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⑤ - 거듭남의 증거
인간은 거듭남의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났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우리가 수 십년 신앙생활 하는 동안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는 수 없이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 거듭나는지 그 방법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엡2:1)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려고 노력하지만 거듭남의 방법을 몰라 모두들 헛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셨는데도 자기가 거듭났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직 그 심령 상태가 어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갓난아이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거듭남의 방법은 없지만 거듭남을 확인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 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1)
여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에서 ‘믿는’이라는 동사의 시제(時制)를 주목하여 봅시다. 이 시제는 현재입니다. “하나님께 로서 난 자”에서‘난’이라는 동사의 시제는 과거입니다.
따라서 현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이미 다 하나님께로서 난자(거듭난 자)입니다.
거듭남의 증거가 아닌 것
많은 성도들이 거듭남의 증거가 아닌 것을 거듭남의 증거로 오인함으로 말미암아 거듭남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 거듭남의 생일
구원 파(이단)는 거듭남의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
"구원받았는가?"
라고 물어 봅니다.
"구원받았다"
라고 대답하면 다시
"거듭났느냐?"
라고 물어 봅니다.
"거듭났다"
고 하면
"언제 거듭났느냐? 거듭남의 생년월일은 언제인가?"
라고 물어 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거듭남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꼬투리 삼아 구원파들은
"육신이 태어난 생일은 있는데 영이 태어나는 생일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일은 모른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심령 상태가 어린 교인은 자기의 거듭남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고 구원파의 유혹에 그만 걸려들고 맙니다.
구원 파는 거듭남의 생일을 모르면 거듭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구원은 없다고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생일을 모르는 사람(예를 들어 고아들처럼) 들에게 너는 생일을 모르는 것을 보니 너는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억지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신이 태어날 때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일을 아는 것은 우리의 인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2)거듭남과 거듭남의 체험
사람들 중에 ''''거듭남''''과 ''''거듭남의 체험''''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거듭날 때 내가 거듭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체험하는) 경우도 간혹 있을 수 있지만 (바울 사도와 같이) 대부분의 경우 거듭남의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경우는 후에 영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 거듭남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은 거듭남의 사실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별로 느끼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듭남의 체험은 주로 회개의 체험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강하게 느낄수록 은혜가 됩니다.
회개의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죄가 생각나게 되고 강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 쏟아지면서 통회 자복이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평안과 위로를 경험하게 되지요.
이런 체험이 있으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믿음에 큰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이 없다고 해서 거듭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3)거듭남과 거듭난 자의 생활
성도들 가운데 거듭났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거듭남 후에 영적인 생활이 없어서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쉽게 흔들리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제가 부목사로 시무하던 도성교회에 목소리가 유난히 크신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새벽 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시작하면 그 권사님의 기도 소리가 유난히 커서 제 귀에 다 들려 왔습니다.
"현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거듭(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 로서 난자니....''''(요일5:1) 권사님 이 성경 말씀을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아멘 믿습니다.”
하고 권사님은 아멘은 참 잘 하십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새벽 예배를 마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예의 그 권사님의 큰 기도 소리로
“하나님 어찌 하시든지 이 부족한 죄인을 거듭나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나는 권사님의 기도가 끝날 때 까지 기다렸다가 권사님을 당회실로 불렀습니다.
“권사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인 것을 현재 믿고 있지요?”
“물론 믿고 있지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그야 거듭난 사람이지요.”
“그런데 권사님은 오늘 아침에도 거듭나게 해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왜 자꾸 그러세요? 그러니 앞으로는 거듭나게 해달라고 기도 하시지 마시고 거듭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세요.”
“목사님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새벽에도 여전히 권사님은
“하나님 어찌 하시든지 이 부족한 죄인을 거듭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또 나는 권사님을 불러서 말씀드립니다.
“권사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인 것을 현재 믿고 있지요.”
“물론 믿고 있지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그야 거듭난 사람이지요.”
“그러면 권사님은 거듭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런 대화가 수 차례 반복되었지만 그러나 다 소용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주여 이 죄인을 거듭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권사님의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을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 것은 몇10년 동안 알고 있던 거듭남의 개념과, 성경에 정의 되어있는 거듭남의 개념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거듭남이란 거듭나는 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참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이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혼동치 말 것은 거듭남과 거듭난 자의 생활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요컨데 거듭난 자가 신령한 생활을 못한다 해서 거듭남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으로, 거듭났지만 아직 거듭남의 생활을 못하고 있는 자를 “육신에 속한 자”(고전3:1-2)로, 거듭난 사람에 걸맞은 생활을하는 사람을 “신령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4)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제가 장로로 시무할 때에 "평신도 신학"이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거듭남에 관한 비유를 요강단지와 밥그릇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옛날 어느 아가씨가 결혼을 했습니다. 시댁에는 홀로된 시아버지가 계셨는데 얼마나 식성이 좋으신지 아무리 큰 밥그릇에 밥을 담아 드려도 뚝딱 다 잡수시고 새 며느리에게 밥을 더 달라고 하기가 민망해서 숟가락을 놓지않고 계십니다.
이 민망함을 없애기 위해서 온 집안을 샅샅이 다 찾아보다가 마루 밑에 큰 놋 그릇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유기(놋쇠)로 만든 그릇인데 꼭지가 달린 뚜껑도 있었습니다. 이 그릇은 아주 컸습니다. 아무리 대식가라도 여기에 밥을 담아 드리면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릇은 요강단지였습니다.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며느리가 요강단지에 밥을 담아 시아버지에게 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요강단지를 기왓장을 깬 가루를 수세미에 묻혀서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 깨끗하게 하고 또 끊는 물에 소독까지 해서 청결한 요강단지를 만들어서 여기에 밥을 가득 담아 시아버지 밥상에 올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아버지가 이렇게 큰 그릇에 밥을 담아 드리는 며느리에게 고맙다고 하실까요? 아니면 화를 내실까요?
요강단지는 아무리 깨끗하게 닦고 소독을 해도 요강 단지일 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은 아무리 수양을 하고 착한 일을 해도 “육에서 난 것은 육입니다.”(요3:6) 그러므로 요강단지에 밥을 담아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요강단지를 가지고 안성에 있는 유기 공장으로 가야합니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 안성에 가야 유기그릇을 내 마음에 맞게 주문해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맞춤 그릇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며느리가 요강단지를 가지고 안성 유기공장을 찾아가서 요강단지를 녹여서 요강단지 만한 밥그릇을 만들어 이 밥그릇에 밥을 담아서 시아버지 상에올려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요강단지를 녹여서 만든 밥그릇이라고 며느리를 야단치실까요? 아닙니다. 그 게 요강단지 건대포 탄환 탄피이건 간에 용광로에 일단 들어가서 쇳물이 되어 나오면 이전 들어 갈 때와는 전혀 다른 유기가 되어 나오기 때문에 설사 요강단지를 녹여 만들었다 할지라도 이것은 완전하고 깨끗한 밥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은 아무리 깨끗하게 되어도 신령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육은 죽음에 넘기고 육이 성령과 물의 용광로에 들어가서 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평신도 신학에서 읽은 거듭남의 비유를 꽤 길게 소개했지만, 사실 이 비유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즉 육은 그 어떤 과정을 거처도 영이될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육은 용광로에 들어갔다 나와도 육이지 영이될 수는 없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은 없어지고 변하여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은 그대로있고 영이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육에 보석과 같은 영이 담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남이란 육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육은 그대로 있고 영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났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의 생활이 신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죽었던 영이 갓 태어난 사람을 ‘육신에 속한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과 거듭남의 생활은 구별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즉시 신령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이 신령해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통하여 성령을 쫓아 행할 때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갈5:1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 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1)
- 끝 -
원로 Essay 중에서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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