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선교의 마인드
무엇이 비즈니스 선교사이며, 비즈니스 선교사의 마인드는 무엇일까? 이것은 참으로 쉬운 문제는 아니다. 아마 많은 시간을 두고 연구되고 검증되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한 자가 선교사
우리는 곧잘 성경 한 권을 뚫었다는 표현을 듣는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의도, 혹은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위대한 일을 한 최초의 인물이 스데반이다. 스데반이 사도행전 7장에서 구약성경 한 권을 뚫는 설교를 하며,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경륜(계획, 의도)을 설교한다. 그리고 이 설교를 옆에서 듣고 있던 바울이 이 설교를 그대로 다른 곳에서도 한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이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한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음주에도 이와 동일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다른 곳을 다니면서 이 설교를 계속하였다고 하고 있다. 바울은 이 설교에 이어 에베소서 1장에서 이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했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 하나님의 경륜을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를 통하여 온 만유가 통일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만유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곧 우리가 바로 이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당시에는 바울이 이 경륜을 맡았지만 이제는 우리 산 자들이, 우리의 현재 교회가 이 경륜을 맡고 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만유가 통일되어지는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증거 하여야 할 것은 바로 예수께서 이 세계 위의 왕이시며, 우리나라의 왕이시며, 만유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어디에 증거 하여야 하나? 세상 중에 증거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 28:18-20)
또 모든 족속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왕에게 가서 증거하여야 한다. 왜냐면 주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실 때 다음과 같이 부르신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 15)
바울은 대체로 그의 전도의 대상이 후반부로 갈수록 총독들이나 대제사장들이나 왕들이었다. 선교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반드시 벌어지게 되어 있다. 바울이 총독 베스도 앞에 가서 예수의 이 실제 세계의 왕이심을 전하자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행 26: 24,26)
그러나 어찌 되었건 바울은 이 말을 황제에게도 말하길 희망한 것 같다. 그는 기필코 황제를 보려고 한다. 나중에 로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핍박을 받는데, 그 핍박의 한 큰 죄목이 저들은 두 임금을 섬긴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살아 있는 이 세계 위의 왕으로 생각하고 증거하였던 것이다. 왜냐면 예수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교도 이러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실제의 왕이 그리스도라고 말하여야 한다.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이 가 있는 곳에 가서 이것을 말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왕이 예수라고 인정할 때까지 이 일은 변론되어야 하고, 증거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헌신하여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한 자가 선교사이다.
2. 현실세계의 전문가
세상은 현실세계의 전문가의 얘기를 듣는다. 우리가 위의 말을 자꾸 현실세계를 떠나서 교회 내에서만 말하다 보니, 이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로만 듣는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왕이 왜 예수인지를 변론하면 사람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사람들은 영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이원론에 빠져 있다. 그래서 이 두 세계를 분리하여서 각각의 세계에서 왕을 찾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고 이 실제 세계의 왕이시다. 로마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주장하면서 순교까지 하였다. 우리는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선교지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그 나라의 왕들에게도 알려지길 원한다. 지금의 말이 너무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선교사로서 현실에 깊이 참여하는 이유로써 이러한 것을 상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관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위의 일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현실에서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을 부정하게 보기 때문이다. 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구원의 개념을 통해서 파악해 보도록 하자. 왜냐면 땅에서의 것들을 선하게 바라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세상에서의 전문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정죄하지 말고 선하게 바라볼 때 우리가 그 안에서 열심히 살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개념은 여러 가지로 정의된다.
구원의 개념의 대표적인 것이 부활에 대한 개념이다. 여기서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육체의 부활이다. 그리고 이 육체는 아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분명히 땅에서의 존재이다. 그리고 계시록에 의하면 이 새 땅에 우리로 구성된 예루살렘 성전이 하늘로부터 임하여 만유를 다스린다. 또 구원의 개념에 만유의 후사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가 만유의 후사이고,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것인데, 여기서의 만유는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또 구원의 개념을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표현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가 통일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만유는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데, 사실은 땅에 더 큰 의미를 둔다. 왜냐면, 땅이 곧 산 자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이미 분쟁이 없으며, 천사나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영혼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님도 그렇고, 우리는 모두 육체까지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영혼들의 소원은 육체를 갖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개념에 대한 적용을 우리 안에 할 때, 위 모두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이 땅을 거룩하게 여기고, 이 땅에서 그 영생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개념이 바르게 적용된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땅에서 적극적으로 살아 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살 수 있을 때, 비즈니스 선교(전문인 선교)의 자질이 생성된다. 전문인이란, 이렇게 승리하는 삶의 전문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손이 마이더스의 손이어서 사업만 하면 성공하겠는가? 1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첫 번의 원정과 사자왕 리차드의 원정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는데, 십자군전쟁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명분이 좋은가? 하나님께서는 그 명분에 함께 하시나? 아니다. 우리가 선교란 명분으로 비즈니스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와 똑 같이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생각이다. 그래서 비즈니스 선교사의 첫 번째 자질은 먼저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데에 있다. 세상사람들 보다 더 노력하여서 그에 못지 않게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세상사람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세상에서 열심을 낼 수 있는 신앙관이 필요하다. 이것이 비즈니스 선교사의 중요한 자질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아갈 때, 그곳에서 비로소 세상에서의 지혜가 나온다. 지혜는 열심만큼이다. 우리는 이것을 “뱀 같은 지혜”라고 말하고 싶다. 뱀은 세상의 대명사이다. 세상에도 이법이 있다. 로고스에 대한 개념에 따르면, 치리를 잘해서 놀라운 정치가가 되는 이법(지혜), 돈을 버는 이법(지혜), 가정을 잘 꾸리고 그곳에 행복을 쌓을 수 있는 이법(지혜), 심지어는 유머에 이르기까지…… 칼빈은 이것을 기독교 강요에서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고 있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이법에는 우리와 세상 사람들의 그 이법이 다를 바가 없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처럼 지혜롭고 부지런하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다른 바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일을 향하여 나아가면 끝없이 소망을 주시고, 또 믿고 나아가는 자에게 바른 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3.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린 자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철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열심히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면 이제 그에게는 세속화의 위험이 찾아온다. 세상의 축복을 얻는 것으로 모든 신앙이 Focusing 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은 세상의 축복을 위한 도구가 되어간다. 입술로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물들어 간다. 이기심이 극도로 개발된다. 선교사로서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도 여기에 많이 빠질 수 있다. 당장에 직원들에게 줄 급여 날은 매월 돌아오고, 자금은 급하고, 영업은 뜻대로 안 되고, 직원들은 이것을 몰라주고 아주 궁색해진다. 세상에 몰려서 이제 세속화 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겪지 못한 사람은 사실은 아직 책임을 지고 사업장을 운영할 수 없다. 결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그가 경영주라면 이러한 일은 반드시 있게 된다(직원이라면 몰라도). 그리고 이때 우리의 비즈니스 철학이 잘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순교자적인 정신이다. 그러한 순교자적인 정신이 아니면, 이때 순전함이 흔들리게 된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질고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신 주님의 십자가 아래로 나아온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인가? 이곳은 우리를 산 제사의 제물로 드리는 제단인 것이다. 우리의 목숨과 생명, 세상에서의 야망, 소유와 소득, 현재의 곤란스러운 일들과 미래의 일들(걱정과 근심), 부한 것과 가난한 것, 우리의 이기심 등 모든 것을 제사의 제물로 드리는 곳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순교자의 길과, 십자가의 길과, 자기부인의 길을 마음은 원하나 걷지 못하고 망설일 때,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버지께 드리심으로 우리가 드려진 바 되게 해 주신 곳이다. 우리는 매일 이곳에 나아가서 우리의 생명을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 특히 우리의 소유와 소득을 드려야 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부자는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이것을 삶에서 실천하고, 우리의 인생 길을 자기부인의 길,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로 잡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 인생은 청지기의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신 것이다. 우리는 이 “불의한 재물”로 우리 영혼을 구하는 청지기들인 것이다. 이 철학이 서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전 소유를 드릴 수 있는 용기를 매일 내어야 한다. 이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즈니스 선교로 활용하신다.
영지주의적 단계에서 모든 소유를 바친 자의 기도와 물질에 대한 의미를 알고 열심히 세상을 사는 자의 소유를 바친 자의 기도는 다르다. 비즈니스 선교에 대한 견고한 철학을 가지기 전에는 그냥 선교사가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자칫 선교의 길이 사망의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즈니스의 길이 생명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유와 소득이 주의 것이라는 것을 아는 신앙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비즈니스가 선교를 위한 아주 탁월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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