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점의 실체와 인간의 갈망

수호천사1 2012. 1. 26. 11:47

점의 실체와 인간의 갈망


목회와 신학 2005년 1월호
안점식/ 한국선교훈련원(GMTC) 교수

지금은 점이나 사주 운세 등이 예전과는 달리 오락이나 대중문화의 한 단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혜화동이나 신촌의 대학가에 있는 현대식 점집들은 미아리에 있었던 예전의 점집과는 참으로 많이 다른 분위기를 풍겨낸다. 예전에는 점이나 사주를 본다고 하면 중년의 아줌마를 연상했지만 최근에는 이런 현대적인 점, 사주, 운세를 보는 곳은 주택가가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용이한 사주까페, 점까페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예전에는 점을 보러가긴 하지만 그 사실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곤 했고, 따라서 마음에는 있지만 점이나 사주에 접근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의 현대적 성격은 누구나 어디서든 익명으로 자신의 노출 없이 접근할 수 있다. 버스 좌석 뒷면, 버스 옆 광고판,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 스포츠 신문이나 각종 무가지 신문 등을 통해 점술가는 전화 한 통이면 쉽게 연결될 수 있고 거리에서도 쉽게 점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길거리 곳곳마다 점을 치는 젊은 사람들과 여기저기 점을 보러 다니는 젊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반영하듯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되는 무속과 관련된 드라마도 이제는 대중들에게 큰 거부감 없이 흥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점, 지금은 현대화 중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애니미즘이나 샤머니즘적 세계관과 행태의 부흥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사실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인 종교의 형태로 간주된다.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사나 자연사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초자연적인 영들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샤만 혹은 주술사들은 초자연계와 인간계를 중개하는 매체의 역할을 한다. 이처럼 샤만, 주술사와 같은 인간 중개자를 통해 초자연적 영들로부터 주어지는 정보에 입각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인도함을 받고, 동시에 초자연적 영들의 힘을 끌어내어서 현세적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애니미즘 혹은 샤머니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점, 사주, 운세와 같은 운명술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와 관련된 왜곡된 종교성의 발로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욕구가 현대적으로 포장되어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다. 모든 종교는 고등종교이든 하등종교이든 현대적 상황에 맞게 적응하며 자신의 옷을 바꿔 입기 마련이다. 고등종교들이 상황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점술, 운세술과 같은 민간종교의 차원도 상황화를 시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러한 점집을 찾는다는 것도 타락한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과 원초적인 욕구를 고려한다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젊은이들을 끌어오기 위한 상황화된 시도를 하기 마련이다.

  타락한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 중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인간이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고달프다. 무엇보다도 생존과 안전을 위한 고달픔이 있다. 인간의 삶에는 예기치 못하는,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만일 닥칠 일을 예기할 수 있다면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기하지 못한다고 해도 통제가능한 일만 일어난다면 역시 고통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는 예기치 못하면서 통제할 수 없는 일들, 예컨대 예기치 못하는 죽음, 이별, 실패, 질병, 재난 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와 인종을 초월에서 이 지구상 모든 곳에서 미래를 예기해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일어난다. 아마도 인간의 운명을 예기하는 술수만큼 다양한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장래사를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전 7:14, 10:14, 사 41:21-24) 못 박고 있으며 따라서 온갖 형태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술수와 점성술을 금지한다(신 18:10-12, 사 47:13-14). 하나님만이 장래 일을 아시며(사 45:11, 48:3) 예기치 못하는 장래에 대해 하나님께 의뢰하도록 요구한다(시 37:23-24, 55:22). 점이든 사주든 운세 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예기해서 피할 것은 피하고 길하고 복된 길로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주와 같은 것은 인생 전체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자기 스스로 경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계획할지라도 하나님께 의뢰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경영하심을 말한다(잠 16:3, 9). 하나님께서는 사주처럼 인생의 청사진 전체를 보여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마치 안개 낀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것처럼 우리를 한걸음씩 인도하신다. 청사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 운명론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그런 식으로 운명론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운명론은 예정론과 구분돼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에 대해 예정해놓은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예컨대 구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의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인생에는 예기치 않으면서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며 통제할 수 없을 때 고통은 가중된다.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영역은 생존과 안전의 영역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종신토록 땀 흘려야 먹을 수 있는(창 3:17-19) 생존의 문제가 발생했고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써 안전의 문제가 발생했다. 아담에게 생존의 문제가 있었고 가인의 대에 오면 안전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다(창 4:14).

인간의 미래 불안증

인간은 생존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통제권 안에 모든 것을 두기 원한다. 인간은 재물(돈)을 확보함으로써 통제하지 못하는 일의 발생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자동차보험, 연금보험, 노후대책, 명문대학과 좋은 직장을 구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는 물질, 즉 풍요와 다산에 기초한 문화이고 풍요와 다산의 신화적 구조에 기초한 종교다. 이 세상문화, 세상풍속의 본질과 기초는 물질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라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재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실존이 생존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길흉화복이란 생존과 안전을 증대시키고 그것을 위협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생존과 안전의 기초를 눈에 보이는 물질 대신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두라고 요구한다. 물질이 안전의 기초가 아니라 여호와가 반석이시요, 요새시요, 피할 바위시요, 방패시요, 구원의 뿔이시다(시 18:2). 생존에 대해서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이러한 실존적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나 생존과 안전에 급급한 삶은 이방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넘어서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마 6:31-33). 구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명기 8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훈련 받은 이유를 밝힌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는 것을, 반석을 터뜨려 나온 물로 마시는 것을, 의복과 신이 헤어지지 않는 것으로 입는 것을 해결 받았다.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책임져 주시는 대신에 물질에 기초한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도록 훈련이 필요했다. 그러나 역시 물질에 기초한 애굽의 문화와 종교에 젖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몸에 배인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출애굽을 경험한 구세대 중에서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없었다(민 26:65).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생존과 안전의 기초를 두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위의 모든 종족과 그들의 종교는 보이는 물신(物神)에게 그들의 생존과 안전의 기초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범죄에 빠졌던 것이다(출 32:4). 기독교가 세상의 종교들과 근본적으로 달리 치열한 것은 타락한 인간의 실존과 본성을 거슬러서 눈에 보이는 물질 대신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생존에 대한 기초적 갈구에 이끌려

오늘날 젊은이들이 길흉화복을 점치고 싶어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 역시 타락한 인간의 실존에 처해 있고 생존과 안전의 기초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청년 실업이 심각한 이 시대에 그들의 방황과 두려움에서 오는 발버둥이 어찌 가련하지 않겠는가! 교회는 고통이라는 타락한 인간의 실존, 즉 생존과 안전을 갈구하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깊게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과 두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왜, 어떻게 생존과 안전에 급급한 삶을 넘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보여줘야 한다. 장래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신앙의 훈련이 돼야 한다.

  점과 운명술의 본질을 보았으므로 이제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점이나 운명술의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점술가는 신 내림이 있어야 소위 용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점의 가장 큰 문제는 인도함(guidance)을 받는 대상의 설정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잡신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점이다. 점술가들은 이러한 잡신의 도움으로 과거에 발생한 일이나 현상태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로 맞출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해서는 꽤나 용하다는 점술가도 많이 맞추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장래사를 알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잡신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며 단지 타락한 천사에 불과하다. 잡신들은 꽤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또 어느 정도 자기의 예언을 성취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역시 타락한 천사에 불과하다. 그들도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해서는 확률적으로 짐작할 뿐이다. 인간도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잘 처리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면 예측이라고 하지만 신비적으로 초자연적 영에 의존하게 되면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점술가들이 이러한 예언을 하기 위해서는 신접이 필요하다. 성경은 신접을 명백히 금하는데(신18:11) 그것은 신접의 대상이 잡신, 즉 타락한 천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내린 사람이다(행8:16).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성령은 인격적이고 신사적이어서 강압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감동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무병(巫病)은 잡신의 강압이고 내림굿은 일종의 강압적 잡신 영접의식이다. 그러나 성령신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 창조의 원리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영접할 때에만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잡신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잡신과의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깨뜨릴 수가 있다. 그러나 성령과의 연합은 영원하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성령과의 연합을 깨뜨릴 수는 없다.

  사주니 운세니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중국점성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난 연월일시에 따른 천체(天體)의 배치에서 오는 기(氣)의 영향력 때문에 길흉화복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길흉화복은 기의 법칙과 같이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사주니 하는 것이 오늘날 형태를 갖춘 것은 10세기 경이며 3세기 경만 해도 유치한 형태를 면치 못했다. 사주는 중국에서도 계속 비판을 받았는데 우선 동일한 연월일시에 태어난 사람의 운명이 판이하게 다른 것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했다. 또 중국에서는 역법(曆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으며, 역법이 바뀌면 연월일시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우에 사주가 바뀌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야

사주의 근본적 문제는 사주의 좋고 나쁨이 가나안 문화와 종교처럼 현세기복적이고 물신주의적인 문화와 종교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주론에 입각해서 본다면 선교사는 역마살이 끼었고 선교지에서 순교한 사람은 객지에서 죽었기 때문에 사주가 매우 좋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베드로의 사주는 어떤가? 바울의 사주는 어떤가? 운명술들은 하나님과의 영적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국무총리가 되고 장관이 되어서 무엇을 했느냐는 것보다는 단지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영화를 누렸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사주는 통계학이고 철학이라는 주장이 있다. 음양오행과 같은 동양철학의 범주개념을 사용한다는 면에서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철학의 본질은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데 있지 부귀영화의 삶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사주가 통계학이라는 것은 자연인에 대한 통계일 수 있다. 사람이 어떤 기질과 체질을 타고 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주가 통계학이라고 주장할 때에는 타고난 기질과 체질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기질과 체질을 바꾸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 약점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사주보는 사람조차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사주가 잘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에 육신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또한 넘어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단순히 받을 필요가 있다. 성경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대야 겨우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합당한 설명이 없고 이유를 모를 때에도 단순히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 “너는 네 하나님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신 18:13-14)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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