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에서 고백되어지는 기독론
(부제: 17세기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을 중심으로)
발표자: 신원균 목사
서론 본론 1.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기독론 고백 1) 교리문답
2. 이성일인격(二性一人格) 1) 제네바 교리문답 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요리문답
3. 성만찬의 내용 가운데서 기독론 고백 결론 |
서 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마태복음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증거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고백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어떻게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교회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항상 바르게 확인되어져야 했던 물음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15)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잘못된 고백은 교회 역사 가운데서 항상 교회를 향하여 도전해 왔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잘못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항상 교회를 도전하고 있다. 즉 역사적인 개혁교회의 정통적인 신앙고백인 소요리문답 21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사람이 되셨으니 앞으로도 한 인격에 구별된 두 가지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다”라고 고백되어지는 있는 것처럼 성경적으로 바르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위대한 사람으로만 고백함으로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예수님만을 고백한다든가 또는 예수님의 사람이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의 가르침만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런 잘못된 신앙고백은 자유주의의 ‘예수전 연구’를 통해서 더욱 급속도로 한국교회에 퍼지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Historie’(역사적 예수)와 ‘Geschichte’(케리그마적 예수) 라는 형태로 나뉘어져 다양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가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개혁교회에서 사도신조로부터 시작되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따라서 성경에서 증거되어지는 예수님을 바르게 고백해 왔던 신앙고백은 점점 사라지고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고백만이 한국교회 가운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을 통해서 주어지는 거듭남과 구원의 확신과 평안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더욱 큰 혼란과 불안과 허무함만이 가득차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변질되고 흐려져 가는 이 때에 우리는 개혁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따라서 고백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시급히 확인하고 발견하여 성경에서 증거되어지는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살아계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라고 물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본 논문에서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어떻게 고백되어지고 정리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신앙고백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기독론의 내용을 살필 때 다음과 같은 3가지의 구조로 살피고자 한다. 첫째는 삼위일체의 구조 가운데서 기독론이 어떻게 고백되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며, 둘째로는 이성일인격(二性一人格)에 대한 기독론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로는 성만찬에서 제시되고 있는 기독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구조로 신조에서 제시되고 있는 기독론을 살피고자 하는 이유는 우선 개혁교회에서는 항상 기독론을 고백할 때 기독론만을 따로 분리 시켜서 고백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고백 가운데서 기독론을 고백해 왔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내용은 사도신조의 고백을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개혁교회의 정통적인 신앙고백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기독론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인격(이성일인격)과 사역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만찬 속에서 기독론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교회 역사 속에서 기독론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논쟁이 이성일인격에 대한 문제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6-17세기의 개혁교회 신앙고백들이 칼빈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데 칼빈의 기독론 가운데서 “칼빈주의 신학 ‘밖에서’(Extra Calvinisticum)”라는 기독론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즉 Extra Calvinisticum은 “유한이 무한을 받을 수 없다(finita non recipiunt infinita, 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라는 고백과 함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은 루터주의와 로마 카톨릭과 구분되는 아주 중요한 개혁신학의 독특성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본 논문에서 성만찬의 내용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고백되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 론
1.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기독론 고백
1) 교리문답
칼빈의 제네바 교리문답은 사도신조의 내용을 그대로 해설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조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기독론 이해는 개혁교회의 기독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앙의 기초를 형성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사도신조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 신조에서 소개되어지고 있는 기독론은 철저하게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증거되어지는 기독론임을 다음과 같이 먼저 정립해 주고 있다.
13문: 어떻게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답: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14문: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다는 말입니까? 답: 예, 그렇습니다.
또한 사도신조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소개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17문: 이 신앙고백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것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까? 답: 4가지 부분입니다.
18문: 어떤 것들입니까? 답: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님께 대한 것입니다. 넷째로 교회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우신 행위들에 관한 것입니다.
19문: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신 데 당신은 왜 아버지(성부), 아들(성자), 성령(성령)을 말하고 있습니까?(삼위:三位) 답: 우리는 단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만물의 시작, 기원 그리고 제 일 원인이신 아버지와 영원한 지혜이신 아들과 모든 피조물 위에 부어지시기는 하나 언제나 당신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신 성령님을 고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0문: 당신은 우리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位格)을 명확히 구분할 때 그것이 전혀 부적절하지 않으며,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분리되지(나누어지지 않음) 않으신다고 이해하고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의 구조에서 칼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각 위격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부분에서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을 칼빈은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22문: 당신은 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까? 답: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성부)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며, 영원 전부터 하나님(성부)에게서 나셨습니다. 그 후 그분은 세상에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고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예수님의 자리와 그 사역을 이해하는 방식은 사도신조의 모든 기독론의 내용에 있어서 핵심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의 자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그 외아들’이라고 불려지는 것도 ‘그것은 하나님(성부)의 아들을 우리의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31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는 말씀을 기초로 해서 소개되는 46문의 설명에서도 “그러나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불려지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본성적으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라는 형태로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에서 정죄되었던 아리우스주의나 사벨리안주의 등이 철저하게 배격되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구조 속에서 기독론의 자리를 고백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와서 더욱 분명하게 그 성격을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8장에서 기독론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2장에서 삼위일체를 정리해 주고 있다. 특히 대요리문답에서는 기독론의 자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삼위일체의 고백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부분인지를 다음과 같은 부분을 통해서 더욱 자세하게 고백되어지고 있다.
10문: 신성 안에 있는 삼위의 고유한 품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기초로 8장에서는 기독론의 첫 고백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성부) 그의 영원하신 뜻을 따라,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택정(擇定)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仲補者)가 되게 하시며(사42:1; 벧전1:19,20; 요3:16; 딤전2:5), 선지자(행3:22), 제사장(히5:5,6), 왕(시2:6; 눅1:33), 자기 교회의 머리요 구주(엡5:23), 만유의 후사(히1:2), 세상의 심판자가(행17:31) 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에게 창세 전에 한 백성을 주시어 그의 씨가 되게 하셨고(요17:6; 시22:30; 사53:10), 기약한 때에 이르러 그로 말미암아 그 백성이 구속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성화되고, 영화롭게 되도록 하셨다(딤전2:6; 사55:4,5; 고전1:30).
위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자리뿐만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모든 내용은 철저하게 삼위일체의 고백 안에서 기독론이 고백되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성부 하나님과 관련하여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고백이 되어야 함을 우리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발견하게 된다.
제 35문 :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지니신 채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처녀 마리아의 혈육으로부터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취하셔서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우리와 같은 형체가 되어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다는 뜻입니다.
위의 고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요한이서를 통해서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1:7)라고 ‘영지주의’ 이단을 지적한 이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등장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만약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면 이때부터 그리스도는 참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위의 교리문답에서 고백되어지는 것처럼 비록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성을 취하셨을지라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잃어버리거나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지니신 채” 참 사람이 되셨음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후 삼위일체의 제 2위에 대한 이해가 논쟁이 된 것은 과거 케노시스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라는 말씀을 가지고 잘못된 주장을 교회 안에 제시했기 때문인 것이다. 즉 이들은 위의 말씀 중에서 ‘동등 됨을 버리고, 자기를 비었다’라는 부분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의 동일한 본질까지 버리셨기 때문에 성육신 하신 후 인성을 취하셨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하나님이 아님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까지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누리시고 얻으셔야 하는 권세와 영광과 존귀함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인간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인간의 자리까지 낮아지셔서 참된 인간의 몸을 취하였을지라도 역시 위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지니신 채” 라는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제 2위(位)이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즉 성육신 하신 이후에도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본질이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기독론 고백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이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도르트신조/ 둘째교리)
4항. 이 죽음이 무한한 가치와 존엄이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내놓으신 그 분은 온전한 거룩함을 가지신 실제의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시오 성부와 성령과 함께 동일하게 영원하며 무한한 본질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본질이 우리를 위한 구세주로서의 필수적인 자격을 갖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바로 이 분의 거룩함이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 삼위(三位) 중에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또한 동등하신 분이시며,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요1:1,14; 요일5:20; 빌2:6; 갈4:4). 또한 인간의 본성에 속한 모든 본질적인 성질들과 일반적인 연약함들을 아울러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히2:14,16,17; 4:15).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고, 그녀의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나셨다(눅1:27,31,35; 갈4:4).
3. 신성과 결합된 인성을 취하신 주 예수는 성령으로 성화(聖化)되고 한량없이 부음을 받았으며(시45:7; 요3:34), 그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었고(골2:3), 성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그 안에 거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골1:19).
위의 고백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후 인성을 취하셨을지라도 여전히 삼위일체의 제 2위(位)이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즉 인간이 되셨다고 해서 제 2위(位)의 자리가 없어지거나 낮아지거나 변질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론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독론의 신비로움을 3항에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라는 말씀에 따라서 “신성과 결합된 인성을 취하신”라는 표현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거룩함과 영광과 본질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취하셨고,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인간의 몸을 매우 높은 거룩함으로 올리셨기 때문에 승천하셔서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신 제 2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런 기독론의 고백이 4항에서는 사역과 관련하여 히브리서의 말씀을 기초로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히13:8)라고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고백되어지는 기독론의 자리를 기초로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소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네바 교리문답 33문에서도 ‘예수’라는 고백을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불리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실제로도 그대로 불려져야 합니다”라는 방식으로 소개해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있어서도 “그분은 왕, 제사장, 선지자로 임명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34문)”라고 설명하면서 기독론의 모든 내용은 철저하게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고백되어져야 하는 방식임을 제시 해 주고 있다. 이런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대한 이해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삼위일체의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제 31문 : 왜 예수님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까? 답 :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으심으로 우리의 구속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과 뜻을 완전하게 계시해 주는 위대한 선지자가 되셨고 자기 몸을 화목제로 드려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셨으며6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죄에서 승리하시는 삶을 살도록 늘 지켜 보호하시는 영원한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지자’직에 대한 고백에 있어서도 “그분은(예수)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높으신 대언자요, 보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분명히 밝혀 주셨으며 그리고 모든 예언들과 계시를 완성시키셨기 때문입니다(제네바 교리문답 39문)”라고 고백하면서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의 방식은 성부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고백도 기독론 속에서 함께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면서 36문에서는 “그것은 성령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성령님의 은혜는 과거에 행해졌던 외적 기름부음의 본질적인 것입니다”라는 형태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역시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그 왕국은 의와 생명을 지니고 있는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37문)”라고 고백됨으로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비하(卑下)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신조의 부분을 설명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인간의 협력이 없이 오직 성령님의 기적적인 활동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49문)”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52문에 가서는 성령의 자리와 함께 성부의 자리를 좀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52문: 그런데 이것은 왜 인간의 행위나 자연질서를 통해서가 아니고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 일어나야만 합니까? 답: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부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령님께서는 이 잉태를 인도하시어 우리 주님을 모든 부패로부터 보호하시고 또 그분을 거룩함으로 채워 주셨던 것입니다.
53문: 이로써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흠이 없으시고, 모태로부터 본래적인 깨끗함으로 성부 하나님께 바쳐지셨으며, 인간의 보편적인 부패의 지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확증되었다는 것입니까? 답: 예, 그렇습니다.
위와 같은 신앙고백은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61: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라는 말씀에서 이해되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칼빈은 삼위일체의 구조 속에서 기독론의 자리를 고백하는 방식이 위와 같은 성경말씀의 형식을 따라서 이해되어지는 것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런 기독론의 이해가 고대신조와 어거스틴(Augustinus)을 이어서 개혁교회 가운데서 정통적으로 고백되어진 기독론의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즉 어거스틴이 “성부, 성자, 성령은 존재가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역사에도 분리될 수 없다. 즉 외부와 관련된 사역에 있어서도 분리될 수 없이 역사하신다”라고 증거했던 것처럼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정통적인 개혁교회의 기독론이었던 것이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삼위일체의 구조 안에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을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관련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8장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3항. 이는 그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히7:26; 요1:14), 중보자와 보증인의 직분을(행10:28; 히12:24; 7:22) 수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직분은 그가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요, 성부께서 그를 부르셔서 맡기신 것이다(히5:4,5). 성부께서는 모든 권세와 심판을 그의 손에 맡기시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명령하셨다(요5:22,27; 마28:18; 행2:36).
위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사역은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단독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고백 속에서 증거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중보자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적작정 속에서 ‘속죄언약’과 ‘은혜언약’을 맺으신 삼위일체의 사역이였던 것이다. 이런 뜻이 4-5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4항. 이 직분을 주 예수께서는 아주 기꺼이 맡으셨으며(시40:7,8; 히10:5-10; 요10:18; 빌2:8), 이 직분을 이행하기 위하여, 그는 율법 아래 태어나셨고(갈4:4),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으며(마3:15; 5:17), 자신의 영혼이 가장 극심한 고뇌들을 직접 겪으셨으며(마26:37,38; 눅22:44; 마27:46), 그의 몸으로는 가장 아픈 고통들을 당하셨고(마26:27),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빌2:8), 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으나 결코 썩지 않으셨다(행2:23,24,27; 행13:37; 롬6:9). 사흘만에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으되(고전15:3-5), 그가 고통 당하셨던 바로 그 몸을 가지고(요20:25,27) 또한 하늘에 오르셨으며, 거기서 그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막16:19) 간구하시고(롬8:34; 히9:24; 7:25) 세상 끝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롬14:9,10; 행1:11; 10:42; 마13:40-42; 유6; 벧후2:4).
5항. 주 예수는 완전하게 순종하시고, 그가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충분하게 만족시키셨으며(롬5:19; 히9:14,16; 10:14 엡5:2; 롬3:25,26),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얻을 영원한 기업을 값 주고 사시었다(단9:24,26; 골1:19,20; 엡1:11,14; 요17:2; 히9:12,15).
4항의 고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뜻하신 신적작정을 이루시기 위해서 중보자의 직책을 맡으시고, 또한 이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낮아지시고, 높아지시는 사역들을 감당하시게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5항을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계되어 있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고백해 주고 있다. 이처럼 8장에서는 기독론에 대한 고백을 다루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백 속에서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삼위일체의 고백 속에서 신적작정을 따라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앞선 3장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부분에서도 동일하게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3항. 하나님의 결정(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선택)되고(딤전5:21; 마25:41),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롬9:22-23; 엡1:5-6; 잠16:4).
5항.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 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엡1:4,9,11; 롬8:30; 딤후1:9; 살전5:9),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엡1:6,12; 전3:14).
6항.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意思)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수단)들을 미리 정하셨다(벧전1:2; 엡1:4-5,2:10; 살후2:13).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살전5:9-10;딛2:14), 때를 따라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되며, 성화되며(롬8:30; 엡1:5; 살후2:13),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벧전1:5). 이처럼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요17:9; 롬8:28; 요6:64-65,10:26; 8:47; 요일2:19).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이후에 이성일인격에서 소개되는 그리스도의 신분이나 사역의 모든 내용이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개혁교회의 독특한 기독론의 특성으로 인해서 개혁신학의 중요한 교리적 특성인 “제한속죄”의 개념이 고백되어지기도 한 것이다.
이 ‘제한속죄’라는 개념은 도르트 신조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만인구원설(보편속죄/보편구원)’을 주장하면서 교회를 혼란케 하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반드시 ‘예정론’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신 백성들만을 위해서 오셨고, 바로 그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내용으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독론에 대한 이해가 위의 고백에서 “이처럼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도르트 신조를 이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그대로 고백되어진 것이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도르트 신조의 ‘제한속죄’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항.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보배로운 죽으심으로 인하여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이 생명을 얻어 구원받도록 하는 하나님의 가장 은혜로운 뜻과 목적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자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이 선물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뤄주시기 위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피흘리심으로 새 언약을 확증하셔서 모든 사람과 족속과 민족, 즉 영원 전부터 구원에 이르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구원토록 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구원의 능력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들을 속량해 주셨다. 따라서 믿기 전과 후에 지은 모든 죄악들을 그것이 원죄이든 실제적인 죄이든 간에 깨끗케 해주시며, 세상 끝날까지 점이나 흠 없이 신실하게 보존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그 영광을 즐거워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들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이루는 내용으로 고백되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는 말씀에서도 증거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역은 신적작정에 의해서 영원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구원토록 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었다”라는 고백처럼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사람들을 위한 제한 속죄이셨던 것이다. 이런 고백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얻을 영원한 기업을 값 주고 사시었다”(8장5항)라고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기초로 고백되어진 내용이다.
(요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위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 속에서 기독론의 고백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기독론에 대한 중요한 이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구조를 모두 파괴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록 이들도 기독론을 고백하고 삼위일체를 인정한다고 하지만 개혁교회에서 이해하는 방식은 아니였던 것이다. 즉 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 속에서 기독론의 사역과 신분을 살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 보편구원의 형태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 이런 구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 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구원의 내용을 강조하려는 편협적인 기독론 중심의 형태로 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결국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개혁교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 속에서 고백되어지는 기독론을 인본주의적인 기독론으로 변질시켜 버리게 된 것이었다. 알미니안주의의 기독론은 다음과 같이 주장되고 있다.
잘못된 주장 1항 :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세우신 것은 누구를 구원토록 하기 위한 분명한 계획 없이 되어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은 구원이 실제로 어떤 사람에게 적용된 적이 결코 없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공로의 필연성과 유익성과 그 가치는 그대로 존속할 수 있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주장 3항 :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인간을 위한 구원이나 믿음을 얻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에 의하여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효과를 줄뿐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성부를 위하여 인간에게 다시 권위와 완전한 의지의 관계를 세우셨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해 주심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지만 이 조건에 순종함으로써 이를 만족시키든지, 또는 거부함으로 파기하든 지에 대한 관계를 세우신 것에 불과하다.
잘못된 주장 6항 :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공로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유익을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주셨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죄사함과 영생을 얻은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예외 없이 누구에나 주어진 은혜일 뿐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 그들 속에 역사하는 어떤 특별한 자비를 입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잘 선용했기 때문이다.
위의 주장을 살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개혁교회의 기독론과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을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세우신 것은 누구를 구원토록 하기 위한 분명한 계획 없이 되어진 것이다”라고만 고백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이 모두 붕괴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들의 잘못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아주 강경하고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경멸하는 입장이요 성경과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저희를 알며”(요 10:15, 27).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구세주에 과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따라서 위의 주장은 온 기독교회가 믿는 바 신앙의 내용에 어긋나는 것이다(1항 답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여지없이 멸시하는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얻게 되는 가장 중요한 열매나 유익 됨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다시 한번 펠라기우스의 엄청난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다(3항 답변).
비록 이런 주장이 건전한 생각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괴적인 독소를 주고자 하는 펠라기우스의 오류에 기인한 것이다(6항 답변).
이처럼 도르트 신조에서 개혁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기독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구조를 파괴하는 거짓된 기독론임을 밝혔던 것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경멸하는 입장이요”라고 평가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지혜와 그리스도와 성령의 거룩한 의논과 뜻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이라는 것이다. 비록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이 건전한 생각에서 나온 것처럼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 멸시는 성격인 것임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가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모든 신앙적 내용을 단편적인 기독론 중심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깊은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개혁교회가 이처럼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 속에서 기독론을 이해하고 고백하려는 것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제 25문에서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라 하면서 왜 삼위(三位), 즉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합니까? 답 :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삼위(三位)가 곧 유일하고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만이 참되고 유일한 중보자에 대한 고백임을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2. 이성일인격(二性一人格)
1) 제네바 교리문답
칼빈은 제네바 교리문답 30문과 46문에서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신조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31문: 이 부분에서 말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과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내어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해 주셨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46문: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시는데 당신은 왜 그분을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까? 답: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려지는 것은 태어나면서(본성적으로)부터가 아닙니다. 다만 양자로 만드시고, 또 은혜에 의한 것이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여겨주시는 한에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불려지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본성적으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위의 고백은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성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해를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 속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에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세상의 구주가 되시도록 미리 작정되셨고 예정되셨다는 사실을 믿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취하시는 순간부터가 아니며 단순히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도 아니다. 그는 표현할 길 없는 방법으로 영원 전에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으셨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이사야는 “(사53:8)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라고 말했고, 미가는 “(미5:2)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들은 그의 신성에 관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동일본체이시다. 이 아들은 명목상으로나 양자됨에 의해서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체와 본성에 있어서 참 하나님이시다(빌2:11)(제2 스위스 신앙고백 11장. 예수 그리스도, 곧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시오, 이 세상의 유일한 구주에 관하여).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해는 개혁교회 안에서 기독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의 내용이 됨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에 대한 의미를 왜곡하는 자들에 대해서 개혁교회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반대하는 아리우스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불경건한 교리를 싫어한다. 특히 스페인 사람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의 신성모독,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됨을 거부하는 것을 반대한다. 사단은 이들을 통하여 이러한 이단 사설을 지옥으로부터 끌어내어 아주 뻔뻔스럽고 불경스럽게 이 세상에 확산시켰다”라는 엄중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즉 이것은 비슷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라는 말씀처럼 “다른 예수”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르게 주장하지 않는 모든 잘못된 가르침들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라는 말씀처럼 엄중한 경고를 외쳐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설명은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부분을 통해서 본 교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지고 있다.
48문: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그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 아버지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으셨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분은 우리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사역들을 성취하셨다는 것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49문: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두 구절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답: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그녀와 똑같은 몸으로 되어졌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렇게 된 것은 그분이 예언된 바와 같이 다윗의 자손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인간의 협력이 없이 오직 성령님의 기적적인 활동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50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을 취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스려 범한 불복종은 인간의 본성 안에서 원 상태로 회복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를 결합시키기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없으셨습니다.
위의 고백 중 50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성을 취하셨는지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의 범죄에 대한 구원의 성격과 연결과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인성을 위하셔야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칼빈이 강요에서 오시안더가 “예수님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역시 사람이 되셨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주장을 배격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신앙의 고백이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다음에 소개되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문)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음으로는 이성일인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신앙의 고백이 소개되어지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성일인격에 대한 칼빈의 놀라운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즉 353문 이후로 소개되는 “Extra Calvinisticum”에 대한 설명을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76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셨으므로 그분은 이제 더 이상 땅 위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답: 예,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명령받으신 것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지상에 머물러 계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78문: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인성) 하늘에 계심으로써 세상에서 떠나셨고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9문: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육신적인 형태를 통해서입니까? 답: 아닙니다. 하늘로 올리움을 받으신 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곳에 계신 신성으로 함께 하십니다.
위의 고백을 보면 승천의 고백 속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깊은 신앙적 이해가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칼빈은 칼케돈 신조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칼케돈 신조에서는 그리스도의 참된 사람에 대해서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고 또한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역시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인성의 내용을 파괴됨 없이 그대로 가지고 계신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 본 교리문답에 그대로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승천의 고백은 참된 몸이 승천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성일인격에 대한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한 고백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즉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라는 말씀을 이해하려고 할 때 칼빈은 68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68문: 그러나 친히 하나님이신 그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기나 한 것처럼 어떻게 그러한 심한 공포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까? 답: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성에 따라 이러한 극단적인 곤궁 속에 계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그분의 신성은 마치 잠시동안 숨어계신 듯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칼빈은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는 부분 속에는 이와 같은 놀라운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이렇게 되기 위해서 그분의 신성은 마치 잠시동안 숨어 계신 듯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신성의 성격과 인성의 성격이 예수님의 한 인격 속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이 된다. 이런 이해가 다음과 같은 벨직 신앙고백에서도 발견되어진다.
“그러나 이 두 본성들은 한 인격 속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합하여서, 심지어 그의 죽으심에 의해서도 두 본성이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맡긴 것은 그가 육신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참 인간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이 신의 본성은 심지어 그가 무덤에 있었을 때 조차라도 인간의 본성과 항상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늘 그의 마음 속에서 계셨던 것처럼, 비록 이런 사실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늘 그 속에서 함께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께서 순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순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다. 순전한 하나님이라 함은 죽음을 이기신 그의 능력에 의해서이며, 순전한 인간이라 함은 그의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이다”(제19장.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두 성품의 연합과 구별)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앞서서 ‘삼위일체 구조 안에서 기독론 고백’라는 항목에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후에도 신성의 자리를 어떻게 가지고 계신지에 대한 설명에서도 소개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에서부터, 자라남, 그리고 지상의 사역과 죽음심의 과정 가운데서 신성의 자리와 인성의 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 이해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즉 “Extra Calvinisticum”의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Extra Calvinisticum”의 이해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의 해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했는데 이 말씀과 관련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앞서서 소개되는 마태복음 26장의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26:11)라는 말씀과 비교해서 이해해야만 그 바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마태복음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로 정반대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조와 교리문답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를 살피게 될 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신조에서는 성경에서 제시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총체적인 내용을 정리해서 고백해 주고 있기 때문에 양쪽의 구절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이런 구조를 제네바 교리문답은 신성과 인성의 독특성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인성은 참된 사람의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천하신 후에는 결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은 고유한 신성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곳에 편재해 계실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신성은 인성 가운데도 계시고 또한 모든 곳에도 계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26:11절의 표현은 인성에 대한 표현이며, 마28:20절은 신성에 대한 표현 방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개혁교회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6:26)라는 말씀도 이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마26:26절은 마26:11절과 마28:20절에서 소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중요한 고백 속에서 함께 증거되어지고 있다. 이 구절을 루터주의에서는 신성과 인성의 ‘속성교류’의 형태로 제시하면서 ‘공재설’의 형태로 이해했던 것이다. 즉 인성이 신격화되어 신성과 같이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는 편재의 속성을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서는 마26:26절을 위에서 제시했던 구조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즉 인성은 항상 참된 인성의 특성을 잃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고 고유한 속성으로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인성의 편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성의 한계성과 신성의 고유한 신적 속성을 “유한이 무한을 받을 수 없다(finita non recipiunt infinita, 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해로 말미암아 성만찬에 있어서도 인성에 대한 이해와 신성에 대한 이해가 아주 중요한 핵심 내용으로 제시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인성은 인성의 고유한 성격 때문에 승천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신성은 그 고유한 속성 때문에 그 인성과 함께, 그리고 그 인성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Extra Calvinisticum”라는 의미가 정립되었던 것이다.
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본 요리문답에서는 제네바 교리문답의 구조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즉 사도신조에서 소개되는 기독론의 성격을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위의 제네바 교리문답 50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을 취하실 필요가 있습니까?”라는 의미를 살펴본 것처럼 본 요리문답에서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이 두 성(性)이 어떻게 한 인격 속에서 연합하여 있는지를 사도신조의 순서를 따라서 잘 소개해 주고 있다. 우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성격이 다음과 같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제12문 :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형벌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나 다른 이가 그의 정의를 완전히 만족시켜 드려야 합니다.
제15문 : 그렇다면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기대해야 합니까? 답 : 그는 참 사람이면서, 진실로 의로우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큰 능력을 소유하신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제16문 : 왜 그분은 참 사람이면서 진실로 의로우셔야 합니까? 답 :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사람이 자기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다른 사람들의 죄값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제17문 : 왜 그분은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 그래야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몸소 감당하여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8문 : 그러면 그 중보자 곧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고 진실로 의로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답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본 고백에서도 제네바 교리문답의 구조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셔야 하는 이유와 또한 참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고백해 주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라는 고백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기쁘신 뜻, 즉 신적작정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성육신은 인간의 죄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이성일인격에 대한 아주 중요한 고백이 소개되어지고 있다. 즉 위에서도 “Extra Calvinisticum”이라는 주제는 개혁신학에 있어서 개혁신학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totus)과 인성(totum)에 대한 개혁신학의 독특한 이해이다. 이 주제는 루터주의와 분리되게 되는 성만찬 논쟁의 핵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본 요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제 47문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인간적인 본성으로는 지금 이 땅 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그의 영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제 48문: 만일 신성이 있는 모든 곳에 인성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불가해하고 어디에나 현존하기 때문에, 그 취한 인성 외부에(extra) 있을지라도, 그 안에 있어서도 인격적으로 인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루터주의가 “공재설”을 주장하면서 인성이 인성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신격화되어 신성처럼 모든 곳에 편재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의미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 자체를 곡해하는 위험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배격한 개혁신학의 기독론과 관련해서 절정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루터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예수의 신성의 속성들을 공유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인간성이 편재, 전능, 전지와 같은 속성들을 가지셨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루터파의 기독론에 이해는 성만찬론에 있어서 예수께서 신체적으로 떡에 현존한다는 자신들의 공재설에 있어서 근본적인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신적 속성은 예수의 인간성으로 전달되는 빵과 포도주의 각 요소 “안에, 그와 함께, 그 아래”에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현존”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고대 신조인 칼케돈 신조에서 확립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제시를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지만 그의 신성은 계속해서 참되고 진정한 신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거나 혼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 안에서 연합한다고 제시했던 것이다.
또한 인성은 신성으로 변화하거나 신성과 혼합되지 않고 인성은 언제나 인성으로 남아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성은 언제나 신성으로 남아 있음을 함께 제시했다. 즉 창조자와 피조물의 그 근본적인 구별은 성육신에 의해서도 변경되지 않는 것이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인격적으로 연합된 것임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칼케돈의 기독론 이해가 본 교리문답에도 그 신앙적 기초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제네바 교리문답에서 이미 ‘승천’에 대한 교리를 소개하면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승천’의 신앙고백을 설명하면서 “신성은 불가해하고 어디에나 현존하기 때문에, 그 취한 인성 외부에(extra) 있을지라도, 그 안에 있어서도 인격적으로 인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라고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Extra Calvinisticum”에서 가장 중요한 이해인 신성은 그 인성 안에 있어서도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또한 그 인성 밖에서도(extra) 역시 존재하시고 계시다는 중요한 이성일인격에 대한 고백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구조에서 “Extra Calvinisticum”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즉 48문의 정신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간성의 한계 이상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인데 여기서 ‘인간성의 한계이상’(beyond the bounds of the humanity)이란 의미를 라틴어로 ‘엑스트라 후마눔’(Extra-humanum)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바로 ‘칼빈주의 신학의 밖에서’라는 표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런 이해가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고난을 받을 수 없고 그의 인성은 이 세상 도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 수난을 받았다거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직도 이 세상 도처에 계신다고(편재)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영화롭게 되신 후에는 참 몸이기를 그만 두셨다든가 신화한 나머지 몸과 영혼의 특징들을 상실하고 완전히 신성으로 변화했고, 단순히 하나의 본질이 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위의 고백도 “Extra Calvinisticum”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즉 신성은 항상 신성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역시 인성도 인성의 성격을 탄생시나, 부활 후에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이성일인격에서 있어서 신성의 고난을 말하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방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속성(본성)교류(communicatio idiomatum/ naturarum)’를 주장하면서 신성이 인성화로 그리고 인성이 신성화로 교류되어지는 본성의 교류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성의 편재를 주장하는 방식도 이성일인격과 관련해서 가장 깊이 주의해야 하는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Extra Calvinisticum”과 같은 이해가 단순한 신학적 논의가 아니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제18-19문에서 “18문: 그러면 그 중보자 곧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고 진실로 의로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답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9문: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답 : 성경이 내게 알려줍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성경이 이렇게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고백되어져야 하는 중요한 신앙의 고백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요리문답
지금까지 소개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이성일인격에 대한 내용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요리문답을 통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항: 삼위 일체(三位一體) 중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또한 동등하신 분이시며,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요1:1,14; 요일5:20; 빌2:6; 갈4:4). --- 그러므로 두 개의 온전하고, 완전하고, 구별된 본성인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전환이나 혼합이나 혼동됨이 없이, 한 인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 서로 결합되었다(눅1:35; 골2:9; 롬9:5; 벧전3:18; 딤전3:16). 그 인격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시되, 한 분 그리스도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36문. 은혜 언약의 중보자는 누구인가? 답:은혜 언약의 유일하신 중보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므로, 성부와 한 실체(본질)이시고 동등하시며, 시간 세계 안에서(이 땅에서)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었고 지금도 계속 그러하시다. 즉 그분의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구별되지만 영원한 한 인격이시다.
37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이 되셨는가? 답: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참 몸과 이성있는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즉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그 몸에서 탄생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38문. 중보자가 하나님이시어야 하는 것은 왜 그런가? 답: 중보자가 하나님이시어야 하는 것은 그의 인성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진노와 사망의 권세 아래 침몰하는 것으로부터 방지하고 지탱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고난과 순종과 중재하심에 가치와 효능을 주시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며,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고, 특별한 백성을 값주고 사며, 그들에게 그분의 영(성령)을 주시고, 그들의 모든 원수를 정복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39문. 중보자가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왜 그런가? 답: 중보자가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성품을 향상시키시며, 율법에 순종하심을 보이시며,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양자가 되고 위로를 받아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40문. 중보자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으로서 한 인격을 이루시는 것은 왜 그런가? 답: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는 중보자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 신.인(神人)은 한 인격 안에서라야 하였고, 신성과 인성의 각기 고유한 일들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받으신 바 되고, 온전하신 인격자의 일로써, 우리의 의지하는 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들을 보면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로부터 개혁교회의 신조 속에서 소개되었던 기독론의 내용이 총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질에서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에 대한 고백과 함께 탄생시나 사역기간이나, 부활과 승천 후에도 인성을 취하신 후로 그 인성은 없어지거나 변질된 것이 아니라 인성의 고유한 성격을 지금도 그대로 소유하고 계신 참된 사람에 대한 고백과 그리고 이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거나 분리되어 이성이인격(二性二人格)이나, 일성일인격(一性一人格)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라는 말씀에 증거되는 것처럼 신성과 인성이 신비롭게 결합된 이성일인격(二性一人格)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기독론의 내용을 소요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하기도 한다. “21.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의 구속자가 누구인가? 답: 하나님의 구속자는 다만 선택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신 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이 되셨으니 앞으로도 한 위(位)에 구별된 두 가지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이 교회 역사 속에서 잘못 이해되었을 때 교회를 얼마나 해롭게 했는지를 살펴봄으로 이 이성일인격에 대한 바른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성일인격”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고 또한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인지도 바르게 소개되지 않은 결과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과거 이단들이 곡해했던 잘못된 기독론의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성을 무시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강조해서 예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내고, 조각하고, 영상화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된 것이다. 어느 교회든지 주일학교의 공과를 보면 온통 예수님을 아저씨나 수염난 할아버지로 그려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도 교회를 치장하고 장식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그리거나 액자에 장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요즘은 스테인드글라스로 교회에 장식하는 것도 보게 된다. 그리고는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해야 만 신앙적 교육이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신앙교육의 가장 중요한 효과가 “시청각 교육”이라고 모두들 목소리를 높여서 강조하고 있다.
결국 이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정통적인 객관적 신앙고백의 기준에 입각하여 볼 때는 과거 이단들이 행했던 일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와 같은 비참함과 부패에 빠지게 된 것은 개혁교회의 객관적 신앙고백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기준만 최소한 알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이렇게 까지 성경의 참된 의미를 곡해하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럽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이런 교회의 혼탁과 부패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속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칼케돈 신조는 동방, 특히 발칸반도의 저속화 된 기독교를 정화하기 위하여 753년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결의한 ‘성상 반대 결의’에 기본 정신이 되었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아무튼 그들이(성상옹호론자들) 묘사해서는 안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묘사하려고 시도하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을 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변명하는 말을 했다. “우리는 우리가 보았고 또 전승된 그리스도의 육신만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네스토리안들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육신, 즉 신성과 분리되지 않으며 신성으로 완전하게 성육하여서 전적으로 거룩하게 된 육신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육신이 어떻게 이제 와서 신성과 인성으로 분리될 수 있겠는가?(즉 신성을 배제한 인성만을 그리스도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과연 그런 인성만 표현된 예수님이 참된 예수님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자이신 하나님과 둔한 육신 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도 또한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인간 육신이 동시에 말씀이신 하나님의 육신이듯이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이 말씀이신 하나님의 영혼이어서 그의 영혼과 그 몸이 다같이 동시에 거룩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가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았을 때도 그의 신격은 분열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의 영혼이 있는 곳에는 그의 신격이 있고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에도 그의 신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일 그가 고난을 받았을 때 신성이 그의 영혼과 몸에서 불리 될 수 없이 그대로 있었다면 어찌하여 어리석은 자들이 감히 그의 육신을 그의 신격에서 분리시키는 모험을 하여 그 육신을 마치 단순한 한 인간의 형상처럼 제시하려 드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을 그의 신격에서 분리시켜서 그것을 단순한 육신의 본질에, 또 그 육신 자체의 인격에 돌려서 그것을 형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삼위일체에다가 제 4의 위격을 도입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불경의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어간다. 더구나 그들은 신격에 의하여 성육되어서 신화된 그 육신을 마치 신화되지 않은 것처럼 제시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든 간에 묘사될 수 없는 신격을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혼동시키거나(단성론자들처럼) 혹은 그리스도의 몸이 신화되지 않고 분리되어 있는 듯이 네스토리안처럼 제시하는 사람이 된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합당하게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은 성만찬 예식에서 나오는 떡과 포도주뿐이다. 이 형상만이, 또 이 형식만이 그의 성육신을 제시하기 위하여 그가 선택하신 것이다.
이처럼 칼케돈 신조의 바른 신앙고백의 내용을 교회가 바르게 이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곧 부패하여 다음과 같은 잘못된 결의를 하게 된 것이다. 즉 753년 콘스탄티노플 노회의 성상 금지 결의는 큰 충격을 서방교회에 주었고 성상을 안치하고 그 앞에서 경건생활을 실천하던 신자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제7차 에큐메니칼 공회를 787년 니케아에서 소집하여 753년의 콘스탄티노플 노회의 결의를 무효화하고 성상을 숭배 또는 예배할 수는 없지만 존경하며 절하며 입맟출 수 있음을 결의하였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가 다같이 이 결의를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잠정적이었고 815년에 동서양교회는 성상문제로 다시 분쟁에 들어갔다. 결국 이성일인격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로 시작된 이 형상에 대한 문제는 서방 로마교회와 동방의 로마제국이 정치적으로 분열하게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787년의 “성상의 교리”에 대한 니케아 회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쉬운 길과 교부들의 신령한 권위와 공동교회의 전통들에 따라서 확실하고 또 정확하게 정의하는 바는, 생명을 주는 귀중한 십자가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그림으로나 모자이크로나 다른 어떤 적당한 재료로써 만들어진 존경할 만한 거룩한 성상(聖像)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안치되어야 하며 또 그 성상들은 교회의 성구(聖具)들과 예복들과 벽걸이에 또 집안이나 길가에 그림으로 즉 우리 주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흠이 없는 성모 하나님의 어머니와 또 존귀한 천사들과 모든 성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의 형상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까닭은 이러한 형상들이 예술적인 표현으로 자주 나타날수록 쳐다보는 사람들이 그 형상들의 원형들을 쉽게 기억하며 또 그들을 동경하게 되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그들이 성상들에 대하여 환영(aspasmon)과 존경(timytiyn)을 품되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따라 신성에게만 합당하게 드릴 예배(latreian)는 실제로 드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중한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형상과 복음서들과 또 다른 거룩한 물건들에게와 같이 이러한 성상들에게 분양하며 촛불을 켜는 것은 고대의 경건한 습관에 따라 허용될 수 있다. 이러한 성상들에게 바치는 존경은 그 형상들이 대표하는 대상에게 전달되는 것이고 성상들을 높이는 사람은 성상들이 묘사하는 대상들을 높이는 것이다.
결국 이 같은 내용은 후대에 로마 카톨릭의 중요한 신앙관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런 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에까지 그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오늘날 그림성경의 출판이나, 각종 형상물들, 크로스웨이 성경공부, 성경 드라마, 연극, 영화, 모자이크, 등등 각종의 모습들은 이와 같이 개혁교회의 이성일인격에 대한 기독론을 곡해한 것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위의 결정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흠이 없는 성모 하나님의 어머니와 또 존귀한 천사들과 모든 성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의 형상이 제시되어야 한다”라는 표현만 보아도 이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마리와 및 성경의 인물들, 천사들 등등 모든 내용을 형상화시키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다음과 같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靈)으로서 본질상 가시적(可示的)이 아니요, 광대불변하시기 때문에 예술이나 형상에 의하여 표현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형상들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과 더불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우상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형상들까지 배격한다(하나님의 형상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조각가나 화가의 모델이 되시기 위하여 그렇게 인간의 형상을 입으신 것은 아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온 것”(마 5:17)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들(신 4:15, 사 44:9)은 형상들을 금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육체적 임재가 교회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우리에게 가까이 계실 것(요 16:7)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육체의 모양들이 경건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리라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고후 5:5)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그런즉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6)(그리스도의 형상들)
하늘에 있는 축복 받은 영들과 성자(聖者)들은 지상에 사는 동안 자신들에 대해서 예배하거나 어떤 형상을 만들거나 하는 것을 배격했고 정죄 했다. 그런데 이 하늘에 있는 성자들과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상 앞에서 무릎을 끊거나, 모자나 수건을 벗고 경배하는 것을 어찌 기뻐하라.
사실 주님은 복음설교(막 16:15)를 명령하사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것과 이들의 구원에 관한 것을 생각나게 하며 종교를 교육하게 하셨다. 결코 주님께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들을 수단으로 하여 평신도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시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성례전을 제정하셨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형상들을 만들어 세운 일이 없으시다(성자들의 형상들).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 작가인 락탄티우스의 다음과 같은 판단을 인정한다. 즉, “형상이 있는 곳에는 결코 종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락탄티우스).
에피화니우스 감독이 교회의 문에서 그리스도 혹은 성자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베조각을 발견하자 그것을 뜯어냈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에 위배되기 때문에 옳은 행동이었다고 우리는 또한 주장한다. 이때 이래로 그는 참 종교에 어긋나는 그러한 화폭들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걸지 못하게 하였고, 그리스도의 교회와 믿는 신도들에게 전혀 무가치한 그 문제의 형상들을 치워 버리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참 종교에 관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동의한다. 즉,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예배를 우리의 종교로 삼지 말자. 예술작품보다 이것을 만든 예술가 자신들이 더 훌륭하지만, 우리는 예술작품도 예술가도 예배해서는 안 된다”(「참된 종교에 관하여」 제55장)(에피화니우스와 제롬).
위에서 증거되는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코 형상으로 소개될 수 없고,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이성일인격을 형상화 할 수 없으며, 또한 각종 성자(聖者)들조차도 형상화 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해 주고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형상 금지의 성격을 T. Vincent는 “왜냐하면 그의 신성(divine nature)은 도무지 주상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며 그의 인성 또한 현재 영광 중에 있어서 그렇게 나타나실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이유 때문임을 잘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즉 개혁교회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라는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의 특성을 성경대로 간직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에 대한 이해는 십계명 중에서 2계명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제 97문 : 그러면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아야 합니까? 답 :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어떠한 모양을 가진 분으로 그려질 수 없으며 그려져서도 안됩니다. 피조물은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으나, 그것들이 예배의 대상이 되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그러한 형상들을 만들거나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 98문 : 그렇다면 그 형상들을 교회에서 학습보조 교재로 사용하는 것도 안됩니까? 답 :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현명해지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못하는 우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의 전파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09 제 이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 이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며,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 인정하는 것들이며, 거짓 종교를 용납하는 것과 하나님의 삼위(三位)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형상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가지든지,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 만든 것(그림, 조각상, 영상화)이며, 이 형상이나 혹은 이 형상 안에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일이며, 거짓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그들을 예배하거나 또는 그것들에 속한 것을 섬기는 것이며, 우리 자신들이 발명하고 취하든지, 전통을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든지, 옛 제도, 풍속, 경건, 선한 의도, 혹은 다른 어떤 구실의 명목으로 예배에 추가하거나 삭감하여 하나님의 예배를 부패케 하는 미신적 고안, 성직 매매, 신성 모독,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 경멸, 방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2계명의 정신은 삼위일체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도 그 어떤 형상도 허락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이성일인격의 자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더욱 신비로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에 대한 이해는 아주 신비롭고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경의 뜻을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마치 그림으로나 조각이나 형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혁교회의 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파괴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참된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무서운 죄악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일인격에 대한 기독론의 고백에 있어서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의 입장을 우리의 고백으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고대의 에큐메니칼 교회공의회가 결정한 신조들을 받아들임)
많은 내용을 몇 마디 말로 표현해 보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에 관하여 성경이 정의하는 모든 것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에서 열린 가장 탁월한 처음 네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신조들과 결정들에 내포된 것은 무엇이든지 진지한 심정으로 믿고 입을 열어 자유롭게 고백한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이와 비슷한 신조들을 역시 귀히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정죄 한다.
(이단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기독교적 신앙, 정통 신앙, 그리고 보편적 신앙을 손상됨이 없이 온전히 보유하고 있다. 상기한 신조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믿음을 신실하게 해설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11장).
3. 성만찬의 내용 가운데서 기독론 고백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의 이해는 “Extra Calvinisticum”이라는 개혁신학의 독특성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이 이해가 실제적인 성만찬 논쟁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차이를 갖게 했는지를 살펴보면서 바른 기독론의 고백이 성도의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성만찬 논쟁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문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즉 로마 카톨릭과 루터주의도 성만찬에 있어서 핵심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서 연합하는 것에 있음은 동일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을 따라서 연합하는가? 에는 중요한 차이점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로 실제적으로 변화되어진다는 ‘화채설’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중대한 오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참된 사람이시기 때문에 결코 인성의 속성을 넘어서거나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동일한 인성의 속성을 간직하신다는 이해가 정통적인 개혁교회의 이해인데 로마 카톨릭은 이 인성이 모든 떡과 포도주로 변화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하므로 몸의 편재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 올리우신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편재하기 위하여 모든 곳으로 내려오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루터주의를 들 수 있다. 루터주의는 ‘화채설’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 원리에 있어서는 화채설의 방식으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신성과 인성은 본성에 있어서 교류하기 때문에 성만찬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처럼 몸이 모든 떡과 포도주에 편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장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옆에, 아래에 함께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역시 이 주장도 인성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항상 이성일인격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간직해 왔기 때문에 성만찬에 있어서도 이 방식을 따라서 이해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항상 참된 인성의 속성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곳에 편재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항상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방식은 결코 허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개혁교회에서는 성령께서 놀라운 은혜로 성도들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들어 올리셔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신비로운 연합을 갖게 하신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을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신앙고백 안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제네바 교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353문: 성찬에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상징만을 가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이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신고로 그분이 성찬에 관해 행하신 약속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즉 그분이 성찬에서 보이시는 표시가 실제적으로 입증되지 않을 것처럼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저는 그리스도께서 한 생명 안에서 우리를 당신과 연합시키기 위해 당신 자신이 약속하시고 제시하신 바에 따라 우리를 당신 자신의 실체(subustance)에 참여케 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믿습니다.
354문: 그렇지만 예수님의 실제적인 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의 몸은 땅위에서 순례자로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답: 그것은 성령의 이해하기 어려운 능력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은 장소와 간격을 통해 떨어져 있는 사물들을 서로 잘 결합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55문: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이 빵 속에 그리고 그 피가 잔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얻게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높여 하늘로 향해 가도록 해야 합니다. 즉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중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빵과 포도주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위의 고백에서도 증거되는 것처럼 개혁교회의 성만찬에 있어서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인데,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 자신의 실체(subustance)에 참여케 하신다”라는 고백처럼 이성일인격의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고백하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어떤 방식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 에 핵심적인 물음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몸은 참된 인성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곳에 편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항상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성령의 놀라운 인도하심으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실제적인 연합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 정리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적임재설’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정립되었던 것이다.
결국 신성은 인성의 밖에서도(extra) 그리고 그 안에서도 존재하는 것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성만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들려 올려져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실제적인 연합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신비적인 연합”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는 “이 성령은 우리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고, 육신적이고, 지상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시고 이제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과 피와 실제로 연합한다”라는 방식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개혁교회의 놀라운 성만찬의 고백은 결국 니케아와 칼케돈 신조를 통해서 정립된 이성일인격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을 정확하게 정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성만찬 이해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음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표현을 통해서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이해를 좀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제 76문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죄와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된 몸에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살이며 주님의 뼈인 것입니다.
79문 :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자기 몸이요, 잔을 자기 피, 혹은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고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만찬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직접 먹고 마심)‘동참하는 것’(교제)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살지게 하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몸과 흘리신 피가 진실로 우리 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살찌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상징물들을 실제로 받아먹듯이 우리도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는 상징과 보증에 의하여 주님의 실제 몸과 피에 실제로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몸소 고난을 겪어 죄값을 지불한 것처럼 주님의 고난과 순종을 우리의 공로로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위의 고백에서도 성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의 복된 몸과 실제적으로 연합하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성도들의 실제적인 참된 양식이 됨을 우리는 이 성만찬의 신비로운 연합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Extra Calvinisticum”의 의미를 정립해야만 알 수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제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소개해 주고 있다.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긴밀히 연결시킨 나머지 떡 자체가 성례전적 방법 이외의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 자체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물질적으로 떡 속에 숨겨져 있으므로 떡의 형태로 그것이 예배되어야 한다거나 이 성찬의 표징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 대상 혹은 내용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므로 우리의 마음은 빵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을 향하여 올리워져야 하고 주님은 결코 떡 속에 갇혀진 체 예배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성만찬을 베풀 때 주님께서는 그의 교회로부터 부재(不在)하는(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태양은 우리를 떠나 있으나 우리들 속에 효과적으로 임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임재하고 계신 것인다. 즉 그리스도는 그의 몸으로는 우리를 떠나 하늘에 계시지만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에 의하여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신다. 주님은 그의 최후의 만찬에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성만찬을 받는 것이 아니요, 동시에 교부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피흘림이 없는 신비적 성만찬을 받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개혁교회의 신조들은 니케아와 칼케돈 신조에서 정리된 이성일인격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기독론을 간직해 왔기 때문에 성만찬에 이렇게 놀랍고 신비로운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도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놀라운 풍성함을 맛보게 된다. 위의 고백에서는 이성일인격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이와 같은 신비로운 연합을 “피흘림이 없는 신비적 성만찬을 받는 것”라고 표현해 주고 있으며, 또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이 독실한 사람이 주님의 성찬을 올바로 받음으로써 주 예수의 몸을 참으로 먹고 그의 피를 참으로 마시며 이 일을 통하여 주님은 그들 안에 계시고 그들은 주님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확신한다. ”라는 표현으로 기독론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진리의 풍성함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바른 기독론이 이해되어지고 간직되어질 때 성도에게 주어지는 진리의 풍성함이 너무나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거 니케아와 칼케돈에서 정죄했던 잘못된 기독론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위와 같은 영광스러운 내용이 가리워져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결 론
지금 본 논문을 통해서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기독론에 대한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즉 개혁신학에서 기독론으로 정리되는 내용들은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기초로 정립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스콜라적인 방식이나 단지 학문적인 내용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고백으로 고백되어지고 간직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개혁신학의 기독론과 관련해서 신앙고백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은 우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론만을 단편적으로 강조하게 되면 삼위일체의 구조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신앙고백에서는 삼위일체의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정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해서도 예수님의 구원만을 강조함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이 구원을 어떻게 성취하는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고백되어지는 방식임을 깊이 주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성일인격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살펴보았다. 즉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성을 취하셔서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되신 중보자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살펴보았다.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은 탄생하실 때나, 사역하실 동안이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지금까지도 그대로 참된 인성을 간직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 인격 안에 고유한 인성의 속성과 또한 고유한 신성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바로 신앙고백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기독론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이성일인격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성만찬 교리의 핵심적인 교리적 이해가 되는 것임을 살펴봄으로서 이성일인격에 대한 참된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즉 “Extra Calvinisticum”이라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기독론 이해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한 거룩한 영(靈)이시기 때문에 모든 곳에 언제나 계실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취하신 몸 안에도 계시며, 또한 그 밖에서 항상 존재하신다는 중요한 고백인 것이다.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요리문답 21문의 고백을 따라서 처음에 언급했던 성경의 고백으로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즉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고백이 우리의 심령 안에 울려 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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