치 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시너지(合意) 개념 ; 이 개념에 따르면, 서로 납득되지 않을 경우 주종관계에 있어도 합의에 달할 때까지 갈등이 지속된다. 대신 양자가 부자관계에 있다면 갈등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요구됨에 따라 자식은 어버이로부터 배우는 것을 잊지 않고, 어버이는 자식에 가르치기를 계속한다.
2. 그리스 정교의 계승
러시아가 수용한 정교는 어머니 대지와 대자연이 신과 교류하기 위한 매체인 것으로 가르침을 받은 러시아인은 자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체험을 하였다. 부자간의 단순한 혈통만이 아니라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교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정교는 이교를, 신이 만든 이 세상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집약된 것으로 이해한다. 신이 인간에게 준 이 세상이란 선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만끽하고 만취한 나머지 그것을 숭배하게 된 것이 곧 이교라는 뜻이다.
이교도 루시가 성스러운 루시로 전환한 것은 루시의 선하고 아름다운 감수성이 숭배 대상으로부터 유일신과 교제할 수 있는 매체가 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때로는 번개신 뻬룬이 구약성서의 예언자 일리야로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스러운 러시아에 이교 러시아와 다름 없는 현상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현실에 뿌리내린 계승과 단절의 논리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나 정교라고 하는 전통적인 기독교는 이교와의 접점에 있어 계승적인 자세를 취하고 얼핏 보아 유동적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고도의 변용을 요하는 극히 주체성이 강한 특성이 있었다.
교리상 정교는 성서를 배우고 해석하여 신앙에 이르게 되면 착한 것이고, 과거에 사람들이 전통으로 계승해온 것을 기독교와 관련 없다고 하여 버리라고 하는 비현실적인 입장이 아니다. 지적으로 금욕적인 기독교의 이미지는 전혀 본래의 것이 아니다. 러시아가 수용한 정교에서 배움이란 단순히 머리로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을 포함한 총체적인 행위이다. 세례를 받은 루시가 체득한 배움(修道)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악을 단절하고 선을 취하는 양자택일론에 기인된 간단하고도 관념적인 어려운 과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욕심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악 가운데서 선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며, 욕심에 물든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죽은 것을 어떻게 부활시켜 놓는가에 있었다. 사람의 욕심에 관해 말하자면, 누구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자택일의 금욕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만사 중에서 선한 것을 발견해냄으로써 욕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설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교라고 하는 전통적인 기독교는 마음과 몸을 구사하여 욕심으로부터 해방되고 선을 발견하기 위한 장소를 교회라고 하는 기도장에서 찾았다. 정교회의 벽면을 덮은 모자이크 이콘이나 프레스코 이콘의 역할 역시 선을 추구하기 위한 역할을 맡았다. 성당에서 기도가 시작됨에 따라 인간의 삶은 신과의 교제에 몰입하고, 이미 선을 얻어 성인의 대열에 낀 여러 이꼰 상들이 촛불 속에 은은히 비춰지는 모습은 엄숙하게 신의 나라로 접근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러한 인상들이 무지한 이교도들을 자연스럽게 교회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다.
교회 내부를 장식한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이콘의 제작 기술도 비잔틴으로부터 전수되었다. 당시 루시인 건축가나 예술가들 모두가 비잔틴의 스승으로부터 직접 보고 흉내냈던 만큼, 비잔틴과 루시의 성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곧 정교가 신앙을 단순한 관념이나 지적 이해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준 신앙은 말로 가르치는 지적 전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수도하는 체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전달은 생활의 전달과 같다고 간주하여 생활 속의 일 모두가 이를 위해 이용되고 건축술이나 미술도 그 전달 과정에 포함되었다. 물론 이때 교회 달력에 따라 행해지는 일년의 예배 의식도 그대로 전수되었으며, 예배 때 필수품인 여러 성경책들도 끼릴 문자를 통해 많이 번역되었다.
루시가 정교의 길을 걷기 이전부터 성경책과 성자전들이 슬라브어로 번역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후 러시아가 서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위치에 처하게 된 중요 요인이다. 기독교를 배우는데 있어 루시인이 그리스어를 익힐 필요가 전혀 없었던 데 반해 유럽인들은 라틴어 때문에 골머리를 썩혀야 했던 것이다. 원래 로마 총주교구는 라틴어를 강요하지 않은 채 현지인들의 언어를 존중하고 포교하였다. 그런데 로마 총주교구내에 프랑크 왕국이 세워지면서부터 파견된 전도단에게 라틴어 사용을 의무화 함으로써 왕국의 권위를 세워나갔다. 그 본을 딴 로마 총주교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9세기 이후부터 교구내에 라틴어 사용을 의무화하였다.
* 비잔틴과 다른 전통 *
비잔틴이라고 하는 어버이는 루시라고 하는 충실한 자식에게 가진 것을 모두 주었지만, 하나만은 주지 않았다. 그것은 비잔틴 제국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계승해온 살아 있는 그리스 고전이라는 보물이었다. 줄 기회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비잔틴 측에서는 줄 마음도 없었으며, 루시 역시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서구인들은 왜 인접한 비잔틴이 아니라 동방의 멀리 떨어진 아랍으로부터 그리스 고전을 전래받았을까? 7세기 초엽 거의 사막이나 다름없는 아라비아 반도 서남단에서 갑자기 발흥한 이슬람-아랍은 원래 그리스-로마와 직접 연관이 없었을 뿐더러 이슬람 문화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7세기를 지나면서 중동을 양분하고 있던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침입하면서부터 상대의 문화를 흡수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아랍이 비잔틴 제국 영토를 점령하고 거기서 입수한 그리스 고전이 나중에 스페인의 진출로 인해 유럽으로 재반출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 문화가 유럽 문화보다 오래된 것은 분명하지만 루시가 수입한 비잔틴 문화는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러시아 교회의 지붕 모양에도 적용된다. 양파 같은 모양을 가졌다 해서 어니언-돔이라 불리우는 러시아 교회의 지붕은 이슬람교의 사원과 매우 흡사하므로 이슬람의 영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이슬람은 발생하자 곧 아라비아 반도를 북상하여 비잔틴 제국을 침공함으로써 중동에서부터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곳은 기독교적 기반이었기에 많은 성당이 있었고, 그것들은 물론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야 성당을 본딴 둥근 지붕의 모습이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그 지역을 점령함과 동시에 성당을 자신들의 사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슬람의 사원이 둥근 지붕 모양을 띤 것은 비잔틴을 점령하면서 차용한 것인데도, 비잔틴 제국의 그림자가 세계사 속에서 큰 조명을 받지 못하다보니 마치 이슬람 사원의 둥근 지붕이 더 유구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처럼 러시아 교회의 지붕이 돔형인 것은 처음부터 비잔틴 제국의 건축양식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최초에는 비잔틴 성당의 지붕과 다를 바 없었지만, 꽤 일찍부터 북쪽 교회들이 양파 모양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눈이 많은 나라임을 고려해볼 때, 적설량의 무게로부터 돔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모양을 완곡하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어니언-돔 모양이 몽고족의 텐트 지붕 모양을 본따 변형되었다고 하는 설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유럽인들이 이슬람-아랍으로부터 북아프리카를 경유하여 간접적으로 수입한 그리스 고전을 루시인은 왜 직접 비잔틴으로부터 전수받지 않았을까? 우선 루시가 비잔틴과 교류하면서도 그리스어 독해 공부에 신경쓰지 않았음을 들 수 있다. 루시가 세례를 받으면서 비잔틴과의 왕래가 잦아졌는데도 그리스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전이 없던 당시로서는 감히 고전을 읽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하겠다. 그래서 그리스에 관한 내용은 번역되어 있는 책들(精神書)로 만족해야 했고 그리스어 습득은 의사 전달 수준의 구어체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3. 러시아 정교의 특징
기독교에 관한 러시아인들의 태도는 비잔틴보다는 덜 철학적이고, 라틴보다는 덜 제도적이다. 끼예프 공국의 성격상 정치적 필요에 의해 수용된 종교인 만큼, 러시아 정교에서 지적․문화적 진보는 지연되고 의식의 화려함과 장중함에 치우친 감동적 요소가 강조되었다. 원래부터 루시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 인간의 용기나 사랑, 음악과 예술 등에 아주 자연스럽게 감동(우밀레니예)을 잘 하는 민족이었다. 아름다움을 접할 때 우밀레니예를 느끼지 못하면 산 송장으로 취급받던 그들로서는 비잔틴 교회 의식의 장중․화려함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 논쟁보다 감정적인 성정(性情)에 신앙의 초점을 맞춘 루시인은 비잔틴의 교회의식을 그대로 전해 받았다. 예수의 탄생, 사망, 부활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서유럽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조된 그리스 정교의 의식미는 루시 땅에 들어오면서 더욱 극적으로 변하였다. 교회는 명목만의 신의 집이 아니라 진실로 신이 거하시는 장소로 신성시되었다. 의식 중에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신이 부여한 가장 아름다운 소리인 인간의 목소리만으로 음악이 표현된다. 의자도 없고 신자들은 예배시간 내내 서 있다. 보통 하느님을 숭배하는 마음에서, 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의 아픔을 기리는 뜻에서 신자들은 몇 시간씩이나 선 채로 예배를 거행한다. 다른 기독교에 비해 성직자의 역할이 미미한 반면 평신도들이 종교 의식을 주도하고 있다.
루시인은 비잔틴의 이꼰(聖像畵)을 더욱 발전시켰다. 서유럽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나 마리아, 성인들의 그림을 중시하는 것이 우상숭배로 보였지만, 정교인의 관점에서는 이꼰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공경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꼰을 통해 참된 숭배의 길을 걸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루시인들에게 있어 이꼰은 글을 모르는 무지한 농민들을 포교하고 신앙심을 길러주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루시의 이꼰은 비잔틴 이꼰보다 더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으며, 세월이 조금 지나면서 의상도 농민들이 입고 있는 일상복의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기독교 진리에 새롭고도 깊은 통찰력을 담아 주었다. 비잔틴 의식대로 기독교를 수용한 루시인은 곧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방식에 따라 기독교를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비잔틴 사람들이 예수의 신성(神性)을 중시한 반면, 루시인은 예수의 인성(人性), 즉 신성포기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가진 청빈, 사랑, 다정다감, 연민을 본받는 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는 곧 천국과 지상의 지배자인 하느님보다 기독교 안의 자기비하적 요소, 즉 겸허한 예수의 성품과 희생에 대한 믿음이 더 컸음을 의미하였다.
러시아 정신계의 또 다른 특징은 자연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다. 천지창조를 이룬 신에 대한 경배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공통된 사항이지만 루시인은 자연 속에서 신의 사랑에 대한 특별한 증거를 발견하였다. 블라지미르 모노마흐가 남긴 유훈(遺訓)은 세속인에 대해 고매한 도덕적 기준을 전해준 유언집일 뿐만 아니라, 자연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가치에 대한 루시인의 심성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신에 대한 찬미와 더불어 기독교의 여러 측면을 일찍 깨달았던 상류층과 달리 농민들은 여전히 민간신앙에 머물러 있었다. 이른바 이중신앙 형태가 오래동안 지속된 것이다. 루시의 세례는 극적으로 이루어졌고, 인민들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그 어느 나라보다 급속히, 그리고 비교적 고통없이 이루어졌다. 그에 반해 루시 세례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를 많이 남겨 두었다. 즉 기독교는 인민들에 대해 표면적인 지배력밖에 지니지 못했고, 인민들은 자신의 진정한 신념과 일상의 관습에서는 여전히 이교도로 남아 있으면서 이전의 미신들을 기독교 속에 흡수시켰던 것이다.
러시아 정교를 서방의 가톨릭이나 개신교와 완전히 구분짓는 것은 소보르노스찌 개념이다. 19C 전반 대표적인 슬라브주의자였던 호먀꼬프는 교회생활에 있어 '자유와 통일'이란 결합하기 어려운 두 원리를 연구하면서 이 개념을 만들어냈다. "권위 만능의 가톨릭 교회에는 통일은 있으나 자유가 없으며, 개신교회에는 통일 없는 자유만이 있다."고 말한 그는 러시아 정교만이 진정한 자유 속에 통일을 지향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신과 신인(神人)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의 진리를 공통적으로 사랑한다는 기초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통일되는 것이 바로 '소보르노스찌'의 의미이다. 그 어떤 세속적 권위보다 더 높은 교회를 토대로 정교 속에서 인식된다고 믿은 이 가치는 물론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한편 러시아 정교에는 종말론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세기말 러시아의 유명한 사상가 베르쟈예프는 러시아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글에서, "러시아인들은 문화의 중간 영역에 관심이 없으며, 러시아의 사상은 화려하게 꽃핀 문화나 강력한 국가에 대한 사상이 아니고, 종말론적인 신의 나라에 대한 사상이다."고 표현하였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 정교는 문화를 정당화하지 않으며, 인간이 이 세상에서 창조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허무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정교는 기독교의 다른 어떤 것보다 종말론적 측면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고, 러시아인들은 묵시론자들 아니면 허무주의자들이다.
러시아 정교가 종말론과 신의 왕국, 즉 초지상적인 절대선(絶對善)을 지향하고 있다고 이해한 베르쟈예프의 견해는 올바른 것이다. 정교의 이러한 성격은 모든 예배와 연중 교회생활 속에 선명하게 표현된다. 특히 모든 행사 중에 부활절을 가장 성대하게 치루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이기고 신의 왕국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를 찬미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교 성상화의 아름다움 또한 속세의 아름다운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지상적인 영성(靈性)에서 찾고 있다.
속세를 떠나 이러한 절대가치를 지향한 러시아인들로서는 정부의 온갖 탄압과 박해도 참아낼 수 있었다.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이 오면 신이 우리를 불러 주실 것"으로 믿었던 러시아인들의 생각은 성직자들의 국가-교회관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동방교회는 비잔틴의 전통에 따라 '황제교황주의 Caesaropapism' 속성에 따르고 있다. 교회와 국가간의 엄격한 분리가 없던 비잔틴으로서는 황제가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교회는 엄연한 독립기구로서 국가와 상호 긴밀한 협조관계를 통해 공존해 왔다. 따라서 교권은 속권을 넘보지 않았으며 국가는 교회를 보호해 주는 차원에서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다음에 나오는 교회의 발전과정에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4. 초기 러시아 교회
성스러운 루시는 세례를 받은 뒤 곧 끼예프를 비롯한 각지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빠른 속도로 전파된 교회 건립과 예배의식은 루시 문화와 향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뿐만 아니라 인접한 그루지아 등으로부터도 교회 건축을 위한 기술자들이 초빙되어 천년 가까이 축적된 기술들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성경 번역을 위해 사용된 끼릴 문자의 보급은 문맹을 깨치고 야만적인 관습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다하였다. 교회법 또한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에게도 도덕과 종교적 계율의 지침을 정해 주었다. 기독교 세계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는 이념적 기반으로서의 종교적 기능 외에도 교회는 자선과 병자 치료, 여행자들에게 숙박을 제공해주는 등 사회적 기능도 발휘하였다.
반면 그리스 정교를 수용함으로써 서방의 발달한 가톨릭 문화와 단절되는 결과도 가져 왔다. 라틴어를 강제로 사용했던 서방교회와 달리 각 지방어를 허용한 동방교회의 속성상, 러시아 교회도 슬라브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의 고전문화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단절이 러시아의 독창적 문화를 빨리 창달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교회의 원심적 특성에 따라 러시아 교회도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하였다.
따따르족에 의해 끼예프가 멸망한 뒤 모녀지간이었던 양국의 교회 관계도 바뀌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가 임명하고 러시아를 관장하던 대주교가 그리스인에서 러시아인으로 바뀐 것이 바로 이 때였으며, 이는 폐허가 된 루시 땅으로 가려는 그리스인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러시아인 대주교 끼릴은 1242년부터 39년간 루시 땅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루시인들을 위로하고 가르쳤으며, 아울러 성직자들을 서품하고 교회를 재건하였다. 또한 몽고로부터 유일하게 면세 혜택과 함께 신분상의 보호를 받던 성직자들이 민족의 단결을 위해 활동하던 공후들을 지원해 줌으로써, 러시아 교회는 민족 부흥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러시아 교회가 독립적이며 자치적인 교회로 그 위상을 확립해 나간 것은 1448년부터였다. 1439년 플로렌스 종교회의에서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들이 투르크의 위협을 고려하여 로마의 지원을 받고자 가톨릭과 통합하기로 결정한 내용을 모스끄바 대주교 이시도르가 동의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종교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던 루시인들은 모스끄바로 돌아온 대주교를 체포하였고, 결국 그는 1448년 러시아를 떠나버렸다. 이 때 모스끄바의대공 바실리 2세가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독자적으로 랴잔의 주교 요나를 대주교로 선출하였던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당하자 모스끄바 대주교는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로 갈 필요가 없었다. 이반 3세는 1472년 비잔틴의 황녀 소피아와 결혼하고 비잔틴의 쌍두 독수리를 모스끄바의 문장으로 채택함에 따라 동방교회의 정통 계승자임을 선포하였다. 이에 수도승 필로페이가 주창한 '제 3 로마설'은 러시아인의 종교적 자긍심을 한층 드높여 주었다. 제 1 로마와 제 2 로마(콘스탄티노플)는 그들의 이단성 때문에 야만인들에게 정복당하였고, 이제 기독교 세계의 수도(로마)가 모스끄바로 옮겨졌음을 설파했던 것이다.
속권과 교권의 긴밀한 제휴를 강조하던 양자의 관계는 16세기 초 '소유파'와 '비소유파'의 논쟁에서 힘의 균형이 점차 속권 쪽으로 기울어졌다. 수도원의 토지소유 문제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수도사 닐 소르스끼로 대표되는 비소유파는 수도원의 재산 소유는 타락이며, 수도사의 의무는 세상사와 단절하고 영적인 일에 전념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볼로깔람스끄의 수도원장 요셉이 주도한 소유파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을 천명하였다. 즉 교회가 종교적 의무 외에도 빈민구제를 비롯한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재산과 국가의 도움 없이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소유파는 교회와 국가간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한 반면, 비소유파는 이단에 대한 탄압과 같은 교회문제에 대한 국가의 관여를 적극 거부하였다. 심지어 소유파는 군주의 전제를 옹호하여 교회행정에서 군주의 지도적 역할을 허용할 정도였다.
이 논쟁의 결과는 1503년, 1504년 연이어 개최된 교회회의 결과 소유파의 승리로 끝났다. 엄청난 부와 광범위한 특권을 가진 '나라 안의 나라'였던 교회 세력이 국가-교회간의 제휴관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그러면서도 교권은 속권을 넘보지 않고 오히려 속권의 영적 권위를 위해 신의 사자로서 대관식에서 군주의 머리에 관을 얹어 주었던 것이다. 이반 4세는 짜리로 등극하고 1589년 모스끄바 대주교는 총주교로 승격함에 따라 양자간의 밀월관계는 극에 달하였다. 동란시대(1598~1613)를 지나면서 국가 존망의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왕조가 출범하도록 앞장선 것도 교회였다. 심지어 로마노프 왕조의 초대 짜리로 선출된 16세 소년 미하일의 아버지 필라레뜨 총주교는 스스로 대군주의 칭호로 아들과 공동통치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17세기 중엽 교권이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를 제시한 총주교 니꼰에 의해 추진된 교회개혁이, 교회분리를 야기시키고 차후 교회가 국가에 예속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1654년 알렉세이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소집된 교회회의는 모든 교회 서적들을 그리스어 원본으로부터 다시 번역하고 예배의식도 통일시키자는 총주교의 제안을 가결시켰다. 신자들은 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어야 했고, 일부 기도문과 성가의 텍스트도 바뀌었다. 이에 사제장 아바꿈을 비롯한 '구교도'(라스꼴리니끼)들은 개혁을 반대하고 전통적인 의식을 고수하는 운동을 벌여 나갔다. 결국 양자의 투쟁 양상은 황제가 개입한 종교회의에서 개혁파의 승리로 끝나고 파문당한 구교도들은 국가의 처벌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 초기 교회의 특성은 국가-교회간의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공존관계, 주도적 관계를 거쳐 국가의 보호를 받는 단계로 들어 갔다. 그렇지만 황제는 교회 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회의 보호 의무를 가진 '정교회의 군주'로서 자리를 지켰다. 짜리가 교회생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어도 총주교를 선출하던 교회회의에 의해 다스려진 교회는 내부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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