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를 건너게 하신 비밀
홍해를 통한 구원의 계획
출애굽기 13장 17-18절/고전 10장 1-5절
글/扈一麥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도 계획이 않된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생활로부터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여 내신 내용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왜 홍해바다 길로 인도하셨는가?
홍해를 피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가면 빠르기도 하고, 여행의 피로도 적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의 조건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홍해를 향해 갔습니다. 만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생활로부터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였다면 치밀한 계획 하에 출애굽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막에서 40년을 훈련받은 모세가 그 길을 모를 리가 없으며, 이스라엘 백성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수많은 보석과 재물을 얻어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블레셋인 땅의 길 대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멀고도 험한 홍해의 광야 길을 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13장 17-18절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경로를 바꿔 막다른 홍해 길로 향해 되돌아가게 하셨습니다.(출14:2).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의 광야 길을 헤매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뒤쫓도록 결심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애굽의 신들을 무력하게 만드시고 마지막으로 애굽의 군대를 홍해로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계략이며, 애굽 사람들의 마지막 남은 힘마저 꺾기 위한 덫인 동시에 유인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빠른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멀기도 하고 건널 수 없는 불가능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14장 1절,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홍해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주를 허락했지만 바로 입장에서는 장정만 60만명 가량 되는 엄청난 노동력을 상실에서 오는 애굽의 경제적 소실은 막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을 볼 때 아깝다는 마음에서 경제적 손실을 되찾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애굽 군대는 특별 병거 6백승 외에 모든 병거, 마병 등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서 이스라엘을 뒤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적잖은 공포와 두려움을 주었을 것 입니다(출14:10-12).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바다 앞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의문에 대한 해답을 13장 17절에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라고 하십니다. 아울러 두 번째 홍해로 인도하신 까닭으로 14장 4절에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라고 하십니다. 즉 홍해로 인도하신 까닭은 2가지로서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때문이고, 둘째는 이방민족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관한 이유는? 삶에 닥쳐오는 극복하기 어려운 고난과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하기 보다는 자신의 존재감이 없으나 당시의 문명의 발상지이고, 나일강변의 풍요를 따라 몸은 힘들어도 풍요와 평안을 누리고자하는 마음에 노예생활을 선택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성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홍해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로는 애굽 군대의 추격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죽음의 현장으로 몰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돌아서려는 것에서 끝까지 보호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하여 하나님 나라에 도착하기까지 어려운 현실에 대해 승리의 소망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이방민족인 애굽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적하는 세력의 군대와 무기가 하나님의 권세와 비교되지 못함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심으로서 영광을 얻고자 하셨습니다.이는 이방민족인 애굽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이방민족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은 이방민족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속도로 이스라엘을 쫓던 바로의 군대도 이스라엘 진영에 가까워지면서 하나님의 천사의 방해를 겪게 되며. 더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바로 군대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접근하기 어렵게 막았습니다. 또한 애굽 군대를 막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에 대해 일부 고고학자들은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구름기둥은 화산의 폭발로 인한 수증기 구름을 말하며 불기둥은 밤에 치솟는 불길의 불빛이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일부는 무서운 천둥을 뜻한다고 주장하지만 출애굽 당시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임재 상징을 상징합니다.
왜 백성이 애굽으로 돌아갈까 우려하셨는가? 애굽은 바로가 통치하는 강력한 문명국가로서 세상의 즐거움과 나일강변의 풍요가 주는 경제적 이익이 많았던 곳이며,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에서 그들의 노예로서 생활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들과 같은 문명의 이익과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강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서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즐거움과 평안으로부터 떠난 고난의 시작입니다. 세상과 단절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출애굽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죄”의 생활로부터 구원입니다. 즉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죄”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도 로마서 17장 14절에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할만큼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팔렸도다.”는 헬라어 “페란”에서 파생된 “피프라스코”라고 하며, 원어의 뜻은 “노예로 팔리다”입니다. 즉 노예생활로 돌아가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죄”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서 자유로와지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 홍해는 어떤 바다인가요? 홍해는 붉은 산호로 인해 바다가 붉게 보인다고 해서 불려온 말 그대로 붉은 바다이고, 길이 약 1,920km, 폭 약 400km 정도 되는 바다로서 라스모하메드 근처에서 V자형으로 갈라져 수에즈만과 아카바 만으로 나누어 오늘날 홍해는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경계로 두 지역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이런 홍해를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시기를 주전 1446년경으로 보는 설과 주전 1290년경으로 보는 설이 있으나, 그 어떤 출애굽시기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 3,000여 년 전에 당시의 문명과 기술로 보아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기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홍해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바다를 건너게 하셨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건너기에 불가능한 홍해를 건너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리로 인도하셨고, 건너게 하셨을까요? 홍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직접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히브리서 9장 12절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고 말씀 하셨고, 또 마태복음 26장 28절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 하신 것과 같이 인류의 “죄”의 대속은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홍해의 건넘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과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죄”의 노예가 그리스도의 “피” 로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처럼,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건널 수 없는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홍해를 어떻게 건너게 하셨습니까? 출애굽기 14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라고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처럼 걸어서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상태는 출애굽기 14장 12절과 같이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라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기 14장 15~1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조금도 필요치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홍해의 흉용한 물결 벽은 이스라엘을 감싸주는 보호의 벽이었지만, 애굽 군대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벽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인 바로의 병거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갇힌 줄 알고 살기 등등해 달려왔지만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홍해에 사장(死藏)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홍해는 단순히 늪지대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낮은 물가를 건넌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홍해(Red Sea)를 뜻하는 히브리어(얌수프)가 ‘갈대 바다(Reed Sea)란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수프’라는 단어는 ‘붉은’이란 뜻 외에 습지 식물인 ‘갈대’(reed), ‘바다풀’(water plant)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해를 단순히 갈대 늪지대로 봐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동풍이 불어 바다 가운데 길이 생겼고 애굽군대가 수장될 만큼 깊은 곳이었고, 열왕기상 9장 26절에는 솔로몬이 ‘홍해’ 바닷가에 항구를 건설하고 함대를 건조했다는 기록을 볼 때 홍해가 충분한 깊이의 물이 있었던 곳임을 반증합니다. 후대에 솔로몬은 이스라엘 민족이 건넌 바다 양쪽에 돌기둥을 세웠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일에 이스라엘 백성의 노력의 결과는 아닐지라도 홍해를 향해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모세에게 명한 명령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지도자가 처한 상황에서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도록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도 없이 이스라엘을 이끌었다면 홍해가 갈라졌을까요? 뒤에서 군대가 몰지 않았다면 원망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요?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출애굽기 14장 4절에서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4장 7절에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이방민족인 애굽에게도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을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지금 우리의 믿음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닥쳐오는 어려움과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요? 그리고 먼저 믿은 우리 크리스천은 아직 불신앙 가운데 있으나 하나님의 택함 받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만한 홍해를 건너는 믿음의 솔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례(침례)나 믿음으로 받는 것은 홍해를 건너는 사건과 같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택하심 입니다. 홍해는 죄악에서 해방의 바다, 성결의 도구입니다. 뒤로 돌아가라고 하셨다면 홍해로 인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다시는 놓치않습니다.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애굽 군대의 홍해 몰살 사건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의 멸망을 경고하는 최후 심판의 상징(계20:13-15)인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홍해 통과 사건은 물세례로 비유됩니다.(1.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2).
과거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옛 이스라엘(옛사람)은 홍해에서 완전히 장사(수장)되었고, 물로 정결케 된 새 이스라엘(새사람)은 죽음으로부터 다시 새롭게 태어났다는 중생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넘으로써 죄악된 세상, 노예의 삶에서 해방됨을 의미하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이 성취됨을 상징합니다. 홍해는 세상(애굽)과 결별하는 ‘해방(세례)의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홍해는 애굽(세상)적 요소인 죄와 사망으로부터 선민을 분리시킨 하나님의 성별의 도구이며 영적인 정결의 방편으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사랑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높이며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가좋다오/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