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에서 선교 이양: 현지교회에 선교사역 이양의 원리와 시기와 방안
김활영 선교사|아시아 전방개척 선교 협의회
I. 선교부와 현지 교회의 관계발전 4 단계 (Four Stages of Development)
윈터(Ralph Winter)박사는 현대 선교역사를 요약 해석하는 “Four men, three Eras, Two Transitions”라는 글에서 Henry Venn의 글 중에 유명한 한 구절을 인용하며 선교이양 (宣敎移讓)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Winter, 225-7,1999). Venn은 선교부가 현지에서 존재하는 이유와 목표를 설명하면서, 특히 현지 교회의 설립이란 관점에서 선교부의 기본적인 목표는 현지 교회가 자립하도록 조직을 갖추어서 현지 목사의 지도를 받도록 하는 것이며, 선교부는 자치할 수 있는 목사를 훈련하고 배치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발전하므로, 결국은 선교사는 이렇게 성숙한 현지 목사들에 둘려 싸여서 행복하게 ”선교부가 안락사(mission's euthanasia)“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 . . 그런 다음에 선교사나 선교부는 다른 지역으로 (regions beyond) 옮겨 가야 한다고 하였다. 즉 성숙한 현지 지도자들에게 선교를 이양하고 떠나야 한다고 하였다. 윈터는 계속하여 SIM의 Harold Fuller가 정리한” 선교 사역의 단계들 (stages of mission activity)"을 소개하면서 선교부와 현지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이상적인 발전단계로 Venn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풀러가 분류하고 있는 발전 단계들이란 “개척자 단계 (pioneer stage)", ”부모 단계(parent stage)", "동역자 단계(partner stage)", 그리고 “참여자 단계 (participant stage)"이다.
이들 선교 이론가들은 선교부와 현지 교회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에 비유하여 보았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성장시켜서는 자식이 자기의 가정을 가질 때에 재산을 나누어 주고 세상을 떠남으로 사명을 다한다고 본 것이다. 즉 선교(mission)의 모든 것을 자식 같은 현지교회로 이양함으로 선교가 완성되고, 또한 4단계가 끝나는 시간이 선교 이양의 완성시기로 본다. 이런 선교부와 현지교회 관계 발전 4 단계는 지금까지의 대부분 선교사들에 의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태면 윈터도 선교사가 자기의 사역기간 안에 이 4단계로 사역이 진행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볼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하였다. 미국 개혁교단 선교부의 Samuel Hoffman도 “선교사는 자신을 선교지에서 처음에는 전도자로, 다음으로 교사로, 마지막으로 행정가로 발전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대부분의 선교부들도 선교사역의 이양을 이상의 4 단계에 대입시켜서 평가하고 추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 발제에서는 이 4 단계를 중심으로 선교이양의 문제를 다루며 의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 해답을 생각하여 보려고 한다.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이양의 예를 살펴 볼 것이며, 지난 4반세기 동안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선교에서 선교이양을 이 공식(?)에 적용해 보려고 한다. 또한 과연 다음 세대의 아시아와2/3세계 선교에서 선교 이양의 본이 될 사례가 있는 것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선교이양의 원리와 시기 방안 등을 생각하면서 발제자의 제안을 하려고 한다.
윈터는 이 4 단계에서 현지교회가 자체적으로 새로운 지역으로 선교를 시작하는 단계가 빠진 것을 지적하였다. 선교부의 선교사역만 언급하고 현지교회의 선교사명에 대해서는 4 단계 안에 언급하지 않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첫 개척자 단계에서 선교사는 그야말로 개척자이다. 신자가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선교사 스스로 다 해결해야 한다. 이런 개척 선교사에게는 강력한 지도력뿐 아니라 온갖 일들을 혼자 다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은사를 고루 갖춘 자가 적당하다고 보았다. 천국복음의 씨를 어디에 어떻게 뿌릴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척자인 선교사에게 달려 있다.
개척자에 비해 두 번째 부모의 단계에서 선교사는 부모로써 특별히 교사의 은사가 필요하다. 자라고 있는 어린 교회에 선교부가 너무 엄격한 가부장적인 자세를 가져서는 안되지만 하나에서 열 가지를 모두 가르쳐야 하는 사명이 크다. 이 과정에서 현지교회의 토착화가 결정 된다. 선교부는 현장의 문화에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의사소통을 할 것인가? 복음의 내용이 변질되지 않으면서 현장에 걸맞게 정착하여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린 교회가 자 신학화 (self-theologizing)를 어떻게 진행하도록 도울 것인가는 부모의 선교신학과 특히 교회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선교현장의 제반 상황도 자 신학화의 큰 변수이다.
다음 단계인 동역자로 위치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부모자식 관계에서 동등한 동역자 입장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갈등이 쉽게 생기기 마련이다. 자식을 성숙한 어른으로 인정하는 것이 부모로써는 원하는 바 이기도 하지만 쉽게 인정하는 것이 두렵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자식도 부모를 존경하지만 자기의 정체성을 부모에게 예속되는 것을 용납하는 자식은 흔하지 않다.
마지막 단계는 자식이 완전히 성숙하여 지도력의 이양이 끝난 단계다. 부모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지만 자식의 살림살이에 참여하며 함께 살아가는 경우이다. 선교사의 특수 은사를 교회의 본래적인 사명을 수행하는데 활용하면서 안락사의 단계로 들어가는 단계다. 안락사는 다른 곳으로 철수하여 또 다른 첫째 단계를 시작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 단계에서 참여란 늙은이의 잔소리가 되지 않고 경험으로 얻은 지혜로 그래도 남아있는 은사와 자원을 새롭게 꾸민 가정에 보탬이 되는 봉사하는 정도로 끝내야 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윈터는 이런 4 단계의 사역들이 현대 선교의 첫 시대 (the first era)에는 잘 진행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제2시대(the second era)나 마지막 시대(the last era)에는 상황이 다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허지만 서구 선교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선교 역시 완전 불모지에서, 소위 전방개척지에서 처음으로 개척하는 단계부터 시작하는 선교가 아닌 상황에서는 이 4단계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즉 많은 선교사들이 이미 이 4단계의 과정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 배치를 받거나, 이미 독립한 현지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참여자 혹은 동역자의 위치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선교사들을 위하여 단순한 동역자란 대등하거나 참여자란 손님의 위치를 불편하게 여기기도 하였지만, 선교신학적으로 진보적인 교회들은 그들의 달라진 선교개념에 따라 “선교사”란 용어 대신에 “형제동역자” (fraternal worker)라는 새로운 용어를 차용하고 있다. 윈터는 새로운 용어를 사역의 내용면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선교사로 간주하기를 주저하였고 보수적인 선교부들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진보적인 교회에서의 “형제동역자”의 위치는 선교이양이란 문제 자체가 이미 없어진 관계이다. 현지교회가 성숙하여 이미 선교부로부터 선교를 이양 받았다면 외부로부터 오는 “선교사”가 필요하기 보다는 “형제동역자”가 더 적당할 것 같다.
II. 서구 선교에서 선교이양 (Handing Over of the Western Mission)
지난 두 세기 동안 개신교 서구 선교사역은 지구촌 구석 구석까지 미치는 대단한 역사였다. 보통은 식민 자들과 함께 혹은 뒤를 따라서 열방으로, 소위 후진국으로, 미개한 지역으로, 동시에 오랜 역사와 문명, 그리고 전통 종교를 가지고 있는 여러 족속들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의 발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복음의 행진을 하여왔다. 엄청난 자원도 쏟아 부었고, 순교와 희생이란 대가도 많이 지불하였다. 그 결과 훌륭한 현지 교회들이 세워지고 여러 민족 교회들이 탄생 되었으며, 문명화, 선진 개발 국가로 거듭나는데 일조도 하였으며, 선교현지 사회의 정치, 경제, 과학, 예술, 산업 등등에 영향을 미치고, 민족들의 삶과 사회에 큰 변혁도 (transform) 가져 왔으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맞이한 오늘에도 아직 복음이 미치지 못한 족속들로(unreached, least-evangelized people groups) 남아있는 자들이 세계인구의 1/3이나 된다. 서구 선교사들의 발이 미치지 못한 지역이 남아 있어서 인가? 선교사 배치나 선교이양에 무엇이 잘못된 결과인가? 혹은 다른 원인들은 무엇인가? 하지만 발제자는 여기서 선교이양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200년 개신교 선교는 서구선교 역사였다. 사도행전 이후 동방교회들은 네스토리안이나 시리아 계열로 중앙 아시아를 넘어 중국과 인도에까지 진출하였으나 15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쇠퇴하거나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슬람이나 불교 같은 전통적인 동방 종교들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서방의 가톨릭이나 정교회들도 개신교와 경쟁적으로 이미 점령한 지역들(중남미를 위시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리고 새로운 정복욕심으로 선교영역을 넓혀왔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어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지칭한다. 여기서 발제자는 이런 활발하던 서구 개신교 선교 200년 동안에 선교이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가톨릭과 개신교, 스페인과 미국 선교의 대표적인 선교지인 필리핀을 예로 들어 보려고 한다. 필리핀은 동방 기독교의 영향도 없었고 15세기까지는 토속적인 정령숭배와 같은 원시종교의 세계관 속에 갇혀 살아왔다. 이런 섬 나라에 1521년 마젤란이 세계일주의 함선에 십자가 깃발을 달고 이 섬에 상륙한 이후, 곧 이어서 강력한 스페인 함대와 함께 신부들이 들이닥쳐서 토속어를 배우고 교리를 가르치며 스페인 문화를 소개하면서1세기가 안되어 필리핀 열도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됨과 동시에 가톨릭국가로 변하는 선교가 진행되었다. 이런 가톨릭이 지배하는 마닐라 만에서 미국함대가 스페인함대를 격파한 때는 20세기 초입이었다. 그 때부터 필리핀은 미국의 개신교 선교지로 문이 활짝 열리고 미국의 각종 교파와 선교 단체들이 식민지 당국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각자의 교세를 확장하는 선교를 하여 왔다. 한세기 안에 필리핀 개신교회는 여러 면에서 기록적인 발전을 하였다.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는 스페인의 가톨릭처럼 미국의 개신교 선교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선교부들의 선교이양은 어떠하였는가? 먼저 이들의 독특한 선교환경을 보면, 일단 3세기 동안 가톨릭이 독주하던 민족들의 재 복음화란 점과, 20세기 미국교회의 왕성한 교파확장주의가 식민주의와 함께 들어 왔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장로교파를 위시한 몇몇 교파들은 교파연장 보다는 연합하여 하나의 필리핀 교단을 만드는데 성공하게 된 배경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교파연장이던 교파연합이던 사역에서 선교이양을 가톨릭은 3세기를 끌어 오면서 서서히 지도력을 넘겨주었으나 개신교 선교 단체들은 4단계 공식에 맞춰서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추진하였다. 장로교 선교부를 예로 들면, 선교초기부터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하여 여러 선교부 들과 선교지 분담(mission comity) 뿐 아니라 다른 선교부와 연합하여 하나의 복음주의 교단을 만들고, 신학교를 공동으로 운영한 뒤에, 반세기 안에 철수한 것은 가히 성공적인 선교사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교 선교부는 선교이양에서 한국에서 보다는 필리핀에서 더 빨리 진행되었으며, 선교사의 철수도 처한 상황이 달랐지만 한국이 필리핀보다 늦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라토리움 (moratorium)의 강한 목소리가 아시아에서는 필리핀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먼저 나왔다. 물론 감리교파와 같은 교회 치리 조직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선교사의 철수가 늦어지거나, 본국에서 재정이나 인사 면에서 원격 조정하는 식의 간섭에 대한 불만일 수 있을 것 이다.
대부분 미국의 주요 교파들(장로교, 감리고, 성공회, 침례교 등)의 필리핀 선교는 시작 후 반세기를 기점으로 선교 이양이 진행되어 완료되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고 필리핀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한 다음에 후발 주자로 필리핀에 발을 내 디딘 여러 개의 소위 복음적인 (evangelicals) 군소 교파와 선교단체들은 이미 개신교회 교파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선교사역을 또 새롭게 시작하였고, 또 한번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는 이들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선교사들 대부분은 철수하고 현지교회에 선교를 이양하였다. 발제자는 후발 주자들의 선교이양 과정에서 겪는 진통들을 목격하면서, 개척자 시절부터 선교를 지혜롭게 시작하여야 하며 한 단계씩 넘을 때마다 주는 자나 받는 자의 지혜와 인격이 어떠해야 함을 배우기도 하였다. 각 단계마다 형편과 사정과 사람이 다르므로 수학공식처럼 딱 들어 맞는 절차나 시기나 방안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선교이양의 일반원리는 찾아내어 참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와 대륙에서도 비슷한 선교이양이 진행되어 왔다. 헌데 각 대륙과 나라들 그리고 족속들마다 복음확장에 발을 디딘 서구 개신교선교사들의 일반적인 목표는 할 수 있는 대로 단시일 내에 지역과 족속을 복음화하여 그 현지교회에 선교를 이양하는 것보다 지구촌 구석구석에 지상의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의 건설과 확장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개신교회가 지배하는 국가의 건설이 이루어진 예는 드물다. 또 어떤 지역이나 족속에게서 이런 목표들이 달성되었다고 사항이 종료된 것이 아님을 다음 세대에서 알게 되었다. 즉 복음화된 지역이나 족속들이 다음 세대에서 복음을 유지하고 확장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복음이 살아지거나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남게 되어 재 복음화를 위한 재선교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문제다. 나아가서 자기 교파가 없는 지역과 족속을 일단 새로운 개척대상으로 정하는 경우가 생기고, 따라서 재 복음화, 3차 복음화, 그리고 4차 복음화의 시도가 끊임없이 추진되었다. 이런 재 복음화 시도의 결과로 Joshua Project에서 조사한 바로는 세계 전체 초 문화 선교사의(cross-cultural missionary) 85%가 명목상의 기독교 지역과 족속을 위해 사역하고 있으며, 순수한 비 접촉 미 복음화 종족을 (unreached, least-evangelized people group) 위한 선교사는 전체 선교사의 3%밖에 되지 아니하며, 무슬림 인구 백만 명당 사역 선교사 숫자는3명에 불과하다는 선교사배치의 허점을 고발하고 있다. 심지어 무슬림이 다수를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어렵고 열매가 적은 무슬림을 제쳐놓고, 기독교 종족을 상대하고 있는 선교부가 적지 않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고하고 건실한 서구 선교부들은 선교이양에서 시기의 장단, 방법이나 절차의 차이가 있어도 대체적으로 선교이양이 미리 계획도 되고 제대로 추진된 것으로 보여진다.
선교부 차원에서 선교이양 즉 선교시작과 철수를 생각 할 수 있지만 선교사 개인에게 이르면 문제는 달라진다. 개 선교사의 배치된 시점이나 위치가 개척자, 부모, 동역자, 참여자, 나아가서 fraternal worker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면, 선교사는 자기의 은사나 현지의 필요를 따라서 이양 시기가 이미 결정되어 있거나, 적당한 때를 맞추어 철수할 시기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또 이런 면에서는 선교사 개인들의 선교지 철수는 선교이양과는 별개의 사항일 수도 있다.
III. 한국 선교에서 선교이양 (Handing Over of Korean Mission)
한국선교에서 선교이양은 서구 선교와는 사뭇 다른 선교적 환경에 놓여있다. 즉 본격적인 선교 운동이 추진된 기간이 4반세기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 선교사 파송에서 초기에는 서구선교 단체(OMF, SIM, AIM, WEC, SIL 등)에 의존 합류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개척사역 보다는 서구 선교단체의 이미 진행되고 있는 선교사역에 배치 받은 선교사가 대부분이었던 점, 차츰 현지교회의 초청으로 사역을 시작한 선교사도 많아졌으나, 선교부에 소속되었어도 팀 사역보다는 선교사 개별적 사역이 많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또한 전문적인 사역을 나누어 하기보다는 모든 사역을 다 맡아서 하는 목사 선교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 개 교회의 지원과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어서 소속한 선교부 보다 개 교회의 입김이 선교사에게 더 크게 미치고 있는 선교구조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특징들이 선교이양에서 서구선교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이양을 성공적으로 이룬 예를 소개하기는 이른 시점일 것이다.
이제까지 선교 팀 중에, 장로교단의 초기 산동선교는 반세기(1912-1957) 동안에 3대에 걸쳐서, 장단기 선교사를 합하여 20가정 가까이 참여한 대를 이은 팀 선교사역이었다. 비록 공산당에게 쫓겨나서 어쩔 수없이 철수함으로 선교사역이 현지로 넘어가고 교회는 지하로 들어갔다. 산동 선교부 이후 소수의 선교부가 몇 선교지에 파송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한 두 가정씩 현지교단이나 서구 선교단체와 협력하는 소규모 선교 팀이어서 독자적인 사역은 생각하지 못하였고 선교이양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지난 4반세기 동안 활약한 선교부들 중에 산동선교를 계승하는 첫 팀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회의 필리핀 선교부(합동)는 ‘80년대에 들어와 선교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벌써10여 가정이 팀을 이룬 경우다. 이 선교부는 장로교단 설립을 목표로 한국과 미국의 타 장로교 선교부(통합, 고신, 합동보수, CCC, OPC, PCA)들과 협력하여 재 복음화, 엄밀히 말하면 3차의 복음화 사역에 뛰어 들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수백의 지 교회들과 노회, 총회까지 조직하고 지도력을 필리핀 현지인들에게 넘겨주기 까지 하였다. 이들 장로교 선교부들 중에 통합 측은 교단의 선교철학에 따라 일부의 후발 선교사들은 필리핀 연합교회 (PCUSA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교단)에서 “형제동역자” 신분으로 사역을 계속 확장하고 있고, 일부는 신생 필리핀장로교단에서 철수 보다는 증파 형식으로 계속 사역하고 있다. 한편 합동 측은 선교시작 20년쯤부터 선교부의 사역 목표를 필리핀 장로교단과 상관 없는 사역도 할 수 있도록 변경하고, 역시 철수 보다는 증파형식으로 여러 가지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즉 통합 측은 “참여자” 혹은 “형제동역자” 신분으로 사역을 지속하는 반면, 합동과 고신은 부분적으로 동역자나 참여자로,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개척자 혹은 부모의 신분으로 필리핀 장로교단의 안과 밖에서 사역하고 있어서 선교이양의 단계가 모호하다. PCA 선교부는 점차 철수 쪽으로 방향을 정한 듯하다.
한편 감리교 선교부는 처음부터 필리핀 연합감리교회의 “형제동역자” 위치에서 시작하였으나, 모든 선교사가 필리핀 각 연회에 배치된 것이 아니고 독립적으로 사역하는 선교사도 있다. 다른 한국 선교 단체들 중에서 선교이양을 완료하고 필리핀을 떠나고 있는 교파, 초 교파 선교부를 막론하고 없다. 오히려 선교사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서구 선교부들과 대조를 이루어 서구 선교사들이 남겨주었다고 생각되는 사역을 개발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다른 선교 현장에서도 필리핀에서와 별반 차이가 없는 선교이양이 진행되고 있다. ‘90년대를 지나서 21세기에 들어 오면서 더 큰 규모의 선교사단을 여러 지역으로 파송하고 있지만 한국선교부들은 재 복음화 지역이나, 이미 서구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는 현장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데는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프런티어 지역을 대상으로 개척자적인 사역을 계획적으로 추진하는 선교단체도 생겨나고, 최근 수 차례의 선교지도자 모임에서는 “전방개척 선교(frontier mission)”을 캐치 프레이스로 내 걸고 남아있는 과업에 선교세력을 집중하려고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제한 접근 지역에서는 강제철수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현장 선교부에서 선교이양이 조기에 이루어지는 예도 적지 않다. 반면에 안전한 지역에서는 선교이양을 잊어버리고 있는 선교부도 많다. 오히려 은퇴하는 선교사의 사역이 현지인에게 보다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승계되는 과정이 순탄치 못하여 선교부나 현지교회가 혼란한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 한국 선교에서 선교이양은 아직은 뚜렷한 모델을 제시하기는 이른 것 같다. 선교사 개인적으로도 이제 막 1세대 선교사들이 은퇴하기 시작하였고, 선교부들도 모든 지역과 사역에서 시작과 확장에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보니 어떻게 잘 마무리할 것인가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한국 선교사들도 서구 선교사들처럼 그저 4단계 관계의 사역을 막연하게 받아들이고는 있으면서도 선교이양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점검은 아직 관심 밖의 사항이다. 그러나 윈터가 지적하였던 현지교회의 선교참여에 대하여서는 적극적이고 민감한 생각을 가진 선교사들이나 선교부들이 현지교회의 선교사역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에서 선교 이양은 서구 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로 진행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IV. 선교 이양의 원리와 시기와 방안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오셔서 자신의 사명을(mission) 완수하셨다(눅 24: 44-47).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완성하신 사명을 증거하기를 부탁하시고 떠났다(눅 24: 48-51). 소위 대 위임령 (the Great Commission)이 그것이다. 부탁을 받은 사도들은 복음증거를 통하여 이 땅의 여러 민족들을 제자(교회) 삼아서, 그들 중에서 장로를 택하여 그 회중의 지도자로 세웠다. 그리고 이 장로들을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떠났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행14: 23,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 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2). 이 장로들의 자격이나 사역에 관하여 서신을 통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앞에서 사도들을 계승한 선교사들이, 역사적으로 선교이양을 어떻게 진행하였던 가를 몇 가지 실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사도들의 선교행적이나 역사적 실제 예를 통하여, 선교이양의 의미, 필요성, 내용, 대상, 시기와 방안에 대한 원리들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교이양은 선교사가 복음을 전파하여 제자로 삼고 (제자 된 자들이 곧 교회다), 이 교회에 장로 혹은 감독, 집사들을 세우고, 이들 지도자들을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교이양은 선교사가 신생 교회의 장로들을 주님에게 부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말씀과 성령님께 지도자를 맡기고 떠나는 것이 선교이양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출발한다면, 선교이양의 필요성은 선교사들이 계속 머물러 교회들을 돌볼 수 없고 또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점이 이유이며, 선교이양의 내용은 교회를 든든히 세워 모든 성도들에게 기업이 있게 하는 작업이며, 이양 받을 자는 분명히 지도자들이며, 선교이양의 시기는 대개는 단기간 이었다는 점과 (사도들의 경우), 선교이양의 방안은 지도자들을 주님께 부탁하는 기도와 금식이 있었다는 점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선교부와 현지교회의 관계 발전 4단계는 이상의 선교이양 원리를 교회의 탄생과 성장을 아이의 탄생과 성장에 비유한 발상에서 전개한 이론이다. 그러나Wolfgang Simon같은 가정교회 개척 운동을 주장하는 급진적인 교회개혁론자들이 교회의 사도성과 사도적DNA를 “불가사리”의 DNA에 비유하여 교회의 왕성한 번식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4단계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이 자라고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복음의 능력과 본질을(마 16:12, 눅 13:21) 잊어버리고, 전통적인 기독교왕국적인 교회론 관점에 (Christendom Ecclesiology Perspective) 치우쳤기에 그런 발상을 하게 되었다고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조동진 박사도 이 4단계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선교사가 산모로 교회라는 자식을 낳아 키운다는 발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선교사는 산모가 아니라 산파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시고, 선교사는 주님의 지체가 자라고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성령께 붙잡으시고 사용하시는 도구다. 선교사가 성령의 권능을 사용하여 교회를 낳거나 키우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선교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탄생시키고 자라게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태어날 때부터 주님의 교회이며, 현지인의 소유다. 이런 현지인의 교회는 탄생할 때에 선교부로부터 복음이란 사도적인 DNA는 이미 이양 받았다. 만약 현지교회가 선교부가 가지고 있는 제도화된 교회의 (institutional church) 조직이나 전통, 그리고 이것에 연관된 재산이나 프로그램 혹은 프로젝트까지 이양 받으면 두고두고 토착교회가 되지 못하게 되고 선교부의 교회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선교이양을 선교사의 전진배치, 혹은 선교사의 떠남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한 지역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명을 다한 선교사가 현지교회의 지도자를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떠나는 것이 선교이양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이양 시기, 방안, 대상 등을 다음에서 제안하여 보려고 한다.
V. 선교 이양을 위한 제안
이 제안의 바탕에는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선교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벗어놓고, 새로운 세기에 걸 맞는 새 선교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깔려있다. 즉 전통적인 식민주의적이고 정복적이며, 문화이식적이고 교파확장적인, 또 성직자 중심의 선교로부터 벗어나서, 상황적, 내부자적 관점에서 민족 자율적 교회를 설립하는 목표를 가지고, 그리고 모든 신자가 참여하는 선교로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선교사는 한 선교지에 항구적으로 정착하지 말고, 사도적인 비 거주 순회선교에로 탈바꿈을 제안한다. 나아가 제도적 선교로부터 유연성 있는 자유 유동적인 사도시대의 비제도적 선교에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동시에 교회관에서도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제도적 교회에 대한 인식 때문에 사도시대의 신앙공동체(believers' fellowship)로서의 순수한 교회관에 생소해졌는데, 이런 제도와 구조를 탈피하여 신약성경의 역사적 원형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신약성경의 원형적 교회 관으로 돌아가서 저들에게 적절한 교회제도와 구조를 스스로 정립해가는 것을 도와가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에는 많은 연구와 기도가 수반할 것이며, 전술한 4단계 관계 같은 패턴도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양의 시기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교회가 개척되고 지도자가 세워지면 선교사는 떠나기를 제안한다. 바울의 경우는 데살로니가에서는 소동을 인하여 3주도 주재하지 않았으나 에베소에서는 3년을 눈물과 기도로 복음을 전했다 (행 17:2, 20:31). 그러나 다 훌륭한 교회들이 개척되어서 선교사가 떠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사도시대나 19세기와는 매우 상이한 시대로 발전하여 지구촌은 정보화시대로 변한만큼, 선교사가 현장을 떠난다는 의미 자체가 과거와는 크게 달라져 있음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새 믿음의 공동체가 개척되었다면, 그 공동체는 이 시대의 다양한 컨텍스트에 잘 정착하는 토착적인 형태로 지도자를 세우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양의 중요한 대상인 현지교회 지도자 상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안한다. 만인사제주의로 다시 돌아가서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 주님께서 몸소 한 가운데로 찢어 놓으신 성전 휘장을 다시 꿰매어 놓고 제사장(직업적인 성직자)을 불러오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지도자 양성과정이나 제도를 모든 선교현장에 적용하려는 문화이식적인 틀에서 벗어나서, 현장의 지도자들은 현장에 맞게 양성하는 생각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를 태면 3년 과정의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마친 목사가 있어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은 참고 정도로 하고, 직수입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참고 자료
강승삼 편: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전”전방개척선교”한선협, 2005
선교 위원회 편: 선교전략 논총, 100주년 기념 사업회, 2007
2006세계선교대회: 자료집, 2006
마닐라 선교포럼 편: 자료집, 2009
방지일: 복음 역사 반백 년, 복음 문화사,1986
서만수: 남방에 심는 노래, 기독신보 출판사,1994
정승회: 태국 선교의 위험과, 기독 신보, 1995
조동진:한국교회 국제지도력 개발과 21세기 선교신학의 정립, 2007
촬스 크래프트, 김요한외 역: 말씀과 문화에 적합한 기독교, 생명의 말씀사, 2005
Kim, Hwal Young, From Asia to Asia: A Mission History of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1876-1992), Unpublished Dissertation, RTS, 1993,
Ralph D. Winter, and Steven C. Hawthorne, ed.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William Carey Library, 1999
Rhodes, A. Harry, ed.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of Presbyterian Church in USA, 1934
Rodges, J.B, Forty years in the Philippines: A History of the Philippine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Board of Foreign Mission, 1940
Simson, Wolfgang: The Starfish Manifesto, http//starfishmenifesto.com. 2006
Taylor, W. ed. Global Missiology for the 21st Century, WEF, 2002.
'선교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 선교사훈련의 공헌, 반성 및 제언 (백광현) (0) | 2012.07.09 |
---|---|
[스크랩] Re:한국 선교에서 선교 이양: 현지교회에 선교사역 이양의 원리와 시기와 방안의 응답 (김북경) (0) | 2012.07.09 |
[스크랩]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 2012년 한국교회 아시아 선교역사 포럼 선언문 (0) | 2012.07.09 |
[스크랩] 응답: 한국 선교운동의 현재와 미래적 전망 (김종국) (0) | 2012.07.09 |
[스크랩] 한국 선교운동의 현재와 미래적 전망 (한철호) (0) | 2012.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