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2007.11.01 통권 578호(pp.616~649)
[제43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격암유록(格菴遺錄)의 실체를 밝힌다
허진구
1. 신앙촌에 입주하다
1958년 가을, 우리 가족은 경기도 소사에 위치한 전도관의 신앙촌에 입주했다. 전도관은 6·25전쟁 직후의 비참하고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한 기독교 계통의 신흥종교 중 하나로, 당시 ‘동방의 의인’ ‘불의 사자’ 등으로 불린 교단의 창시자 박태선 장로는 전국을 누비며 부흥집회를 열어 날로 그 교세가 커지고 있었다. 신앙촌은 ‘말세의 심판을 피하고 영생복락을 누릴 천년성’이라며 전도관에서 건립한 일종의 신앙공동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나 소사 신앙촌에 들어가게 된 경위, 그리고 그 뒤의 기구하고도 파란만장한 사연을 말하기에 앞서 증조부-조부-부친 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에 걸친 우리 집안의 신앙에 얽힌 내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우리 집안은 고조부까지 누대로 전라남도 진도에서 살아오다가 19세기 후반 증조부 대에 이르러 전라북도 정읍으로 이거(移居)했다. 이때 증조부께서 출향(出鄕)을 하게 된 배경은 다름 아닌 종교였다. 증조부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세대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이어져 내려온 우리 집안의 신앙사는, 우리나라 근·현대 종교의 변천사와 맥을 함께하는 것 같아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1860년대를 전후해 물밀듯이 밀려든 서양세력에 마주해 일어난 수운 최제우의 동학은 수운이 죽은 후 해월 최시형으로 이어졌다. 1894년 전라북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농민운동이 그 연장선상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배경과 인연을 이제 와서 소상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증조부께서는 바로 이 동학운동에 합류하기 위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향리를 떠나 전라북도 정읍으로 이거했다고 한다.
내 조부께서는 한학(漢學)은 물론 풍수, 점복, 의술 등에 두루 밝은 분으로 말년에는 20여 년간 서당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내가 유년기부터 조부 슬하에서 천자문을 시작으로 동몽선습, 사자소학 등을 읽고 성장하면서 한문에 문리가 트이게 된 것도 이런 연유였다. 그런데 평생을 종교에 관련되어 사신 것은 조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 지방에서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펼쳐졌으니, 그것은 증산교였다. 숱한 기행과 이적을 일으켰다고 전하는 교조(敎祖) 강일순이 세상을 뜬 후, 생시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제각기 증산(甑山·강일순의 호)으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여러 종파로 갈라졌다. 그중 교세를 가장 크게 떨친 종파가 정읍 대흥리에서 차경석이 세운 보천교(普天敎)다.
차경석은 일제 강점기 수백만 신도를 거느리며 1만여 평(3만3000여m2)의 부지에 십일전, 성전 등 웅장한 건물들을 짓고 차천자(車天子)로 불리며 막강한 세력을 떨쳤던바, 지금의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 이 보천교의 한 건물을 뜯어다 이축한 것이라 하니 가히 당시의 교세를 짐작할 만하다. 조부께서는 바로 이 보천교의 교령(敎領)을 지내시며 활동하다, 교주의 사망과 일제의 교단 강제해산 이후 인근 정읍군 태인에 거처를 정해 칩거하면서 서당을 열어 노년을 보냈다.
이 같은 집안 내력으로 아버지 또한 종교적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은 조부와 교분이 있었던 분으로 아버지를 당신의 원불교 활동에 동참시키려 했으나, 조부의 반대에 부딪힌 아버지는 오로지 한학에만 매진하였다. 조부께서는 당신의 후손들은 어떠한 종교에도 관여치 않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조부의 간곡한 당부에 따라 아버지는 그때까지 아무런 종교에도 관여치 않았지만 중년부터 역학과 풍수 분야에 심취하게 됐다. 결국 이것이 하나의 동기가 되어 증조부-조부 대의 종교적 성향과는 전혀 이질적인 기독교 신흥교단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세상사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2. 어머니의 신앙
어머니는 인근 지역 면장의 둘째딸로, 나이 열아홉에 중매로 아버지와 혼인했다. 천성이 다감하고 정이 많은 분으로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고, 당시엔 흔치 않던 손재봉틀을 가지고 있어 주위에서 부탁하는 일감이 많아 집안이 항상 분주했다.
위로 두 살 터울인 누나와 나를 출산하고 난 몇 해 뒤부터 어머니는 구체적인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과 불면에 시달렸다. 때로는 혼자서 중얼중얼 헛소리를 하기도 해서 주변 사람들이 실성한 사람으로 여길 정도였다. 용하다는 한의(韓醫)의 치료도 받고 좋다는 한약도 복용해보았지만 모두 별무효과였고, 나중엔 절에 가서 조상 천도재도 지내고 신통하다는 무당에게서 굿도 수차례 해보았으나 날이 갈수록 증세가 심해질 뿐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바느질 일로 우리 집을 드나들던 인근 동리에 사는 어느 부인이 어머니에게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했다. 교회에 나가서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솔깃해 했다지만, 그러나 종교에 대해 완고한 생각을 가진 조부의 명을 거스를 수 없는 일이었다. 조부께서는 ‘야소교(耶蘇敎)는 서양에서 건너온 몹쓸 종교’라며 백안시하시고, 예배당에 다니는 자들은 자기 조상은 외면한 채 남의 나라 조상신을 모셔다가 “아버지, 아버지” 하며 섬기는 철딱서니 없는 자들이라며 심히 못마땅해 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어머니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가정살림을 돌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무렵 조부께서 세상을 뜨셨다. 조부께서 별세하고 난 얼마 후부터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처음엔 어머니의 교회 출석을 극력 반대했지만, 날로 심해지는 어머니의 증세에 달리 도리가 없는지라 나중에는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나가게 된 교회는 당시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장로교 계통이었다. 유가 중심적인 전통사회에서 아직 예수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좋지 않던 터라 신자 수도 그리 많지 않은 작은 예배당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교회에 다닌 후 어머니의 정신질환 증세가 차츰 호전되기 시작했다. 극심한 두통과 불면증세도 많이 좋아지고, 혼자서 중얼거리던 헛소리도 차츰 줄어들었다. 대신 한 손으로 재봉틀을 돌리며 나지막한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기 좋아하고 교회 다니는 일을 낙으로 삼게 됐다. 어느 날인가는 누나와 나를 교회에 데리고 가려다 아버지에게 호통을 들으시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렇듯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어머니는 얼마 뒤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이후로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서울에서 내려온 유명한 장로님이 전주에서 큰 부흥집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같은 교회 신자 두 사람과 함께 집회에 참석했다. 그 부흥회가 바로 박태선 장로가 이끄는 전도관 집회였다.
일반 교회의 경건하고 단조로운 예배의식과는 달리, 전도관 집회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힘차게 손뼉을 치면서 빠른 템포로 계속 찬송가를 부른다. ‘영모님(박태선을 지칭하는 말)의 은사로 병 고침을 받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신도들의 눈물 어린 간증을 들으며 군중은 환희에 벅찬 감정으로 탄성을 지른다. 이처럼 한껏 고조된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박태선 장로의 걸출한 설교와 특유의 우렁찬 음성, 현란한 몸짓이 펼쳐지는 집회는 어머니를 크게 매혹했던 모양이다. 부흥집회에 나선 박태선 장로가 안수, 안찰을 행하여 앉은뱅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소경과 정신병자들을 고치며 기성 교회의 부정적인 행태를 질타하는 것을 보고 대단한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부흥회에 다녀온 어머니는 박태선 장로야말로 ‘말세에 오신 이 땅의 구세주이시고 하나님의 사자’라며 새로운 신앙의 열정에 들떠 있었다. 그 후 어머니는 기회만 닿으면 원근을 불문하고 전도관 집회에 다니시는 것 같더니, 1957년 말 경기도 소사에 신앙촌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다녀온 후 아버지에게 신앙촌 입주를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같은 제의는 아버지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조부께서 작고한 뒤 아버지가 섰던 친지의 빚보증이 사단이 되어 전답 등 가산이 압류당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의 새로운 생활터전을 제시하는 어머니의 권유를 아버지로서도 내칠 수만은 없었던 듯하다.
당시 어머니 얘기로는 신앙촌은 얼마간의 입주금만 내면 의식주 염려는 물론 누나와 나의 교육 문제도 걱정없다는 것이었다. 신앙촌 마을은 ‘계급이 없고 누구나 평등하게 살며 질병과 죽음이 없는 구원의 방주’라며 한번 가서 전도관 사람들을 만나보기나 하라고 계속 아버지를 설득했다. 구원의 방주 같은 말이야 아버지가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의식주와 자식들의 교육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에는 당시의 절박했던 집안 형편으로 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듬해,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행해 전도관 간부들을 만난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아버지로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계기를 맞게 된다. 아버지가 한학과 역학(易學) 등에 깊은 식견을 가졌음을 안 전도관측에서 아버지에게 파격적인 예우와 우대조건으로 신앙촌 입주를 제의했던 것이다. 경제사정을 감안해 입주금은 성의만 보여도 좋다는 것이었고, 식구가 된 다음에는 교단의 발전을 위한 집필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할 터이니 생활이나 자녀교육 등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해(1958년) 가을, 우리 가족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전도관의 신앙촌이 있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범박리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증조부께서 동학에 참여키 위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진도를 떠나신 것이 19세기 후반이었으니, 그 뒤로 거의 100년의 세월이 흐른 내 대에 이르러 다시 새로운 땅, 신앙촌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3. 최초로 씌어진 ‘格菴遺錄’
신앙촌에 입주하여 사는 것은 당시 전국에 있는 전도관 신자들의 소망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를 거치고 소정의 입주금을 내야 했다. 우리가 들어 간 소사 신앙촌은 3만여 m2 땅에 주택과 교육시설 위주로 세워졌다. 부모님께서 얼마의 입주금을 냈는지는 내가 모르는 일이지만, 우리는 방이 셋이나 되는 주택을 배정받았고 입주한 뒤에도 전도관 측으로부터 여러 가지로 우대를 받는 듯했다.
누나와 나는 신앙촌 안에 있는 학교로 전입학을 했고 어머니는 양재부에서 일하는 등 초기 생활에는 비교적 어려움이 없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신앙촌의 종교생활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 집필에만 전념하면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전도관의 다른 일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동안은 재단 사무실에 나가시더니 어느 날인가는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뒤 며칠 동안 사무실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만 계시며 허탈한 표정으로 실소를 짓기도 하고 무언가 착잡한 생각에 잠기는 것 같기도 하였다.
얼마 후부터 아버지는 당신의 방에서 여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그 책들을 참고 삼아 무슨 책인가를 새로 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내가 호기심을 갖고 어깨너머로 쳐다보기라도 하면 아버지는 “네가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니 건너가서 공부나 해라”고 하시면서 방에서 내보냈다. 당시 아버지가 보던 책들은 ‘삼역대경’ ‘정감록’ ‘무학비결’ 같은 제목의 고서들과 기독교 성경 그리고 전도관에서 나온 ‘오묘원리’라는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앙촌 생활을 한 지 두어 해가 지날 때까지 아버지는 이따금씩 재단 사무실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고서들을 보며 책을 쓰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이따금씩 찾아와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다 돌아가곤 하던 이씨 성을 가진 분과 김 부장님이라는 분 외에는 사람들과의 교분도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동안 한지에 직접 붓으로 쓰시던 책을 노끈으로 묶어 편철하고 계셨는데, 그때 내가 본 그 책 표지의 제목이 ‘격암유록(格菴遺錄)’이었다.
그럼 소사의 신앙촌에서 아버지가 쓴 격암유록이란 과연 어떤 책이며 그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그 전체 내용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980년대 초, 내 나이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였으니, 그 놀랍고도 기이한 경위와 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지 두렵기만 하다.
4. 아버지의 잠적과 누나의 죽음
책을 다 쓰고 나서 아버지는 다시 사무실에 나가셨다. 그러나 집에서 집필할 때의 진지하던 모습과는 달리, 왠지 고뇌에 찬 얼굴로 한숨을 쉬기도 하고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도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 아버지께서 처음 책을 쓰시기 시작할 무렵의 일들이 언뜻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그때도 허탈한 모습으로 실소를 짓고 무엇인가 착잡한 표정으로 괴로워하지 않으셨던가. 나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소비조합 업무와 부인회 일을 열성적으로 하면서 때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대하고 안타까워했으나, 집필과 관련된 아버지의 인간적인 고뇌와 사정을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두운 얼굴로 얼마간을 지내던 아버지는 1961년 가을 어느 날 아무런 말씀도, 쪽지 한 장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신앙촌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곧 돌아오시겠지 하는 기대 속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1년이 다 되도록 아버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우리는 아버지의 잠적보다 더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어느 날 초저녁에 갑자기 누나가 배를 움켜잡고 방바닥에서 뒹굴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복통을 호소하며 까무러진 누나를 보며 나는 어머니에게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했지만, 그러나 어머니가 가져온 것은 ‘생명수’였다. 생명수는 영모님께서 직접 기도로써 축복한 물로 당시 전도관 식구들은 이 물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질병 치료 등에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내심 ‘속히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진료를 받아야 할 텐데’ 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누나에게 생명수를 먹이는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생명수를 마신 은혜였던지 다행히 누나는 통증이 가시면서 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누나를 보고 나는 “이제는 병원에 가야 한다”며 어머니를 졸랐다. 어머니도 심상치 않은 누나의 모습을 보고 “그러자”며 축 늘어진 누나를 들쳐 업고 막 현관 쪽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 듯 잠깐 멈추어 서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와 누나를 자리에 눕혔다. “오늘이 마침 주일이니, 이따가 주일 집회 때 영모님의 안찰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회 때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며 당장 병원으로 가자고 애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당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영모님께서 인도하시는 소사 신앙촌의 집회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영모님께서는 두 손으로 누나의 배를 누르고 마치 휘파람 소리 같은 “쉬-잇, 쉬-잇”하는 소리를 내며 안찰을 해주었는데, 통틀어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집회가 끝나고 축 늘어진 채 간신히 신음소리를 내는 누나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날 오후 누나는 끝내 눈을 감았다. 너무도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나는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누나는 어머니가 죽인 것이니 빨리 살려내라”면서 울부짖었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 꿈을 채 펼쳐보지도 못하고 비명에 스러져간 누나를 제단 아래 야산에 묻고 그날로 나는 신앙촌을 뛰쳐나왔다. 그곳에 들어가 생활한 지 만 6년 만인 1964년 12월 초였다.
소사 신앙촌에서 나온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찾아갈 만한 가까운 친척도 생각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달리 아는 이도 없었다. 역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신앙촌에 입주해 살다가 두 해 전쯤 밖으로 나간 경식이네가 떠올랐다. 수원 노송지대인가 하는 곳에서 포도밭을 한다는 얘기를 언뜻 기억해낸 것이다. 수원으로 간 나는 다행히 경식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집에서 일을 거들며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풍문으로 아버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부산 동래에서 서예학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산으로 내려가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만났다. 4년 만이었다. 혈육의 정은 어쩔 수 없었던지, 내가 누나의 죽음을 얘기하자 아버지는 눈시울을 적시며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긴 한숨만 내쉬었다.
아버지와 함께 며칠을 지내고 난 뒤 나는 아버지에게 신앙촌으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이 없으셨으나 나는 용인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소사로 향했다.
1년여 만에 나를 본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덥석 끌어안더니 “미안하다. 나를 용서해다오” 하며 흐느껴 울었다.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반갑게도 어머니가 이성을 되찾으신 것이었다. 어머니 역시 누나의 비통한 죽음을 계기로 그곳에서 보낸 지난 세월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 입주할 때 그들이 약속했던 모든 것의 실체를 늦게나마 깨달았던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가재도구를 정리해 이삿짐 차에 싣고 신앙촌을 나섰다. 구원의 방주에서 영생복락을 꿈꾸며 차디찬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두 손 뜨겁도록 손뼉 치며 부르던 찬송가 ‘내 평생 소원은 이것뿐’, 하얀 셔츠차림으로 단에 오르시어 열정적인 음성으로 구원을 약속하시던 주님을 감격에 겨워 우러르던 일, 다 키운 꽃 같은 딸을 비명에 떠나보내던 일 등을 회고하는 것일까. 흔들리는 용달차 창가에 앉아 어머니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얼굴로 연신 두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5. 22년 만에 만난 ‘격암유록’
부산으로 내려가 아버지와 합류한 가족은 일반적인 생활인의 삶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내게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말고 검정고시를 준비해 대학에 진학하라”고 권유했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다른 생각’이란 아마도 종교적인 관심이나 신앙생활 같은 걸 이르는 듯했다. 어머니에게도 여러 가지로 다짐을 받았다. 이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신앙촌에서 살던 때 얘기는 입 밖에 내기를 꺼렸고, 기독교 신앙이나 그 밖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애써 외면하며 살았다.
무심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정부 산하기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수년 동안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지 세 해 뒤인 1985년 초여름의 일이다. 시내에서 길을 걷던 나는 어떤 청년이 건네주는 전단지 한 장을 무심코 받았다. 종교단체인 증산도를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신앙촌에서 나온 이후로 어떠한 종교단체나 신앙도 외면하며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증산교에 대한 관심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조부께서 증산교와 관련이 깊은 여러 교단 중에서 교세를 가장 크게 떨쳤던 보천교의 교령을 지낸 분이 아니던가. 교단이 해체되고 난 후에도 작고할 때까지 증산교 계통의 여러 인사와 잦은 왕래와 교분이 있었던 것을 내 유년시절에 직접 보고 자란 그 인연의 끈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증산교를 표방한 종교나 신행단체는 해방 이후로도 꾸준히 늘어나 태극도, 대순진리회 등 그 교세가 큰 교단부터 여타 군소 교단까지 부지기수였다. 그중 증산도는 다른 교단에 비해 비교적 역사가 짧은 단체이나 1980년대부터 대학생층을 비롯해 젊은 지식인들을 상대로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전단은 그 교단의 교화원장이 펴냈다는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격암유록’이란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16세기 중엽 조선 명종 때 격암 남사고(南師古)라는 사람이 쓴 위대한 예언서가 있는데, 그 책에 이러이러한 글이 있다면서 자기 교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거(典據)로 삼고 있었다.
‘격암유록’이라는 책이름을 대하는 순간, 마치 물 묻은 손으로 전기를 접했을 때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한 내 눈앞에는 순간적으로 20여 년 전 신앙촌에서 아버지가 붓으로 쓰신 책을 편철할 때 본 그 책의 제목, ‘格菴遺錄’이란 네 글자가 스크린의 잔상처럼 떠올랐다.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을 사서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읽기 시작하였다.
그 책을 쓴 이가 격암유록에 나오는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인용해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지를 말하기에 앞서, 우선 그 격암유록이라는 책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밝히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다. 격암유록의 내용이나 쓴 사람, 누가 어떻게 그 책의 내용을 왜곡하여 이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뒤에서 차차 확연하게 밝힐 것이다.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의 말미 참고문헌 목록에는 ‘격암유록 : 남사고 저’라 씌어 있고, 책의 내용 가운데는 “조성기 편 ‘격암유록’을 참고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다음날 대전에 있는 증산도 사무실을 방문해 저자가 그 책을 쓰기 위해 참고했다는 조성기 편 ‘격암유록’을 볼 수 있었다. 그 책은 신앙촌에서 펴낸 일종의 격암유록 해설서였다. 나는 비로소 ‘감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암유록 해설서라는 책이 신앙촌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내게는 어떤 확신과도 같은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신앙촌에서 격암유록을 집필하던 때가 1962년 전후였다. 그렇다면 이후 20여 년의 세월 어디에 사장되어 있다가 왜 이제야 출현한 것일까. 마치 미스터리 외화에서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어수룩한 모습으로 미궁에 빠진 어떤 사건을 추적해가는 형사가 된 듯, 가벼운 흥분과 함께 묘한 긴장마저 느껴졌다.
신앙촌에 가서 알아보면 조성기란 인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사람을 만나면 그가 책을 쓸 때 보고 쓴 원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나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간단한 여행 도구를 챙겨들고 경기도 소사로 향했다. 신앙촌에서 나온 지 21년 만이었다.
박태선 장로가 이끄는 전도관은 1960년대를 전후해 박태선씨가 폭행, 혼음, 사회질서 혼란 등의 혐의로 두 차례 구속되고, 특히 1960년 말 ‘동아일보’가 ‘박태선씨의 성화(聖火)는 조작된 것’이라고 보도하자 전도관 간부들의 지휘에 따라 열성적인 신도들이 신문사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부려 많은 신도가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박태선의 장남 박동명이 호화생활을 하며 유명 여배우들과 염문 행각을 벌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970년대 전후만 해도 전국 각처의 읍 단위까지 전도관이 있었고 전성기에는 신도 수 100만을 자랑하던 전도관은 이후 적잖은 신자가 이탈하면서 교세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1980년대부터는 공장 운영과 기업 활동 중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고, 간판도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에서 ‘천부교’로 바꿔 달았다.
일부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주택들과 눈에 익은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나는 찾아온 목적마저 잠시 잊은 채 깊은 회한에 젖었다. 재단 사무실에 찾아가니 몇 사람이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중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한 분은 안면이 있었으나,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조성기라는 사람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들은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 사람이 무슨 일로 그 사람을 찾느냐고 묻기에 나는 “조성기라는 분이 쓴 격암유록이라는 책을 보고 더 알고 싶은 내용이 있어 왔다”고 답했다. 그제야 경계심을 푼 듯한 그는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조성기라는 사람은 전도관 신자였는데 어느 때 격암유록이라는 책을 들고 나와 “이 책은 몇 백년이나 된 오래된 고서인데 바로 거기에 박태선 장로가 말세의 성인이라고 씌어 있다”면서 영모님을 증거하여 신앙촌에서 큰 대우를 받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땐가부터 사람이 돌변하여 그 책에 박태선 장로뿐만이 아니라 자기도 성인으로 예언되어 있다면서 자신을 따르는 식구들을 데리고 신앙촌을 나가 새로운 집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전도관에서는 그 책을 일절 못 보게 하고 없애버렸다고 했다.
그럼 조성기라는 사람이 지금은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니 그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느냐”면서, 들리는 말로는 신앙촌을 나간 뒤로 안양 어딘가에 교단을 세워 운영하다 얼마 못 가서 신도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 사람은 종적을 감추었다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매우 낙담한 표정으로 나오면서 인사를 하자 그 노인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출입문 밖으로 따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언뜻 들었는데 격암유록이라는 책이 서울 국립도서관에 또 한 권 있다고 합디다. 더 공부해보려면 가서 그 책을 보든지….”
나는 격암유록이 국립도서관에 있다는 말에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사람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신앙촌을 나왔다.
격암유록이라는 책이 국립도서관에 있다는 말은 내게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서울에 있는 국립도서관이라 함은 국립중앙도서관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중앙도서관을 찾아 대출신청을 해놓고 책을 받기까지 불과 몇 분의 시간이 왜 그리도 길게 느껴지던지. 이제 곧 20여 년 만에 아버지가 쓴 책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도서관 직원으로부터 책을 받아 펼쳐 보는 순간, 나는 일순 아득한 절망감으로 눈앞이 흐려왔다. 그것은 분명 아버지가 손수 쓴 책이 아니었다. 내가 어찌 아버지의 필적을 모를 리 있겠는가. 한지에 세필로 씌어진 그 책은 총 60장 115쪽으로(여기서 ‘장’은 총 60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어 씌인 글을 필자가 편의상 붙인 것이다) 일부는 한글과 한자 혼용문으로 돼 있었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한글은 쓰지 않고 순 한문으로만 책을 썼다. 열람석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책을 정독했는데, 맨 마지막 장에 가서야 나는 드디어 새로운 희망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책을 쓴 때와 장소, 그리고 쓴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甲申閏四月丙申 瑞山郡 地谷面 桃星里
全城後人 李桃隱 複寫
그러니까 갑신년 윤사월 병신일에 서산군 지곡면 도성리에서(혹은 도성리에 사는) 이도은이라는 사람이 복사했다는 말인데, 여기서 ‘복사’라는 표현은 자기가 이 책을 지은 것이 아니라 남이 저술한 책을 그대로 보고 베껴 썼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원본이 아닌 필사본인 것이다. 책을 다 필사한 날과 장소는 이 책의 앞표지에도 ‘畢甲申閏月丙申桃源精舍’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우선 도서관 직원에게 간곡하게 협조를 구하여 그 책을 한 부 복사해 가지고 일단 부산으로 돌아왔다.
6. 필사자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와 이도은이 복사했다는 필사본 ‘격암유록’을 몇 번이나 정독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어느 정도까지 그 내용을 해독할 수 있었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격암유록뿐 아니라 ‘도선비결’ 등 옛날부터 민간에 유포되어 전해 내려오는 이른바 도참, 비결서를 해독하려면 상당한 한문 지식은 물론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나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원리, 역학이론과 파자(破字)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식견과 역사를 통찰하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내가 해독한 격암유록의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우선 이 필사본의 원본이 무엇인지, 그 원본은 언제 누가 썼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내 처지에서는 그 원본이 아버지가 집필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본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이 필사본을 쓴 사람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다. 필사자 이도은이라는 사람을 만나려면 책의 말미에 씌어 있는 주소지를 추적하면 되리라. 나는 먼저 이 필사본이 복사된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만세력을 펴놓고 책을 복사했다는 ‘甲申閏四月丙申’이 어느 때인지를 찾아보았다.
연도, 즉 해를 간지(干支)로 표시한 갑신년은 60년마다 돌아오므로 현재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찾아보니 서력 기원으로 1944년, 1884년, 1824년이 갑신년이다. 윤사월이면 음력으로 사월에 윤달이 든 해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를 또 살펴보니 바로 1944년이다. 1944년 갑신년 윤사월에는 병신 일진이 있었다. 음력으로는 이해 윤사월 열하룻날이요, 양력으로는 6월1일이다.
물론 갑신년은 60년씩 계속 과거로 소급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단어들 때문이었다. 또한 국한문 혼용으로 기술된 한글이 조선 중엽에 씌인 고어체가 아니라 근대 가사체로 씌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에는 도로(道路), 변소(便所), 정거장(停車場), 공산(公産), 원자(原子), 철학(哲學) 등의 단어가 나온다. 이 말들은 모두 개화기 이후에 들어온 일본식 한자어다. 따라서 필사본 격암유록이 1944년 이전에 씌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이는 내가 필사본을 살펴보던 1985년 당시를 기준으로 41년 전의 일이었다. 필체로 보아 젊은 사람이 복사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필사할 당시 연령을 40세 정도로 본다면 필사자의 나이는 81세가 될 터였다. 아직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나는 필사본에 나와 있는 주소지인 충청도 서산으로 향했다. 서산군 지곡면에 도착해 먼저 도성리 이장댁을 찾아 방문한 취지를 말하고 한학 등에 박식한 이도은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물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장은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해 들어본 바 없다고 했다. 내가 책의 앞표지에 적혀 있는 ‘도원정사’라는 이름을 상기해, 그런 명칭을 가진 절이나 건물 같은 것이 있었느냐고 재차 확인했으나 그 역시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장 집을 나서면서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도은이라는 이름이 가명이거나 또는 ‘도은’이 어쩌면 호(號)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사무소도 방문하고 대서방도 찾아 여러모로 수소문해봤으나 모두 허사였다.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7. ‘격암유록’의 실체
격암유록의 저자로 알려진 남사고라는 인물에 대한 일화와 인물평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봉유설’ ‘어우야담’ ‘해동이적’ 등 여러 곳에 나온다. 그에 따르면 남사고는 조선 명종 때 사람으로 풍수, 천문, 복서, 상법 등의 비결에 능통하여 그가 말한 예언이 모두 적중했다는 신이(神異)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그가 썼다는 책으로 현재 전해오는 것은 ‘남사고비결’과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가 있는데, 여타의 도참, 비결서가 그렇듯이 이 두 책도 남사고라는 이가 직접 저술한 것인지 아닌지 고증할 길이 없다. 각종 도참, 비결류의 서책들은 대부분 그 원본을 찾을 길이 없고 지은이도 분명치 않은 채 민간에 은밀히 유포돼 나도는 각종 필사본이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도 이 사람 저 사람 거치는 동안에 잘못 옮기거나 그 내용을 첨삭, 보필한 것이 뒤섞여 후대에 이르렀기 때문에 원저자를 밝히거나 원본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격암유록’이란 책명이 지금까지 어떤 사서나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남사고의 호인 ‘격암’을 들어 ‘격암이 남긴 기록’이라는 넓은 의미로 본다면 앞에서 말한 ‘남사고비결’이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를 격암유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격암유록’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책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격암유록’이란 책이름으로 세상에 처음 출현한 것은 바로 지금까지 추적해온 이도은이라는 사람이 복사했다는 필사본이다. 앞서 남사고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있는 여러 책에서 그의 신상을 명종 때 사람, 울진 사람 등으로만 쓰고 확실한 생몰연대의 기록이 없는 데 비해, 유일하게 그 생몰연대를 밝혀 쓴 것이 이도은이 쓴 필사본의 첫 장에 나오는 ‘남사고비결’이다. 이렇게 보면 이도은이 보고 복사했다는 격암유록 원본의 존재 여부는 물론 그 내용의 진위도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그럼 이도은이라는 이가 필사한 격암유록과 1960년을 전후해 아버지가 집필한 격암유록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나는 아버지가 쓴 책의 표지만을 보았을 뿐 그 내용을 소상히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도은의 복사본이 아버지가 쓴 격암유록을 원본 삼아 필사한 것인지, 반대로 아버지가 이도은의 복사본을 참고로 다시 보필해 격암유록을 고쳐 쓴 것인지는 확인할 방도가 없다.
나는 그때까지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은 절망감으로 그 책에 대한 미련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기왕에 해독하기 시작한 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야겠다는 의지마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1983년 출간된 ‘이것이 개벽이다’에 격암유록이 인용된 후, 연이어 여러 신흥 종교단체와 역술인, 우리 민족사상이나 동양철학에 심취한 사람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앞을 다투어 이 책의 내용을 거론하거나 해설서를 내어 시중에 유포했다. 이를 통해 격암유록이라는 책은 어느 사이엔가 ‘위대한 민족의 예언서’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80년대 중반 때마침 불어닥친 세기말적 종말론에 편승해, 격암유록을 썼다는 남사고라는 인물은 서양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와 쌍벽을 이루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예언가로 추앙되기 시작했다. 그가 쓴 책에 임진왜란을 비롯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인물의 행적이 정확히 예언돼 있다면서 격암유록은 ‘450년 만에 신비의 베일을 벗는 민족의 경전’으로까지 인구에 회자되기에 이른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도 격암유록과 관련된 책들은 속속 출간되어 그 해설서만 해도 10여 권이 넘고, 격암유록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해 언급한 저작물은 부지기수다. 이제 웬만한 도서관에는 격암유록이라는 책명의 도서가 한두 권쯤은 다 비치돼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격암유록과 동학가사를 연계하여 쓴 논문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격암유록을 450여 년 전에 씌어진 예언서로 맹신하고 있지만 그 진위를 판별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어구, 즉 도로, 정거장, 철학 등이 대부분 개화기 이후에 들어온 일본식 한자말임을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구원방주, 보혜사 같은 용어, 국한문 혼용으로 씌어진 내용 중 ‘우리 주님 강림할 제’ 같은 말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국한문 혼용의 한글 문체가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고어체가 아니라는 점 역시 이 책이 씌어진 시기를 짐작케 한다.
450여 년 전 조선 중엽에 저술된 책에 어떻게 개화기 이후에나 쓰기 시작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필사본 격암유록을 해독하면서 확인하게 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이 책에 기독교 성경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10장부터 16장까지와 18장, 이렇게 여덟 장은 그 제목이 모두 성경의 제목과 동일하고 그 내용 역시 성경 본문의 몇 절을 같은 의미의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즉 ‘塞三五’는 이사야 35장이고 ‘羅馬簞二’는 로마서 2장이며, ‘哥前’은 고린도전서를 한자로 음사하여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한문으로 된 중국어 성경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격암유록 10편에 나오는 ‘塞三五’의 원문과 해설, 그리고 성경 본문을 차례대로 보자.
‘塞三五’
基時閉目忽開 聾耳亞聽吹吹歌 半身不隨長身脚 廣野湧出沙漠流 泉移山倒水海枯 山焚大中小魚皆亡 愚妹行人不入正路 天釋之人 兩手大擧天呼萬歲
“그때에 닫혔던 눈이 홀연히 열리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는 노래를 부르며 반신불수가 다리를 펴고 광야에서 샘물이 솟고 사막에서 물이 흐른다. 샘을 옮기고 산이 무너지며 바다에는 물이 마르고 산이 불타서 크고 작은 고기들이 다 죽는다. 우매한 행인은 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놓아준 사람은 양손을 크게 들어 하나님 만세를 부른다.”
‘이사야 35장 5~10절’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샘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중략)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중략) 여호와의 속량함을 입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렇듯 성경의 제목과 장은 물론 그 내용을 유사한 의미의 한문 문장으로 바꿔쓴 데 불과하다. ‘남사고는 신이한 예언가이므로 몇 백년 뒤의 후세들이 이러이러한 말을 쓰리라는 것, 또 기독교 성경이라는 책이 한국에 들어오리라는 것과 그 내용까지 미리 환히 알고 썼다’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사실이 이렇게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이 책을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에 저술된 고서라고 맹신하는 것일까.
격암유록을 인용하거나 해설서를 쓴 사람들이 맨 먼저 들고 나오는 것이 이 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고古 1496-4’로 소장돼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을 먼저 내세우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 우리나라 최대의 국립도서관에 고서로 소장돼 있는 책이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을 전제해두고자 하는 것 아닐까. 일단 이런 인식을 갖고 난 뒤에 그 책을 보면 선입관 때문에 부분적으로 의문이 생겨도 크게 문제삼지 않고 넘어가게 되기도 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 책은 보통의 책이 아니라 신비의 예언서라 하지 않던가.
바로 여기에 맹점이 있다고 판단한 나는 이 책이 어떻게 해서 고서로 분류되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담당부서 직원을 만나 도서 분류기준과 소장경위 등을 알고 싶다고 말하니 30대로 보이는 그 직원은 나를 다른 직원에게 안내했다.
도서 등록대장에는 이 책이 등재된 연도가 1977년으로 적혀 있고 월과 일은 기재돼 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책의 표지에 찍힌 장서인에는 등록일자가 1977년 6월7일로 돼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필사본이라 해도 저술된 지 450여 년이나 되었다는 고서가 당시를 기준으로 불과 8년 전에 도서관에 등록되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거니와, 더욱 뜻밖인 것은 그 책이 어떻게 고서로 분류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고서로 분류하는 기준은 책의 출간 연대나 그 저자가 살았던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제본방식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현대에 출판되는 책처럼 접착제로 붙이거나 철사를 박아 제본된 것이 아니고 옛날처럼 노끈 따위로 묶어 제책된 것이면 고서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 그 말을 듣고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누가 오래된 한지에 붓으로 글을 쓰고 끈으로 묶는 방식으로 제책하여 적당히 오래된 책처럼 보이도록 만든 후 예로부터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라며 도서관에 기증하면 고서로 분류되어 소장된다는 말이 아닌가.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 직원은 다시 이렇게 설명했다.
“도서관에서는 도서를 기증받을 때 그 책의 저자나 출판 연대에 대해 조사를 하거나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기증한다고 해서 아무 책이나 다 받아들이고 소장하지는 않습니다.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도서대장에 등재하고 그때부터 관리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렇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국립도서관에 고서로 분류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책이 반드시 옛날에 저술된 고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격암유록이라는 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고古 1496-4’로 소장되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국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이 책을 고서로 인정이나 한 것처럼 믿게 마련이다.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격암유록에 관한 책을 쓰거나 그 내용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으레 이 말을 먼저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계속)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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