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순교의 신앙으로 이어진 중국 선교 (김진주)

수호천사1 2012. 7. 9. 17:21

순교의 신앙으로 이어진 중국 선교

김 진주

  벌써 사역을 시작한지 9년이 되었다. 처음 3년은 조선족 사역을, 다음 3년은 탈북자 사역을, 그리고 지금은 한족 사역을 하고 있다. 2004년 가을, 늦은 결혼이었지만 장신대 한경직 기념예배당에서 한족 아내와 결혼식도 올렸다. 결혼식 때 초청되었던 장인, 장모님도 은혜를 받고 중국에 들어오셔서 친구들과 친인척, 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결신자와 헌신자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지도자들을 세우고 신학도 지원하고 있다.

순교의 신앙을 받다 

  98년 봄, 월산교회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해마다 3.1절 기념식을 남양주문화원과 공통으로 갖고 있는데 고 김필규 목사님 후손들도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집안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조부님은 가평 처가에 살면서 1907년 남양주 화도읍 월산리에 당미교회와 배인학당을 세우고 가족들도 모르게 전도와 교육에 힘쓰고 계셨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그 지역 독립만세 운동과 그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연행되어 심문을 받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관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시다 순교(건국훈장 제 3549호)하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몰랐던 부친은 머슴으로 성장하였다. 그 후 금광을 전전하다가 양평금광까지 와서야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였다. 6.25전후 빈농에서 태어난 형제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증손들까지 대학을 나온 후에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우리 가정의 순교의 신앙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또 선교사로서의 삶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정상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공부는 중 3때 중단하였고, 공장을 돌며 12가지 기술을 익혔다. 33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기도하던 중 중국선교의 사명을 받고 서울 장신대학 성서과에 입학했다. 그동안 고입검정고시를 비롯하여 대입검정고시, 그리고 방통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였고 신학과, 장신대학원에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와 교단이 다르고 출석하던 교회마저도 양분되어 흩어져 실제로 모교회도 본교회도 없어졌다. 서울 근교의 개척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있다가 훈련을 받고 중국으로 왔으니 파송교회도, 후원교회도, 특히 목사고시를 통과하고도 안수 받을 교회가 없었다. 어려움 가운데도 하나님께서는 길을 인도하셨고 어느 교회의 배려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보일러 김 사장 

  한 단체에서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방향을 한족선교를 해야겠다고 정했다. 그러나 방통대 중문과 신. 편입생 지도를 6년간이나 하여 초급중국어Ⅰ,Ⅱ를 외울 정도라는 교만 때문에 언어연수를 하지 않고 바로 조선족 사역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보일러 시공을 했다. 촌서기집으로부터 시작하여 처소교회, 양로원, 고아원, 사역자 주택 등을 실비로, 또는 자비로 재료를 사서 돌보아주었다. 이 일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S시 주변 B, T, G, Z지역과 멀리는 M지역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자문도 해주고 수리와 시공을 했다. 한번은 M지역에 있을 때 S지역에서 연락이 왔다. 2층 건물을 신축하고 보일러 시공할 사람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보일러 김 사장’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줬다며 보일러 시공을 해 줄 것을 요청해서 공사를 해 준적이 있다. 이때 미국에서 은퇴하고 중국에 온 목사님이 내게 ‘한국에서 들었는데 이 지역을 다니며 보일러를 고쳐주고 시공해 주는 선교사님이 있다던데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아마 제 얘기가 거기까지 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보일러만 시공한 것은 아니다. 가는 곳마다 때가 되면 ‘보일러 김 사장님이 말씀을 전해주시겠습니다.’라고 소개되었고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사역의 어려움 속에서도 

  처음 1, 2년은 처소교회에서 지내면서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주일예배를 인도했다. 20여명이 예배를 드렸다. 그해 여름 수요일 오후에 혼자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청년인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었는데 공안이었다. 나는 파출소로, 구(區)의 공안 분국(分局) 정보과에 붙잡혀갔다. 공안은 처소교회 부근에 있다가 예배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공안 분국으로 연행하였다. 다행히 청년들은 눈치를 채고 서로 연락하여 잡히지 않았고, 나는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벌금을 물고 추방당했다. 

  이후 탈북자 사역으로 이어졌다. 같은 민족임에도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짐승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어 도와준 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2년 여간 계속 이어졌다. 나는 한 사건을 계기로 탈북자 사역에서 한족 사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음 해 8월말, 갓난아기를 포함하여 8명의 탈북자와 안내인이었던 조선족 한명, 그리고 나는 상의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쓴 채 렌트한 승합차로 북경에 가서 그곳 안내인에게 8명을 인계한 수 조선족 안내인과 동물원에 갔다. 저녁에 호텔에 가서 CNN뉴스를 보고 그들이 공안에 잡혀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선족은 사색이 되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으로 가느냐, 중국 내에서 잠적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다. 북경에서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비행기표를 챙기고 컴퓨터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 공항을 향했다.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었기 때문에 나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 같아보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져만 갔다. 출국심사대에서 애써 태연한 척 여권을 내밀었고 심사원은 ‘한국사람 맞느냐?’고 물으며 스탬프를 찍어 여권을 건네주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몹시 피곤하였고 담도 들어 몸이 결렸다. 그 사건은 한국의 3개 TV에 방영되었다고 한다. 연이어 대사관 진입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난 후 어느 지인으로부터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없다는 확인 통보를 받고 여권을 다시 만들어 중국에 들어갔다. 그 후 그들은 공안에 잡혔다가 북송된 후 다시 중국에 들어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사건 후, 내가 ‘동쪽의 귀인’이라고 부르는 H씨가 중국에 온 목적이 한족선교라면 한족선교에 충실하라고 말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한족과 결혼할 것을 권했다. H씨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팔순 노모님은 새 며느리의 인사를 받고 한 달도 못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다. 금년 3월 초 하나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또한 최근 H씨가 안전하고 독립된 장소를 제공하여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의 사역 가운데 소전력 풍력발전으로 반년을 추워서 웅크리고 쭈그리며 사는 농촌교회의 교인들에게 냉난방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비닐하우스와 축산, 양어장을 확대, 적용하고, 농촌교회를 중심으로 1원 사우나도 계획하고 있다. 아직도 광솔 불을 켜고 사는 내몽고 벽지에도 전등불을 켜주고 싶다. 그리고 팀을 조직하여 산간지역에 가서 기계로 벽돌을 찍어 반듯한 집도 지어주고 농촌교회에 화장실과 주방 등 주거개량 사역도 하기 원한다.

  어느 해, 한국에 들어가서 막일을 할 때 점심 식사를 하고 목사님들에게 점심 드셨냐고 전화를 했더니, 아니 고난주간에 무슨 점심입니까? 하는 말을 듣고 나서 뼈아픈 기도를 했다. 힘든 일을 하니 금식은 못하고 일하면서 묵상을 했다. ‘나에게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저녁에 성경을 읽다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한 후에 중보기도하면서 변호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탈북자 사역 중에 배신을 당해 불면증으로 고통 받을 때도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는 말씀에 따라 용서하고 기도하였다. 

  누가 탈북자는 안 된다거나 조선족은 안 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러면 일본 사람은 좋습니까? 미국사람은 좋습니까? 한국 사람은 좋습니까? 라고 되묻는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큰 사랑의 빚진 자로서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라고 합니다.

  조부의 순교와 부친의 농촌 정착, 그리고 나의 취학기의 빈궁과 학업 중도포기, 상경해서의 생활과 기술 습득, 예수 영접 후에 先신학과 後검정고시, 모교회도, 본교회도, 후원교회가 없어도 자비량 선교를 감당케 하신 것을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全과정?을 통하여 나를 다듬으시고 연단하시고 낮추시고 겸손케 하셔서 불평 없이 그저 순복케 하신 주님의 손길을 깨닫는다. 나는 보냄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선교할 마음, 즉 사명감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교회가 보내고 후원도 받아 하면 더할 나위 없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 중에서 뽑아 세우시어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으면 감사하고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보내는 자?도 선교를 후원(비)으로 하는 것으로 부담을 가지면 안 된다. 돈보다는 뒤에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므로 가능한 것이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무엇 하나 잘난 것 없는 ‘나’를 다른 나라, 민족에게 보내셔서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죽도록 충성하여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할렐루야! 세상의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김 진주/중국 사역자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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