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개혁주의 신조(Confession)의 구원론

수호천사1 2012. 4. 2. 09:13

개혁주의 신조(Confession)의 구원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원의 서정)

 

신원균 목사

 

 

 


서론


본론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원의 서정이 갖는 독특성

1) 엄밀한 독특성.

2) 일반적인 독특성.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원의 서정 각 항목들.

1) 유효적 부르심(10장)

2) 칭의(11장)

3) 양자(12장)

4) 성화(13장)

5) 구원에 이르는 신앙(14장)

6) 생명에 이르는 회개(15장)

7) 선행(16장)

8) 성도의 견인(17장)

9) 은혜와 구원의 확신(18장)


결론
 

 


 

 

서 론


 

개혁주의의 신조에서 고백되어지는 구원론의 핵심적인 고백은 도르트 신조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할 따름이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하나님께만 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총에 의한 선택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임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구원론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런 정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딤전5:21; 마25:41),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3장3절),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 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엡1:4,9,11; 롬8:30; 딤후1:9; 살전5:9),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엡1:6,12; 전3:14)”라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고백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개혁주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예정론 안에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의 서정을 예정론 안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방식이 칼빈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이어지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구원론의 이해인 것이다.

즉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라는 말씀과 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등과 같은 말씀에서 끊임없이 증거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분의 주권과 권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셔서 구원을 선물로 주시며 영원한 신적작정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조들에서는 구원론을 ‘인간론 중심’으로 다루지 않고 철저하게 ‘신론을 중심’으로 다루며, 예정론 안에서 구원론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 론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원의 서정이 갖는 독특성


 

1) 엄밀한 독특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고백되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전 개혁교회의 핵심적인 구원론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에 여기서 고백되고 있는 엄밀한 독특성을 가장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복음주의의 영향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구원론적 의미가 더욱 많이 가려지고 축소되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엄밀한 개혁주의적 구원론의 의미가 퇴색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핵심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구원론의 엄밀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정립하므로 성경적인 구원론을 다시 회복해야 할 거룩한 부르심에 있다.

우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제시되고 있는 구원론의 엄밀한 독특성은 서론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일반적인 복음주의의 구원론적 특징인 ‘인간론’을 중심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신론’을 중심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은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이해할 때도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시는가 강조점이 있다”라는 벌콥의 지적처럼 인간의 사역보다 하나님의 사역이 더욱 강조되고 또한 명백히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적 특징인 것이다.

특히 구원론을 ‘신론 중심적’으로 다룬다고 하는 것은 구원론이 자유주의처럼 ‘기독론 중심적’이거나 신비주의처럼 ‘성령론 중심적’이지 않는 것임을 전제한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즉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서 고백하는 구원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역으로 이해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조석만 교수와 박형룡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은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이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에 있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평화의 의논(슥6:13), 즉 속죄계약이 선행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의 효과는 필연적으로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의하여 속죄의 대상(선택된 자)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 조성자로 높인다. 이 신학은 구속의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은혜로운 의지에 추적하여 돌아간다. 사람이 구원의 참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역사의 나가는 길에 유효적으로 실현하시는 선택의 영원한 작정에 의지한다. 영국 교회의 39개신조(17조), 돌트신조(1장6,7조),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3장6절)가 모두 이 진리를 선언한다.


 

이처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구원론의 엄밀한 특징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개혁교회의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풍성하신 지혜와 은혜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을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적 사역과 또한 그분의 신적작정이 구원론의 중요한 기초로서 고백되어질 때 우리는 두 번째로 개혁교회 신앙고백에서 드러나고 있는 엄밀한 구원론의 독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서론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개혁교회 신앙고백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론에 기초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구원의 서정이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진다는 것이다.

예정론이 구원의 서정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칼빈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이어지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증거되어지는 중요한 구원론 이해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의 서정을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만 구원론이 인본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 중심적인 구원론이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엄밀한 개혁주의 구원론에 대한 독특성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명확하게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엄밀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독특성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구원의 서정이 10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이것이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즉 10장에 ‘부르심’을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10장1절)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고백을 살펴보면 구원의 서정이 어디에 기초되어 있고 또한 무엇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위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신론에 기초해 있으며, 또한 구원의 서정이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는 방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르심’에 대한 고백은 철저하게 3장의 ‘신적작정’에 기초해서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3장에서 신적작정을 고백하면서 그 작정 안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가 함께 포함되어 고백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고백 위에서 부르심에 대한 부분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3장에서는 신적작정과 인간의 구원이 다음과 같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3장3절),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 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3장5절).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철저하게 구원론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구조는 복음주의에서 소개되는 구원론 구조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즉 복음주의는 신론과 구원론을 분리해 놓고 있으며, 그래서 구원론에 이르서는 더욱 인본주의적인 구원론으로 치우쳐 “만인구원론”과 같은 방식으로 고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구원론을 고백하게 될 때 구원론은 인간중심적으로 흐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며, 개혁신앙의 핵심인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 드릴 수 있는 신앙의 형태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3장 6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전 구원의 서정에 해당되는 각 세부 내용들을 이 기초 위에서 장엄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意思)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수단)들을 미리 정하셨다(벧전1:2; 엡1:4-5,2:10; 살후2:13).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살전5:9-10;딛2:14), 때를 따라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되며, 성화되며(롬8:30; 엡1:5; 살후2:13),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벧전1:5). 이처럼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


 

위의 고백에서 우리가 놀랍게 발견하는 것은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수단)들을 미리 정하셨다”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구원의 서정에 해당되는 각 항목의 모든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절대주권과 은총에 의해서 값없이 거저 선물로 주신 구원의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즉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룩한 질서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고 증거되어야 하는 것으로 정리해 주고 있다.

부르심, 믿음,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 등의 모든 내용이 이처럼 3장의 신적작정 안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의 각 항목들은 10장에서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 기초와 근원은 이미 3장에서 모두 정리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기초를 중심으로 해서 10장은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라고 고백하게 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원론 구조를 잘 이해하고 살펴야 개혁주의의 구원론적 독특성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징은 ‘부르심’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각 항목들의 고백에서도 계속 살펴볼 수 있다. 즉 11장 ‘칭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칭의는 바로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고백하므로 칭의의 기초는 바로 앞서 소개한 10장의 부르심의 성격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12장 ‘양자’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양자된다고 고백하므로 앞서 고백한 칭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칭의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르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양자에 대한 고백도 ‘부르심’의 고백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13장 ‘성화’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좀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성화는 철저하게 부르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4장 ‘신앙’에 대한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된다.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여기서는 부르심을 넘어서 3장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신적작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된다. 즉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들로 구원의 대상을 제한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이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5장 ‘회개’에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 --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라고 고백하므로 회개의 성격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총에서 오는 것으로 고백해 주고 있다. 16장 ‘선행’에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자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고백하므로 선행의 기초는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17장 ‘견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라고 고백되어지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견인의 기초를 부르심에 기초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본 고백에 견인에 대한 구원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세하게 고백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 안에서 선택하신 것과 그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것과 또한 성령께서 그 구원을 효과적으로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총체적인 사역이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 부분에서도 “이 확신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 등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즉 구원의 확신은 인간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기초해서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부르심’에서 시작해서 ‘구원의 확신’까지 전 구원의 서정이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적작정의 성취로 소개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으로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는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적작정에서 출발하여 예정론 안에서 구원의 서정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고백되어지는 엄밀한 구원론의 독특성인 것이다.

 

2) 일반적인 독특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요리문답에서 고백되고 있는 일반적인 독특성으로서 구원의 서정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제시되고 있는 순서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을 제시할 수 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벌콥(Louis Berkhof)의 선을 따라서 “부르심 → 중생 → 회심 → 신앙 → 칭의 → 양자 → 성화 → 성도의 견인→ 영화” 등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으나 본 신앙고백서에서는 “부르심(부르심, 중생 포함) → 칭의 → 양자 → 성화 → 신앙 → 회개 → 선행 → 견인 → 은혜와 구원의 확신” 등과 같은 순서로 고백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근본적인 차이로 볼 수 없다. 즉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신조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인간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신론을 기초로 하나님의 신적작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동일한 공통점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표현과 내용을 다루는 범위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 자체가 종교개혁 시대에서부터 정립되어 후대로 올수록 좀더 세분화되고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에 부딪히면서 지금과 같은 논리적인 순서를 정립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초기에 소개된 구원의 서정과 후기에 좀더 세밀하게 정립된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후크마가 ‘중생’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종교개혁 시대와 17세기의 신학자들이 소개하는 중생의 범위가 오늘날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넓고 좁은 형태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소개해 주는 부분에 잘 증거되고 있다. 또한 박형룡 목사는 이와 같은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사들의 다양 의미’, ‘영적 행위들의 대조적 구별’, ‘다양 동작의 선후 순서’ 등을 잘 고려해야만 한다고 지적해 주기도 한다.

이런 특징들을 고려해 볼 때 본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부르심’ 안에 ‘부르심’과 ‘중생’이 함께 포함되어 소개되어지고 있고, 또한 ‘신앙’과 ‘회개’가 성화 뒤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중생 뒤에 소개되지 않고 성화 뒤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직신학에서 ‘회개’ → ‘신앙’으로 소개되는 것이 여기서는 ‘신앙’ → ‘회개’ 순서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으로는 ‘선행’이란 부분이 따로 설정되어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조직신학에서 ‘성화’에 대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소개될 수 있는 부분인데 신조에서는 따로 이 부분을 구분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이것은 다음에 소개되겠지만 성도의 삶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좀더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한 17세기 목회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은 ‘은혜와 구원의 확신’라는 부분이 ‘견인’ 뒤에 추가되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것은 ‘견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포함되어 소개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본 신조에서는 이것을 따로 구분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17세기 목회자들의 깊은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즉 마지막 내용을 통해서 구원론에 대한 총체적인 성격과 의미를 다시 정립해 줌으로 개혁신앙의 구원론의 특징이 무엇인지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내 주려고 한 것을 보게된다. 본 신앙고백서의 위와 같은 특징을 고려하면서 이제 각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원의 서정 각 항목들.

 

 

1) 유효적 부르심(10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부르심’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르심에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부르심’과 ‘중생’이 함께 포함되어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중생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부르심’ 부분에 포함되어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부르심’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은 1절의 다음과 같은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롬8:30; 11:7; 엡1:10,11),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살2:13; 고후3:3,6),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에로 인도하신다.


 

본 고백에서는 부르심의 주체가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부르심의 주체이며, 각 위격의 사역이 부르심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고백해 주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은 앞서 소개했던 것처럼 인간중심적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해서 예정론 안에서 부르심을 이해하고 고백하는 방식임을 알 수 잇다. 즉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라는 고백에 명백하게 증거되고 있듯이 부르심의 기초는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 근거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와 같이 신적작정과 예정론에 기초한 부르심의 성격은 3절에서 더욱 놀랍게 고백되고 있다. 즉 3절에서는 유아구원과 외적 부르심의 방편을 사용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한 ‘부르심’의 성격을 소개하면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에 입각한 ‘부르심’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다.


 

영아기에 죽은 택함을 받은 영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받는다. 성령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을 따라 역사 하신다(요3:8; 눅18:15,16; 행2:38,39; 요3:3,5; 요일5:12; 롬8:9). 또한 말씀의 전도에 의하여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능력이 없는 다른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요일5:12; 행4:12).


 

위의 고백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구원이 철저하게 신적작정과 예정론의 기초에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알 수 있다. 본 고백에서는 부르심의 외적 방편인 ‘말씀’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상자들까지 언급해 줌으로 그 택자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택함을 받은 영아들은 다른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선택의 성격은 외적 방편까지도 초월하여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이루는 구원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은 4절에서도 분명하게 소개되고 있다. 4절에서는 ‘부르심’의 대상을 고백하면서 예정론 안에서 ‘선택과 유기’로 대상을 나누어 부르심을 소개하고 있다.


 

택함을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말씀의 전도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으며(마22:14), 성령의 어떤 일반적인 역사들을 체험할지라도(마7:22; 13:20,21; 히6:4,5),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게로 참되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요6:64-66; 8:24).


 

위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부르심’의 대상은 철저하게 ‘선택된 자’에게 제한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유기’자는 외적인 부르심의 내용을 일반적으로 받는다 해도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다. 오직 택자만이 이 부르심의 대상자인 것으로 부르심의 성격을 정립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 ‘부르심의 방편’을 살펴볼 수 있다. 보통 외적인 부르심 방편과 내적인 부르심의 방편으로 구분되는 “말씀과 성령”에 대한 고백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은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르심의 방편으로 “말씀과 성령”에 대한 고백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유일한 부르심의 방편으로 늘 존중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잘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이것은 합리주의나 신비주의 형태의 방편들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1절에서 소개되어지고 있는 또다른 특징은 부르심 안에서 ‘중생’에 대한 부분뿐만 전 구원의 서정이 함께 포함되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고백되고 있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행26:18; 고전2:10,12; 엡1:17,18),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겔36:26),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겔11:19; 빌2:13; 신30:6; 겔36:27),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엡1:9; 요6:44,45)


 

위의 고백을 보면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중생의 사역이 소개되고, 또한 의지가 새롭게 되어 회개와 믿음을 갖게 하시며, 선한 것을 결심하므로 성화되어져 갈 수 있는 구원의 서정이 모두 소개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증거되는 ‘부르심’의 부분은 좀더 폭넓게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절에서 좀더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전체 구원의 서정이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라는 고백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으로 고백해 주고 있지만 이 부분 안에 ‘인간의 의지’에 대한 부분을 함께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신다(즉 강제적인 마음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오게 하신다)(아1:4; 시110:3; 요6:37; 롬6:16-18).


 

이 고백은 아주 놀라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고백되는 구원의 서정은 철저하게 신론 중심적이며,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언급할 때다 많은 비(非)개혁신학자들은 ‘인간의 의지’ 부분을 언급하면서 신론 중심적인 구원론의 의미를 파괴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신론 중심적인 구원론은 인간의 구원론적 책임을 약화시켜서 회개와 신앙의 자리를 회피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해야만 인간의 구원론적 책임이 부각되어 회개와 신앙의 자리를 강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간의 구원론적 책임을 강조하고 회개와 신앙의 자리를 확립시켜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거하므로 구원의 근본적인 자리를 붕괴시켜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의 연약한 의지로 자신의 구원에 대한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구원론적 책임도 약화되고 또한 회개와 신앙의 자리도 늘 불안한 방식으로 정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 고백에서는 철저하게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구원의 서정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확실하게 구원론의 기초를 정립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적작정과 예정론에 입각한 구원의 서정은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작정과 예정론의 기초에서만이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가장 높이 존중되고 확립될 수 있는 것임을 고백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신다’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서정을 통해서 인간의 의지가 가장 자유롭게 존중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을 성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며, 또한 신비로운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마치 동등한 수준으로 구원의 서정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주권 밖에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 안에서 다스려지고 보호받는 은혜의 성격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구조는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3장, 5장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다만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들 안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2장2절)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시는 이도 아니시다. 도리어 제 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을 제거시키지 않고, 오히려 확립하시는 분이시다(행2:23; 마17:12; 행4:27-28; 요19:11; 잠16:33)(3장1절)

제 1 원인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모든 일들이 변함이나 틀림이 없이 일어난다(행2:23). 그렇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 2 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작정해 두셨다(창8:22; 렘31:35; 출21:13; 신19:5; 왕상22:28,34; 사10:6,7)(5장2절)


 

위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실 때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확립해 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인간의 의지가 확립되어지는 방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은혜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이해 속에서 전 구원의 서정이 고백되어야 인간의 구원론적 책임이 정확하게 정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뒷 부분에서 좀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중생과 관련된 부분은 2절에서 좀더 분명하게 다음과 고백해 주고 있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이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딤후1:9; 딛3:4,5; 엡2:4,5,8,9; 롬9:11). 그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고전2:14; 롬8:7; 엡2:5),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되며, 또한 이 부르심 가운데서 제공되며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요6:37; 겔36:27; 요5:25).


 

위의 고백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중생이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관여 할 수 없는 부분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풀어주시는 전적인 은혜 선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소개된 3절의 ‘영아기에 죽은 택함을 받은 영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받는다’라는 표현에도 중생의 의미를 함께 포함하여 소개하고 있다. 즉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과 그리스도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이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부르심과 중생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도전은 부르심과 중생의 기초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간의 의지에 있는 것처럼 제시하는 ‘예지예정론주의’임을 알 수 있다. 즉 도르트 신조에서도 가장 심각하게 배격했던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에 개념이 본 고백에서도 철저하게 배격되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칭의(11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두 번째로 소개되는 구원의 서정은 ‘칭의’에 대한 고백이다. 칭의에 대한 고백도 역시 앞서 소개되었던 ‘부르심’에 고백처럼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칭의를 이루시는 주체로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 고백도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로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는 방식으로 칭의를 다루고 있다. 이런 구조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롬8:30; 3:24). --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11장1절).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순종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이같이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빚을 완전하게 갚아 주셨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대해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속상을 드렸다(롬5:8-10,19; 딤전2:5,6; 히10:10,14; 단9:24,26; 사53:4-6,10-12). 그렇지만,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으셨고(롬8:32), 그들 대신으로 그의 순종과 속상이 받아들여졌으며(고후5:21; 마3:7; 엡5:2), --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롬3:26; 엡2:7)(11장3절).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갈3:8; 벧전1:2,19,20; 롬8:30).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갈4:4; 딤전2:6; 롬4:25). 그렇지만,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골1:21,22; 갈2:16; 딛3:4-7)(11장4절).


 

우선 3절에서 칭의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대해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속상을 드렸다. --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으셨고’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칭의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전 속죄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성취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라는 고백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의 사역들이 칭의 사역과 어떻게 연결되어져 있는지를 분명하게 고백해 주고 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는 칭의 사역을 위해서 작정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칭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그리고 성령께서는 칭의를 실제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으로 고백되고 있다.

다음으로 칭의의 사역이 신적작정을 기초로 해서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고 있는 구조를 언급해 볼 수 있다. 위의 고백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칭의의 사역은 신적작정과 선택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칭의의 사역은 구원의 서정에서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소개된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칭의는 부르심뿐만 아니라 다른 항목들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이 고백되고 있다.


 

이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함에 있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요1:12; 빌3:28; 5:1). 그렇지만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안에서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다른 구원의 은사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약2:17,22,26; 갈5:6)(11장2절).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의 죄들을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마6:12; 요일1:7,9; 2:1,2). 그리고 그들은 칭의(稱義)의 상태에서 결코 전락될 수는 없지만(눅22:32; 요10:28; 히10:14), 그들의 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노(怒)를 살 수 있게 되며, 그들이 자신들을 낮추어, 그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들이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하기 전에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게 된다(시89:31-33; 51:7-12; 32:5; 마26:75; 고전11:30,32; 눅1:20)(11장5절).


 

위의 고백을 보면 칭의와 믿음이 어떤 관계로 이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와 믿음과 회개가 서로 깊은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칭의의 기초에 의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구원의 서정 각 단계들이 서로 단독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서로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고백되는 구원의 서정의 또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구조는 구원의 서정이 인간중심적으로 이해되어지지 않도록 하며 오직 하나님 중심적으로 그 내용들을 고백하고자 한 당시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칭의 부분에서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칭의의 구조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오류를 함께 소개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론중심적인 칭의의 구조에 가장 심각한 도전은 인간중심적인 칭의의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중심적인 칭의관은 도르트 신조에서 배격되었던 알미니안적 구원론과 동일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본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미니안적인 구원론이 배격되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칭의(稱義)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량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롬4:5-8; 고후5:19,21; 롬3:22,24,25,27,28; 딛3:5,7; 엡1:7; 렘23:6; 고전1:30,31; 롬5:17-19),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행10:44; 갈2:16; 빌3:9; 행13:38,39; 엡2:7,8)(1절).

또한 이 모든 것이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값없이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롬3:24; 엡1:7).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롬3:26; 엡2:7)(3절).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선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라는 고백을 통해서 로마 카톨릭의 칭의관이 배격되고 있다. 즉 로마 카톨릭은 신적인 본질이 마치 인간에 주입됨으로 인간이 의로워진 것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먼저 정리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알미니안주의적인 인간중심적 칭의관이 철저하게 배격되어지고 있다.

이 표현은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도 매우 중요한 고백의 내용이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제시하고 있는 칭의관이 위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으로 칭의관을 거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믿음 행위나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 또한 신비적인 종교현상을 통해서 자신 안에 무슨 변화나 경험을 인식하므로 칭의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 고백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오늘날도 잘못된 칭의관을 분별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바른 칭의관은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량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라는 고백처럼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이루어 주신 속죄의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돌려(전가) 주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그 은혜를 우리게 전가 시켜주시는 하나님 중심적인 칭의관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의해서 선물로 칭의가 주어지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라는 고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칭의가 단순히 신약에서만 제시되는 내용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동일한 성격으로 제시되는 것임을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칭의(稱義)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칭의(稱義)와 모든 면에서 똑같았다(갈3:9,13,14; 롬4:22-24; 히13:8)’라고 고백하고 있는 6절 부분이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와 관련해서 오늘날 많은 오류가 발생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구약은 행위로 구원받고,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오해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도 오는 것이지만 역시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성경의 통일성을 깨뜨리면 전체 성경의 구조가 무너지게 되고 결국 신론중심적인 칭의관 자체도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 고백에서는 철저하게 신구약의 칭의관이 신론중심적인 칭의관으로 동일한 성격임을 명백하게 정립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이미 앞서서 소개하고 있는 7장 ‘언약’과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에 기초하고 있는 고백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7장에서는 신적작정에 의해서 주어진 은혜언약의 본질이 구약과 신약의 모든 택하신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원의 은혜임을 고백해 주고 있고, 또한 8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비록 신약에 오셔서 구원의 실제적인 내용을 성취하셨지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도 구원의 주체로 존재하셨고, 또한 그 구원의 사역적 내용은 비록 신약에서 성취되었어도 구약의 모든 택한 백성들에게도 역시 그 효력과 은혜가 성취되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므로 신구약의 구원적 성질의 통일성을 확립해 주고 있다.


 

그 당시에는 약속된 메시야(고전10:1-4; 히11:13; 요8:56)를 믿는 신앙으로 선택자들을 교훈하며 세우는 데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것들만으로도 충분하였고 효과적이었다. 그 메시야로 말미암아 그들은 완전한 죄 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는데 이를 “구약”이라고 부른다(갈3:7-9,14)(7장5절).

그러므로 본질 면에서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7장6절).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사역의 공덕과 효능과 혜택은 창세로부터 모든 세대에 살던 택함 받은 백성들이 계속적으로 받아 누려 왔다. 그가 성육신하기 전에는, 그것들을 누리는 방편들은 그를 계시하며 상징하는 약속들과 예표들과 희생 제물들이었으며, 이 방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곧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계시되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8장6절).


 

3) 양자(12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원의 서정 부분에서 가장 간략하게 고백되어지고 있는 부분은 바로 ‘양자’ 부분이다. 그러나 다른 개혁교회 신앙고백들에서는 ‘양자’에 대한 고백이 본 고백만큼 풍성하게 소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고백되고 있는 ‘양자’에 대한 이해는 간략하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을 소개해 주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엡1:5; 갈4:4,5).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수효에 들게 되고, 자녀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리게 된다(롬8:17; 요1:12). 또한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게 되며,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으며(롬8:15),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며(엡3:12; 롬5:2),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가 있으며(갈4:6), 불쌍히 여김을 받으며(시103:13), 보호를 받으며(잠14:26), 필요한 것을 공급받으며(마6:30,32 벧전5:7), 육신의 아버지에게 징계를 받는 것처럼 징계를 받으나(히12:6), 그렇지만 결코 버림을 받지 않으며(애3:31), 구속의 날까지 인(印)치심을 받으며(엡4:30),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들이다(히6:12; 벧전1:3,4; 히1:14).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선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라는 부분이 매우 중요한 고백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고백은 앞서 보았던 내용처럼 ‘양자’됨의 기초는 철저하게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양자’의 기초를 ‘칭의’로 소급해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칭의’는 역시 ‘부르심’으로 거슬러 가고 있으며 ‘부르심’의 기초는 ‘신적작정’과 ‘예정’에 기초한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해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라는 말씀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다음으로 ‘양자’를 이루시는 사역의 주체는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으며’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이 ‘양자’를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고백해 주고 있다. 또한 이런 이해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4-6)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양자’의 구조는 대요리문답에서 좀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74. 양자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답: 양자로 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자의로 베푸시는 은혜의 행위인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며, 당신의 이름을 그들에게 붙여 주시고, 아들의 영을 그들에게 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버지와 같이 돌보시고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모든 자유와 특권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모든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누는 상속자로 삼으시는 것을 말한다.


 

대요리문답에서도 ‘칭의’를 이루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고, 또한 이것은 ‘칭의’에 기초한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공로와 노력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의로 베푸시는 은혜의 행위인데’라는 고백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베풀어주시는 절대적인 은총의 선물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런 이해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3:1)라는 말씀에서 기초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양자’의 열매들을 살펴볼 수 있다. 즉 본 고백에서는 ‘양자’의 은혜를 통해서 제시되는 열매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고백해 주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자녀로서의 자유와 특권’,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 ‘양자의 영을 받음’, ‘은혜의 보좌로 나갈 수 있음’, ‘아버지라 부름’, ‘불쌍히 여김’, ‘보호’, ‘공급을 받음’, ‘ 징계를 받음’, ‘인(印)치심을 받음’, ‘상속자가 됨’ 등등과 같은 풍성한 열매들이 바로 ‘양자’됨을 통해서 얻게 되는 열매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의 기초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라는 말씀에 기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 성화(13장)


성화와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은 성화의 주체에 대한 부분이다. 많은 복음주의 신앙고백들은 성화는 인간이 실제적인 참여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주체가 되는 것으로, 또는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해서 이루어 가는 ‘신인협력설’ 등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에서는 철저하게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해 주고 있다. 비록 인간이 성화의 대상으로 실제적인 참여자이고 실행자일지라도 그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성화의 사역을 이루시는 분임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런 엄밀한 하나님 주권적인 ‘성화’의 의미가 본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고전6:1; 행20:32; 빌3:10; 롬6:5,6),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요17:17; 엡5:26; 살후2:13)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즉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롬6:6,14), 그리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갈5:24; 롬8:13),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골1:11; 엡3:16-19),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고후7:1; 히12:14).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앞서 소개했던 구원의 서정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역시 성화의 사역을 앞으로 거슬러서 ‘부르심’에 기초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화’를 ‘칭의’에서부터 설명하므로 ‘신인협력설’ 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더욱 철저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칭의’보다는 ‘부르심’에 기초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부르심’에서 기초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이 ‘성화’를 다룸으로 성화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대요리문답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거룩하게 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 ‘성화’는 예정론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도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화’의 주체이시며, 또한 각 위격의 사역이 ‘성화’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자세히 고백되어지고 있다. 즉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대요리문답),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신의 사역으로 고백되고 있다. 또한 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서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며(롬6:14; 요일5:4; 엡4:15,16)라고 고백하므로 모든 성화의 과정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주어지는 실제적인 도우심과 힘이 없이는 인간의 공로와 의지와 노력으로는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통해서 이루시는 ‘성화’는 인간의 공로에 이루어지거나 ‘신인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성화’ 부분에서도 아주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복음주의 신앙고백들이 ‘성화’ 부분에서 인간의 공로와 노력과 상급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화’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며, 또한 은총의 선물인 부분을 약화시키려고 하지만 본 신앙고백에서는 이 부분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은총의 선물로서 ‘성화’에 대한 고백은 3절에서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벧후3:18; 고후3:18),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고후7:1)’라고 고백되고 있으며, 대요리문답에서는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끓어오르고 증가되며 강력해져서(75)’라고 고백되고 있으며, 소요리문답에서는 ‘거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이신 데(35)’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런 정신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성화의 수단’에 대한 부분이다. 본 고백에서는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화의 수단이 “말씀과 성령”으로 고백되고 있다. 성령께서는 믿음을 일으키시는 내적인 수단으로 이미 앞서 소개받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씀”에 대한 부분을 좀더 자세하게 언급해 보고자 한다.

말씀이 성화의 외적수단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다. 즉 인간의 판단이나 결정, 좋은 의도나 공로가 성화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성화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16장에서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들만을 가리킨다’(1절)라는 고백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것은 그 어떤 것도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 설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삶의 규범이 되는 원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기초해서 고백해 주고 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특히 이와 같은 성화의 수단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 하는 것으로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라는 말씀을 통해 성화의 수단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이해인 것이다.

또한 본 고백에서는 성화의 ‘범위’와 성화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먼저 성화의 범위는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이 성화는 전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3절)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의 전인격적인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의 자라남이 종교적인 모습에서만 열정적이고 그이 삶에서는 전혀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이원론적인 신앙을 비판 할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이다. 즉 성화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삶의 전 인격에서 세워져 감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성화의 실제적인 내용으로는 두 가지가 소개되고 있다. 즉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라는 고백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죄에 대해서 슬퍼하며, 의로운 삶을 향해 가는 것으로 증거되고 있다. 이것은 소요리문답에서 좀더 명확하게 요약되어 “거룩하게 하신 것은 -- 점점 죄에 대하여서는 능히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능히 살게 되는 것이다(35)”라는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성화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성화는 단지 외부적으로 나오는 몇몇의 구별된 행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반응과 그리고 의로운 삶에 대한 태도를 총체적으로 해서 평가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규범으로 삼으로 그 말씀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슬퍼하며, 또한 그 말씀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하는 성화의 내용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4)라는 말씀을 근거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성화의 ‘상태’에 대한 고백이다. 즉 본 신앙고백에서는 성화의 ‘불완전성’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복음주의 신앙고백에서 ‘완전성화’를 고백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고백된다.


 

이 성화는 전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요일1:10; 롬7:18,23; 빌3:12) 그로 인하여 계속적이고 화해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갈5:17; 벧전2:11)(2절).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다’, ‘그 전쟁에서, 그 남아 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롬7:23)(3절),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이 땅에서 순간적으로 완전히 성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죄 때문에 여전히 부패의 내용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성화라는 것은 일평생 동안 끊임없이 전인격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대요리문답에서는 “이 생에서 아무도 완전한 성화에 달할 수는 없고 다만 완전을 향하여 성장해 갈 뿐이다(77)”, “신자들은 그들의 모든 부분에 숨어 있는 죄의 잔재 때문에, 그리고 영을 끊임없이 거스리는 육의 정욕 때문에 성화를 완전히 달성할 수 없다(78)”라는 표현으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런 성화의 성격 때문에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 싸워가며, 또한 의로움 향해 항상 전진해 가야 하는 삶의 과정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성도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본 고백에서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라는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표현과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성화의 실제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거룩한 삶이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부정’의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어떤 성격인지도 자연스럽게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확립되는 거룩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다.

 

5) 구원에 이르는 신앙(14장)


‘신앙’은 ‘믿음’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 ‘신앙’에 대한 부분도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신앙’을 이루시고 또한 이것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본 고백에서는 철저하게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이 모든 고백은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우선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이 우선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히10:39), 그 믿음의 은사는 그들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며(고후4:13; 엡1:17-19; 2:8), 통상적으로 말씀의 증거에 의하여 역사한다(롬10:14,17). 또한 말씀과 성례집행과 기도에 의하여(은혜의 수단) 믿음의 은혜는 증가되고 강화된다(벧전2:2; 행20:32; 롬4:11; 눅17:5; 롬1:16,17).


 

우선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앙’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로 하며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 믿음의 은사는 그들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며’. 그리고 더욱 명확한 고백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라는 말씀을 근거로 고백하고 있는 3절의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라는 표현 속에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소요리문답에서는 “30.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셨는가? 답: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고”라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첫 시작에서 믿음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고백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1절의 고백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은 이 ‘신앙’은 인간 자신의 공로와 노력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로서 ‘신앙’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왜 중요한가 하면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는 끊임없이 ‘믿음’이란 그 자체의 원인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단지 구원의 내용을 얻게 하는 ‘유일한 도구’임을 고백해 왔는데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원인 그 자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항상 ‘믿음’과 관련해서 논쟁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구원에 이르는 ‘도구’라고 고백하는 것과 ‘원인’이라고 고백하는 것과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철저한 성경적인 믿음에 대한 개념을 비(非)성경적인 개념을 변질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선 신앙고백에서는 이 부분이 ‘믿음의 은사로, - 그 믿음의 은사는, - 믿음의 은혜는’라는 표현을 통해서 고백되고 있다. 즉 믿음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의 성격으로 고백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명확하게 이 부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대요리문답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73. 믿음이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의롭게 하는가?

답: 믿음이 죄인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의롭게 하는 것은 칭의와 함께 주시는 다른 은혜나 칭의의 열매로 맺어지는 선한 일 때문에 믿음이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며, 믿음의 은혜나 믿음에서 난 어떤 행위가 의롭다 함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믿음은 다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적용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롭게 할 뿐이다.


 

위의 고백은 ‘믿음’이 ‘도구’인가, 아니면 ‘원인’인가에 대한 논쟁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본 고백에서는 믿음 자체나 그 행위나 노력 등이 원인이 되어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칭의와 함께 주시는 다른 은혜나 칭의의 열매로 맺어지는 선한 일 때문에 믿음이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며’라는 표현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구원의 서정의 다른 부분들조차도 ‘믿음’을 얻게하는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원인’ 그 자체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믿음’은 ‘오직 믿음은 다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적용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롭게 할 뿐이다’라는 표현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듯이 오직 ‘도구적인 성격’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믿음’에 대한 고백은 앞서서 이 주제를 가장 첨예하게 논쟁하므로 성경적인 ‘믿음’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낸 도르트 신조의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잠시 도르트 신조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므로 두 내용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우선 ‘믿음’을 구원의 ‘원인’ 그 자체로 주장했던 알미니안의 비(非)성경적인 주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불완전하고 비결정적인 상태로 택함을 받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예지된 믿음과 회심, 거룩함, 경건한 등의 생활 등을 이미 시작했거나 얼마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믿음과 회심 그리고 거룩함과 경건함에 끝가지 이르도록 하는 견인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은혜롭고 복음적인 가치가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택함 받은 자가 택함받지 못한 자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과 이 믿음에의 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경건함 또한 성도의 견인 등은 영광에 이르게 하는 불변하는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선행(先行)으로서 요구되는 조건(원인)이다. 그런데 이 조건은 완전히 선택될 사람들에게 보여질 일이며, 이러한 조건(원인) 없다면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택은 일어날 수 없다(1항의 잘못된 주장 5절).

인간이 참 회심을 하는 데에는 그 어떤 자질이나 능력과 은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의 의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회개하여 신자라고 불리게 된 이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인 자질이나 은사가 아니라 다만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이 믿음에 따라 얻게 되는 능력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 믿음이란 어떤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3.4항의 잘못된 주장 6절).


 

위의 주장을 살펴보면 우선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믿음과 회심 그리고 거룩함과 경건함에 끝가지 이르도록 하는 견인으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원인’으로 소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믿음과 이 믿음에의 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경건함 또한 성도의 견인 등은 영광에 이르게 하는 불변하는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선행(先行)으로서 요구되는 조건(원인)이다’, ‘이러한 조건(원인) 없다면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택은 일어날 수 없다’라는 표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즉 믿음은 선택의 열매적 성격인 도구가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조건(원인) 그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게된다.

결국 신적작정과 예정론에 대한 의미는 모두 배제되고 오직 믿음 그 자체가 조건과 원인이 되어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공로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믿음’이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것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이 믿음이란 어떤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비(非)성경적인 주장에 대해서 도르트 신조는 “이 주장은 성경의 말씀과 모순되는데, -- 교회의 지금까지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경적인 ‘믿음’의 성격을 정립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 선택의 선행 조건이나 원인 등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선택을 받아서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에 순종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등의 순서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선행의 기초(원인)를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선택받음으로 인하여 믿음과 거룩함과 그 밖의 구원의 은사를 얻게 되어 결국은 그 열매로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하셨다는 사도의 말과 같다(1항9절).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자기의 뜻을 따라 받거나 거부할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제시한 정도의 것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된다. 오히려 이 믿음은 인간에게 내려진 것이요, 인간으로 하여금 받아들이며 영접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믿게 할 능력이나 힘을 제시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의지를 정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뜻이나 행위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서 모든 사역을 이루시듯이 믿을 의지도 주시고 믿게 되는 행위 역시 주신다는 것이다(3,4항 14절).


 

위의 고백에서는 우선 ‘선택의 선행 조건이나 원인 등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믿음은 구원을 얻게되는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믿음 그 자체나, 믿는 행위나 노력과 공로 등 믿음이 원인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오직 유일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따라서 선택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선행의 기초(원인)를 이루게 되는 것’라는 고백에서 증거하듯이 하나님의 기뻐하심 가운데 정하신 신적작정만이 구원의 유일한 원인이며 ‘믿음’은 단지 이 신적작정을 이루는 방편(도구/열매)인 것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고백은 ‘그것은 뜻이나 행위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서 모든 사역을 이루시듯이 믿을 의지도 주시고 믿게 되는 행위 역시 주신다는 것’라는 표현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란 도구를 통해서 믿을 수 있는 의지와 그 행위까지도 값없이 거저 은총의 선물로 주시는 것으로 고백하는 내용이다. 알미니안주의는 ‘믿음’의 실제 참여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마치 인간의 믿는 행위와 의지가 중요한 원인과 조건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믿음의 성격은 그것조차 하나님의 선물임을 도르트 신조에서는 정확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는 말씀을 근거해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믿음의 ‘수단’에 대한 부분이다. 본 고백에서는 “성령과 말씀”이 고백되어지고 있다. 내적인 수단으로서 ‘성령’과 외적인 수단으로서 ‘말씀’이 고백되어지고 있으며, 또한 이 믿음이 강화되는 수단으로서 ‘말씀’, ‘성례’,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특히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며, 통상적으로 말씀의 증거에 의하여 역사한다’, ‘72. 의롭게 하는 믿음은 죄인의 마음 속에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은총이다(대요리문답) 등과 같은 표현은 매우 신중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반드시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방식을 통해서 세워져 가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는 말씀따로, 또는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는 방식으로 치우쳐 참된 믿음의 성격을 파괴하고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반드시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방식으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말씀과 성령이 각자 따로 역사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 안에서 세우시고 열매맺게 하는 방식으로, 즉 진리를 증거하는 방식으로 믿음이 세워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정신은 칼빈의 다음과 같은 증거 속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서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음의 성격은 본 고백서 2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서 친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하여(요4:42; 살전2:13; 요일5:10; 행24:14)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을 기독교인은 참된 것으로 믿으며, 그 말씀의 각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행동하되, 명령의 말씀에는 순종하고(롬16:26), 경고의 말씀에 대하여서는 떨고(사66:2), 금세(今世)와 내세(來世)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기꺼이 받아들인다(히11:13; 딤전4:8).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주요한 행위는 은혜 언약에 근거하여(요1:12; 행16:31; 갈2:20; 행15:11), 칭의와 성화와 영생을 위하여 그리스도만을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의존하는 것들이다.


 

위의 고백을 보면 우선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은 ‘은혜 언약에 근거하여 - 그리스도만을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의존하는 것들이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말씀의 각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행동하되’라는 표현에서도 증거하는 것처럼 믿음은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따라서 두려워하며, 순종하며, 소망하며, 위로를 받는 것이 믿음의 실제적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즉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며, 또한 그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을 믿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성격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하여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대요리문답), ‘8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무엇인가?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대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이다’(소요리문답)라는 교리문답의 표현 속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6) 생명에 이르는 회개(15장)


‘회개’는 항상 믿음과 함께 언급될 정도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 신앙고백에서도 ‘이 회개의 교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교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에 의해 전파되어야 한다’(눅24:47; 막1:15; 행20:21)(1절)라고 서두에서 ‘믿음’과 연결해서 고백해 주고 있다.

또한 ‘회개’도 ‘믿음’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표현이 본 고백에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말씀)에서 오는 은혜이다’(슥12:10; 행11:18)(1절),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3절),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란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는 구원의 은혜를 말한다(대요리문답)’라는 표현으로 고백되고 있다. 즉 ‘회개’는 전적인 하나님의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제시하므로 이것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개’에 대한 이해는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라는 말씀을 근거로 고백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특히 성경의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에 있어서도 구약과 신약을 함께 제시해 줌으로 구약의 회개에 대한 성격도 신약과 동일한 성격임을 제시하는 것은 신구약 통일성을 깊이 배려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회개에 대한 고백 중에서 가장 심각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믿음’에서 논쟁의 핵심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도구’인가, 아니면 그 ‘원인(조건)’인가가 핵심적인 논쟁이었던 것처럼 ‘회개’에서의 논쟁의 핵심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본 고백서는 비록 회개가 구원을 얻기 위한 중요하고 필수적인 ‘도구’가 되지만 그 자체가 구원을 얻게 하는 ‘원인’은 아님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께서 신적작정을 이루시는 ‘선택’이 유일한 원인이며, ‘회개’는 그 선택의 ‘열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해 주어야만 개혁주의에서 고백하고 있는 성경적인 ‘회개’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본 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회개가 죄에 대한 어떤 속량이 되거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이 되는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겔36:31,32; 16:61-63).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호14:2,4; 롬3:24; 엡1:7). 그렇지만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함이 없이는 죄 사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눅13:3,5; 행17:30,31).


 

위의 고백은 회개 그 자체가 마치 죄에 대한 배상이 된다거나, 죄를 용서받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던 소키누스파와 합리주의자, 알미니안주의의 ‘회개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고백인 것이다. 이들은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겔18:28)라는 말씀과 같은 표현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은 인간 그 자체가 원인이 되어 회개할 수 있고, 또한 그 회개가 원인이 되어 구원이 주어지는 것처럼 이해했던 것이다.

특히 도르트 신조에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처럼 ‘회개’ 자체가 구원의 유일한 원인이 됨을 더욱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은혜와 자유 의지는 회심하는 데 필요한 부분적인 요소가 되는데, 회심의 과정을 볼 때 은혜는 자유 의지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작용하여 결정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 의지를 돕기에 충분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회개는 은혜의 성격이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 자신의 결정과 선택이 되는 ‘원인’(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 고백에서는 ‘회개가 죄에 대한 어떤 속량이 되거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이 되는 것으로 믿어서는 안된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와 같은 비(非)성경적인 주장을 배격하고 있다. 오히려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16:62-63)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선물로 주어지는 선택의 열매인 것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더욱 놀라운 신앙고백의 표현은 회개와 관련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렇지만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함이 없이는 죄 사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라는 표현에서 바로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한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임감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것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원인’으로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회개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신적작정에서 주어지는 은혜인 것과 바로 이런 구조 안에서 인간이 회개해야 하는 강력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조화는 자칫 모순처럼 보여질 수 있으나 본 신앙고백에서는 이 두 구조를 성경에서 제시하는 그대로 소개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위의 ‘겔16:61-63’에서 회개의 유일한 원인은 신적작정 안에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 같은 구절에서 인간의 회개에 대한 책임에 대한 구절을 같은 에스겔서에서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겔36:31-32)라는 말씀을 함께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 놀라운 특징이다.

2절에서는 회개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먼저 ‘회개의 기준’은 인간의 형편이나 문화나 상황에 맞추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로 말미암아 죄인은 자신의 죄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더럽고 추악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그의 의로운 율법에 반대되는 것임을 눈으로 보고 깨달음으로 해서’(2절)라는 고백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만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발견해야 하는 ‘회개에 대한 지식’은 ‘죄인은 자신의 죄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더럽고 추악하여 -- 또한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라는 고백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두 가지로 소개된다. 첫째는 죄에 대한 지식과 둘째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을 회개의 중요한 내용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진정한 회개는 단지 죄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과 자비와 은총을 맛보게 될 때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2절에서는 ‘회개의 요소’를 3가지로 소개해 주고 있다. 첫째는 ‘그의 의로운 율법에 반대되는 것임을 눈으로 보고 깨달음으로 해서’라는 고백에 증거되듯이 ‘지성(지식)’적인 부분이며, 둘째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게 되며’라는 고백처럼 ‘감성’적인 부분이며, 셋째는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작정하고 또한 노력하게 되는 것’라는 고백처럼 ‘의지’적인 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6절에서는 회개의 ‘범위’에 대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하며’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회개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것임을 고백하므로 로마 카톨릭의 신부를 중보자로 한 ‘고해성사’와 같은 회개의 방식이 배격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자기의 형제나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험담한 사람은,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자기의 죄를 기꺼이 고백하며 통회하고,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회개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약5:16; 눅17:3,4; 수7:19; 시51)라는 고백을 통해서는 공적인 책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적. 공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바른 회개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만 회개했다고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공적책임은 반드시 당사자와 공적책임을 실제적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7) 선행(16장)


‘선행’은 앞서서 살펴보았던 ‘성화’에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본 고백에서는 이 부분을 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제시되고 있는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것은 ‘성화’뿐만 아니라 ‘믿음’과도 연결될 수 있다. 즉 ‘믿음’에 있어서 ‘행위’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고백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내용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앙’과 ‘견인’, ‘영화’까지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선행은 구원의 서정에서 각 내용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 가운데 있는 것임을 본 고백은 2절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행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들이요 증거이다(약2:18,22). 그리고 신자들은 이 선행을 통하여 그들의 감사함을 표하며(시116:12,13; 벧전2:9), 그들의 확신을 견고케 하며(요일2:3,5; 벧후1:5-10), 형제들에게 덕을 세우며(고후9:2; 마5:16), 복음에 대한 신앙 고백을 돋보이게 하며(딛2:5,9-12; 딤전6:1), 대적자들의 입을 막고(벧전2:1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벧전2:12; 빌1:11; 요15:8). 저희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으로(엡2:10)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결국은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롬6:22).


 

특히 성경적인 ‘선행’에 대한 부분이 강하게 고백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17세기의 가장 비(非)성경적인 구원론은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었던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공로설’이 팽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더욱 철저하게 배격하고 바른 구원론을 정립하고자 했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먼저 3절을 통해서 이 ‘선행’의 주체와 그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선행’도 역시 앞서 소개되었던 다른 구원의 서정들과 같이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선행’을 이루시는 주체이시며, 이것은 오직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자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요15:4-6; 겔36:26,27). 그리고 그들이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 이외에도 그들 안에서 역사하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그들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바로 그 성령의 실제적인 감화가 필요하다(빌2:13; 4:13; 고후3:5).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무도 실천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여 나태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써 불일듯하게 해야 한다(빌2:12; 히6:11,12; 벧후1:3,5,10,11; 사64:7; 딤후1:6 행26:6,7; 유20,21)(3절).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선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자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 이미 받은 은혜 이외에도 그들 안에서 역사하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그들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바로 그 성령의 실제적인 감화가 필요하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듯이 선행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선행’의 실제적인 참여자는 인간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 사역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철저하게 고백하므로 ‘선행’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선물로 주시는 은총의 성격인 것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선행’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바로 이와 같은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소개되어야만 ‘공로’에 대한 교만으로 빠지지 않고 또한 ‘나태와 게으름’으로 핑계할 수 없는 구조를 갖게 됨을 본 고백은 성경을 따라서 고백해 주고 있다. 즉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무도 실천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여 나태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써 불일듯하게 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인간의 거룩한 책임과 의무가 어떤 성격인지 제시되고 있다.

또한 7절에서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행위들은 가령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들이요, 그들 자신에게 분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하고 유익한 것들일지라도 - 그것들은 죄악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게 할 수도 없다. - 그렇지만 그같은 행위들을 그들이 게을리하게 되면 그것은 더욱 죄악되며, 하나님을 더욱 불쾌하게 하는 것이 된다(시14:4; 36:3; 욥21:14,15; 마25:41-43,45; 23:23)’라는 고백을 통해서 불신자의 행위에까지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과 신적작정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를 고백해 주고 있다. 즉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19)라는 말씀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인간의 자리는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는 피조물의 자리이기 때문에 악한자의 행위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악할지라도 자신들의 의무와 책임감을 핑계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엄중한 책임과 의무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아래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인간의 거룩한 책임과 의무를 소개하려고 할 때 성경 말씀에서 이미 ‘선행’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다루는 구절을 기초로 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은 개혁주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의 독특한 자리를 개혁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대한 근거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1:10). 특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9-10)라는 말씀에서는 ‘선행’이 더욱 철저하게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다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본 고백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것을 4-6절까지 확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어떤 성격인지를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해서 정확하게 소개해 주고 있다. 먼저 4절에서는 ‘순종을 통해서 이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도의 선행에 도달한 사람들일지라도, 의무 이상의 공(功:supererogation)을 세운다든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결코 행할 수가 없는데, 이는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마저도 그들은 다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눅17:10; 느13:22; 욥9:2,3; 갈5:17)라는 고백을 통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총체적인 성격을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아무리 완벽한 행위를 행해도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마저도 인간은 다 행할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의 행위를 정립해 주고 있다. 5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죄 사함이나 영생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선행들과 장차 있을 영광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으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무한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어 드릴 수가 없고, 우리들의 전에 범한 죄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롬3:20; 4:2,4,6; 엡2:8,9; 딛3:5-7; 롬8:18; 시16:2; 욥22:2,3; 35:7,8). 가령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 뿐이요, 우리는 무익한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눅17:10). 그런데 우리의 행위들이 선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데 있는 것이다(갈5:22,23). 그러나 그 선행이 우리들에 의해 행하여질 때에는 여러 가지 연약성과 불완전성으로 더럽혀지고 혼잡되어 있어서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견디어 낼 수가 없다(사64:6; 갈5:17; 롬7:15,18 시143:2; 130:3).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어 드릴 수가 없고, 우리들의 전에 범한 죄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그런데 우리의 행위들이 선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데 있는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완벽해도 무한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의 자리에 보태거나 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신적작정의 권위가 얼마나 완벽하고 높은 것인지를 확증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항상 인간의 ‘자유의지’와 ‘공로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신적작정 대한 오해와 곡해에서부터 이런 잘못된 제시를 출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본 고백에서 가장 놀랍게 인간의 행위와 자리를 소개하는 것은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17:9-10)라는 말씀을 근거로 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 뿐이요, 우리는 무익한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고백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인간의 행위와 노력은 하나님의 높으신 주권과 권능 아래서 핑계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마땅히 받아들이고 행해야 하는 거룩한 의무와 책임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거룩한 책임과 의무의 성격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는 말씀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즉 가장 큰 열심과 노력의 책임과 의무는 어떤 공로와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성격이 너무나 높고 커서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 감사로 영광을 드리기 위함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또한 이렇게 행해진 책임과 의무까지도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총의 선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은혜로 주시고, 바로 그 속에서 거룩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확립해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5절까지 인간의 독특한 책임과 의무를 소개한 다음 6절에서는 다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서 ‘성화’의 성격을 재정립해 주고 있다. 즉 “신자들의 인간됨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되는 것이다(엡1:6; 벧전2:5; 출28:38; 창4:4 히11:4) --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들을 보시기 때문에, 비록 많은 연약성과 불완전성을 수반하고 있을지라도, 성실하게 행한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시고 상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이다”(히13:20; 고후8:12; 히6:10; 마25:21,23)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선행의 가치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의 방식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심 가운데 주시는 선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선행의 성격을 기초해서 1절에서는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들만을 가리킨다’(미6:8; 롬12:2; 히13:21)라는 고백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행의 유일한 규범이 되고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말씀이 성도의 삶의 규범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7절에서는 ‘그것들이 믿음에 의하여 청결케 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창4:5; 히11:4,6), 말씀을 좇아서 올바르게 행해진 것도 아니며(고전13:3; 사1:12),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았기 때문에(마6:2,5,16)’라는 고백을 통해 ‘선행’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며, 그 기준은 ‘오직 말씀’이며, 그 목적은 인간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이 유일한 선행의 목적임을 알 수 있다.

 

8) 성도의 견인(17장)


성도의 견인에 대한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제시되고 있는 구원의 서정 부분에서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다음 18장에서 “은혜와 구원의 확신” 부분이 더 추가되어 있지만 이 부분도 견인과 함께 포함해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견인” 부분이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견인”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서정이 철저하게 신적작정을 기초로 해서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는 방식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제시되고 있는 엄밀한 구원론임을 더욱 깊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첫 출발점이었던 ‘부르심’에 대한 부분에서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시작했으며, 이제 구원의 서정을 마감하는 부분에서도 철저하게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1절에서는 ‘견인’의 사역에 주체가 오직 하나님 자신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꾸준히 인내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빌1:6; 벧후1:10; 요10:28,29; 요일3:9; 벧전1:5,9).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79.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위하여 계속 중재하고 계시며, 성령과 하나님의 씨가 그들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대요리문답),라는 고백처럼 ‘견인’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인 것임을 알 수 있다. 2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각 위격의 사역이 다음과 같이 고백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나오는 작정의 불변성’,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 ‘성령의 내주하심과’. 이런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각 위격이 사역이 어떻게 견인의 주체가 되고 있는지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견인’의 성격도 앞서 살펴보았던 다른 부분처럼 ‘부르심’으로 소급해서 연결해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 가지 추가된 부분은 ‘성화’도 연결되고 있으나 ‘부르심’을 기초로 해서 ‘견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바로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견인을 고백하려는 모습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정신은 바로 2절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성도들의 이 견인은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넘쳐나온 선택의 불변하는 작정(딤후2:18,19; 렘31:3)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히10:10,14; 13:20,21; 9:12-15; 롬8:33-39; 요17:11,24; 눅22:32; 히7:25),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로 말미암은 것이요(요14:16,17; 요일2:27; 3:9) 은혜 언약의 본질에 달려 있는 것이다(렘32:40). 이와 같은 모든 것에서 또한 견인의 확실성과 무오성이 나오는 것이다(요10:28; 살후3:3; 요일2:19).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견인은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2:19)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넘쳐나온 선택의 불변하는 작정에 달린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표현에 아주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듯이 견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져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3절에 대한 고백이다. 많은 비(非)개혁주의자들이 ‘성화’와 ‘믿음’ 등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 아래서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확립해 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적작정과 예정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구원의 서정에 대한 주체를 ‘인간의 자유의지’, ‘신인협력설’ 등과 같은 비성경적인 교리로 끊임없이 주장해 왔던 것처럼 본 ‘견인’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도 역시 같은 논쟁이 있어 왔다. 그래서 본 신앙고백서는 이와 같은 합리주의와 알미니안주의적 ‘견인’ 교리를 철저하게 배격하면서 성경적인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다음과 같이 정립해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성도들은 사탄과 이 세상의 시험을 받으며,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부패한 요소가 깊이 퍼지고, 그들을 보존해 주는 은혜의 방편들을 무시함으로 해서 중한 죄에 빠질 수 있으며(마26:70, 72, 74), 그리고 얼마 동안 그 죄 가운데 거하기도 한다(시51:14).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사며(사64:5,7,9; 삼하11:27), 그의 성령을 근심케 하고(엡4:30), 그들이 받은 바 은혜와 위로의 얼마를 상실하게 되고(시51:8,10,12; 계2:4; 아5:2-4,6),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사63:17; 막6:52; 16:14), 그들의 양심은 상처를 받으며(시32:3,4; 51:8), 남을 해치거나 중상하여(삼하12:14) 일시적인 심판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시89:31,32; 고전11:32).


 

우선 위의 고백은 2절에서 ‘성도들의 이 견인은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표현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2절에서는 견인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자체가 견인의 ‘원인’이나 ‘조건’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견인’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와 노력과 의지가 견인 그 자체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만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어떤 성격인지 바르게 정립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절에서 제시되고 인간의 책임과 의무의 성격은 ‘성화’ 부분에서 발견한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의 거룩한 책임과 의무의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신적작정과 예정을 ‘강제’의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주권 안에서 확립해 가시는 방식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시는 이도 아니시다. 도리어 제 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을 제거시키지 않고, 오히려 확립하시는 분이시다(3장1절)”, “제 1 원인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모든 일들이 변함이나 틀림이 없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 2 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작정해 두셨다(5장2절)”라는 앞선 부분의 신적작정과 섭리에 대한 부분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부분이다.

이것은 알미니안주의처럼 인간의 의지가 독립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책임과 의무는 이 안에서 확립되어져 간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만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겸손과 주를 향한 가장 큰 열심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임을 본 고백에서는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이해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1:10),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2:19)라는 말씀을 통해서 고백되고 있다.

본 말씀도 살펴보면 택함은 전적인 하나님의 권한임에도 마치 그것이 성도의 노력과 열심으로 더욱 견고해져 가는 것처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견인의 교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으로 그 은혜가 주어지는 것임을 제시해서 성도들이 강한 신앙의 확신과 신뢰를 갖게 해 주고 또한 그런 은혜에 감사함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인간의 노력도 함께 이끌어 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견인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이 조건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에 감사해서 더욱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신적작정과 예정의 ‘열매’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처럼 견인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는 신적작정과 예정 안에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자유롭게 확립하고 세워가는 방식으로서 주어지는 거룩한 책임과 의무의 성격이기 때문에 3절에서 ‘그러나 성도들은 사탄과 이 세상의 시험을 받으며,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부패한 요소가 깊이 퍼지고, 그들을 보존해 주는 은혜의 방편들을 무시함으로 해서 중한 죄에 빠질 수 있으며’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때론 자신의 죄와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자리에도 처할 수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를 자신의 신적작정과 주권 아래서 가장 자유롭게 확립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통한 거룩한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될 때 이처럼 죄와 책망과 슬픔과 강팍함과 일시적인 심판까지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 고백에서는 가장 깊이 있는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이 신적작정과 예정 안에서 더욱 촉구하고 확립해 주기 위해서 성도가 처할 수 있는 심각한 형편까지 낱낱이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9) 은혜와 구원의 확신(18장)


본 장은 앞서 소개한 ‘견인’에 포함해서 소개해도 되는데 본 고백에서는 따로 분리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고 있는 것이 또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구조는 ‘선행’이 ‘성화’와 분리되어 성도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정립해 주고자 했던 것처럼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분도 ‘견인’에서 따로 분리되어 당시 로마 카톨릭이나 알미니안주의적 구원론에 대한 부분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성경적인 구원의 내용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비(非)성경적인 구원론의 내용에 대해서 본 고백은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경고해 주고 있다.


 

위선자나 그밖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상태에 있는 줄로 알고서 거짓된 소망과 육적인 억측으로 헛되게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으나(욥8:13,14; 미3:11; 신29:19; 요8:41),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사라질 것이다(마7:22,23). 그러나 주 예수를 참으로 믿고, 신실한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을 따라서 힘써 행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요일2:3; 3:14,18,19,21,24; 5:13),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중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다. 이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롬5:2,5)(1절).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거짓된 소망과 육적인 억측으로 헛되게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으나’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비(非)개혁주의적 구원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참된 구원의 소망이 아니라 거짓과 억측에 의한 자기확신으로 속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경고는 2절에서도 ‘이 확실성은 허황된 소망에 근거한, 단순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 그럴듯한 확신이 아니라’(히6:11,19)(히6:17,18)라는 고백을 통해서 계속 경고되고 있다. 더욱 분명한 경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고백에 증거되는 것처럼 비(非)개혁주의적 구원의 소망은 반드시 붕괴되고 상실될 것임을 엄중하게 경고해 주고 있다.

반면 개혁주의적 구원론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중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다. 이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처럼 가장 철저한 성경적인 구원론이기 때문에 참된 구원의 은혜와 소망과 확신이 있으며 이것은 결코 붕괴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개혀주의의 구원론과 비(非)개혁주의의 구원론이 얼마나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2절에서는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수단’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이 확신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벧후1:4,510,11; 요일2:3; 3:14; 고후1:20)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롬8:15,16). 이 영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이 영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날까지 우리가 인(印)치심을 받았다(엡1:13,14; 4:30; 고후1:21,22).


 

위의 고백에서는 확신에 이르는 수단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즉 ‘이것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라는 고백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소개되는 “말씀과 성령”은 이미 앞서 소개된 구원의 서정 각 부분에서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 언급되었었다. 즉 ‘부르심’에서부터 ‘견인’에 이르기까지 전 구원의 서정 각 부분에서 구원의 서정을 이루어 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본 고백서는 계속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적인 구원의 확신 부분에서 개혁주의 구원론은 전체가 “말씀과 성령”을 수단으로 이루어져 가고 세워져 가는 것임을 다시 언급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라는 고백처럼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진리를 믿고 신뢰하는 “성경신앙적 확신”인 것이다.

특히 3절에서는 ‘그렇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들을 그가 성령을 통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색다른 특별한 계시(직접계시) 없이도, 통상적인 방편(말씀,성례,기도)들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그 확신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전2:12; 요일4:13; 히6:11,12; 엡3:17-19)라는 고백을 통해서 신비주의적인 확신이 더욱 철저하게 배격되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백은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 팽배해 있는 오순절적 신비주의의 구원론이 배격될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3-4절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구원론에 있어서 성도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소개된 ‘견인’ 부분에서도 소개되었는데 본 장에서는 ‘견인’ 부분보다도 더욱 구체적으로 그리고 장엄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세워져 가는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소개해 주고 있다.


 

절대로 틀림없는 이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참 신자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많은 난관들에 부딪히고 난 연후에야 그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요일5:13; 사50:10; 막9:24; 시88; 77:1-12). -- 그러므로 모든 신자에게는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벧후1:10).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의 마음은 성령 안에서 화평과 희락으로 넘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로 넘치며, 또한 복종하는 일에 있어서는 힘있고 유쾌하게 된다(롬5:1,2,5; 14:17; 15:13; 엡1:3,4; 시4:6,7; 119:32). 이같은 것들은 확신에서 오는 당연한 열매들이다. 그러므로 이 확신을 갖게 되면 사람들은 결코 방탕한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요일2:1,2; 롬6:1,2; 딛2:11,12,14; 고후7:1; 롬8:1,12; 요일3:2,3; 시130:4; 요일1:6,7)(3절).


참 신자일지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흔들리며, 약해지며 일시 중단될 수 있는데, 이같은 일들은 그 확신을 보존하는 수단들을 게을리 하거나, 양심에 상처를 주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어떤 특별한 죄에 빠지거나 어떤 갑작스럽거나 강렬한 시험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의 빛을 숨기시어 그를 경외하는 자일지라도 흑암 중에 행하며 전혀 빛이 없게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아5:2,3,6; 시51:8,12,14; 엡4:30,31; 시77:1-10; 마26:69-72; 시31:22; 시88; 사1:10). 그렇지만 하나님의 씨와 믿음의 생활이나, 그리스도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무에 대한 신실한 마음과 양심이 결코 전적으로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확신이 적당한 때에 소생하게 되는 것이며(요일3:9; 눅22:32; 욥13:15; 시73:15; 51:8,12; 사1:10), 또한 그간의 심한 절망에서도 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버티어 내는 것이다(미7:7-9; 렘32:40; 사54:7-10; 시22:1; 88)(4절).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선 ‘모든 신자에게는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책임과 의무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세워지게 될 때 성도는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의 마음은 성령 안에서 화평과 희락으로 넘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로 넘치며, 또한 복종하는 일에 있어서는 힘있고 유쾌하게 된다’라는 고백처럼 가장 큰 구원의 은혜와 확신과 열매들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세워져 가는 인간의 책임과 의무는 결코 강제의 방식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는 말씀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자원하는 마음으로 책임과 의무를 행하도록 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에 4절과 같은 엄중한 경고가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엄중한 경고가 4절에서는 ‘참 신자일지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흔들리며, 약해지며 일시 중단될 수 있는데, 이같은 일들은 그 확신을 보존하는 수단들을 게을리 하거나, 양심에 상처를 주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어떤 특별한 죄에 빠지거나 어떤 갑작스럽거나 강렬한 시험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의 빛을 숨기시어 그를 경외하는 자일지라도 흑암 중에 행하며 전혀 빛이 없게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는 인간의 책임과 의무는 결코 나태하거나 게으름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나태함과 게으름을 가장 강력하게 책망하고 경고하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최고의 겸손과 열심을 가지고 성도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촉구하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얼마나 엄중하고 거룩한 것인지를 정립해 줌으로 본 고백서는 전체 구원론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어떤 것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해 주고 있다. 즉 ‘이 확신을 갖게 되면 사람들은 결코 방탕한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고백처럼 감사함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큰 열심과 노력과 헌신의 책임과 의무인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구원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제시하고 있는 엄밀한 개혁주의 구원론은 구원의 서정 전체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해서 예정론 안에서 이해되고 고백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즉 전체 구원의 서정은 그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원인’이나 ‘조건’이 아니라 바로 이 신적작정과 예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시는 ‘열매’로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주체에 있어서도 역시 이 신적작정과 예정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신론 중심적으로 구원론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적인 특징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론의 이해가 있어야만 구원론이 인본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고백될 수 있고 또한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구원의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론에서는 당연히 인간이 많이 소개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는 구원론의 완성은 인간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까지 이르어야 한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즉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소요리문답의 고백처럼 구원론은 인간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자리까지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구원론의 구조를 기초로 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전체 구원의 서정들을 다루어 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부르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이 기초 위에서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런 독특한 특성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기 위해서 각 구원의 서정들의 근거를 ‘부르심’으로 소급해서 고백해 주고 있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원론에 대한 이런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우리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는 말씀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구원이 우리의 노력과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에 의해서 값없이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Confession of Faith(1658). John G. Eccles Preinters Ltd, 1983.

Berkhof, L. 조직신학 (下), 권수경․이상원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Calvin, John. 깔뱅의 요리문답, 한인수역, 경건, 1995.

---------. 기독교강요, 김종흡,신복윤,이종성,한철하 공역, 생명의말씀사, 1994.

Clark, G. H.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나용화역, 개혁주의신행협회, 1994.

Green, J. B.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대조해설, 김남식역, 성광문화사, 1997.

Gruster, F. A.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 이승구역, 여수룬, 1993.

Hodge, A. A.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 김종흡,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Hoekema, A. A.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역(譯), 기독교문선선교회, 1991.

Sachff, P. The Creeds of ChristendomⅢ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Co), 1998.

Ursinus, Z.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Ohio: Presbyterian and Reformedpublishing Co, 1852.

Vincent, T. 성경 소요리문답 해설, 홍병창역, 여수룬, 1993.

Williamson, G. I.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4.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강해, 문성출역, 양문출판사, 1989.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해설, 이길호역, 베다니, 1995.

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 와 그 개혁 정신, 미간논문, 1999, p. 96.

김의환.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생명의 말씀사, 1994.

박윤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영음사, 1994.

박형룡. 박형룡박사 저작전집(구원론)Ⅴ,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이장식. 기독교 신조사Ⅰ권, 컨콜디아사, 1987.

이장식. 기독교 신조사Ⅱ권, 컨콜디아사, 1987.

이형기. 신앙고백서, 이형기편역,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조석만, 조직신학(下), 도서출판 잠언, 2001.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주기도문해설), 안양대학교신학대학원, 1996.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