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휴거는 언제 일어날 것인가? 역사상 유례없이 요즈음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영토로 귀환한 사실, 지식의 폭발, 핵무기로 인한 전세계의 파괴 가능성, 정보 기술의 급속한 성장(온 세계에 복음 전파를 가능케 하는) 등의 사건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마지막 때가 매우 가깝다고 생각하게 한다.
성경만이 미래의 답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알기 위하여 자연히 성경을 볼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두 가지 사건은 세상의 종말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공부하기 이전에 이 두 가지 사건을 잘 살펴보고자 한다. 그 중 하나는 "대환난"으로 세상 마지막 직전에 있을 사건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대환난에 대하여 자세히 공부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휴거"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는 큰 위로 중의 하나가 믿는 자들의 휴거이다. 휴거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음을 당하기 전에 영광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 때 그들은 공중으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을 보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교회의 휴거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중 하나는 역사의 연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여러 교단과 회중을 말하며,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근본적이며 광범위한 부분을 차지한다. 휴거는 믿는 자들이 공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만나기 위하여 들림 받는 것이므로 믿는 자들에게는 휴거가 이 세상 삶의 마지막 결실을 의미한다. 즉 그 후 교회는 더 이상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휴거가 역사와 관련해서 언제 일어날 것인지 배워야 한다.
이제 한 가지 어려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휴거의 시기에 관해서 어려운 일들이 생겼다. 그것은 휴거의 시기가 과연 언제인가 하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마지막이 되기 1,007년 전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1,003년 반 전으로 휴거의 때를 성경이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1000년 전이라고 믿는다. 그런가 하면 이 사건이 마지막 날과 동시에 일어나리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논리적으로 볼 때 마지막 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모호하다고도 보며 또는 성경에 나오는 언어가 매우 어렵다고도 한다. 물론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을 분명히 알고 싶어하며 그렇게 되면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환난이 우리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휴거의 시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마지막 때와 관련되는 많은 사실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다행히도 성경은 휴거에 대하여 많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가끔 언급되는 정도가 아니다. 심판날, 마지막 날과 관련되어 휴거의 시기는 성경에 너무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 역사의 어떤 시점에 틀림없이 일어날 것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 공부에서 우리는 휴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일곱 경로의 성경 말씀을 잘 살펴보려고 한다. 이 서로 다른 일곱 경로의 성경 말씀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결론을 찾아 낼 것인데 그것은 믿는 자들의 휴거는 마지막 때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그 때와 같은 때이다. 이 세상은 붕괴되기 시작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준비를 하실 때이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이다. 성경 안에서 이토록 중요한 휴거와 마지막 때에 관한 많은 정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이제 그 일곱 경로 중 첫 번째를 살펴보자.
마지막 나팔과 휴거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을 읽어보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 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죽을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성경 말씀에서 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순간적으로 부활된 몸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휴거이다. 53절에는 믿는 자들이 죽지 아니할 몸을 입을 것을 말씀하신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언제 이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마지막 나팔"에 주목하라. 이것이 바로 그 시기를 알게 하는 실마리이다.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 나팔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 준다는 원칙에 따라 우리는 마지막 나팔과 관련되는 모든 구절들을 찾아봄으로써 그 마지막 나팔이 언제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요한계시록 11장 15-18절을 보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일곱째 또는 마지막 나팔과 함께 일어날 일들의 대략을 설명하신다. 그 때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발생한다.
첫째,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되고 둘째,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상을 받게 되며 셋째,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곱째 나팔은 심판날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상을 받는 때이다. 마귀의 세력은 지옥으로 던져지는 때이다. 그러므로 그 마지막 나팔은 반드시 이 세상의 마지막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심판날은 시작되고 사탄은 불 못으로 던짐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 말씀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믿는 자들의 휴거가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시록 11장 말씀을 통하여 그 마지막 나팔은 심판날과 동시에 일어남을 알았다.
소돔의 멸망과 휴거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휴거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그 때에 있을 일임을 공부하였다. 이제 두 번째 성경 말씀을 찾아보고 휴거가 일어날 때가 언제인지 좀 더 찾아 보기로 하자.
누가복음 17장 28-37절 말씀을 보자.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소돔의 멸망을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의 모형으로 사용하셨다. 우리는 롯과 그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휴거의 모형임을 곧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롯과 그 가족의 구원을 34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의 말씀과 연결시키신다. 소돔의 멸망 바로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사자를 보내어 그 가족을 구원하셨다(창세기 19장). 이 구출 작업에 곧 이어 하나님께서는 불과 유황을 소돔에 쏟아 부으시고 그 온 도시를 멸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30절에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고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심판날과 소돔의 멸망과 연결시키신다.
소돔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이 매우 유사하다는 데에 명백한 증거가 있다. 소돔, 가증한 도시, 멸망 받기에 너무도 무르익은 이 도시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성되었었는데 하나는 가증한 자들로 멸망 받을 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롯과 그 가족으로 된 교회, 즉 상징되는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 가증한 도시에 살았던 지극히 적은 수의 남은(remnant) 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그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 가운데 교회가 있는데, 이것은 세상의 인구 비례로 보면 너무도 적은 수의 사람들이다.
다음에 심판날이 소돔에 닥쳐온다. 그들의 부정은 절정에 이른다.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단호하게 그들을 멸망하신다. 그러나 그 심판 바로 직전에 롯을 구출하신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되기 직전에 롯의 부인은 심판을 받고 만다. 나라들이 심판 받을 만큼 무르익게 되면,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시어 그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믿는 자들을 구출하실 것이다.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다. 데려감을 당한 자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말씀 같이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고 버려 둠을 당한 자는 소돔의 가증한 자들처럼 심판을 받기 위하여 남겨 둠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휴거가 심판날과 동시에 일어날 것임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소돔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고린도전서 15장의 휴거가 마지막 나팔에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 완전한 일치가 된다.
노아 때의 홍수와 휴거
세 번째 성경에 있는 휴거와 관련된 기사는 노아 때의 홍수 사건이며 휴거가 심판날과 동시에 일어날 것에 대한 확실성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노아의 홍수 사건과 심판날과 비교하여 말씀하신 성경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4장 37-41절을 보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구절에 하나님께서 노아의 때에 홍수로 인한 멸망과 예수님의 재림을 유사한 언어로 말씀하신다. 즉 노아 때의 홍수로 인한 세상의 멸망은 심판날의 모형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3장 3-7절에서도 설명되고 있는데 읽어보기로 하자.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창세기 7장 홍수의 기사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홍수가 나기 7일 전에 노아에게 홍수가 7일 후 있을 것이라고 예고해 주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노아와 그 가족은 방주로 들어가게 된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창 7:4)
홍수는 4절에 있듯이 예고가 있은 후 7일째에 온다. 이것은 창세기 7장 10절에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에서도 알 수 있다. 성경은 홍수의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노아가 실제로 방주에 들어간 것은 홍수가 난 바로 그 날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 7장 11-13절을 읽어보자.
"노아 육 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 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노아 때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먹고 마시며 할 일을 다하였고, 홍수는 그들을 모두 멸해버렸다고 가르치신다. 누가복음 17장 27절을 읽어보자.
"노아가 방주에 들러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분명히 우리는 홍수와 심판날 사이에 유사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아와 그 가족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었다. 마지막 심판날에 믿는 자들도 이 죄로 물든 세상에서 아주 적은 수의 남은 자로 존재할 것이다. 심판날에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옮겨질 때 믿는 자들은 휴거 되어 구출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마 24:40). 데려감을 당한 자는 노아와 같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갔음으로 구원을 받았듯이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만남으로 안전한 곳으로 구출을 받는 것이다. 버림을 받은 자는 심판을 받기 위해 남김을 당했고 이것은 마치 노아의 방주 밖에 있던 자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남김을 당한 것과 일치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분명하게 휴거가 심판날과 동시에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을 때 그의 부활이 사실이었음을 많은 증거를 통하여 보여 주신다(행 1:3). 마찬가지로 휴거시기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사실을 가르치는 성경의 네 번째 경로를 찾고자 한다.
죽은 자의 부활과 휴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7절에 우리는 휴거에 대하여 가장 자주 인용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하여 네 번째 휴거의 때를 알려 주는 내용을 공부하기로 하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구절에서 제일 먼저 찾을 수 있는 진리는 휴거는 우리 몸의 부활과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잠든 자들을 같이 데리고 올 것을 말씀하신다. 다른 곳(고후 5:8)에서 우리의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고 가르치신다.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는 순간 부활된 영혼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죽으면 그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미 죽은 자들, 이미 잠든 자들, 즉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온 자들이 그와 함께 올 것이라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서 가르치신다. 그 다음에 무덤이 열리고 이미 죽은 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이다. 동시에 믿는 자 중에 죽지 않은 자들은 부활한 몸을 입을 것이다. 바로 이것에 이어서 무덤에서 부활한 자들은 죽지 않고 홀연히 새 몸을 입은 믿는 자들과 함께 주님과 영원히 거하기 위하여 공중으로 들림을 받을 것이다. 오직 구원 받지 못한 자들만 남아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모든 믿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부활된다
이제 우리는 이 육체의 부활에 대한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은 육체의 부활이 있을 시기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휴거는 육체의 부활과 거의 동시에 일어나므로 믿는 자의 몸의 부활이 언제인가를 알면 휴거의 시기가 언제임을 알게 된다.
요한복음 6장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raise it up)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raise him up) 하시니라"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raise him up)"
요한복음6장 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raise him up)"
마지막 날(the last day)이란 문구는 깊은 뜻이 있다. 성경 전체에서 이 문구가 모두 8번 발견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어를 선택하시는데 매우 신중하시며, 이 문구도 중요한 진리를 암시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다. 이 문구를 잠시 살펴보자. 우리가 읽어본 봐와 같이, "마지막 날"이 요한복음 6장에서 4번 씌어졌다. 다른 네번 쓰인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1장 24절: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2장 48절: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7장 37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느헤미야 8장 18절: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 팔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요한복음 11장 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르다가 요한복음 6장의 네 구절에서 말하는 진리를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믿는 자들의 부활은 마지막 날에 있다. 위에 있는 요한복음 12장 48절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이 곧 심판날임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지옥으로 보내시는 일이 그 다음에 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의 부활 역시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이며(요 6:40) 이것이 심판날과 같은 때에 일어날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마지막 날"이 씌어진 다른 두 구절을 공부하기 전에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자. 만약 심판날이 마지막 날이라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도 마지막 날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을 보면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리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이고 구원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의 부활이 동시에 마지막 날에 있어야 한다. 어느 상황에서라도 우리는 믿는 자의 부활과 믿지 않는 자의 부활이 서로 다른 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확실히 가르치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을 읽어보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에 순간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아무도 무덤 속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을 보면 믿는 자들이 호령하는 소리를 들으리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도 그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한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 구절이 천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분리된 두 부활을 가리킨다고 어떤 이들은 가르치지만 그럴 수가 없다. 한 시각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올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이 무덤에서 나온 자들이 다른 두 곳으로 갈라짐을 더 밝히 말하고 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들, 즉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올 것이다. 악한 일을 행한 자들 즉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의로 옷 입혀지지 않은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7절 말씀과 요한복음 5장 28-29절의 말씀을 비교해 가면서 마지막 날에 대하여 공부해 왔다. 그러므로 성경은 명백하게 휴거, 믿는 자들의 부활,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 그리고 심판날이 마지막 날, 즉 이 날은 세상이 끝나는 때이며 이 때 동시에 일어날 일임을 발견해 왔다. 이 모든 구절들이 완전히 맞아 들어가는 것은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덟개 가운데 여섯개의 마지막 날이란 문구가 들어 있는 성경 구절을 보았다. 나머지 두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7장 37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느헤미야 8장 18절:
"에스라는 첫 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 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 팔일에 규레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우리는 마지막 날의 문구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이 두 성경 구절도 공부하려고 한다.
명절날이 휴거와 관련됨
이 나머지 두 성경 구절은 모두 초막절과 관련된다. 실제로 둘 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이 휴거나 심판날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우리는 초막이 다루는 주제와 깊이 관계됨을 알아야 한다. 먼저 초막절의 성질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것은 두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이었다. 첫째로 그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추수를 끝마치는 때이었다. 레위기 23장 42-43절을 읽어보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성경 말씀은 초막절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 생활을 뒤돌아보는 명절이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현 세대의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도 광야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안식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외인이요 순례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된 몸을 받을 때는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살전 4:17).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이 명절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동일시되는지 알 수 있다. 그때에 우리는 부활된 몸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고 광야 생활도 끝이 나는 것이다.
초막절을 기념하는 두 번째 이유는 초막절이 추수를 끝내는 축제였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23장 16절을 읽어보자.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이것은 놀라운 구절이다. 왜냐 하면 수장절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초막절과 같으며, 마치 한 해의 마지막처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초막절은 일곱째 달에 지켜 왔다(레 23:39). 그런데 사실 일곱째 달은 연말로부터 멀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지막 또는 한 해가 지나가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이 명절이 마지막 때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 볼 때에 비로소 왜 하나님께서 이것을 연말로 말씀하고 계신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추수 때에 그가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마 13:30,39).
마태복음 13장 30절;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장 39절;
"---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초막절이 추수를 기념하는 축하잔치였고, 또한 그 해의 마지막 때이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끝을 추수 때와 비교하시는 것을 보아, 우리는 초막절과 세상의 마지막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마지막 날이란 말이 믿는 자의 부활, 심판 그리고 초막절과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아래와 같은 도표가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여 준다.
초막절 - 세상의 끝
해의 마지막 때 - 세상의 마지막 때
곡식을 추수하는 때 - 인류를 추수할 때
이스라엘 족속의 광야 생활의 마지막 - 믿는 자들의 광야 생활의 마지막
마지막 날(출 23:16) - 마지막 날(요 6:39-40, 12:48)
느헤미야 8장 18절과 요한복음 7장 37절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을 초막절과 연관시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초막절에 대한 공부를 마치기 전에, 초막절을 마지막 때 또는 세상의 마지막과 연결하는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출애굽기 23장 14-17절을 보면, 구약 시대에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번씩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Abib)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첫 번째 절기는 무교병의 절기로서 유월절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절기는 일월 십 사일 저녁에 시작하였고(레 23:5) 십 오일부터 7일간 계속되었다(레 23:6,신 16:1-3). 이 날은 이 세상의 죄를 사하여 줄 유월절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가 뿌려질 것을 상징하는 절기였다.
두 번째 절기는 맥추절, 첫 열매절 또는 칠칠절(Feast of Weeks)이다. 이 절기는 유월절 주간에 있는 안식일 다음날로부터 일곱 주간 동안을 지켜졌다(레 23:15-16, 신 16:9). 이 절기는 안식일 후 오십일간 지켜졌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시작한 영적인 추수를 상징하는 절기였다.
세 번째로 남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절기는 초막절이다. 이 날은 속죄일(Day of Atonement)로부터 시작한다. 속죄일은 칠월 십일이다. 이 초막절은 칠월 십 오일부터 팔일간 계속되었다(레 23:27, 34, 39). 이 절기는 우리가 공부한대로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구원 즉 영적인 추수를 완성하시는 것을 바라다보는 절기이다.
이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사실이 있다. 이러한 절기가 속죄 사역의 역사적 성취를 기대하고 가리키며, 이스라엘 나라가 그 절기를 지켰던 똑 같은 날에, 하나님께서 절기가 가리키는 영적인 실제 사건을 일어나게 하셨다. 서기 33년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유대인들의 오순절 날(구약의 첫 열매를 바치는 절기)에 성령이 임하였고 영혼의 추수가 시작되었다. 바로 그 날에 18개국으로부터 온 3천명이 구원 받음으로 추수의 첫 열매를 보였다(행 2:).
우리는 온 유대인 남자가 예루살렘에 가도록 특별히 강조된 세 명절 중 두 절기가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이루어지는 때였음을 보았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죽임을 당하시던 같은 날에 행하여졌었다. 유대인의 첫 열매를 바치는 절기도, 하나님의 성령을 부으시고 영적인 추수의 첫 열매를 보여 주신 같은 날인 오순절에 지켜졌다.
이제 하나의 절기가 남았다. 즉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다. 분명히 성경은 다른 두 중요한 절기에 문자 그대로 절기를 지키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절기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는 때에 재림하시리라고 암시한다. 우리는 그 날이 가을,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 온 초막절과 같은 날임을 믿을 수 있으며 그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초막절과 마지막 날을 연결시켜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초막절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과 동일시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부활과 심판날도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것과 동일시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경의 여덟 곳에서 씌어진 마지막 날이 모두 마지막 때를 가르침을 알았다. 그것은 지구 존재의 마지막이고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시는 때이다.
대환난과 휴거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공부한 독특한 네 개의 성경 구절을 통하여 휴거가 이 세상 존속의 마지막 때에 있어야함을 알았다. 모든 인간의 육체의 부활과 심판날은 함께 일어날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이제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자. 마태복음 24장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마지막 바로 직전에 일어나야 할 징조와 사건의 대략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4장 21-31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자.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 구절들을 살펴 본 바와 같이 휴거는 믿는 자들이 반드시 당할 대환난 바로 직후에 일어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마지막과 동시에 일어날 것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심판날과 같이 일어나야 한다. 21절과 22절에서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 반드시 일어날 대환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택한 자들을 위하여 이 날들이 감하여질 것이다. 이 대환난이 내포하는 뜻을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와야만 함을 안다. 성경의 어느 다른 구절에도 이 구절보다 더 쉽게 말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우리는 22절에서 말하고 있는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 하나님은 희랍어로 "eklektos"인 택함이란 단어를 신약에서 약 23번 사용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24장이 오직 이스라엘 국가만에 관계되고 이방인에게는 관계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이 "택함"이 오직 믿는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에 따른다면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제자들에게 국한된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 같은 논리로 요한복음 3장도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방인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논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직 유대인만 거듭날 수 있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는 로마의 교회에게 씌어진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도 이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 보내신 자들이므로 이방인에게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는 성경의 몇 책만이 신약 시대의 믿는 자들에게 적절하고 권위 있는 말씀이 된다.
우리는 즉시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잘못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성경은 모든 말씀이 교훈과 책망과 가르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딤후 3:16). 모든 성경은 연구되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마태복음 24장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 의해서도 읽혀지고 연구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3장도 성경의 어느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주의 깊게 읽혀지고, 연구되어야 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24장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전세계에 대하여 말씀하심을 알 수 있다. 13절에서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을 읽는다. 14절에서 하나님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말씀하신다. 28-31절에서는 그가 권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유대인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온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의 경고들도 온 세상에게 주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이나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에게 중요하다.
이제 다시 마태복음 24장 22절의 단어 "택함:elect"로 돌아가자, 우리는 King James 번역판에서 이 단어가 "택함" 또는 "뽑힘"으로 번역되었음을 발견한다. 희랍어 "eklektos"가 씌어진 23곳의 성경 구절을 살펴보면 이 단어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믿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씌어졌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for many are called, but few are chosen(많은 자를 부르셨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한국 성경에는 영문 부분의 번역이 빠져 있음)
요한계시록 17장 14절;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로마서 8장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골로새서 3장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디도서 1장 1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믿는 자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마태복음 24장 22절에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날들이 감해진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아 믿는 자들이 이 환난 기간에 존재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4장 22절만 보더라도 휴거가 이 환난 전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4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환난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관계를 포괄하는 매우 주의 깊은 연대를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4장 29-30절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있을 마지막 사건이 마태복음 24장 21-22절에서 말하고 있는 환난임을 매우 강조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환난 후 즉시라는 말은 대환난과 29-31절에서 말하는 사건들 사이에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뜻한다. 환난 즉시 일어날 일들을 주의 깊게 보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그 빛을 내지 않음을 본다. 이것은 시간의 마지막을 가리킨다. 해와 달이 시간의 흐름을 조절한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재림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마지막 날이다. 다음에 우리는 별들이 하늘로부터 떨어지기 시작함을 본다. 이것은 심판날의 징조이며 우주의 멸망이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6장 12-17절에서 이 사건을 더욱 확대시켜 말씀하신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것은 심판날을 설명하는 문맥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우주의 붕괴에 대하여 읽으면서 놀라지 않는다. 베드로후서 3장 10-13절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하나의 사실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것을 본다. 이 우주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파괴될 것이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 하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멸망되어야 한다. 바이러스 균, 지진, 태풍, 기근들은 인류가 하나님께 대항해왔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사람만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배하는 우주도 역시 저주를 받았다. 로마서 8장 20-22절을 보자.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영광의 아들들(믿는 자들)이 나타나기를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은, 그 때에 우주가 저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가게 된 직후에 이 땅의 멸망이 있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시 창조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별들이 하늘로부터 떨어지고, 하늘이 말려 떠나간다는 것을 읽으면서 놀라지 않는다. 마태복음 24장 29절에서 우리는 이 일이 환난 후 즉시 있을 것임을 알았다. 환난 후 그리스도께서 이 죄로 물든 세상에 자기의 보좌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오신다는 가르침은 불가능한 상황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환난 직후 우주가 붕괴되고 그리스도께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때에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4장 30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한다고 읽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6장 15-17절에 모든 사람들이 극심한 공포에 쌓여 산과 바위에게 자기들 위에 떨어져 자기들을 가리우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이 날은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이다. 그것은 바로 심판날이다. 심판대 앞에서 그들의 죄값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날이다. 이제 마태복음 24장 31절을 더 자세히 보자.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때 제일 먼저 하실 일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과 그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흡사한가 보라. 그것은 휴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사들을 큰 나팔소리와 함께 보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살아 남은 자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리라고 한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택함을 받은 자는 세상 곳곳에서 휴거 될 믿는 자들이다. "Under heaven"은 "Under the sky"로 번역될 수 있다. 어쨌든, 이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믿는 자들로서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
이렇게 하여 우리는 마태복음 24장 31절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사이에 천사의 활동,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나팔 소리, 믿는 자들의 휴거 등의 유사한 언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 마태복음 24장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믿는 자들의 휴거가 마지막 때에 있을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대환난 직후, 심판날과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휴거 시기에 대하여 이렇게 많은 증거를 주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지금까지 우리는 휴거가 이 세상 마지막에 있을 것임을 나타내는 다섯 가지의 매우 분명하고 독특한 구절들을 찾아보았다. 이제 성경에 있는 여섯 번째 기록을 알아보자.
불법의 사람과 휴거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우리는 휴거가 세상 끝에 있을 것을 가리키는 자료를 더 발견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오시기 전에, 두 사건이 꼭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첫째는 배도 하는 일이고, 둘째는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나타나며,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의 입 기운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다. 그 악한 자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9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누가 불법의 사람인가? 만일 우리가 그는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스도로 불리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사단임을 안다면, 우리는 완전히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그가 하나님이라 경배함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13장 4절에 경배함을 받는 사단, 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그러므로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불법의 사람이 경배 받는 다는 것은, 그가 불법의 사람으로서 사단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사단이 사람으로 불릴 수 있을까? 그는 타락한 천사가 아닌가? 우리는 그가 사람이었던 바벨론의 왕으로 상징되었기 때문에, 역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을 알 수 있다(사 14:4).
이사야 14장에서 우리는 사단 계명성(Lucifer)의 타락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 내용에서 우리는 루시퍼가 사단 그 자신이었음을 안다. 그러나 이사야 14장에서 루시퍼의 타락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은 이 사단을 사람처럼 말씀하신다.
이사야 14장 16절을 읽어보자.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요한계시록 18장이 가르치듯이, 바벨론은 성경에서 종종 사단의 왕국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즉시 그 공통점을 알 수 있다. 바벨론 나라는 바벨론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사단의 왕국은 사탄에 의하여 통치된다. 이 불법의 사람은 사단으로서, 성전에서 그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만물을 통치하신다(엡 1:20-22). 그렇게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지배하며 또는 권세를 갖는다는 성경적인 표현이다. 불법의 사람 사단은 성전에 앉아 성전을 지배한다.
성전과 휴거
성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자 그대로 성전의 재건이 있을 것인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미래에 있을 성전의 재건에 대하여 읽지 못한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성전의 장막이 찢어지므로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한 장소로서 중요시되던 시대는 끝이 났다. 오히려 성경은 믿는 자들이 성전인 것으로 말한다.
에베소서 2장 19-21절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베드로전서 2장 5절: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면서 믿는 자들이 성전인 것을 강조하신다.
성전은 교회이며 그것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임을 우리는 명백하게 본다. 여기에서 사단이 불법의 사람으로 활동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불법의 사람(사단)이 성전(믿는 자들의 공동체, 교회)에서 통치(앉아)하고, 하나님처럼 숭배함을 받는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영인 까닭에 믿는 자들의 무리 속에서 문자 그대로 통치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참 진리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선지자나 거짓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11장 13-14절에 이러한 종류의 활동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마태복음 24장 24절도 비슷하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이 구절은 사단의 철저한 속임수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가 가져오는 복음은 너무도 참 복음과 비슷하기 때문에 택하신 자들도 미혹 당하게 된다. 마태복음 24장 24절에 이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오는 것에 주목하라.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케 하기 위하여 참 복음과 아주 흡사한 거짓 복음을 가져 올 뿐만 아니라 그는 또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활력과 생동감을 줄 것이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오셔서 진리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 이적과 기사를 보이신 것처럼, 사단도 이적과 기사를 가지고 옴으로써 그의 복음이 하나님과 예수님께 관계되는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 1-9절도 역시 이적과 기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악한 자"라고 표현된 거짓 선지자들도 9절에서 가르치듯이 이적과 기사를 가지고 올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믿어져 왔다. 사단은 굉장한 속임수를 가진 자이며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11절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러한 자들의 눈을 멀게 하여, 거짓을 믿게 하신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사단의 종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참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교회가 이적과 기사의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는 일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선언하셨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참 선지자로 믿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사실상 사람들로 하여금 사단을 숭배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의 특징이다.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교인들과 교회는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자들에 의하여 침범되고 결국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거짓 복음의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 복음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그들이 표적과 기사에 촛점을 두기 때문이다.
죄의 결박과 휴거
데살로니가후서 2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7절을 읽어보자.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letteth)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letteth"는 영어의 고어로서 "restrain"(결박한다)이다. 위의 구절은 불법을 막는 자가 놓여진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불법을 막는 자가 성령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이 믿는 자들 가운데 거하시므로 그들은 이 구절이 교회의 휴거에 대하여 가르침이 틀림없다고 제안한다.
물론 불법을 막는 자가 하나님 그 자신을 가르치는 것은 맞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기근을 면하려고 그랄(Gerar) 땅으로 가기 위해 가나안을 떠났다. 거기에 있는 동안 그의 생명이 두려워 왕에게 자기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랄 왕은 사라를 그의 궁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이기 때문에 동침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랄 왕은 사라와 동침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경고에 응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창세기 20장 6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고 하셨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죄를 제어하시는 것을 보여 주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죄를 막고 계시는 것을 성경말씀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다고 한다(렘 17:9).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악한 생각, 살인과 간음들이 나온다고 한다(마 15:19). 단지 사람들이 제어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온당한 삶을 살 수 있고 부모 자녀간의 사랑, 친구간의 우정과 의리, 불우한 사람에 대한 동정 등, 어느 정도의 덕을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제어는 믿는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이신 하나님은 물론 믿는 자들 사이에 거하시지만 성령이 그들 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이 세상에서, 믿는 자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불법을 막는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불법을 막는 일을 옮기신다고 하는 것은, 믿는 자들이 휴거 될 것을 암시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믿는 자들이 스스로 막을 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도 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허락하기 위하여 죄를 막는 일에서 하나님의 손을 떼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 사실은 문맥을 통해서 나타난다. 왜냐 하면 이 구절에 하나님은 배도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장에 악한 자들이 점점 많아진다고 하며 요한계시록 20장에 사단이 놓였다고 하였다. 이 모든 구절이 한 가지 내용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매우 사악해지도록 허락하실 때가 올 것이다. 그는 죄를 제어하던 손을 구원 받지 못한 자들, 사단 그리고 사단의 추종자들로부터 떼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들은 예전보다 더욱 사악해질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절 말씀으로 돌아가자.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위에 설명된 불법의 사람이 먼저 나타나야 함을 본다. 하나님은 또 이 구절에서 그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면 예수님이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폐하실 것을 외치신다. 그것은 사단을 따르던 악한 자(구원 받지 못한 자들)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갈 것을 의미한다. 악한 자들이 영원한 멸망의 벌을 받는 곳은 지옥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믿는 자들을 모은다는 말씀에 주목하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믿는 자들을 한데 모으는 일이,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8절에 이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때에 주의 강림하심으로 그 악한 자들이 멸해질 것이라고(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 말씀하시므로, 즉시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함께 모이는 시기(휴거)와, 사단과 악한 자들이 멸망 받는 시기(심판날)가 같은 때임을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지금까지 공부해온 구절들에서 휴거는 심판날과 이 세상 마지막과 동시에 일어난다는 완전히 일치하는 가르침을 발견한다. 이제 휴거가 세상 끝에 있다는 진리를 강조하는 다른 구절 하나를 더 찾아보기로 하자.
밤의 도둑과 휴거
휴거의 시기에 대한 말씀을 연구할 때, 성경에 휴거가 마지막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때에 일어나리라는 아주 풍부한 자료를 이해하려고 한다. 성경에 있는 여섯 가지의 내용을 검토해 왔는데 각기 같은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이 문제를 떠나기 전에 한가지 사실을 더 찾아보아야 한다.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재림하실 때에 믿는 자들이 지상에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성경은 반복해서 그리스도의 강림이 도둑같이 또는 밤의 도둑같이 오리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43절에 그의 재림에 대한 기사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세상 마지막 때의 우주의 붕괴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 3장 3절에 우리는 경고를 읽는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러한 구절들에 근거하여 다양한 교리들이 나왔으며, 그 중에 일부는 그리스도께서 조용하게 오신다고 주장한다. 갑자기 그리고 조용히 크리스천들은 이 지상에서 옮겨지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밤의 도둑처럼 말하는데 비추어 볼 때 분명히 타당하게 여겨진다. 그것이 사실인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는 믿는 자들의 휴거에 대하여 말하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이 도둑처럼 조용히 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호령과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말씀하신다. 그것이 조용하게 오시는 거라고 할 수는 없다.
놀랍게도 성경은 성경 자체의 주석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칙을 따른다면 밤의 도적이란 문자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구가 쓰여진 성경의 자료들이 그리스도의 조용한 강림을 암시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휴거의 사건이 심판날의 때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을 읽어보자.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리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 할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밤의 도적과 마찬가지인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분명한 자료를 찾는다. 주의 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능과 큰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실 그날이다. 그날은 주님께서 만 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시는 날이다. 이 구절들에서 하나님은 그날이 밤에 도적같이 올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러면 그가 아무도 기대하고 있지 않을 때에 오실 것을 가르치시는가?
물론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것이 맞는 말이다. 3절을 다시 보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오실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재림을 전혀 기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진화론으로 눈이 어두워져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을 이 세상에서 찾으리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답은 인류가 이 지상에서 백만 년이나 혹은 오래 동안 존속할 것이라는 심중한 확신을 줄지도 모른다. 심판날에 대하여서도 그 날이 실제로 있다고 믿더라도 아마 백만 년 뒤에 있으리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지어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썩어질 향락을 따르는데 평안하고 확고한 집념을 가지고있다.
만약 어떤 사람들 가운데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면, 그들도 역시 심판날이 실질적이 아님을 믿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 지구와, 또 여기서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최고의 사랑을 확신할 놀라운 계획이 있으시다고 생각한다. 매우 성경적이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무지하고 또 거짓 복음의 가르침은, 이 지구상에 아직도 이상적인 나라가 세워질 희망이 있는 것으로 믿는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자들과 동일하게, 모든 것이 안전하게 느껴질 것이다.
따라서 구원 받지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머지않아 심판 주로 오실 것이다. 사실상 그의 강림은 매우 무섭고 놀랄만한 일일 것이다. 왜냐 하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심판대 앞에서야 함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모든 일이 잘 된다고 생각했었겠지만 그들은 사실상 성경에 기록된 구원이 아닌 스스로가 좋아하는 식의 구원을 따르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순간적으로 그들의 진리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긴 일이 없었음을 인식할 것이다.
그들은 편리할 때만 성경 말씀을 순종해 왔다.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자로 믿은 적이 없다. 그들은 오히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들의 노력한 훌륭한 행동이 합해짐으로 온다는 것을 추구해 왔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평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해 왔으나, 그것은 거짓된 화평과 거짓된 안도감이었다. 주의 강림 때에 그들은 전혀 위로부터 나지 않았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강림은 밤의 도적 같을 것이다. 주의 강림이 밤의 도적 같이 있게 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라. 갑작스러운 파멸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고 아무 곳으로도 도망할 곳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심판날의 어조이다. 노아의 때에 무슨 일이 사람들에게 일어났는가 기억하라. 갑자기 그들은 침수되었고 멸망되었다. 소돔을 기억하라. 그곳 역시 갑작스런 파멸을 당하였다. 예수님이 심판날에 대하여 마태복음 7장 13절에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태복음 24장 37절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해 보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하였다.
얼마나 두려운 순간인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장소인가! 우리는 요한계시록 6장 16절에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리워 달라고 바위와 산을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겪지 못한 충격이 심판날의 완전한 공포가 될 것이다. 성경은 이 중대한 사건과 관련된 또 다른 소식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계속 말씀하신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밤의 도적 같이 오지 않을 것을 알려준다. 이들은 진정한 믿는 자들이다.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준비된 자들이다. 이들은 흑암의 왕국의 지배하에 있지 않는 자들이다(예수님은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에게 속한 자들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4-5절을 읽어보자.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우리는 위의 구절에서 주님의 날이 믿는 자들에게 도적 같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준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미리 휴거 될 수가 없다. 우리는 심판날은 세상의 종말에 있고, 그 날이 믿는 자들이 휴거 될 때임을 안다. 믿는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심판 받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에도 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이 구절에 있는 노하심은 대환난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대환난으로 생각한다. 휴거가 심판날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자들도 대환난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이 믿지 않는 자들이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노하심은 아니다. 하나님의 노하심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그들의 죄의 결과로 당해야 하는 영원한 형벌을 말한다. 참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서 그들의 죄를 다 씻어 주셨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당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6장 15-17절에 하나님의 노하심에 대하여 적절하게 말하고 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구원 받은 자들은 진노의 면함을 받고 자유롭게 된 것이다. 그렇게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자.
요약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7절로부터 휴거가 믿는 자들의 부활과 동시에 일어남을 알았다. 요한복음 6장에서 믿는 자들의 부활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임을 보았다. 요한복음 12장에서도 또 마지막 날이 초막절과 연관되며,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마지막 날이 심판날임을 배웠다. 더 나아가서 요한복음 5장 28-29절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부활인, 일반적인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요한복음 6장의 가르침과 믿는 자들의 부활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다른 구절들을 통하여 볼 때, 휴거, 심판날, 그리고 종말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휴거와 심판날이 동시에 있을 것임을 안다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은 아무 문제없이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밤의 도적 같이 오셔서 심판을 내리실 때 믿는 자들은 주님의 강림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는 밤의 도적 같이 오시지 않는다. 그 때가 그들에게는 구원이 완성되는 놀라운 순간이요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하여 휴거 되는 때이다.
우리는 휴거에 대하여 알려 주는 성경에 기록된 일곱 가지 경로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모든 경로가 믿는 자들의 휴거가 심판날과 동시에 일어남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에 대하여 풍부한 증거를 주셨다. 이러한 진리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다른 가르침들도 이 성서적 진리에 근거하여 연구되어야 한다. 사실은 우리가 성경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진리를 찾고 연구할 때 성경은 끊임없는 합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는 성경은 그 진리 안에서 완전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연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개하는 것이라는 현저한 증거를 발견해왔다. 이렇게 하여 휴거로써 이 지상의 구원 계획은 완결될 것이다. 역사도 종결되고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다. 우리가 모두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있는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자로 믿는가? 우리의 죄로부터 돌아서서 진실로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의 재림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심판을 받을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이다. 우리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자. 왜냐 하면 아직 구원의 때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아직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계속하여 연구하자.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교회 마지막 때의 배도 하는 일로 인하여 교회에 내리실 심판에 대하여 주의 깊게 연구하여야 한다. 교회에 대한 이 심판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 때에 올 것이며 대환난으로 불린다. 다음 장에서 이 환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1 천년왕국(I)
요한계시록 20장, 천년왕국(千年王國)
세 가지의 천년왕국: 아마도 성경학자들이 성경 중에 요한계시록 20장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또 이 한 장에 기록된 내용을 확장하여 책으로 엮어 내는 유명한 얘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년왕국의 얘기입니다. 학자들의 의견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으며, 전(前)천년설, 후(後)천년설, 그리고 무(無)천년설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설이 나오게 된 이유는 요한계시록 20장에 그리스도께서 "1000년 동안 왕노릇하시리라"는 기록이 여섯 번이나 나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설(說)의 차이를 말하면, 전천년설은 교회의 휴거가 있은 후 마지막 환난이 오며, 곧 이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황금시대, 천년왕국이 올 것이라는 학설이며, 후천년설은 그와 같은 황금시대, 천년왕국이 온 후에 마지막 환난과 교회의 휴거가 있을 것이라는 학설입니다. 반면에 무천년설은 이상 두 학설에서 주장하는 지상의 황금시대는 없을 것이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천년왕국은 영적인 상징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천년이 실제적인 천년이 아니라 때가 완전히 찼다든가, 오랫동안이라는 뜻이라고 믿는 학설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런 학설을 믿을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만 믿으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천년왕국을 말하며, 칠년(七年) 대환난(大患亂)을 말하고 있으니 그러한 분들은 교회에서 듣는 설교가 다 성경말씀에서 오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상 어떠한 방법으로 통계를 해 보더라도 전천년설을 믿는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기독교 서점에 가서 소위 종말론(終末論)에 대한 책을 열람(閱覽)하면 태반이 전천년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후천년설을 믿는 교역자 몇 명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소의 극(極) 보수파(保守派) 개혁주의(改革主義) 교역자들이며, 그리스도의 계획과 성령의 역사로 이 지상에 평화를 누릴 천년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믿음은 세계의 단일정부를 기대하는 동시에, 그 단일정부 정치인들이 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합니다.
무천년설은, 지상의 천년왕국을 부인하며, 특히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기록이 상징적임을 믿으며, 숫자 1000도 상징적인 숫자임을 믿습니다. 굳이 학설을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말해야 한다면, 무천년설이 성경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라고 저는 믿고, 주장합니다.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학설에서 오지 않는 것을 저는 믿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 옳으냐 하는 결론은, 기도 중에 요한계시록 20장의 말씀을 다른 성경말씀과 비교하여 그 뜻을 찾는 공부를 하고자 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전천년설: 이렇게 흔한 전천년설의 천년왕국을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 보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이전에 교회가 구름 위로 휴거를 당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으로 이루어지며, 세상의 종말에는 예수님의 세번째 강림(降臨)을 기다리게 됩니다. 교회가 휴거된 후 7년 대환난이 시작되며, 휴거를 당한 진짜 교인들은 7년 대환난을 공중에서 예수님과 함께 피하게 됩니다. 이 환난이 지난 직후 1000년 왕국이 시작되며, 그 때에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을 짓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신다는 학설입니다. 이 천년왕국에서는 예수님께서 권위와 철장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천년동안 만국은 평화를 누릴 것이며, 이사야서 11장에서 읽는 사자(獅子)가 풀을 먹으며, 염소와 사자가 함께 살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만물을 평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천년이 지나는 마지막날이 천지가 개벽되는 세상의 마지막이며, 이 때에 예수님께서 세번째 오시여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15절밖에 안되는 요한계시록 20장이 장편소설처럼 얘기가 엮어져 흘러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텍사스(Texas)에 있는 달라스(Dallas) 신학교(神學校)는 이 전천년설 천년왕국을 가르치는 고장이 되었습니다. 그 학교 학사과정을 겪은 한 교역자의 말에 의하면, 전천년설을 믿지 않고서는 석사와 박사 과정을 끝마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학자들의 다른 이름은 세대주의(世代主義)자들이며,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시대에 따라 그 방법이 다르다고 가르칩니다.
천년왕국을 가르치는 신학교의 수(數)를 통계적으로 본적이 없습니다마는, 출판되는 천년왕국에 대한 책들이 그 수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심리는 절대 다수에 귀를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누구든 유명해지면 모두가 쳐다 보게 마련입니다. 카톨릭 교리가 그 잘못을 시정할 수 없는 이유는 유명한 교황이 신으로 군림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유명해질 수가 없고, 숨어 있습니다. 특히 말세에 진리를 찾기가 힘든 것을 성경말씀이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미한 소리(a still small voice):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여러분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 같은 "세미한 소리"를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1-14)
위의 구절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왕후 이세벨에 쫓겨 광야에서 숨어 있을 때 여호와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종말을 당한 교회가 겪는 현상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순종할 때 우리는 엘리야와 같이 되는 것이며, 교회는 우리를 천대할 것이며, 회중에서 출회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엘리야와 같은 고독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000인을 남기리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됩니다.
이 구절에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더 큰 교훈이 있습니다. 세상 종말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음성이 강한 바람 가운데나, 지진 가운데나 혹 불꽃 가운데 있지 않고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입니다. 강한 바람 같고, 불꽃 같은 교회 행사나 설교를 원하십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것을 암시하십니다.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암시하십니다. 이 엘리야에 대한 얘기는 수많은 군중이 모이는 집회를 조심할 것이며, 베스트 셀러가 된 유명한 책들이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는데 양식이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유명한 인사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유명한 인사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미한 소리"를 찾는 우리에게 유명인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몇 개월에 걸쳐 요한계시록 20장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듣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deceive)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우리는 우선 사단을 잡는 일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찾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을 잡아 묶는 이유인 "다시는 만국을 미혹(deceive)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거기에 따라 오는 여러 가지 의문이 풀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질문은 누가 사단을 쇠사슬로 묶을 수 있으며, 언제 묶을 것이며, 얼마 동안 묶어 둘 것이며, 또 잠간 동안 놓아 주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인간의 지성(知性)에서만 오는 교리로써 이루어질 때, 그 바른 답을 얻을 수 없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를 다스리시며, 또한 만국을 다스리시는 것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사역(使役)을 다른 각도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며, 지난번 요한계시록 12-14장에서 배우지 못한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잘못된 번역, "천사": 1절에는 "사자(使者)"가 "천사(天使)"로 잘못 번역된 것을 우리는 다시 발견합니다. 무저갱을 열고 닫는 권세가 그리스도 외에는 없으며, 사단을 결박할 권능이 또한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 것을 우리는 이미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닥이 없는 "무저갱"은 지옥의 상징임을 요한계시록 11장에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바닥이 없다 함은 나올 길이 없음을 말하며, 사단의 종말을 가르치는 한가지 상징입니다. 또한 사단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에 대하여 2중 3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쇠사슬로 결박"하는 것이며, "열쇠로 잠그는"것이며, 또한 "인봉(印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사단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 창조된 인간에게 있습니다. 사단을 따르는 인간의 말로가 그 사단과 같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거듭 가르칩니다.
쇠사슬: "사단이 쇠사슬에 묶여 무저갱에 갇힌 것이 언제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 바른 해답을 찾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세상을 휩쓸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거기에 귀를 소곳하게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에 잘 알려진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전도자 착크 스윈돌(Chuck Swindoll)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분의 설교야말로 미국의 모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애청하는 훌륭한 설교입니다. 수십년 전 언젠가는 이분의 설교 테이프(tape)를 사서 결혼기념으로 아내에게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의 설교집도 여러 권 사서 읽은 적이 있으며, 1992년 저희들이 교회를 찾을 때 이 목사가 속해 있는 교파, (Manassas)에 있는 Evangelical Free교회를 여러 번 방문하면서 행여나 그 교파의 교인이 되어 볼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교회가 여러 가지 자유의지를 가르치며, 젊은 아이들이 모여 세상 음악을 예배 전에 연기하는데 못 마땅하여 발을 끊었습니다.
달라스(Dallas) 신학대학: 스윈돌의 설교집은 아마도 20세기에 가장 현저한 베스트 셀러일 것이며, 그 책을 팔아 번 돈은 수천만불에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 유명한 분이 달라스 신학대학의 총장으로 있다고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분은 천년왕국을 가르치는 교역자입니다. 달라스 신학대학은 세대주의의 고장이며, 그 신학의 역대 총장으로는 그 유명한 스코필드(Scofield)학습 성경의 저자이며 달라스 신학대학 창설자인 스코필드와 월보오드(Walvoord)가 총장으로 역임한 일이 있어, 명실공히 세상 종말에 있을 아마겟돈 전쟁의 가장 큰 보루(堡壘)가 되었다고 믿어집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속이는 전쟁입니다. 사단의 가장 잘 속이는 전략으로 자유의지를 가르치고, 천년왕국을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독약: 속이는 일을 생각해봅니다. 빨간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마도 속이지 못할 거짓말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런가하면 한국은 위조물을 가장 잘 만들어 파는 시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가짜 상품에 속는 사람이 있고, 속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속지 않는 사람의 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신앙으로 속지 않는 영적인 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사기꾼에게 속아 금반지를 잃은 얘기를 여러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기꾼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좀 원통할 따름이며, 그 금반지를 대처하면 그것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속는다면 그것은 독약(毒藥)을 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이미 늦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는 "천년왕국을 믿는 것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따라 다른 것 뿐 아니냐?" 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속이는 일은 작고 큰 일로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우리의 영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 양식이 되지 못하는 가르침은 다 독약이 됩니다(막 16:18).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속이는 사람입니다. 금반지를 얻기 위해 사기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기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속이는 사람은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년왕국을 가르치는 스윈돌 목사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기하는 사람이요"라고 한다면 펄 적 뛰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단의 결박: 사단을 천년 동안 결박한다는 것은 "은혜의 시대"가 존재한다는 뜻이며, 이 시대에 복음이 전파되며, 수많은 택하신 백성이 복음을 듣고 거듭나는 때임을 가르칩니다. 영(靈)인 사단을 어떻게 육신적인 방법의 쇠사슬로 묶겠습니까? 그 행동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사나운 짐승을 쇠사슬로 묶어 나무기둥에 매어 둔다면 그 나무기둥 주변에서는 짐승이 아직도 사나운 행동을 할 수 있지만 그 기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해하지는 못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단의 지배하에서 그 나무기둥 가까이 살다가 자유함을 얻는 역사(歷史)가, 바로 은혜의 시대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데살로니가후서 2장 6-7절이 잘 설명합니다.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저"라고 한 것은 "사단"이며, "지금 막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로 사단의 역사를 억제하심을 가르칩니다. "옮길 때까지"는 1000년이 차서 사단을 잠깐 동안 놓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을 이 구절은 가르칩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사단의 지배하에서 자유함을 얻는 사실을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상의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억제하시고, 제한하시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궁금해집니다. 사단의 구속은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이 십자가야말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때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 사역이 우리의 육신적인 부요(富饒)함이나 성공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믿음으로 역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한편 사단의 딴 이름은 아바돈(Abaddon)이며, 그 뜻은 파괴자입니다(계 9:11). 물론 파괴의 뜻이 인간의 악이 성하여 서로 전쟁함으로 파괴됨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에 앞서 더 중요한 뜻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격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는 과정은 파괴된 진리를 되찾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8:32). 사단의 파괴하는 힘은 강합니다. 그것은 세상 몇 십억이 되는 인구가 거의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사역이며, 또한 말세에 기독교인들을 다 거짓복음에 속게 하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그러나 더 큰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의 능력이며, 그 능력은 많은 인간 중에서 여러분과 같이 몇 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롬 1:16).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十字架)의 도"(고전 1:18)라고 하였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멸망을 받을 자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며, 사단이 지금도 거의 모든 인간들을 다스리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사단은 이 십자가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귀신, 군대(軍隊)를 명하여 2000마리의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을 때에, 귀신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고(눅 8:31) 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을 때의 얘기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했을 때,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마 12:29)라고 하심으로 사단이 무저갱에 갇힌 것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 복음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률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골 2:14)함으로써, 우리를 사단의 통치에서 해방하시기 위하여 사단을 결박한 것을 가르칩니다.
사단의 무장, 거짓: 사단의 결박은 사단이 우리를 통치할 권리(의문)가 없어진 것이며, 또한 무조건 무장해제(武裝解除) 당했음을 가르칩니다. 사단의 무장은 "거짓"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12절은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분명한 이해를 주십니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께서는 다 그리스도의 용사들로서, 의의 흉배(胸背),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防牌), 구원의 투구, 그리고 말씀의 검을 가진 용사들입니다(엡 6:14-17). 이 용사들은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군병이 된 우리의 유일한 사명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참 복음이 전해질 때 사단이 결박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용사의 사명을 "권능을 받고"라고 사도행전 1장 8절은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이 사단이 잠깐 동안 놓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종말 직전에 있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단의 속임수를 말하며, 세상이 가르치는 기독교 교리가 거의 예외 없이 거짓임을 또한 가르칩니다.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사단의 전략이 속이는데 있기 때문에 지상(地上)에 중심을 두고 있는 사회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의 능력만을 찬양하며, 그것에 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최고 전략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거두시는 복음사업을 방해하는 것에 촛점을 두고 있음을 요한계시록 20장은 가르칩니다.
천년이 차도록: 한국말에 "천년만년 살고지고"라는 노래가 있으며, 이것은 "한번 영원히 살아 보았으면" 하는 인간의 소원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출 20:6) 하신 말씀이나,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시 105:8) 등은 숫자 그대로의 1000년이 아니라, "영원히"라든가 "모든 세대"라는 뜻이 있음을 문장을 읽음으로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의 1000년도 숫자 그대로의 1000년이 될 수가 없음을 4절이 설명하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해가 다 지나간 후에"라는 뜻이 됩니다.
또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1000)년 같고 천(1000)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어떤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가 수 백만년이 된 것을 설명한다고 주장합니다마는, 말씀의 참 뜻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인내로 기다리심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루라도 속히 대적, 사단을 멸하시고 싶지만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신 때를 기다려야 하시며,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인간이 구원 받는 것을 인내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신랑(新郞)이 되시고 택하신 백성이 신부(新婦)가 되어 영원히 사는 창조의 목적을 생각하신다면, 2000년이라는 기간은 참으로 짧은 기간인 것으로, 천년이 하루 같이 속히 오실 것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계 22:20)
사람들은 아직도 1000년 동안 지상에 황금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0장 1-3절의 참 뜻은 "그리스도께서 계획하신대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신 사역은 사단에게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선고(宣告)하신 것이며, 택하심을 입은 모든 인간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 예수님의 시대가 다 지나가고, 사단은 마지막 환난 때에 이전에 없던 거짓말로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거짓말은 인간의 지혜로는 상상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사단의 속임수를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deceive)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택하신 백성은 속지 않습니다.
2-2. 천년왕국(II)
요한계시록 20장 4절: "또 내가 보좌(寶座)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아버지의 보좌: 이 구절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두고 지상에 천년왕국을 이룬다는 바로 그 교리의 근본이 되며, 또한 천년왕국의 교리가 사용하는 유일한 성경 구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천년 동안 왕노릇" 하실 것을 이 구절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천년왕국의 수도를 찾아 보면, 그 곳은 바로 아버지의 보좌가 있는 곳이며, 이 보좌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3장 21절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 구절은 아버지의 보좌, 그리스도의 보좌, 그리고 승리한 믿는 자들의 보좌가 다 한 곳에 있으며, 그 보좌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이 보좌에 대하여 더 상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 1절에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고 하심으로 요한계시록 4장의 기록이 다 장래의 일 즉, 말세 후에 일어날 사건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을 계속하여 읽어 나가면 이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되며, 이 보좌야말로 예수님께서 지상에 처음 오실 때에 잠시동안 떠나야 했던 보좌이며,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다시 돌아가신 보좌이며, 구원 받은 자들이 죽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천국에서 앉게 될 바로 그 보좌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9-11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大主宰)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伸寃)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죽임을 당한 영혼들: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 20장 4절을 읽고 생기는 의문들을 많이 풀어 줍니다.
첫째로 이 장면이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장면과 일치하며,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이라는 점입니다.
둘째로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는 "천년이 다 차기까지"의 뜻임을 알게 됩니다. 이 구절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설명합니다.
셋째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라고 하심으로 이 보좌가 지상이 아니며 천상임을 분명히 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좌에 대한 기록이 37번이 나옵니다마는 이 보좌가 지상에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구절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라고 하심으로 지상에서의 임무가 완성되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로 물든 이 세상에 다시 오시어 왕노릇 할 것이라는 신앙은 우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이룩하신 사역을 알지 못한다는 고백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서도 발견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 10:12-13)
지금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사가 "영원한 제사"가 된 것은 그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었음을 가르치며, 그 구원 계획이 지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저주 받은 지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발등상이 되게 하실) 일 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또한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한 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승리 하셨음을 거듭 가르칩니다(요 16:33, 마 26:53, 골 2:14-15, 히 2:14, 요일 3:8, 히 12:22-24).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다스리신다는 또 다른 뜻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가르치며(엡 5:23),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6:15). 머리인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몸이 된 우리도 이미 승리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애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승리를 가져 오기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십니다(엡 5:27, 계 19:7-8).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누차에 걸쳐 자기가 왕으로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마는(마 2:2, 마 27:11, 눅 23:3, 요 1:49),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또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 유대인(믿는 자들의)의 왕으로 오신 것을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으로 군림하셨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리심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지금 내가 섬기는 왕이 없기 때문에 천년왕국이 세상에 올 때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겨 보겠다는 신앙은 성경적인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는 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1000년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상징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이 천년동안 세상에 살다 죽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갈 것을 배우게 됩니다마는, "보좌에 앉은 자들",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자들"이 무슨 뜻인지를 질문하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0-12절이 이 말씀의 주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왕이 된 그리스도인들: 위의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시인하는(거듭나는) 순간 왕으로 출생(出生)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왕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이 된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다는 뜻인데 우리가 갖는 권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요한계시록 4장에는 24 장로들이 보좌에 앉아 있고 또 황금으로 된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는 광경이 있습니다. 이들 24 장로들이 구약과 신약 시대에 구원 받은 모든 믿는 자들을 상징한다면 이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무엇인지는 참으로 궁금해집니다. 시기를 보면 24 장로들이 왕노룻 하는 것은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한가지 우리가 얻는 해답은 24 장로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점입니다. 함께라는 뜻은 같은 때를 말하는 동시에 또 권력도 우리에게 주심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권력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권력일 뿐 아니라, 죄를 멸하시는 권력이며, 사단으로 하여금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천지인 천국에서 우리가 왕노릇하는 것은,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아담에게 주신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마는, 지금 우리가 왕이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골 2:14). 왕국에서 왕을 상소할 법이 없는 것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단은 정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우리를 흑암(黑暗)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하셨으며, 요한일서 5장 4절에는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고 하신 말씀들이 우리를 죄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음을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10절이 위의 사실을 더 잘 설명합니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kings)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이 구절은 24 장로들이 천국에서 그리스도께 지상에 남아 있는 믿는 자들을 위하여 탄원하는 그 때에(우리에게는 현재임) 부르는 새 노래라고 하셨습니다. 24 장로들이 지상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왕과 제사장으로" 부르지 않았습니까? 이 구절에서 누구를 지적하여 "왕과 제사장"으로 불렀겠습니까? 어떠한 특수한 사람들을 가리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여 우리가 이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년왕국의 뜻: 요한계시록 5장에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대로 진행하심을 가르치는 동시에, 또한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역사만으로 이루어짐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왕국을 설립하시는 광경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이것이 바로 천년왕국이 진행되는 광경입니다. 이 구절에서 유의할 점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무제한의 권세입니다. 그리고 그 무제한의 권세를 여러분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얘기입니다마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은 자연히 믿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이 기쁜 소식은 사단이 더 이상 우리의 생을 주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4-15)
여러분께서 사단으로부터 놓인 자들입니까? 육신의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죽는 날이 가장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침내 뵈올 수 있는 날이 아닙니까? 이렇게 큰 자유를 얻은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어려움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간증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라고 했습니다. 이 간증이야말로 모든 거듭난 자들의 간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도 사단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지"(벧전 5:8) 않는가? 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그것을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그들이 삼킬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의 양을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0:27-30).
우리의 생명에 대한 더 큰 보장을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감사의 말씀을 다 올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살리신" 것이 언제입니까? 천년왕국이 와서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다 알 수 없으나 이 구절은 우리가 받는 구원의 일면(一面)을 깨닫게 하십니다. 저는 어떤 대국(大國)이 군사들로 첩첩히 수비가 되어 있는 궁전(宮殿)을 상상합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있는 궁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비하는 군사가 필요 없는 곳이 아닙니까? 사단과 그의 군졸(軍卒)들을 영원히 땅에 내어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은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좌(寶座)에 앉히셨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있을 얘기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지금 그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눈 아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35절에 고백한 신앙이 바로 그러한 설명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困苦)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하루에 백번이라도 외치고 싶은 우리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오!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 창조주께서 자기의 양을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
영원한 승리: 이러한 능력의 주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이라는 가증한 생각이 우습기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이것이 내가 무엇을 한 결과 얻은 것이라면, 마치 축구경기에서 얻은 우승기를 다음 경기에서 이긴 선수들이 내 승리를 빼앗아 갈 수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시고, 그 증거로 우리 이마에 "인 치심"(seal)을 하셨습니다(엡 1:13, 계 7:4). 이것은 창조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절대 보장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1-32)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天上) 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린다는 영적인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행사하는 권력은 사단이 우리가 천국생활을 하는데 어떠한 방해도 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완전한 조처(措處)를 하신 것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처지에서 견디며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증거이며, 우리가 사단을 다스리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내용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있는 자들은 지금까지 세상에 살다 죽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은 우리의 영(靈)도 그 보좌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역사상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20장 4절과 일치되는 광경을 요한계시록 6장 10-11절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우리 피를 신원(伸寃)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대답하신 것을 주석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목 베임을 받은 자: 요한계시록 20장 4절로 돌아와 그 구절을 다시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공부하는 성경의 본문(本文)을 천천히 읽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찾는 것입니다. 지상의 천년왕국을 믿는 자들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이 구절을 천천히 읽어 보았던들 지상의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중요한 구절은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죽임을 당하면 몸은 땅에 묻혀 흙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본 "보좌"는 땅에 있을 수 없는 것을 본문 자체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설명합니다. 그 보좌는 영혼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영(靈)인 사단들이 지상에서 일을 하기 위하여 사람들 마음에 들어와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의 사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소망은 사단의 소망입니다. 천년이라는 긴 동안 지상에서 아기자기하게 살아보자는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목 베임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 성경 구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성경구절을 찾아보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은 특수한 순교자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지적합니다.
몇년 전 캠핑씨와 그 유명한 천년왕국의 권위자 월보드(Walvoord)박사 가 "전(前)천년설이 성경적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천년설이 성경적이냐?" 하는 토론에서 월보드 박사의 진술을 기억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집단으로 순교를 당할 것이며, 그때부터 1000년 동안을 그리스도와 함께 태평(太平) 왕국에서 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긍정이 가지 않는 소설 같은 얘기지만, 수많은 교회가 이것을 가르치고 또 믿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1000년은 완성된 때를 가르치는 상징적 숫자임을, "목 베임을 당한 자"를 생각해 봄으로써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서기 2000년에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가정을 해 본다면, 순교 당하는 사건이 전부 서기 1000년에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렇다면, 제 일세기(一世紀)에, 로마 제국의 폭군(暴君) 네로(Nero)왕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국을 누리지 못한다는 얘기이며, 그후 역사상에 일어난 순교자들이 한 때에 죽은 것이 아니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누릴 기회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이 어느 때에 순교를 당했던간에, 그리스도께서 계획하신 그 구원 계획이 완성되어 재림하시는 그 때가 순교자들에게는 1000년이 차게 되는 때입니다.
순교자가 누구냐? 하는데 대한 공부는 요한계시록 13장을 공부할 때 찾아 본 일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5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이 구절은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요한계시록 20장 4절과 일치된 내용입니다. 이 구절에서 사단에게 속하지 않은 자는 "다"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음을 가르칩니다. 사단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여러분은 사단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짐승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 "목 베임을 받은 자"가 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지적하는 것임을 우리는 쉽게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은 여러분, 여러분에게 핍박(逼迫)이 있습니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에 여러분의 보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눈물겨운 일이 있습니까? 즐거워 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씻어 주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왕위를 내리시기 위하여 금면류관(冕旒冠)을 예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 8:36).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종일토록 노력하는 여러분의 간증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큰 소망을 세상에서 그렇게도 못생긴 나에게 어찌하여 주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다 알 수 있으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이 기쁨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사도 바울의 심정,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오늘의 공부를 마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2-3. 천년왕국(III)
요한계시록 20장 5-6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復活)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현재 세상 인구가 약 60억이며, 그 인구 중 매일같이 20만 정도의 사람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 죽는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며, 한 종류의 사람들은 지난달에 공부한바,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서 읽은 것 같이 죽어 그 영혼이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에 종노릇한 사람들이며 죽은 후 천년이 차도록 살아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115편 17-18절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18절은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을 설명하며, 17절은 요한계시록 20장 5절의 괄호한 부분을 설명하는 주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적막한 곳에서 그들의 심판을 기다리게 됨을 가르칩니다. 다른 한편 구원 받은 영혼들은 구원을 받는 순간부터 영원토록 여호와를 찬양하며 살게 됩니다.
첫번째 부활: 오늘은 부활에 대하여 공부를 하게 됩니다. 구원 받은 자들을, 요한계시록 20장 6절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라고 했습니다. "첫째 부활"이라고 말한 것은 "둘째 부활"이 있음을 가리키며, 그와 같이 사망도 첫째와 둘째 사망이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을 믿는 사람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또 한가지는 바로 이 부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공부하기 전에 이 사람들의 다섯 가지 성품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이들은 축복 받은 자들입니다. 이 축복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나 교회가 정의하는 물질이나 건강의 축복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축복입니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矜恤)이 여기는 자, 마음이 정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10).
둘째, 이들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로마서 11장 16절은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가 그리스도이심을 우리는 알며(고전 15:23), 이 구절에는 그리스도를 뿌리로 상징하셨고 그에게 속한 자들이 가지임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다 거룩한 자들입니다.
셋째, 이들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자들이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둘째 사망은 인간의 영과 육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 일입니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믿는 자들을 가리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벧전 2:9)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懇求)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칩니다.
다섯째,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롯 하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4-6절을 다시 읽어 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만국을 다스리시게 된 것을 배웠고, 우리도 그와 함께 왕이 되는 것을 지난달에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바 택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품이 "첫째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첫째 부활은 우리 육신의 부활이 아닙니다. 지상에 천년 왕국이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 첫째 부활이 육신의 부활임을 믿고, 심지어, 역사상에 살던 선지자들도 살아나 천년왕국에 참여할 것이라는 답답한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첫째 부활"이 우리 영혼의 부활임을 가르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있고, 둘째 사망(계 20:14)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지 못한 모든 인간은 육신의 죽는 첫째 사망이 있고, 영원히 지옥에 가는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첫째 부활이 없고,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기 위하여 무덤에서 살아나는 부활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부활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었음을 가르치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우리가 받을 영원한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셨음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의 육신의 죽은 고통이 우리의 속죄를 가르친다고 합니다마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신 고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살아 있는 동안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다 받으신 것을 가르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揮帳)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 23:45)고 하신 것도 그리스도의 인간 속죄사역이 완료되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문은 "왜 예수님께서 죽어 무덤에 묻혀야 했고, 부활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구원을 증명하셨고, 성경의 모든 약속을 이루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결론 짓고 기록으로 남기시는 일이 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하신 말씀을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땅 속에"가 잘못 번역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구절의 사본을 "in the heart of the earth: 세상 깊숙이"로 번역할 수 있으며, 결코 무덤에 들어가신 것을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신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밤낮 사흘"은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 됩니다.
첫째 부활의 경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첫째 부활을 경험하는가를 공부하겠습니다. 이 첫째 부활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라고 하신 말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첫째 부활이 바로 거듭나는 순간임을 알게 됩니다. 구원 받은 우리의 영혼이 출생한다는 것을, 우리의 죽은 영혼이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골 3:1)이라고 하셨고, 에베소서 2장 5절에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임을 지난달에 배운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4-25)
이 구절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첫째 부활"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신 것이며, 그 때가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때라고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는 자"는 거듭난 자이며, 예수님께서 거듭 거듭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거듭난 자만이 내 말을 알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대로 믿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25절에서 우리가 특히 유의할 구절은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택하신 백성들의 첫째 부활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나는 순간임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은 우리의 영혼이 부활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행하므로 오는 것이 아니며, 죽은 영이 살아난 후 비로소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됨을 배우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둘째 부활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27절에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여 우리를 영원히 천국으로 옮겨가는 때 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둘째 부활을 경험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부활의 경험도 첫째 부활의 경험 없이는 얻을 수 없습니다. 첫째 부활은 우리의 영적 부활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말씀 중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라고 하셨습니다.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것은 둘째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첫째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우리의 첫째 부활은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신 말씀과 관계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었을 때, 그들의 육체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담은 930년이나 향수(享壽)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바로 그 순간, 인간의 영이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 죽은 인간의 영혼이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게 하실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2-4. 천년 왕국 (IV)
요한계시록 20장 7-10절: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오늘 저희들이 공부할 구절들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마지막 대환난"의 광경입니다. 이 마지막 대환난의 광경은 성경에 여러 차례 반복하여 나타나지만, 장마다 그 구사(構思) 방법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요한계시록 20장 7-10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마지막 대환난"의 성격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셨다는 점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마지막 대환난의 기록을 다 한 자리에 펴놓고 비교한다면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대환난을 쉽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에서(마 24:,막 13:, 눅 17:)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음으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몇 가지 요점만 가지고 공부하겠습니다.
첫째로 떠오르는 생각은 이 "마지막 대환난"을 전쟁으로 상징(象徵)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전쟁은 진리와 비진리의 대결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전쟁이라고 믿는 성경학자들이 태반입니다. 이 전쟁을 요한계시록 16장에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상징하셨습니다. 이 전쟁은 바로 여섯째 대접을 쏟을 때이며, 그 때가 바로 마지막 대환난 때이며, 일곱째 대접을 쏟는 마지막 심판의 직전(直前)입니다. 그러나 이 아마겟돈 전쟁은 위의 "곡과 마곡" 전쟁과 동일한 전쟁이며, 결코 실제적인 전쟁이 될 수 없고, 마지막 대환난의 비유임을 알게 됩니다. 사단과의 전쟁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성경 구절을 공부하기 이전에 세상에 나도는 마지막 대환난의 얘기를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불신자들이나 할 것 없이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아마겟돈 전쟁을 상상한 영화가 쏟아져 나왔고, 또 얘기책들이 항상 베스트 셀라(best seller)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아마겟돈"을 요청했을 때 나타난 어떤 교회 복음회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을 맞이할 최후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Countdown to Armageddon, How to Prepare)
지구상에 크나큰 변동이 생길 것을 기대하는 참으로 흥분된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무대의 커튼은 열렸고 지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연극은 벌써 시작되었으며 아무 누구도 그것을 정지시킬 수는 없다. 좋고 싫든 간에 우리 각자의 삶은 이 크나큰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을 맞이할 최후 점검(Countdown)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마겟돈에 대한 위와 같은 성경 해석이 유일하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과 카톨릭 신자들이 이것을 따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회교도(回敎徒)들이 그들의 사전(事典)이나 또 다른 문헌들을 통하여 동일한 종말론을 믿고 있다. ---
종말에 대한 예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장래에 일어날 일을 당신들에게 알게 함으로써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놀라지 않고,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장래를 준비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그의 자녀가 된 당신을 보호하시며, 어려운 때를 잘 넘기도록 인도하신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이며, 담대하게 세상 끝까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견디어 나가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더 나가서 예수님은 당신의 큼직한 꿈이 이루어져 천국과 같은 세상(천년왕국)을 맞이하는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이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으면 지금 주님을 영접하고 영생의 선물을 받으시라.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기도를 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예수님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주십시오. 내가 과거에 잘못하고 범죄한 것을 용서하시고 영생하는 당신의 자유를 선물로 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도와 주시며,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도 나눌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아멘"
지금 소개한 글은 아마겟돈 전쟁을 눈 앞에 곧 볼 것이라고 믿는 태반의 기독교인들이 듣는 설교입니다. 이 아마겟돈 전쟁(삿 5:19)이 이스라엘과 열국(列國) 간에 일어나는 전쟁이며, 칠(7)년 대환난이며, 위에 말한 "간단한 기도로써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휴거를 당하여 아마겟돈 전쟁을 피하고, 예수님과 함께 공중에서 칠년을 보낸다고 합니다. 위의 글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전에 "곡과 마곡"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 보겠습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 여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마곡이 러시아를 가르침을 우리는 믿게 된다.
첫째 이유는 "마곡:Magog"이 히브리어로 Rosh라는 것은 러시아(Russia)의 어원이며, 수도 Moscow도 마곡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둘째는 러시아의 위치가 이스라엘 북방에 있음을 마곡을 설명하는 에스겔 38장 6, 15절과 39장 2절에서 "북방의 나라"라고 한 것과 일치하다.
셋째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국가들이 동맹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에스겔 38장 4-6절에서 말하는 동맹과 일치하다.
넷째로 군병의 크기라 에스겔 38장 4,9, 15절의 기록과 일치된다.
다섯째로 성경에서 말하는 병기가 러시아를 지적할 수 밖에 없다.
여섯째로 러시아가 유대민족과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이 "곡과 마곡" 전쟁의 원인이다.(성서 백과사전, 성서 침례교 출판)
위의 글을 가르치고 믿는 교회가 태반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비교할 때 잘못 되어 있는 것을 쉽게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적 기록이 신약 성경에서 인용되었을 때 그것은 예외 없이 영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용된 내용의 뜻을 알기 위하여는 역사적 기록을 우리의 영적인 신앙과 일대일(一對一)로 비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로 상징(눅 1:13-17)한 것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구약의 역사적인 기록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의 결과 세례 요한을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론은 엘리야를 상징한 세례 요한은 엘리야가 행한 기사와 이적이나, 병거(兵車)를 타고 하늘에 올라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거역한 거짓 선지자들을 무참하게 죽여 가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에 근거를 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 아마겟돈은 "므깃도 언덕"이라는 뜻이며, 아마겟돈 전쟁의 뜻은 구약 사사기(士師記)의 기록, 여선지(女先知)이며, 사사인 드보라와 그녀의 군대장관 바락이 가나안 왕 야빈을 므깃도 언덕에서 쳐서 전멸시킨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삿 4:,5:)
여 사사 드보라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삿 4:5)고 함으로써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그 "말씀" 치하(治下)에 있었던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치하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20년 동안을 가나안 왕 야빈에게 학대를 받았습니다(삿 4:3). 드보라는 바락을 (바락은 한 믿음의 용사로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어 있음) 군대장관으로 세우고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므깃도 언덕에서 싸워 가나안을 전멸시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이 치열한 전쟁을 요한계시록 16장 16절은 비유로 인용하였고, 하나님께서 이 역사적 사건을 말세의 대환난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첫째 사단을 상징한 가나안 왕 야빈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것과, 둘째 사단의 전 병력과 바락의 전 병력이 대결한 사실이며, 셋째로는 사단의 병력으로 상징된 가나안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한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 이 전쟁이 마지막 대환난의 상징임을 잘 음미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삿 5:13),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삿 5:20) 등 여러 가지로 우리가 당할 마지막 대환난을 비유로써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전쟁을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어야 할 아마겟돈 전쟁도,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내 걸고 있는 세상 교회가 거의 예외 없이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지배되어 있으며, 마지막 대환난은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으실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한 것을 말합니다. 그 마지막은 주님께서 사단과 교회를 심판하시며 다 지옥의 멸망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 곡과 마곡의 비유도 아마겟돈 전쟁과 대등합니다.
곡과 마곡 전쟁의 기록은 에스겔 38-39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치열했던 전쟁을 비유로 들어, 마지막 대환난이 얼마나 치열한 가를 에스겔 38-39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은 북방 이스라엘이 BC 709년 앗스루 왕 살만에셀에게 패하여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사로잡히고, 이스라엘 국은 완전히 패망했습니다. 그후 유일하게 남아 있던 하나님의 선민, 유대국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멸망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상징했고, 이와 같이 유대국의 종말은 말세를 상징하는데 거듭 인용되고 있습니다.
곡과 마곡 전쟁이 가르치는 요점은 첫째, 이 치열한 싸움이 전세계적(全世界的)이라는 점이지만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세계 대전쟁(大戰爭)을 말한다고는 성경이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 "전무후무한 행음(行淫)"이라든가(겔 16:16),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deceive)하게 하리라"(마 24:24)고 하신 말씀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극도로 배반하며, 교회가 더 이상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음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3-4절은 이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對敵)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바로 이 구절이 마지막 대환난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과 일치되는 사건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장 7절에 "1,000년이 차매"는 인간의 복음시대, 즉 택하신 백성의 마지막 사람이 구원을 받는 때가 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단이 옥에서 놓여"는 3절에서 공부한 적이 있으며, "땅의 사방 백성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속이고:deceive)"는 곡과 마곡의 전쟁이 전 세계적임을 우선 가르칩니다. 이 구절 자체에서 전쟁이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의 진리로 알지 못하게 됨을 가르칩니다. 사단과 인류가 하나님을 향한 전쟁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한 것이 인간의 역사(歷史)입니다마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만한 하나님의 백성이 진리를 거역하는 것이 마지막 환란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걸고도 진리를 따르지 못하는 때이며, 교회의 지도자들이 진리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사실은 거짓을 가르치는 때입니다. 이 때를 가리켜 "네가 네 의복을 취하여 색스러운 산당을 너를 위하여 만들고 거기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니라"(겔 16:16)고 하신 것은 에스겔 16장 8절에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신 것과 비교함으로써, 말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류의 진상을 짐작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여호와의) 옷으로" "너의 (자기 백성의) 벌거벗은 것"을 "덮어 가리운 것"을 분명히 하셨는데, 그 백성이 "네가(하나님의 백성이) 네 의복을 취하여" 벌거벗은 것을 가릴 수 있다고 믿는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이사야 4장 1절이 그 뜻을 좀 더 설명합니다.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
위의 구절들을 이해하는데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 잔치의 비유가 주석이 됩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라고 하셨고, 그 혼인 잔치에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마 22:10)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혼인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들"을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2:13)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하는데 따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숱하게 많은 교리가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의롭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과, 또 그의 생명의 떡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그 옷과 떡은 싫어하고 "내 떡과 내 옷"으로 만족하는 때입니다. 그 "내 떡과 내 옷"은 세상이 주는 것이며, 사단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떡과 내 옷"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이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극단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 상태를 전쟁으로 묘사를 했고, 사단은 거의 전 인류를 속일 수 있었기 때문에 의기양양(意氣揚揚)해지는 때입니다.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인간을 상징하며,"미혹하고"는 세상이 다 속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말씀의 떡을 먹는 참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극히 적기 때문에 "사방의 백성 곧 곡과 마곡"에 의하여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된 것입니다. "곡과 마곡의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고 함으로써 사방의 백성의 수가 절대 다수임을 나타냈습니다. "모래알 같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성경에 여러번 씌어졌습니다마는, 이사야 10장 22절에는 이 모래알을 구원 받지 못한 온 이스라엘을 지적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네 백성이라고 부르셨지만 "남은 자"만이 택하신 백성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27절에서 인용하여 말세에 이스라엘 국가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허망한 생각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모래알 같다는 표현을 교회와 그 교인의 수가 극히 많은 것을 또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는 성을 두르매"는 역사상 교회가 점차로 말씀을 배반하게 되며, 말세에 가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진리를 믿지 않는 교회와 교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택하신 백성의 수를 능가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교회가 극도로 진리를 배반한 때가 세상의 종말이며, 이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교회를 소멸"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입으시고 세상에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천년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며 "불로 소멸"하시는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인간을 거짓으로 인도한 사단이 마침내 "유황 못에 던지우며 거기서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사단의 사역을 대표하는 상징이며, 사단의 사역은 인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일로 그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종말이 올 것이며, 지구상의 시간을 지키는 해와 달이 그 구실을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 구절에서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이 밤낮을 가릴 수 있는 해와 달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이 생각되기 쉽습니다마는, 이 때는 이미 해와 달이 없어진 후이므로 그 뜻은 "계속하여 영원한" 괴로움을 받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2-5. 천년왕국(V)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避)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위의 두 구절 중에도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흰 보좌",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생명책", "책들", 그리고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1000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하신 5절의 말씀에 대한 공부를 기억합니다. 오늘 공부할 12절에는 1000년 동안 살지 못하던 "죽은 자", 즉 모든 인간들이 심판을 받기 위하여 부활하는 것을 봅니다. 심판 날이 온 것입니다.
이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무론대소"라고 한 것은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던,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던 간에,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시행하는 재판은 불공평할 수가 있고, 숨겨졌던 사실이 몇년 후에서야 밝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크고 흰 보좌"가 무슨 뜻이냐?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흰색을 말할 때 이사야 1장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고 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51편에는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흰색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贖良)하시는 상징이며, 이 마지막 심판이야말로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시는 사역의 마지막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주홍 같은 죄"를 다 그리스도께 맡기기 위하여 주께로 나아간 사람들이며, 그들의 죄가 "눈보다 희게"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히 받아야 할 엄청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흰 보좌"는 그리스도의 순결하심과, "공의(公義)"의 상징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의 속성과 구속하심을 가리켜 "흰 양털"과 "흰눈"(계 1:14), "흰 돌"(계 2:17), "흰 옷"(계 3:4,5,18, 4:4, 6:11, 7:9, 7:13, 19:14), "흰 말"(6:2 (19:14)등으로 여러 번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보좌를 "큰 보좌"라고 한 것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보좌이며, 역사상에 살았던 모든 인류가 그 앞에 나타나는 큰 보좌입니다. 이렇게 큰 그리스도의 보좌를 마지막 심판에 가서 비로소 인간들이 알게 됩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는 땅과 하늘이 더 이상 인간들이 받아야 할 심판의 변호인(辯護人)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백만장자의 재물이 "지옥에 갈 죄 값"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뜻이 되며, 역사를 기록한 인류의 모는 공헌(貢獻)이 땅을 위하여 한 것이므로, 그 공헌의 흔적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말세에 가서 위인(偉人)이 누구이며 선인(善人)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잘잘못을 가려내는 재판이 아니고, 형벌의 집행만이 남아 있는 때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책"과 "책들"이라고 한 점에 유의하게 됩니다. "책들"은 죄를 기록한 책으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책들"이라고 복수(複數)를 사용한 뜻은,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수(單數)로 기록된 생명책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이름만이 기록된 책이며, 이 책에 기록된 자들은 심판을 받지 않게 됨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 생명책에 대하여는 다음 구절들을 음미함으로 써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방(異邦)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無論大小)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8)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1-34)
이상의 구절 뿐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때에 택하심을 받은 백성들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심원(陪審員)이 될 것을 가르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 6:2-3)
고린도전서 6장 2-3절은 요한계시록 2장 26,27절이 잘 설명합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 심판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심판하기 이전에, 이미 복음을 전하는 순간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며(고전 14:24, 히 4:13), 또한 말씀대로 죄를 다룰 때에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됩니다(마 18:15-20, 고전 5:).
왜 심판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만 정의하는 교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진노의 하나님을 가르치는 선생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노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진노의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태반의 구절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패역(悖逆)하는 인간을 향해서 무서운 진노를 거듭 거듭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신 32:39-41)
위의 구절은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신 한 예입니다. 성경 사전을 펴 놓고 진노하심에 대한 모든 기록을 찾아 본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의(義)로우신 하나님의 속성(屬性)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 7편 11절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하심으로 인간들의 죄를 한시도 용서치 않으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노하심은 그의 능력과, 자비하심과, 미쁘심과 동등하게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없을 수 없는 속성임을 알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노하심을 제하여 버린다면, "죄"에 대한 정의를 잃을 것이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진노를 토기장이가 천(賤)히 쓰는 그릇을 만드는 권한으로 설명을 하였고, 22절에는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寬容)하시고"라고 함으로써,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한 후 인간은 멸망을 받게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그 심판을 연장하셨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죄임을 성경은 가르치며, 인간이 영원히 지옥에 가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증거입니다. 또한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건립(建立)하시는 왕국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생각하듯, 인간 행위에 대한 복수적(復讐的)인 해(害)를 보이겠다는 것이 아니며, 그가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의 자연적인 권한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1장 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은 또한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벌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장래에 대하여 맹세 하셨습니다. 그 한 예는,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노하사 맹세하신 기록(신 1:34-35)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盟誓)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결정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역사상의 인류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들에게 어린양의 진노(계 6:16)가 임한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에 대한 노하심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신 진노의 하나님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 진노 아래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진노에서 건지신다는(살전 1:10)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참으심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는 것을 13,000년 이상을 참아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음녀를 심판"하신다(계 19:2)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살길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진노를 피하게 하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책들이 펴 있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책"에 대하여 좀 더 공부해 보겠습니다. "책들"하면 상식적으로 성경을 가리킵니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여 기념하게"하신(출 17:14) 책이며, 에스라가 이스라엘에게 읽어 준 책이며(느 8:18), 사도 요한이 쓴 책이며(요 20:30), 이러한 책들이 편집되어 성경 66권을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마는,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의 법률책으로 등장할 것을 가히 짐작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선을 행하여야 할 이유와 기준을 기록하셨고, 또한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할 이유와 의무에 대하여 충분히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책들"에 대하여 더 넓은 범위의 뜻을 가르칩니다.
자연 속에서 읽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책 또는 책들이 그의 피조물인 자연 그 자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창세(創世)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虛妄)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0-21)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萬有)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主宰)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限)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4-27)
이상의 구절들만을 가지고도 자연 속에 적어 두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고 섬기지 않는 인간들의 죄를 핑계할 여지가 없음을 가르칩니다.
양심(良心)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 그런가 하면 인간의 양심이 "책들"이 됨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 인간의 양심만으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本性)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證據)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4-16)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이상의 두 구절은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진리가 새겨진 "책"으로 되어 있음을 가르칩니다.
복음으로 된 또 다른 책: 말할 것도 없이 이 책은 66권으로 된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심판 때에 책이 됨을 다음 구절은 가르칩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인간을 심판하시는 때가 마지막 심판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복음을 사랑하는 형제와, 자식들에게와, 부모님께와 그리고 친구들에게 전한 바 있습니까? 그것이 책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전한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때 이 책이 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어야 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여러 가지 책들이 곧 펴질 때가 다가옵니다.
2-6 천년 왕국 (VI,마지막)
요한계시록 20장 13-15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陰府)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生命冊)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 구절은 인간의 종말을 지옥에서 장식하는 인류역사의 마지막 시나리오입니다. 이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지옥을 부정하며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신 모든 내용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임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공부를 계속하겠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다가 세상을 가리킴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죽은 자"는 영혼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계 20:6)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내어 주고"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상이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며, 지옥의 형벌 받을 인간들을 위하여 감싸 주고, 숨겨 줄 능력이 더 이상 없어졌음을 말합니다.
"사망과 음부(death and hell)"는 역사상에 일어났던 모든 인간의 죽음을 가리키며, 여기에서 "음부(hell)"는 무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고 땅 속에 파 묻혔다 할지라도 세상 종말에 다시 부활할 것을 이 구절은 가르칩니다. 장사(葬事)하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땅에 묻거나, 화장(火葬)을 하거나, 수장(水葬)을 하든 간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인간들이 마지막 심판(審判)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왜 받게 됩니까? 심판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하여 마지막 선고(宣告)를 받는 과정입니다. 죄에 대하여 성경은 철저하게 가르칩니다. 지난달에 공부한 12절에서, 모든 인간이 자신들의 행한대로, 즉 책에 기록된대로 심판 받을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인간의 죽음을 지금까지 감싸 주었습니다. 그 죄가 크던 작던 간에 사람이 일단 죽은 후에는 그 일이 지나간 일로만 알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은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이 잠시동안 가 있을 곳을 성경은 "적막(寂寞)한 곳"(시 115:17)이라 하였고, 그 "적막한 곳"은 무서운 심판을 받기 이전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지우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첫째 사망은 인간의 육신이 죽는 것이며, 에녹과 엘리야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당하는 죽음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육신이 영혼과 분리되는 것이며, 둘째 사망은 인간이 영원토록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와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데살로니가후서 1장 7-9절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렇게 무서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오묘하신 창조의 능력이, 지금 구원을 받는 자들이나 받지 못한 자들에게 동일한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은, 매일 같이 아침이 되면 돋는 해며, 때를 따라 곡식을 자라게 내리시는 비며, 어려울 때 위로를 받게 하는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심판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창조의 사랑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무서운 때인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내 이름이 생명책에 없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극도로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집행하시는 구원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심대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계속하여 죄의 길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은 바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公義)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친히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인간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친히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한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찾는 자는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께로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까? 인간은 누구도 이 질문에 답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만 답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지옥의 무서움을 깨닫고, 또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따름입니다. 내가 참으로 구원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 간청(懇請)해야 할 때입니다. 내 생명을 그리스도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는 신앙을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악한 자들의 영원한 거처(居處)가 될 지옥에 대하여 어떻게 성경이 가르치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두 가지로 분별하셨습니다. 그 중 한편은 양이며, 다른 편은 염소입니다(마 25:31-46). 양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며, 염소는 "영원한 형벌(지옥), 불못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특히 그들 중에는 "주의 주린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供養)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에는 이들이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소위 말하는 기독교인들이며, 또 기독교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과 같이 지옥에 갈 사람의 종류를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나열하셨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무서운 지옥이 어떠한 곳인가를 성경에서 더 찾아보기 이전에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서운 얘기를 성경에 기록하셨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의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는 구주로 오셨고, 기쁜 소식인 복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오실 때는 자신이 건립한 복음을 인간들이 받아 들이고 말씀에 순종했는지, 안했는지를 판결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세상 종말에 대하여 수없이 경고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자신이신 문입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입니다. 또 이 문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감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 멸망을 홍수로 비유하셨고,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반석이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때, 홍수가 나도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다가올 멸망"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얘기의 주제(主題)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기 전에 하나님을 찾을 것을 요구하셨고, 인간이 죽은 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을 빈번히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또 찾아 보겠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서운 지옥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써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저가 음부(陰府)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라고 함으로써, 죽기 전에 하나님을 찾을 것을 경고하십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에 대한 많은 비유가, 지옥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동시에 있다는 점입니다. 지옥에 대한 무서움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마는, 마가복음 9장 42-50절이 한 현저한 구절입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47-50)
마가복음 9장 42-50절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몸의 어떤 지체라도(손, 발, 눈을 지적하셨음) 범죄하면 찍어, 또는 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죄에서 떠나야 지옥을 면할 것을 이 구절은 또한 가르칩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라고 하신 말씀은 이사야 66장 24절에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悖逆)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인용(引用)하신 것이며, 그들의 죽은 영혼이 영원히 죽어 살아나지 못함을 가르칩니다. "소금 치듯함"은 두 가지의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 제사법에서 화제(火祭)를 드릴 때 반드시 제물(祭物)에 소금을 치도록 명령하신 것을(레 2:13) 인용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은 썩지 않게 본래의 상태를 보전하는데 사용합니다. 동시에 화제에 사용하도록 명령하신 소금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seasoned with salt))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심판주로 오시어 죄인을 심판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 성경 얘기를 전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의무입니다. 다른 한편 "소금"의 뜻은 하나님의 공의로서 정하신 지옥의 형벌이 영원히 보존(preserve)될 것을 가르칩니다.
지옥 불못에 가야 할 인류의 운명은 오로지 죗값이며(롬 6:23), 그 죄는 내 죄이며, 다른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22장 10-11절에 인류의 마지막 날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맘씀을 인봉(印封)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이 무서운 지옥의 형벌을 면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간청할 따름입니다. 지옥과, 지옥에 갈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 몇 구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1, 지옥은 어두운 곳입니다(마 22:13). 왜 어둡습니까?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 "삼키는 불"(사 33:14) 속에서 살며, 예수님께서 그 불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 "영영히 타는 불"이라고 하셨습니다.
3,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은 고통을 받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6:19-31).
4, 지옥에서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 14:11)
5, 지옥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며, 로마서 1장에는 이 죄인들의 종류를 일일이 지적하였고, 이들은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심으로써, 인간이 받을 지옥의 형벌은 영원한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喪失)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誹謗)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8-32)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朱紅) 같을지라도 그리스도께 나아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우리를 영접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지옥행을 자처(自處)한 몇 인물들을 찾아 보겠습니다.
발람과 거짓 선지자들: 민수기 22-24장에 발람의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유다는 발람을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로 몰려간 자"(유 1:11)라고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발람을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에는 버가모 교회에 경계하시기를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고 함으로써 돈을 벌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파는 수다한 거짓 선지자들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세상과 짝할 때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며 또한 행음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거짓 선지자들: 사도행전 1장 17절에, 가룟 유다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職務)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고 함으로써 3년 반 동안 침식을 같이하며,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팔게 된 유다와 같은 자들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利慾)을 좇음이라"(겔 33:31)고 하셨습니다. 어찌 이 말씀이 가룟 유다에게만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교회를 한 기업체로 생각하는 많은 한국 교회에게 내리시는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롯의 아내: 예수님께서 친히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2)고 하셨습니다. 롯의 처가 소금기둥이 되기 직전의 사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소돔이 멸망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소돔에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 운영이 세상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물질이 풍부한 교회의 교인이 될 때, 롯의 아내로 세상의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세를 당한 우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에서와 같이 장자의 직분을 파는 자: 에서의 얘기는 창세기 25-36장으로 돌아가 공부해야 할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12장 16절에 하신 경고를 읽어 보겠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축복에 대하여 깨닫고 간직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7절에는 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는 자는 음행하는 자와 일반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 40년간을 광야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볼만큼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마른땅이 된 것을 보았고, 홍해를 건너간 후 애굽 군대가 바다에 빠지는 것을 보았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마셨고, 만나를 매일 같이 거두었고, 메추라기를 잡아 먹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대로 여행하였습니다. 이 모든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히 3:1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해야 할 따름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의 공부를 마감하면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요한계시록은 장래에 대한 얘기만이 아니며, 과거, 현재 그리고 장래에 일어날 일을 상징적(象徵的)으로 기록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1-3절의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사단을 묶어 무저갱(無底坑)에 가두시는 것은, 십자가상에 달리심으로 사단에게 승리하신 것의 상징이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까지를 완성된 기간인 1000년으로 상징하셨습니다.
4-6절은, 현재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천상(天上)에서 다스리시는 광경이며, 그 왕권을 다윗의 보좌로 상징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공의로우심을 가르칩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예루살렘을 수도를 삼고 천년 동안 왕노릇하신다는 가르침이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기간에는 그리스도께서 예정하시고 택하신 백성이 온 세상 사방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 기간입니다.
7-10절은 사단이 잠시 동안 옥에서 놓이는 마지막 대환난이며, 상징적인 완전한 기간, 1000년이 지나간 때이며, 이 때에 사단은 속이는 수단으로 인간을 유혹합니다. 모든 것을 현실로 비추어 볼 때, 지금이 바로 사단이 잠깐 놓인 때라고 믿어집니다.
11-15절은 그리스도께서 흰 보좌에 앉아 심판하시는 세상의 종말을 가르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때입니다. 세상에 살던 모든 인간이 심판대 앞에 서서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히 불못에 던지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 불못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을 것이며, 불이 타도 어두운 곳입니다. 이 지옥의 표현은 장래에 다가올 일의 상징이며, 사람의 지혜로는 그 일들을 다 추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무서운 일이 모든 인류에게 다가올 것을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을 믿을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은 일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간구(懇求)하는 것 뿐입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기회는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구원 받고 영원히 살기 위하여 주님께 애걸(哀乞)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3. 지상토론 천년왕국, 사실인가 상징적인가를 읽으면서
1)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생
인간은 자기본위로 살고 있다는 것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냄을 우리는 들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제 잘난 맛으로 산다"든가 "팔은 안으로 구부러지게 마련이다"라는 격언(格言)은 인간은 누구나 다 이기주의(利己主義)의 동물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발달된 언어인 영어에 "나"를 말할 때는 반드시 대문자인 "I"를 쓰게 된 것도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같은 표현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사건들도 인간의 이기주의를 잠재적으로 늘 노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유명해지기를 원하며,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있다. 흔한 예로서 한국의 어린 세대를 생각하면, "너 장래에 무엇이 될거냐?"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유명해지겠다"는 답변을 듣는다. 물론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제창(齊唱)하는 것 뿐이다. 자식이 집을 나가면 금의환향(錦衣還鄕)할 것을 학수고대 하는 것이 부모들이다.
"목사가 될 바에야 유명한 부흥사가 돼야지" 하는 말을 여러번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유명한 부흥사였던 박태선 장로가 억대의 돈을 벌기까지 성공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다. 1,000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 10,000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 10만명 앞에서 설교한 부흥사, 등등의 찬사(讚辭)들이 박태선 장로에게 주어지던, 같은 찬사가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경의 세계, 참 복음이 전도되는 과정은 인간의 이기주의로 되지 않음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인류는 사람의 생각대로(제 잘난 맛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임을 성경에서 거듭 읽을 수 있다[그들이 내말을 듣지(hearken) 아니하며(렘 6:19)]. 유명한 목사님을 보고 "당신의 설교는 사람의 생각입니다"라고 지적한다면 여러가지 그럴듯한 변명을 들을 수 있겠지만, 유명해지겠다는 잠재적인 이기주의를 부인하는 변명은 없을 것이다.
a. 금송아지
천년왕국의 교리가 서점에 범람해 있고, 많은 설교들에서 이 허무(虛無) 맹랑(孟浪)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천년왕국이 기독교를 정의하고 있다. 마치 연옥이 가톨릭교를 정의함과 대등하다. 사람의 이기주의를 기탄없이 발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아론까지도 포함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우상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믿었다는 사실을(출 32:4) 역사의 이야기로만 들을 수는 없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나와 있었다고 해서 갑자기 무지각(無知覺)한 바보들이 된 것이 아니다.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것이 금송아지 였다. 이스라엘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애굽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금송아지 였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직전에 있는 기독교의 현상을 상징 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말세에 기독교인이 듣고, 보고, 배운 것이 그럴듯한 천년왕국이다. 이렇게 잘못된 교리를 왜 쉽게 받아 들이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의 해답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의 상상을 묘사한 소설이 잘 팔리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또 연옥(煉獄)의 얘기가 가톨릭교인을 위안(慰安)하는 것과 같이 천년왕국의 교리가 말세의 기독교인을 위안한다. 연옥의 교리는 "내가 천국에 갈 정도로 완전하지 않지만, 연옥에 갇힌 후 구원을 받을 기회가 있다"는 교리이며, 이와 대등(對等)하게 천년왕국의 교리도 "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 구원을 획득(獲得)할 수 있다"는 신화(神話)와 같은 얘기들이다.
그동안 같이 복음사업을 해 온 어떤 분이 "지상토론 천녕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의 기사가 실린 복음신문을 보내 주면서 그분의 답답한 심정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알아 보자는 암시였다. 나야 신학을 공부한 일이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변증(辨證)이 성경말씀에 근거할 방법 밖에 없다. 이름 있는 두 성경학자의 글을 평신도인 내가 비평(批評)한다는 것이 좀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러한 사람에게 나는 성경의 본질을 먼저 의론하기를 원하며, 내가 쓰는 글이 "성경말씀을 성경말씀으로 해석"한 비평이 될 때 서슴지 않고 독자들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2) 하늘과 땅의 차이
이사야 55장의 말씀이 생각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0-11).
이 성경구절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대할 때, 그리고 전도할 때 틀림 없이 마음에 두어야 할 기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생각(신학자들의 학설)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는 것(9절)과, 성경 말씀만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인간의 구속(救贖)사업을 위하여 (10절) 절대로 필요하다는(11절) 말씀을 믿어야 된다. 이렇게 볼 때 "전천년설" 또는 "후천년설의 지지자"들은 땅에 속한 얘기를 지지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무한과 유한의 비교인데, 수학(數學)에서도 무한(無限)과 유한(有限)을 비교하는 일은 정의할 수가 없다. 성경말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라고 믿을 때 우리는 수동(受動)의 자세 밖에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權威)와 위엄(威嚴)을 생각한다면 성경말씀이 "수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 논쟁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말의 사실은 "내 말은 청종치 않고"라고 하신 하나님의 경종과 잘 대조가 된다. 지상토론을 읽으면서 "종말론 정립", "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뜨거운 논쟁의 요소로, 건전한 신학토론의 장", "계시록의 나중에 나타나고 있는 책의 성격",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화적 해석방법" 등등의 표현은 모세가 없는 동안에 금송아지를 만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성경은 논쟁을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학설이 어떠한 신학설보다 좀 더 우월하다는 표현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니면 아니요, 옳으면 예! 라고 말할 의무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론할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할 계명이다. 전능하시고 완벽(完璧)하신 하나님께서 논쟁을 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애매하게 쓰실 수가 없다. 가령 계시록 20장 4절을 읽을 때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하니"에서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의 문장(文章)의 문법(文法)을 생각할 수 있다. "목 베임을 받은 자"는 주어(主語)인 "영혼"의 수사(修辭)인 것은 국민학교에서 배우는 문법이 아니겠는가? 가령, "화분에 꽃이 피었다"고 할 때 화분이 피었다고 어떻게 오해를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주어와 수사를 바꾸어 놓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4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은 영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국에서)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라고 읽을 수 있다. 지상에서 살게 된 인간은 육신을 가진 피조물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 앞으로 간다.
3) 비유로 되어 있는 성경 말씀
최갑종 목사님의 "예수님은 인류역사의 마지막 때에 오셨다"라는 기사는 성경적이며(행 2:17), 말세(Last days)와 마지막 날(Last day)은 성경에 잘 구분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장차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말세에 일어난, 그리고 일어날 사건이라고 믿는 것이 성경적이다. 구약성경이라 할지라도 그 주제가 말세에 대한 예언이거나, 말세에 대한 상징임을 배우게 된다. 말세는 주님의 재림 이전의 세대를 지적함으로, 논리적(論理的)으로 생각하더라도 천년왕국이 지상에 또 올 수가 없다.
우리가 흔히 듣는 얘기가 "성경을 해석하기에 달렸다"고 하며 성경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하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기름"을 말할 때 그 상징의 뜻이 성령을 말할 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이름도 여러가지로 표현한다. "어린양", 어떤 때는 "문", 어떤 때는 "말씀" 이라고 성경에서 우리는 읽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시나리오가 두 가지로 해석될 수는 결코 없고, 그 시나리오를 잘못 알면, 자기가 탈 기차가 오는데도 타지 못하고 놓쳐 버리게 된다. 사람의 고집, 제 잘난 맛이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어 영생을 보지 못하게 한다. 특히 유명해질 때 조심할 것은, 백두산 정상(頂上)에 올라간 줄 아는 명사(名士)가 아래를 내려다만 보면, 자기의 높이와 비교할 수 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로 무슨 박사의 어떤 설, 무슨 론, "교의신학의 면류관", "종말론의 다이아몬드" 등의 표현은 참 신앙인들에게는 거북한 어휘(語彙)들이다. 철통같이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다"(약 1:17)는 사실이며, 신학의 논쟁은 세상일에 대한 다툼이며, 그리스도의 신앙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하다. "성경말씀을 성경이 어떻게 정의하며, 또 어떻게 성경말씀이 다른 성경 구절의 주석(註釋)이 되는가"하는 공부에 우리는 전생(全生)을 바쳐야할 것이다.
성경말씀이 상징이냐? 문자적이냐? 하는 질문도 "누구누구가 그렇게 보니 나도 그렇게 믿는다"는 식의 변증은 신앙이 아니다. 성경자체가 경우에 따라서 상징인지 문자적인지를 말해 줌을 믿어야 한다. 가령 "천(千)"에 대하여 읽을 때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성경에 450번 가량 쓰시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든 구절을 읽어 보는 것은 성경학도들에게는 필수(必修)의 과정이다.
가령 창세기 24장 60절에 리브가를 축복하면서 "천만인(千萬人)의 어미가 될지어다"라고 한 것이나, 신명기 7장에 "천대(千代)"라고 읽을 수 있는 것과, 요한계시록 7장에 14만 4천(千)의 경우도 다 상징으로 씌어졌음을 알게 된다. 마가복음 4장 34절에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고 기록된 것은 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비유로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비록 비유가 아닐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인간 구속(救贖)의 사역(使役)을 상징함을 배우게 된다.
4) 성령께서 주시는 우리의 비젼
최목사님이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이 상징적이라는 이유를 "환상 자체가 지상적인 인간역사 세계에서 일어난 실제가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영적 실제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말세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믿는 자들이 환상(Vision)을 볼 것이라고(행 2:17) 예언한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이 우리에게 환상(幻像:Vision)으로 제시(提示)되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는 이 환상은 꿈에서 보는 화면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 같은 현상(現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환상(Vision)은 앞으로 나타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또 그것을 믿는 일이다. 베드로가 환상을 본 기록을 보면(행 10:) 불결한 짐승을 본 환상이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게 된것처럼, 환상이 상징이라 할지라도 그 환상은 실제적인 사건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Vision을 환상으로 번역 해야 하는 한국 번역이 미약한 것을 느낀다. 성경이 주는 Vision은 실제적이며, 성령의 역사이다. 사도 요한이 받은 Vision도 우리가 받은 것과 다를 수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요한은 성경 기록이 없을 때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받았고, 우리의 환상은 성경 기록에서 받는 것이다. 비단 꿈(성경에서 읽는)은 환상의 일종이라 할지라도, 구약에서 읽을 수 있는 꿈의 경우(요셉의 꿈, 다니엘의 꿈 등)도 환상과 실제 사건을 일대일의 관계로 연결을 시킨다.
천년왕국이라는 시나리오가 단순히 요한계시록 20장 1-6절로만 되었다는 이광복목사님의 간증을 인정하며, 앞으로 부조리(不條理)한 이 시나리오를 성경말씀과 비교할 것이다. 이목사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론"인 천년왕국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가지고 도우시는가를 볼 것이다. 이목사님이 인용(引用)한, 요한계시록에 반드시 속히 될 일(1:1), 장차 될 일(1:19), 마땅히 될 일(4:1), 결코 속히 될 일(22:6)이 무엇을 뜻하는지 공부하려고 한다.
아마도 세대주의자들의 가장 큰 오류(誤謬)가 "책의 성격"을 정의하는 잘못에서 온다고 본다. 나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성경에 대한 정의가 요한계시록에도 적용이 됨을 믿으며, 다음은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이 독립적으로 기록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특히 성경에서 "말세와 마지막날"은 성경전체를 가장 가깝게 설명하고 정의하는 제목이라고 배우게 될 때,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의 내용은 성경 여러 곳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을 믿게 되며, 또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장래에 있을 일만을 기록했다는 가정은 성경이 용납치 않는다. 가령 요한계시록 12장 1-6절에 나오는 여인의 얘기는 장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부터 시작하여 신약시대 전체를 설명한다. 이목사님의 "실제적 성취"라는 표현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말씀이 상징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은 우리의 "실제적인 구원의 성취"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5) 지상토론의 큰 제목
"천년왕국 상징화는 말씀을 훼손시킨다"는 큰 제목을 "천년왕국을 제창(提唱)함은 말씀을 훼손시킨다"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네번에 있을 지상토론을 읽고 성경말씀과 비교를 하겠지만 천년왕국의 교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소설이다.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신화(神話)를 근거로 한것처럼, 천년왕국의 교리는 성경적이 아닌 종교에 현혹(眩惑)된 사람의 마음을 그려낸 교리이다.
놀라운 것은 카리스마틱 교파가 다 이것을 믿고, 몰몬교, 칠일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구원파 교회, 형제교회, 그리고 군소 교파들이 천녕왕국을 믿는다. 내가 속해 있던 경건파 교회는 교인들 집에 텔레비젼도 없고, 잡지도 없고, 성경만 보는 사람들인데, 이상하게도 교역자들이 천년왕국을 말한다. 성경말씀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잘못된 비 성경적인 것을 받아 들이는데는 텔레비젼도, 잡지도 필요 없고, 남의 설교를 듣지 않고도 배우게 된다. 독립교회를 차리고 어떤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아주 건실한 모임을 알게되었다. 그 집회에도 천녕왕국의 교리는 전염병처럼 번져 들어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천년왕국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면 그 답변을 다음과 같이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고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 참 교회이지, 교제하는 다른 형제가 천녕왕국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한다. 우리가 남의 구원을 말할 때는,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구원계획에 건방지게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언제 구원을 받고 나는 몇년, 언제 구원을 받았다"는 간증을 들을 때 몹씨 거북해진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를 갈망하며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는 것이며, 내가 믿고 있는 사실이 잘못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을 하는 본질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한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밤새껏, 동이 틀 때까지,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과 씨름하던 사건과 같다.
앞으로 네번 더 있을 지상토론에서 천년왕국에 대하여 여러가지 낭설(浪說)을 듣을 기회가 여러분에게 올 것이며, 이 기회에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구원의 비밀을 좀 더 찾아 내기를 바라고 있다.
6) 유대교 묵시문학
최갑종 목사님의 무천년설(無千年說)을 일반적으로 당연(當然)하다고 동의하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이유는 최목사님께서 적절하게 성경 구절을 인용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항상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최목사님은 성경을 신학으로 보는데 비하여, 나는 성경적으로 보는데 있다고 믿는다. 2월 12일 날자의 토론에도 "천년이란 말이 이미 예수님 당대 이전부터 유대교 묵시문학의 종말론에서 도래할 메시아왕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 사고방식을 내 신앙으로는 용남(容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교 묵시문학"이 무엇을 지적(指摘)하는지는 몰라도 만일 그것이 구약성경을 지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시문학"으로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겠는지 묵상(默想)해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 3:16)고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이 역사에 대한 얘기이든, 꿈을 꾼 얘기이든, 또는 환상(幻想)을 본 얘기이든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깨닫는 방법은 유일하게 그의 말씀으로부터 옴을 우리는 경험하고 믿게 된다. 성경 말씀을 문학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인간과의 대화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며, 그럴때 그 성경 학도는 혼자서 눈도 감고 귀도 닫아 버리고 상상(想像)의 세계를 헤매게 될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영적 실제"는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幻想) 속에서 본 세계를 지적하는 모양인데 이것을 우리의 신앙생활과 조화시키면서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적 세계"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거듭난 것이 영적 세계에 신생아(新生兒)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앙은 실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을 "영적 세계"에서 본 것으로 분류(分類)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한 가지 방법"을 써서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셨다고 이해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방법이 영적이기 때문이다.
7) 왕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미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라고 하신 최목사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고 또 지금도 왕으로 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이 죄 많은 지상에 왕국을 세우시고 왕이 되실 것을 기대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첫째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영적인 것을 잠재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 당시에 모든 군중이 메시야를 기다리던 상태였다. 기사와 이적을 보기 위하여 4,000명씩 혹은 5,000명이 모였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차 예수님께 기사와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또 그 군중들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높여 호산나라고 환성(歡聲)을 올렸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찾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지금도 똑 같은 현상을 본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너무나 초라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려(華麗)하고, 찬란(燦爛)하고, 이 세상에서 능력 있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를 원하고 있다. 이 저주 받은 땅(창 3:17)에서 좀 잘 살아 보자는 소망이기도 하다. 하기야 사도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도 그 찬란한 왕국이 올 때 왕 예수님 다음에 가는 높은 자리를 자기 아들들에게 주기를 원했던 기록(마 20:20, 막 10:25)이 있다.
8) 천(千)이라는 숫자
천 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다시 살펴 본다면,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천이라는 숫자가 "아주 많다"는 뜻이거나 "완전함"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천량빚을 갚는다"라든가, "그의 말은 천 근의 무게가 있다", "천금"(a thousand pieces of Gold: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물건), "수천명"(많은 사람), "천리"(먼길), "천사만고(千思萬考:Mature Consideration:완전한 숙고[熟考]), 이름을 천세에 남긴다, 천세 만세 사십시오, 천신만고(千辛萬苦:all sorts of hardship) 등, 이와같이 동서 풍습(風習)과 문화(文化)를 막론(莫論)하고 천이라는 숫자는 아주 풍족하다든가 완성된 것을 상징(象徵)하여 사용이 되어 왔다.
성경에서 비단 이 천이라는 숫자가 실제적인 수자를 지적할 때라 할지라도 풍족하다 혹은 완성되었다는 상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이스라엘 왕후 이세벨에게 쫓겨서 죽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보인 숫자 7,000이 있다. 숫자 7과 1,000은 영적인 뜻이 있다. 성경에는 천이라는 숫자가 병력을 계수하는데 많이 씌어졌지만, 위에 나열한 것처럼 "많은 수"와 "완전함"을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창 24:60, 출 20:6, 34:7, 신 5:10, 수 23;10, 욥 9:3, 시 91:7, 119:72, 렘 32:18, 눅 14:31, 계 5:11, 벧후 3:8). 그 중에도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은 계시록 20장에서 말하는 천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천년(완성된 기간)을 말하고 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과 벧후 3장의 천년의 뜻이 다른 점이 있다면, 계시록 20장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시점(時點: 사단을 옥에 가둔 시점: 십자가의 승리)에서 완성된 때를 말하는데 반하여, 베드로후서의 천년은 아담을 창조하신 때를 시점으로 한 완성된 기간(약 13,000년?)을 말씀하신다고 볼 수 있다. 우주 창조의 중심이 되는 피조물, 인간의 수(택함을 받은 자)가 완전하게 찰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베드로는 말한 것이다.
9) 인간의 수명
하나님께서 천이라는 숫자를 성경에 쓰시면서 실제적인 숫자와 연결하여 생각하도록 하신다. 그것은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인간들의 수명이다. 창세기 5장의 기록을 보면 가장 오랫 동안 향수한 무두셀라를 생각해 보게된다. 그는 969세를 향수했다.
이 사실은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이 영원히(성경에는 영원(永遠)을 천대(千代)로써 상징)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지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둘째로 이 세상(지구)은 점차적으로 쇠퇴(衰退)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창조후 수 천년간, 노아 때까지, 인간이 900년이 넘도록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지구상에는 공해도 없었고, 해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병균(病菌)도 없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인간의 수년(壽年)은 노아 때의 홍수후 점차로 감해지고 지금은 인간의 수명을 70세로 성경은 우리에게 암시 한다(시 90:10). 이 짧아진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언하신 말씀,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현재동사)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경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7-18)을 기억나게 한다.
노아의 때까지 채소를 먹게 하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육식을 하도록(창 9:3) 허락 하신 사실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조화 있게 생각할 수 있는 한 단서가 된다.
천년왕국을 믿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착각하는 이사야 65장 17-25절의 말씀은 바로 앞서 말한 "저주된 땅"과 "인간의 수명"을 잘 설명한다.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라고 하신 말씀이 천년왕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장의 구조로 보아서 이 문장의 전체를 배경으로 하는 첫번째 구절(17절)의 말씀을 없는 것으로 간주(看做)하는 것이 천년왕국을 믿는 사람들의 해석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18절 이하 마지막 절까지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설명하는 것 뿐이다. 이미 저주를 받은 세상이 갑자기 낙원으로 변하여, 공해나 오염물이 없어저 하늘과 바다와 땅은 아름다워지며, 사람은 다 천년을 향수(享壽)하며, 세상의 정치(政治) 경제(經濟) 그리고 사회질서(社會秩序)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주관(主管)하게 될 것이라는 천년왕국설은 백주(白晝)에 꿈을 꾸는 망각(妄覺)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성경의 문법과 논조는 극히 타당하며, 초신자(初信者)가 읽을 때에도 논리정연한 하나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천이라는 숫자가 "많은 것과 완전함"을 상징한다고 해서 계시록 20장에서도 그것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 말씀의 바른 이해는 본문(本文)에서 우선 얻게 되는 것이 보통의 경우가 되며, 계시록 20장의 이해도 계시록 20장에서 찾는 것이 타당(妥當)하다.
10) 뜻을 잘 설명하는 본문
계시록 20장에 돌아와서 몇 가지 어휘(語彙)를 생각해 보자. 4절에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의 설명을, 세계에서 제 일인자(一人者)로 알려진 천년왕국설의 제창자(齊唱者) Dr.John walvoord(전 Dallas 신학대학 총장; 이 신학대학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천년왕국설의 고장이 되었다)는 이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은 순교자들을 말하며, 이 사람들은 한 시점(時點)에서 한꺼번에 죽은 사람들이라고 지적하였다. 성경은 특수한 사람들을 위하여 쓴 책이 아니며, 언제나 대중(大衆), 즉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나, 받지못한 사람들을 위하고 있다. 어느모로 보든지 Dr. Walvoord 의 주장은 억측(臆測)에 지나지 않는다.
계시록 20장 본문 속에 세 가지 큰 설명이 있다. 첫째, "첫째 부활"에 대한 이해와, 둘째는 "목 베임을 당한"(순교)일과, 세째는 순교자의 "영혼이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한다"는 점이다. 세째 경우에 대하여는 지난번 편지에 언급하였음으로 처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겠다.
"첫째 부활"은 첫째 죽음에서 온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둘째 부활과 동시에 있음은 논리적(論理的)이다. "첫째 부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경구절은 수 없이 많이 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이상 세 구절만 가지고도 첫째 부활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즉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영원히 살 인류의 영혼이 사형집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날 때 죽은 영혼이 새로 부활함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계시록 20장 6절은 이 이해를 돕는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 20:6-7)
성경의 "복"은 구원을 가리키며, "거듭남"은 "구원을 받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신 것(요 3:)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거룩하도다"의 뜻은 구별됨을 말하며,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양과 염소를 구분하심을 말씀(마 25:32-33)하셨다. 둘째 사망은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날에 영원히 지옥불에 들어가는 사형집행을 말하며 거듭난 자들(택함을 받은 자들)이 은혜로 이 사형선고에서 면죄(免罪)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믿는 자들이 제사장이 됨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이 설명한다. 이와같이 조화된 설명을 천년왕국설을 가지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목베임을 당함"(순교)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에 성경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오묘(奧妙)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천지와, 그 운영(運營) 법칙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글이 성경이며, 하나님께서 인간과 대화하시는 유일한 방법이 성경이라고 알게 될 때 몇 가지 성경을 이해하는데 원칙(原則)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 성경을 내가 읽도록 쓰신 글이며, 내가 필요할 때(시기) 이해하도록 그 설명을 성경 속에 준비해 두셨다. 그 설명은 가정(假定)이 아니며, 질서(秩序) 정연(整然)한 논리(論理)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필요 이상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며, 말씀의 중심은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다.
"목 베임을 당한 자"는 어떠한 시점에 순교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말세(末世:그리스도의 세대)에 순교당한 모든 믿는 자를 말하며, 어떤 의미에서 모든 택함을 받는 자들은 순교자가 된다(요 16:2, 계 11:7-9). "천년이 차도록"은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들의 수가 계획하신 수에 도달하는 때" 즉 "구원 받을 마지막 인간이 거듭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2000년 전에 순교 당한 사람과, 작년에 순교 당한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간은 동일하게 천년(완성된)이다(마 20:1-16 참조).
11) 여섯번씩이나 나오는 천년
이광복 목사님의 논조(論調)는 자기의 생각을 지나치게 강조(强調)함으로 논리성을 상실(喪失)하는 경우를 가끔 발견한다. 예를 들면 "천년"이라는 단어를 여섯번이나 반복하여 쓴 것 때문에 실제적 천년으로 해석한다고 한다. 논리적 타당성이 없다.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주휴 95년 이후의 "장차 될 일"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계시록이 씌어진 이유는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계 1:1) 정의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의 기록은 인간 저자(著者)가 보고 들은 것을 명령에 따라 기록한 것 뿐이다.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둔 것을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신 것을 사도 요한 자신은 그 뜻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4 지상토론 천년왕국의 평가
1) 로마제국(帝國)
세번째 지상토론에서 최목사님의 무(無)천년 론설에 대하여 계속 찬성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유대교 종말론"이라던가 "2-3세기의 극심한 기독교 박해시기에 발달된 지상적 천년왕국설" 등의 표현이 내 신앙으로는 못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을 사람이 쓴 글로 판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자아낸 역사적(歷史的) 환경(環境)이 계시록을 쓰도록 만들었다는 논설이다. 반면에 내가 믿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사람의 손만 빌려서 쓰셨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말한다면 계시록이 기록된 이유도 오래 전의 하나님의 계획이 때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며, 역사적 환경과 배경을 계시록에서 읽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는 상징일 뿐,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도록 만드는 원인이 될 수는 결코 없다. 특히 로마제국(帝國)의 핍박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믿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요한에게 계시를 보이셨다는 의견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으며, 그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성경의 기록을 살펴 보면서 설명하려고 한다.
신약성경의 모든 책의 저자(著者)가 다 로마제국하에 살면서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신약성경에는 로마제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지명(地名)과 국가명(國家名)은 역사적인 기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상징으로 쓰시고 있다. 가령 "애굽"하면 세상을 상징하며,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나와야만 그리스도의 나라로 갈 수 있음을 상징으로써 가르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도 주일 예배(禮拜)때 랑송(朗頌)하는 십계명(十誡命)에서 알 수 있다. 네째 계명에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한국 찬송가에는 출애굽기 20장을 인용)고 하신 것은 실제로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을 가리키기보다는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 예를 들면 바벨론은 멸망 받을 세상을 상징하며, 헬라인은 이방인을(롬 1:16, 2:9,10, 3:9, 고전 1:24, 골 3:11),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이다.
만일 두 목사님들의 논조대로 계시록이 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해서 씌어졌다면 장차 망하고 없어질 로마를 세상으로 상징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사단의 나라를 바벨론으로 거듭 상징하고 있음을(계 14:8, 16:19, 17:5, 18:2,10,15,21) 깨닫게 된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두 목사님들이 계속하여 언급하고 있는 로마제국과 당시 믿는 자들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계시록이 씌어졌다는 논조(論調)를 부정할 수 있다.
장로교 목사인 이광복 목사님이 천년왕국을 믿는다는 사실은 장로교단의 부끄러움이다. 이목사님 자신이 이 토론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칼빈은 "천년왕국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조작은 너무도 유치해서 논박할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면, 그렇게 언급한 근거를 충분하게 우리는 제시(提示)할 수 있다. 장로교의 교리만 가지고도 천년왕국이 진리가 아님을 설명할 수 있다.
계속하여 이목사님은 다시 "여섯번이나 언급한" 것과 "천년이 상징적이 아닌 이유"를 "알포드"라는 학자를 내 세우고 있다. 천년왕국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인격적으로 누리며 살게되는"은 지상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보여 주고 있으며, 성경 전체가 우리의 장래를 위하여 기록된 점을 잊어버리고 있다. 사람의 생각대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다.
이목사님의 "악의 삼위일체"는 듣기에 그럴듯하나, 사실상 우스운 일이며,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그 축복이 회복되는 것이 천년왕국의 목적임을"이라고 한 것도 성경이 뒷받침할 수 없는 억측(臆測)에 지나지 않는다. "전천년설을 위하는 학파의 신앙관을 오해하고 있는"은 신앙을 학설로서 질서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참 믿음은 위에서 주시는 것(약 1:17)이라고 하셨다. 내가 어떠한 학설을 통해서 계산하고 판정한 결과에서 오는 신앙은 사람들이 성경 없이 들을 때 그럴듯하지만,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뒷받침하지 못할 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 무너짐을 지금 볼 수 있어야 한다. 비가 오고 홍수가 날 때(마 7:24-29, 눅 7:48-49)를 기다릴 수는 없다.
"에덴동산의 회복"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몇 구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이 외에도 성경에는 우리가 다음 세대(世代)에 살 곳이 지상(地上)이 아님을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 "계시록 본문의 우월성을 훼손시키는 것인가?"라는 표현은 성경 말씀을 무엇과 비교하는 모양인데, 성경 말씀은 우뚝하게 홀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목사님은 거듭 "계시록 필자의 의도"를 말하고 있지만, 모든 성경의 필자가 하나님 자신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우리의 복음임을 또한 늘 기억해야 한다. 두 목사님의 논쟁은 마치 "계시록은 사도 시대 때 핍박을 받던 성도들을 위하여 씌어졌지만 우리도 그 내용에서 좀 덕을 본다"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께서 내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깨달을 때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수확(收穫)은 엄청나게 많아진다. 최목사님의 "헬라어 원문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독자들이 성경을 읽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2)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의 무대(舞臺)
최목사님이 계시록 20장 1-6절을 둘로 구분하여, "1-3절의 비젼이 지상을 무대로 하여 일어난 비젼", "4-5절의 비젼은 천상, 곧 보좌를 무대로 하여 일어난 비젼"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1절에 "천사가 무저갱 열쇠",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한 표현이 지상에서 일어난 일의 상징이라고 하겠지만, 3절에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린 것"은 지상의 얘기가 아니며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온 천하를 다스리신다"(벧전 3:22, 엡 1:20-21)는 천상의 얘기이다. 4절의 사망과 부활을 얘기할 때도 그 무대가 천상이라기 보다는, 지상과 천상이 하나의 무대로 등장함을 볼 수 있다.
나는 무대라는 용어가 듣기에 거북하다. 무대는 꾸며서 만드는 장치이지만, 계시록 20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창조 과정을 보여 주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지상과 천상을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지상을 가리켜 "하나님의 발등상"(사 66:1)이라고 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지금 천상 보좌에서 지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창조의 중심이 되어 있는 인간이 지상에 살고 있고, 그 분의 뜻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태여 이 장면을 무대라고 부른다면 천상과 지상 사이에 아무런 칸막이도 없는 연결된 한 무대라고 하겠다.
"큰 용 곧 옛 뱀이 땅으로 내 쫓겼다"에 대해서 성경 구절을 살펴 보고자 한다. "땅으로 쫓겼다"의 설명은 우선 사단이 천상에 있었음을 말하며, 성경에서 욥기 1장 6-12절과 시편 109편 6절(대적:Satan)의 기록이 이를 설명한다. 사단이 지상에 떨어진 순간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순간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 관점에 대한 성경 구절의 뒷받침은 다음과 같다.
처음으로 살펴 볼 단어는 "큰 쇠사슬 :a great chain"이다. 사단은 영적인 피조물(被造物)이므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쇠사슬로 결박(結縛)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쇠사슬로 결박하는 것은 상징이다. 이 사건의 설명을 유다서에서 읽는다.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處所)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結縛)으로 흑암(黑暗)에 가두셨으며"(유 1:5-6)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姦淫)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위의 유다서의 세 구절은 세 가지 심판 즉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심과, 천사를 심판하심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기록이다. 그 중 천사에 대한 심판도 과거에 있었던 일임을 문장의 시제(時制)로서 알게 된다. 또한 그 시제가 계시록 20장 1-3절에서 사단이 결박되는 시제와 다를 수가 없다. 이 사실을 베드로후서 2장 4절을 읽으므로서 더 확실하게 된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이 구절에서도 과거에 일어난 일의 기록임을 알게 된다. 성경이 역사책 모양으로 사건이 연대순으로 기록된 책이 아님을 우선 유다서 1장 5-7절의 사건의 순서가 연대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닌데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 큰 의문이 생기는 것은 사단이 이미 지옥에 던지움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결박을 당한 것"에 대하여 성경 구절을 몇 군데 찾아 보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勒奪)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이 구절은 이사야 49장 24-25절의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용사(勇士)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强暴者)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이 구절에서 "승리자", "용사", "강포자"는 사단을 가리키며,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바로 이 예언을 이루신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은 이 사실을 다짐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3) 사단이 결박(結縛)된 시기(時期)
그렇지만 사단을 결박한 순간이 어느 때 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에베소서 4장 8절을 읽어 보자.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 구절은 시편 68편 18절의 인용이다. "사로잡힌 자"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 이전의 상태이며, 우리가 거듭날 때 받는 "선물"이 사단의 포로(捕虜) 생활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다음절, 에베소서 4장 9절이 이 사건의 시기를 설명한다. "올라가셨다 하였은 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아랫곳으로 내리셨던"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죗과를 대신하는 엄청나게 큰 형벌, 십자가의 고난을 말한다. 지옥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이상 몇 구절의 성경말씀이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2장에서 읽는 결박의 시기를 잘 설명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승리를 찬송가에서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박"에 대하여 그 뜻을 좀 더 생각해 보자.
"자녀들은 혈육(血肉)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사단의 멸망을 가리킴을 알게 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塗抹)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4-15)
여기에서 "정사와 권세"는 사단을 지적하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말씀사신대로 "강한 자를 결박"하시는 것이다. 이 결박에 대하여 "완전히 사단의 거동(擧動)을 폐쇄(閉鎖)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뜻을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말하자면 사형 언도를 받은 사형수가 사형 집행시까지 기동(起動)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비유로, 미국 역사에 보면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을 쇠살슬을 달아 놓고 부려 먹던 일을 생각나게 한다. 그 후 흑인 노예(奴隸)들의 쇠사슬이 없어?다 할지라도 "그들이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는 표현은 노예 생활을 잘 설명한다. 이러한 생각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벧전 5:8)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얻는 결박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는 순간 사단은 땅에 떨어졌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 계획이 구체적으로 시작되어, 사단은 그 계획을 절대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인봉(印封)하신 것이다. 사단은 이 시기를 알고 있었다(마 8:29).
이목사님이 계시록을 가리켜 "장차 될 일이지만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라고 한 얘기는 성경적인 진리이지만, 쳔년왕국을 믿는다는 사실은 이 진리와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논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천년왕국을 믿는 생각은 특정(特定)한 시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들을 염두에서 버리지 못하는 망각에서 오기 때문이다. 성경이 실제적이냐 상징적(象徵的)이냐 하는 논쟁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 성경은 영적인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들이 다 한결같이 영적인 우리 구원(복음)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에 대하여 성경에서 읽을 때 그 뜻이 실제적이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지만, 현재 우리 믿는 자에게 제시(提示)되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영적인 뜻 외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는 점이다. 천년왕국을 믿는 자들은 아직도 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실질적인 사실로서 등장한다고 큰 오해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뜻이 반드시 20세기에 사는 우리에게는 영적인 뜻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옛 성전 자리에 회교도의 사원을 짓도록 허락하신 것과,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계의 어떠한 국민보다도 자기들의 피를 이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되도록 내버려 두신 사실이다. 이러한 형편에서도 이스라엘이 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것이라는(사 27:13, 렘 3:14) 것과, 성전을 다시 예루살렘에 건축하리라는 주장은, 기사와 이적이 아직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다. 그 신앙은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순간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다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친다. 세상의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보다 특수하게 하나님의 총애(寵愛)를 받을 수는 없다. 어떤 국가의 국민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창세전에 계획하신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4) 두 개의 왕국(王國)
이목사님은 다시 학자 "에베렛 카버"의 견해를 소개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는 자기의 구원 계획 속에 전혀 참고하시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계 11:2). 성경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수가 차는데만 관심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계 6:11, 롬 11:25). 적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도 이 지상에 천년왕국이 올 것이라는 그릇된 이해를 해소(解消)할 수 있다. 이목사님은 "이교가 결박을 당하는 것"을 "용이 결박을 당한 것"으로 "에베렛 카버"의 학설을 동의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첫째 세상에는 두 개의 영적 왕국이 있으며, 온 인류가 이 두 왕국에 속해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다. 어떤 한 사람이 두 왕국에 동시에 적을 둘 수도 없고, 또 아무 왕국에도 적을 두지 않을 수도 없다. 그 왕국들은 사단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일단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온 사람은 영원한 입적(入籍)을 하는 것이며, 사단의 왕국으로의 이적(移籍)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단의 왕국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적을 한다. 이 이적의 과정은 완전히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다.
이 사실을 통해서 분명해지는 진상이 있다. 그 진상은 성경이 이 두 왕국을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특정한 집단을 말할 때도 이 두 왕국을, 또는 두 왕국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비유가 예외 없이 이 두 가지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상의 어떠한 저명인사(독일의 히틀러 같은)를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한 판정은 다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다. 용과 뱀은 사단의 다른 이름이며, 사단은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겔 28:12-16)이며,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가 되었다(창 3:15, 고후 11:3). 그렇기 때문에 사단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며, 이 적그리스도는 사도시대부터 일하고 있음을 요한1서 2장 18절에서 읽을 수 있다.
5. 진리의 말씀을 잘못 나누는 교리(요약)
얼마 전에 스퍼어젼(Spurgeon) 목사가 "진리의 말씀을 잘못 나누는 교리"(Wrongly Divideding Word of Truth) -세대주의 비판- (A Critique of Dispensationalism) "죤 거스너"(John H.Gerstner, PhD)가 쓴 책을 저에게 우편으로 보내 왔습니다. 이 목사님이 주일학교에서 책 "1994"를 6주간 우리에게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그 후 4개월이 지나서 그 분이 나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책을 사서 보낸 것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캠핑씨의 성경해석 방법이 세대주의자(Dispensationalist)와 같다는 것을 믿게 하려던 것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의외로 좋은 책을 읽었고 오히려 스퍼어젼 목사의 판단이 잘못이라는 반증을 할 수 있는 자료가 생기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말세를 눈 앞에 둔 우리는 어떤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음을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아주 효과적으로 전도할 계획을 함께 해야 할 때에 내가 시간을 낭비하지나 않나 생각도 했습니다.
저의 독후감은 사단의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현명한 사단이 제일 먼저 선수를 친 곳이 성경번역이며, 그 다음에 일을 시작한 곳이 신학교라고 깨닫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수가 흘러 나와야 할 원천을 흐리게 한 것이지요. 사실은 세상의 신학교가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알게 되면 세상의 기독교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신학교들이 16세기에 문을 열면서 다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개혁주의 신앙의 등불이 막 꺼지고 있는 때라고 믿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의 발전상을 보게 되는 것은 교회가 어떻게 배도하는데 이르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며, 말세의 징조를 신학의 동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못 나누는 교리 -세대주의에 대한 비평- (요약)
제 1장 세대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
2세기: 저스틴 마티일(Justin Martyl)이 전천년설을 믿었다는 라이리(Ryrie)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3세기 후: 어거스틴(Augustine)은 한 때 천년왕국설(Chilliasm)을 믿었으나 얼마 후 천년왕국설이 육신적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중세기: 토마스 아퀴노스(Thomas Aquinas)는 교회가 영적인 천년왕국의 영광을 누린다고 믿었다.
종교개혁기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며 동시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신다고 믿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에서 읽을 수 있다. (a) Tetrapolitan (b) Basle (c) Second Helvetic (d) Heidelberg (e) Belgic (f) The Canons of Trent (g) Orthodox 1642 (h) Westminster (i) 영국교회의 39개 조항 등이며, Lutheran Augsburg 신앙고백은 유대교와 First Helvetid 신앙고백이 지상에 황금시대가 1000년이 계속된다는 믿음을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칼빈(Calvin)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 14만 4천(계 7:4,14:1), 666(계 13:18), 그리고 1000(계 20:2)을 실제적인 숫자로 보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꿈을 꾸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종교개혁 후: 근대에 와서 전천년설의 꽃이 피기 시작하여 심지어 개혁교회에도 침투하였다.
제 2장 영국의 현대 세대주의
영국에서 현대 세대주의는 성공회(Anglican 교회)를 나와 설립한 형제(Brotheren) 교회가 시작하였다. 형제 교회의 창시자 중의 하나인 다아비(Darby)의 설교와 출판물을 통하여 세대주의는 전파되었다.
제 3장 미국의 세대주의
프리머스(Plymouth) 형제 교회에서 세대주의는 시작되었다. 법관으로 있던 스코휠드(Scofield:1843-19??)는 부루크스(Brookes)의 영향을 받아 조합(Congregational) 교회의 목사가 되고 통신 성경 강좌를 통하여 세대주의를 가르쳤고, 유명한 스코휠드 주석성경을 발간하였다.
무디(Moody)는 다아비의 영향을 받고 세대주의를 가르치는 무디 성경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최이훠(Chafer)는 세대주의 신학으로 유명한 달라스(Dallas) 신학교를 설립하고 PC USA의 목사가 되었다. 달라스 신학교는 스코휠드 성경을 쓰며 또 장려한다. 달라스 신학교는 세대주의의 주류가 되는 다아비, 스코휠드 그리고 최이훠의 신학을 가르친다. 달라스 신학을 졸업하기 위하여는 세대주의를 인정하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Dr. 월보오드(Walvoord)(캠핑씨와 6시간에 걸쳐, 전천년설 대 무천년설의 논쟁을 한 일이 있음. Family Radio에서 Tape를 얻을 수 있음)와 라이리는 동일한 세대주의를 달라스 신학교(1925 A.D. 설립)에서 가르친다.
이 세대주의 세력은 성경학교를 통하여 전파되었고, 유명한 무디 성경학교와 장로교 출신인 씸슨(Simpson)이 설립한 선교사 훈련소(Missionary Trainning Institute, Nyack, NY)를 통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씸슨은 "The Chrstian and Missinary Alliance 교파를 설립하게 되었다. 신학교들은 달라스 신학교에 이어서 James대학, Weaton대학, Grace신학교, 서부 보수 침례신학, Capital 성경신학교 등이 세대주의를 가르쳤다.
세대주의 신봉자들의 대회(Conference)가 열을 띄우기 시작(1800년대 후반)했고, 그 중에서 나이아가라(Niagara) 사경회는 대표적이며, 이 대회의 연사들을 보면 Moorehead, Garrett, Gaebelein, Whittle, Needham, Gordon 그리고 Pierson 등이다. 세대주의자들의 선교활동은 너무나도 현저하며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명사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Rex Humbard, Jerry Falwell, Jim Bakker, Jimmy Swaggart, James Robison,그리고 Billy Graham이다.
제 4장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교회
세대주의가 북방 장로교회에 들어온 것은 1878년 프린스톤에서 시작한 정통파(Princeton-oriented Fundamentalism)의 선구자 쌘딘(Sandeen)이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가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초기에는 세대주의 신학자들과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적 그리스도의 요소를 가진 자유주의 신학과 대결하기 위하여 연맹하였다. 이 연맹은 지금까지 존재하며, 저자도 그 연맹의 일원이다.
세대주의는 19세기에 새로운 현상으로 신학을 조성하였으며 프린스톤 신학과는 정반대의 학설을 주장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이미 세대주의는 장로교회에서 극도로 왕성했고 1936년 세대주의 신봉자인 Machen을 중심으로 PCA가 갈려 나왔다. UPC USA(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의 Xenia신학교 교장인 모아헤드(Moorehead)는 장로교 세대주의의 일인자이며, 스코휠드 주석성경(1909 A.D.)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이다.
화란(Dutch) 개혁교회의 저명한 신학자 피터스(Pieters)는 "스코휠드 관주성경은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위험한 책"이라고 선언하였다.(1938)
전천년설의 문제점
모든 세대주의자들은 전천년설을 믿는다. 이 두 가지를 논리상 분리할 수 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전천년설은 세대주의의 일부이다. 이 두 학설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동일한 결론을 가지고 온다. 성경을 상고할 때 전천년설을 가르치는 구절을 찾을 수 없고, 또 전천년설을 해석할만한 구절을 찾기도 불가능하다. (The Millennium: Boetter 1958 A.D.) 전천년설은 종말론이고, 세대주의는 신학으로서 전 천년설을 포함한다. 세대주의는 종말론과 신학 전면에 있어 역사상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세대주의는 도덕률 폐기론주의자(Antinomian)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신학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말할 때 구약의 이스라엘과 현대교회를 분리하는 것은 원래의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몰몬교도들이 이 전천년설의 신봉자이지만 다른 교파의 전천년설의 신봉자들이 그들과는 다른 것을 믿는 줄 알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이 단 한 번 있을 것을 가르치고 있으나, 전천년설의 신봉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휴거하기 위하여 재림하시고 세상 마지막에 그 믿는 자들과 같이 세 번째로 오신다는 신기한 생각을 하고 있다. 칠년 환난은 유대의 남은 자들을 정결하게 하는 때라고 말한다.
제 6장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Hermeneutics)의 문제점
세대주의는 성경의 직역을 보장하는 것 같이 말하나 사실은 그 신학의 학설이 직역의 방향을 말하는 것 뿐이다. 세대주의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졌음을 고백한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 무오류(無誤謬)를 주장하는 세계 심의회(審議會: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의 회원이다. 성경해석은 누구에게나 다 어느 점까지 직역을 할 수 있으나 결국은 영적인 뜻을 배우게 된다. 세대주의는 성경의 통일성을 부정하며, 성경의 분리성을 조장한다. 세대주의는 성경을 시대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상반이 되는 뜻을 조성하며, 상호간의 연결을 가져오지 못한다.
성경의 계시는 사건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전개되며 한 사건은 다음에 올 사건을 지적한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이러한 사건들을 연결하여 조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는 신령한 것을 신령한 것으로 해석하는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나, 세대주의는 말씀을 별 생각 없이 멋대로 대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직역을 보장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세대주의는 이 일에 대하여 확고한 기준이 없다. 특히 예언을 직역할 수는 없다.
제 7장 신학, 가짜 칼빈주의
교회역사에는 단지 3가지 신학이 있다.
1. 첫째는 어거스틴(Augustinian)신학, 칼빈신학, 혹은 개혁주의라 하며,
2. 둘째는 준 페라지안(Pelagian)신학, 알미니안(Arminian)신학, 혹은 복음주 의(Evangelical)이며,
3. 셋째는 페라지안, 쏘시니안(Socinian),혹은 자유주의(현대주의)이다.
세 번째로 열거한 자유주의 신학은 고려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전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교리라고 부를 수 없다.
세대주의는 종말론 밖에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인상을 준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어떤 세대주의자는 칼빈의 5대 교리 중 "제한된 구속"만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나 결과적으로 5개 교리를 하나도 믿지 않는다. 영국의 침례교 목사였던 스퍼어젼(C.H. Spurgeon)은 말하기를, 칼빈주의란 기독교의 딴 이름이라고 하였다. 칼빈주의를 부인하고 기독교인이 될 수는 결코 없다.
세대주의는 알미니안 신학과 구별할 수 없게 성경을 믿는다. 알미니안 신학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어느 정도의 선을 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다"고 가르치며,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기 보다는 죄인인 인간이 어느 정도 하나님 앞에 옳바를 때에 하나님의 응답으로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인간이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선을 택하고 행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세대주의는 인간이 선을 행할 마음의 여유가 있음을 믿고 인간의 완전 타락을 믿지 않는다.
조건이 붙지 않는 선택을 믿는 듯 하나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신앙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선택하셨다고 한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도 믿는다. 세대주의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하는 부분이 있고 인간이 가져야 할 믿음이 또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만들고, 성령이 선택된 사람만 구원한다고 믿는다.
개혁주의가 보는 속죄는 "아버지께서 내게 준 자"를 속죄하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사람을 속죄하신다는 교리는 개혁주의 신앙으로는 받아 들일 수 없다. 알미니안 신앙은 세대주의와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인을 사랑하심으로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다고 믿는다.
슬픈 사실은 개혁신앙을 가르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의 많은 교수가 개혁주의를 잘못 알고 있고 세대주의에 접근하며 장로교회가 이미 1920 A.D.부터 "부활한 그리스도는 온 세상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적 알미니안 신앙은 "사람은 신의 도움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지만, 믿음이 없이는 거듭날 수 없다"고 한다. 순서적으로 보면, (1).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2). 인간의 신앙이 오고, (3). 다음에 거듭난다. 이상은 세대주의의 가르침과 동일하다. 결국은 죽어 있던 영혼이 자기 힘으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리는 거듭나기 때문에 신앙이 있다고 하며, 세대주의는 신앙으로 거듭난다고 믿는다.
칼빈의 5개 교리를 비교하면:
1. 완전 타락(Total Depravity)
칼빈주의: 타락한 인간성은 그 생각과 느낌과 의지에 있어서 완전한 죄인이다.
세대주의: 인간이 타락은 했지만 복음을 받을 만한 양심은 있다.
2. 조건이 붙지 않는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칼빈주의: 온 인간은 완전히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중의 몇몇을 선택하셨다.
세대주의: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선택하셨다.
3. 제한된 구속(Limited Atonement)
칼빈주의: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만을 위하여, 아무 조건이 없이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신다.
세대주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위하여 계획하셨다.
4. 거절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칼빈주의: 하나님께서 택하고 독생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다.
세대주의: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이어서 하나님은 거 듭나게 하신다.
5. 상실될 수 없는 구원(Perseverence of the Saints)
칼빈주의: 성령이 거듭난 사람의 신앙을 지키며, 선한 일을 하도록 인도하며, 원죄로 인한 범죄함과 싸우며 그 죄의 정도는 죽을 때까지 가면서 줄어 들게 된다.
세대주의: 새로 거듭난 본성은 결코 범죄하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 원래의 낡은 본성은 거듭나기 전과 같이 악하며, 죽을 때 까지 간다.
제 8장 분명치 않는 복음주의
세대주의의 세대에 대한 이해와 주장은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대주의는 개혁신앙의 4개 조항만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상 알미니안의 5개 조항을 믿고 있다.
이 사실은 극히 슬픈 일이며, 세대주의는 흐리멍덩한 기독교의 교리임을 자처한다.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세대주의의 가르침을 비난해야 하며, 이 비난을 은연중에 늘 해야 하지만 어떠한 때에는 노골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두 가지의 구원을 믿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섬기는 주님이 곧 진리라면, 우리가 땀을 흘리며 여러 방향으로 진리를 찾아 보는 수고를 왜 해야 되는가?
구원에 대한 교리는 논쟁할 것이 못되고, 절대적이며, 또 타협할 수 없는 기독교의 근본이다. 세대주의는 우리의 구원이 한 길 밖에 없다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 떠나고 말았다. 숱하게 많은 다른 중요한 진리를 피력할지라도 이 기독교의 본질이 되는 메시지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우리는 이단을 정의할 때 이 기독교의 본질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을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대주의가 곧 이단이며, 기독교 교회에 속할 수가 없다. 이 사실은 매우 심각하며, 과장된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는 빈번히, 그리고 필사적으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신학적인 교리에서는 이 사실을 찾을 수가 없다.
스코휠드는 말하기를 "우리가 받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한다.---구원을 받은 상태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시험할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느냐 혹은 거절하느냐 하는 질문을 구원의 결실인 선한 일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상태와 부합해서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면, 이 상태는 하나님과는 적이 되는 것이며, 빛의 세계를 미워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그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 들일 능력이 없다.
세대주의의 두 가지 구원은 첫째로는 구약의 구원이 법을 지킴으로 왔고, 둘째로는 신약시대에 죄인이 필요로 하는 믿음을 가짐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세대주의 신학의 근본적 차이가 이 두 가지의 구원론이며, 이것을 부인한다면, 그는 세대주의자가 아니다. 세대주의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관계는 되지만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지는 않다. 어떤 세대주의 학자들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신학적인 제도를 보면 그렇지 못하다.
결론적으로 세대주의는 두 가지 길의 구원을 가르치는 잘못을 가지고 있다. 현대에 와서 세대주의가 이 잘못을 고치려 하나 그 상처는 너무나 커서 그 심한 상처를 밴데이드(Band-aid)를 바름으로 고칠 수 없는 것이나 같게 되었다.
제 10장 분명치 못한 복음주의
세대주의가 보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는 복음을 부인한다. 세대주의가 이스라엘과 교회를 은연중에 분리하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방식도 다르고, 장차 올 미래도 다르다고 한다.
세대주의가 생각하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같은 구원을 가지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옛날과, 지금과, 장래에 영원히 동일하시다는 진리를 믿지 않는 결과이다. 같은 구세주로 같은 구원을 받는다면, 어떻게 두 종류의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의 구원을 받은 인물들은 성령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며, 성령을 받지도 않았으므로 신약시대의 신자와 다르다고 믿는다. 세대주의자들이 열성을 가지고 이런 일을 믿는다는 것은 같은 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근본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동일하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이 기본적으로 같은 기초를 "사도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세웠다고 하였다.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은 다 함께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가 된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수행한 역할이 좀 다른 것 뿐이다.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시인하였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고
출애굽기 19장 6절, 신명기 7장 6절, 10장 15절, 이사야 61장 6절은 이 사실을 잘 설명한다.
제12장 세대주의의 도덕률 폐기론과 진정한 은혜와의 대 조:성결화(Sanctification)의 교리
세대주의 저서를 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도덕률 폐기론(Anti- nomianism)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버리는 것은 세대주의를 버리는 것이다. 이 교리는 성결화를 잘못 믿는 이단이다. 세대주의의 성결화를 이해하는 일은 그들이 거듭나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기독교인이 거듭남으로써 한 사람이 두 가지 인격과 싸우게 되며, 새로 난 인격(거듭난)은 낡은 인격과 싸워 이기게 된다. 이 새로운 인격은 성령이 우리 속에 오심으로 형성이 된다.
세대주의 교리는 인격이 성결화된다는 것보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성결화의 경험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과 절대로 무관함을 주장한다. 세대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의 성결화의 경험이 신앙의 확신을 주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한다.
개혁주의 신앙은 기독교인의 성결화는 믿음의 확신이라고 믿는다.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내가 성결화되었는가를 아는 것과 같다.
세대주의 교리는 신앙을 얻는 일이 지성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신뢰한다. 그들은 죄인임을 시인하고 누구에게나 주어진 구세주를 믿는 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믿음이 인정되는 것이다.
다음은 세대주의 신학자 피터슨(Peterson)의 인간성에 대한 설명이다.
"기독교인은 그들의 생활을 열어 놓아야 한다"
"기독교인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싸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령에게로 간다"
"기독교인은 육신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없애야 한다."
세대주의 교리에 의하면 기독교인에게 성결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세대주의는 성결화를 "기독교인을 기독교화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개혁신앙은 말하기를 "거듭난 인간성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의 기적적인 은혜로 우리의 영혼이 성장한다"고 한다.
한편 세대주의는 스코휠드의 말을 빌린다면 "새로운 인격(Nature)이 내 속에 살게 되며 그 인격은 나 자신은 아니며 또 거듭나는 과정은 물론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기한 제 3자가 나타난다. 이 제 3자는 신성(神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도덕률 폐기론(Antinomi- anism)이다. 세대주의는 믿음만이 구원에 필요한 조건이므로 도덕률에 매여서 살 필요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률 폐기론에 의하면 "거듭나면 새로운 신격이 탄생되며 이 신격은 낡은 인격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우리가 구원의 인정을 받는 것은 바로 이 성결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낡은 인격은 새로 난 신격의 구원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라고 한다.
개혁주의 신앙은 인간이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며 그 후로 낡은 인격이 새로운 삶의 원칙을 따라서 노력하며, 이렇게 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히 12:14)고 가르친다. 이러한 노력이 없는 사람은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선택이 그의 행함에 있지 않고, 그러나 행함을 가지고 그가 선택된 사실을 확인한다. 루터나 칼빈이나 그리고 건전한 성경교사들은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만 그 믿음이 단순히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또한 가르친다.
제 13장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논쟁과 세대주의의
마지막 말
도덕률 폐기론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수는 있지만 그를 자기 생활의 주권자로 받아 들이지는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논쟁을 "주권과 구원의 논쟁"이라고 불리어 왔다.
세대주의는 20세기에 와서 기독교인의 인구를 가장 많이 차지했지만 왜곡된 복음을 지니고 있다. 세대주의는 20세기 전반을 휩쓴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을 잘 대처할 수 있다. 세대주의는 복음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성경적인 지혜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세대주의는 한 말로 스코휠드 추종자들이며 이 세대주의는 모든 교파와 교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도덕률 폐기론자는 말하기를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도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없을 때 그리스도는 그를 버릴 것이며 그는 심판날에 저주를 받는다"고 말한다. 도덕률 폐기론은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 침투하였고 선교사들을 통하여 외국에 널리 퍼졌다.
달라스 신학생의 신앙고백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나 내 생활의 주권자는 아니다.
2.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니다.
3. 회개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내 마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며 죄를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4. 기독교인이 타락하고 되돌아 오지 못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그가 천국에 가는데는 상관이 없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수집한 과거와 현재 세대주의의 역사는 세대주의가 다른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
역사적으로 보아서 세대주의의 변화가 좀 있었으나 어제와 오늘날의 세대주의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세대주의는 칼빈의 4개 교리만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대주의는 근본적으로 도덕률 폐기론이다. 사실상 칼빈의 5개 교리 중 한 가지도 믿는 것이 없다.
세대주의는 모호한 복음주의이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하나, 구원은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성경의 근본교리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세대주의는 두 가지의 구원을 주장하며,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른 구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는 알미니안 신앙을 믿으며, 기독교인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으나 인생의 주권자는 아님을 가르친다. 선행을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가르친다.
역사상의 모든 이단자들이 참으로 진지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기준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의지하여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4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내가 세대주의 신봉자들에게 간청하는 것은 내가 가르치는 내용에 오류가 있으면 지적하고 그렇지 않으면 세대주의 오류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개혁주의와 세대주의가 다 옳을 수는 없다. 어느 한 쪽이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거짓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회개를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 앞에서 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잘못 나누는 교리 -요약 끝-
책을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고역을 치른 느낌이다. 왜 그렇게 "주의"도 많고 "설"도 많은지? 개혁주의(칼빈신앙)가 성경적이라면 그냥 성경만 가르치면 될 것이지, 누가 무엇을 주장했고 가르친 역사가 신학자들에게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다. 특히 신학자들의 책 "1994"에 대한 거부감이 그들의 학설과 결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그들의 불평을 들으면 "과거에 누구는 어떻게 했는데"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세상 지식(신학)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바른 신학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위대하고, 무한하고 정확한 말씀(성경)을 접근할 때 사람의 콩알만한 지식에서 나온 신학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볼 때 가련한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좋은 선생을 가진 우리는 행복하다. 캠핑씨의 가르침은 어떠한 신학자의 가르침과 비교할 수 없이 고상하다(빌 3:8).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수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얻은 또 다른 느낌은 시한 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선언을 들은 것 같다. 전세계 기독교인 중 90% 이상이 세대주의자며, 알미니안이며, 전천년설을 믿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성경이 정의한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이 책을 나도 믿으며, 그들은 "다른 복음"을 믿는다는데 동의한다.
얼마 전에 성결교 원로 목사님과 대화를 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성결교는 예정론을 믿지 않습니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믿지 않습니다"와 동일한 고백이다.
"내가 다시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말씀의 흉년 중에 하나님께서 내게 양식을 주시는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6-1. 요한계시록 21장 새하늘과 새땅
요한계시록 20장 공부에서 지옥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사실상 지옥은 우리가 갈 곳이 아니고 보니, 우리의 관심은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965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오던 생각을 합니다.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왔습니다. 미국에 이민 오는 사람들이 해마다 백만이 좀 넘는다고 합니다. 이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제각기 큰 기대를 가지고 미국에 오기는 하지만, 그 기대가 바라던 것처럼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기대는 실망과 좌절이 있을 수 없는, 실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이 천국에 대한 공부를 그냥 넘길 수 없어, 얼마동안 공부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비유이며 상징이기 때문에, 천국의 설명도 모두가 비유이며 상징입니다. 미국은 어디가 어떻고, 민심이 어떻다는 식으로 천국을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적은 지식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상해 보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는 너무도 신기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 다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더욱이나 완전 무결하게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어떻게 우리가 짐작이라도 하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한도에서 비유의 뜻을 찾아 보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인간들은 왜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세상에 큰 정을 붙이고 살며, 성공한 사람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게 됩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한 조각 땅을 사기 원하며, 그 땅 위에 집을 짓고 살 꿈을 꿉니다. 자녀를 가장 좋은 학교에 보내고, 자녀들의 성공을 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하게 됩니다.
나그네: 어떠한 독자가 질문하기를, 왜 완벽하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할 것을 미리 방지하시지 않으셨는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답변을 "완벽한 새 하늘과 새 땅을 택하신 백성에게 주시기 위함이다"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기 전에 하나님의 권능과 그 크신 사랑을 미쳐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만이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되며, 또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까지 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또 즐거움으로 그를 예배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이 나그네의 생활임을 성경은 거듭 가르칩니다. 출장을 자주 다니는 저로서는 나그네 생활의 불편한 점을 잘 압니다. 세상에서 사는 생활이 너무도 편하게 되면, 내 본향이 천국인 것을 쉽게 망각하고, 세상에다 뿌리를 박으려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내가 참으로 천국에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과정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다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살면서, 또 재물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가나안에 정착(定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나그네의 생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이 상징적인 천국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말할 것도 없이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은 상징적인 천국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사실은 "처음 땅이 없어 졌고"라고 한 점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처음 세상은 다 낡아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한 가지 옷을 입고 또 입으면 낡아지는 것과 같다(시 102:26)고 하겠습니다. 지구도 낡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걱정하는 공해(公害)와, 또 공해에서 오는 기후의 변동이 그러한 것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인공위성: 재미있는 신문 기사를 한 가지 소개합니다. 1999년 6월 24일자 USA Today의 기사입니다.
"신예(新銳) 기술로 장식된 지구는, 태양의 주기적 에너지 방사로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Sun's season of rage could darken high-tech earth)"라는 기사입니다. 기사 내용은, 태양 표면에 충전된 가스(gas)의 집합이 서로 충돌하고 또 방사를 하며, 이 충전된 에너지는 그 크기가 11 억톤(11 billion tons) 가량이며, 이것이 우주 공간에 발사된다고 합니다. 이 가스 집단은 약 3일이 걸려서 지구에 도달하며, 인공위성과 지상에 있는 전자장치를 파괴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스 집합의 주기적인 방사가 1959년에 있었으나, 그 당시에 피해를 걱정할 위성은, 미국과 소련이 시험적으로 떠올린 몇 개의 인공위성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천의 인공위성이 지구 표면을 돌고 있으며, 여러 가지 현대 과학기술은 인공위성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1989년도 5월에 소량의 이 태양의 가스 방사가 있었고, 그 때 Galaxy라는 PanAmSat회사 인공위성이 85%의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상당한 지역에 전화 단절과, 라디오 및 비디오 통신이 오랫동안 좌절되었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기술 GPS: 현재 모든 항해용(航海用) 전자 기구들이 예외 없이 GPS[세계적 위치(位置) 지적(指摘) 장치: 지구를 둘러 싼 16개의 인공위성이 지상에 신호를 보냄으로써, 그 신호를 받는 수신기는 자체의 위치를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장치]를 사용합니다. 항공, 해상, 그리고 지상의 항로를 예외 없이 GPS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05년경에 있을 태양의 가스 방사는 GPS의 효력이 상실되게 하는 등 21세기 문명사회의 수족을 묶어 버리는 사건이 될 것이라는 기사입니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의 발명과 발전이 인간 문화문명의 개혁을 가져 왔지만 2000년에 일어날 Y2K 버그(bug)의 참상을 예기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가 놀랄만한 발명과 발전을 가져오지만, 그 지혜는 인간 자체를 올무에 빠지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문화문명의 발전은 인간과 지구의 파멸을 준비하고 말세를 준비하는 도구로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사람들"만이 갈 수 있도록 정하셨습니다. 인간의 육신이 되는 혈(血)과 육(肉)은 천국을 상속할 수 없다(고전 15:50)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거듭날 때 "새롭게 난다"는 말씀과 일치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실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이 구절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는 광경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이사야서 65장과 66장은 그 자세한 내용을 가르칩니다. 그 내용의 몇 구절만 읽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 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 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사 65:17-1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의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사 66:22)
이상의 구절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며, 그것은 영원한 곳이며 더 이상 낡아지는 일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서 65장 20절에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향한(享限)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다는 고해 (苦海):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신 요한계시록 21장의 말씀을 이사야서 65장은 잘 설명합니다. 바다는 세상을 상징함을 배운 적이 있으며, 세상은 고해(苦海)입니다. 바다는 항상 풍랑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다는 계절을 따라 태풍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바다의 곡절을 인간의 삶과 비교하신 성경 말씀을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왕은 시편 69편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2-3)
이 기도야말로 풍랑 많은 바다에서 부르짖는 하나님 백성의 호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기쁨과 즐거움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또한 새 땅에서는 기쁨과 즐거움 밖에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하셨습니다.
이사야서에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새로운 "창조"가 무엇인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알게 되는 것도 새 창조의 일부임을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라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택하신 백성이 창조주를 예배할 수 있는 곳입니다. 새로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 새로 창조된 인간들은 더 이상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충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풍성함을 이사야 65장 24절은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6-2. 요한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II)
요한계시록 21장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城)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15-16절이 잘 설명합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機會)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城)을 예비하셨느니라"
새 예루살렘: 이 구절에서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신 그 성, 도시(city)가 즉 예루살렘입니다. 세상 종말에 예수님께서 오른편에 갈라 놓을 양들이 들어갈 곳으로 이 도시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에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신 것은 새 예루살렘이 믿는 자들이 상속 받을 영원한 도시임을 가르칩니다. 이 성에 대하여 요한복음 14장에는 "내 아버지의 집"에 예비한 처소라고 하셨고, 또 예수님께서 이 처소를 가리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성경 말씀 몇 구절을 종합하여 읽어 보면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상징입니다 천국은 "아버지의 집"이며, 예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읽어 나가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절)고 하셨고,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저와 함께 하리라"(23절)고 하심으로 "새 예루살렘"은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살 곳을 상징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천국의 일면(一面)만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 다른 면(面)의 천국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하신 면 입니다. 단장한 신부를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평생에 가장 정성을 드려 화장을 하며, 그 아름다움을 두고두고 기념하기 위하여 결혼사진을 찍지 않는 신혼부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부의 단장은 따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9-15절은 여자들의 단장법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신부가 된 믿는 자들이 있을 곳임을 가르칩니다.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신부를 무한히 사랑하심을 또한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크기를 인간의 제한된 사고로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날을 가리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하심으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다시 창조될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룩한 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거룩하다는 뜻은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며, 거룩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상징하는 지성소(至聖所:Holy of Holy)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예루살렘은 택하신 백성이 모이는 곳이며, 또한 택하신 자들이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3:16). 그러한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하여 그 날을 기다리며 준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절의 내용 중에서 유의해야 할 어구는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제적인 건물이 내려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특히 11절부터 예루살렘의 모양을 문(門)이라든가, 금과 은, 혹은 높이와 길이를 설명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실제적인 건물로 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생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공상에 지나지 않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니"의 뜻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마련하심을 말하며, 지상에 속한 아무 것도 우리의 구원을 돕지 못함을 가르칩니다.
3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의와 함께 계셔서"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哀痛)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의 장막"이 물질적인 장막을 가리킬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구원 받은 자들의 숫자를 알 수 없지만, 수 천만의 인간이 거처할 장막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을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과 영원히 살 곳임을 이 구절도 설명하며, 천국을 설명하는 여러 구절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정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 사실 것의 선언입니다. 현재 우리는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알고 믿고 기다립니다. 그 때에 가서 우리는 새로운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그 때에 그의 영광 속에 우리가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눈물이 없는 곳: 4절은 세상이 고해(苦海)임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눈물을 다 모으면 강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가르칩니다.
첫째로 믿는 자들의 눈물은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왕의 시를 우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譴責)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懲戒)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陰府)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困乏)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1-6).
다윗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택하시고, 이스라엘 건국에 있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전쟁에 승리하고,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섬기던 택하신 백성의 상징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죄를 지을 때마다 눈물로 통회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죄에 대한 통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애통(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의 눈물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라고 했습니다. 순결하게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러한 눈물이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으로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가 눈물을 흘립니다. 시편 126편 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사랑하는 가족이 구원 받기를 원하며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던 기억을 하십니까? 그리고 또 사랑하는 가족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보고 감사의 눈물을 흘린 때를 기억하십니까?
말세에 살고 있는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교회가 늘어가는 것을 보며 한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판날이 가까이 옴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을 여러분도 흘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殺戮)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哭泣)하리로다"(렘 9:1)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주야로 애통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 한국인들은 비참한 전쟁을 경험하고 많이 울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인간들이 울게 되는 일들이 또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퍼하는 일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일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에도 몹시 슬퍼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의 슬픔은 세상이 하나님을 극도로 배반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말하기를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세상을 볼 때에 눈물을 시냇물 같이 흘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법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것이 기쁜 일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것들이(첫 번째 창조) 다 지나갔음이러라"(4절)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라고 한 것은 실제적으로 눈에 눈물을 씻기시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슬픈 일들이 다시는 오지 않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슬픈 일들은 세상의 종말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사야서 65장은 이 일에 대하여 분명한 주석이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당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創造)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사 65:17-19)
여러분께서 천국에 갈 때 지상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을 다 만날 것으로 기대하고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65장은 여러분의 기대를 어긋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요한과 야고보와 베드로)이 높은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본 것을(마 17:) 어떻게 이해하는가? 라고 반문(反問)할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그들이 지상에서 살 때에 가졌던 인격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비교한다면 지상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을 알아 볼 것이 분명합니다 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과 지상에서 가졌던 관계는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새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며, 우리의 모든 사랑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며, 이전에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더 큰 사랑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완전한 사랑의 반영(反影)일 것입니다. 과거의 슬픔을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고 사랑과 기쁨만을 누리며 영원히 살 곳, 그리스도께서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러분과 함께 바라봅니다.
5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信實)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절: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5절의 말씀은 앞 절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짐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이 구절에서 다시 강조하시며,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모든 말씀이 참 진리임을 또한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루었도다"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완성하셨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놀라운 계획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 완성된 구원 계획을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완성 하셨다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신 것과 같은 뜻인데 왜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KKJV)]라고 하신 말씀도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것과 동일합니다.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영원 전에 계셨고, 또 영원히 우주를 다스리실 그리스도를 왜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겠습니까? 그 뜻은 바로 우리의 구원 계획을 창세 전에 홀로 계획하시고, 또 홀로 완성하실 것을 가르칩니다.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하심으로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시 설명하며, 인간의 아무런 노력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자유의지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가르칩니다.
"값없이 주리니"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의 뜻을 설명하는 어구입니다.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 혹은 "우리가 이기는 자들보다 더 나으니라:(롬 8:37,KKJV)고 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는 순간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릴 기업을 받을 후사가 됨을,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 8:17)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로마서 8장 31절에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하심으로 7절에서 말씀하신 "이기는 자"는 바로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이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또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유업을 얻을 사람은 끝까지 노력하여 이기는 자"라고 합니다마는, 로마서 8장 32절을 읽어 보면, 이기는 것도 내가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유업을 말할 때 재산과 토지를 말합니다마는, 그러한 것은 마지막 날에 타서 녹아 없어질 것이 아닙니까? 위의 구절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지상의 생산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들과 함께" 받을 은사라고 하신 것을 생각하면, 지상에 속한 아무 것도 은사로 주실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큰 은사는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전능하시고, 완벽하시고, 또 무한량(無限量)한 사랑의 근원이신 그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요? 우리는 하나님의 그 깊은 은사의 뜻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감사와 찬송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6-3. 요한계시록 21장 새하늘과 새땅(III)
요한계시록 21장 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천국에 가지 못할 자들:
요한계시록 21장 전체가 천국에 대한 영광스럽고, 찬란한 자세한 얘기들인데, 왜 특별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 대하여 한 구절을 끼워 두셨는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요한계시록 13장과 20장을 공부하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 대한 공부를 상당히 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왜 다시 말씀하십니까? 이 일을 강조하시거나, 새로운 가르치심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인류: 이 구절에 나타나는 여덟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을 찾아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왜 인류를 포기하시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성경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로마서 1장 18-32절의 말씀을 한 절에다 요약한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로마서 1장에는 불의한 자들의 20가지 이상의 속성을 설명하면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gave them up)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4)라고 하심으로 인간을 하나님께서 포기 하셨음을 가르칩니다. "내어 버려두사"의 더 정확한 번역은 "포기하시어(gave them up)"라는 동사의 과거형입니다. 여기서 인간을 포기하신 이유를 "마음의 정욕"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은 정욕의 동물이며, 이 정욕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인간들 중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욕이 없는 의인이 있다는 가정(假定)을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역사상에 알려진 선한 사람들이나,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의인들도 다 정욕의 동물입니다. 아브라함 같은 의인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내버려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의인입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른 점이 없습니다.
골로새서 3장 5-10절이 이 사실을 잘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毁謗)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인간은 정욕의 동물: 이 구절에서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라고 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불의한 과거 생활에서 떠났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내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노력함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 할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 9절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은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흔히 "배우지 못한 놈" "무식한 놈"들의 표현으로, 인간을 교육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이 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 인간의 정욕을 제거하지 못함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각 개인의 정욕은 집단의 정욕으로 발전하고, 집단의 정욕은 국가들의 정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국가마다 병력을 과시하는 것이 바로 이 정욕의 발산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정욕을 보시고 그대로 내어 버려두신(포기하신)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몇몇 사람들을 창세 전에 선택하시고, 그 택하신 백성이 거듭나서,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의 생활은 나날이 성장하며, 죽는 날 까지, 혹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내어 버려둔다"는 뜻이 포기하다 보다는 "관심이 없다"는 표현 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을 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의지로써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이 인간들의 상태입니다(롬 3:10-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셨다는 뜻은, 인간을 지옥으로 행하는 자멸의 길에 내어 버려두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포기하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기록을 사도행전 7장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이며, 이 설교로 인하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기까지 이스라엘을 격동시킨 이유는, 그들의 죄를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가 없는 동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죄를 지적했습니다. 41-4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gave them up)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진리 몇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 번째 사실은 이스라엘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금으로 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진리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들의 만족을 찾은 것이 이스라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사실은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gave them up)"라고 하신 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를 기뻐할 만한 충분한 경험과, 또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고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늘의 군대, 사단을 섬기도록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43절에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고 하심으로 천국에 들어갈 소망이 없어진 것을 지적하십니다.
이 얘기가 이스라엘에게만 적용이 되던 말씀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살고 있는 20세기 기독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하여 풍요하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고로만 삼고,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학과, 교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해당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대제사장,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던 것 같이, 많은 신자들이 자기의 잘못된 교리를 알지 못하고 열심을 내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또 다른 기록을 찾아 보겠습니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 두어(gave them up)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시 81:11-12)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인류: 위의 구절에서 발견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이유가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역사적으로나, 현 세상을 살펴보면 인간은 인간이 성취한 업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일삼고 있습니다. 종교 서적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자기 만족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드는 얘기들입니다.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신 세 가지 이유를 요약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믿으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이 인간들 중에 속해 있지 않음을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이유 세 가지가 나에게 해당하는지를 일일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내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장래를 바라봅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거듭나고 하나님께서 내 생활을 주관하심을 믿고 살고 있습니까? 내가 성취한 경제적, 사회적인 입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소망을 지상에다 두고 사는 사람 중에 속해 있지나 않습니까? 여러분께서 듣기 원하는 설교가 유명지사의 강연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혼에 경종을 울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경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이러한 질문을 하며, 내가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확신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이 눈앞에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여덟 가지 본질:
다음으로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기록된 여덟 가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은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믿는 자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즉 아직도 구원이 가능한 때에,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2-17절은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5-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自主者)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음이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 광경은 심판 날에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비로소 알게 되는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영광스럽고 기쁜 날이 하나님의 심판 날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요한복음 3장 18절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인격으로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신앙,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 육신에 속한 아무것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이 행하는 선행이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가증스런 자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을 다니엘서 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 "가증한 것"을 어떠한 특정한 인물을 지적해서 말합니다마는, 성경은 "가증한 자"가 거짓 선지자임을 가르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은 거짓 복음을 가르침을 말하며, 말세에 가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세력이 절대로 우세할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살인자들: 성경에는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믿는 자들을 미워하는 때가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말세의 한 가지 현상입니다. 세상이 살인자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행하는 자들(whoremongers): 불륜(不倫)한 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특히 말세의 윤리는 땅에 떨어져있습니다. 젊은 세대와 대화를 해 보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결혼생활도, 이혼을 몇 번하고 또 재혼도 몇 번 한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들로 알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생활이 정상적이라고 사회가 인정을 하게 된 때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 음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다른 면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음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술 하는 자들: 옛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기사와 이적 보기를 원합니다. 마리아의 동상이 눈물을 흘린다거나, 병을 고치는 목사의 집회가 있다거나 하면 군중들이 모여드는 때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사와 이적은 모두가 사단의 역사임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기적은 불가능한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 일 뿐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 그리스도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을 다 우상숭배자로 성경은 가르칩니다. 인간은 누구 나가 다 무엇인가를 숭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숭배합니다. 자기의 경제적, 사회적, 혹은 인격적인 성취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사회 도덕을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구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이 지구를 보전하겠다는 "새 시대 활동:New Age Movement"에 참가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인간들에게 각각 다른 우상이 있어 그 우상을 섬기는 일로 바빠져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길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들: 사단은 거짓의 아버지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 사단에게 속한 인간들이 거짓의 자식들입니다. 세상에 진리는 그리스도뿐입니다. 세상이 어떠한 진리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 원천이 그리스도가 아닐 때는 거짓말입니다. 수학, 과학, 공학에 나타나는 방정식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법칙의 일부이며, 창세 후 13,000년(성경의 역사적인 기록에 의해) 동안 변동이 없는 창조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과학과 공학이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 들입니다. 사실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상 여덟 가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본질"을 요약하면, 그들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지 않을 때, 모두가 유황불이 타는 지옥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입니다. 내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 인격과 지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간구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유황이 타는 불 연못이 무엇이겠습니까?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하신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유황이 타는 불못"만이 실제적인 표현이라고 믿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의 죽음을 유황불로 기록한 것으로 시작하여 "유황불이 타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하는, 무서운 형벌임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무서워하고 슬퍼합니다마는, 그것이 어떻게 영원한 형벌인 둘째 사망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우리도 이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형벌을 내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받으셨기 때문에, 나는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감사하며,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9절: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화려한 혼인 잔치: 위의 구절, 9절과 10절은 결혼식의 장면입니다. 여러분께서 가장 화려했던 결혼식 광경을 회상해 보십시오. 영국의 왕자 찰스와 다이아나의 결혼식을 텔레비전에서 본 생각을 합니다. 그때 다이아나가 아주 매력적인 신부였음을 기억합니다. 그 결혼식의 화려함은 평민들의 결혼식과 비교가 안되겠습니다마는,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 만 왕의 왕이신 어린양의 결혼식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어린양 결혼식에, 저와 여러분이 신부가 된다고요? 어떻게 이것을 다 이해할 수 있고, 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구절이 우리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것은,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하신 다음에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며,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실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고, 모든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거듭나는 순간 그 마음속에 성령께서 들어와 사시며, 이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결혼식에 참석하는 날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이라고 하신 말씀에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되는 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계획과 또 그분의 사역으로 이루어짐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구원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신 말씀(약 2:14)을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행함이 있는 믿음: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보라 내가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니 나는 예수를 믿는 자다"등 표적을 보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계속하여 이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하여 설명 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1-33)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하늘에서 주시는 떡을 먹을 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구절에서 배우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내가 구주를 영접하는 신앙"은 하늘에서 오는 떡을 먹는 것이 절대로 못된다는 사실이며, 우리가 인간의 상식과, 지성과 감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신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있는 신앙은 생명의 떡,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일이며, 이 일은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주셔야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우리의 구주)의 결혼식은, 그 신부가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하늘에서 내리는 떡을 먹고 살아온 믿는 자들)입니다. 이상 모든 설명이 비유이며, 상징입니다.
천사가 요한을 데리고 간 것이 "높은 산"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고 하신 말씀에서 산은 도움이 오는 곳입니다. 도움이 무엇입니까? 말세에 영원한 멸망을 면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칩니다. 이 모든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일일이 기록하신 책이 성경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높은 산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이 택하신 백성을 통하여 실제화 되어,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 자기의 백성이며, 그들과 만날 곳이 또한 높은 산입니다.
이 결혼 예식에 대하여 다시 생각을 합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결혼으로 비교하셨겠습니까? 구원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라고 하신 것을 생각할 때, 어린양과의 결혼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한 육체가 되는" 순간입니다.
11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碧玉)과 수정같이 맑더라"
"그 성의 빛"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발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빛입니다. 그리고, 보석 같다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지극히 보배로움을 말하며, 수정 같다고 하심은 그들의 신앙이 순결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순결하고 보배로움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3절에서 "벽옥(jasper)"을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지적하신 것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이 모두 그리스도를 닮은 것을 지적합니다. 출애굽기 28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대제사장 아론이 입을 옷을 12가지 보석으로 장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중 마지막으로 지적하신 보석이 벽옥이며(출 28:20, 39:13), 그리스도께서 "알파와 오매가"이심을 기억하게 합니다.
12절: "크고 높은 성곽(wall)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열 두 문"이 실제적인 성곽이나 문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열 두 성곽과 문"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하나님의 백성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인류역사상 아담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에 구원을 받는 자까지의, 모든 믿는 자들을 열 두 성곽과 문으로 상징하셨습니다. 숫자 "열 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신 자들로 완결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열 두 천사"가 누구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가지고 온 사자(使者)들입니다. 이 천사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구원은 복음을 들음에서 시작된다는 하나님의 말씀(롬 10:17)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문들 위에 이름"이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이라고 하신 말씀이 상징임을 알게됩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은 열 세 지파가 있음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14만 4천으로 상징하신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은, 역대에 구원을 받는 모든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가르치며, 이것도 어린양과 신부사이에 이루어진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성곽과 문"은 예루살렘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자료들이며, 그리스도자신이 "문"이라고 하신 점을 기억나게 합니다.
13절: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 29절에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라고 하신 말씀을, 바로 요한계시록 13절에서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국가와 인종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하도록 마련하셨고, 자기의 잃은 양을 모든 국가와 인종들 가운데서 찾으심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기초석"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는 큰 홍수가 나도 능히 요동치 않는 것이라는 비유를 누가복음 6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초석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을 지켜온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 기초석의 수가 완결된 수, 열 둘이며, 여러분을 가리키는 기초석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숫자 "셋"은 하나님의 뜻을 상징합니다.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은 모든 택하심을 받은 자들 전체를 가리키며, 특히 성경에 사도의 수가 사도바울을 포함하면 13명 이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사실은, 이 혼인 예식이 완전히 그리스도의 계획과, 또 그리스도께서 홀로 하신 사역으로 이루어짐을 요한계시록 21장의 문맥들이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13절의 말씀을 다시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역(功力)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역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기초석도 그리스도 위에 세운, 불에 타지 않는 기초석이기를 바랍니다.
6-4. 요한계시록 21장 새하늘과 새땅(IV)
요한계시록 21장의 후반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숫자를 사용하시어 말씀하셨고, 또한 열두 보석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숫자 중에 12가 주로 씌어지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숫자 12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가리키며, 예수님의 12사도를 지칭하며, 그들은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백성은 세계만방에 흩어져 있음을 지난번에 공부한 13절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10이 아니고 12라는 숫자를 써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표시하셨는가 하는 이유를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므로써 발견하게 됩니다. 수 12는 세계 방방곡곡을 상징하는 4로 나눌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은 15절부터 공부를 계속하겠습니다.
15절: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갈대"에 대하여는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하나님께서 "척량하라"고 명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구원받을 마지막 잃은 양을 찾으시는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요한계시록 11장 1-2절에서 유의할 점은, 하나님의 관심이 성전 밖, 믿지 않는 자에게는 없고, 마당 안에 제단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5절에는 척량의 대상이 성과, 문들과 그리고 성곽들이며, 이러한 대상은 11장에서 척량의 대상인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킴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금은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마는, 왜 "금으로 된 갈대"라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다른 성경 구절을 찾아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갈대는 성경에서 "연약한" 혹은 "속수무책"인 인간을 상징합니다.
열왕기상 14장 15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되게 하시고"라고 하셨고, 열왕기하 18장 20-21절에는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지적하여 말할 때,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는 분(사 42:2, 마 12:20)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갈대가 바로 연약한 인간, 애굽과 같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지적함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금으로 된 갈대"입니다. 바람에 흔들리고(마 11:7), 불이 붙으면 타 없어질 미약한 존재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시고, 성전의 건축자료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의 뜻은 새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자료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며, 그 백성의 마지막 구원받을 자가 구원을 받을 때에 예루살렘 성이 완성됨을 가르칩니다.
16절: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이 구절에서 성의 크기가 실제적으로 얼마나 넓고, 길고, 높으냐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천국의 모양은, 숫자에 있으며, 그 숫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신 백성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신다는 뜻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이 구절에서 1만 2천(12,000)은, 숫자 12와 1000이 곱하여 된 수이며, 12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며, 1000은 많은 수임을 가리킵니다. 이 많은 수에 대하여는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횐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이 구절은 1000 이라는 숫자가 "셀 수 없는 큰 무리"임을 설명합니다.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켜, 적은 혹은 남은 자로 표시된 성경 구절과 상반되는 표시입니다마는, 구원받은 자들만을 두고 볼 때 큰 수임을 알게 됩니다. 가령 현재 세계 인구가 60억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한다면, 역사상에 태어나 살다 죽은 사람의 수를 60억으로 보면, 누계한 인구가 120억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몇몇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숫자를 알 수 없습니다만, 10,000에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가정을 할지라도 120만 명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숫자로써 자기의 백성을 표시하는 이유는, 자기의 백성을 일일이 살피시고 끝까지 구원의 길로 친히 인도하심을 알게 하며, 그 백성들이 하나님에게는 아주 귀한 보배가 됨을 가르칩니다.
"네모가 반듯하여"와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의 뜻을 다른 성경에서 몇 구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네모가 반듯한"은 다섯 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모든 경우가 예외없이 성전과 제단의 모양을 가리킵니다(출 27:1, 겔 40:47, 43:16, 45:2, 계21:16). 그리고 이 성전의 규격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규격입니다. 그러므로 반듯한 뜻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의 뜻이 됩니다.
"같더라(equal)"는 희랍어 "isos"이며, 성경에 네 번 씌어졌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나타내셨고(요 5:18, 빌 2:6),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신 데서, 포도원의 품꾼들이 제 3시와 제 6시와 제 9시에 들어온 사람들과 제 11시에 들어 온 사람들이 "같은 품값",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0장의 품꾼들이 받는 품값의 비유는, 요한계시록 21장 16절에서 "같더라"고 하신 말씀의 주석이 됩니다.
17절: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사(144)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이 구절에서 144규빗이 성의 넓이인지, 길이인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44규빗이 성곽의 높이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실제적인 성곽의 구조가 아니고, 그 성곽은 믿는 자를 상징하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완성된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숫자 144도 그 숫자를 그대로 생각하면 그 뜻을 알기가 어렵지만, 12 X 12가 144가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전하게 성취되었음을 이 구절은 설명합니다.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이 구절에서 "천사"는 "사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른 번역입니다. "사람의 척량"은 그리스도의 척량, 혹은 택하신 백성들의 척량이며,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자이시며, 우리 택하심을 입은 백성은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자(使者)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곽의 "척량"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이 바로 성곽이 완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내 생활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성곽을 짓는 과정임을 가르칩니다. 우리 삶에 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려움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짓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18절: "그 성곽은 벽옥(jasper)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벽옥에 대해서는 11절에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벽옥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함을 가리킵니다. 정금은 그리스도의 백성을 지칭하며, 영원함을 가리키며, 동시에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합니다. "유리 같더라"는 정결함을 말하며, 천국에서는 죄가 인간을 다스릴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19-20절: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이라"
이 구절은 기초석(foundation)에 대한 얘기이며, 이 기초석은 또한 집을 짓는 터(foundation)를 말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이 고린도전서 3장 10-15절에 있습니다. 11절에 말씀하시기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우리 신앙의 기초가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가르칩니다. 12절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 3장은 하나님의 백성이 금과, 은과, 또한 보석이며, 마지막 심판 때에 불의 심판을 면할 것을 가르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성곽이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이러한 보석으로 꾸며져 있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르칩니다. 열 두 가지 보석들에 대하여는 출애굽기 28장에, 제사장 직분을 맡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입을 에붓에 장식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중에 유의할 점은 물린 보석들의 순서가 같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벽옥(jasper)이 요한계시록 21장 19절에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출애굽기 28장 19절에는 마지막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1절: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 이더라"
"진주"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신 마태복음 13장에서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45-46절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진주를 구하는 장사"는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셨습니다. 그 진주를 사기 위하여, 그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야만 "값진 진주 하나"인, 그의 교회를 살 수 있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택하심을 입은 그의 백성으로 장식되었다는 상징의 의미,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재차 보여 주십니다.
열두 문은 모든 믿는 자들이 들어갈 문이며, 완벽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문마다 택하신 백성인 진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길" 혹은 "도로"라고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4:6절에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순금"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또한 왕으로 상징하였고, 그리스도는 순결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맑은 유리같은"은 투명함을 말하며, 그 뜻은 천국의 모든 것이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2절: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성전이심은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던 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의 성전이 됨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 제물로 십자가상에 매달리신 것을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23절: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이 상징임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23절의 "해나 달"을 실제적인 해나 달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해는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해로 상징한 구절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또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시 19:;5)라는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요점은, "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배웠기 때문에, "해나 달"을 그리스도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 없이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해나 달"이 필요없다는 뜻이며, 필요없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는 내용은, 신천지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르다는 점이며, 세상의 모든 생물은 그 생존을 태양을 근원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하여, 신천지에서는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 빛에 대하여는 11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백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이 23절의 주석이 되는 성경 구절을 이사야 60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사 60:19)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스가랴 14장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24절: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사야 60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 60:3-5)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의 택하신 백성들이며,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물이며, 이들은 또한 "바다의 풍부"라고 했습니다. 바다에 대하여서는, 인생은 고해라고 상징함을 배웠고, 바다는 인류를 상징하며, 이 인류가 다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몇몇을 선택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택하신 백성을 "왕"이라고 부르시는 점에 유의하게 됩니다. 만 왕의 왕은 그리스도이시며, 믿는 자들은 그 왕에게로 나아오는 "열왕"입니다. 성경에는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만 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로 상징하였고, 스바 여왕이 많은 향품과, 금과, 보석을 가지고 솔로몬 왕을 찾아온 것은(왕상 10), 택하신 백성이 그리스도 앞에 모여드는 것의 상징임을 알게 됩니다. 이 24절의 말씀은 또한 믿는 자들이 천하 만국에 흩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25-26절: "성문들은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말할 것도 없이 "성문"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성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아직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상징이며, 또한 택하심을 입어 구원을 받게 된 모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옴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보면 25-26절의 장면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바로 그 때의 장면이라기보다는, 인류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는 백성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는 광경을 묘사한 영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우리의 영혼이 밤 없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밤이 없음이라"의 뜻은 우리 육신의 경험하는 어두운 밤이 영원한 천국에는 없다는 뜻이 분명합니다마는, 이 구절에는 영적인 뜻이 있다고 봅니다. 밤은 죄를 상징하므로,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부터 우리의 영혼이 더 이상 죄를 경험하지 않을 것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가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이 영원함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뜻에서 "밤이 없음이라"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현재의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 천지는 죄가 없는 세상입니다. 세상에 왜 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왜 죄를 세상에 두셨는가? 등의 질문은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만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할 때 여러 가지 변론만 생깁니다.
몇 주 전 주일학교에서 이 일에 대하여 변론하는 신학용어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 Amyraldian Schema, 2) Infralapsaranism, 3) Supralapsarianism입니다.
목사님들의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이, 서재에 진열된 신학 서적을 이용하여 신학 변론을 공부하면서 내가 믿는 변론은 누구누구의 변론이며, 그와 상반되는 변론을 누구누구가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목사님이 Supralapsarianism을 믿는다고 했지만, 저는 그 단어들의 뜻을 집에 있는 대(大) 영한사전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신학변론의 문제도, 성경 말씀만은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위에 말한 신학용어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죄의 발생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순서를 말합니다. 그 중 두 가지만을 비교하면,
Infralapsaranism [후 정론자(後定論者), 혹은 타죄 후설자(墮罪 後說者)]
1.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2. 인간은 타락하였고, 그 후
3. 타락한 인간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자를 결정하시고,
4.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5.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몇몇을 선택하신다.
Supralapsarianism [전 정론자(前 定論者)]
1. 창세 전에 인간 중에서 몇몇을 구원할 계획을 하시고, 나머지는 멸망하게 내버려두도록 계획하셨고,
2. 선택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속죄하시는 은혜를 입도록 계획하셨다.
3. 그리스도께서 선택한 몇몇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시기로 계획하시고
4.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셨고, 그 다음
5.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셨다.
신학적 변론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신학자들이 주장을 합니다마는, 오히려 혼돈과 불신을 줄 뿐이며,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이야기를 가상하거나,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확대하는 변론을 일삼게 됩니다. 위의 변론만 하더라도, 성경을 믿을 때 "후 정론자"의 성경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 구절에 "창세 전에 나를 선택하셨다"(엡 1:4)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창세 이전에 이미 십자가에 매달리실 것을 계획하셨음을 믿게 됩니다. 제가 이 신약용어를 소개하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 때, 신학 논쟁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은, 우선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고,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자의 말씀을 두고 논쟁을 허락하시지는 않습니다.
"후 정론자"의 변론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믿는 것이며,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창조의 실패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창조의 실패를 회복하시기 위한 대책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전지 전능하시고 피조물에게 절대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에게 "실패"하는 사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실패 없이 완전무결하게 시행하신 사역의 결과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 만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정해 놓으신 자기 백성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금과 은으로 상징하셨고, 열두 보석으로 상징하셨습니다.
자유의지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열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로잡을 수도 있고,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할 바를 다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과정을 도울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들은 또한, 세상이 차차 좋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아무 문제가 없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땅 속에 묻힌 광석을 파내고, 그 돌에서 금과 은, 그리고 보석을 깎아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전무결하심을 믿을 따름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때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27절: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이 구절은 앞 절에서 "밤이 없음이라"고 하신 말씀을 설명합니다. 밤은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을 상징하며,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이 모두 사단의 역사이며, 사단의 통치 아래 있는 인간들을 가리킵니다. 전에 공부한 바와 같이, 사단의 전략은 "거짓말하는 일"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속이는 일로 시작하며, 시종일관 거짓말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말세에 전무후무한 전쟁,"아마겟돈 전쟁"은 사단이 거짓말로 "어떻게 하면 택하신 자도 속일 수 있을 까" 하고 힘쓰는 때가 바로 이 전쟁입니다.
이 구절은 두 종류의 사람 즉,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며,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을 "거짓말하는 자들"로 구분을 했습니다.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라고 하신 것은 "생명책에 기록된"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 갈 자가 없음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만일 내 이름이 생명책에 없으면, 내가 지옥에 가야 되는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이 구절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내가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가?"라고 다시 질문할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는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기독교 교파도 많고, 훌륭하고 유창한 설교가 많습니다마는, 대개가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것들이며,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면 그것은 거짓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것을 믿습니까? 그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믿는 말씀이 참으로 성경의 말씀인가를 애써 알아내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면서, 내 구미에 맞는, 내 인생철학에 맞는 믿음으로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적 논쟁을 아주 위험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서로 비교하며, 자기의 생각을 또 다른 사람의 생각과 비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것이며,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불손한 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애통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 일의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가 내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애걸할 수 밖에 없습니다.
7-1. 세대주의
세대주의(世代主義)에 속지 않고 성경의 신앙을 지켜 나갈 열 두(12)가지 요법(療法)
오늘은 몇개월 전에 복음신문을 읽으면서 여러분과 대화를 하던 "'지상토론 천년왕국(千年王國), 사실인가 상징인가'를 읽으면서"의 결론으로 열 두가지 요법을 성경 말씀을 공부하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지상토론 천년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가 12번 신문에 게재(揭載)되었고, 저는 그 토론을 5번까지 평론한 적이 있습니다. 나머지를 계속 평론할 생각을 저버린 이유는 매번(每番)의 토론 내용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한데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그 기사들을 읽고 같이 토론하시기를 원하시면 수집해 둔 신문을 보내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천년왕국의 토론이 뭘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솔직하고, 유일한 답은 성경을 바로 깨닫자는 권유(勸誘)입니다. 세상은 다수가결로 사건을 처리하고, 민의(民意)에 의하여 정부의 정책을 시정(施政)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을 다수의 의견대로 한다면 우리는 다 천년왕국을 믿어야 합니다. 절대 다수의 교역자들과 신자들이 천년왕국을 가르치고, 믿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반문을 합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완벽하시기 때문에, 각 사람의 때가 되면 말씀의 진상을 깨닫게 하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진리를 잘못 깨달을 때 수 없이 많은 다른 진리를 또 잘못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목적지를 반대로 향한 기차가 속력과 시간에 따라 목적지와는 더 멀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께서 긍정하신다면 이번 공부야말로 천국을 목표로 달리는 내 기차의 방향을 점검하는 좋은 기회라고 믿어집니다.
A.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천년왕국을 믿는 사람들은 세대주의자들임을 자칭하며, 세대주의는 은혜의 교리 (Grace Doctorinse)와 상반(相反)이 됩니다. 물론 세대주의자들은 은혜의 교리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은혜의 교리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는 것은 앞으로 얘기를 하겠지만, 우선 세대주의가 무엇인가를 세대주의자들이 정의한 것으로 시작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의 정의
인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다른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시행하셨다. 세대라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대한 특정한 구원 계획이 있음을 암시한다. 성경은 일곱 세대로 나뉘어져 있다.
1. 죄가 없던 때 (창 1-2)
2. 양심을 발견한 때 (창 3-7)
3. 인간 스스로 통치하던 세대 (창8-11)
4. 약속(約束)의 세대 (창 12장-출 18장)
5. 율법(律法) 세대 (출 19장-말 4장)
6. 교회(敎會) 세대 (마 1장- 계 19장)
7. 왕국(王國) 세대 (계 20-계 22장)
이상의 구분을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그 세대에 살던 인간들에게 각각 다른 계획과 다른 역사(役事)를 하신 것을 발견한다. 인간은 현재 에덴동산에 살고 있지 않으며, 노아의 방주를 짓지도 않으며, 장막을 짓는 일도 없으 며, 짐승을 잡아 제사하는 일도 없으며, 엄청나게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는 일도 없다. 창조는 이미 완성하셨고, 홍수는 자났고, 율법시대도 과거가 되었고, 오순절의 얘기도 옛 이야기가 된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세대는 모세의 율법 세대에서 교회세대로 옮겨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모든 예는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세대에 따라서 나누었음을 알게 된다. 성경의 예언을 직역하면서 이스라엘의 왕국이 장래에 올 것을 믿는 사람들을 세대주의자라고 한다. 세대주의자들 중에는 세대의 수(數)라던가, 어떻게 세대를 구분하는가, 그리고 장래에 있을 사건의 시기(時期)의 차이를 가지고 구분하는 여러가지 세대주의가 있다.
*침례교 성경사전: Way of Life Encyclopedia of the Bible & Christianity에서 발췌
B. 열 두가지 오해
성경을 바로 깨닫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간절한 심정입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말씀은 지극히 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해석의 차이점이 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극히 오묘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겠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미리 기대하는 결과에 집념(執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신학자들의 학설에서 시작하여 생긴 여러가지 성경 해석이 시장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과 육감(六感)을 의존한다면 소설과 같은 그럴듯한 얘기가 독자들을 차지하게 마련입니다.
은혜의 교리가 천대를 받고 있는 때입니다. 은혜의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이루어지며,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의 구원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이루어짐을 가르칩니다. 반면에 세대주의의 가르침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세대에 따라 다르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점이 나오게 한 성경 구절을 공부하면서, 상반되는 성경 해석 중에서 다음과 같은 열 두가지의 차이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세대주의는 이스라엘의 구원 계획과 교회 시대의 구원 계획이 다르다고 하나, 은혜의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2. 세대주의가 그리스도께서 다시오시여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교리가 믿는 그리스도께서 약 2,000년전에 메시야로써 이미 오셨음을 부정합니다.
3. 세대주의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다고 믿는 것은, 2,000년전에 이미 이스라엘(믿는 자)의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4. 세대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사실을 부인하므로 지금 이스라엘과 세상에는 구세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5. 세대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셨고, 현재 우리의 왕이심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주님"이라는 뜻은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6. 세대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께서 정치적으로 자기들을 해방할 것을 기대했던 것과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7. 세대주의는 성경에서 교회라는 뜻이 모든 세대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지적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8. 세대주의는 믿는 자들의 휴거가 세상 종말에 있을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9. 세대주의는 창세기 17장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성경이 설명하고 있음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10. 세대주의는 그리스도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이스라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11. 세대주의는 과거에 죽은 믿는 자들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올 것이라는 성경에 없는 얘기를 가르칩니다.
12.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이루어짐을 부정합니다.
다음 편지에는 세대주의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성경 구절들을 찾아 보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진상(眞相)을 찾아 보겠습니다.
7-2 세대주의
지난번 편지에 약속한대로 오늘은 세대주의에 속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믿는 열 두가지 잘못된 생각을 공부한 다음,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이 걸어가고 있는 열 두가지 잘못된 길을 지적하고 거기에 속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I. 세대주의가 잘못 믿는 성경 말씀 열두(12)가지
1) 한 가지 밖에 없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이스라엘의 구원 계획과 교회의 구원 계획이 따로 있다고 믿게 되는 이유는 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해는 창세기 17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여 남자는 다 할례(割禮)를 받게 하셨으며(창 17:10), 아내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낳을 것이며, 이삭의 후손들이 "중다(衆多)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할지라"(창 17:20)고 하신 것을 공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 17장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복음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상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區分)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게 하셨지만, 그 할례의 더 깊은 뜻이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는 것임을 또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그러므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임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어 주시고, 야곱에게 장래를 약속하신 창세기 35장의 기록도 자세히 살펴 볼 때, 그 약속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1)
"많은 국민"이라든가 "왕들"은 야곱의 혈통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을 지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 사역(使役)을 하신 삼년 반 동안에도 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이방인들을 선택하여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5절에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신 것도 "이스라엘 집"이 야곱의 혈통을 이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적하심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生水)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신 때에도(요 4:10) 사마리아 여인이 이방인이지만, 이 얘기는 그 여인이 구원을 받은 기록이며, 이방인들도 이스라엘로 간주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중 여러 곳에 이스라엘의 뜻이 택하심을 받은 자들임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裏面的:inwardly)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儀文:letter)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
여러 성경 구절들을 종합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여러분은 유대인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택하신 자들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정의합시다. 야곱의 혈통(血統)을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歷史)는 참 이스라엘의 그림자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표현은 구원을 받을 자들을 지적함을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9장 25- 26절은 이 참 이스라엘을 위한 창세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가르칩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 말씀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살던 모든 믿는 자들이 단번에 드린 그리스도 자신의 회생 제물로 말미암아 속량되었음을 가르칩니다.
2) 메시야로 이미 오신 그리스도
세대주의자들이 기다리는 구세주는 2,000천년 전에 이미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마감하면서 성경을 쓰는 이유를 말하며,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로 그리스도이며(요 1:41), 다니엘 9장 25-26절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신 기록은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에서 수 없이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3) 이스라엘의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지상(地上)에 다시 오시어 예루살렘을 수도(首都)로 하고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실 것이라는 세대주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스라엘의 구주로 오셨음을 부인합니다. 마태복음 2장 6절은 아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음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4) 이스라엘과 세상의 구세주로 이미 오신 그리스도는 임무를 완성하셨음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다시 오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救世主)로 세상에 오신 사역(使役)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2,000년전의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못하던 것과 동일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그들에게는 구세주가 없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읽은 바 마태복음 2장 6절과 또 많은 성경말씀이 그리스도는 현재 우리의(이스라엘을 포함) 구세주이심을 가르칩니다.
5)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이미 오셨음을 부인합니다.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박사들이 만나러 왔었고(마 2:2),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왕으로 시인(是認)하였고(요1:49), 예수님 자신이 왕으로 오셨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마 21:3-5),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도 자신이 왕이심을 선언하셨고(요 18:37),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전도하였습니다(행 5:31).
6) 정치적 왕국의 왕이 아니신 그리스도
2,000년전 그리스도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왕이 되어 로마 통치하(統治下)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가룟 유다가 그리스도를 판 것도 그러한 기대에 대한 실망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누릴 천국의 왕이시며, 우리는 거듭나는 순간 그 왕국의 시민이 되며, 왕이신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7) 성경이 정의하는 교회의 뜻
세대주의자들은 교회시대라는 새로운 세대를 정의함으로써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뜻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사역을 보면 구약시대를 "광야교회"라고 불렀고(행 7:38),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복음의 행적(行蹟)을 변명한 내용을 보더라도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 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행 26:22-23)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선지자들과 모세를 통하여 이미 설립되어 있었음을 가르칩니다. 8) 세상 종말에 올 휴거
세대주의자들은 교회의 휴거가 칠(7)년 환난 전에 있을 것이며, 그 후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때 그 교회가 함께 지상에 내려 온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며, 요한복음 6장은 믿는 자들의 휴거가 세상 마지막날에 있을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네(4)번을 말씀하셨습니다(요 6:39, 40, 44, 54).
9) 창세기 17장의 언약(言約)
창세기 17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로마서 4장은 잘 설명합니다. 로마서 4장 11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祖上)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오신 것은 이 창세기 17장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며, 사도행전 5장 31절에는 "이스라엘로 회개(悔改)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의 언약을 아직도 기다린다는 세대주의자들의 생각은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10) 영광은 오로지 그리스도께로만 돌려야 함
세대주의자들은 아직도 야곱의 혈통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믿으며,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함으로써 영광은 사람들이 받을 것이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의 것임을 가르칩니다.
11)천국에 있는 구원 받은 자들
세대주의자들은 과거에 죽은 모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시 그와 함께 이 세상에 살아 내려올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에 없는 얘기이며, 아담이 범죄한 후 이 세상이 저주를 받은 사실(창 3:18)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 세상은 점차 낡아지고 있으며(시:102:26), 불의 심판을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히 10:27).
12)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성경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을 그 당장에 멸하실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그리스도께서 만민(萬民)의 구주가 되심으로써 성경의 언약이 이루어졌으며, 세상의 모든 국가가 차별 없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아래 복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예루살렘에 수도(首都)를 세우고 이스라엘 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구 원 계획을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II. 교회가 가르치는 속기 쉬운 교리(敎理) 열 두(12)가지
두 사람이 성경 얘기를 하는 동안 그 해석의 차이가 있을 때 타협적으로 결론을 짓고 대화를 끝내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진리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중 하나는 근본적인 성경 해석의 원리를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사사로운 성경 해석(解釋)을 하는 결과입니다. 사단은 그 사사로운 성경 해석을 장려(奬勵)함으로써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리와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문제는 성경 해석이 어떤 교리에서 시작하여 많은 독자들의 긍정을 얻고 있을 때입니다.
가톨릭교의 교리가 그렇고, 또 이와 같이 유명한 신학자들이 전개한 교리들이며, 또 그 중에는 천년왕국이라든가 인간이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선택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허다하지만 그 중에서 열 두가지를 선정하고,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꼭 배워야 할 하나님의 말씀들을 공부 하고자 합니다.
1) 황금시대인 천년왕국(千年王國)은 오지 않는다
지상(紙上) 토론(討論)의 비평과 또 열 두가지 세대주의에 대한 잘못된 점을 여러분께 말씀 드림으로써 충분한 성경 공부의 자료를 제시(提示)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께서 종말론(終末論)의 책을 서점에서 찾으신다면, 열권중 아홉권은 천년왕국을 가르칩니다.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을 입어 기사와 이적을 행한다는 교역자들과 신자들
약 일년 전에 드린 편지 중에서 "가장 현저한 말세의 징조, 기사와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성경 공부를 한 적이 있으며, 말세에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상당한 양의 성경 구절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 편지에 발췌(拔萃)한 성경구절을 다시 한번 찾아 보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 이득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은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이 혼돈을 피하도록 "기록된 성경 말씀 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르침으로써 성경을 마감하셨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이 구절에서 "이것들 외에 더하면"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 외에도 있다고 믿으면"이라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예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위의 구절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기사와 이적을 과시하는 모든 얘기를 들을 때 귀를 막아야 합니다.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이 무엇입니까? 지옥에서 받을 형벌입니다. 왜 그 무서운 형벌을 자청(自請)하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이며, 믿음은 말씀에서만 옵니다.
3) 안수(按手) 기도를 받고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선정하여 특수한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 특수한 직책은 왕들이며, 선지자들이며, 제사장들입니다. 이 직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머리 위에 기름을 부어서 구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특수한 직분을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며(계 19:16),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히 2:17), 선지자이십니다(히 3:1, 신 18:15, 행 3:22).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이와 같은 귀한 직분을 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왕이며(계 1:6, 벧전 2:9), 제사장이며(계 1:6, 벧전 2:9, 사 61:6), 또 선지자들 입니다(행 2:17, 막 16:17-18).
우리가 남의 어려움을 보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자연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의 안수 기도를 받는 것은, 가톨릭 신부(神父)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제사장이 된 우리는 거리낌 없이 그리스도 앞에 내 자신이 나아가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직접 아뢰고, 해결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녀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정을 여러분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여러분께서 구하기 전에 해결책을 마련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말로 말해서, 병을 고치기 위하여 모이는 집회는 무당을 둘러싸고 모인 무지(無知)한 무리들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 보시기 바랍니다.
4) 철야기도와 금식기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며(눅 21:36),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요 11:42, 사 58:9).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하신 것이 무엇이든 청구(請求)하는대로 다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 7:10)고 하신 말씀은, 믿는 자들의 참 기도가 "생선을 달라"는 기도이며, 그렇지 않은 기도는 "뱀을 달라"는 기도임을 상징(象徵)합니다. 생선은 복음을 말하며, 뱀은 세상의 복지(福祉)를 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지는 하나님의 뜻과 항상 상반이 되는(갈 5:17) 이유는 사단(뱀)이 세상을 통치(統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기도의 뜻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냉수를 떠 놓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소원을 하소연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원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심령을 만족케 하는 흡족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표현이 감정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흡족한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만 성경이 정의하는 은혜는 아닙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은혜는 값 없이 받는 구원을 말하며, 이 구원이 철야 기도, 또는 금식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이 정의하는 금식(Fast)은 복음을 전함을 말합니다(사 58:6).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화(逸話)에서, 철야기도의 경험은 신령(神靈)한 것을 체험(體驗)한다고 합니다. 신령한 것이 하나님께서 오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성경 외에는 없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벗어나며, 철야기도 또는 금식기도의 행동은 사단의 사역을 돕는 일 밖에 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금식을 적당히 함으로써 위장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일 수가 있습니다.
5) 성령을 내리게 하는 기도
성령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한 이름입니다. 장난감을 선물로 받는 것처럼 "성령을 주시옵소서"하면 받고, 얼마 후에 그 성령이 떠나가고 없기 때문에 "다시 오십시오"하면 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성경에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시기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고 하신 것은, 우리가 일단 거듭나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께서 그 믿음이 없으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증거이며, 성령을 받겠다고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광명의 천사"로 온 사단의 속임 수에 농간(弄奸)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말씀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6) 유명(有名) 지사(志士)
우리가 말세의 징조를 알려고 할 때 교회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把握)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정의하는 말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교회를 두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세에 세상의 죄악이 관영할 것을 성경은 말하지만, 그 죄악을 교회가 타협을 하는 때가 말세입니다. 그러한 현상이 사단의 역사라고 하지만, 사단은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속이며, 광명의 천사로 오기 때문에 광명의 근본이신(요 8:12) 그리스도인 줄 알고 따라가는 때입니다. 수십 만명이 모이는 집회에 가서 듣는 설교가 그릇되고, 악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얘기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많은 집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7) 구원 받는 일이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내가" 영접한다고 믿는 사람들
구원을 내가 자청(自請)해서 받았을 때, 쉽게 상실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번한 부흥회가 필요하며, 매 부흥회 때마다 새로 거듭나기로 작정을 합니다. 전에 회개를 하기는 했지만, 그 회개한 결과로 지은 죄의 용서함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빌리 그레함(Billy Graham)의 집회를 보면 수 천명의 신자들이 강대상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죽어 있던 영혼을 살리시는 순간입니다. 죽어서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죽은 송장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이 구원을 받는데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은 거짓말입니다. 물론 부흥 강사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면서 청중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 하는 자가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계 21:27)을 기억하시고, 내가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내가 지은 죄는 다 용서함을 이미 받았고, 육신이 약하여 짓게 될 앞으로 범할 죄까지도 용서하심을 받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복음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결과입니다.
8) 그리스도께서 세상 만인의 속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세상 만인을 위하여 오셨다는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람들의 계속되는 오해(誤解)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셨다"는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그를 믿고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말하면 그럴듯한 얘기이며, 공평하시고, 사랑에 넘치는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성경은 여러가지로 설명을 하셨으며, 그 중에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고 하셨고,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자기의 아들 이스마엘과 같이 광야에 쫓겨났을 때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하시며 이스마엘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창 21:17-18) 등의 기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계획과, 그 선택의 과정, 즉 거듭나는 과정을 성경에서 배울 때 조금은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을 이해하는 처음 단계는, 모든 인간은 타락하고 범죄하여 그 영혼이 죽어 있음을(롬 3:10-18, 엡 2:1)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인물 중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는 과정에서 예외로 되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예외가 없음을 성경은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 같이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리지 아니하시면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가리켜 "알파와 오메가"(계1:8)라고 하신 것은 그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또 그 거듭난 우리를 천국에까지 들어가게, 끝까지 인도하심을 가르칩니다.
9)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가?
20세기에 들어서 남녀 동등(男女 同等) 문제는 사회의 가장 큰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50년전의 사회와 지금의 사회를 비교하여 여성들의 입장과 그들의 활동을 살펴본다면 엄청난 차이를 통계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편지에 사회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며, 교회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와 동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제도가 돌이킬 수 없이 붕괴(崩壞)된 사회와 국가는, 인체의 어떤 기관이 세포로부터 썩어가는 암과도 비교가 됩니다. 그러한 세포가 썩어가는 암이 교회에 침투되어 있음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이러한 암은 교회가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며, 교회가 여자 교역자를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한다면 간음한 아내를 버릴 수도 있고, 강폭한 남편을 떠나서 평안한 생활을 시도할 수도 있고, 성경의 지식과 사회에서 선망이 높은 여성이 교회를 지도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는 이러한 일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구분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창조하신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너(여자)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하신 것은 명령 계통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말하며,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고전 11: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이유는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는 법" 즉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2)는 명령을 완전히 망각(妄覺)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하셨고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딤전 2:12)라고 하셨습니다.
이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고 하심으로 한번 결혼을 하면 죽는 날까지 이혼할 수 없음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10)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연령(年齡)의 제한이 있는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신자들에게는 "나이가 얼마나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하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옵니다. 사물을 판단하지 못하는 유아들이 어떻게 "그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겠는가?"하는 질문을 합니다. 그 답변으로 "어느 정도 철이 나야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할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 구절 밖에 없다고 가정하거나, 이 구절을 사람의 이성(理性)과 육감(肉感)으로만 생각한다면 철이 나야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한다는 답변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성경에 있는 딴 구절을 부정하게 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결론임을 알게 됩니다.
가령 로마서 9장 11-13절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신 것은 야곱이 태중에 있을때 구원을 받은 기록입니다. 시편 71편 6절에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라고 한 것이나,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15)라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거듭나는 것이) 입으로 시인(是認)해서 받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로마서 10장 9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고 반문(反問)할 것입니다. 이 구절의 바른 이해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라는 뜻이며, 성경에는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처럼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결과로 선하게 되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며, 의롭게 됨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행하는 아무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11)큰 교회(敎會)와 작은 교회
어떤 목사님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의 목사임을 자랑하는 것을 들은 바 있습니다. 또 제 극친한 친구 목사가 자기의 큰 교파의 잘 되어 있는 퇴직(退職) 제도(制度)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큰 교회에서 시무하시던 존경 받는 원로(元老) 목사님의 자식들을 다 성공 시킨 얘기를 듣습니다.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거의 예외 없이 교회가 영업(營業)을 하는 단체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의 숫자가 중요하며, 그 큰 숫자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는 사업 계획을 하며, 그 사업을 집행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사업들은 사회 복지(福祉)를 위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사회 복지를 위한 것이라면 이러한 큰 교회가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겠지만, 복음은 사회 복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배우는 곳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宣布)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거듭난 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곳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곳입니다. 말씀을 우리가 선포한 후 사람들이 말씀을 믿게 되는 것은 인간들이 계획하고 실행하기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획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의 크기도 아니며, 교인의 수(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배운 진리를 그대로 선포하는 것입다.
12) 과학자들의 말을 성경보다 더 정확학하다고 믿는 신앙
성경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라고(요일 2:22) 정의했으며,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모든 자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영적인 뜻을 강조하여 적그리스도를 말한다면 택하심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다 적그리스도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합니다.
몇개월전, 2,000명의 신도를 가진 교회에 시무하는, 성경말씀으로만 설교하고 가르친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가 과학자들이 말하는바 수백 만년이 된 것을 믿고, 창세기 일장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흉악한 적그리스도를 촬스 다아윈(Charles Darwin)이라고 믿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그 생각에 동감입니다. 그러나 수다하게 많은 교역자들과 신자들이 다아윈의 학설을 성경말씀보다 더 정확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줌 밖에 되지 못할 다아윈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신앙이 여러분에게는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교회가 박사들이 수 십명나오는 지성인의 교회임을 소개한 일이 생각납니다. 만일 그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가 말씀은 외면하고, 인간의 지식이나, 인간의 이성(理性)을 설명하는 연설(演說)이라면, 그 교회의 교인이 되는 이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상과 같이 교회가 잘못 믿고 있는 열 두가지 경우를 선택하고 성경 말씀을 찾아 보았습니다. 현대 교회는 이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믿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성경 말씀은 영의 양식이며, 우리가 성경을 잘못 깨달을 때 우리의 영혼은 독을 마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고 성장(成長)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바로 깨달아야 하며, 그러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우리는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애원(哀願)하며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출처:A Little Maid Ministry(ALM 복음회/성경 연구회: Bible Study Group) Announcement; A Little Maid Ministry Bible Fellowship. Please join our fellowship on Sundays. We usually start at 9:30AM. Please call first - (732) 695-9414 *주소:http://www.alittlemaid.org/html/millenium.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