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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하는 박태식 서강대강사의 글이다) 꿈이란

수호천사1 2012. 3. 10. 22:11

(이하는 박태식 서강대강사의 글이다)
신약성경에는 꿈이나 환상에 대한 보도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방대한 꿈과 환상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리고 예수의 유년기 시절에는 곧잘 등장했던 꿈들이(마태 1:20; 2:12, 13, 22) 정작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바울의 편지에서도 한 곳(고후 12:1-4)을 제외하고는 꿈이나 환상에 기대어 자신의 사고를 전개시키는 법이 없다. 그러니 초대교회에서는 꿈과 환상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또한, 1세기 말엽에 씌어졌을 것으로 간주되는 유다서에 보면 “여러분 가운데 몰래 끼여든 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제 정신을 잃고 자기 육체를 더럽히며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스러운 천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8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로 황홀경에 싸여 주님을 욕되게 하는 적들의 못된 행동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하건대) 초대교회에서는 꿈과 환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더러 종종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서신에 나오는 꿈과 환상에 관한 구절들을 살펴보고 나서 이 질문들에 대답을 시도해 보겠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꿈들은 대체로 미래에 벌어질 일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을 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마태복음의 꿈들은 예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인물들 중 누구보다도 꿈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다. 그는 정식 결혼도 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의 유대풍습에 따르면 정혼을 한 지 1년이 지나야 부인을 친정 집에서 데려와 정식으로 살림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으니 그야말로 큰 일이 난 셈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부정을 저지른 여자는 간음죄가 적용돼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요셉은 점잖은 사람(‘의로운 이’)이었기에 슬며시 파혼하기로 작정했는데, 이는 물론 자기 쪽에서 먼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공개해서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지는 않겠다는 심산에서였을 것이다. 이 때 요셉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고 태중의 아이를 정식 아들로 삼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 때 꿈과 관련되어 쓰인 표현은 ‘캍 오나르’(κατ΄ οναρ, 마태 1:20)이고 우리말로 옮기자면 ‘꿈에 따라서’인데, 의역하자면 ‘꿈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꿈도 역시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하고(2:12), 요셉에게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달아나라는 요구나(2:13), 헤롯이 죽은 뒤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거나(2:19), 갈릴리 땅 나사렛 마을에 거처를 정하라는 명령(2:22)에서도 모두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빌라도의 아내가 남편에게 예수의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한 당부도 역시 전날밤 ‘꿈에 따른’ 것이었다(27:19).

위에서 언급한 마태복음에 나오는 꿈에 관한 보도들은 한결같이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려주고 그와 관련해 모종의 지시를 내린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으로 이 보도들은 단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모두 마태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제3의 자료, 즉 마태의 특수자료에서 온 것들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κατ' οναρ’도 마태가 즐겨 쓴 표현이라기 보다는 마태 이전의 전승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태복음에서 꿈에 관한 보도들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는 곳은 이른바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혹은 前史, 마태 1:18-2:23)로,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암시를 제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유년기 때 겪은 일들을 통해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추론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의 유년기는 마치 모세의 그것과 비슷한데, 이를테면 아기들의 학살이라든가 이집트로의 피신 등의 모티브가 모세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예수 역시 모세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파견된 인물이라 세상의 통치자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으로 예수 아기도 모세처럼 위기를 넘기고 결국 하나님의 뜻은 차질 없이 진행된다. 예수 아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 계획이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환히 계시된 것이다. 마태는 이처럼 전승으로 물려받은 특수자료에서 예수가 가진 구원사적인 의미에 대한 암시를 얻어낼 수 있었으며, 이 사상을 그대로 자신의 복음서에 옮겨 적었다.

그렇다면 과연 마태복음의 꿈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계획(혹은 예수의 구원사적인 의미)이 꿈을 통해 충분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비단 유년기 이야기에서뿐 아니라, 수난사화에서도 빌라도 아내의 꿈을 통해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꾸준한 관심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꿈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는 도구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도구로서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대단히 신학화된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꿈들 역시 마태복음의 꿈 못지 않게 신학적인 의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꿈들은 언제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 때 등장한다. 우선 16:9-10에 보면 꿈을 통해, 이제까지 복음의 선포 범위가 팔레스타인 땅과 소아시아 지방에 머무르던 것이 지중해를 건너 바야흐로 유럽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제공된다. 그리고 유럽 대륙으로 확산된 복음이 급기야 23:11의 꿈을 통해 로마에까지 이어진다. 사도행전이 씌어질 당시의 사람들, 즉 이 책의 독자들에게 ‘세계’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는 이가 바로 세계의 정복자였다. 따라서 이를 정복해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한 로마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세계제국이었다. 그러니 팔레스타인 땅과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 대륙과 마지막으로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사도행전에 제시된 선교 계획이 다 이루어지는 셈이었다(“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행 1:8). 따라서 23:11의 꿈을 좇아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 전도를 하게 되는 장면으로 사도행전이 마무리된 것도 하등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28장).

그 외에 사도행전에서 꿈(혹은 환상)과 관련된 보도들로는 베드로의 첫 설교에 등장하는 구약성경 인용문(2:17), 최초의 이방계 그리스도인인 고넬료 이야기에 나오는 환상(11:1-18), 주께서 신비로운 영상으로 바울에게 나타나 복음 전파의 힘을 준 것(18:9) 등도 모두 복음 전파라는 맥락에서 씌어진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꿈(혹은 환상)에 대한 보도들은 주로 선교 모티브와 관련된 신학화된 개념이라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릴 수 있겠다.

이제까지 마태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꿈과 환상을 다루었고, 이들이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두 책에 나오는 꿈과 환상들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가미되어 있고, 어찌 보면 초대 교회의 가르침들로 규격화되는 작업을 이미 거친 것들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규격화 작업을 거치기 전의 생생한 모습,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는 꿈이나 환상을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잘 다가갈 수 있는 예는 역시 바울의 꿈(혹은 顯示) 이야기다(고후 12:1-4).5)

고후 11:21 이하로부터 바울은 신상발언을 하는데 이는 아주 희귀한 일이다. 그는 여간해서 자신의 자랑을 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여기서 스스로의 전도 철학을 깨고 자랑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자랑은 그와 경쟁관계에 놓여 있던 유랑 전도사들에 비해 자신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임을 강조하는 내용들이며, 그 중에 하나가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신비한 체험이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교인 하나가 십사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 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고후 12:1-4). 바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런 식의 꿈(혹은 현시)이란 현실 세계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체험이며, 누구인가 하나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온전히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번쯤 겪었을 법한 체험이기도 하다.

따라서 또한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바울의 꿈 이야기를 모두 사실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 이런 체험을 가진 이의 신앙이 돋보이게 되고, 그가 공동체에서 믿음직한 인물로 받아들여졌으리라는 점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바울의 경쟁자들 역시 자신들의 신비한 체험을 상당히 떠벌려서 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은 이와 달라서 하나님과 자신만의 그 소중한 체험은 속으로 고이 간직해야지, 절대 과시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고후 12:1-4에 뒤이어 바울은 자신의 현시 체험(혹은 바울이 빌려 온 다른 이의 현시 체험)으로 행여 스스로 교만해질 새라 하나님이 바울의 몸에 가시를 주었다는 말을 덧붙인다(5-10절).

아무튼 바울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자화자찬을 한 셈이며,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11上절). 그러나 그 뒷켠에는 바울의 경쟁자들(이른바 ‘대단히 여겨지던 사도들’, 11下절)이 자신들의 신비한 체험을 바탕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자랑에 맞서 바울 역시 자신의 현시체험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원치 않던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11中절).
바울의 편지에서(행간을 통해) 초대교회가 꿈이나 환상을 신앙의 과시 수단으로 여기는 잘못된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는 방언이 신앙의 과시 수단으로 무분별하게 진행되어 고린도 교회의 예배가 종종 망쳐졌다는 고전 14장을 머리에 떠오르게 만든다. 꿈이나 환상도 초자연적인 감각의 신앙행위라는 점에서, 방언의 은사와 같은 맥락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서두에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에 대해 한두 가지 질문을 던졌었다. 이제 대답에 앞서 몇 가지 중요한 전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마태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와 세계전도의 과정에 서슴없이 꿈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꿈과 환상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의 꿈 이야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초대교회 교인들이 초자연적인 체험을 보다 신뢰했기에 바울도 자신의 현시 체험을 자랑하게 되었다. 둘째, 꿈이나 환상은 이것들을 통해 빚어지는 결과에 주목할 일이지 결코 초자연적인 면, 그 자체에 강조점을 두어서는 안된다. 꿈을 통해 예수가 가지는 구원사적인 의미나 복음의 세계화는 읽어 낼 수 있을지언정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했다는 식의 자랑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과학만능주의가 팽배한 20세기 후반에 사는 사람의 눈으로 초대교회의 체험을 거론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혹은, 반대로 꿈과 환상이라는 계시의 도구가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초대교회에서처럼 보편적이지 않다고 해서 “다같이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식으로 교인들을 닦달해서도 곤란하다. 적어도, 하느님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적절한 도구를 사용해 자신을 계시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꿈과 환상들이 신학적인 작업을 거친 것들이라면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현시 체험은 초대교회의 한 가지 모습을 생생히 알려주는 보도이다. 전자의 꿈과 환상을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수단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데 반해, 후자에서는 꿈과 환상이 자칫 인간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는 점, 즉 대단히 부정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꿈과 환상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함이 정확한 대답이 될 것이다. 꿈과 환상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수여되는, 또한 초월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교만이 끼여들면 자칫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점만은 여전히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http://cafe.Godpeople.com/healinghouse/?B23-1181

장봉운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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